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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李承晩 대통령의 미국 여행 이야기(上)(中)(下)

淸山에 2012. 3. 19. 12:35

 

 

 

 


1954년 李承晩 대통령의 미국 여행 이야기(上)
 
 
 위대한 인물은 미국에서 더욱 빛났다.
이현표(李東馥소개)   
 
  李承晩 대통령의 미국 여행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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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박사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었는지를 대한민국의 젊은 세대가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은 민족적 비극입니다. 이 대통령이 초대 대통령으로 재임(1948-1960)하던 기간 중 정치적 독재에 흐르고 장기집권 논란을 불러일으킨 행적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평생을 바쳐서 일제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대한민국 건국을 이끌었으며 이 땅에 민주주의의 나무를 심고 공산주의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 낸 그의 위대한 업적은, 장공속죄(將功贖罪)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그의 과실(過失)을 가지고 시야비야(是也非也)하는 것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더구나, 이 나라의 젊은이들이 그를 상대로 심지어 ‘친일(親日)▪친미(親美)’의 누명을 씌우는 인격살인(人格殺人)에 동참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역사에 대한 중대한 왜곡이고 모독입니다.
 
  어째서 왜곡이고 모독인가를 밝혀 주는 귀중한 글을 上/中/下 세 토막으로 나누어 여기 소개합니다. 이 감동적인 글은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을 역임한 이헌표 선생이 1954년7월26일부터 8월13일까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국빈방문한 80세의 노(老) 대통령이 19일간에 걸쳐 전개한 외교활동을 엮어서 34회에 걸쳐서 <국방일보>에 연재한 내용입니다. 특히 이 글은 방미 기간 중 이 대통령이 행했던 모든 연설문을 담고 있는 소중한 사료(史料)이기도 합니다. 모쪼록 많은 분들이 이 글을 읽고 그 동안 사장(死藏)되었던 역사적 진실에 눈을 뜨고 왜곡된 사관(史觀)을 교정(矯正)하는 기회로 삼기를 바랍니다. 특히 초▪중▪고등학교 선생님들이 이 글을 읽고 학생들이 읽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기를 바라 마지 않습니다. 2012년1월1일 李東馥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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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를 시작하며 (1)
 
 “나를 좀 우리나라에 데려다 달라”
 
 1965년 7월 21일(수요일) 저녁, 어느 여인이 울면서 하와이 호놀룰루의 한인교회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만 나이 64세로 보기에는 너무도 늙고 병약해 보이는 벽안의 여인이 31년이라는 영욕의 세월을 함께한 사랑하는 남편을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보내려고 힘든 발걸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25세 연상의 남편, 90세에 가까운 노령으로 병상의 신세를 지고 있는 지아비를 3년 반 이상 극진히 간호하면서 그녀의 심신은 극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더구나 남편이 영면하기 전 1주일 동안은 잠을 거의 못 이뤘던 그녀는 1965년 7월 19일 새벽 0시 35분, 싸늘하게 변해 버린 ‘파파’(평소 그녀는 남편을 이렇게 불렀음)의 손을 놓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식음을 못하고 혼절을 거듭하다가 양자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장례식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하얀 한복을 입고 반듯이 빗어 올린 머리칼, 검은 실 핀으로 머리칼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꽉 조인 모습. 그리고 통곡하지 않고 오른 손에 흰 장갑을 낀 채 하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범상치 않은 행동은 그녀의 품격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대한민국의 첫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 리(Francesca Donner Rhee, 1900∼1992) 여사였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1875∼1965). 남북통일이 되기 전까지는 눈을 감을 수 없다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병마와 투쟁하던 그는 사랑하는 ‘마미’(이승만은 평소 아내를 이렇게 불렀음)를 두고 그렇게 떠났다. 향년 만 90세.
 
  1960년 4·19 혁명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난 후, 이승만은 부인 프란체스카와 하와이에서 인생의 마지막 5년을 보냈다. 1913년부터 1938년까지 하와이에서의 망명생활을 포함하면 그는 무려 30년을 하와이에서 보냈다. 공교롭게도 조국인 한국에서 45년, 하와이를 비롯한 미국에서 45년을 살았던 이승만에게 미국은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었다.
 
  그렇지만 이승만은 나라를 빼앗겨 40년을 망명생활하면서 느꼈던 향수보다도, 권좌에서 물러난 이후 하와이에서 보냈던 5년 동안 더욱 애절하게 고국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이 시절, 그는 병상에 있으면서도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좀 우리나라에 데려다 달라”고 하소연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살아서 조국 땅을 밟을 수 없었다. 1965년 7월 21일 밤 11시(하와이 현지시각), 이승만의 유해는 미군 의장대의 호송을 받으며 하와이 히캄 공군기지로 향했으며, 미 공군수송기에 실려 조국으로 돌아왔다. 사랑하는 ‘마미’는 그곳에 남겨 두고!(프란체스카는 그 5년 후인 1970년에 귀국해 1992년 서울에서 서거했음)
 
  7월 22일, 김포공항에는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3부요인, 그리고 많은 인사들이 그의 시신을 영접했으며 장례는 7월 27일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정동교회에서 영결식을 마친 후 국립묘지로 가는 그를 전국에서 모인 수십만의 국민들이 애도했다.
 
  당시 이승만의 장례 형식을 놓고 국장·국민장·사회장 등 논란이 빚어졌듯이, 주검이 돼 돌아온 그를 보는 시각이 달랐다. 그것은 어제의 일만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우리 사회 내에서 극과 극을 달리고 있으며 커다란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그러나 그를 존경하든 비난하든 우리가 알아둘 것이 있다. 이승만은 우리 기억 속에서 사라진 인물이 아니라, 이렇게 우리와 함께 호흡을 해 오고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왜 그럴까? 대답은 간단하다.
 
 美 골동품 상점서 뜻밖의 책 발견
 
  이승만만큼 우리 현대사의 흐름을 바꿔 놓은 인물을 찾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한국 근대화의 선구자로, 조국 독립의 구심점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한민국이라는 자유민주국가의 건국과 발전을 위해서 남달리 헌신했다.
 
  반면에 그는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아집 때문에 장기집권을 도모했다. 그러다 보니 억지 개헌과 부정선거를 마다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1960년 4·19 혁명의 단초를 제공했고, 많은 젊은이들을 피 흘리며 쓰러지게 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국내외에서 이승만에 대한 수많은 저작물이 제작됐다. 그중에는 그를 직접 접할 수 있었던 이들의 기술이 담긴 중요한 저작물들도 있다.
 
  그러나 이승만과는 일면식도 없는 이들이 제3자의 입이나 글을 통해서 얻은 정보를 가지고 그를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 보니 구체적인 사실과는 거리가 멀고 검증되지 않은 정보가 생산되며, 첨단 미디어가 이런 정보를 넓게 그리고 빠른 속도로 확산시키고 있다.
 
  인간이 인간을 평가한다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을 것이다. 직접 접촉하고 교류했던 사람이 평가하는 것도 힘들거늘, 그렇지 못한 사람은 말해서 무엇하랴! 이는 정말 경계해야 할 일이다.
 
  오늘부터 선보이게 되는 연재물은 이승만에 관한 저작물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 저작물은 아주 특이한 존재다. 잠시 연재물이 등장하게 된 책에 관한 일화를 소개하는 것이 도리일 것 같다.
 
  이야기를 2005년으로 돌려야겠다. 필자는 당시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해 4월 초 골동품 상점을 찾았다가 뜻밖의 책을 만났다. “President Rhee Syngman’s Journey to 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이승만 대통령의 미국 여행)”라는 제목의 영어 원서였다.
 
  대한민국 공보처가 발간한 책으로 1954년 7월 26일부터 8월 13일까지 18박 19일 동안 이승만 대통령의 미국 방문 행적이 많은 사진들과 함께 수록돼 있었다.
 
  필자는 오랫동안 대한민국의 대통령들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 왔으나 그 책은 처음 봤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책에는 소장자가 보관하기 위해 꽂아 둔 특이한 사진 한 장이 꽂혀 있었다. 6·25전쟁 직후, 피란지에서 태극기를 들고 서 있는 이승만 대통령 사진이었다.
 
  사진을 처음 대하는 순간 실망스러웠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왜 우리 대통령은 총이나 칼을 들고 결연한 의지를 보이지 못하고, 그렇게 나약한 모습으로 태극기를 들고 있을까? 그것도 1949년 법률로 정해진 태극기와 비교해 볼 때 태극과 괘의 모습이 사뭇 다른, 어느 장롱 속에서 꺼내 온 것 같은 태극기를!
 
  그날 밤, 필자는 그 사진을 책갈피 삼아 밤새도록 책을 읽으며 너무도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그간 알지 못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국제적인 위상이 극히 낮았던 그 시절, 그는 미국을 국빈 방문해 당당하게 미국 정치지도자들에게 한반도의 미래를 설파하고 있었다. 자유와 정의라는 이름으로!
 
 `… 미국 여행' 책 통해 다시 한번 조명
 
  책 읽기를 마치고 태극기를 들고 서 있는 이승만 대통령을 다시 곰곰이 살펴봤다. 처음 접했을 때 느껴졌던 실망스러운 감정이 이번에는 연민과 애정으로 변해 있었고, 그분의 용기와 배짱이 느껴졌다.
 
  그때 불현듯 이 책을 나만이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가 한 번쯤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승만 대통령을 이해할 수 있는 최적의 교재 중 하나라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다.
 
  이후 5년 이상이 훌쩍 지나버렸다. 그리고 이제 감히 국방일보 지면을 통해서 그 책의 내용과 관련 자료들을 바탕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말했던 자유와 정의, 그리고 대한민국의 비전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그때 책을 읽으며 필자가 느꼈던 그 감동을 되살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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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방문 배경 (2)
 
 6·25 총성 그후… 평화주의자, 반공투사가 되다
 
  1948년 7월 17일 제정된 대한민국 제헌헌법의 전문은 대한민국 건국의 기본이념을 자유와 정의에 두고 있으며, 이는 8차례의 헌법 개정에서도 변하지 않고 지켜지고 있다. 자유와 정의는 유엔의 설립 목적이며 모든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기본이념이기도 하다. 그런 대한민국이 수립된 지 채 2년이 못 돼 미증유의 시련을 겪게 된다.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의 무력남침으로 수백만 명이 생명과 재산을 잃었고, 국토의 전체가 전화로 완전히 초토화됐다. 이후 대한민국은 무력과 폭력을 앞세워 자유와 정의를 짓밟는 세력과 3년에 걸친 긴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으로 총성이 멎었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일시적인 방편이었다. 이후 1954년 4월 26일부터 6월 15일까지 51일간 제네바에서는 한반도 통일문제를 다룬 국제회의가 개최됐다. 휴전 뒤 3개월 내에 고위 정치회담을 열어 한국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권고한다는 휴전협정의 내용에 따른 국제회의였다.
 
  그러나 제네바 회담은 아무런 성과 없이 말잔치로 끝나고 말았다. 이제 바야흐로 국제사회는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의 노골적인 대립이 시작됐다. 구체적으로는 미국과 소련의 양극체제였으며, 중국(중공)이 신생국으로서 세계 무대에 등장하게 됐다. 이로써 한반도의 통일문제는 더욱 어두운 구름 속으로 잠겨 버리고 말았다.
 
  한편 휴전 직후인 1953년 8월 3일부터 대한민국과 미국은 한미 상호방위조약 협상에 들어가 같은 해 8월 8일 그 최종안을 서울에서 가조인했다. 그리고 동년 10월 1일 워싱턴에서 대한민국과 미국의 외무부장관이 서명했지만, 양국이 비준서를 교환하고 실제 효력이 발휘된 것은 1954년 11월 18일이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한반도에 자유와 정의가 넘치는 통일국가를 꿈꿨던 인물이다. 비록 그가 공산주의에 대한 지독한 혐오감을 갖고 있긴 했지만 당초 무력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일제 강점기 미국에서의 망명생활 중에도 그는 조국 독립에 관한 견해에 있어서 남다른 면이 있었다. 즉, 외교적인 노력으로 국권을 회복한다는 신념을 가졌던 인물이다.
 
  외교에 의한 독립노선은 당시 한국인들에게 너무 이상적이고 현실 회피적이며 유약한 노선이었던 것 같다. 때문에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자 목에 30만 불의 현상금이 걸린 일제의 공적 1호였지만, 동료들로부터 오해도 받았고 적대적인 세력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6·25전쟁은 이승만 대통령을 다른 인물로 바꿔 놓았다. 자유와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게 했다. 때문에 그는 휴전에 철저히 반대했고 전쟁을 서둘러 종식시키려는 아이젠하워 등 미국과 국제사회의 정치지도자들과 대립각을 세웠다.
 
  6·25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졌을 때인 1952년 11월, 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가 실시됐다. 당시 공화당의 아이젠하워 후보는 그해 10월 24일 “I shall go to Korea(나는 한국에 갈 것이다)”라는 제목의 연설로 선거의 주도권을 잡았다. 연설은 그가 어떤 방식으로든 전쟁을 종식시키겠다는 의도로 받아들여져 미국 언론과 국민의 주목을 받았고 그를 대통령에 당선되게 했다.
 
  사실 아이젠하워는 군인으로서 평생을 살아온 인물이고, 일부에서는 그가 전쟁을 종식시키는 방식이 휴전이 아니라 북진 대공세로 전쟁을 마무리 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단지 그런 생각만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그를 설득해 남북통일의 꿈을 실현시키고 싶어 했다.
 
  아이젠하워는 약속대로 대통령 당선자 자격으로 1952년 12월 2일부터 2박 3일 일정으로 방한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그를 만나 자신의 계획을 설명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이승만과 생각이 달랐다. 이미 휴전으로 마음을 정한 그는 이승만 대통령과의 만남 자체를 탐탁해하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교수는 1978년에 발간된 저서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에 당시의 상황을 비교적 잘 기술해 놓았다. 그는 아이젠하워가 도착 즉시,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고는 더 이상의 접촉을 꺼렸다고 적고 있다. 더구나 아이젠하워가 3일 동안 체류하면서 밴플리트 장군의 戰況 보고를 듣지 않으려 했고 낮에는 미군부대 시찰, 밤에는 포커놀이를 즐겼다고 적어 놓았다.
 
  당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아이젠하워를 만났을 때 대형 태극기를 선물했다. 외국의 최고 지도자에게 국기를 선물한다? 정말 기발한 착상이 아닌가. 사실 이승만 대통령은 무슨 선물을 할지 상당히 고민했던 것 같다. 결론은 태극기였다. 물론 이승만도 상대가 반갑게 받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을 것이지만 태극기를 통해 자유와 정의를 지키려는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때 현장을 목격했던 원로 언론인에 따르면 아이젠하워가 한 손으로 태극기를 받으려고 하자 이 대통령은 황급히 태극기를 거두며 정색을 하고 말했다고 한다. “한 나라의 국기를 받을 때는 두 손으로 받는 게 예의입니다”라고. 곧 아이젠하워는 두 손으로 태극기를 받은 다음, 왼손으로 태극기를 들고 오른손으로는 이 대통령과 악수를 했다고 한다. 그때 장면을 담은 사진이 남아 있다. 자세히 보면 어딘지 두 사람의 관계가 어색함을 느낄 수 있다.
 
  아무튼 李承晩 대통령의 태극기 사랑은 유별났다.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조국의 독립을 그릴 때는 물론이지만, 어렵사리 광복을 맞고 수립한 대한민국 정부를 공산주의자들이 무력으로 짓밟으려 할 때 그의 태극기 사랑은 더욱 절실하지 않았나 싶다.
 
  아이젠하워에게 태극기를 선물하는 사진은 물론, 1950년 7월 21일 태극기를 들고 촬영한 사진, 태극기를 배경으로 이승만의 초상화가 실린 1950년 10월 16일자 ‘TIME’ 표지는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6·25전쟁을 겪고 나서 이승만은 어제의 순진한 평화주의자, 외교를 우선하는 합리주의자가 아니었다. 북쪽의 공산 정권을 반드시 무너뜨리겠다는 反共투사로 변해 있었다. 이승만에게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필요한 것이기는 했지만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敵의 도발을 응징하고 북진 통일하겠다는 이승만의 이러한 집념은 미국은 물론 국제사회로부터 큰 호응을 받지 못했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큰 불만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1954년 제네바 회담이 수포로 돌아가고 한반도에 暗雲이 드리우자 이승만은 자신의 주장이 옳았다는 것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
 
  반면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에 취임한 후 약속대로 6·25전쟁 휴전을 성립시켰다. 하지만 이승만의 불만을 잘 알고 있었고 어떻게든 그를 회유하고 싶었다. 그래서 존 덜레스(John Foster Dulles, 1888∼1959) 국무장관과 로버트슨 국무차관보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 미국을 방문해 주도록 요청했다.
 
  결국 이승만의 방미계획은 구체화돼 갔고 1954년 7월 14일, 엘리스 브리그스 주한 미국 대사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아이젠하워의 초청장을 전달하자 이승만은 訪美를 최종 결심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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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外交와 弘報의 達人 (3)
 
 “국가홍보는 외교관만이 아닌 국민의 몫”
 
  “과거 40년간 우리가 국제적으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은 세계 모든 나라가 우리와 접촉할 기회가 없었던 까닭입니다. 세계가 일본인들의 선전만을 듣고 우리를 판단해 왔었지만 지금부터는 우리가 우방들의 도움으로 우리 자리를 찾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우리말을 할 수 있고, 우리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세계 모든 나라는 남의 말을 들어 우리를 판단하지 말고 우리가 하는 일을 보고 우리의 가치를 우리의 중량대로만 판정해 주도록 요청하는 바입니다.
 
  “우리 정부와 민중은 해외 선전을 중요히 여겨서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각국 남녀에게 우리의 올바른 사정을 알려 줘야 합니다. 이렇게 서로 간에 양해를 얻어야 정의가 상통해 교제가 친밀해질 것이며, 이는 우리의 복리만 구함이 아니요, 세계 평화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 1948년 초대 대통령 취임사 중에서
 
  이승만(1875~1965) 대통령은 1948년부터 1960년까지의 재임기간 중에 전부 6차례 외국을 방문했다. 1948년 10월, 맥아더 장군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한 것을 시작으로 일본만 세 차례 방문했으며, 6·25전쟁 중인 1953년 1월 자유중국 방문, 1954년 7월 미국 방문, 그리고 1958년 11월 월남 방문이 그것이다.
 
  요즘은 정상외교가 매우 잦아졌지만 반세기 전만 해도 외교활동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으며, 초청국이나 방문국 모두 汎국가적인 행사였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의 미국 방문은 우리 대한민국 국가원수로서는 첫 미국 방문이었고, 더구나 방문 형식이 정상외교의 형태 중 가장 높은 격식의 의전이 따르는 國賓방문(정상외교에는 국빈방문 이외에 공식방문, 실무방문 등이 있음)이었다.
 
  국빈방문의 경우 통상적으로 21발의 예포 발사, 양국 국가 연주 등 공식 환영행사, 국빈만찬(남자는 검정 혹은 흰색 나비넥타이와 연미복 착용), 의회 방문 및 연설, 정상 간 선물 교환, 양국 간 공연 등 문화교류 행사가 수반된다. 때문에 적어도 방문이 시작되기 2~3개월 전부터 초청국과 방문국의 외교부와 공관에서는 방문 일정 등 세부사항에 대해 준비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의 미국 國賓방문의 경우, 준비 기간이 겨우 1개월 남짓밖에 되지 못했다. 물론 韓美 양국 간에는 6·25전쟁 휴전 이후 1년 이상 방미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나 실제로 李 대통령의 訪美 의사가 미국 측에 전달된 것은 1954년 6월 15일 제네바 회의가 성과 없이 끝나고,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양유찬 駐美 한국대사가 미국의 수도 워싱턴으로 귀임한 이후였다.
 
  사정이 이러하니 준비 기간이 짧을 수밖에 없었지만 이승만 대통령과 경무대, 외무부, 그리고 주미 한국대사관, 美 국무부는 한미 양국 간의 첫 국빈방문 행사를 차분하고 철저하게 준비했다. 당시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실무를 총괄했던 한표욱 공사는 그때의 준비상황을 ‘이승만과 韓美 외교’(1996)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해 놓았다.
 
  “당시 외부부가 업무를 관장했으나 모든 훈령은 거의 李 대통령이 직접 내렸다. 대통령 연설은 자구 하나하나를 경무대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대통령이 타고 올 비행기를 물색하고 교섭하는 문제도 쉽지 않았다. 우리도 대한민국항공사(KNA)가 있었으나, 비행기가 낡은 고물이었다. 미국은 최신형 공군기를 내줬다. 비행기는 100명이 탈 수 있었고 機內에서 서울과 교신할 수 있는 통신시설도 있었다.”
 
  사실 이승만은 외교, 특히 홍보에 있어서 대한민국은 물론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達人이었다. 망명 시절 40여 년간 그의 외교와 홍보활동은 접어 두고라도 1948년 7월, 초대 대통령 취임사는 달인으로서의 탁월한 재능을 잘 증명해 주고 있다.
 
  “과거 40년간 우리가 국제적으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은 세계 모든 나라가 우리와 접촉할 기회가 없었던 까닭입니다. 세계가 일본인들의 선전만을 듣고 우리를 판단해 왔었지만 지금부터는 우리가 우방들의 도움으로 우리 자리를 찾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우리말을 할 수 있고, 우리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세계 모든 나라는 남의 말을 들어 우리를 판단하지 말고 우리가 하는 일을 보고 우리의 가치를 우리의 중량대로만 판정해 주도록 요청하는 바입니다.”
 
  “우리 정부와 민중은 해외 선전을 중요히 여겨서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각국 남녀에게 우리의 올바른 사정을 알려 줘야 합니다. 이렇게 서로 간에 양해를 얻어야 정의가 상통해 교제가 친밀해질 것이며, 이는 우리의 복리만 구함이 아니요, 세계 평화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필자는 당시 취임사에서 가장 강조됐던 부분이 바로 국가 홍보에 국민이 앞장서야 한다는 이 대목과 이에 앞서 나오는 외교에 관한 부분이라고 본다. 즉, 국가 홍보와 외교가 외교관이나 특정인의 몫이 아니라 국민 전체의 책무라는 것이다. 63년 전의 이 취임사는 우리 국가 위상이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진 오늘, 아니 대한민국이 존속하는 한 우리 국민들이 늘 되새겨 보고 실천에 옮겨야 할 명언으로 보인다.
 
  아무튼 이렇게 방문 준비가 구체적으로 마무리돼 가자 1954년 7월 14일 양국 정부는 李 대통령의 訪美를 공식 발표했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國賓방문에 대해 미국 언론은 비상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7월 15일자 워싱턴포스트의 보도를 보기로 하자.
 
  “이승만 대통령이 다음 주에 미국을 국빈방문한다고 7월 14일 주한 미국대사관이 발표했다. 브리그스 대사는 토요일, 李 대통령 방미 준비를 돕기 위해 워싱턴으로 향할 예정이다. 李 대통령은 아이젠하워의 초청에 감사하지만 이번 訪美의 중요한 이유는 개인적인 관심사가 아니면서 한국과 미국이 적에 대한 공동조치를 취하는 데 합의한다면 자유라는 大義의 선양에 큰 진전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만은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 벌써 40년간을 미국에서 망명생활했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독립운동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힘들었다. 미국 대통령을 비롯해 여야 지도자와 미 국무부 등의 인사들을 만나기가 힘들었고, 국권을 잃은 국민으로서의 푸대접을 받을 만큼 받았다. 더구나 광복 이후 정부수립, 6·25전쟁과 휴전에 이르기까지 이 대통령에 대한 미국의 괄시는 심각했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그런 데에 주눅이 드는 위인이 아니었다. 비록 미국에 불가피하게 신세를 지고 원조는 받더라도 할 말은 하고 할 일은 해 버리는 인물이었다.
 
  좋은 예의 하나가 반공포로 석방이다. 이승만은 미국이 자신의 의사에 반해 6·25전쟁을 휴전으로 마무리하려 하자, 휴전 직전(1953년 6월 18일) 일방적으로 포로를 석방해 미국은 물론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는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런 행동은 막가파식의 만용이 아니었다. 철저히 계산된 외교와 홍보활동이었다. 그의 말과 행동은 동양과 서양의 학문 및 교양을 두루 갖춘 당대 최고 지성인으로서의 자존심과 당당함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이승만은 만 나이 4살 때, 3개월 만에 천자문을 외는 신동이었다. 또 동양의 고전을 공부해 13살 때 과거시험에 첫 응시한 후 수년간 도전했었다. 하지만 관직에의 길이 실력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과거를 포기하고 20살의 나이에 서양학문과 문물을 배우고자 배재학당에 들어갔다.
 
  곧 이승만은 조국의 근대화에 눈을 뜨게 되며 선구적인 개혁운동에 가담한 대가로 종신형을 선고받지만, 다행스럽게도 5년 7개월간 옥살이 끝에 석방돼 1904년 11월 미국행 배를 타게 된다. 미국에서 그는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학사,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 등 전 과정을 놀랍게도 5년 만에 마쳤다.
 
  이후 무려 35년간을 미국에서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하다가 광복 후 귀국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됐고 귀국 후 9년 만에 국빈으로 초청받아 자신의 제2의 고향인 미국에 가게 됐다. 그는 앞서의 워싱턴 포스트의 보도대로 개인의 관심사 때문이 아니라, “자유라는 대의를 선양”하러 미국에 간다는 자신감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그는 당당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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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4년 7월 워싱턴 방문 (4)
 
 통일의 신념, 美 심장서 목놓아 외치다
 
  1954년 7월 14일 이승만 대통령의 국빈방문 공식 발표와 동시에 대통령 공식수행원 명단이 공개됐다. 총 27명의 명단 중에는 손원일 국방부장관, 정일권 육군참모총장(대장), 김정렬 국방부장관 보좌관(중장), 김일환 육본관리부장(중장), 최덕신 육군작전기획부장(소장), 장건식 국방부 제5국장(대령) 등 국방부 관리들이 포함됐다.
 
  군 요직이 이렇게 공식수행원 명단에 다수 포함된 것은 이 대통령 방미의 중요한 목적의 하나가 한미 군사협력 강화와 미국의 군사원조 요청에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즉, 이 대통령은 제네바 회의의 결렬에 따라 한반도의 상황이 다시 악화되고 있으므로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한반도의 통일을 앞당길 수 있는 방안을 심도 있게 논의하고 싶어 했다.
 미국 방문에 나선 이승만 대통령이 1954년 7월 26일 워싱턴 공항에 도착한 후 닉슨 부통령 주재 환영행사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1954년 7월 25일 소나기가 쏟아지던 날 오후 5시,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김포공항에서 환송식을 마치고 미국 정부가 제공한 군용기편으로 미국으로 향했다.
 
