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파헤친 歷史

동서양의 아름다움을 지닌 크렘린 궁

淸山에 2012. 3. 24. 23:39

 


 
 
 
 
 
 
 
 
 동서양의 아름다움을 지닌 크렘린 궁

1917년 러시아 혁명 이래 모스크바에는 철의 장막이 내려졌고 그 안으로 들어가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날 모스크바는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이 되었다. 과거에는 두려움의 상징이었던 크렘린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세계의 이름난 관광명소가 되었다. 소련이라는 사회주의 대국의 정점으로 어두운 과거가 스며있긴 하지만 크렘린에는 제정 러시아 시대의 훌륭한 문화유산이 많아 방문하는 사람을 기쁘게 한다.
 
원래 ‘크렘린’이라는 명칭은 고대 희랍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가파른 바위나 성곽을 의미한다. 크렘린이 처음 세워진 것은 1156년 이 지역의 영주였던 돌고루키에 의해서였다. 그 후 14세기에 드미트리 돈스코이에 의해 증축되었다가 15세기 이반 3세에 의해서 다시 오늘날과 같은 웅장한 석조 건축물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12세기 유리 돌고루키 왕 때 시작된 크렘린의 역사는 1382년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몽골족의 침입으로 모든 것이 불에 타버린 것이다. 15세기 말,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는 러시아 대부분의 통일을 끝내고는 여세를 몰아 13세기 초부터 계속돼 온 몽골 타타르족의 예속으로부터 러시아를 해방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반 3세는 비잔틴 황제의 딸을 왕비로 맞이함으로써 오스만 투르크에 멸망당한 비잔틴 제국의 권위를 계승했다. 이어 그는 크렘린 궁전을 확장해 견고한 벽돌 성벽으로 둘러치고 그 중앙에 석조로 된 세 개의 사원 즉, 아르항겔스키, 블라고베시첸스키, 우즈벤스키 사원을 건립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러시아의 독립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붉은 광장의 등장과 역할

크렘린 성벽 바깥쪽에 붉은 광장이 만들어진 것도 이때였다. 적이 침략해 왔을 때 시야를 가리는 건물을 없애 버리자는 것과 시가지에 화재가 났을 때 불똥이 크렘린 안으로 튀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 당시 크렘린 주변의 건물들은 몇몇 교회를 제외하곤 대부분 목조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붉은 광장(Krasnaya Ploshchad)’은 ‘아름다운 광장’이라는 뜻이다. 크라스나야(Krasnaya)가 ‘아름다운’이란 뜻이고 ‘붉은’이란 의미도 함께 갖고 있다. 붉은 광장의 ‘붉은’은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붉은 색이나 크렘린 성벽의 붉은 벽돌 때문에 붙여진 이름은 아니다. 제정 러시아 시절 러시아 정교회의 장엄한 성가행렬은 붉은 광장에서 시작해 스파스카야 탑을 지나, 크렘린 궁전의 대사원으로 가는 행사였다. 1534년 붉은 광장에는 공개처형장인 로브노예 메스토가 설치되기도 했다.
 
붉은 광장은 나라에 큰 사건이 있을 때마다 한몫을 해온 곳이다. 1917년 10월 혁명 당시에는 적군이 백군과 백병전을 벌여 승리를 거둔 곳이며, 레닌이 대중을 설득하기 위해 여러 차례 성공적인 연설을 한 곳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승리의 축하 퍼레이드도 이 광장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러시아를 침공해왔던 나치 독일로부터 빼앗은 수백 개의 군기를 쌓아놓고 승전가를 부른 장소로도 유명하다.
 
 
 제정 러시아의 유물이 가득한 크렘린 궁

크렘린 안에는 제정 러시아 시대의 많은 유물들이 있다. 특히 이반 대제의 종루를 중심으로 한 다섯 개의 웅장한 대사원들은 당시 화려했던 제정 러시아 황실의 영화를 말해준다. 대표적인 곳이 우즈벤스키 사원으로 제왕들의 대관식과 외국 사신 접견이 이루어지던 건물이었다. 15세기 후반에 건축된 건물인 사원 안에는 이반 황제의 목조 왕좌와 14세기에서 17세기에 이르는 벽화, 러시아 화가들의 프레스코화 등이 소장되어 있다. 14세기에 만들어진
이콘(러시아의 종교적 미술품에 나타난 인물 또는 형상. 대부분 성화이다)은 진기한
고대 미술로 유명하다.
 
