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하는 1인보다 논쟁하는 집단이 똑똑하다
전병근 기자 이메일bkjeon@chosun.com
꿀벌들 새집 찾기에서 '집단지성' 원리 발견 다양한 대안 놓고 경쟁토론 벌일 때 최선의 결과 얻어
저자의 꿀벌 연구는 끈질기고 치밀한 관찰의 결실이다. 개체별 역할과 동선을 추적하기 위해 벌의 등에 색색의 태그와 페인트칠로 표시해 놓은 모습. /에코리브르 제공
꿀벌의 민주주의
토머스 D 실러 지음|하임수 옮김 에코리브르|328쪽|2만원
양봉업자들 사이에 '분봉(分蜂)'이란 말이 있다. 벌들의 분가다. 늦봄과 초여름 사이 벌집 주변엔 일대 장관이 펼쳐진다. '부웅-' 수천 마리 황갈색 벌떼가 벌집에서 쏟아져 나와 인근 나뭇가지에 오밀조밀 매달린다. 할아버지 턱수염 모양이다. 그러고는 몇 시간 혹은 며칠 동안을 거의 꼼짝 않는다. 몇 십 마리만 뻔질나게 들락날락할 뿐. 잠시 후 벌떼는 다시 들썩댄다. 치솟는 음파가 F1에 출전한 자동차의 엔진 굉음 같다. 돌연 벌떼는 다시 날아올라 어디론가 몰려간다….
작곡가 니콜라이 코르사코프가 '꿀벌의 비행' 악상을 떠올렸을 장면에서 저자는 '꿀벌의 민주주의'를 발견해낸다. 콩알만한 머리, 벌꿀의 집단행동에서 큰 두개골을 자랑하는 인류가 민주적 의사결정의 비결을 배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3000만년 응축된 꿀벌의 지혜
꿀벌은 최소 3000만년 이상 지구상에서 명맥을 이어왔다. 비결은 잘난 개인이 아니라 집단의 지혜였다. 인간은 4400여년 이상 달콤한 벌꿀을 탐해 왔지만 정작 이 미물이 응축해온 집단적 지혜를 알아낸 것은 100년이 못 된다.
지식인 눈에 집단, 혹 대중은 흔히 비웃음이나 경멸의 대상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대중은 결코 최고 기준에 도달할 수 없다. 오히려 최저 기준으로 자신을 끌어내릴 뿐"이라 했고, 니체는 "집단에서는(…) 광기가 곧 법"이라 했다. 하지만 꿀벌은 집단 지성의 거대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여왕벌은 군림하지 않는다
무게를 재면 5㎏ 남짓한 벌떼는 하나의 유기체처럼 일사불란하다. 그룹 차원에서 영양의 균형을 유지하고, 수분·체온을 조절하며, 환경 변화를 감지하고 대응한다. 오랜 진화의 결과다. 자연선택은 언제나 구성원끼리 갈등하는 집단보다는 서로 긴밀하게 협력하는 집단 편이었다.
벌떼의 중심에 여왕벌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여왕벌은 여름 내내 매일 1500여 개씩
알을 낳는다.
그 딸들인 수천 마리 일벌들은 여왕을 보살피며 여왕벌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애쓴다. 하지만 벌집의 운영은 여왕벌이 아닌 일벌에 의해 집단적으로 이뤄진다. 일벌 하나하나가 자기 일을 찾아 공헌할 뿐 여왕은 이 과정에 개입하지 않는다.
집단의 사활이 걸린 새 보금자리 찾기도 마찬가지다. 겨울나기에 필수적인 꿀을 저장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좁거나 찬바람과 약탈자에 취약한 곳에 터를 잡을 경우 공멸은 시간문제. 일벌들은 중지를 모은다. 선호하는 벌집의 입구는 대부분 10~30㎠ 정도 되는 옹이구멍이나 틈이다. 대개 지면에서 높이 떨어진 곳에 입구가 있는 남향의 나무 구멍을 선호한다. 그래야 포식자 접근이 어렵고 외풍을 덜 받으며 햇볕을 받아 온도 유지에 유리하다. 벌떼는 이런 명당 자리를 어느 특출난 개체의 지시가 아니라 집단적 의사 결정을 통해 찾아낸다.