 비행기는 일본에는 절대 들르지 않겠다는 이 대통령의 고집으로 알류샨 군도의 에이댁(Adak) 섬과 시애틀을 경유해 7월 26일 오후 4시(미국 동부시간) 워싱턴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는 사열대와 환영식장이 마련됐고 미국 정부를 대표해 닉슨(Richard Nixon, 1913∼1994, 1953∼1961 : 부통령, 1968∼1975 : 대통령 역임) 부통령 내외, 덜레스(John Foster Dulles, 1888∼1959) 국무장관 내외 등 정부 고위인사, 래드포드(Arthur W. Radford, 1896∼1973) 합참의장 내외,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1895∼1993) 육군참모총장 내외 등 군 장성들이 도열해 있었다. 재미동포 100여 명도 한복에 태극기를 들고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일행을 마중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79세의 노인답지 않게 당당한 걸음으로 트랩을 밟고 내려왔다. 이때 동포들은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 대통령은 닉슨 부통령 내외 등 미국 측 환영인사들과 악수를 나누고, 다정하게 동포들의 손도 잡아줬다. 21발의 예포가 울리고 미군 군악대가 애국가와 미국 국가를 연주하는 동안 모두가 차려 자세로 서 있었다.
 
 무려 15분 동안 즉흥 연설
 
  이어 이승만 대통령은 닉슨 부통령의 안내로 미국 육·해·공군 의장대를 사열한 후 행사장에 마련된 마이크를 잡고 닉슨의 간단한 환영사에 대한 답사 형식으로 도착 인사를 했다. 당초 이 대통령은 짤막하게 인사를 할 것으로 예정됐으나 무려 15분 동안 즉흥 연설을 했다.
 
  그렇게 오래 연설을 했는데도 그간 국내에서 발간된 책자에는 그 내용이 무엇인지 거의 기술돼 있지 않다. 공보처에서 발간한 국문 책자 ‘이승만 대통령 방미 수행기’(1955)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영문판 ‘President Syngman Rhee's Journey to America’(1955·국내 번역판 제목 : ‘이승만 대통령 방미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President Rhee said that American ‘cold feel’ prevented the reunification of Korea during the fighting, but God Almighty will see to it that we shall carry out our program.”
 
  이 문장을 번역하자면 이렇다.
 
  “이 대통령은 도착 연설에서 미국의 ‘cold feel’이 6·25전쟁에서 한반도의 통일을 막았지만, 전지전능한 신은 우리의 계획이 기필코 성취되도록 해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
 
  이 문장에서 ‘cold feel’이라는 단어는 분명 ‘cold feet’의 오타다. ‘cold feet’이란 겁을 먹는다는 뜻이다. 즉,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이 겁을 먹어 한반도 통일을 막았다는 얘기를 한 것이다. 그런데 공보처가 그런 중대한 오타를 낸 것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공보처의 ‘cold feel’이 오타라는 것은 그때 공항에 있었던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가 1978년에 발간한 저서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에서도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올리버는 “미국이 겁을 먹어(American cold feet) 한반도 통일을 여태껏 막았다”는 이 대통령의 발언을 소개하면서 “그가 싸우려는 마음을 갖고 왔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그는 “닉슨 부통령이 이승만 박사의 뜻하지 않은 비판적인 발언에 당황해했다”고 적었다.
 
 마음속 있는 말 다 쏟아내
 
  그러나 올리버도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날 공항에는 다수의 기자들이 있었다. 이들 중 워싱턴 포스트 신문의 에드워드 폴리아드(Edward Foliard) 기자는 그때의 분위기를 매우 상세하고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1954년 7월 27일자 워싱턴 포스트 신문의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그의 기사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보통 외국의 국가원수가 워싱턴에 도착하면 외교적인 어투로 사랑의 밀어를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승만 박사도 그런 선에서 도착 인사를 준비했었다.
 
 그러나 닉슨의 환영사에 이어 공항에 마련된 마이크 앞에 선 그는 준비된 이야기를 하지 않고 그의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쏟아냈다. 그는 미국인들이 한국을 어떻게 구해줬는지,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의 남침야욕이 어떻게 좌절됐는지를 우선 설명했다. 그리고 이승만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에 우리가 조금만 더 용기가 있었다면 압록강까지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한반도의 통일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이 조금 겁을 먹어(a little cold feet) 우리는 다 차려 놓은 밥상을 차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가 한국, 미국과 유엔, 그리고 모든 자유국가들에 최상의 기회였는데 놓친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은 확실한 승리를 위한 우리의 계획이 기필코 성취되도록 보살펴 주실 것입니다.’”
 
  “이 박사는 낮은 목소리로 연설을 해서 그의 음성은 비행기 엔진의 소음 속에 묻혀 버렸다. 때문에 닉슨 부통령, 덜레스 국무장관, 그리고 다른 고위인사들은 그의 연설을 거의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스피커 앞에 있던 통신사 기자들은 그의 발언 대부분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 박사는 기대했던 것보다 상당히 오랫동안 연설했기 때문에 백악관 도착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통일막은 사람들에게 선전포고
 
  워싱턴 포스트 신문의 기사가 올리버 박사보다 더 정확해 보인다. 아무튼 이승만 박사는 겁을 먹어 한반도의 통일을 막았던 바로 그 일부 사람들과 싸움을 하겠다는 선전포고(?)를 공항에서 한 것이다.
 
  우리의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정부의 환심을 사러 미국을 방문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나 덜레스 국무장관 등 미 행정부는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에 반대하고, 어떻게든 한반도 통일을 달성하겠다고 주장하며, 전후 복구를 위해 더 많은 경제지원을 해 주도록 요청한 데 대해 골치 아파하고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李 대통령은 미국 정부의 이런 분위기에 굴복하거나 화해를 통해 실질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얄팍한 술수를 부리지 않았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공산주의의 전략에 말려든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세계 정책에 대해 공개적으로 신랄한 공격을 퍼부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승만 대통령의 미국 방문 목적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미 행정부의 유약한 태도에 대해 투쟁을 선언하고, 미국 국민의 여론에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호소해 보려고 방문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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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악관 國賓 晩餐 (5)
 
 아이젠하워 남북공존 암시에 이승만 共産軍 축출 의지로 응수
 
  미국 워싱턴 시는 외국의 국빈이 방문할 경우 백·청·적색의 끈이 매여 있는 놋쇠에 금도금한 열쇠를 선물한다. 전달 방식은 시청 앞에 환영식장을 마련하고 시장이 국빈에게 직접 전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경우에는 달랐다. 1954년 7월 26일 사무엘 스펜서 워싱턴 시장이 공항으로 와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열쇠를 증정했다.
 
  열쇠를 받은 李 대통령은 미소를 지으며 “내가 이 열쇠를 들고 있는 한 워싱턴으로 들어갈 때 나를 막는 사람은 없겠구먼. 내가 최대한 빨리 시내로 차를 타고 들어갈 테니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아무도 나를 못 잡을 걸”이라고 말하고는 손으로 열쇠를 흔들어 보이며 마치 어린아이같이 즐거워했다.
 
  이윽고 李承晩 대통령과 닉슨 부통령, 래드포드 美 합참의장이 탄 제1호 리무진과 퍼스트레이디 프란체스카 여사와 닉슨 부통령의 부인이 탄 제2호 리무진 등 자동차 행렬이 워싱턴 시내로 향했다. 차량 행렬은 메모리얼 브리지, 링컨기념관을 지나 수많은 인파가 양국 국기를 흔들며 환영하는 가운데 23번가와 펜실베이니아 거리를 지나 백악관 서북문을 통해 백악관 안으로 들어섰다.
 
  이승만 대통령 일행이 도착하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백악관 건물 계단에서 내려와 차에서 내리는 이승만 대통령을 영접해 계단을 다시 올라와 그의 부인에게 안내했다. 이어 아이젠하워는 다시 계단을 내려가 프란체스카 여사를 마중했다.
 
  이날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백악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저녁 8시 20분, 아이젠하워 대통령 내외가 베푸는 國賓만찬에 참석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내외는 공산침략에 맞서 싸운 李 대통령과 한국 국민에게 존경과 경의의 표시로 성대한 만찬을 마련했다.
 
  만찬회는 백악관의 국빈연회장에서 개최됐다. 연회장은 약 150명이 함께 만찬을 즐길 수 있는 고전적 향취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이날 만찬회 참석자 수는 통상 백악관의 국빈만찬 참석자 수보다 상당히 적은 총 60명이었다.
 
  한국 측에서는 李 대통령 내외를 비롯해 최순주 국회부의장, 정일권 육군참모총장, 양유찬 주미 한국대사, 임병직 주유엔 한국대사, 백두진 경제조정관 등이 참석했다.
 
  미국 측에서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내외를 비롯해 닉슨 부통령, 조셉 마틴 연방하원의장, 덜레스 국무장관 내외, 조지 험프리 재무장관 내외, 찰스 윌슨 국방장관, 로버트 앤더슨 국방차관 내외, 래드포드 합참의장 내외, 밴플리트 장군 내외, 스펠만 추기경, 주한 미 8군사령관 맥스웰 테일러 부인, 엘리스 브리그스 주한 미국대사 등이 참석했다.
 
  만찬회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환영 연설로 시작됐다. 아이젠하워는 자기가 육군참모대학 재학 중에 들었던 강의, 즉 모든 것은 변한다는 논리를 근거로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쟁이 아니라 남북한의 평화 공존을 암시하는 발언을 했다. 아이젠하워의 연설 일부를 인용해 보기로 한다.(영어학습에 관심 있는 분들을 위해 국방일보 인터넷판에 영어연설 全文과 번역문을 게시했음)
 
  “이승만 대통령님이 오늘 이 나라를 방문해 주시고, 만찬에 참석해 주신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잠시 내가 참모대학 시절에 들었던 강의를 회상코자 합니다. 당시 강사는 삶의 기본적인 특성은 변화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전쟁에서 수송 수단, 사용 무기, 물자 공급 방법 등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항상 변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소위 文明국가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규칙도 때로는 변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그 다음, 강사는 결코 변하지 않는 요소가 단 하나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아무리 장구한 역사와 오랜 신화를 들춰 봐도 용기·정력·신뢰·희생정신을 찬양하지 않고 편협성·사악함·이기주의를 경멸하지 않은 경우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용기·정력·신뢰·희생정신에 충실한) 한국 국민과 李 대통령에게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국 국민들이 시련 속에서, 고통 속에서, 야수적인 공격에 의한 노예 상태에서, 용기를 갖고 용감하게 대항하는 것을 봤습니다. 미국인들이 한국 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자랑거리의 하나입니다. 그런 자랑스러운 국민의 용기를 위해, 한국의 번영과 미래의 행복을 위해, 여기 참석하신 한국 국민들의 대표이신 李 대통령과 함께 나는 축배를 제안합니다.”
 
  이어 이승만 대통령이 답사를 했다. 李 대통령은 아이젠하워의 연설에 대해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고, 6·25전쟁에서 보여 준 미국의 지원에 대해 아래와 같이 고마움을 표시했다.(영문연설 全文과 번역본은 국방일보 인터넷판에 게시)
 
  “오늘 밤 한국을 위해서 이같이 영광스러운 자리가 마련된 데 대해 내 개인적으로나 우리 국민의 감회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찹니다. 친구들이여, 이 자리에 있는 우리 일행이나 한국에 있는 우리 국민의 가슴속에는 여러분과 미국 정부 그리고 미국 국민에게 고마움과 감사의 마음이 넘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 줬으면 합니다. 여러분은 한국 국민의 용감성에 대해서 말들을 합니다. 한국군 장병들, 물론 용감합니다. 또한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우리는 우리 영토가 외래 공산군에게 점령돼 있는 한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육·해·공군의 장병들뿐만이 아니라, 남녀 또는 지위의 상하를 막론하고 나라를 통일하지 않으면, 공산 침략군을 우리 땅에서 몰아내지 않으면 우리가 살 수 없다는 점에서 온 국민이 모두 하나가 돼 있습니다.
 
  “바로 이런 정신이 한국인으로 하여금 아시아 최대의 반공 방위력을 자랑하는 군대를 갖도록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한국군 장병들은 기꺼이 죽을 각오가 돼 있습니다. 그들은 기꺼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돼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왜 그렇게 용감한 것일까요? 왜 그들은 목숨을 던질 각오가 돼 있을까요? 그 이유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들은 거의 40년간 외부의 통치하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외래의 군국주의 통치하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경험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확신을 심어 줬습니다. 독립해 우리 정부를 갖지 않고는 우리 생명이 우리 것이 아니요, 자유를 가진 것도 아니라는 확신 말입니다.
 
  “바로 헨리 패트릭이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말한 것과 같이 말입니다. 한국인들은 놀라운 투쟁정신을 갖고 있으며, 모두가 놀라운 병사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원조가 없었다면 사정은 매우 달라졌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여러분의 장병들이 한국에 와서 그들을 훈련시키고 사기와 정신을 앙양시켜 줬으며, 무기까지 줬습니다. 여러분이 준 원조가 그들에게 어떤 성과를 이뤄 놓았는지 보십시오. 내가 일선을 시찰할 때면 그들은 모두 기립해 나를 맞이합니다. 모든 장병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두 미국 제품으로 무장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의 젊은이들을 강력한 병사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날 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가 백악관에서 머물도록 각별한 배려를 했다. 수행원들은 영빈관인 블레어 하우스와 헤이 애덤스 호텔에 나뉘어 투숙했다. 특히 아이젠하워는 이승만 대통령 내외에게 링컨 대통령이 사용하던 침대에 잠자리를 마련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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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ext of President Eisenhower‘s Remarks
 아이젠하워 대통령 연설문(1954.7.26)
 
  Mr. President, Mrs. Rhee, Your Eminence, my friends:
  이 대통령님, 여사님, 추기경님, 나의 친구여러분,
 
  I am sure there is no one at this table who does not have, Mr. President, a feeling of distinction in your visit to this country and your presence at this table. I think it is not difficult to discover the reasons for this sense of pride and distinction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서 대통령님이 이 나라를 방문해주시고, 만찬에 참석해주신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분은 없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이렇게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느낌을 갖는 이유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고 봅니다.
 
  I hope I will not be considered guilty of filibustering if I ask you for a moment to go back with me to a lecture I heard in my staff college days.
  잠시 내가 참모대학시절에 들었던 강의를 회상코자 하오니, 바라건대 만찬 진행을 방해하는 죄를 짓는 행위로 간주하지는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The lecturer was pointing out that the principle characteristic of life is change. And since he was talking about war, he talked about the changing factors that the fighting man had to consider in his calculations as to war.
  당시 강사는 삶의 기본적인 특성은 변화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전쟁에 관한 얘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투하는 군인이 전쟁에서 고려해야만 하는 변화의 요인들에 대해 말했던 것입니다.
 
  He pointed out that there are constant changes in the means of transportation, in the weapons to be used, in methods of supply─everything that we do─and the rules that sometimes obtain among so-called civilized nations are subject to change.
  강사는 전쟁에서 수송수단, 사용무기, 물자공급방법 등,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항상 변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소위 문명국가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규칙들도 때로는 변한다고 지적했습니다.
 
  And then he pointed out that there is one factor that is completely unpredictable, completely unreliable and untrustworthy and yet never changes─only one─that is human nature.
  그 다음 강사는 완전히 예측불가능하고, 전혀 믿을 수도 신뢰할 수도 없지만, 결코 변하지 않는 요소가 단 하나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본성이라고 지적했습니다.
 
  In support of this thesis he pointed out that there is no history so old, no mythology so venerable that it does not glorify the qualities of courage or stamina or reliability or sacrifices and does not treat with contempt all of the opposites of intolerance, evil and selfishness.
  강사는 자신의 논지가 옳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즉, 아무리 장구한 역사와 오랜 신화를 들춰보아도 용기·정력·신뢰·희생정신을 찬양하지 않고, 편협성·사악함·이기주의를 경멸하지 않은 경우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So I think that in our feeling of pride in the Korean people and the presence here of their chief representative, we are merely responding to an age-old instinct of man to venerate these qualities that we call ennobling, that we believe are somewhat godlike in their quality.
  그러므로 나는 한국 국민에 대해, 그리고 오늘 여기 참석하신 그분들의 수석대표에게 우리가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이런 느낌을 갖는 것은 바로 인간의 고귀한 품성들과 그 품성 중에서 어느 정도 성스럽다고 믿어지는 것에 대해 존경하는 인간의 오랜 본성에 부응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And we have seen the Korean people through tribulation, through troubles, through enslavement under brutal attack, respond gallantly and with courage. It was a source of pride to Americans that with them as allies in the Western world we could join with Korea in seeing that the country should not be overrun by the invading hordes from the north.
  우리는 한국 국민이 시련 속에서, 고통 속에서, 야수적인 공격에 의한 노예상태에서, 용기를 가지고 용감하게 대항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서방세계의 동맹국으로서 미국인들이 한국인들과 손잡고, 한국을 북쪽의 침략무리들에게 전복되지 않도록 한국 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자랑거리의 하나입니다.
 
  And to the courage of that people, to its prosperity, and to its future happiness, I think we may drink a toast, doing so in the name of their representative here present, President Rhee.
  그러한 자랑스러운 국민의 용기를 위하여, 한국의 번영과 미래의 행복을 위하여, 여기 참석하신 한국 국민들의 대표이신 이 대통령과 함께 나는 축배를 제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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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ext of President Syngman Rhee’s Remarks
 이승만 대통령 연설문(1954.7.26)
 
   The honor which has been paid to Korea tonight is beyond any words of mine to express my feelings, and those of my people. I want you, my friends, to know that the hearts of Koreans who are here in our party and the hearts of all the Koreans in Korea are full of gratitude and thanks to you and the American Government and the American people.
  오늘 밤 한국을 위해 이같이 영광스러운 자리가 마련된 데 대해, 나 개인적으로나 우리 국민의 감회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찹니다. 친구들이여, 이 자리에 있는 우리 일행이나 한국에 있는 우리 국민의 가슴속에는 여러분과 미국 정부 그리고 미국 국민에게 고마움과 감사의 마음이 넘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합니다.
 
  I would like very much to tell something about what American aid and assistance have done, what the American fighting men have done in Korea, to save at least half of that war-torn peninsula. And I would like to say how much the American citizens, individually and collectively, have done in the way of relief work for Koreans.
  나는 미국의 원조와 지원이 한국에서 무엇을 이뤄 놓았는지, 그리고 미군 장병들이 전쟁으로 반쪽이 된 한반도의 절반이나마 구하기 위해서 행한 일에 대해 얘기하고 싶습니다. 또한 얼마나 많은 미국인들이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한국인들을 구호하는 사업에 기여했는지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But I can‘t. I don’t know how to start, or how to end. All that ask of you, my friends, is to know that we are grateful to you for everything you have done, and for everything that you are doing. We are grateful. And we will remain grateful.
  그러나 그럴 수가 없습니다.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어떻게 맺어야 할지 모르겠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이여, 단지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우리에게 베풀어준 모든 일에 대해서, 그리고 여러분들이 지금 우리를 위해 하고 모든 일에 우리가 고마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감사한 마음을 가질 것입니다.
 
  You talk about bravery of the Korean people. The Korean fighting men, yes. We thank God. We are willing to fight to the finish, as long as there are territories still occupied by a foreign Communist army.
  여러분은 한국 국민의 용감성에 대해 말들을 합니다. 한국군 장병들, 물론 용감합니다. 또한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우리는 우리 영토가 외래 공산군에게 점령되어 있는 한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And not only soldiers of the Army, Navy and Air Force but the people, the men and the women regardless of rank and file, are all one in that we cannot live unless we unify our country, unless the aggressive Communist armies are out of our land.
  육해공군의 장병들뿐만이 아니라, 남녀 또는 지위의 상하를 막론하고 나라를 통일하지 않으면, 공산침략군을 우리 땅에서 몰아내지 않으면 우리가 살 수 없다는 점에서 온 국민이 모두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That same spirit proves that the Korean people have an army known to be the biggest anti-Communist defensive force in Asia.
  바로 이런 정신이 한국인으로 하여금 아시아 최대의 반공 방위력을 자랑하는 군대를 갖도록 했습니다.
 
  Yes, I say that they are willing to die they are willing to give their lives. Why are these Koreans so brave? Why are they so willing to give up their lives? I will tell you why.
  그렇습니다. 한국군 장병들은 기꺼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기꺼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왜 그렇게 용감한 것일까요? 왜 그들은 목숨을 던질 각오가 되어 있을까요? 그 이유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합니다.
 
  Their country was occupied by an alien rule for nearly forty years. They have experienced how terrible it is to live under a foreign military rule. That gave them the conviction that unless we have our independence and our own government, our lives are not ours and we have no freedom, just as Patrick Henry said, he would rather die than live as a slave.
  그들은 거의 40년간 외부의 통치하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외래의 군국주의 통치하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경험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확신을 심어줬습니다. 독립하여 우리 정부를 갖지 않고는 우리 생명이 우리 것이 아니요, 자유를 가진 것도 아니라는 확신 말입니다. 바로 헨리 패트릭이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말한 것과 같이 말입니다.
 
  That is feeling there. But that is not what I mean to say. The Koreans must have a wonderful fighting spirit, they are wonderful soldiers, and all that. But without your aid, things would have been quite different. Fortunately, your fighting men came over there, trained them, helped them build up their morale and their spirit, and gave the weapons.
  한국의 분위기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한국인들은 놀라운 투쟁정신을 갖고 있으며, 모두가 놀라운 병사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원조가 없었다면, 사정은 매우 달라졌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여러분의 장병들이 한국에 와서 그들을 훈련시키고 사기와 정신을 앙양시켜 주었으며, 무기까지 주었습니다.
 
  Look what all that has done for them. When I go over to the front lines, they are all standing up, every soldier equipped from head to foot, all from America. This is what makes Korean boys strong fighting men.
  여러분이 준 이 모든 원조가 그들에게 어떤 성과를 이뤄놓았는지 보십시오. 내가 일선을 시찰할 때면 그들은 모두 기립해 나를 맞이합니다. 모든 장병들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두 미국 제품으로 무장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의 젊은이들을 강력한 병사로 만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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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차 韓美 정상회담 (6)
 
 대한민국 대통령, 미국 대통령과 첫 정상회담
 
  링컨 대통령이 사용하던 침대에서 1박을 한 李承晩 대통령 내외는 1954년 7월 27일 아침 9시에 아이젠하워 내외, 그리고 그의 손자 손녀들의 전송을 받으며 숙소를 영빈관(블레어 하우스)으로 옮기기 위해 백악관을 나섰다. 백악관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영빈관에 이 대통령 내외가 도착한 것은 9시 15분이었다. 30분간 휴식을 취한 이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다시 백악관으로 향했다. 역사상 최초의 韓美 정상회담에 임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감회는 남달랐다. 이 대통령은 꼭 50년 전인 1904년, 30세의 나이로 미국행 배를 탔다. 고종 황제의 밀서를 테오도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런 만남은 실현되지 못했고 이후 40년간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미국 대통령은 고사하고 각료급 인사와의 접촉도 힘들었다.
 
  그런데 이제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미국 대통령과 처음으로 공식 대좌를 하게 된 것이다. 사실, 李 대통령은 1952년 12월 아이젠하워와 한국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당시 대통령 당선인 신분이었고 둘 사이의 만남은 휴전에 대한 서로의 입장 차이 때문에 매끄럽지 못했다.
 
  그 후 휴전이 성립되고 제네바회의가 성과 없이 끝나자 李 대통령은 미국의 정치지도자들, 특히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할 말이 많았다. 이 대통령은 아이젠하워의 천진난만한 웃음 뒤에 가려진 이중적인 인격에 대해 신뢰하지 않고 있었다. 아이젠하워가 군인 출신의 정치인답지 않은 인기에 영합하는 유화주의자라는 사실을 이승만은 간파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7월 27일 오전 10시 백악관 회의실로 들어섰다. 그는 한편으로 역사적인 頂上회담을 한다는 흐뭇한 감회를 가졌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과 스타일이 너무 다르며 인상이 별로 좋지 않은 미국 대통령과 대좌해야 하는 불편한 심기를 감출 수 없었다.
 
  우리 측에서는 손원일 국방부장관, 백두진 경제조정관, 양유찬 대사,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이 이 대통령을 보좌했고, 미국 측에서는 아이젠하워를 비롯해 덜레스 국무장관, 윌슨 국방장관, 브리그스 주한미국대사, 타일러 우드 경제조정관 등이 참석했다.
 
  참고로 이 회담에 참석했던 손원일 국방부장관은 우리 해군을 창설해 행동과 정신으로 큰 가르침을 줬기에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의 홍보에 대한 식견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손원일 장관이 이승만 대통령을 수행해 미국 방문을 끝낸 지 2개월 만에 국방부는 ‘방미-리승만 대통령 연설집’(1954년 10월· 사진)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공보처에서 ‘President Syngman Rhee's Journey to America’와 ‘리승만 대통령 각하 訪美 수행기’를 발간하기 수개월 전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대한민국 대통령의 해외순방 기록을 최초로 남긴 것은 홍보를 관장하던 공보처가 아니라 국방부였다.
 
  이 책의 머리말에서 손원일 장관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한 목적은 우리 국민과 약소민족의 소리를 호소함으로써 양보에 양보를 거듭하는 자유 진영의 새로운 각성을 촉구함이었다. 이 연설문집을 간행하는 목적은 (李 대통령의 연설을 통해서) 우리 스스로의 목소리를 다시금 상기하며 조국 통일을 싸워서 얻어 내기 위해 더욱더 분발하자는 데 있다.”
 
  특히, ‘訪美-리승만 대통령 연설집’은 제목처럼 연설문과 사진만을 수록했지만 공보처에서 발간된 책자에는 보이지 않는 귀중한 자료인 ‘한미 공동성명’과 ‘중립감시위원회 철수 요구에 대한 성명서’가 국문과 영문으로 수록돼 있음을 알려 둔다.
 
  孫元一 장관이 이렇게 공보처보다 연설문집을 먼저 만든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단순히 대통령을 수행만 하지 않았다. 오히려 韓美 정상회담에서 한국 측 의제를 마련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등 대통령 방미에 관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었다.
 
  孫 장관은 회담에 앞서 1) 韓日 공동방위체제문제, 2) 미국의 對 한국 지원증가와 군사원조 및 민간원조 분리문제 등에 관한 의제를 마련하고, 3) 일본 문제에 있어서 미국과의 의견이 엇갈리더라도 회담을 결렬시켜서는 안 될 것이라고 李 대통령에게 보고했었다고 한다.
 
  韓美 양국 대표가 백악관 회의실의 타원형 테이블에 마주앉자 이승만 대통령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제네바회의가 예상대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앞으로 어떤 수를 써서라도 북한에 주둔하고 있는 100만 중공군을 철수시켜야 합니다. 늦기는 했지만, 미국의 유럽 중심 세계 전략을 이제라도 수정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지금은 아시아의 安保에 대한 배려가 절실한 시점입니다.”
 
  이렇게 미국의 세계 전략의 부당성을 지적한 李 대통령은 이어서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 및 경제원조를 역설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구체적으로 답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문제는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좋습니다”라는 말을 여러 차례 반복함으로써 李 대통령의 입장에 대해 유보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이어 화제가 韓日 국교정상화 문제로 넘어가자, 이승만 대통령은 크게 화를 내며 언성을 높였다.
 
  “한일회담의 일본 수석대표 구보다라는 자가 일본의 한국 통치가 유익했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당신네는 알고 있는가? 이런 성의 없는 자들과 어떻게 國交를 정상화하라는 말인가?”라고 신랄하게 따졌다.
 
