西道張氏의 過客 대접
[조용헌 살롱] [835] 조용헌 이메일goat1356@hanmail.net
- 조용헌
조용헌 조선시대 학식 있는 선비들이 여행을 다니면서 많이 이용했던 숙박시설은 부잣집 사랑채였다. 조선시대 부자들은 돈을 받지 않고 자기 집을 찾아오는 과객들을 잠 재워주고, 밥 주고, 때로는 여비까지 챙겨주는 관습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과객 접대는 조선시대 부자의 사회 환원 방식이었다.
김제 금구면 서도리(西道里)의 '서도장씨(西道張氏)' 집안은 김제평야 최고의 부자였고,
과객 대접 잘한다는 소문이 19세기 중반부터 해방 무렵에 이르기까지 호남 일대에
널리 퍼져 있었다.
서도리에 모여 살았던 장씨 아홉 가구가 가진 재산을 합치면 약 4 만석에 달하였다. 만석꾼이 두 집이나 되었고, 나머지는 오천석·삼천석을 고루 하고 있었다.
한반도의 가장 넓은 평야지대인 김제·정읍·태인·임실 일대에서 손꼽히는 부자였다. 해남·목포·나주·장성 쪽에서 한양을 가기 위하여 올라오는 여행객들은 전라도의 '서쪽길'인 금구면의 서도장씨 집에서 일단 짐을 풀었다. 말하자면 국도 상에 있던 집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주(全州)를 거쳐 삼례(參禮), 함열(咸悅)로 올라갔던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장씨들의 기와집 구조이다. 집집마다 모두 '샛문'이 설치되어 있어서 대문을 통하지 않고서도 서로 이동이 자유로웠다. 예를 들면 한꺼번에 과객 100여명이 들이닥치더라도 샛문을 통하여 아홉 집이 나누어 분산 수용하면 별문제가 없었다.
전라도 사람들은 애가 울면 '서도장씨 집에 가서 떡을 가지고 온다'는 말로 달랠 정도였다. 손님 접대를 위하여 1주일에 소 한 마리씩을 잡았다는 구전도 전해온다.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에 유배 갈 때도 여기에 들렀고, 유배가 풀려 돌아갈 때도 서도의 '윗집'에 머물며 객고(客苦)를 풀고 갔다고 한다. '윗집'은 추사의 친구이자 종2품을 했던 장한규(張漢奎)
집이기도 했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어학회 사건과 대동단(大同團) 사건으로 함흥과 서대문 형무소에서 각각 감옥살이를 한 장현식(張鉉植·1896~?)이 바로 서도장씨 종갓집 후손이다.
장현식은 자신의 만석 재산을 일제 강점기 때 민족운동에 거의 다 써버려서 해방 후 토지개혁을 할 때는 가진 땅이 별로 없었다. 서도리의 퇴락해 가던 장현식의 고택을 근래에 전주시장이 전주 한옥마을로 옮겨서 깔끔하게 정비하여 복원해 놓은 걸 보니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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