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개치듯 105초 끝낸 구출작전 전세계 놀라
손자병법으로 푸는 세상만사 <20> 勢를 타라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세계를 경악하게 한 1976년 이스라엘 특공대의 아프리카 우간다 엔테베 공항 인질 구출작전의 상황을 묘사한 그림이다. 아래 작은 사진은 당시 엔테베 공항의 실제 모습. [JewishJournal.com]
미션 임파서블! 2011년 1월 21일에 있었던 ‘아덴만 여명 작전’은 가히 그렇게 불릴 만했다. 우리 해군 특수전요원들이 소말리아 해적들에게 납치된 삼호주얼리호 선원 21명을 극적으로 구출했다. 청해부대 최영함(4500t급)은 21일 오전 4시48분(현지시간) 링스헬기의 엄호사격 아래 고속단정으로 특수요원(UDT)들을 삼호주얼리호에 투입시켰다. 그리고 격렬한 총격전을 벌인 끝에 오전 9시56분 해적을 완전히 제압하고 선박과 우리 선원 8명 등 21명 전원을 구출했다. 우리 군의 실력을 만방에 유감없이 자랑한 쾌거라 할 수 있다. 대한민국 군인들이 참으로 자랑스럽다. 사람들은 이 통쾌한 작전을 두고 마치 엔테베 구출작전과 같았다고 입을 모았다. 엔테베 구출작전은 그야말로 영화 ‘미션 임파서블’과 같은 작전이었다.
1976년 6월 27일 이스라엘의 텔아비브에서 출발해 프랑스 파리로 향하던 에어 프랑스 139편 항공기가 중간 기착지인 그리스 아테네에서 이륙한 직후 납치당했다. 인질범들은 과격행동단인 혁명분파 소속의 독일인 두 명과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 소속 팔레스타인 사람 두 명이었다. 납치된 여객기엔 248명의 승객과 12명의 승무원이 타고 있었다. 이 중 유대인은 3분의 1이었다. 비행기는 급유차 리비아에 잠시 들렀다가 아프리카 우간다의 엔테베 공항으로 갔다.
모형 공항서 맹훈, 20m 초저고도 비행 여기서 동료 3명과 더 합류했다. 이들은 각국에 수감 중인 50여 명의 동료들을 석방해 달라는 조건을 제시했다. 그리고 7월 1일 오후 2시까지 조건을 들어주지 않으면 인질을 살해하겠다고 협박했다. 이스라엘 정부를 더 압박하기 위해 유대인을 제외한 인질을 풀어주었다. 이때 풀려나던 프랑스인 기장과 승무원들은 승객들을 보호하는 일이 자신들의 의무라며
비행기에 남았다. 이제 106명(승무원 12명 포함)이 인질로 남았다.
이스라엘이 지금까지도 지키고 있는 중요한 원칙이 있다. “테러리스트와는 어떤 협상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정부 측은 테러범과 협상을 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애초부터 천명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내부에서 인명을 중시하자는 여론이 도는가 하면, 인질의 가족들이 격렬히 항의하며 총리실 난입을 시도하기도 했다. 결국 이스라엘 정부는 인질범들과 협상을 시작했고, 협상시한은 7월 4일로 연장됐다. 동시에 내부에서는 국방장관 시몬 페레스의 총지휘 아래 엔테베 구출작전을 계획했다.
그러나 구출작전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우선 이스라엘에서 아프리카 우간다의 엔테베 공항까지의 거리는 4000㎞를 넘었다. 또한 비행기로 날아가더라도 적대국들의 영공을 통과해야 했다. 더구나 우간다 정부는 이스라엘에 비협조적이었고 우간다를 다스리던 독재자 이디 아민은 인질범 쪽으로 기울어진 듯했다. 그러나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우선 정보기관인 모사드를 통해 엔테베 공항의 정확한 정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모사드는 미국으로부터 엔테베 공항의 위성사진과 첩보자료를 입수하는 한편, 엔테베 공항의 건설 공사에 참여한 이스라엘 건설회사로부터 공항의 구조와 도면을 입수했다. 또한 풀려난 비유대계 인질들을 면담해 인질범들의 무장과 항공기 내부 상황을 세밀하게 파악했다. 과거 우간다군의 훈련을 도운 인연으로 이디 아민과 가까이 지냈던 퇴역 장교 발 레브는 수시로 아민과 통화를 해 정보를 수집했다. 이스라엘 특공대는 이런 정보를 토대로 급히 만든 모형 엔테베 공항에서 맹렬한 훈련을 했다.