  회의장의 분위기가 긴장되고 무거워지자 아이젠하워가 덜레스 국무장관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 덜레스는 즉시 구보다의 망언으로 한일회담이 결렬됐다고 보고했다.
 
  여기서 잠시 구보다 발언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1953년 10월 15일 개최된 제3차 한일회담 재산청구권분과위원회 제2차 회의에서 일본 측 수석대표였던 구보다 간이치의 발언은 예나 지금이나 문제가 되는 한일관계 전반에 관한 일본인들의 시각을 잘 대변하기 때문이다.
 
  이 회담에서 구보다의 발언은 다음과 같다.
 
  “한국 측에서 對日청구권을 주장한다면, 일본으로서도 대한청구권을 주장할 수 있다. 일본은 조선의 철도나 항만을 만들고 농지를 조성했으며, 대장성이 당시 매년 많은 돈을 들였는데 많게는 2000만 엔을 내놓은 해도 있었다. 이것들을 돌려달라고 주장해서 일본 측의 對韓청구권과 한국 측의 對日청구권과 상쇄하면 되지 않겠는가?”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내가 외교사 연구를 한 바에 따르면 당시 일본이 한국에 가지 않았다면 중국이나 러시아가 들어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세계정책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비판에 이어, 韓日 국교정상화에 대한 미국 측의 입장과 우리 측의 입장 간에 현격한 차이를 보인 제1차 한미 정상회담은 별다른 소득 없이 1시간 반 만에 폐회됐다. 역사적인 회담이었지만 회담에 임하는 兩國 간, 아니 양국 지도자 사이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거리감이 존재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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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덜레스 국무장관과의 회담 (7)
 
 反共보다 日에 대한 적대감이 더 큰 `李承晩'
 
 1954년 7월 27일 오전 11시 30분, 아이젠하워와의 역사적인 제1차 韓美 정상회담을 마친 이승만 대통령은 영빈관으로 돌아와 과거 워싱턴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만났던 방문객들을 사적으로 접견하며 오찬을 함께 했다. 오후 2시, 李 대통령은 美 국무부로 가서 덜레스(John Foster Dulles, 1888∼1959) 국무장관과 회담을 가졌다. 덜레스는 1953년 아이젠하워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국무장관으로 발탁돼 1959년 대장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아이젠하워로부터 가장 신임을 받는 각료였다. 그는 종교적인 신념에 따라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심을 가졌다. 상대의 의견이나 여론에 따르기보다는 상대를 설득시키고 여론을 주도해 나가는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국제법률가로서 조약의 가치에 대해 강한 신념을 가졌던 인물이다.
 
 덜레스 국무장관과의 회담
 
  특히 덜레스의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감은 그의 외교정책 근간을 이루는 것이었다. 미국은 소련의 어떠한 침략에 대해서도 ‘대량 핵 보복’으로 응수할 것이라고 한 그의 발언은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덜레스 장관은 그의 성격대로 이승만 대통령과의 회담에서도 일방적으로 미국의 세계전략, 對 한국정책을 설명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유진영의 집단 안전보장체제 확립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덜레스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중앙조약기구(CENTO), 중동에서의 대소련군사조약기구, 앤저스(ANZUS : 호주·뉴질랜드·미국 간의 공동방위기구) 등을 예로 들면서 동북아시아에도 이들과 유사한 기구를 만드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일본까지 포함시키는 태평양·아시아조약기구(PATO)를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덜레스의 얘기를 경청하던 이승만 대통령은 태평양·아시아조약기구 얘기를 듣고는 즉각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李 대통령은 일본이 개입하는 집단 안보체제는 극히 위험한 발상이라면서, 일본이 한국에 발을 다시 들이는 것은 한국의 독립을 위태롭게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승만은 덜레스보다도 더 반공적인 인물이었지만 그에게는 우리를 침탈해 근대화를 지연시켰던 일본에 대한 적대감이 反共보다 훨씬 더 우위에 있었다.
 
  6·25전쟁 초기에 우리의 戰勢가 불리하자 미군 고위인사들 간에 대만이나 일본군을 투입하면 어떻겠느냐는 견해가 대두됐었다. 이 소문을 들은 이승만 대통령은 노발대발하면서 “만일 일본 군인이 단 1명이라도 우리 땅에 발을 디디면 한국군은 북한과 중공군을 향하고 있던 총부리를 일본군에 돌리게 될 것”이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덜레스도 물론, 이승만 대통령의 이 같은 對일본 강경 자세를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얼른 말꼬리를 돌려 미국의 핵 우위를 강조하는 발언을 쏟아냈다. 그러나 李 대통령의 불편한 심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덜레스 국무장관 주최 만찬회
 
  이날 저녁 8시, 덜레스 국무장관 내외는 이승만 대통령 내외를 비롯한 우리 공식 수행원들을 위한 만찬을 베풀었다. 만찬회에는 우리 측 인사 이외에 미국 각료, 상하원 의원, 이승만 대통령과 각별한 친분관계에 있는 스펠만 추기경, 미군 장성, 언론사 발행인, 국무부 또는 국방부 고위관리 50여 명이 초대됐다.
 
  만찬 행사는 앤더슨 하우스(Anderson House)에서 개최됐다. 앤더슨 하우스는 워싱턴 중심부인 듀퐁 서클에 위치한 미국과 이탈리아의 건축양식이 조화를 이룬 고색창연한 건물이다. 이 건물은 신시내티협회(The Society of Cincinnati) 소유의 건물이며, 1905년 완공된 이후 주로 외교적인 사교 모임에 이용되고 있다. 1783년 미국 독립전쟁의 이상과 동지애를 기리기 위해 발족한 신시내티협회는 미국과 프랑스의 저명인사들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대표하는 사교 모임의 하나다.
 
  덜레스는 이날 오후 회의에서 서먹했던 이승만 대통령과의 관계를 만찬회에서 화해의 분위기로 일신하고자 나름대로 노력했다. 덜레스는 이승만 대통령을 참석자들에게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은 멘트를 덧붙였다.
 
  “연로하신 李 대통령께서 미국을 방문하시게 되면 어떻게 기쁘게 해 드릴까 나름대로 궁리를 했습니다. 좋은 방법이 없던 차에 문득 지난해 李 대통령께서 저희에게 보내 주신 반달곰 한 쌍을 떠올렸습니다. 현재 워싱턴 국립동물원에 있는 반달곰 2마리를 백악관에 데려다가 대통령님께 보여 드리면 좋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즉시 동물원에 확인해 봤으나 그간 너무 크게 자라서 데려올 수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무튼, 대통령님께서 이 곰들처럼 노경에 들어 더욱 원기 왕성하시니 기쁩니다.”
 
  이 말은 들은 李 대통령은 즉석에서 응수했다.
 
  “내가 기증한 곰들을 기억해 주니 고맙습니다. 그런데 어떡하죠? 나도 지금 동물원의 우리 안에 들어 있는 곰과 같이 행동의 자유가 없는 것을 느낄 때가 자주 있답니다.”
 
  李 대통령의 발언으로 장내에는 폭소가 터졌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자신의 방식대로 통일을 이루지 못하는 답답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이렇게 즉각 화답하는 기발한 지혜의 소유자였다. 이어서 이 대통령은 따끔한 말을 덧붙였다.
 
  “미국 정부와 정치 지도자들에게는 공산 침략자들에 대해 더욱 단호하고 적극적인 방침과 전략이 필요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반달곰 기증에 얽힌 사연
 
  이야기가 나온 김에 반달곰에 대한 사연을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1953년 초, 국군 장병들이 강원도에서 가슴에 하얀색 V자가 새겨진 반달곰 한 쌍을 포획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선물했다. 그는 수개월 곰을 키우다가 문득 주미 한국대사관으로 電文을 보냈다. 워싱턴 국립동물원장에게 곰 기증의사를 전달하고 결과를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워싱턴 국립동물원장 윌리엄 맨(William M. Mann, 1886∼1960) 박사는 李 대통령과 막역한 사이였다. 워싱턴 망명 시절 이승만은 자신이 살던 집 바로 인근에 있던 동물원을 자주 찾았고, 맨 박사와 사귀었다. 社交의 달인으로서의 이승만의 면모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1년 후 나타난다.
 
 1949년, 우리 어부로부터 수명이 수백 년이 넘는 거북을 선물 받은 이 대통령은 주미 한국대사관을 통해 맨 박사에게 그 사육 방법을 물어봤다. 그런데 그렇게 거대한 거북이는 사육할 방법이 없다는 말을 듣고 거북이를 방류한 적이 있다.
 
  이후 4년 만에 다시 이승만은 맨 박사에게 반달곰 기증의사를 전달했고, 맨 박사는 이를 쾌히 수락했다. 1953년 6월, 이승만은 사랑했던 곰들을 워싱턴으로 보냈다. (1953년 6월 23일 ‘대한뉴스’) 곰을 미국에 데리고 간 인물은 당시 대통령 경호실장 곽영주(1924∼1961, 후일, 부정선거 주동자로 교수형에 처해졌음)였다. 미국 언론은 콜라를 잘 마시는 2마리의 반달곰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이 곰을 미국에 보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그는 곰의 가슴에 새겨진 V자를 강조해 한국 국민 결사항전의 의지를 미국인들에게 과시하고 싶었다고 측근들에게 털어놨다. 하지만, 이승만이 무엇을 의도했든 한 쌍의 반달곰이 워싱턴 동물원에 들어간 지 꼭 1개월 만에 6·25전쟁은 휴전을 맞게 됐다.


 

 

 

 

 

 


1954년 李承晩 대통령의 미국 여행 이야기(中)
 
 
 미국 대통령을 향하여 "저런 고얀 사람이 있나"
이현표(국방일보)   
 
  李承晩 대통령의 미국 여행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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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박사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었는지를 대한민국의 젊은 세대가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은 민족적 비극입니다. 李 대통령이 초대 대통령으로 재임(1948-1960)하던 기간 중 정치적 독재에 흐르고 장기집권 논란을 불러일으킨 행적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평생을 바쳐서 日帝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대한민국 건국을 이끌었으며 이 땅에 민주주의의 나무를 심고 공산주의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 낸 그의 위대한 업적은, 장공속죄(將功贖罪)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그의 과실(過失)을 가지고 시야비야(是也非也)하는 것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더구나, 이 나라의 젊은이들이 그를 상대로 심지어 ‘친일(親日)▪친미(親美)’의 누명을 씌우는 인격살인(人格殺人)에 동참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역사에 대한 중대한 왜곡이고 모독입니다.
 
  어째서 왜곡이고 모독인가를 밝혀 주는 귀중한 글을 上/中/下의 세 토막으로 나누어 여기 소개합니다. 이 감동적인 글은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을 역임한 이현표 선생이 1954년7월26일부터 8월13일까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국빈방문한 80세의 노(老) 대통령이 19일간에 걸쳐 전개한 외교활동을 엮어서 34회에 걸쳐서 <국방일보>에 연재한 내용입니다. 특히 이 글은 방미 기간 중 李 대통령이 행했던 모든 연설문을 담고 있는 소중한 사료(史料)이기도 합니다. 모쪼록 많은 분들이 이 글을 읽고 그 동안 사장(死藏)되었던 역사적 진실에 눈을 뜨고 왜곡된 사관(史觀)을 교정(矯正)하는 기회로 삼기를 바랍니다. 특히 초▪중▪고등학교 선생님들이 이 글을 읽고 학생들이 읽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기를 바라 마지 않습니다. 2012년1월1일 李東馥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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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美 議會 연설 ① (8)
 
 美 심장에 `자유를 향한 불굴의 투쟁' 刻印
 
 외국 국가원수의 미국 국빈방문 시 중요한 일정으로는 정상회담, 국빈만찬, 美 의회연설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의 경우 의회연설에 남다른 집착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인기에 영합하고 유화적인 아이젠하워와의 정상회담을 통해서는 결코 자신이 원하는 한반도의 휴전, 동북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축출을 기대할 수 없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의회연설에는 영어 통역이 필요 없었다. 그는 미국 최고 지성인 못지않은 영어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또 그는 망명 시절부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연설문은 자신의 타이프라이터로 직접 작성해 왔다. 따라서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의회연설 연설문은 어느 누구와도 협의하지 않고, 직접 타이핑해 준비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는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라는 책에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해 놓았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 도착한 후, 내가 처음으로 그와 직접 대화를 나눈 것은 (의회연설 하루 전인) 1954년 7월 27일 오후였다. 연설문이 몹시 궁금해 나는 이 대통령에게 초안을 주면 검토해 드리겠다고 제안했다. 마침 그가 앉은 의자 옆의 바닥에 서류 가방이 놓여 있기에 나는 그곳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러자 이 대통령은 재빨리 가방 위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채근했다. ‘제발 훑어보게 해 주십시오. 다시 쓰려는 것이 아니라, 제가 혹시 작은 부분이라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아니, 안 됩니다.’ 이 대통령은 단호하게 말했다. ‘싫소이다. 난 휴전에 대한 나 자신의 생각을 말하려고 미국에 온 것입니다. 난 내 나름대로의 생각을 말하렵니다. 당신은 내가 할퀼까 봐 내 손발톱을 손질하고 싶은 모양인데, 그렇게는 안 되오.’ 그는 서류 가방을 집어 들어 가슴에 끌어안으며 말했다. ‘의회에서의 담화는 나 자신의 것입니다. 거기에는 내가 아주 특별히 하고 싶은 말이 담겨 있으며 나는 내가 쓴 방식대로 그 말을 정확하게 전달하려고 합니다.’ 나는 망설였다가 다시 한번 연설 초안을 보려고 시도했으나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美 의회연설 당일인 7월 28일 오전, 다른 일정을 일절 소화하지 않은 채 연설문을 가다듬고 마음을 추슬렀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美 의회에서 최초로 연설한다는 역사적인 의미와 함께 누구와도 사전협의 없이 자신이 준비한 영어 연설이 과연 미 상하원 의원들은 물론, 언론 등 미국 여론에 어떤 반향을 일으키게 될지 본인으로서도 무척 초조하고 궁금했다.
 
  7월 28일 오후, 워싱턴의 미 의사당 대회의실은 분주했다. 다수의 사진기·조명등이 설치되고 상하원 의원 및 이날 행사에 특별히 초청받은 각료, 대법원장 및 판사, 외교사절들을 위한 의자가 추가로 반입됐다.
 
  미국과 전 세계의 기자들을 위해 2층에 취재석이 마련됐고, 오후 4시가 조금 넘어 이 대통령의 연설문이 등사(당시는 복사기가 발명되긴 했으나 널리 실용되지 못하던 시절이었음)돼 기자들에게 배포됐다. 방청석은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고 특별 입장권을 소지한 방청객들만 좌석이 마련됐다.
 
  이승만 대통령이 대회의실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 32분이었다. 윌리엄 노울랜드(William F. Knowland, 1908∼1974) 미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의 안내로 이 대통령이 회의장에 들어서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때 의정 단상에 앉아 있던 닉슨 부통령 겸 상원의장, 조셉 마틴(Joseph William Martin, Jr. 1884∼1964) 하원의장이 일어섰고, 마틴이 의사봉을 세 번 두들기자 회의실 내의 모두가 기립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이윽고 李 대통령이 연단으로 안내됐으며 마틴 의장이 “미국 국민이 진심으로 존경하는 자유를 위한 불굴의 투쟁가를 여러분에게 소개하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라는 소개말을 건네자 다시 장내에 열띤 환호의 분위기가 조성됐다.
 
  장내가 잠잠해지자 이 대통령은 마틴에게 간단히 감사를 표하고 나지막한 소리로 연설을 시작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이 역사적인 영문 연설을 번역해 소개하고자 한다.
 
  “하원의장, 상원의장, 상하 양원 의원 여러분, 신사 숙녀 여러분!
 
  저명한 미국 시민들이 모인 이 존엄한 자리에서 연설할 기회를 얻게 됐음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유서 깊은 의사당에 참석해 주심으로써 내게 커다란 영예를 베풀어 줬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으로 여러분의 후의에 보답하려고 합니다. 바로 내 마음속에 간직된 것을 여러분에게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입니다. 그것은 미국의 민주주의와 자유 정부의 위대한 전통 일부이며, 이 전통이야말로 내가 반세기 이상이나 신봉해 온 것이기도 합니다.
 
  나도 여러분처럼 워싱턴·제퍼슨·링컨에게서 영감을 받아 왔습니다. 여러분처럼 나도 여러분의 빛나는 선조들이 全 인류를 위해 탐구했던 자유를 수호하고 보존하려고 스스로 맹세해 온 사람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여러분과 미국 국민이 행한 일에 대해 한국과 한국 국민을 대표해 끝없는 감사의 뜻을 전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고립무원의 나라를 파멸로부터 구출해 줬습니다. 그 순간, 진정한 집단 안전보장의 횃불은 전례 없이 찬란히 빛났습니다. 우리 전선의 방어를 위해서, 또는 피란민과 기타 이재민들의 구호를 위해서 여러분이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그리고 다른 방법으로 보내 준 원조는 그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고마움의 빚입니다.
 
  우리는 또한 한국 파병의 중대 결정을 내림으로써 우리를 바다 가운데로 밀려나지 않도록 구원해 준 트루먼 前 대통령, 그리고 당시는 대통령 당선인으로서 지금은 미국 행정수반으로 敵의 위협을 잘 이해하고 우리를 원조해 준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많은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40년간 일본의 잔혹한 점령하에 있던 한국에 왔었습니다. 우리 국토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던 외국 친구들의 수는 극히 적었습니다. 그러나 역사상 처음으로 이러한 곳에 여러분에 의해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위대한 인물이 왔습니다. 여러분의 군대만이 우리의 자유를 회복해 주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한국인을 돕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아내려고 했습니다.
 
  나는 이 기회에 6·25전쟁에 참전한 미군의 어머니들에게 우리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감사를 표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장 암울한 처지에 놓여 있던 시기에 그들은 미국 육·해·공군 및 해병대에서 복무하는 자식, 남편, 형제들을 한국으로 보내 줬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는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계곡과 산으로부터 한미 양국 군인들의 영혼이 하나님에게 함께 올라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마음속에 소중히 기억하듯이, 전능하신 하나님도 그들을 어여삐 품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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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美 議會 연설 ② (9)
 
 “自由 守護” = “共産 打倒” 美國의 腦에 새기다
 
 트루먼과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6·25전쟁 지원에 대한 감사를 언급한 데 이어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 지휘관과 미군의 헌신적인 노력에 대한 찬사도 잊지 않았다.
 
  “여러분의 거룩한 애국 장병들은 맥아더, 딘, 워커, 아몬드, 리지웨이, 클라크, 헐, 테일러와 같은 장군들의 훌륭한 지휘를 받았습니다. 그 다음, 1951년에도 역시 훌륭한 밴플리트 장군이 제8군을 지휘하기 위해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한국 청년들의 군인다운 용감한 정신, 그리고 가정과 조국을 위해 싸울 테니 총을 달라는 그들의 열화와 같은 요구를 발견한 사람이 바로 밴플리트 장군이었습니다. 그는 큰 어려움 없이 한국 청년들을 제주도ㆍ광주ㆍ논산ㆍ기타 여러 곳에 모으고, 주한 미 군사 고문단의 장교들을 보내 주야로 이들을 훈련시켰습니다. 수개월도 지나지 않아 한국 청년들은 전선으로 보내졌으며 경이로운 성과를 올렸습니다.오늘날 이렇게 훈련받은 군대는 아시아를 통틀어 최강의 반공 군대로 알려졌습니다. 이 병력이 전체 전선의 3분의 2 이상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밴플리트 장군은 한국에서 바로 대한민국 군대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미국 병사들은 한국 육군을 강인한 ‘ROKs’라고 부릅니다. 이제 만일 미국이 이러한 육군 병력을 계속 증강시켜 주고, 공·해군력도 적절한 비율로 함께 증강시킬 수 있도록 원조해 준다면, 한국의 전쟁터에서 미국 병사들이 필요 없게 될 것임을 나는 여러분에게 장담할 수 있습니다.”
 
  이쯤에서 서론을 끝낸 李 대통령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본론에 들어갔다. 나지막하던 그의 목소리는 강하고 생기가 돌았으며 그는 웅변가로 돌변했다.
 
  “수많은 미국인들이 이렇게 한반도에서 大義를 위해 그들이 가졌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승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그 전투는 아직도 승리를 쟁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폭정의 군대는 아직도 全 세계에서 주도권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한국 전선에서는 현명치 못한 휴전에 의해 포화가 잠시 중단되고 일시적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적은 이 기회를 무력을 증강시키는 데 이용하고 있습니다. 제네바 회담도 예견된 바와 같이 하등의 성과 없이 끝났으니, 이제 휴전 종결을 선언할 적당한 시기가 됐습니다.
 
  우리나라의 북반부는 소련이 조종하는 100만 명의 중국인 노예들에 의해서 점령·지배되고 있습니다. 적의 비행기들은 그곳에서 10분 이내에 우리 국회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서울이 워싱턴보다 더 가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 크렘린 내 음모자들의 최고 목표는 미국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련의 수소폭탄은 파괴된 우리나라 도시 위에 떨어지기보다는 오히려 미국의 대도시에 먼저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것을 막아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미국과 그 우방들이 소련의 공장들에 대해서 지금 폭탄을 투하해야만 하겠습니까? 아니면 도살장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거세된 소처럼 그저 서 있어야만 하겠습니까?
 
  全 세계의 자유 국민들이 생존할 수 있는─우리 한국인들이 알고 있는─길은 오직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평화가 없을 때에 소망스러운 눈빛으로 평화를 기다리기만 하는 길이 아니며, 어떻게든지 소련 정부로 하여금 그 극악무도한 세계정복 노력을 포기하도록 설득시킬 수 있다고 믿는 길도 아닙니다. 유일한 방법은 악의 힘에 유화적이거나 굽히지 말고, 세계의 세력 균형을 공산주의자들에게 불리하게 움직여 설사 그들이 섬멸 무기를 소유하더라도 감히 그것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한국 전선은 우리가 승리하고자 하는 전쟁─아시아를 위한 전쟁, 세계를 위한 전쟁, 지구상의 자유를 위한 전쟁─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은 여러분에게 20개 사단을 무장시켜 주고, 또 다른 20개 사단을 편성할 수 있는 병력을 충원할 수 있는 군사원조를 요청했습니다. 150만 명의 한국 청년들의 최고의 목표는 인간의 자유, 그들의 명예, 조국을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 군인들의 용감성은 전투에서 증명됐으며, 밴플리트 장군이 한국 병사들은 세계의 그 어느 군인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언급한 이래 미국인 중에서 이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대만의 중화민국 정부 역시 여러분에게 무장 병력 63만 명과 예비 병력을 위한 군사원조를 추가로 요청했습니다. 중공은 그들을 반대하는 150만 명을 학살했지만, 아직도 수많은 자유중국 게릴라들이 중국 본토 내에서 투쟁하고 있습니다. 중공군은 250만이라는 병력을 가지고 있으나, 군의 충성은 결코 믿을 만한 것이 못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국에서 포로가 된 1만4369명의 중공군이 대만으로 가겠다고 한 반면, 중공으로 귀환을 택한 자는 불과 220명이었다는 사실이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중공의 경제 상태는 극도로 취약합니다. 미국 해군에 의해 중국 해안이 봉쇄된다면 중공의 교통망은 큰 혼란을 겪게 될 것입니다. 중공 정권에 대한 반격의 성공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미국 해군과 공군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미국 보병은 필요치 않을 것이라고 나는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중국 본토가 자유 진영의 편으로 환원된다면, 한국 및 인도차이나 전쟁은 자동적으로 승리의 귀결을 맞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력 균형이 소련에게 극히 불리하게 기울어져 소련은 감히 미국과의 전쟁 모험을 시도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중국을 다시 찾지 못하는 한, 자유 진영의 궁극적 승리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아는 소련 정부가 중국 본토를 차지하기 위한 전투에 그 지상군과 공군을 투입하지 않을까요? 아마 투입할 것입니다. 그러나 소련의 지상군 투입은 오히려 자유진영을 위해 아주 잘된 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소련이 수소폭탄을 대량 생산하기 전에 그 제조 중심지들을 미 공군이 파괴하는 것을 정당화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세계가 지혜와 용기만 있다면 충분히 공산주의를 타도할 수 있다고 말하고 결론으로 돌입했다.
 
  “나는 이런 내 주장이 강경정책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유화적이면 노예로 만들어버리는 힘든 세계, 끔찍한 세계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인류 문명의 존립을 가름할 운명이 바야흐로 우리의 최고결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 용기를 가지고 우리의 이상과 원칙을 수호하기 위해 궐기합시다. 이러한 이상과 원칙들은 바로 미국 독립의 아버지들인 조지 워싱턴과 토마스 제퍼슨에 의해서 선양됐고, 그 후 절반의 자유, 절반의 노예 상태로는 생존할 수 없다며 연방 수호를 위한 투쟁을 주저하지 않았던 위대한 해방주의자 에이브러햄 링컨에 의해서 다시 주창됐습니다.
 
  친구들이여, 우리는 반쪽짜리 공산주의, 반쪽짜리 민주주의 상태의 세계에서는 평화가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시아의 자유를 안정시키기 위한 여러분의 중대한 결정이 지금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결정은 유럽ㆍ아프리카, 그리고 아메리카에서의 세계 공산주의 문제를 자동적으로 해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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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美 議會 연설 波紋 (10)
 
 “위대한 애국자” vs “세계대전 경계” 甲論乙駁
 
 이승만 대통령의 의회연설은 대한민국 대통령이 美 의회에서 최초로 연설을 했다는 역사적인 성격을 갖는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영어로 작성해 우리말이 아니라 영어로 연설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더구나 연설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론·본론·결론이 분명한 매우 설득력이 있는 명연설로 보인다. 그런데 근간에 국내에서 간행된 각종 저술에 보면, 李承晩 대통령이 이 연설을 한 다음 자신의 생애에서 최악의 연설이었다고 후회했다는 내용 일색이다. 이런 기록들은 필자의 고찰에 의하면 두 사람의 회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첫째는 李 대통령의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교수, 둘째는 한표욱 당시 주미 한국대사관 정무공사의 기록이다.
  올리버는 그의 저술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1978)에서 다음과 같이 당시를 회고했다. “그것은 대단한 연설이었으며,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내가 기자들에게 배포된 연설문 등사본에 계산한 바에 따르면 박수갈채로 연설이 33차례나 중단됐다. (중략) 연설은 매우 흥미진진했으며, 기본적으로 정당한 주장을 했다고 할 수도 있다. 만일 개인이 그런 연설을 했다면, 아무도 나무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 나라의 국가원수가 다른 나라의 의회에서 행할 연설은 아니었다.” “이 사실을 이 대통령도 인식하게 됐다. 다음에 내가 서울에 갔을 때, 그의 집무실에 들어서자 그는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올리버 박사, 내가 의회에서 했던 연설은 일생 동안 저지른 최악의 실수였네.” 올리버 교수는 이런 내용과 함께 이 연설이 향후 한미관계에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했으며, 미국의 위정자들이 이 대통령을 신뢰하지 않고 그의 후계에 대해서 공공연히 언급하게 됐다고 기술하고 있다. (책자 449∼450쪽)
  한편 한표욱 공사는 그의 저술 ‘이승만과 한미외교’(1996)에서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54년 7월 29일) 새벽 2시 반쯤 항규면 비서관이 나의 방을 노크해서 잠을 깼다. 李 대통령이 급히 찾는다는 것이었다. (중략) 대통령 방으로 갔더니, 첫눈에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었다. 李 대통령이 라디오를 가리키며, 방금 방송에서 내일 아침 뉴욕타임스 지의 사설을 읽는 것을 들었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가 李 대통령의 의회연설을 비난한 것이다. 사설 내용은 李 대통령의 연설이 미국 사람들의 무드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쟁을 충동하고 권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책자 227∼228쪽) 이승만 대통령이 과연 올리버 박사나 한 공사의 회고대로 의회연설을 일생일대의 최대 실수로 생각하고 있었을까? 필자는 올리버와 한 공사의 진술을 존중한다. 그런데 그들의 진술이 사실인지의 여부에는 회의적이다.  나름대로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 그들의 회고는 의회연설이 행해진 지 24년, 42년 후에 이뤄졌다. 그런데 당시 대한민국 공보처와 국방부는 이승만 대통령의 의회연설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이 대통령 각하 방미수행기’(1955), ‘President Syngman Rhee’s Journey to America’(1955), ‘Handbook of Korea’(1958ㆍ이상 공보처), ‘방미 이승만 대통령 연설집’(1954ㆍ국방부)에 실린 이 대통령의 의회연설문은 무엇인가?
 
