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화폭의 예술

北은 버렸고 南은 몰랐던, 천재화가 변월룡

淸山에 2012. 5. 5. 09:37

 

 
 
 
 
 
北은 버렸고 南은 몰랐던, 천재화가 변월룡
곽아람 기자
이메일aramu@chosun.com

 

 

 


 
 
이중섭과 같은 해 출생… 러시아 한인, 변월룡
스탈린·레닌·최승희 등 그린 인물화의 大家
1950년대 북에 파견… 귀화 요청 응하지 않자 영원히 고국 땅 못 밟아
 우리가 잃어버린 천재화가, 변월룡

문영대 지음|컬처그라퍼|404쪽|1만8000원
 
 
1953년 4월, 소련은 소·조(蘇朝) 문화교류의 일환으로 화가 한 명을 북한에 파견한다. 러시아 미술 명문인 레핀 미술대학 교수인 그는 곧 평양미술대학 고문 겸 학장으로 추대된다.
 
 그는 대학 커리큘럼을 정비하고, 교재를 개발하며, 교수들의 기량과 수준을 향상시키는 등 평양미술대학의 기틀을 닦는다. 데생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사실주의에 초점을 맞춘 그의 화법(畵法)은 이후 북한미술의 기초가 됐다.
 
그의 러시아식 이름은 �} 봐를렌, 한국 이름은 변월룡(邊月龍·1916~1990)이다.
이중섭과 같은 해에 태어났고, 이중섭 못지않은 기량을 지녔으나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고려인 화가, 변월룡.
 
연해주에서 러시아 한인(韓人) 이주민의 아들로 태어난 변월룡은 어릴 때부터 타고난 화재(畵才)로 주목받았다. 가난한 형편에도 배움에 대한 열망을 떨치지 못하고 출판사 삽화
그리기, 극장 포스터·간판 그리기 등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업을 이었다.
 
1937년 스베르들롭스크 미술학교에 입학했고, 24세 때인 1940년엔 당시 최고의 미술 명문인 레닌그라드(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미술 아카데미에 합격한다. 35세 때인 1951년엔 미술학 박사 학위를 받고, '레핀 미술대학'으로 개칭한 미술아카데미 교수로 임용된다.
 
변월룡의 장기(長技)는 인물화. 그는 '닥터 지바고'의 작가인 소설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를 비롯한 러시아 예술가들과 스탈린·레닌 등 정치가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북한에서 활동할 때는 무용가 최승희, 한설야 홍명희 등 문인, 미술인 근원(近園) 김용준 등 북한 문화계 인사의 초상을 많이 남겼다. 당시 그의 초상화가 북에서 차지한 위치는 변월룡이 러시아로 돌아간 후 한설야가 그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잘 나타난다.
 
"나의 장편소설 2편이 출판되옵는데 변 선생이 그린 저의 초상화가 있으면 그것을 권두에 낼까 하옵니다."

 
인물화를 잘 그렸던 변월룡은 러시아와 북한 문화 예술계 인사의 초상을 많이 남겼다. 왼쪽 사진은 1954년 작 '무용가 최승희'. 오른쪽 사진은 '닥터 지바고'를 쓴 소설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를 1947년에 그린 것이다. /컬처그라퍼 제공
 
러시아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변월룡의 마음속엔 항상 고국(故國)이 있었다.
항상 그림에 한글로 서명할 정도로 '나는 한민족'이라는 자각이 뚜렷했다. 북한 파견 시절 열과 성을 다해 북한 화가들에게 그림을 가르친 것도 고국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치와 이념은 그를 고국 품에 마냥 놓아두지 않았다. 1954년 8월 이질에 걸려
러시아로 돌아간 그는 평생 고국을 그리워했지만, 귀화하라는 북한 당국의 요청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눈밖에 나 다시는 북한 땅을 밟지 못한다.
 
저자는 변월룡을 "분단의 비극 때문에 북한에서는 버림받고, 남한에서는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은 비운의 화가"라고 평한다. 렘브란트를 흠모해 그의 화풍을 연구하기도 한 변월룡. 저자는 변월룡의 그림이 서양이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이식(移植)된 우리 서양화의 공백을 메울 수 있을 것이라고도 주장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북한 미술, 그리고 '잊힌 천재'에 대한 호기심으로 읽어볼 만한
책이다. 하마터면 역사 속에 파묻힐 뻔한 인물을 발굴하고, 그에 대해 꾸준한 조사를 한
저자의 노력이 돋보인다. 그러나 대상에 대한 사랑이 지나쳐 미화(美化)로 일관한 점은
 아쉽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