7월 3일 오후 3시30분 C-130 허큘리스 수송기 4대, 보잉 707 2대, 최정예 특공요원 100명이 출발했다. 작전명은 번개라는 뜻의 ‘선더볼트’. 계획 착수에서 집행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6일이었다.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의 레이더망을 피하기 위해 불과 20m가 안 되는 초저고도로 홍해 위를 날았다. 이스라엘 공군사령관과 총참모부의 작전사령관이 다른 비행기에 타고 상공에서 이들을 지휘했다. 이스라엘 측은 협상에 따라 석방한 죄수들을 데려다주는 것이라고 속이고 특공대를 태운 C-130 허큘리스 수송기와 지원 항공기를 우간다 상공으로 진입시켰다.
이때 다시 한번 적의 눈을 속이기 위해 모든 조명을 끈 상태로 착륙했다. 조명 없이 시도하는 위험천만한 착륙은 프로토 타입의 야시경을 착용하고 시나이 반도에서 야간 착륙시험에 성공한 경험 덕택에 성공한다. 착륙한 뒤 깊은 밤을 틈 타 특공대는 재빨리 작전을 전개했다. 특공대는 검은색 벤츠 승용차와 4륜차 몇 대에 나누어 탔다. 그리고 마치 이디 아민의 행차인 것처럼 행세하고 인질이 있는 곳으로 접근하려 했다. 그러던 도중에 이디 아민이 자동차를 흰색으로 바꿨다는 것을 기억했던 우간다 경비병이 의심을 품었다. 이스라엘 특공대는 즉시 우간다 경비병을 사살하고 터미널로 달려갔다. 이때 터미널 외부에서 마주친 2명의 인질범을 사살했다.
공항의 전기를 끊어서 순간적으로 암흑 상태를 만든 후 이스라엘 특공대는 곧바로 터미널 내부로 돌입했다. 그곳에는 인질범과 인질들이 함께 있었다. 깜깜한 가운데 표적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이때 특공대는 유대인만 알아듣도록 헤브라이어로 소리쳤다. “엎드려!” 이때 특공대는 못 알아듣고 서있었던 인질범을 정확한 사격으로 쓰러뜨렸다. 경비병 사살로부터 내부의 인질범 소탕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분 45초! 이때 우간다의 경비병들이 몰려왔고 특공대는 이들을 향해 대전차 미사일과 기관총을 퍼부었다.
또한 특공대의 일부는 C-130 허큘리스 수송기에서 보병전투차량을 몰고 나와 우간다군의 미그 전투기 11대를 파괴했다. 추격을 우려해서였다. 이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의 시간은 53분! 작전 중 특공대원 한 명이 전사했고, 우간다군은 40여 명이 죽었다. 유일하게 죽은 특공대원은 바로 지휘관 요나탄 네타냐후 중령이었다. 30세. 그의 동생은 현재 이스라엘 총리인 베냐민 네타냐후다. 이스라엘의 군대에는 ‘돌격’이란 명령이 없다. 오직 ‘나를 따르라’가 있을 뿐이다. 이스라엘에서는 진두에서 지휘하다가 전사한 요나탄 네타냐후 중령을 기려 이 작전을 ‘요나탄 작전’이라 부른다.