 李 대통령이 그렇게 후회하는 연설을 정부기관에서 대통령의 재가 없이 대대적으로 홍보할 수 있었을까?  둘째, 李 대통령이 뉴욕타임스의 부정적인 사설을 라디오에서 들었다는 韓 공사의 회고도 의문이다. 우선 이승만 대통령의 의회연설은 1954년 7월 28일 오후 5시가 넘어서 끝났다. 당시의 신문 발행 시스템 아래에서 사실보도라면 몰라도 부정적인 사설이 실렸다는 것이 필자에게는 궁금했다. 그래서 당일자 뉴욕타임스를 검색해 보았으나 문제의 사설은 찾을 수 없었다. 반면에 ‘Our Stand on Syngman Rhee(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내용의 독자투고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축출하려는 자신의 목표를 우리에게 상기시켰다. 이번 이 대통령에 대한 우리의 환대를 우리의 동맹국이나 적들이 침략행위를 묵시적으로 승인하는 것으로 오해할 것이 틀림없다. 현재의 이데올로기 경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우리는 이 대통령의 방미기간 중에 침략자 혹은 희생자가 공산주의자인지에 상관없이 침략에는 반대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만 한다.” 이 글은 델라웨어 대학의 펠릭스 오펜하임(Felix Oppenheim) 조교수가 기고한 글로 작성일자는 7월 27일로 돼 있다. 즉, 이틀 전에 쓰인 글이 7월 29일자 뉴욕타임스에 실린 것이다. 오펜하임은 李 대통령의 의회연설을 듣고 글을 쓴 것이 아니라, 李 대통령의 7월 26일 도착 성명이든, 아니면 다른 발언을 보고 독자투고를 한 것이다. 그리고 당시 이 대통령이 라디오에서 들었다는 뉴욕타임스의 기사는 사설이 아니라, 논평란(Op-ed page:opposite the editorial pageㆍ사설은 보통 논설위원의 글이 무기명으로 실리는데 반해, 논평은 외부인사의 글이 기명으로 소개되며 둘은 대개 같은 페이지에 실림)에 소개된 오펜하임의 독자투고로 보인다.  
 
 이미 소개했듯이 이 대통령은 홍보에 남다른 열정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런 열정이 자칫 실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의회연설의 사례에서 나타난다. 이 대통령은 다양한 뉴스를 접하지 못하고, 7월 28일 밤 라디오 방송을 듣고 당황했음에 틀림없다. 그는 뉴욕타임스의 사설이 아니라 독자투고에 놀랐던 것이다. 韓 공사의 말을 빌자면, 李 대통령이 3∼4시간의 수면을 취하고 7월 30일로 예정된 미국 외교기자클럽 연설을 수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7월 29일 아침 9시에 워싱턴 생가를 방문하는 등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했기 때문에 건강이 걱정스러웠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필자는 대통령ㆍ수행원ㆍ대사관 직원들이 조금만 침착하게 언론보도를 체크했었더라면 그렇게까지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고 믿는다. 사실 李 대통령의 의회연설을 가장 비중 있게 다룬 것은 뉴욕타임스가 아니라, 7월 29일자 워싱턴포스트의 1면과 4면에 실린 장문의 기사였다. ‘이 대통령, 미국의 지원으로 공산주의자들과 전쟁 요구(Rhee Calls for War on Reds Aided by U.S.)’라는 제목의 기사는 물론 쇼킹한 뉴스를 전했지만, 객관적이었다. “이 대통령은 어제 상하원합동회의에서 미국의 해군과 공군의 지원하에 한국과 중화민국 군대가 중공군을 공격하도록 요구했다. 그는 매우 솔직한 어조로 그러한 전쟁이 ‘아마’ 소련으로 하여금 중공을 돕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소련이 수소폭탄으로 무장하기 전에 미 공군이 그 생산시설을 파괴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세계로서는 썩 좋은 일이라고 천명했다.” “이 대통령은 연설하기 전과 하는 동안, 그리고 한 후에 열렬한 갈채를 받았다.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 아시아에서의 대전쟁을 시작하자는 그의 제안에 대해 청중들은 완전히 몰입했으나, 모두의 말문을 닫고 조용함으로 일관했다. 의원들은 이 대통령에 대해 애국자이자 정치 지도자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나, 79세의 노 정치인이 23분간 무기에 호소하자는 데 대해서는 큰 경계심을 피력했다.”  “하원의장 조셉 마틴은 전쟁 제안의 대화조차 거부했으며, 알렉산더 윌리 상원의원은 ‘조국을 위해서 위대한 연설을 행한 위대한 애국자의 말을 들었다’고 논평했다. 해리 잭슨 상원의원은 ‘이 대통령의 제한적인 예방전쟁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으나, 브라이언 도른 상원의원은 ‘조만간 우리는 공산주의자들과 싸워야 한다. 그들은 날로 강해지고 있다’며 이 대통령을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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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젠하워 대통령 부부를 위한 만찬 (11)
 
 호텔로 아이크 초청 - 貧國의 아버지는 당당했다
 
  의회연설을 마친 이승만 대통령은 그날 저녁에는 아이젠하워 내외를 위해 만찬을 베풀었다. 통상 國賓방문의 경우, 초청 국가의 원수가 먼저 만찬을 베풀고, 다음으로 방문국가 원수가 화답하는 만찬을 베푼다. 李 대통령의 만찬은 7월 26일 도착 당일 저녁,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베푼 국빈만찬에 대한 답례였다. 만찬회는 7월 28일 저녁 8시, 최고급의 메이플라워 호텔에서 개최됐다. 백악관 인근에 위치한 이 호텔은 1925년에 최초의 영업을 시작한 후 오늘까지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가장 오래 운영되고 있으며, 가장 화려한 호텔이기도 하다. 49년부터 52년까지 백악관이 개축할 때, 트루먼 대통령이 이곳에서 잠시 집무를 보기도 할 정도로 유명세를 탔던 곳이다. 이 호텔은 98년 대규모 증축을 하고 이름도 르네상스 메이플라워 호텔로 바뀌었다.
 
  참고로 이 호텔은 독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몇 가지 에피소드로도 유명하다. 우선 케네디 대통령(1917∼63ㆍ대통령 집무기간:1961∼63)의 여자로 알려진 쥬디스 캠벨 엑스너(1934∼99ㆍ가수 프랭크 시나트라의 소개로 상원의원이었던 케네디를 만나, 그가 대통령이 된 후에도 계속 관계를 유지했던 여인)가 이 호텔에 장기간 투숙하며, 케네디 부인 재클린이 백악관을 비우면 백악관에 들어가 케네디와 정사를 벌였다.
 
  또한 모니카 르윈스키가 95년부터 97년까지 빌 클린턴 대통령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을 때, 이 호텔에서 투숙했다. 2008년에는 뉴욕 주지사가 매춘부와 이 호텔에 투숙했다가 사임했다.
 
  필자는 워싱턴 근무시절, 여러 차례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곤 했다. 동방의 신사였던 이승만 대통령은 이 호텔이 앞으로 이 같은 섹스 스캔들로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 것이라는 것을 예견했더라면, 이곳을 만찬 장소로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 말이다.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저녁 7시 45분, 아이젠하워 대통령 내외가 도착하자 이 대통령은 아이젠하워 부인을, 프란체스카 여사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안내해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만찬회에는 70여 명의 한미 양국 지도급 인사가 참석했다. 미국의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과 다른 각료들, 군과 관료, 의원들이 양유찬 주미 한국대사 및 우리 일행들과 자리를 함께했다.
 
  연회장의 말 편자와 같은 U자 모양의 테이블에 70명의 손님들이 자리를 잡았다. 연회장은 거대한 양치식물과 야자수들, 태극기와 성조기, 그리고 다양한 색깔의 꽃들로 장식돼 있었다.
 
  이 대통령은 축배를 제안하며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신사숙녀 여러분, 나는 긴 연설을 하지 않겠습니다. 물론 미국 대통령을 아무리 누추하더라도 우리 소유의 건물인 대사관으로 초대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리의 절친한 친구들을 이렇게 많이 초대하기에는 건물이 너무 협소해 이곳 메이플라워 호텔에 만찬회를 마련했습니다. 이 호텔이 오늘 하룻밤은 한국대사관입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당선된 후 취임식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그 춥고 모든 것이 얼어붙은 날씨에 공산주의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날뛰는 전쟁 중에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대통령은 한국을 돕기 위해 1만 마일 이상을 날아왔습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 한국 국민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같은 일을 해준 우리의 위대한 친구이자 위대한 대통령에게 자그마한 성의를 표시해주고 싶었습니다. 마침 오늘 메이플라워 호텔을 우리 대사관으로 활용해서 조촐하지만, 그분 내외와 우리의 친한 벗들을 초대해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을 무척 기쁘게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이 자리를 빛내 주셔서 우리는 행복하기 그지없습니다.
 
  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내외가 어디를 가나 한국에 대한 관심을 보인 것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나의 친구 아이젠하워 대통령 내외분, 두 분이 오늘 밤 이 자리에 왕림해 주시고 우리를 격려해주신 데 대해 다시 감사드립니다. 잠시 워싱턴에 도착해서 내 마음속에 일어난 감회를 표현해야겠습니다. 어디에서건 미국 국민들은 우리를 진심으로 맞아주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거리에서, 그리고 우리가 어디를 가나 그들은 손을 흔들며 즉시 모여들었습니다. 이는 실로 감동적인 광경이었으며, 우리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가슴 벅찬 격려와 희망을 듬뿍 안고 이곳을 떠날 것입니다. 미국 정부뿐만 아니라, 미국 국민 모두가 우리의 친구로구나 하는 느낌을 갖고 말입니다. 오늘 저녁, 내가 이 연회장 입구에 서 있을 때, 누군가 내게 다가와 이렇게 바쁘니 정말 피곤하겠다고 말을 건넸습니다. 나는 즉시 아니라고 대답했답니다. 친구들을 만나는 것은 피곤하지 않은 법입니다. 오히려 여러분들이 우리 때문에 피곤하지나 않을까 우려돼 우리가 먼저 자리를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신사숙녀 여러분,
 
  나는 현 미국 정부의 건투와 성공을 위해, 미국의 번영을 위해, 지구상의 평화를 위해, 그리고 아이젠하워 대통령 내외를 위해 축배를 제안하고자 합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평화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 평화를 어떻게 이루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숙제입니다. 나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지구상에 평화를 내려 주실 것을 기도하고 희망할 따름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장황한 연설을 하지 않기로 약속했습니다. 자, 신사숙녀 여러분, 아이젠하워 대통령 내외의 건강과 성공을 위해서 건배합시다.”
 
  이어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축배를 제의하면서 말했다.
 
  “때로는 상호 간에 의견 차이가 있을지라도 자유를 사랑하고 자유를 위해 싸울 준비가 돼 있는 국민들은, 때로는 서로 간에 견해상의 차이를 보이지만 진정한 형제요, 참된 전우요, 함께 희생할 준비가 돼 있는 전사들입니다.
 
  우리가 이 대통령의 방미를 계기로 논의하려는 것은 단지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방법과 수단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란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늘 예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에 의해 여실히 증명되듯이 우리가 목표를 잃지 않고, 모든 자유국가의 초석이 되는 기본정신을 잊지 않는다면, 결국 독재는 사라지고 자유만이 존립하게 될 것입니다.”
 
  양국 지도자의 연설에 이어 김자경(1917∼99ㆍ소프라노 가수로 많은 성악가를 길러낸 교육자로 평생을 살았던 한국 오페라계의 산증인)과 황재경(1906∼84ㆍ독립운동가, 목사, 미국의 소리 방송 아나운서, 국악인, 만담가, 톱 연주자) 등의 연주와 전통 무용이 펼쳐져 행사의 즐거움을 더했다. 만찬회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진행돼 밤 11시에 끝났다. 이 대통령 내외는 아이젠하워 내외와 호텔 현관까지 함께 가 전송한 후 숙소인 영빈관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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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싱턴에서의 행보 (12)
 
 조지 워싱턴 사적지 마운트 버논 방문
 
  7월 29일 아침 9시 20분, 이승만 대통령은 워싱턴 인근의 관광명소 마운트 버논(Mount Vernon)을 찾았다. 워싱턴DC에서 남쪽으로 24㎞ 거리에 위치한 이곳에는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살던 저택과 농장, 그리고 그가 묻힌 곳이 있다.
 
  포토맥 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명당에 자리 잡은 조지 워싱턴 유저(遺邸)는 외국 원수들이 워싱턴을 방문하면 의례적으로 방문하는 곳이며, 일반 관광명소로도 소문 난 곳이다.
 
  조지 워싱턴을 누구보다 흠모했던 이승만은 망명 시절 이곳을 여러 번 방문했고, 내력을 훤히 알고 있었다. 그곳 관리인의 건물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저택 내부를 둘러본 후, 이 대통령은 수행하는 한미 양국 관리들과 군 지휘관들을 건물 밖 잔디로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의 옛 경험담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이곳을 처음 방문한 것은 1905년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옆에 있는 미국 기자에게 말했다. “그때는 당신이 태어나기 전일 것입니다. 당시 나는 조지 워싱턴 대학의 학생이었습니다.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조국,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때였지요.” 그리고 다시 일행들에게 포토맥 강의 굽은 지점을 손으로 가리키며 과거를 회상했다. “저녁에 저곳을 지나는 배 위에 달빛이 근사하게 비추던 것을 보면서 고향생각이 절실했었답니다.”
 
  이어 李 대통령은 일행을 정원으로 인도해 미리 준비된 장소에 서울에서부터 가져온 붉은색 단풍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그곳 관광명소의 책임자에게 경고조로 말했다.
 
  “이 나무가 자라거든 ‘일본 단풍’이라는 푯말을 붙이지 마시오. 이 단풍은 난쟁이 같은 일본종과는 엄연히 다른 ‘한국 단풍’이라오.”
 
  필자는 2005년 이곳을 찾아가 이 대통령이 식수한 단풍나무가 있는지 확인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세월은, 그리고 권력은 그렇게 무상했다. 그러나 아쉽지만 마운트 버논이 아닌 워싱턴 시내에 이 대통령이 식수한 나무가 살아있는 것을 알고 위안을 삼았다. 그곳은 다름 아닌 아메리칸 대학(American University)이었다.
 
  잠시 역사의 현장으로 가보기로 하자. 1943년 4월 8일, 아메리칸 대학 교정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24주년을 경축하는 기념행사가 열렸다. 주미외교위원부ㆍ한미협회ㆍ한미기독교친우회가 공동주최한 이날 행사에는 300여 명이 참석했다. 물론 이승만 전 대통령이 주관한 행사였다.
 
  이 행사에는 당시 아메리칸 대학의 총장 폴 더글러스(Paul F. Douglass. 1905∼1988:이승만 대통령과 절친했던 인물로 1952∼56년 이 대통령의 고문으로도 활동)도 한미협회의 회원으로 참석했다. 행사 후 이 대통령은 제주도에서 가져온 벚꽃나무를 식수하고, 대한의 자유와 독립을 염원했다.
 
  1893년에 설립된 이 대학은 현재 1만 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으며, 특히 국제관계학부가 유명하다. 바로 이 국제관계학부의 정원에 대한민국의 자유의 나무가 자라고 있으며, 벚나무 바닥에는 이 대통령의 식수를 알리는 표지석이 남아 있다.
 
  아무튼 이날 마운트 버논에서의 공식 일정은 이 대통령에게는 남다른 감회를 불러일으켰다. 예전 망명시절 쓸쓸히 찾았던 이곳을 이제 대규모 수행원을 대동하고 다시 찾았으며, 더구나 저택 입구에서 많은 미국인이 환영을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들에게 사인도 해주고 사진도 함께 찍었다. 특히 그곳을 떠나기 전에 어느 여인이 일곱 살 된 자신의 조카와 사진 한 장을 더 찍자고 우기는 바람에 공식 일정이 지체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그녀의 요구에 응했고, 한마디 말을 건넸다. “내게도 사진 한 장 부쳐 주세요.”
 
  알링턴 국립묘지 참배
 
  마운트 버논에서 출발한 李 대통령은 미국의 영웅들이 안식을 취하고 있는 곳, 알링턴 국립묘지로 향했다. 대통령이 도착하자, 21발의 예포가 발사됐다. 이 대통령은 묘지 사령관의 안내로 준비한 화환을 무명용사 비석 앞에 놓고 잠시 묵념을 했다. 무명용사 묘에는 제1ㆍ2차 세계대전에서 산화한 무명용사뿐만 아니라, 6·25전쟁에서 희생된 무명용사의 묘표도 세워져 있었다.
 
  李 대통령은 이 국립묘지에 한국산 단풍나무 한 그루를 친히 식수했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최초 알링턴 국립묘지 방문을 영원히 기념하고, 6·25전쟁에서 자유를 위해 산화한 영혼을 추모하기 위함이었다.
 
  링컨 기념관 방문
 
  이어 李 대통령은 “링컨은 미국의 남북통합을 주창하고 싸워서 이뤄낸 인물이며, 이것이야말로 분단된 우리나라에 대해서 내가 바라는 것”이라면서, 예정에 없던 링컨 기념관 방문을 지시했다. 그는 차에서 내려 기념관으로 올라가면서 수행원들에게 말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한국의 비극을 잘 이해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게티즈버그 연설이 남북전쟁의 판도를 바꾸었듯이, 다음과 같은 그의 ‘우리는 그들의 죽음이 헛되이 소멸되지 않도록 다짐합니다’라는 연설이 오늘의 남북한 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보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공산 침략이 분쇄돼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념관에 들어선 이 대통령은 링컨의 대형 대리석 석조상 앞에서 2분 간 기도하듯이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이어 출구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때, 그를 쳐다보던 관광객들이 박수를 보냈다. 어느 여인은 눈가의 눈물을 소매로 훔치며 말했다. “신께서 당신의 나라에 축복을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이 대통령은 발길을 멈추고, 그녀의 손을 붙들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당신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어디를 가든 이 대통령은 주변에 있는 미국 시민들과 어울렸으며, 아마추어 사진사들을 위해 포즈를 취해 주고, 어린이들에게 자필 서명을 해 주었다. 이런 그의 행동 때문에 미국정부 경호관들은 각별히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워싱턴 스타 신문사 방문
 
  유적지들 방문을 마치고, 예정대로 영빈관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이 대통령은 운전사에게 차를 시내 중심부로 향하도록 지시했다. “11번가와 펜실베이니아 거리 쪽으로 가도록 해요.” 워싱턴 스타 신문사를 찾아가 발행인을 만나고 싶어서였다. 서양식의 의전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지만, 이 대통령은 개의치 않았다.
 
  자동차 행렬은 스타 빌딩 앞에 멈췄다. 대통령 일행은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의 용적이 허용하는 한 빼곡하게 끼워 타고 6층으로 향했다. 그리고 워싱턴 스타의 사무엘 카프먼 회장 사무실로 불쑥 들어섰다. 그러나 카프먼 회장은 출타 중이자, 맥켈웨이 편집인의 사무실로 들어가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깜짝 놀라는 편집인에게 이 대통령은 6·25전쟁 기간 중에 이브닝 스타 신문이 한국에 대해서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준 데 대해 감사의 뜻을 전했다. 맥켈웨이 편집인은 뜻밖의 방문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이 대통령의 파격적인 행보는 계속됐다. 망명 시절 사귄 야구 구단주 클라크 그리피스(Clark Griffithㆍ1869∼1955. 워싱턴 세네터스의 피처ㆍ매니저ㆍ34년간 구단주)의 자택을 예고 없이 찾은 것이다. 마침 그리피스가 없어 그의 부인과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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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정상회담-아이젠하워와 不和 (13)
 
 성명서 草案의 “韓-日 우호관계” 문구 보고 激怒한 老 大統領
 
  워싱턴과 인근의 사적지, 워싱턴 스타 신문, 그리고 미국의 유명한 야구왕이자 구단주인 그리피스 자택을 방문한 이 대통령은 같은 날, 즉 1954년 7월 29일 오후, 백악관에서 제2차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은 세계 정상외교 역사상 전례가 없을 정도로 험악했다. 그 단초를 제공한 것은 아이젠하워였고, 이유는 한미관계가 아닌 한일관계 때문이었다.
 
  지난 월요일(2011년 8월 1일), 일본 자민당 소속 중의원 2명, 참의원 1명 등 3명이 울릉도 방문을 강행하려다 김포공항에서 입국이 금지되고, 9시간 농성 끝에 되돌아가는 희대의 정치쇼가 벌어졌다. 이들은 독도문제를 이슈화하려는 천인공노할 노림수를 숨기지 않고, 이런 간악한 쇼를 벌였다. 우리가 참으로 경계해야 할 것은 이런 정치쇼의 배후에 일본 정부와 국민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야기를 57년 전으로 다시 돌리고자 한다. 우리나라, 아니 동서고금의 정치 지도자들 중에서 이승만 대통령만큼 일본을 잘 알고, 철저하게 항일ㆍ반일 운동을 했던 인물을 찾기 힘들 것이다. 그는 독립운동 시절은 물론, 미국 망명에서 귀국한 후, 그리고 집권시절 반일의 선두에 섰다. 그의 반일은 반공보다 더 우선이었다.
 
  오늘 얘기는 그의 반일 사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제2차 한미정상회담에 얽힌 비화다. 이 일화는 이 대통령 방미 당시 주미한국대사관의 정무공사 한표욱 씨의 회고록 ‘이승만과 한미관계외교’(1996)에 등장한다. 당시 그는 회담에 참석할 수 없었지만, 참석자였던 양유찬 대사로부터 직접 들은 얘기이므로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참고로 당시 공보처에서 발행한 책자에는 이에 관한 내용이 거의 소개되지 않고 있는데, 이는 회담을 전후해 한미 양국 대통령 사이에 불화가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준다. 한 가지 지적해 둘 것은 한씨는 회담일시를 1954년 7월 30일 오전 10시라고 적고 있으나, 회담이 개최된 일시는 7월 29일 오후 2시 30분이었다.
 
  일반적으로 정상회담 후에 공동성명이 발표되는 것이 보통이다. 제2차 한미정상회담도 그런 차원에서 준비가 됐다. 문제는 미국 측, 구체적으로는 미 국무부가 우리 측과 사전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이 대통령을 자극하는 성명서 초안을 작성한 것이 문제였다. 즉 미국 측 성명서 초안의 제3항에 “한국은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 우호적이고”라는 문구가 들어 있었다.
 
  이 초안을 본 이승만 대통령은 불쾌한 표정이 역력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평소 대한민국과 일본이 국교정상화에 이르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아울러 이 대통령은 6·25전쟁 후, 미국의 아시아 정책이 너무 일본에 치중하고 있는 데 대해 우려하면서, 미국이 한국에 대한 경제와 군사 원조를 강화해 아시아 자유의 확산 및 평화 구축의 보루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을 설파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 측의 성명서 초안에 한일관계에 관한 뜻밖의 언급이 있었으며, 정상회담 1시간 전에 우리 측에게 전달된 것이다. 이는 국제관례상 문제가 있는 행위이며, 약소국에 대한 강대국의 월권행위였다.
 
  李 대통령은 즉시 최순주 국회부의장, 손원일 국방부장관, 양유찬 대사 등 공식수행원들을 불러 모아 불편한 심기를 적나라하게 토로했다. “이 친구들이 나를 불러 놓고 드디어 올가미를 씌우려는 작전을 시작한 모양인데, 이런 형편이라면 아이젠하워를 만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워낙 노발대발하는 어조였으므로 수행원 누구도 감히 입을 뗄 수 없을 정도였다.
 
  李 대통령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회담 시간이 됐는 데도 백악관으로 출발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총대를 멘 것은 孫元一 국방부장관과 백두진 경제조정관이었다.
 
  “각하, 가셔야 합니다. 가셔서 싫은 것은 싫다고 말씀하셔야지, 가시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李 대통령은 결국 백악관으로 향했고, 10분 늦게 회담장에 들어섰다.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덜레스 국무장관 모두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다. 이유는 李 대통령이 회담장에 들어서며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은 일절 없고, 차갑고 딱딱한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어색한 분위기 속에 아이젠하워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어제 귀국의 헌병사령관 원용덕 장군이 휴전협정에 의거해 파견된 중립국 감시위원단의 공산 측 대표인 체코와 폴란드 대표에게 한국을 떠나라고 경고했다고 합니다.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李 대통령은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되받아쳤다. “그들은 스파이입니다. 우리 군사기밀을 정탐하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들이 미국이 제공한 헬리콥터를 타고 우리나라의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귀하의 나라 군부대 시설까지 정탐하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아이젠하워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고, 동석 중인 주한유엔군사령관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하자, 사령관은 즉시 사실이라고 보고했다. 아이젠하워는 잠시 말문을 열지 못했다.
 
  우리는 여기서 이승만 대통령이 얼마나 용의주도한 인물인지를 실감할 수 있다. 그는 미국 측이 틀림없이 韓日관계를 이슈화할 것에 대비해서 중립국 감시위원단의 공산 측 대표에 대한 카드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참고로 원용덕 헌병사령관은 1954년 7월 30일(미국시간으로는 제2차 한미정상회담이 개최된 7월 29일) 중립국 감시위원단 공산 측 대표에게 퇴거를 경고하는 담화를 발표했으며, 이 대통령은 7월 31일(한국시간은 8월 1일) 워싱턴에서 중립국감시위원단 철수 요구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함과 동시에 휴전협정 공문화(空文化)를 선언하는 중대발표를 했다.
 