나폴레옹 군대가 모스크바를 침공했을 때 그 군대는 우즈벤스키 사원을 마구간으로 사용하다가 나중 패배하여 물러날 때 여기에 있던 금 300㎏과 은 5t을 훔쳐 달아났다고 한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이것을 되찾아 은으로 만든 샹들리에를 많이 만들어 교회 내부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트로이츠카야 탑의 문을 들어서면 바로 왼쪽에 표트르 대제의 병기고가 있는데, 그 앞에는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 빼앗았다는 875문의 고풍스런 프랑스제 대포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 건너편에는 크렘린 안에서 유일하게 혁명 후 지어진 현대적 건축물인 대회궁전이 있다. 1961년에 세워진 이 건물은 우랄 산맥에서 가져온 대리석과 알루미늄을 자재로 사용했으며, 한꺼번에 6,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현대식 회의장이다. 대강당의 무대는 볼쇼이 극장의 1.3배나 되고 음향 효과도 뛰어나다. 이곳에서 각종 축제는 물론 국제회의도 개회되며, 볼쇼이 극장의 제2극장으로도 활용된다. 지난 2000년에는 푸틴 대통령이 이곳에서 성대한 대통령 취임식을 가진 바 있다.
 
이반 대제의 종루는 모스크바에서 가장 높은 탑으로, 중심에는 무게 70t이나 되는 우즈벤스키 종이 있고 주변에 21개의 크고 작은 종들이 조화를 이루며 달려있다. 종교적 의식이나 제정 러시아 황실에 경사가 있을 때 이반 대제 종루에 있는 종의 타종을 신호로 하여 시내의 수백 개의 종들이 타종되었다. 1721년에 표트르 대제도 이반 대제 종루의 웅장한 종소리를 들으며 대관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이반 대제 종루 바로 앞에는 ‘종의 왕’이란 세계에서 가장 큰 종이 있다. 높이가6m, 직경이 6.6m에 무게가 200t이 넘는 이 거대한 종은 1733년에서 1735년 사이에 당시 주조 기술의 정수를 결집하여 제조되었으나, 주조 중에 불이 나 떨어져 깨지는 바람에 미완성인 채로 끝나고 말았다. 현재 이 종은 일부분이 깨어진 채 보존되고 있다. 이반 대제 종루 바로 뒤에는 다섯 개의 돔이 달린 아르항겔스키 사원이 있다. 이 사원의 이름은 사원 안의 프레스코 벽화로 장식되어 있는 성화 ‘대천사 미카엘’ 에서 유래된 것으로 대천사 미카엘의 러시아식 발음이 아르항겔스키인 것이다. 
 
 
 
성 바실리 사원은 폭군 이반 4세에 의해 45년에 걸쳐 건축되었다. 이것은 몽골 타타르족을 러시아의 시베리아에서 소탕한 카잔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여 세운 것으로, 16세기 러시아 건축의 걸작품이다. 47m 높이의 양파 머리 지붕을 중심으로 8개의 둥근 지붕들이 불균형하게 하늘을 향해 솟아있는데, 이 불균형의 미가 오히려 멋진 조화를 이루어내고 있다.
 
이반 4세는 이 사원이 완성된 후 사원의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한 나머지, 다시는 이렇게 아름다운 건축물을 짓지 못하도록 이 사원을 설계했던 포스토닉 바르마의 두 눈을 장님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레닌 묘 왼쪽에 있는 4개의 탑을 가진 붉은 벽돌 건물은 소련의 국립역사박물관이다. 원래 이곳에는 로모노소프에 의해 모스크바 대학의 조그마한 교사가 세워져 있었는데 19세기 말 붉은 벽돌 건물로 다시 지은 것이며 박물관으로 사용된 것은 혁명 후의 일이다. 이곳에는 석기 시대의 유물에서부터 10월 혁명 직전까지 소장품이 전시되어 있다.
 
크렘린에 있는 여러 개의 탑 중 스파스카야 탑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사람들을 맞는 개선문으로도 사용됐다. 19세기 초 나폴레옹 군이 진입할 때 진군 나팔소리를 울렸던 곳도 이곳이다.
 
높이가 20~95m의 다양한 이들 탑을 지을 당시 용도는 전투용과 감시초소였다. 1937년 스탈린 시대에 세계에서 가장 큰 루비가 크렘린 안의 5개 탑 꼭대기에 설치되었다. 대형 별 모양의 이 보석은 당대 러시아 최고의 건축설계사인 표드르 페도로브스키가 제작한 것인데 가장 큰 루비별은 직경이 3.75m, 무게는 1.5t이 넘는데 니콜스카야와 스파스카야의 탑 꼭대기에 각각 설치되었다.
 
 
 
글•허용선 여행칼럼니스트
사진•이미지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