“돌격” 대신 “날 따르라”…지휘관만 전사 엔테베 구출작전은 그야말로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은 작전이었다. 인질범조차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작전이었고,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손자병법 병세(兵勢) 제5편은 아주 빠르게, 아주 거세게 몰아칠 때 얻을 수 있는 세(勢)를 말하고 있다. 세차게 흐르는 물이 돌을 떠내려가게 하는 데까지 이르는 것은 세다(激水之疾至於漂石者 勢也). 사나운 새가 공격을 해서 먹이의 뼈를 꺾는 것이 절이다(<9DD9>鳥之擊 至於毁折者 節也). 이러므로 잘 싸우는 자는 그 세가 험하고 그 절이 짧다(是故善戰者 其勢險 其節短).
중국 병법에서 세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세를 얻어야 승리하며 세를 얻지 못하면 패한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세를 얻을까 고민하고 훈련한다. 대나무를 쪼개는 기세인 ‘파죽지세(破竹之勢)’는 특히 유명하다. 세는 아주 거세고 빠를 때 나온다. 태권도 선수가 벽돌을 격파할 때처럼 아주 짧은 시간에 절도 있게 힘을 가할 때 세는 극대화한다. 즉 기세험(其勢險)과 기절단(其節短)이 동시에 딱 들어맞아야 한다. 엔테베 구출작전은 바로 이 두 가지가 정확히 들어맞은 전형적인 작전이라 할 수 있다. 정부조직의 신속한 대응(其勢險)과 과감한 결심(其節短), 그리고 작전부대의 치밀하며 집중적인 훈련(其勢險)과 민첩한 작전수행 및 치명적인 사격(其節短) 등이 작전의 성공요소다. 엔테베 작전에 투입된 특공대는 이스라엘 육군 최정예인 제35공수여단과 특수부대 ‘사이렛 매트칼(Sayeret Matkal)’ 등에서 선발한 대원들이었다. 이들의 훈련 수준은 세계 최고를 자랑한다.
이 작전에는 운도 따랐다. 특공대가 비행기로 이동할 때 케냐의 레이더망에 잡혔다. 그러나 우간다와 비우호적이었던 케냐는 이 결정적인 정보를 전달하지 않았다. 정보가 우간다에 전해졌다면 구출작전은 실패로 돌아갔을 것이다. 해외에서 억류된 인질을 구출하기 위한 군사작전은 해당 국가의 입장은 물론 국제적·외교적 파장도 고려해야 하는 복잡한 사안이다. 이스라엘은 그러나 이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해야만 국가로서 살아남을 수 있다. 600만 유대인이 학살될 때 당신네들은 어디에 있었는가”라고 묻고 있다.
이스라엘은 자국민을 보호하는 일이라면 아무리 여론이 나쁘고 불가능의 난관에 닥치더라도 목숨을 건다. 한 명의 포로라도 구하기 위해 땅 끝까지 추적하며 무슨 일이든 하고야 만다. 자국민을 결코 포기하는 일이 없다. 이런 조국이었기에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당시에 미국 내 이스라엘 유학생 8000명을 비롯해 유럽과 호주·남아프리카공화국 등에서 공부하던 유학생들이 서둘러 조국을 향해 달려갔다. 학생뿐만 아니라 직장인도 많았다. 런던의 지원자 창구로 사용되었던 렉스하우스는 수백 명의 직장 젊은이가 서로 조국으로
들어가려고 북새통을 이뤘다.
네타냐후 중령은 평소 이런 말을 즐겨했다. “나, 그리고 이스라엘의 청년들은 이 나라를 지켜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그것이 다음 세대를 위한 위대한 책임이다.”
연평도 피격사건 이후 한국청소년미래리더연합에서 전국 중·고생 25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대한민국에서 전쟁이 발발한다면? 참전한다 혹은 돕는다가 19.5%, 해외로 도피한다가 58.1%, 국내에 남는다 21.6%, 나머지는 잘 모르겠다고 응답했다. 해외로 도피하려는 사람이 과반수다. 조국이 내게 무엇을 해달라고 요구하기 전에 조국이 나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를 곰곰이 씹어보게 하는 내용이다. 손자가 말한다. 세상의 리더들이여,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구성원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기 전에 내가 구성원들에게 무엇을 해주었는가를. 위기 시에 충성은 평시의 신뢰에서 나온다.
노병천 한국전략리더십연구원장 1919ro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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