  이어 회담의 화두가 韓日관계로 넘어가자, 李 대통령은 “내가 대통령에 재임하는 동안, 일본과는 상종하지 않겠다”는 극단적인 발언을 했다. 아이젠하워는 화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장 옆방으로 가버렸다. 李 대통령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우리말로 “저런 고얀 사람이 있나, 저런”이라고 말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아이젠하워가 화를 삭이고 들어와 韓日문제는 보류하고 다른 의제로 넘어가자고 제안하자, 이번에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대통령이 통쾌한 답례를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내일 외교기자클럽에서 중요한 오찬연설이 있는데, 준비를 위해 먼저 일어나야겠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아예 회의장을 떠나버렸다. 李 대통령은 이런 인물이었다. 아무리 미국의 신세를 지고 있지만, 국가지도자로서의 자존심과 품격에 손상을 입을 수는 없다는 당당함을 갖고 있었다. 또한 상대가 우리를 얕볼 때 이를 용납하면, 결국 걷잡을 수 없이 양보하게 된다는 사실도 익히 알고 있었다.
 
  회담장을 나온 李 대통령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회담장의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알 리가 없는 기자들은 질문을 쏟아냈다. 우선 美 의회연설에서 李 대통령이 제안한 아시아 해방을 위한 새로운 전쟁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李 대통령은 “토론된 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어 어느 기자가 “미 의회에서 제안한 중국본토 반공전쟁에 대해 아이젠하워 등 미국 정치인 및 군사 지도자에게 실망했는지 아니면 격려를 받았는지?”라고 질문하자, 이 대통령은 정색을 하며 나지막한 어조로 반문했다. “도대체 내가 미 의회에서 무슨 제안을 했다는 말인가?” 이 같은 질의응답은 당시 李 대통령의 심기를 잘 대변해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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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承晩 대통령과 조지 워싱턴 대학 (14)
 
 “내 겨례 자유 위해 몸 던져 미국 民主 배웠다”
 
 1954년 7월 29일 오후, 제2차 한미정상회담 중에 한일관계 문제로 양측이 대립하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비신사적인 태도로 일시 회의장을 비웠으며, 이에 분개한 이승만 대통령이 아예 회의장을 나와 버리자 난리가 났다. 하는 수 없이 아이젠하워도 분통을 터뜨리며 회의장을 나와야 했다. 미국 측 대표도 아이젠하워를 따라 퇴장하려는데, 주미 한국대사관의 양유찬(梁裕燦·1897∼1975) 대사가 양국 정상이 자리를 비웠더라도 회의는 진행시켜야 한다며 특유의 친화력으로 이들을 가로막았다. 양측은 가까스로 회담의 파행을 수습하고 공동성명을 만드는 데 합의했다.
 
   여기서 잠시, 양유찬 대사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그는 아주 어릴 적에 부모를 따라 하와이로 이민 갔으며, 이승만의 하와이 망명시절 한인교회의 학교에 다니던 아주 총명한 학생이었다. 의과대학 졸업 후 그는 하와이에서 산부인과를 개업해 크게 성공했으며, 독립운동을 하는 이승만을 여러모로 도왔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초, 부산에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주미 대사를 맡아 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고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외교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그는 이후 무려 4·19혁명 직후까지 9년 이상을 주미 대사로 근무했다. 전무후무한 장수 기록이다. 그는 탁월한 영어실력, 유머 넘치는 화술로 미 조야인사들과 친분을 쌓았으며, 미국의 각지를 돌며 강연 등을 통해 대한민국을 알렸고, 반공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당시 그의 연설문들을 모은 책자 `Korea against Communism'(1966)을 보면 그가 얼마나 부지런한 인물이었으며 자신을 버리고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해 일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 취득
 
  7월 30일 오전, 이승만 대통령은 50년 전에 그가 다녔던 조지 워싱턴 대학을 다시 찾았다. 1905년 2월, 이승만은 이 대학의 찰스 니덤(Charles W. Needham·1848∼1935) 총장의 특별 배려로 2학년에 특별 입학할 수 있었다. 당시 만나이로 30을 넘긴 늦깎이 학생이었다. 더구나 그는 고종황제의 밀사로, 주미 한국공사관 직원으로, 그리고 외아들을 키우는 아비로서 학업에 전념하기 힘든 형편이었다. 그러나 불굴의 학구열은 그의 게으름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 추억과 애환이 어린 모교를 다시 찾은 이 대통령의 감회는 남달랐다.
 
  조지 워싱턴 대학은 이날 특별 학위 수여식을 열고 그에게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수여식은 리스너 강당에서 개최됐다. 행사에는 대학교 이사 및 교직원 이외에 외교단, 상원·하원 외교위원회 소속 의원, 워싱턴 DC 공무원, 대학 행정요원 및 동창회 회원, 워싱턴의 문화·시민단체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클로이드 마빈(Cloyd Marvin·1889∼1969) 총장이 李 대통령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조지 워싱턴 대학의 아들, 높은 분별력과 기독교적인 품성이 결합된 진지한 인물, 지루한 기다림의 세월 속에 고통·절제된 용기·공공의 복리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희생정신이 요구됐던 시기에 불굴의 인내·조용한 의지·심오한 정신적 힘을 가지고 자신과 국민들을 위해 일했던 애국자이자 지도자, 정의에 항상 민감하게 동의하는 인물, 동양적인 것을 서양적인 것으로 서양적인 것을 동양적으로 해석하는 비범한 재능을 지닌 인물 -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님, 우리는 당신이 짧은 시간이지만 이곳에 방문해 준 것을 매우 반갑게 생각합니다. 우리 대학교 이사회와 교수회의를 대신해 당신께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수여함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어 이승만 대통령은 박사학위를 받은 후 연설을 시작했다. 이날의 역사적인 명연설의 현장으로 독자 여러분을 초대하고자 한다.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의 연설
 
  “마빈 총장, 대학 이사회, 교직원, 학생, 신사숙녀 여러분. 무엇보다 먼저, 오늘은 내게 자랑스러운 날이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더운 날, 귀중한 주중 시간에 나를 축하해 주기 위해 이 자리에 모여 주신 친구들에게 어떻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이 학위는 내가 그간 받았던 그 어느 유사한 인증서들보다 값진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여기는 나의 모교이고, 여러분은 나를 이 위대한 모교의 값진 아들이라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나를 매우 자랑스럽게 해줬습니다.
 
  교직원 여러분, 학생 여러분, 나는 당신들을 축하합니다. 내가 이 학교를 다닌 지 50년 만에 이 대학교를 이만큼 훌륭하게 성공적으로 일궈낸 여러분에게 축하의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05년, 내가 처음으로 조지 워싱턴 대학에 등록했을 때, 나는 컬럼비아 단과대학의 알렌 윌버(Allen Wilbur·1864∼1945) 학장을 찾아가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나는 그분을 찾았습니다. 북서쪽 14가와 지(G) 거리의 모퉁이에 있는 낡은 벽돌 건물이었습니다. 그 건물은 후에 허물어졌고, 오늘은 그 위치조차 거의 찾을 수 없게 됐습니다.
 
  윌버 학장에 대해서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는 모든 교수들과 학생들로부터 교육자의 귀감이요, 나무랄 데 없는 기독교 신사라고 존경받는 분이었습니다. 윌버 학장의 강의, 그리고 그분이 연민의 정으로 학생들을 대하는 태도는 이후 줄곧 나의 삶에 있어서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원천이 돼 왔습니다.
 
  내가 당시 나의 조국에서 미국에 오게 된 것은 고등교육을 받겠다거나, 대학에서 학위를 받으려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말씀드려야만 하겠습니다. 나는 구 한국정부로부터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 일하라고 파견됐던 것입니다. 그때 나는 우리나라 공사관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여가를 내어 고등교육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한 교육이 내가 한국으로 귀국했을 때 도움이 될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이유를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조지 워싱턴 대학은 정부에서 일하고 있는 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갖춘 워싱턴 내 유일한 학교였으며, 나의 이 대학 등록도 그래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내가 조지 워싱턴 대학에 관심을 가졌던 다른 이유는 내가 조국에 있을 때 벌써 미국 독립의 아버지인 조지 워싱턴을 열렬히 흠모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한국의 독립을 위해 일하고 있었고, 조지 워싱턴 대학은 내게 매우 이상적인 학교로 보였습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충실히 학업에 열중했고, 미국 민주주의의 중심에서 민주정부의 운용방식과 국민들의 자유를 어떻게 보호하느냐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는 내 평생의 삶에 있어서 진정한 초석이 됐습니다. 이곳에서 배운 것은 내 겨레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 있어서 커다란 도움이 됐습니다.
 
  후에 몇몇 친구와 우리 국민이 나를 국부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이 진실인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말이 정말이라면, 그것은 틀림없이 내가 조지 워싱턴 대학을 다닌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여기서 이승만 대통령은 연설을 잠시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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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 워싱턴 대학 연설 - 한-미 頂上 공동성명 (15)
 
 “치명적 바이러스 공산주의 퇴치 미루면 재앙”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서의 망명생활 당시 몸소 타자를 쳐서 문서를 작성하던 습관을 대통령 재임 시에도 버리지 않았었다. 미국 국빈방문 기간 중의 연설들도 마찬가지였다. 외교고문이던 로버트 올리버 박사가 자신의 저술에서 일부 연설의 초안을 잡아주었다고 하나, 이 대통령은 그것을 참고하는 정도였다. 따라서 이 대통령의 연설문은 그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조지워싱턴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자줏빛 망토를 걸친 채 연설하던 이 대통령은 너무도 감격스러웠던지, 연설 도중에 잠시 눈물을 훔치고는 다시 진솔한 말들을 엮어 나갔다.
 
  “조지워싱턴대학에서의 공부는 시련이 없을 수 없었습니다. 처음 수업을 받을 때, 본인의 영어는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내 영어는 그때나 그 이후나 결코 완전하지 않았다는 점을 고백해야겠습니다.
 
  당시 나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강의실에서 영어 실습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도대체 교수들은 영어를 왜 그렇게 빨리 말했는지 나는 아직도 의아합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나는 조지워싱턴대학의 충실한 아들의 하나가 되고자 노력해 왔다고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 위대한 대학, 우리의 대학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고 있듯이 나도 그랬었다고 확신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얘기하고 싶은 또 다른 것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나는 두 가지 일 즉, 자유와 민족자결을 위해 투쟁해 온 사람입니다. 특히 광활한 영토와 수많은 인구라는 천부적인 이점을 갖지 못한 약소민족들의 자유와 민족 자결을 위해서 말입니다.
 
  보람 있는 사회를 이루는 이 근본적인 두 가지 요소가 바로 이 순간, 심각한 위협에 처해 있습니다. 국내적·국제적 조직들이 개인적 자유의 존립과 민족주의의 전체구조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인간을 크렘린의 독재자들에 의해서 절대적으로 통치되는 세계 국가의 노예로 만들려고 획책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철학자나 공산주의 행동가들은 누구도 이러한 목표를 숨기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고의 말을 듣거나 적시에 행동하기를 거부하는 사람과 나라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이미 자포자기한 채 우리에게서 떠났습니다.
 
  나는 우리가 변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도 매우 신속히 말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공산주의자들은 조만간 압도적인 힘을 얻는 데 성공할 것입니다. 일단 이를 성취하면, 그들은 문명 그 자체를 파괴시켜 버릴지도 모를 또 다른 세계 전쟁으로 이 세계를 몰고 갈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승리하든 패배하든 그 대가는 재앙 그 자체일 것입니다. 변화는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공산주의에 대해서 마치 불편하기는 하지만 위험하지는 않은 흔한 감기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것을 중지하고, 치명적인 바이러스라고 여기고 퇴치를 위한 투쟁을 시작해야 합니다.
 
  미국과 모든 자유국가의 대학은 이러한 투쟁의 선봉에 나서야 합니다. 총포나 병력의 위협으로만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쟁취하는 것은 아닙니다. 폭력은 공산주의의 무시무시한 시위행위들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는 또한 인간의 마음속에, 이른바 사상적인 영역에 그릇된 가치관을 정립시키고, 검은색을 백색으로 만들고, 결국에는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사상통제를 구축합니다.
 
  교육의 역할은 공산주의가 지성에 반하는 것임을 연구하고 폭로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교육의 역할은 사상의 자유가 귀중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에게 공산주의자들이 이러한 귀중한 가치를 파괴시키려는 책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이제 교육, 그리고 교육자들은 단지 공산주의의 과도함에 대해서 유감을 표시하는 것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습니다. 교육은 싸울 자유가 존재하는 한 교육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시작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닥쳐온 위험이 매우 큽니다. 공산주의는 권력을 장악하는 바로 그 순간, 무제한의 탐구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운 대학, 자유로운 학부, 자유로운 학문─이 모든 것은 소비에트의 힘이나 유혹에 굴복한 나라에서는 미지의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말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중립일 수 없으며, 한적한 강의실에 앉아서 자유세계가 파멸의 비극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것을 수수방관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공산주의에 대항해서 싸우는 모든 자유인의 편에 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무관심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운명을 매우 위태롭게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 중 많은 분이 이미 투쟁을 하고 계실 줄로 생각하며, 그러하기를 희망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적색분자와의 투쟁에 헌신하고 있는 사람과 국가에 대해 결코 떳떳하지 못한 것입니다. 공산주의와 그 위험을 아는 우리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단결할 수 있습니다.
 
  친구들이여, 지금은 바야흐로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단결과 행동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우리 모두 함께 학문의 자유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이 세계의 모든 국민들의 완전한 자유를 위해서 투쟁해 나갑시다.” 
 
  <한미 공동성명 全文>
 
 1954년 7월 30일 오전, 이승만 대통령이 조지워싱턴대학에서 연설을 하는 시간에 한미 양국 정부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의례적인 6개 문단으로 구성된 245단어(영문) 분량의 연설문 전문은 아래와 같다.
 
  “우리는 여러 가지 상호 관심사에 관해 유익하고도 진지한 의견교환을 했다. 이러한 협의는 우리 양국 간에 존재하는 우의를 강화시켰으며, 또한 우리의 목표가 확고함을 보다 더 명백히 보여주었다.
 
  1953년 8월 8일, 이승만 대통령과 덜레스 국무장관은 만일 1953년 7월 27일에 조인된 휴전협정에 따른 정치회담이 한반도 문제에 만족할 만한 해결을 도출하는 데 실패한다면, 대한민국과 미국은 다시 협의할 것이라는 데 합의를 보았다.
 
  이 회담은 1954년 4월 26일부터 6월 15일까지 제네바에서 개최됐다. 그러나 동 회담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유엔감시하의 진정한 자유선거에 입각한 한반도 통일 방식을 수락하기를 일절 거부하고, 그 대신 한국 국민의 자유의 소멸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불가피하게 초래할 수도 있는 합의안을 계속 강요했다. 우리는 유엔헌장 및 한반도 문제에 관한 유엔총회의 결의에 따라서 통일ㆍ민주ㆍ독립국가 한국을 이룩하기 위해서 전진하려는 우리의 의도를 재확인했다. 제네바 회담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했음에 비춰 우리는 이 목표달성 노력을 계속하기 위한 방법을 토의했다.
 
  우리의 군사 및 경제 고문들은 양국에 관계되는 공동이익 문제에 관해서 보다 더 상세한 토의를 계속할 것이다.
 
  끝으로 우리는 한국문제에 관한 우리의 공동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긴밀하고 호혜적으로 함께 노력한다는 결의를 재천명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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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외교기자클럽 오찬 간담회 ① (16)
 
 “한반도 새로운 길 모색이 나의 미국 방문 목적”
 
 미국을 방문하는 외국 국가 원수들의 경우, 정상회담 이후 양국 국가 원수가 공동기자회견을 갖는 이외에 별도로 특정 미디어와 회견을 하든지, 내셔널프레스클럽(National Press Club) 등과 같은 단체의 초청을 받아 수백 명의 기자들 앞에서 연설하고 질의응답을 받는 것이 보통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7월 30일 정오, 미국 외교기자클럽(The Overseas Writers Club)의 초청을 받고 스타틀러 호텔에서 개최된 오찬 간담회에 참석했다. 참고로 행사를 주최한 외교기자클럽은 1921년 설립된 해외에서 특파원을 했던 미국 기자들의 모임이었으며, 한때 미국 외교정책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으나 2002년 해체됐다.
 
  세계 어느 나라의 국가원수보다도 국가홍보의 중요성에 대해서 선구적인 의식을 가졌던 이 대통령으로서는 이 행사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다. 더구나 미 의회연설에 대한 미국 내 분위기가 좋은 것만은 아니었던 탓에 이 대통령은 자신의 소회를 진솔하게 기자들에게 소개하고 싶어 했다.
 
  12시 정각에 이승만 대통령이 도착하자 원형 테이블에 앉아 대기하고 있던 150여 명의 기자들이 일제히 기립해 대통령을 맞았다. 이 대통령은 헤드 테이블에 앉아 함께 앉은 기자들과 담소를 나누며 우선 오찬을 끝낸 다음에 연설을 시작했다.
 
  “언론인들에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입니다. 그들은 예민한 지성과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자유세계에서 그들은 진실을 찾기 위해서 자신의 지성을 이용하며, 국민의 복리를 위해 자신의 힘을 행사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언론의 자유이며, 이것이 바로 모든 자유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입니다. 의사소통의 자유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태도를 보면, 언론의 자유가 중요하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언론의 자유를 허용치 않습니다.
 
  신문·라디오 방송·통신사들은 언제나 적의 제1의 공격목표가 됩니다. 적은 제퍼슨이 알고 있었던 것처럼 자유로운 신문이 자유국가에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적은 권력을 장악하면 무엇보다 먼저 언론의 목을 졸라 질식시키는 것입니다. 정보를 통제함으로써 공산주의자들은 진실 대신 허위 사실들을 전파할 수 있으며, 그들이 항상 노리는 전체주의적인 권력을 재빨리 장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친구들이여, 여러분들은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대의를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들입니다. 부디 진실하고 가공되지 않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파수꾼의 역할을 하지 않아서 수십만 아니 수백만의 국민들을 잘못 인도하기 쉽습니다.”
 
  여기까지 언론인의 사명을 남달리 강조한 이 대통령은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로 말을 돌렸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나는 기자는 아니지만, 때때로 나의 사명이 여러분의 그것과 비슷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전달해야 할 정보가 있습니다. 내가 그 정보를 적절하게 그리고 충분하게 전달한다면, 세계는 나를 이해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동의하고 어떤 이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그들은 모두 내 마음속에 무엇이 담겨있는지를 알 것입니다.
 
  바로 이틀 전에 나는 위대한 미 의회에서 연설했습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연설이었습니다. 내가 만든 최초의 연설원고는 나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길었습니다. 내 친구들이 길이를 줄이면 좋겠다고 해서 마침내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삭제하는 과정에서 어떤 복잡한 문제를 몇 마디 단어로 표현하려고 하니 그 배경과 설명을 삭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 내 연설을 들은 몇 사람은 내가 미국에게 중공과 즉시 전쟁을 개시하도록 촉구한 것으로 이해하게 됐습니다.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나는 자유세계의 보전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장기적인 정책을 미국이 고려해 보도록 제시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뜻했던 바를 충분하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허락한다면, 그제 나의 의회연설을 이 자리에서 연장해서 하고 싶습니다. 의회연설에 대한 배경과 부연설명을 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의 의도나 제안에 대해서 일절 오해가 없도록 확실히 해두고 싶습니다. 문제가 중대하므로 여러 가지로 달리 해석되거나 그릇되게 해석되도록 내버려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어 이 대통령은 자신의 뜻과는 어긋나게 미국 측에서 6·25전쟁 휴전회담을 시작하고, 자신을 회유하고자 미국 초청을 먼저 제안했다고 털어놓기 시작했다.
 
  “우선 내가 미국을 방문하게 된 최초의 제안들에 대해서 얘기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덜레스 국무장관과 로버트슨 국무차관보가 지난해 한국을 방문한 사실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들이 내게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만나볼 겸 잠시 미국을 방문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습니다. 그들은 나의 방미가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지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나 또한 내심으로 미국을 방문해 옛 친구들도 만나고 내가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는 그리운 고장들을 다시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나는 어떻게 할 것인지 미국 측과 결정적인 합의를 할 수 없었으며, 국내에 머물러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유를 설명하고 최초의 초청을 사양했던 것입니다.
 
  제네바 회의가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자 한반도 상황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우리는 역사상 기로에 서게 됐으며, 한미관계도 마찬가지로 기로에 서게 됐습니다. 이제 한반도 문제를 풀어야 할 새로운 길을 모색할 필요성이 대두됐던 것입니다. 사정이 이러해서 나는 미국에 가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정부 지도자들과 조용히 협의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내가 이곳에 오게 된 이유는 바로 그것입니다.
 
  자, 한반도 문제로 돌아가 봅시다. 즉, 공산주의자들이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한반도 통일에 동의하지 않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야기된 상황으로 돌아가 봅시다. 문제는 바로 우리가 어떻게 공산주의자들을 한반도에서 몰아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는 군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나는 전문적인 군사지식이나 통찰력을 갖고 있는 체하지도 않겠습니다. 그러나 한국 군대는 큰 희생이나 제3차 세계대전을 초래하는 심각한 위험이 없이도 한반도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몰아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한국 군대는 이런 일을 행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미국 군사 당국자들이 이 계획의 실현 가능성을 인정하기를 희망했었고, 또한 미국의 협조를 종용했습니다. 이는 아직도 우리의 희망이며, 우리는 아직도 낙담하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 국민들의 위대한 반응은 내게 미국의 지원을 믿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으며, 또한 미국이 결코 공산주의의 유화적인 태도에 동의하지 않는구나 하는 신념을 키워 주었습니다.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들은 미국 국민들의 용기와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을 알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일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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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외교기자클럽 오찬 간담회 ② (17)
 
 “美國이도와준다면 공산주의의 불길 반드시 진화”
 
 1954년 7월 30일 정오, 미국 외교기자클럽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우선 언론인의 사명을 강조하고, 자신의 방미배경, 그리고 한반도 문제 해결에 관한 미국의 군사적 역할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개괄적으로 소개했다. 그의 연설은 다음과 같이 이어졌다. “그러나 미국에 도착해 보니, 현 시점에서 그 어떤 군사적 행동에도 반대하는 상당한 여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한반도의 통일에 관한 우리의 제안들이 시기상조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것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반 국민 여론의 관점에서 볼 때, 한국에 관한 특별한 권고안을 다루는 것보다, 전반적인 상황을 광범위하게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미 의회연설은 그러한 수준에 맞춰진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간직해 왔고,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것은 미국이 공산주의의 정복 야욕에서 민주주의를 구하려 한다면 중국을 우선 구한다는 결정을 지금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국 문제는 한국문제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체 문제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없으면, 아시아의 생명은 지켜질 수 없습니다. (중략)
 
  만일 중국이 공산주의자들의 손아귀에 놓이고 아시아의 다른 지역이 공산 통치하에 들어간다면, 대한민국은 독립국가로, 통일국가로, 민주국가로 결코 계속해서 존립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의회연설에서 우리 모두를 구하기 위해서 미국의 정책이 중국을 먼저 구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명백히 하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중략)
 
  만일 이와 반대로, 우리가 행동의 우선순위 목록에서 중국을 하위에 놓는다면 중국의 구출을 가능케 하는 통로들을 잃어버리는 중대한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나는 미국이 중국을 지금 공격하라고 제안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제안한 것은 미국이 중국을 구하는 데 필요한 단안을 내려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중략) 즉, 미국이 중국의 해방을 항구적인 정책과제의 일부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가능한 한 빨리 그 정책을 강화하고 실천하는 데 노력하자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시오. 친구들이여. 공산주의가 얼마나 오랫동안 계획을 세워 왔는지 말입니다. 전 세계가 다 알다시피 볼셰비키가 그들의 청사진을 작성한 것은 40년 전입니다. 그들의 계획은 ‘민주적이고, 제국주의적이며, 자본주의적인 미국’의 정복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정복은 공산주의자들에게는 항상 우선순위 제1번이 돼 왔습니다. (중략) 그들은 그러한 목표를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 왔습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지난 40여 년간 밤낮없이 일해 왔습니다.
 
  계획과 행동으로 공산주의는 도처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습니다. 세계 인구의 반이 지금 공산치하에 들어갔습니다. (중략) 중국 역시 공산주의자들에 맞서 필사적으로 항전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중국은 미국의 도움으로 투쟁했습니다. 미국으로부터 무기ㆍ탄약ㆍ기타 원조가 조달됐고, 얼마간 자유라는 대의를 지키기 위한 전투는 잘 진행됐습니다.(중략)
 
  그러나 미국인들은 중국에 내전이 중지되고 연립정부가 성립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평화가 회복되지 않으면, 원조를 철회할 것이라는 시사를 함으로써 중국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중국인들은 공산주의에 대항해서 오랫동안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고, 소련 측으로 넘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미국의 우유부단한 아시아 정책을 꼬집은 이 대통령은 의회연설에 이어 또다시 신랄한 어조로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한국 역시 환멸과 실망을 경험했습니다. 한국의 분단은 가공할 타격이었습니다. 한국인들은 민주정부와 개인의 자유가 위태롭게 될 때에는 미국이 결코 양보하지 않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세계정세는 한국의 이익과는 반대로 전개됐고, 우리는 혹독한 시련에 처하게 됐습니다.
 
  일부 한국인들은 오늘의 상황을 분석하면서 우리나라가 너무 과도하게 미국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냐하는 의구심을 보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미국이 너무도 결단력이 없고, 너무도 기회주의적으로 시류에 따라 표류하고, 너무도 행동을 주저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이 도처에서 승승장구하며 점차 가속도를 내어 우리에게 가까이 오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중략)
 
  언론인 여러분, 이 나라에 공산주의자들이 미국의 지배를 도모한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이곳에서 위대한 성전을 시작해서 지금 그들에게 진실을 알려 주어야만 합니다. (중략) 이러한 성전은 미국에서뿐만 아니라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라도 수행돼야 한다는 것이 나의 희망입니다. 물론 한국은 열심히 참가할 것입니다. (중략)
 
  결국 미국과 자유세계의 확고한 정책, 진리를 알리는 성전, 막강한 힘의 정책 등과 같은 조치들은 중국과 기타 아시아 국가들의 용감하고 광범위한 반공산주의 세력들을 일깨워서 그들을 속박하고 있는 자들에 대항하는 고유의 성전을 시작하게 할 것입니다.
 
  나는 미 의회의 모든 내 친구들이 이 연설을 읽어서 내가 그들과 미국 국민에게 말하고자 했던 바를 명확하게 이해하기 바랍니다. 아시다시피 때때로 내 친구들은 나를 예언자라고 말해 왔습니다. 내가 국제정치적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견을 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나는 내가 예언자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단지 나는 상황을 현실적으로 보려고 하며, 특히 그 동기들, 힘의 역학관계, 그리고 우리의 적이나 잠재적인 적들이 야기할 가능성이 있는 행동들을 평가하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내가 중국에 대한 강경하고 확고한 정책이 중국뿐만이 아니라 한국ㆍ동남아시아 그리고 미국을 구할 수 있다고 그렇게 강조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나의 이러한 평가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국민에 대한 호소로 이날 연설을 마무리했다.
 
  “마지막으로 친구들이여, 나는 미국 국민이 세계 문제를 현실적으로 관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점을 거듭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내가 만난 미국인들로부터 정말로 큰 격려를 받았습니다. 나와 우리나라에 대한 그들의 감정은 참으로 따뜻했습니다.
 
