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화폭의 예술

비극을 이긴 노르웨이 거장 뭉크, 역사를 바꾸다

淸山에 2012. 5. 5. 19:54

 

 

 

 

 

비극을 이긴 노르웨이 거장 뭉크, 역사를 바꾸다


[머니투데이]

 

 

신경쇠약 주정꾼, 세계적 화가로..소더비 경매 사상 최고가 낙찰


 [김성휘기자 sunnykim@]

 

 

"지금 나는 거의 미치기 직전이다. 정말 일촉즉발이다."

"아버지는 극도로 신경질적인데다 종교에 심취했어요. 나는 그에게서 광기를 물려받았지요. 사랑하던 어머니와 누나는 내가 어릴 때 세상을 떠났고요. 두려움과 슬픔의 천사들은 내가 태어나던 날부터 내 옆에 있었습니다…."

 

 

 

▲에드바르 뭉크, 담배를 든 자화상(1895). 노르웨이 국립미술관.

 

 

2012년 한국에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 뭉크(1863~1944)가 살아있었다면 사회는 물론 가족들에게도 버림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신경쇠약, 알콜 중독에 가까운 술고래, 술주정을 일삼고, 공황발작 증세까지. 1908년 그를 치료했던 야콥슨 박사는 "좋은 친구들만 사귀고, 사람 많은 데서 술마시지 말라"는 처방을 내렸을 정도다.

 

뭉크 하면 떠오르는 작품 '절규'가 2일(현지시간) 뉴욕 소더비 경매장에서 미술품 경매사상 최고가인 1억1990만달러(약 1355억원)에 팔렸다. 종전 최고가를 기록한 피카소의 '누드, 녹색 잎과 상반신'(약 1200억원)을 누른 것이다.

 

 


▲1921년의 뭉크.

 

 

물론 예술품의 가치를 순전히 가격으로 매길 수는 없다. 뭉크가 지금도 인정받는 가장 큰 이유는 비극으로 점철된 인생의 한가운데서 정신적으로 무너지지 않고 모든 열정과 재능을 예술에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후대는 그를 거장의 반열에 올리고 그의 작품을 걸작으로 평가한다.

 

◆고통스런 유년, 광기와 슬픔= 뭉크의 어린 시절, 의사이던 아버지의 사업은 실패를 거듭했다. 뭉크 가족은 극심한 가난 속에 노르웨이 수도 크리스티아니아(오슬로의 옛 이름)에서 다락방을 전전한다.

 

뭉크의 어머니와 누나 소피아는 각각 1868년과 1877년 결핵으로 사망한다. 여동생 중 한 명은 정신질환에 시달렸고, 5남매 중 유일하게 결혼에 성공했던 남동생은 결혼식 직후 사망한다. 뭉크 또한 어릴 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다.

 

이런 거짓말 같은 현실 속에 뭉크가 밝고 낙천적인 청년으로 자라기는 어려웠다. 몸이 아파 학교를 자주 쉬던 그는 자연스레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고, 점차 그림의 매력에 빠지면서 화가가 되기로 한다. 그는 "그림을 통해 나의 인생과, 그 인생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표현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뭉크, 아픈 아이(1885~87).영국 런던 테이트갤러리.

 

 

아버지의 반대 속에 기술학교를 그만둔 뭉크는 1881년(18세) 오슬로의 미술공예학교에 입학, 체계적인 수업을 받으면서 실력을 닦는다. 인상주의, 자연주의 등 당대의 화풍을 섭렵한 그는 점차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다.

 

슬픔, 분노, 절망과 같은 감성이 그의 캔버스에 담겼다. 굵고도 흐릿한 경계선, 직선보다는 곡선이 그의 작품을 채웠다. 인물은 이목구비를 과감히 생략했다.

 

◆'절규' 경매 피카소作 눌러= 1891년 첫 개인전을 연 뭉크는 여기서 얻은 호평 덕에 프랑스 파리로 2년간 국비유학을 떠나게 된다. 이후 베를린에서 작품 활동을 하던 뭉크는 1893년 '절규' 첫 작품을 완성한다. 이는 뭉크 본인이 거리에서 직접 겪었던 공황발작 증세를 모티브로 삼았다. 붉은 하늘, 일그러진 수평선 등은 상상 속 장면이 아니라 뭉크에겐 현실이었다.

 

'절규'는 4점이 남은 것으로 알려졌다. 모두 같은 장면이지만 두 점은 유화, 나머지는 각각 파스텔과 크레용으로 그렸다. 크레용 작(1893)과 유화(1910)는 오슬로의 뭉크 미술관이, 또다른 유화(1893)는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번에 경매된 파스텔 작품(1895)만 개인 소유다.

 

 

▲2012 소더비 경매에 나온 뭉크의 '절규'(1893).

 

 

'절규'는 현대인의 고독과 슬픔을 표현한 작품으로 널리 알려졌다. 주로 미술관에서만 볼 수 있는 다른 작품과 달리 '절규'는 매우 대중적이고 생명력도 긴 편이다. 특히 20세기 팝아트 분야에 큰 영향을 끼쳐 앤디 워홀의 작품 중에도 '절규'를 응용한 것이 있다.

 

각종 광고나 카툰, 심지어 현대의 예능 프로그램에도 등장한다. 또 '절규'는 1994년엔 노르웨이 국립미술관 소장품이, 2004년엔 뭉크미술관 소장 유화가 각각 도난당했다가 되찾는 등 화제를 뿌렸다.

 

◆풍경·초상화 등 다양한 걸작= 뭉크에게 비극만 있던 것은 아니다. 병약했던 뭉크는 스페인 독감이 세계를 휩쓸던 때 자신이 살아남은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또 1900년대 초반 파리 등지에서 각종 작품의뢰를 많이 받은 뭉크는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생겼다.

 

 

▲뭉크, 스페인 독감 이후의 자화상(1919). 노르웨이 국립미술관.

 

 

1908년 정신적 불안정이 극도로 악화됐다. 다행히 뭉크는 야콥슨의 처방과 조언을 충실히 따랐고 치료는 효과를 봤다. 뭉크는 심리적으로 안정된 상태에서 1909년 고국 노르웨이로 완전히 돌아온다. 뭉크는 야콥슨 박사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표현주의 작가 뭉크는 '절규'처럼 극단적인 감정을 그린 것 외에도 다채로운 작품을 남겼다. 초기 대표작으로는 '마돈나'(1895~1902), '멜랑콜리'(1891) 등이 있다. 신경질적이면서 음울한 모습을 담은 초상화는 뭉크의 내면을 잘 드러낸다.

오슬로 뭉크 미술관엔 노르웨이의 겨울 모습을 담은 다양한 풍경화, 각종 판화, 스케치 등이 소장돼 있다. 연작 '별이 빛나는 밤'(Starry Night)도 인상적이다.

 

뭉크는 2차 세계대전 종전 1년 전인 1944년 1월 오슬로 인근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다행히 말년의 그에겐 어린 시절과 같은 극심한 가난은 없었다. 그는 "내 몸이 썩으면 그 위에 꽃이 피고 나는 꽃들과 함께 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뭉크, 마돈나(1895~1902). 노르웨이 국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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