◇정찰벌…8자 모양 엉덩이춤의 비밀
비밀은 정찰벌의 활약상에 있다. 야생 꿀벌 집단은 대개 6000~1만4000마리. 이중 약 3~5%가 정찰대를 구성한다. 1만 마리 중 약 300~500마리꼴이다. 정찰벌은 새 집터 후보지를
찾아 반경 5㎞ 이내를 훑는다. 안목도 세심하다.
구멍의 부피, 입구의 높이와 크기, 이전 벌집의 존재 여부 등 적어도 6개 기준을 살핀다. 좋은 후보지를 발견하면 집으로 돌아와 동료들에게 엉덩이를 실룩대며 8자 모양의 춤을 춘다. 이 현란한 춤 속엔 후보지의 위치 정보까지 담겨 있다. 춤이 지속되는 시간은 비행 거리에 비례한다. 1초간 '윙윙' 춤을 췄다면 비행 거리는 약 1㎞. 엉덩이 각도는 태양 방향을 기준으로 한 비행 각도를 나타낸다. "태양 우측 ○도 방향 ○m 떨어진 곳에 아주 근사한 집터가 있어"라고 말하는 투다. 다른 벌들도 추천 후보지로 날아가 살펴본 후 무리로 돌아와서는 자기 의견을 담아 엉덩이를 실룩댄다. 일종의 자유경쟁 선거다.
좋은 집터일수록 춤은 격렬해진다. 여러 후보지가 경합하다가 점차 하나에 집중되고 마침내 무리 전체가 선호하는 장소로 날아가게 된다. 이 모든 일이 지도자 관여 없이 이뤄진다. 집단 지성이다.
◇똑똑한 개인의 합보다 나은 집단
저자는 꿀벌에 대한 오랜 관찰 결과를 '효율적인 집단의 다섯 가지 습관'으로 요약한다.
첫째, 의사결정 집단은 공동의 이익과 상호 존중을 아는 개인으로 구성하라. 서로 충돌만 하는 괴팍한 이들로 구성된 결정 집단은 좋은 결과를 낳기 어렵다.
둘째, 지도자의 영향을 최소화하라. 꿀벌 집단에서는 여왕벌조차 방관자다. 군림하는 지도자가 없어야 집단의 자유로운 토론이 가능하다.
셋째, 토론은 폭넓은 대안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다양한 배경과 견해를 가진 개체로 정찰 집단을 꾸려 독립적인 탐구 결과를 내놓게 하라.
넷째, 논쟁을 통해 집단 지식을 종합하라. 꿀벌 민주주의에서 빛나는 부분은 정찰벌들의 상호의존성과 독립성 사이의 탁월한 균형. 어떤 정찰벌도 다른 견해를 맹목적으로 추종해, 스스로 조사하지도 않고 지지의 춤을 추는 법이 없다.
다섯째, 적절한 종결. 꿀벌들은 집터 논쟁에 며칠을 새기도 하지만 어떤 후보지에 대한 지지가 임계점을 넘어서면 다른 정찰대에 다른 후보지 방문을 중단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합의의 권유다.
시종일관 세밀한 관찰과 기록이 놀랍다. 꿀벌의 갖가지 행태에 대한 묘사만큼이나 관찰 실험의 과정 또한 흥미롭게 읽힌다. 수백, 수천 마리 벌의 가슴과 배에 일일이 색 페인트를 칠해서 구분하고, 벌떼를 쫓아 달려가는 대목을 읽다 보면 저자의 학문적 열정이 책장 너머까지 전해온다.
[함께 읽으면 더 좋은 책] "개인의 탐욕이 사회를 살찌운다고?"
꿀벌의 교훈에 먼저 주목한 이는 네덜란드 의사이자 사상가였던 버나드 맨더빌(1670~1733)이었다. 그는 '꿀벌의 우화: 개인의 악덕, 사회의 이익'(1723)에서 개인의 이기적인 탐욕과 사치가 사회를 풍요롭게 한다는 논리를 폈다. 금욕과 절제가 금과옥조로 여겨지던 시절 그의 생각은 불온시됐다. 악덕을 변론했다고 고발당했고 책이 불태워졌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죽지 않았다. 자유시장론의 대부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 영감을 줬다. 2010년 국내에 번역(문예출판사·사진), 소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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