  그들은 미국이 민주국가로 평화스럽게 존속하려면 아시아가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을 듣거나 읽어서가 아니라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이 보였습니다. 미국은 공산주의에 대한 강경정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만한 거대한 힘의 저장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미국 국민입니다.
 
  언론인 여러분에게 촉구합니다. 여러분께서 미국 정부와 함께 위대한 힘의 원천인 미국 국민에게 호소해 주기 바랍니다. 자유롭게 되기 위해, 또는 자유를 보전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세계 도처의 모든 민족들을 지원하자고 말입니다.
 
  미국인들이 도와준다면, 우리는 반드시 공산주의의 불길을 진화할 수 있으며, 우리 자신과 자손을 위해 평화롭고 보다 더 나은 세상을 쟁취할 수 있을 것으로 나는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미국 신문과 방송은 이날 연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1954년 7월 31일자 워싱턴 포스트는 1ㆍ2ㆍ6면 등 3면에 걸쳐 보도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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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대통령의 방미와 獨島 무인등대 點燈 (18)
 “우리가 하는 일… 나는 두렵지 않습니다”
 
 오늘은 이승만 대통령과 독도에 관한 얘기를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이 대통령은 방미 기간 중에 독도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우리 정부는 독도 등대 설치 작업을 마무리하고 있었고, 이 대통령이 마지막 기착지인 하와이에 체류하던 1954년 8월 10일 정오(하와이 시간 1954년 8월 9일 저녁 6시)에 독도 무인 등대에 점등하고 세계 각국에 이를 통보했다.   일본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처참하게 패망한 이후에도 집요하게 영토 문제를 제기해 오고 있었으며, 독도 영유권 주장도 그중 하나다. 독도 문제와 관련해서 일본 당국이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건은 아마 우리 정부의 등대 설치가 아닌가 한다. 일본 측이 독도에 무언가 심각한 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인지한 것은 1954년 7월 말이었던 것 같다.  
 
 이와 관련해서 57년 전인 1954년 7월 31일자 뉴욕 타임스 기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날은 이 대통령이 1주일간의 워싱턴 방문을 마치고 뉴욕으로 향하는 날이었다. 묘하게도 이날 뉴욕 타임스지는 “한국이 섬들을 점령하고 있다고 일본이 주장”이란 제목 아래 일본 측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대변하는 독도 관련 기사를 크게 다뤘다.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독도를 점령하고 작업 중이라고 일본이 주장”이란 소제목이 달린 이 기사는 단순한 사실 보도가 아니었다. 제1면과 2면에 지도와 함께 장문의 기명 기사를 실었으며, 더구나 기사를 쓴 인물은 린드세이 패롯(Lindesay Parrottㆍ1901∼1986)이었다. 패롯은 제2차 대전과 6ㆍ25전쟁 기간 중에 종군기자로 맥아더 장군과 절친한 사이였으며, 이 기사를 쓸 당시에 10년째 뉴욕 타임스의 도쿄지국장으로 근무하던 베테랑 기자였다.  일본 정부의 정보에만 의존한 편파적인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일본 소식통은 7월 30일, 한국이 독도(Takeshima로 표기)를 점령했다고 말했다. 2척의 일본 순시선이 독도 인근을 순찰하던 중, 6명의 한국인이 독도의 2개 섬 중의 하나인 동도(Mishi Island로 표기)에서 작업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일본 해상보안청은 한국인들이 흰색 셔츠에 초록색 바지를 입고 있었으며, 분명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서 한국에서 파견된 경비대였다고 밝혔다. 한국인들이 무장을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커다란 텐트가 그곳에 세워진 것을 보면 그 섬에서 머물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고 덧붙였다.” “그곳 표지판에 적혀 있듯이 한국인들은 적어도 7월 25일부터 그곳을 점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과거에 어부들이 때때로 조업을 하던 때와 같은 일시적인 체류가 아니라고 일본 측은 추론했다. 인근에 한국 선박이 없는 것으로 보아 한국인들은 상당기간 지탱할 물품들을 사전에 이 섬에 실어다 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어 뉴욕 타임스는 독도의 지리적인 위치를 소개한 다음, 일본 측의 주장만을 일방적으로 보도했다. 더욱이 기사에는 독도라는 우리 표기는 일절 보이지 않고 다케시마라는 용어만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학술조사, 한국영토라는 표지판 및 등대 설치, 독도 경비대 상주, 독도 접안시설 설치 등의 실효적인 조치를 취하고 독도의 영유권에 대한 우리의 확고한 의지를 천명해 왔다. 더구나 이승만 정부가 “이승만 라인”(1952년 1월 18일, ‘대한민국 인접해양에 대한 대통령 선언’에 의해 설정한 수역으로 ‘평화선’이라고도 불리며 독도를 라인 안에 포함시킴)을 발표하고, 특히 李 대통령의 방미 기간을 이용해서 독도 등대를 점등한 것은 타이밍이 절묘했던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그러나 이러한 실효적인 지배와 함께 이제부터라도 해외홍보, 특히 해외 주요 미디어를 대상으로 한 홍보에도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할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했지만 1954년 7월 31일자 뉴욕 타임스가 독도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번 필자의 지적을 계기로 독도가 세계 언론에 어떻게 보도돼 왔는가 하는 연구가 이뤄졌으면 한다. 독도는 알파벳으로 언제부터 어떻게 표기돼 왔으며, 보도 내용은 어떠했는가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향후 독도에 관한 해외홍보가 적극적으로 전개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워싱턴을 떠나 뉴욕에 도착 뉴욕 타임스가 독도 관련 보도를 했던 7월 31일, 이승만 대통령은 일주일간의 워싱턴 방문을 마치고, 오전 10시 3분 비행기 편으로 뉴욕으로 향했다. 워싱턴 공항에서 비행기에 오르기 전 李 대통령은 국내외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의 고별인사를 했다.  
 
 “워싱턴을 떠나자니 다소 서글픕니다. 아마 더 이상 이곳을 방문하지 못할 것 같아 그렇습니다. 내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미국 정부와 국민이 진심에서 우러나는 태도와 후의를 보여준 데 대해서 매우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이 대통령 일행은 같은 날 오전 11시, 뉴욕 라과디아 공항에 도착했다. 데이비드 남궁 뉴욕 주재 한국총영사, 리처드 패터슨 뉴욕시 영접위원회 회장 그리고 한복을 입고 웃음을 띤 100여 명의 한인동포들이 열렬히 환영했다. 몇 명의 중국(자유중국)인들도 환영객 중에 끼어 있었다.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 도착했을 때, 호텔 건물 정면에는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간단한 오찬을 마친 이 대통령은 오후 3시, 호텔에서 독도에 관한 보도에 대해 뉴욕 타임스와 단독 기자회견을 가졌으나, 독도에 관한 질의나 응답은 없었다. 이어 저녁 6시부터 약 1시간 동안 맥아더 장군과 환담했다. 뉴욕에서 첫 공식행사는 저녁 8시, 남궁 뉴욕 주재 한국총영사가 주최한 환영 리셉션이었다. 총영사관 건물에서 개최된 리셉션에는 학생ㆍ사업가 등 한인 동포 100명 이상이 모였다. 이 대통령은 우리말로 짤막한 인사말을 통해 모든 한국인이 조국의 궁극적인 통일에 대한 신념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파운드리 감리교회에서의 특별예배 
 
 李 대통령은 8월 1일(일요일), 다시 워싱턴으로 돌아가 파운드리 감리교회의 특별 예배에 참석했다. 예배에는 미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 노울랜드 의원, 전 주한 미 제8군 사령관 밴 블리트 장군 등도 참석했다. 이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아주 감동적인 즉흥 연설을 했다. “한국이 자유롭게 된 것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만약 우리가 100만 공산군을 북한에서 몰아내려고 한다면,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가공할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이 순식간에 인류의 문명을 파괴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우리가 수소폭탄보다도 더 위력적인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습니다. 하느님은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아시아 최상의 최강의 반공 군대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이 우리가 하는 일이 잘못된 일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사랑으로 감싸는 하느님이실 뿐만 아니라, 정의를 구현하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두렵지 않습니다. 모두 나를 비난하라고 하십시오. 그러나 하느님만이 나를 질책하시지 않는다면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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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海外戰爭 參戰勇士會 연례 총회 참석 ① (19)
 
 “한국 땅에서 피 흘린 여러분께 경의를 표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8월 1일 저녁, 방미기간 중 실내 행사로서는 가장 참석자가 많은 행사에 연사로 나서기로 예정돼 있었다. 워싱턴에 도착해 일정을 마치고 뉴욕으로 갔다가, 주말을 이용해 8월 1일, 오전에 워싱턴으로 이동해 파운드리 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같은 날 저녁에 다시 뉴욕 인근의 도시 필라델피아로 이동한 것이다. 80세 노인을 위한 일정으로는 소화하기 힘들었지만, 이 대통령으로서는 피곤보다는 신이 났다.
 
 바로 미국의 예비역 군인들의 모임 중에서는 가장 강력하고 회원 수가 많은 외국전참전용사회(Veterans of Foreign Wars: VFW) 연례총회행사에 초청강연을 하도록 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외국전참전용사회는 해외에서의 전투에 참가한 장병들의 모임이며, 1899년 발족돼 1936년에는 미 연방법에 의해 미 정부의 공인기관으로 승격됐다.
 
  이 조직은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지 않고, 기부금으로 운영되지만 150만 명이라는 회원의 숫자에서 보듯이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는 단체다. 참고로 본부는 미주리 주의 캔자스시티에 있지만, 미 전역에 7700여 개의 지부가 있다. 외국전참전용사회는 미국 전역을 돌며 정기 총회를 개최하는데, 마침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는 필라델피아 컨벤션 홀에 행사가 마련됐다.
 
  이날 행사를 위해 이 대통령이 8월 1일 저녁 8시가 넘은 시간에 필라델피아 공항에 도착하자, 외국전참전용사회 대표 웨인 리처드 사령관 내외를 위시해 미 전 지역 간부 및 부인들, 존 파인 펜실베이니아 주지사 및 주정부 간부들이 나와 환영해 주었다. 애국가가 연주되고 펜실베이니아 주 방위군 소속 미 제111전투단 제3대대 장병 500명을 사열한 후, 이 대통령은 특별 오토바이 호위대의 인도를 받으며 행사장인 컨벤션 홀에 입장했다.
 
  홀에는 5000여 명의 청중이 운집해 있었다. 1주일간 진행되는 연례 총회 행사 중 이날은 추모행사가 진행돼 박수를 치지 않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리처드 회장이 이 대통령을 ‘역사적인 인권 수호자’라고 소개하자 참석자들은 일제히 기립해 박수갈채로 환영했다.
 
  이 대통령은 행사장의 분위기에 한껏 고무됐으며, 대한민국의 자유와 정의, 나아가 세계의 평화를 위해 헌신하다가 외국에서 숨져간 미군 장병들은 물론, 살아서 그 자리에 모인 애국자들에게 말문을 열었다. 시계는 미국 동부시간으로 정확히 1954년 8월 1일 저녁 8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밤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에 서 있습니다. 바로 자유국가의 용맹스런 전사들 가운데 선 것입니다. 대통령으로서 나는 한국 땅에서 내 조국과 미국, 그리고 다른 여러 나라의 군대를 시찰하러 전선을 방문합니다. 이런 시찰을 통해 나는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헌신하는 장병들로부터 커다란 자극을 받고 더 나은 인간이 돼 국가의 업무로 복귀합니다.
 
  전투 장병에게는 고상하고 성스러운 그 무엇이 느껴집니다. 이는 전투 중이든 아니면 우리를 항상 위협하는 적을 경계하든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삶은 고되고, 위험하며 헌신적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삶은 보람 있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장병은 그가 정당하고 옳다고 알고 있는 대의를 위해서 투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추모행사는 힘이 정의를 만들지 않는다는 위대한 원칙을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친 분들에게 헌정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영웅이 자기 고향과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서 수천 마일 떨어진 한국에서 전사했습니다. 그분들이 그곳에 간 것은 자유와 독립을 열망하는 평화로운 국민을 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잔인한 침략자를 막고, 격퇴한 것이야말로 그들에게는 영원한 영예입니다. 그러나 최종적인 승리의 목표가 성취되지 못한 것은 그러한 용기를 가지고 한국을 방어했던 분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삶이란 언제나 먼저 살다간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는 일이며, 특히 다른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바친 분들에게 신세를 지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신세에 보답하는 길은 자유의 횃불을 높이 드는 것입니다. (중략)
 
  나는 한국 땅에서 피를 흘린 여러분, 그리고 전몰장병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그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투쟁의 목적이었던 그 대의는 결코 꺾이지 않을 것이며, 그 어떤 타협의 산물이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위업과 희생이라는 감동적인 행위는 옳은 것과 정의가 승리하는 길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나는 또한 전몰자 유족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우리 국민 모두가 결코 갚지 못할 정도로 빚을 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음을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 이는 넓게 보자면, 여러분의 사랑스런 가족이 목숨을 바쳐 지켰던 대의를 위해 우리 한국인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싸울 결의를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중략)
 
  여러분이 허락하신다면, 나는 이 기회를 이용해 오늘날 세계 정세가 내포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여러분과 논의하고 싶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한국을 구하기 위한 미국 젊은이들의 영웅적인 이야기를 상세히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중략)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제 탱크와 대포를 가지고 한반도 남쪽으로 밀고 내려왔을 때, 나는 단파방송국으로 가서 나의 고뇌를 토로했습니다. `적들이 우리 문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미국 친구들은 우리를 위해서 그리고 그들 자신을 위해서 무엇을 하렵니까?' 나는 누가 들을 것인지, 아니면 누가 신경을 쓸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만 마일이나 떨어진 워싱턴DC에서 미국 대통령 한 분이 각료회의를 소집해 한국을 방어하기 위해 미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중략)
 
  미군과 유엔군이 한반도로 투입되자, 전쟁의 상황은 우리에게 유리하게 바뀌었습니다. 한국 장병들은 압록강까지 진격했고, 완전한 승리가 확실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싸움에 끼어들었습니다. 그러자 당시 유엔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한국군에게 후퇴 명령을 내렸습니다. 한국인들은 명령에 따르기를 거부했습니다. 6명의 한국군 대령이 소위 ‘전술적 후퇴’에 항의하기 위해서 어느 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전쟁은 정체상태에 빠졌고 적과의 쓸모없는 토론에 휘말렸습니다.
 
  밴 플리트 장군과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최후의 승리를 할 힘과 가능성이 있다고 누누이 천명했으나, 우리는 북쪽으로 밀고 가지 못했습니다. 왜 일까요? 그 이유는 내 생각에, 우리가 제3차 세계대전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핵무기가 가공할 무기이며 한순간에 모든 문명과 모든 인류를 파괴할 수 있다는 취지의 선전을 해 왔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유감스럽지만 이런 선전이 효과를 발휘해 왔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자유세계 전체가 굴복하게 된다면,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일입니다.
 
  나는 그래서는 안 되고, 그렇게 되지도 않으리라고 봅니다. 내가 주장하는 바는 핵무기의 위협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로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유롭게 죽기를 원하는 분위기가 전 세계에 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들 중의 다수가 자유를 위한 투쟁을 촉진시킬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합니다. 만약 우리가 생명을 버린다면, 위대한 대의를 위해서 바쳐져야만 할 것입니다. 그때, 바로 그때에만 우리는 자신들을 보호하고, 우리의 생명의 길을 지킬 수 있습니다.”
 
  이 대통령의 연설은 여기서 잠시 중단됐다. 그는 아직 미국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포문을 열지 않고, 참석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 모으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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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海外戰爭 參戰勇士會 연례 총회 참석 ② (20)
 
 “교착상태 빠진 전쟁… 미국은 정신 바짝 차리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본 연재물 제19화에서 보았듯이 연설의 서론 부분에서 이 대통령은 6·25전쟁의 참화 속에서 산화한 미군 장병의 영혼과 그들의 유가족을 위로하고, 역경 속에 살아남은 참전용사, 그리고 미국 정부와 국민에게 감사의 뜻을 전달했다. 이어 그는 오늘 소개하는 본론 부분에서 보듯이 미국의 우유부단한 한반도 정책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다. 그는 미국의 앞잡이가 아니라, 어느 국가의 지도자도 감히 엄두도 못 낼 배짱을 갖고 미국 여론을 선동하는 자유와 정의의 투사였다.  
 
 최근 대중의 인기를 누리는 우리의 일부 지식인들로부터 흔히 듣는 얘기가 있다. 냉전체제가 끝난 지 20년이 넘었는데, 우리는 아직도 냉전적인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들은 이제 남북관계도 냉전적인 시각에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북한체제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수구적이라고 몰아세운다.  
 
  그것도 모자라 역사를 거꾸로 돌려 해방 후 우리의 정치상황과 대한민국의 건국과정을 그들만의 궤변과 오늘의 잣대로 다시 써보려고 획책한다. 이런 그들에게는 이승만 대통령이 한낱 권력욕에 사로잡힌 미국의 앞잡이요, 친일파의 후견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ㆍ궤변ㆍ잣대가 얼마나 역사와 현실에 동떨어진 것이며 허구적인지를 우리는 이승만 대통령의 생생한 육성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필라델피아 외국전참전용사회 연례총회 참석 연설은 그 좋은 예의 하나다.
 
  “한반도는 민주적이고, 독립적이며, 통일 국가가 돼야 합니다. 그러나 공산 국가로 돼서는 안 됩니다. (중략) 그런데 한국인들이 잘못 알고 있든지 아니면 오해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미국이 진실로 무엇을 하려는지에 대해서 의심을 갖고 있습니다. 휴전회담, 교착상태에 빠진 전쟁, 적과의 협상 등을 생각할 때면, 미국이 자유를 보전하려는 전쟁에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중략)
 
  미국이 자유우방국가들을 대하는 태도와 소련이 자기의 노예가 된 위성국가를 대하는 태도를 비교해 보면 혼란스럽고 심지어 고통스럽기까지 합니다. 소련은 위성국가에게 공산주의의 세계정복을 공언하고, 위성국가들이 그 의지와 결의를 신뢰하도록 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합니다. 이에 비추어 자유세계의 주축인 미국은 자신의 목표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 확고부동하고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미국은 두려움을 보이고 있으며, 이는 심각한 심리적인 효과를 초래합니다.
 
  동물조련사는 사자 우리 속에 들어갈 때, 그가 무서워한다는 것을 사자에게 결코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압니다. 만약 그러면, 반드시 사자의 공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곰과 대적하는 미국은 두려움을 숨기지 않고 있습니다. 정책의 우유부단함을 드러내고, 여기서 찔끔 저기서 찔끔, 또 다른 어떤 곳에서는 조금 더 많이 양보하는 정책을 취합니다. 그 결과, 항상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우유부단한 정책이 나옵니다. 그러니 미국의 강력한 리더십을 바라는 자유세계와 그 국민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미국에 대해 신뢰하지 않기 시작하며, 자유 수호의 희망을 상실하기 시작합니다.
 
  자유세계의 챔피언은 하루는 수백만 달러를 지원하고, 다음날은 그 돈을 회수해서는 안 됩니다. 동맹국에게 무기를 사용하지 말라고 해서도 안 됩니다. 또한 자유국가에게 단숨에 싸울 것을 촉구해 놓고는, 얼마 후 싸우지 말라고 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한 행위는 친구와 지지자들을 크게 낙담시키는 것이니, 어떤 위험과 희생이 따르더라도 피해야만 합니다. 미국을 위한 올바른 진로는 확고부동하고, 강하며, 용맹스러운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의 동맹국들도 동일한 능력을 발휘할 것이고, 적도 공격하는 것을 두려워할 것입니다.
 
  외국전참전용사회 여러분은 이러한 일을 해내는 데 매우 크고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야 합니다. (중략) 내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과제는 지금이나 후에나 언젠가는 공산주의자들과 싸워야 하며, 오래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우리에게 더 불리하다는 사실을 미국 국민에게 설득하는 일입니다. 만일 국민들이 반드시 적에 대항한다는 단합된 의지를 보인다면, 정부는 그에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중략)
 
  며칠 전에 나는 여러분의 위대한 의회에서의 연설에서 미국은 중국 본토를 해방시키는 것을 최우선순위에 두라고 제안했습니다. 중국이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아시아를 구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확고한 계획을 세우고, 이를 단호하게 실행에 옮긴다면, 죽의 장막 뒤에 있는 중국 국민은 공산주의자와 어디서든 투쟁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략)
 
  공산주의자들은 꼭 한번 저지됐을 뿐이며, 그것도 한반도에서 무력에 의해서 저지된 것입니다. 우리가 전투를 중단했을 때 공산주의자들은 침략의 과실을 유지하고 즉각 재침 시도를 위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공산주의는 모든 곳에서 행군 중입니다. 그리고 모든 곳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습니다. 한 나라 한 나라씩 소련이라는 암흑의 구렁텅이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으며, 이렇게 하나씩 상실함으로써 우리와 우리의 대의명분이 약화되고 있습니다.
 
  미국과 유럽의 많은 사람은 우리가 공산주의자들에게 무엇을 양보해서라도 어떻게든 전쟁을 피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전쟁보다도 더 나쁜 것은 없다고 하면서 우리가 공산주의자들을 구슬려서 결국에는 우리와 평화적으로 공존의 장으로 인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이러한 주장을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는 여러분도 나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평화는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이 요구하는 대가를 치르는 것은 평화가 아닙니다. 그 대가란 그들에 의한 세계정복인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자유와 모든 해방의 종말입니다. 그것은 크렘린의 전체주의 지배입니다. 그것은 반대하는 사람들을 세뇌시키는 것이며, 모두의 사상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류가 수천 년간 쌓아 올린 문명사회 내의 모든 가치들을 쓸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의ㆍ자비ㆍ동정 그리고 자신보다 더 위대한 힘을 믿는 인간 신앙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내게 그러한 운명은 죽음보다 나쁘고, 전쟁보다 나쁘며,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나쁜 것입니다. 그러한 평화는 인간의 멸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철저히 반대하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저 평화만을 사랑하는 분들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압니다. 여러분에게 말하고자 합니다. 미국이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 경고해 주십시오. 공산주의에 대한 위험뿐만 아니라, 평화에 대한 그릇된 기대 때문에 모든 것을, 심지어 개인까지도 희생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위험에 대해서 말입니다.
 
  미국이 정의와 자유의 편에 서서 두 번씩이나 세계를 구원했던 바로 그 정신을 다시 점화시켜 주십시오. 그리고 그 이전에 위대한 공화국의 창업과 이후 그 보전을 이끌었던 정신을 다시 점화시켜 주십시오.
 
  대의명분이 옳고 달리 방법이 없을 때, 여러분은 항상 싸웠고 또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대의는 옳으며, 그것을 지키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같은 대열에 서 있습니다. 수백만의 다른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잔혹한 압제자들에게 행동으로 대항할 기회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공산주의의 물결을 밀어내고, 자신과 자식들을 위해서 안전하고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더 이상 기다리지 맙시다. 우리의 대의명분의 정당성에 대한 확신과 완전히 승리한다는 확고한 결심을 갖고 전투를 준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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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시민 환영 퍼레이드 (21)
 
 “양국 국민이 단결하는 한 장래 희망이 있습니다.”
 
 워싱턴과 필라델피아에서의 바쁜 하루를 보낸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8월 2일 월요일 새벽 12시 10분에 뉴욕으로 돌아왔다. 국빈방문 일정으로는 이례적인 야간 이동이었다. 항공기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이 대통령 일행은 즉시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로 향했다. 이곳은 예나 지금이나 뉴욕에서 가장 역사 깊은 최고급 호텔이다.
 
  요즘에는 볼 수 없는 광경이지만 당시만 해도 국빈방문의 꽃은 오픈카 퍼레이드라고 할 수 있다. 수십만에서 백만 명의 시민들이 국빈을 환영하고, 고층건물에서 오색 테이프를 날리는 행사인 퍼레이드는 초청국과 방문국의 우의를 확인하는 가장 중요한 이벤트였다. 특히 뉴욕의 그것은 정평이 있었다. 원래는 외국원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공훈이 있는 미국 영웅들에게 예우를 표시하는 행사였다.
 
  6·25전쟁 발발 이후 맥아더 장군이 뉴욕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외국원수로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처음 퍼레이드에 초대되는 영예를 얻었다. 그만큼 미국 정부나 국민은 아시아의 반공전선을 지키는 대한민국 국민과 대통령, 그리고 무엇보다도 용감한 대한민국의 국군에 대해 각별한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8월 2일. 이날은 아침부터 부슬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 한여름의 더위를 식혀주는 청량제 역할을 했다. 오전 10시 와그너 뉴욕시장 부부가 이승만 대통령 내외를 모시러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 도착했다. 시장 부인은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꽃다발을 선물하고 두 내외는 담소했다. 이 대통령 내외와 와그너 시장 일행이 호텔을 출발한 것은 11시 30분이었다.
 
  퍼레이드는 로우어 브로드웨이(Lower Broadway)에서 환영식장이 마련된 뉴욕시청까지 차량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30여 대의 차량이 이동하는 동안 행인들의 횡단을 막기 위해 목책을 쳐 놓은 거리에는 100만 명의 뉴욕시민들이 도열해 박수를 보냈으며, 고층 건물에서는 눈보라처럼 쏟아지는 오색종이와 테이프가 뿌려졌다.
 
  이 대통령은 와그너 시장과 제1호차에, 프란체스카 여사는 시장 부인과 제2호차에 탑승했는데, 이 대통령은 열렬한 환호에 매우 흡족해하며 오픈카에서 일어나 모자를 흔들어 환호에 답례했다.
 
  정오에 일행은 뉴욕 취주악대의 연주 속에 시청 광장에 도착했다. 광장에는 뉴욕 시의 각계각층 인사, 군 지휘관, 그리고 뉴욕 시민 2만5000명이 이 대통령 내외를 기다리고 있었다. 환영행사 시작과 함께 와그너 시장이 말문을 열었다.
 
  “뉴욕 시 의회 의장님, 귀빈 여러분, 뉴욕 시민 여러분, 그리고 우리의 명예로운 소중한 친구이자 동반자이신 이승만 박사님. 대통령님이 유엔의 고장이자, 자유세계의 중심지인 뉴욕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뉴욕의 800만 시민은 귀하의 용기, 귀하의 용감한 행위, 귀하의 애국심, 귀하의 자유에 대한 열정적인 헌신에 경의를 표합니다. 그리고 귀국의 국민과 같이 인간의 자유, 인격의 고귀함, 그리고 공동의 명예를 신봉하는 우리 모든 미국 국민의 애정, 따뜻한 마음씨 그리고 찬사를 모아 환영인사를 드립니다.
 
  1950년 공산주의자들이 무자비한 공격을 개시했을 때 대통령님께서 홀로 전례 없는 용기와 역동적인 지도력을 가지고 한국 국민을 자유의 기치 아래 동원했습니다. 이를 역사는 영원히 새겨 놓았으며, 지구상의 인간은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뉴욕은 특별히 자랑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이곳에 소재하는 유엔이 그 존립 목적과 본질에 관한 최초의 중대한 시험대에 섰을 때 귀하의 나라를 지원했다는 사실입니다. 유엔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높은 대의명분을 내걸고 대한민국을 도왔습니다.
 
  대통령님, 귀하는 마음과 정신이 젊었습니다. 귀하는 애국심과 민주주의의 상징입니다. 귀하께서 이곳에 오신 것을 반갑게 생각하며, 언제나 유엔의 고장인 뉴욕을 귀하의 도시, 귀하의 고향으로 기억해주시기를 희망합니다.”
 
  와그너 시장은 간략한 인사말 후에 이 대통령에게 뉴욕 명예훈장과 기념증서를 주었다. 이어 밴플리트(1892~1992: 6·25전쟁 중 우리 국군의 성장에 크게 기여했으며, 공군조종사이던 외아들이 1952년 북한지역에서 작전 중 전사) 장군이 이 대통령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이 대통령은 세계 반공진영의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만날 때 눈물을 보이며 항상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미국의 청년들이 한국에까지 와서 싸워주는 것을 더 이상 바라지 않습니다. 부디 귀국 정부에 건의해서 미국 청년을 이곳에 보내는 대신에 무기를 보내주라고 하시오. 그러면 모든 싸움과 피 흘리는 희생은 우리가 맡아서 할 것이오.’ 이 대통령은 나를 비롯한 우리 미군 장병들을 사랑으로 대해 주었으며, 우리는 그에게 경의를 표했습니다.”
 
  훈장을 수상하고 밴플리트의 소개인사 후 이 대통령은 광장에 모인 뉴욕 시민 앞에서 훌륭한 영어로 간단한 즉흥 연설을 시작했다.
 
  “뉴욕 시민 여러분,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나는 제3차 세계대전을 지금 하느냐 혹은 시기를 미루느냐하는 점에서만 견해 차이가 있습니다. 나도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전 세계를 파국으로부터 구출하려고 한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조만간 일어날 것이며, 늦어지면 그것은 더 끔찍해질 것입니다. 미국인들과 다른 자유세계 국민들은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 지금 행동해야만 합니다.
 
  밴플리트 대장이 훈련시킨 한국 청년들이 이제 극동 최강의 반공군대로 변모했습니다. 한국군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밴플리트 장군이 다시 한국에 와서 더 많은 한국 군대를 양성해주기 바랍니다.”
 
  여기서 잠시 연설을 멈춘 李 대통령은 연설의 달인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그는 비통한 표정을 지으며 연설을 마무리했다.
 
  “퍼레이드 도중에 차량 행렬을 선도하던 오토바이 순찰대장 조지 피츠패트릭(George Fitzpatrick)의 아들이 1952년 한국 전선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청년은 알지도 못하는 나라로 가서 자유와 정의를 위해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것입니다. 이것이 귀국의 청년들과 우리 청년들이 목숨을 바쳐 싸워 온 정신입니다.
 
  피츠패트릭 군과 같이 수많은 미국인들이 역사상 여러 차례 그들이 신봉하는 자유를 위하여 싸워 온 것처럼, 우리 한국인들도 우리의 자유를 위하여 싸울 용의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자유가 생명 자체보다도 더 귀중함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양국 국민들이 굳건하게 단결합시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한 장래에 대한 희망이 있습니다. 나는 우리가 다 같이 살아서 희망과 안전의 새날의 서광을 보게 되리라는 것을 굳게 믿습니다. 하느님이 여러분께, 그리고 우리가 함께 지탱하는 대의에 축복을 주실 것을 기원합니다.”
 
  국가원수의 연설은 이같이 감동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감동적인 연설은 말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것이다. 이 대통령은 타인을 감동시키는 따뜻한 마음을 가졌었기에 이런 훌륭한 연설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바쁜 퍼레이드 중에 조지 피츠패트릭 순찰대장을 불러 격려하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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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시장 주최 오찬회 및 명예박사학위 (22)
 
 “공산분자들은 오직 힘으로만 격퇴할 수 있습니다”
 
 
 1954년 8월 2일 오후 1시, 뉴욕 시청 광장에서 환영행사가 끝난 후, 와그너 시장은 이승만 대통령을 위해 월도르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남자들만이 참석하는 오찬회(stag luncheon : `stag'는 수사슴을 의미하며 `stag luncheon' `stag party'는 여자 동반 없이 남자만 참석하는 오찬회, 파티임)를 개최했다. 행사는 애국가와 미국 국가연주로 시작됐다. 이어 축원기도가 있었는데, 미국의 저명인사인 프란시스 스펠만(Cardinal Francis Joseph Spellman, 1889~1967) 추기경이 집전했다.
 
 ▲뉴욕 시장 주최 오찬회
 
 스펠만 추기경은 미국 가톨릭의 대명사처럼 추앙받는 분이었다. 특히 그는 우리나라와도 남다른 인연을 갖고 있던 절친한 친구였다.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8일 그는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군과 함께 이 땅을 처음 밟았다. 이승만 대통령이 같은 해 10월 16일 미국에서 환국하기 1개월 전이다. 이후 6·25전쟁 기간 동안인 1951년부터 1953년까지 매년 성탄절에 우리나라를 방문해 주한미군의 신앙생활 및 한국의 천주교 발전을 위해 큰 기여를 했다.
 
 여담이지만, 6·25전쟁 중에 기독교는 미군이나 우리 국민에게 정신적 위안을 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구교의 스펠만 추기경 이외에 신교의 빌리 그래함(William Franklin Graham, Jr. 1918~ )의 선교활동도 빼 놓을 수 없다. 그는 전쟁이 발발하자, 트루먼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북한의 군사적 이념적 위협에 단호히 대처할 것을 촉구했을 뿐만 아니라, 1952년 12월 겨울휴가를 반납하고 부인 루스(Ruth)와 함께 방한한 적이 있다. 마침 스펠만 추기경이 방한했을 때와 겹치는 시기였다.
 
 오찬회가 시작되자, 와그너 시장은 우선 오찬에 참석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전문을 받았다고 말하며, 그 중 대표적인 전문 하나를 선택해 읽었다.
 
  “와그너 시장님, 본인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뉴욕에 있지 못하게 되어 뉴욕 시가 이승만 대통령을 위해 베푸는 환영 오찬에 참석할 수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본인이 이승만 대통령을 매우 존경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아실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추구하는 것은 위대한 대의이며, 그분은 자유세계의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그분의 애국심과 불굴의 의지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행사에 참석하지 못함을 널리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더글러스 맥아더 드림.”
 
  점심 식사 후, 이승만 대통령은 참석자들에게 간략하게 연설했다.
 
  “오직, 힘으로 공산침략자들의 무릎을 꿇게 할 수 있습니다. 오직 힘으로만 우리는 공산분자들을 격퇴하는 데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공산주의자들과 투쟁할 것을 호소합니다. 만약 누구든 평화회담이나 휴전으로 한반도 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하는 자가 있거든, 그런 자에게 속지 말라고 여러분께 말해 두고자 합니다.”
 
  행사에는 밴 플리트(Van Fleet, 1892~1992) 전 주한 유엔군사령관과 윌리엄 딘(William Dean, 1899~1981) 소장 등 6·25전쟁의 영웅들이 참석했다. 오찬 연설에서 이 대통령은 특히 미 보병 제24사단장으로 6·25전쟁에서 공산군의 포로(1950.8.25~1953.9.4)가 됐다가 전후 포로 교환 시 석방된 딘 소장의 노고를 치하했다.
 
  잠시 전설적인 종군 여기자 마거리트 히긴스(Marguerite Higgins, 1920~1966)가 그녀의 저술 ‘War in Korea’(1951, 국내에서 2009년 ‘자유를 위한 희생’이란 제목으로 번역출간)에서 기록해둔 딘 장군의 활약상을 소개하고자 한다.
 
  “딘 장군은 내가 아는 한 가장 친절하고 훌륭한 군인 중 한 명이다. 6·25전쟁 초 그가 행한 용감한 행동은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사단장인 그는 몸소 탱크 5대를 인솔하여 화염에 싸인 바리케이드를 뚫고 옛 전우인 미 육군 제19 보병연대장 멜로이(Guy S. Meloy, 1903~1968, 주한 미 제8군사령관으로 1961~1963년 기간 한국 근무)를 구하고, 직접 바주카포를 쏘아 적의 탱크를 파괴했다. 또한 그는 부상을 당하고도 대전이 적에게 포위되어 미군의 방어가 더 이상 소용이 없게 되자, 패잔병을 모아 필사의 탈주를 시도했다.”
 
  이후 딘 소장은 3년 이상 북한에서 포로생활을 했으나, 미국 정부는 그에게 미국 최고의 무공훈장인 명예훈장을 수여했다.
 
  이어 와그너 시장이 이 대통령을 위한 축배를 제안했다.
 
  “대한민국 대통령을 위하여, 세계의 위대한 시민을 위하여, 용기와 지도력이 생동하는 상징을 위하여, 그리고 이 하나의 지구촌에서 우리의 동맹, 우리의 이웃, 우리의 친구인 이승만 박사를 위하여!”
 
  이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화답했다. “와그너 시장과 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도시를 위하여!”
 
  ▲컬럼비아 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 수여
 
  이승만 대통령은 이날(8월 2일) 오후 4시 부부동반으로 개교 200주년을 맞은 컬럼비아 대학(Columbia University)을 찾았다. 국빈방문 기간 중 2번째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기 위해서였다. 이 대통령은 7월 30일,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뉴욕에 소재한 컬럼비아 대학은 미 동부 명문대학(Ivy League : 하버드·예일·펜실베이니아·프린스턴·컬럼비아·브라운·다트머스·코넬 등 8개 대학)이며, 하버드(1636), 윌리엄·매리 윌리엄(1693), 예일(1701), 프린스턴(1746) 대학에 이어 미국에서 5번째로 역사가 오래 된 대학이다. 또한 오바마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3명의 대통령을 배출한 대학이며, 현재 세계 3위의 부자 워런 버핏의 출신교이기도 하다. 참고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48년부터 1953년까지 컬럼비아 대학의 총장을 역임했었다.
 
  이날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도착하자, 대학 교정에는 총장 대리 이하 많은 교직원이 도열해 있었다. 학위수여식은 마침 그레이슨 커크(Grayson Louis Kirk, 1903~1997) 총장이 출장 중이어서 총장 대리가 주재했다.
 
  총장 대리의 대통령 소개 및 학위수여식에 이어, 이 대통령은 준비해간 기념사를 읽지 않고 다음과 같은 요지의 즉흥 연설을 했다.
 
  “우리는 여전히 전투에서 패배하고 있습니다. 적은 모든 곳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으며, 우리는 한걸음씩 양보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자유국가들의 챔피언이자 리더인 미국 정부가 지도적인 위치에 서서 자유세계를 승리로 이끌지 않고도 우리가 자유로워지고 생존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미국의 도움이 없이는 자유 대한, 자유 중국 그리고 자유 유럽도 없는 것입니다.
 
  아시아를 구하는 데 일조해주시오. 이것이 여러분에게 하는 나의 호소입니다. 여러분은 자유를 위해 싸우는 혁명가들을 격려해야만 합니다. 그들을 저버리지 말라고 간절히 바랍니다. 이들을 버리는 것은 한국, 중국, 기타 여러 나라뿐만이 아니라 미국 자신에게도 재앙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여러분이 전면에 나서서 세계의 자유를 사랑하는 국민들을 해방과 자유로 인도해 주도록 말입니다.” 
 

 

 

 

1954년 李承晩 대통령의 미국 여행 이야기(下)
 
 
 6.25 참전 결단을 내린 트루먼 전 대통령을 찾아가 만나다.
이현표(이동복소개)    
 
 

李承晩 대통령의 미국 여행 (下)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박사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었는지를 대한민국의 젊은 세대가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은 민족적 비극입니다. 이 대통령이 초대 대통령으로 재임(1948-1960)하던 기간 중 정치적 독재에 흐르고 장기집권 논란을 불러일으킨 행적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평생을 바쳐서 일제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대한민국 건국을 이끌었으며 이 땅에 민주주의의 나무를 심고 공산주의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 낸 그의 위대한 업적은, 장공속죄(將功贖罪)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그의 과실(過失)을 가지고 시야비야(是也非也)하는 것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더구나, 이 나라의 젊은이들이 그를 상대로 심지어 ‘친일(親日)▪친미(親美)’의 누명을 씌우는 인격살인(人格殺人)에 동참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역사에 대한 중대한 왜곡이고 모독입니다.


어째서 왜곡이고 모독인가를 밝혀 주는 귀중한 글을 上/中/下의 세 톰막으로 나누어서 여기 소개합니다. 이 감동적인 글은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을 역임한 이현표 선생이 1954년7월26일부터 8월13일까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국빈방문한 80세의 노(老) 대통령이 19일간에 걸쳐 전개한 외교활동을 엮어서 34회에 걸쳐서 <국방일보>에 연재한 내용입니다. 특히 이 글은 방미 기간 중 이 대통령이 행했던 모든 연설문을 담고 있는 소중한 사료(史料)이기도 합니다. 모쪼록 많은 분들이 이 글을 읽고 그 동안 사장(死藏)되었던 역사적 진실에 눈을 뜨고 왜곡된 사관(史觀)을 교정(矯正)하는 기회로 삼기를 바랍니다. 특히 초▪중▪고등학교 선생님들이 이 글을 읽고 학생들이 읽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기를 바라 마지 않습니다. 2012년1월1일 李東馥 올림

 

 


韓美財團 만찬회 ① (23)


한국 원조 위해 설립한 `美 상류 사교모임'의 전형


 이승만 대통령은 훗날 국빈방문 중 가장 즐거워했던 행사로 1954년 8월 2일 한미재단이 주최한 만찬회을 꼽았다. 1955년에 발간된 이 대통령의 방미 영문기록인 ‘President Syngman Rhee's Journey to America’도 한미재단 만찬회 행사를 가장 비중 있게 취급하고 있다. 당시 미국 상류사회의 사교모임의 전형을 보여주는 이날의 행사를 본 연재물에서도 비중 있게 다루고자 한다.


 한미재단 만찬회를 다루기 전에 한미재단(The American-Korean Foundation)이 어떤 단체인지를 우선 소개하고자 한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6·25전쟁의 휴전협상이 거의 마무리 되어 갈 무렵, 대한민국에 대한 미국 정부의 공식 원조 이외에 민간차원의 지원을 신중하게 고려하게 됐다. 그는 1953년 5월 5일 자신의 동생인 밀턴 아이젠하워(Milton Eisenhower, 1899~1985)를 이사장으로 하는 한미재단의 설립을 발표하고 같은 해 6월 7~14일까지 일주일간 대대적인 모금 운동을 전개했다.


 이렇게 발족된 한미재단은 1954년 5월, 새로운 이사장으로 미국 재활의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하워드 러스크(Howard A. Rusk, 1901~1989)를 선출했다. 그는 1967년까지 재단을 이끌면서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나라를 위해 다양한 형태의 민간지원 사업을 전개했다. 한미재단은 러스크 이사장이 물러나고, 한국이 경제적으로 발전해가면서 지원활동은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잠시 한미재단이 이승만 대통령의 국빈방문 기간 중에 마련한 흥미 있는 사업 하나를 소개하기로 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뉴욕 방문을 마치고 시카고에 머물던 1954년 8월 4일 저녁,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의 리볼리 극장(Rivoli Theatre)에서는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 1899~1980)이 제작하고 감독한 영화 ‘Rear Window(1954)’의 시사회가 개최됐다. 각국에서 파견된 유엔 외교관을 비롯해 뉴욕의 저명인사 2000명이 참석한 이날 행사는 바로 한미재단이 대한민국을 돕기 위해 주최한 자선행사였다.


 1950년대에 우리나라에도 ‘이창(裏窓)’이라는 제목으로 상영된 ‘Rear Window’는 히치콕의 걸작이자, 20세기 최고 명화의 하나이며 100만 달러의 예산을 투자해 무려 26배인 26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린 대박 영화다. 제임스 스튜어트(James Stewart, 1908~1997)와 그레이스 켈리(Grace Kelly, 1929~1982)가 주연한 이 영화는 오늘날에도 DVD로 제작돼 널리 팔리고 있다(포스터 사진 참조). 1954년 8월 5일자 뉴욕 타임스 신문은 이날의 자선 문화행사를 상세하게 보도한 바 있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서, ‘이창’ 시사회가 개최되기 이틀 전인 8월 2일, 한미재단이 주최한 이승만 대통령을 위한 만찬회장으로 독자 여러분을 안내하고자 한다. 뉴욕 월도르프 아스토리아에서 개최된 이 행사에는 호텔 연회장이 수용할 수 있는 최대의 인원인 1500명이 참가했다. 행사 참석 신청자가 3500명이나 되어서 부득이 2000여 명에게는 양해를 구했을 정도의 인기 있는 행사였다. 특히 이날 만찬회는 저녁 9시부터 공중파 TV와 라디오로 생중계되는 중요한 행사였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도 영어연설에 상당히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만찬회는 1954년 8월 2일 저녁 8시, 한미재단 러스크 이사장의 행사 개막을 알리는 인사말에 이어, 한국 소프라노 가수 김자경 씨가 미국 오르간 반주자의 반주에 맞춰 한미 두 나라의 국가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됐다. 이어 스펠만 추기경이 축원기도를 올렸다.


 “성령이시여! 당신은 빛이요, 당신의 마음은 모든 나라의 빛입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나라들이 영광스럽거나 암울하거나 평화롭거나 전쟁 중이거나 기쁘거나 슬프거나 늘 함께하십니다. 한국이 지금 침략의 십자가에 못 박혀 있듯이 어느 나라건 그런 박해를 받고 있을 때 당신께서는 고통 속에 사는 그 민족의 버팀목이셨습니다.


 한국의 하늘이 화염으로 가득하고, 조용한 땅이 행군 발자국 소리와 총성으로 전율할 때 당신은 그곳에 계셨습니다. 당신은 한국인의 사기를 높여주셨고, 한국의 아들들이 자유를 위해서 그들의 가정과 제단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의 영혼을 지키기 위해서 적과 맞서서 싸우는 데 힘을 보태주셨습니다.


 성령이시여! 전쟁의 상처로 고통받는 한국을 위로해 주소서! 북쪽 땅을 잃어버린 한국을 위로해 주소서! 한국에 축복을 내려주실 것을 당신께 기도하나이다. 주여, 용맹스러운 마음과 헌신적인 영혼을 가진 한국이 당신의 영광을 실현하는 성전이 되고 당신이 존재하심을 보여주는 성지가 되게 하옵소서! 아울러 한국이 비록 작지만, 당신께 충성하며 독립과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헌신함으로써 서로 간에 믿음을 키워가는 위대하고 참된 남녀들이 사는 나라가 되게 하옵소서!”


 축원기도가 끝나자 러스크 이사장이 행사의 의의를 소개했다.


 “신사숙녀 여러분, 한미재단을 대표해서 저는 오늘 이 거대하고 상서로우며 역사적인 행사에 참석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우리의 환영 인사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우리는 세계의 위대한 애국자들 중의 한 분이며, 우리의 위대한 친구 중의 한 분이며,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영웅 중의 한 분을 만나서 경의를 표하고자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님의 연설이 전국적으로 TV와 라디오로 중계되는 관계로 방송스케줄상 뜻하지 않게 우리의 프로그램을 약간 변경해야만 하겠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처음에 하시고 불가피하게 시장이 대통령님 다음으로 연설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이어서 러스크 이사장은 이승만 대통령 내외를 비롯해 한미재단의 장학금을 받고 미국에서 유학 중인 100명의 학생과 200명의 한국 교포가 만찬회에 참석했다고 소개했다. 또한 그는 뉴욕을 비롯해 미국의 주지사 및 시장 20명도 만찬에 참석했다고 말하고, 한미재단의 첫 번째 사업으로 미국의 영화 산업의 한국에 대한 기여를 언급했다.


“1945년 해방 직후에 한국을 돕기 위한 모금행사를 개시한 적이 있었는데 8년 만인 금년(1954년) 봄부터 다시 한국을 돕기 위한 자선행사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모레(8월 4일)에도 멋진 자선 시사회가 예정되어 있으며, 가을에도 계속될 것입니다. 영화에서의 수익금을 한국에 지원하는 이 사업을 책임지고 있으신 분들이 이곳에 참석해주셨습니다. 박수로 맞아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러스크 이사장은 ‘Help Korea Train(한국 돕기 기차 사업)’과 한국 어린이 합창단의 미국 순회공연에 대해서 소개했다.


 “현재 미국 철도협회 회장이며 ‘한국 돕기 기차 사업’을 개시한 분이 와 있습니다. 그의 노력으로 현재 기차의 화물칸으로 따져서 750량의 물품이 모아졌는데, 이중 9000톤의 물량이 배에 실려 한국으로 향하고 있으며, 10일 이내에 도착할 것입니다. 첫 배에 실린 물품은 11칸의 기관차, 25대의 버스, 200대 이상의 신형 차와 트럭, 500대의 트랙터 등 농기구, 차량 1대 분량의 연필, 차량 2대 분량의 가죽, 차량 20대 분량의 광목·아연·무쇠·인공수족과 부목(副木)·약품과 세제·분유·건포도 등입니다. 이와는 별도로 8대 기차 분량의 또 다른 물건들이 미국 대륙을 횡단해 여러 대의 배에 실려서 한국으로 가는 도중에 있습니다. 또한 이곳에는 한국 어린이 합창단의 미국 순회공연을 위해서 지원해준 항공사 대표들과 버스업체 대표들도 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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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美財團 만찬회 ② (24)


“한미재단이 이뤄 놓은 것은 기적과도 같은 것”


미국 상류사회의 만찬회·오찬회에 참석해 보면 우리와는 사뭇 다른 점을 느낄 수 있다. 식사하는 모임이라지만 식사보다는 적극적인 사교 모임의 성격이 강하다. 특히 참가한 사람들을 치켜세우는 발언을 반복하는 등 지루할 정도로 서로 간에 체면을 세워주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런 의례적인 행사에 익숙해지지 않고는 서구 사람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으며, 그들과의 교류도 불가능하다.


1954년 8월 2일, 이승만 대통령을 위한 한미재단의 만찬회 모습. 이날 만찬회에는 1500명이 참석했으며 이 대통령의 연설은 TV와 라디오로 미국 전역에 중계됐다.


 1954년 8월 2일 저녁 한미재단의 이승만 대통령 초청 만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러스크 이사장은 6·25전쟁 휴전 이후 재단이 할리우드 영화의 자선 시사회 및 ‘Help Korea Train(한국 돕기 기차)’ 사업 등을 통해 한국에 대한 민간차원의 지원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고 소개한 후, 1500명의 참석자 중에서 주빈석에 앉은 인사들을 일일이 거명하기 시작했다.


 “여러분이 한국에 가서 프란체스카 여사를 만났다면 그분을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우아함, 그 사랑스러움, 그 용기, 그 힘을 말입니다. 다른 분들에 앞서 우선 프란체스카 여사를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님, 와그너 뉴욕 시장님이 이 자리에 함께하셨습니다.


 다음은 본인의 왼쪽 끝 좌석에 앉은 한미재단 이사이자 한국에서 3가지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유진 테일러 씨를 소개합니다. 그 옆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신뢰하는 절친한 친구이자 저술가인 올리버 씨입니다. 그 옆에는 또 다른 한국 애호가 폭스 모트 씨입니다.”


 러스크 이사장은 이런 식으로 10여 분 동안 30여 명의 인사들을 소개한 후 9시 정각에 미 공중파 TV와 라디오의 중계가 시작되자 다음과 같이 오프닝 멘트를 했다.


 “TV를 시청하고 라디오를 청취하는 신사숙녀 여러분, 오늘 밤 이곳 월도르프 아스토리아 호텔 대연회장에 한미재단 회원과 손님들이 모여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분을 존경하고 찬사를 보내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이곳에 계신 분이나 세계의 시청자 여러분을 위해서 이 위대한 영웅을 소개하는 데 누구보다도 적합한 분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입니다.


 밴플리트 장군은 한국에서 한국군의 아버지라고 사랑과 존경과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는 분입니다. 장군은 우리가 소개하려는 분과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이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선 여러분에게 미국의 가장 위대한 군인의 한 사람이자, 한국의 위대한 친구의 한 사람인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을 소개합니다.”


 이어 밴플리트 장군이 마이크 앞에 서서 발언을 시작했다.


 “오늘 행사에 참석해주신 여러분, 그리고 시청자 여러분, 제가 여기서 가장 위대한 세계 지도자 중의 한 분을 소개해 드리는 것을 특권이자, 영광이며, 기쁨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시대나 몇 명의 위대한 분이 있지만 흔히 한 세기가 지날 때까지 알지 못하곤 합니다.


 그러나 여기 아직 살아계시는 동안 위대하다고 알려진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위대한 애국자요, 위대한 학자요, 위대한 정치가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분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경건한 숭배자이며, 그 때문에 더욱 위대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의로운 일만을 행하고 그른 일을 결코 하지 않는다는 신조로 삼고 살아온 분입니다. 저는 대통령이기보다는 정의로운 사람이기를 바라지만, 이승만 박사는 정의로울 뿐만 아니라 대통령이기도 하여 솔직히 부럽습니다.


 한국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 저는 이승만 대통령이 우리 미국 병사들을 환영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분은 또한 내게 말했습니다.


 ‘장군, 나는 귀하의 젊은이들이 고향인 미국에서 그렇게도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싸우는 것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젊은이는 이제 자유를 위해 싸우고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부디 우리에게 무기를 제공하고 젊은이들을 훈련시켜서 우리 스스로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귀하의 정부에 건의해 주기 바랍니다.’


 이 대통령이 말씀한 한국의 젊은이들, 강인한 한국군 장병들은 전투에 임해서는 정말 목숨을 개의치 않고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이것이 우리 미국 병사들이 한국의 젊은이들을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특히 위대한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장병과 우리 미군 병사들을 하나같이 사랑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자유를 위한 우리의 투사,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 각하를 소개합니다.”


 드디어 밴플리트 장군의 극찬을 받은 이승만 대통령이 연단에 서서 영어 연설을 시작했다.


 “나는 오늘 밤 한미재단이 미국에서 멀리 떨어진 우리나라에 놀랄 만한 관용을 베풀어준 데 대해 한국 국민의 이름으로 감사드리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끝이 없다는 것을 보았을 것이며, 이들 중 미국정부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한미재단은 조사하는 데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고, 까다롭고 번잡한 절차를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이루어 놓은 것은 기적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도움이 없었다면, 곤궁에 처한 수십만 한국인의 형편이 지금보다 훨씬 나빠졌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민간단체인 한미재단의 도움이 숭고한 의미가 있는 이유입니다. 이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지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간 원조 계획에 의해 제공된 재원·상품·식량은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의류는 우리 국민을 겨울 동안 따뜻하게 해 주었고, 여러분의 다른 활동은 한국 국민에게 그들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물질적인 도움을 즉시 주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한미재단과 다른 기관들이 미국인과 한국인 간에 맺어놓은 정신적 유대가 더욱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공산주의 위협을 받고 있는 세계 속의 두 민족입니다. 한국은 인구·자원·산업·국부 면에서 미국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와 민주주의에 관해서 같은 신념과 정서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용기 역시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적을 물리치고 이 땅에 영원한 평화를 실현하는 성전에서 미국 편에 서는 것, 그 이상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미국이 우리를 돕는 정신을 보여주는 작은 이야기를 여러분께 들려 드리고자 합니다.


 워싱턴 DC에서 국무부 소속 운전기사 중 한 사람이 한국 돕기 운동의 하나로 시행되는 여러 행사 중의 하나로 의류 기부를 했다고 합니다. 그는 몇 년 전에 미국을 방문한 한국 공식대표단을 위해 운전한 것을 계기로 한국을 적극적으로 돕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의 부인과 두 딸도 절약할 수 있는 한 절약해 기부했고, 자신은 단 한 벌인 여름 신사복도 기부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한국 국민에 대한 미국 국민의 목소리입니다. 이런 얘기를 듣는 것은 정말 가슴 찡한 경험입니다.”


 여기서 이승만 대통령은 북받치는 감동을 억제하려는 듯 잠시 연설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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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美財團 만찬회 ③ (25)


“한반도 통일 위해 다시 전투를 해야만 합니다”


1954년 8월 2일 저녁 9시, 뉴욕 월도르프 아스토리아 호텔 연회장에서의 한미재단 주최 만찬회. 이승만 대통령은 밴플리트 장군(6·25전쟁 중에 주한유엔군사령관을 역임하면서 북한 공산집단의 공격 저지 및 한국군의 군비증강에 큰 기여를 했을 뿐만 아니라, 6·25전쟁에서 아들을 잃었음)의 소개로 연단에 올라 우선 한미재단이 우리나라에 민간 차원의 지원을 해준 데 대해 감사를 생생하게 실례를 들어 소개한 후, 자신이 마음에 품었던 얘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1954년 5월 2일, 한미재단 만찬회 참석자 중 왼쪽부터 스펠만 추기경, 이승만 대통령, 와그너 뉴욕 시장, 밴플리트 장군.


 “워싱턴 DC의 몇몇 미국 기자들이 내게 방미에 대해 만족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미 당국자들과 어떤 일을 해냈고, 얼마나 받아냈으며, 고무되었는지 혹은 낙담했는지를 알고 싶어 했습니다. 내가 미국을 방문한 임무가 단지 미국의 호의를 받는 데 있었다면,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시간적으로 기회가 없어 이야기하지 못한 다른 것들이 있습니다.


 나는 미국 관리를 상대로 하는 공적인 차원에서 그다지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코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말하고자 합니다. 내가 여기 온 것은 더 많은 원조, 더 많은 자금, 기타 무엇을 요구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얻은 것이 부족하다거나 굶어 죽겠다는 등등의 불평을 말하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난관에 처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울면서 도움을 갈구하지 않습니다. 우리 국민은 눈물을 감추고 조용한 경의와 용감한 미소로 기아와 파괴를 이겨내는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구걸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구걸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친구들이 우리를 위해 제공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감사하며, 앞으로도 감사한 마음을 가질 것입니다.” (중략)


 미국 정부나 민간의 지원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면서도 대한민국 국가원수로서의 최소한의 자존심을 강조한 이승만 대통령은 연설을 본론으로 몰고 갔다.


 “이제 여러분이 내게 허락한다면, 한반도 통일이라는 내 마음 한가운데의 얘기를 하고자 합니다. 이 주제는 많은 오해가 있어 왔기에 나는 이 자리에서 우리나라의 입장을 명백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한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통일이 돼야 한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유엔과 미국이 그렇게 언급했고, 소련도 한반도에 자유 독립 국가를 만드는 데 동참했다는 점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미국은 부지불식간에 불유쾌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바로 한반도의 38선 이북을 소련이 점령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실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남의 것을 집요하게 자기 제도에 편입시키려고 합니다. 한반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련인들은 북한을 꼭두각시로 만들어 1950년 6월 한반도 남쪽을 침략하게 만들었습니다. 미국과 유엔이 우리를 구하기 위해 왔으며, 불리하던 전황이 역전되어 승리와 통일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다시 공격해 왔지만 우리는 전쟁에 승리할 자신이 있었습니다. 한국군은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 덕분에 막강한 전력을 갖게 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필사적으로 북진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미국 정부와 군 당국은 중공군의 주요 거점들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판문점과 제네바에서 적과의 쓸데없는 휴전회담과 소용없는 협상들이 계속됐습니다. 오늘날 한반도에는 평화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휴전도 없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이를 거부하고 날이면 날마다 수없이 위반하기 때문입니다. 사정이 이러한데 미국의 2개 사단이 철수하고, 공군 부대도 철수했습니다. 이는 바로 공산주의자들이 바라는 것이며, 휴전협정에 서명할 때 그들이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전략은 매우 단순합니다. 우리가 약해지고 그들이 강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4년 전처럼 아무런 예고도 없이 공격해 올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전투를 해야만 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적이 선택한 시점이 아니라 우리에게 형세가 유리할 때에 빨리 싸움을 하는 것이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우리 군 지도자들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미국의 여러 전략가들도 이에 동의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많은 미군 고위관계자들이 휴전을 끔찍한 실수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승리하지 못한 전쟁은 처음부터 다시 싸워야만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한반도 통일이 우리나라의 이해관계보다도 더 큰 의미를 갖는 결정적이고 긴박한 이유가 있습니다. 여태까지 자유세계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항해서 느슨한 전투를 함으로써 유럽·한반도·중국·인도차이나에서 물러났습니다. 동맹국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남아 있는 동맹국들은 저항할 의지가 없으며, 유화와 서서히 죽음에 이르는 공존을 선호합니다. 우리는 점점 약해지고 적은 점차 강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말하고자 합니다. 이런 추세가 반대로 돼야 한다고 말입니다. 노우랜드 상원의원이 지적했듯이 6·25전쟁은 올바른 곳에서 올바르게 치러진 전쟁입니다. 자유세계는 한국 국민이라는 강인하게 싸우는 동맹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이라는 동맹은 그 일을 하기 위한 수단과 기회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한국전쟁은 제한 전쟁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원하지 않는 한 한국전쟁이 세계대전으로 비화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친구들이여 나를 믿으시오. 만약 소련이 바랐다면, 제3차 세계대전이 벌써 지구를 휩싸고 있을 것입니다. 한국의 목표는 제한적입니다. 그 목표들은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물리적으로 우리는 중국 본토를 구하는 길을 열 수 있으며, 심리적으로는 자유진영 전체가 현재 극히 필요로 하는 사기를 엄청나게 북돋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을 저지할 수 있으며, 그들을 영구히 격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승리는 인간의 자유라는 대의를 위해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한국은 단지 우리의 통일과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계 도처의 모든 민족들에게 자유, 정의 그리고 평화가 보장되는 것을 돕기 위해 이러한 기여를 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도움을 주십시오! 150만 명의 한국 아들들이 전진하여 적을 무찌르고, 그들의 가정뿐만 아니라 미국의 가정도 방어하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격정적인 어조로 본론을 마치고,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은 이 대통령은 특유의 떨리는 목소리로 감동적인 연설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다.  “나는 가슴이 너무 벅차서 이번 미국 방문이 내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말할 수 없습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듭니다. 우리를 구해주고, 결국은 승리하리라는 새로운 희망을 불러일으켜 준 미국 국민에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들·남편·형제들을 한국에 파견해 준 미국 어머니들에게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감사를 표합니다. 우리의 계곡과 산악에서 미국과 한국의 영혼들이 함께 신의 품으로 간 것을 우리는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듯이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그들을 소중히 아껴주시도록 기도합니다.


 미국이여, 그대는 지난 며칠 동안 그대의 위대함을 내게 보여주었습니다.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결코 우리를 패퇴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그대와 함께 서 있으며, 항상 그대의 편입니다.


 이러한 경험은 실로 멋진 일이며, 나의 영혼은 미국 국민의 넘치는 후의와 지지에 의해 한껏 고무되었습니다. 우리가 힘을 합하면 무적입니다. 정의라는 대의(大義)의 갑옷을 입고 신의 가호를 받고 있는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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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美財團 만찬회 ④ (26)


“기다림이 길수록, 재앙은 더욱 커지는 법이죠”


앞선 연재물에서 이야기했듯이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국빈방문 행사 중 1954년 8월 2일 뉴욕의 월도르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한미재단이 주최한 만찬행사를 가장 즐겁고 의미 있는 행사로 꼽았다. 그것은 저녁 9시부터 이 대통령의 연설이 미국 TV와 라디오로 생중계되었고, 중계가 끝난 후에는 1500명의 참석자에게 진솔하게 개인적인 감정을 털어놓을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방송중계 이후에 행한 이승만 대통령의 즉흥 영어 연설이야말로 미국 땅에서 행한 그 어느 나라 국가원수의 연설도 따를 수 없는 명연설이었다고 감히 소개하고 싶다. 독자 여러분을 그날의 현장으로 모시고자 한다.


 “신사숙녀 여러분, 그리고 나의 친구들이여! 여러분은 내가 원고를 그대로 따라 읽는 연사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실 것입니다. 몇 시간 전에 쓰인 연설은 결코 효력이 없습니다. 그것은 상황이나 정서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쓰인 연설에 열중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TV와 라디오 중계가 끝났으니, 추가로 한두 마디 더 해야겠습니다. 나와 마미(프란체스카 여사)의 마음속뿐만 아니라 한국 국민 모두의 가슴속에 있는 말을 해야겠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여러분 모두에게, 그리고 미국의 국민 모두에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밤이 새도록 감사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우리에게 베풀어준 모든 도움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여러분과 같은 친구를 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이 위대한 도시, 뉴욕에서의 퍼레이드와 미국 어디에서나 내게 보여준 격려의 환호와 갈채는 내게 너무도 멋진 경험이었습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압니다. 그것은 자유와 인류의 가장 큰 적과 대항함에 있어서 미국이 우리와 어깨를 맞대고 함께 서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와 내 민족, 그리고 다른 나라의 민족들에게 감격적인 것입니다. 나는 우리가 얼마나 큰 격려를 받고 고무되었는지를 일일이 설명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민족과 나라의 반공주의자들에게 커다란 격려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친구들이여! 나는 여러분이 그러한 격려를 계속해주기를 희망합니다. 격려를 계속해 주십시오! 세계 도처에 있는 여러분의 동맹국이나 친구들을 실망시키지 말아 주십시오. 그들 중 많은 수가 이미 낙담하고 포기한 채, 노선을 바꿔 적들과 같은 편이 되었습니다. 그들을 실망시키지 마십시오.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나와 마미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내외에 대한 영원한 감사의 마음을 갖고 미국 땅을 떠날 것입니다. 두 분은 우리에게 이곳 미국을 방문할 기회를 주었으며, 진솔하고 따뜻하게 우리를 맞아 주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아이젠하워 내외의 우정과 신의가 넘치는 마음씨를 보았고, 깊은 감사와 격려를 마음에 새기고 돌아갑니다.


 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위대한 친구라고 항상 생각해왔습니다. 우리의 대화 중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내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미래 세대가 걱정입니다. 우리는 밤낮으로 걱정합니다.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세계대전이 발발하면, 핵무기와 수소폭탄이 세계 문명과 인류의 절반을 파괴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나는 전적으로 그의 의견에 동의한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이 옳습니다. 나는 당신과 의견을 함께합니다.’ 그러나 또한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우리가 생명보다도 귀중하게 생각하는 우리의 민주적인 제도나 우리의 자유를 포기하려는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않는 한, 우리는 세계대전을 피할 수 없습니다. 달리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다른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미국 국민이 자신의 안전과 평화를 지키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안전과 평화의 보장이라는 미국의 위대한 유산인 민주적인 원칙들은 조지 워싱턴과 토머스 제퍼슨에 의해 주창되었고, 국민의 국민에 의한 그리고 국민을 위한 정부는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링컨에 의해 확립된 것입니다. 나는 미국 국민이 이러한 원칙들을 하늘이 무너져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아내가 매우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군요. 곧 끝내겠습니다.


 이미 얘기했다시피, 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거의 모든 면에서 의견을 같이하며, 그의 감정을 존중합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의 기다림이 길면 길수록 재앙이 더 극복하기 힘들어지고 더욱 커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단 하나 우리 사이에 다른 점입니다.


 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미국 국민 여론의 뜻에 따라야만 합니다. 미국 국민인 여러분이, 미국 여론과 세계 여론의 위대한 지도층인 여러분이 공산주의자들의 팽창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빨리 할수록 상황은 더 나아질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할지를 훨씬 수월하게 느끼게 될 것으로 이 사람은 굳게 믿습니다.”


 이 대통령은 미국의 한복판에서 아이젠하워를 공개적으로 몰아붙이는 무서운 인물이었다. 그는 뛰어난 연설가였으며, 용감한 한국의 지도자였다. 요즈음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모욕적인 언사와 심지어는 6·25전쟁과 미국의 역할에 대한 그릇된 사실을 공공연히 유포시키는 분들에게 이 대통령의 이런 간담이 서늘한 즉흥 명연설이 한 번쯤 읽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어 러스크 이사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저는 이곳의 모든 분들이 위대한 애국자의 마음속을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얻고 크게 감동을 받아,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지를 통감하고 있으리라고 봅니다. 다음 차례로 넘어가기 전에 잠시 뉴욕 유대교 목사 협의회장 데이비드 셀리그손 목사의 기도가 있겠습니다.”


 셀리그손 목사의 기도.


 “아버지 하나님, 자유의 창시자이신 당신께 기도하나이다. 당신은 시나이 언덕에서 당신의 이름을 인간에게 알게 하셨나이다. ‘나는 애급의 속박으로부터 너희를 인도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그 말씀은 퍼져나갔습니다. (중략) 우리는 당신께서 우리에게 자유 국가라는 비전을 주신 데 대해 감사합니다. 자유 국가의 비전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에게 힘을 주었고, 인간의 마음속에 그 어떤 형태의 폭압에 대해서도 영원한 적대감을 가져야 한다는 맹서를 하게 했습니다. (중략)


 정의와 신념으로 무장한 이승만 대통령과 그의 국민을 지켜주소서. 그들이 중시하는 인간 본연의 가치가 번창하도록 하시어, 악의 힘을 누르고 그들의 가치가 승리하게 해 주옵소서. 한국과 한국 국민이 폭정과 인간 노예화의 위협 세력에 대항하는 데 있어서 홀로 서 있지 않도록 이 축복받은 땅의 도시와 평원들에서 결단과 결의가 일어나게 하소서.


 한국의 어린이들과 그곳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라는 당신의 빛바래지 않는 말씀이 충만한 날이 빨리 오도록 해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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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美財團 만찬회 ⑤ (27)


“이 대통령은 80평생 오직 나라 위해 살아온 분”


1954년 8월 2일, 한미재단 만찬회. 이승만 대통령이 6·25전쟁 이후 아이젠하워의 한반도 정책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연설, 셀리그손 목사가 한국과 한국인을 위한 기도를 한 후, 하워드 러스크 한미재단 이사장은 또다시 10분 동안, 데이비드 록펠러 등 한미재단의 이사들과 최순주 국회부의장, 양유찬 대사 등 주요 참석자 20여 명을 소개했다. 이어서 와그너 뉴욕 시장이 소개됐다. 로버트 와그너(Robert F. Wagner, Jr., 1910~1991)는 뉴욕 시장을 3차례나 역임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공교롭게도 그는 1954년 1월 시장에 취임한 후, 8월에 이승만 대통령을 뉴욕에서 영접했으며, 1965년 5월에는 대한민국 역사상 2번째로 미국을 국빈방문했던 박정희 대통령을 뉴욕에서 다시 영접한 후, 그해 12월 시장직에서 사임했다.


 하워드 이사장의 소개를 받은 와그너 시장이 연설을 시작했다.


 “오늘은 뉴욕시가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친애하는 이승만 대통령님께서도 뉴욕 방문을 기억에 남을 만한 날로 기억해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800만 뉴욕 시민은 오늘 위대한 인물에 대해 존경과 경의를 표했습니다. 그분은 민주주의 동맹의 대표를 넘어 인간 본성의 가장 중요한 상징인 용기의 표상입니다.


 이상을 신봉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수적으로 압도하는 적에 맞서서 대의를 위해 싸우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살인과 약탈을 일삼는 적에게 저항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자유를 위해서 타협하느니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는 것은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용맹스러운 사자와 같은 용기를 갖고 믿기 어려운 역경 속에서 한국 국민을 자유의 기치 아래 규합한 영웅입니다. 그는 아시아의 민주주의 생존을 위해, 전 세계 자유인들의 안전을 위해 전쟁을 치렀습니다. 이 대통령은 불굴의 정신과 신념이 무신론과 폭정에 의해 소멸되지 않는다는 자유세계가 영원히 잊지 못할 교훈을 주었습니다.


 이 대통령은 크렘린의 독재자들에게도 결코 잊지 못할 교훈을 주었습니다. 자유세계의 국민들은 자유를 빼앗기기보다는 죽음을 택할 것이며, 인간의 존엄성을 희생시키기보다는 그 어떤 희생도 치르겠으며, 침략에 굴복하기보다는 고통을 감수하며 싸운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줬습니다. 그는 소련에 나라를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민족의 의지가 그 어떤 무기보다 강하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이승만 박사는 민주주의는 불굴의 의지로 싸워서 지켜야 하는 이상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험난한 시대를 살고 있으나 이승만 대통령과 같은 용기 있는 지도자가 있고, 한국 국민과 같이 존경할 만한 민족이 있는 한, 인간의 고결함과 품격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는 우리의 노력은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어서 뉴저지 출신 상원의원 하워드 스미스(Howard A. Smith, 1880~1966)가 연설했다.


 “나는 미국 상원의 대외관계위원회 소속 위원으로 일하면서 한국을 3번 방문했습니다. 1949년, 첫 번째 방문에서 이승만 박사 내외를 만났으며 두 분이 대의를 위해 목숨을 기꺼이 버릴 각오로 사는 것을 보고 존경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1951년, 손자가 미군 병사로 근무하고 있는 한국을 두 번째로 방문해 손자와 미군 장병들이 이 박사 내외의 감사와 사랑을 받고 전투 중인 것을 알고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그리고 1953년 휴전을 앞두고 세 번째로 한국을 방문해 이 대통령과 한국 국민의 환대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개인적인 인연 때문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내게 오늘 이 자리에서 자기를 대신해 인사를 해주도록 부탁했습니다. (중략)


 이승만 대통령은 80 평생을 오직 조국을 위해서만 살아온 분입니다. 고문·감옥 생활·망명 생활이 이어졌지만, 조국이 자유의 땅이 되리라는 믿음을 결코 버리지 않고 목표를 향한 노력을 결코 게을리 하지 않았던 분입니다. 흔히 이 대통령과 조지 워싱턴을 비교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분은 독립의 아버지요 초대 대통령이며, 자신이 정한 노선을 흔들림 없이 따랐던 분들입니다. (중략)


 3년간의 6·25전쟁에서 한국 국민의 영웅적인 자기희생 정신은 자유세계의 무한한 찬사를 받아왔습니다. 이제 미국은 한국에 적정한 군사방위력을 유지하면서, 전쟁의 화를 입은 한국의 부흥이라는 중대한 과제를 소홀히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해에 미 의회에 보낸 교서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미국이 즉각 한국을 지원해야 한다고 천명했습니다. 원조계획은 미 의회의 신속한 지지를 얻었으며, 첫해에 2억 달러가 제공돼 한국 국민들이 자신의 미래와 조국의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원조는 앞으로도 활발히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 차원의 원조 이외에도 수백만 미국 시민이 한미 재단 활동에서 보듯이 한국 국민에 대한 우정과 동정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밤 이 만찬회는 한국 국민과 미국 국민 간에 전쟁으로 맺어진 연대감을 강화하는 사업이 성공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미국 대통령을 대신해서 나는 모든 미국 국민이 한국의 미래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점을 말해 두고자 합니다. 우리는 위대한 애국자 이승만 대통령이 대표하는 강하고 용감하며 끈질긴 한국 국민의 정당한 열망을 계속 지원할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한국 국민에게 신의 가호가 함께하실 것을 기원합니다.”


 스미스 상원의원의 연설이 끝나자마자, 이승만 대통령은 사회자의 양해도 구하지 않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마이크를 잡았다.


 “내 아내가 시간이 너무 늦었다고 합니다. 물론 늦은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두 마디 해야만 하겠습니다. 오늘 이곳이 내게 너무도 영광스러운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위대한 마술을 부렸습니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격려를 주었습니다. 친구들이여! 방금 매우 고무적인 메시지를 보내준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스미스 의원에게 감사드립니다. 그 메시지는 한국 국민 모두에게 커다란 격려일 뿐만 아니라, 반공 대열에 서 있는 세계 모든 국민들에게도 큰 격려가 될 것입니다.


 나는 미국 의회에서 아시아를 구하기 위해 중국을 구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아시아를 잃는다면, 다른 대륙을 구하기 매우 힘들어집니다. 중국을 구하는 일은 6억의 중국인을 정복하기 위해 미국이 육군과 공군을 파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유를 갈망하는 중국인을 격려해 주는 것입니다. 자유를 위해 싸우는 모든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주는 것입니다.


 ‘여기 증거가 있다. 이승만이 공산주의에 저항하는 시범을 보였다. 그리고 위대한 미국이, 위대한 미국 대통령이 이승만의 배후를 굳건히 지켜주고 있다. 너희도 자유를 위한 투쟁을 하면, 미국이 도울 것이다.’


 이것이 격려입니다. 이것이 고무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힘입니다. 우리가 중국에 이기지 못하면, 우리가 수백만의 소련 공산주의자를 이기지 못하면, 공산주의를 격퇴하는 일은 매우 힘든 과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하는 방법을 갖고 있습니다. 중국과 소련의 모든 반공세력에게 자유를 위해 싸우도록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하나 둘씩 뒤따라 올 것입니다. 나는 이를 확신합니다. 이러한 노선을 따라 갑시다.”


 이승만 대통령은 상대방의 영어연설을 완벽하게 알아듣고 이렇게 영어로 즉흥적이고도 멋진 발언을 할 수 있었던 대한민국 최고의 외교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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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美財團 만찬회 ⑥ (28)


“미국 국민은 한국의 영원한 친구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4년, 국빈방문 기간 중에 가장 즐거워했던 행사가 한미재단 만찬회라는 사실을 앞서 소개한 바 있으며, 오늘까지 총 6회에 걸쳐 그날의 행사를 상세하게 연재했다. 그 이유는 57년 전의 한·미 관계를 단순히 반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대통령을 비롯한 러스크 이사장, 스펠만 추기경, 밴플리트 장군, 와그너 뉴욕 시장, 스미스 상원의원 등 당대 지성인들의 발언을 육성 그대로 접함으로써 우리가 오늘과 내일을 사는 지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다.


이날 행사의 마지막 연사로 나선 인물은 메리 로드(Mary Pillsbury Lord, 1904~1978) 여사였다. 우리에게는 친숙하지 않은 인물이지만, 그녀는 당대의 저명한 시민운동가이자 사회봉사활동가였으며,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각별한 관계에 있었다. 이런 인연으로 그녀는 1953년, 루즈벨트 대통령의 부인 엘리노어 루즈벨트(Eleanor Roosevelt, 1884~1962)의 후임으로 유엔인권위원회 미국 대표가 됐으며, 유엔총회 미국 대표로도 활동했다. 이날 만찬회에서 로드는 다음과 같은 인사말을 했다.


 “저는 유엔에서 다뤄지는 인권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용감한 지도자, 위대한 애국자, 위대한 친구인 이승만 대통령님, 그리고 용맹스러운 대한민국 국민을 찬양하는 이곳에 초청받아 발언하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세계평화는 유엔의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유엔은 한반도에서 북한의 무력침략을 막기 위해 역사상 최초로 강제조치를 결의했으며,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단결된 힘으로 무력침략자를 격퇴했습니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 미래의 무력침략 위협을 저지하기 위해, 분단된 나라가 올바른 통일의 길로 가도록 하기 위해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들은 동반자로서 단결해야만 합니다. 동반자란 자유를 소중히 생각하며, 자유가 공격받을 때 방어하기 위해 함께 투쟁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 국민은 자유를 위한 투쟁의 성공을 위해서는 크나큰 희생, 피나는 노력, 성실함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습니다. 지구상의 영구적인 평화와 밝은 미래를 위해서는 한국 국민과 같은 투쟁정신이 필요합니다.


 자유는 모든 국가와 개인의 권리이자 책임입니다.


이승만 대통령님, 세계 모든 나라는 대한민국이 자유를 위해 권리와 책임을 다하고 있는 데 대해 찬사를 보낼 뿐만 아니라 이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로드 대표의 발언이 끝나자, 러스크 이사장이 말했다.


 “로드 여사의 말대로 우리가 어제와 오늘 한국을 위해 무슨 일을 하고, 무엇을 제공하는지에 관계없이 이 자리를 떠날 때 자유와 권리를 지키려고 피나는 투쟁을 하고 있는 한국 국민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 대한 우리의 지원은 우리가 한국 국민에게 지고 있는 큰 빚을 갚는 조그만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 미국 국민은 오늘 한국 국민의 영원한 친구가 될 것이라는 약속, 자유민주주의가 가장 나은 삶의 방식이란 신념, 앞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 국민의 용기와 스태미너에 더욱 감사를 표해야겠다는 각오를 지니고 이 자리를 떠나게 될 것입니다.”


 러스크 이사장의 말을 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신사숙녀 여러분, 이렇게 자주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용서하세요. 앞서 발언한 와그너 뉴욕 시장님에 대한 감사의 말을 못 했네요. 좋은 말씀 영원히 간직하겠습니다. 그리고 로드 여사님의 우아한 말씀 감사합니다.  


 그리고 할 말이 더 있습니다. 러스크 이사장에게 증정하기 위해 한국에서부터 훈장을 가져왔습니다. 여러분들이 보는 앞에서 수여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보입니다. 훈장을 수여하는 이유가 담긴 증정서가 있습니다. 한글로 쓰여 있으며, 대한민국의 국새가 찍혀 있습니다. 양유찬 주미한국대사가 이 증정서 내용을 영어로 번역해 러스크 이사장님과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어서 양유찬 대사가 훈장증서를 읽었다.


 “대한민국은 인도주의자, 의사, 편집인 하워드 러스크 박사에게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수여합니다. 러스크 박사는 전쟁으로 파괴된 한국 난민을 구원하고, 이들에게 희망·건강·자립의 수단을 회복하도록 하는 위대한 과업을 매우 성공적으로 도왔으며, 이를 위해 따뜻한 이해심을 갖고 엄청난 능력을 발휘해주었습니다.


러스크 박사는 전쟁으로 수족이 절단된 많은 한국 환자들의 비극적인 고통을 조사하고 그들의 정상적인 생활을 위해서 인공수족을 연구ㆍ개발했으며, 이를 제공했습니다. 또한 한국의 고아와 빈민들에게 미래의 희망이 되는 기금을 모으는 데 적극적으로 앞장섰습니다. 또한 러스크 박사는 큰 파급효과를 지닌 뉴욕 타임스지의 지면을 통해 미국 여론에 한국 국민이 필요로 하는 것과 용감한 정신을 알렸습니다.


 그의 노력으로 세계 자유의 보루인 한국에서 자유를 지키기 위한 전투를 치르다가 심각한 고통을 겪게 된 사람들을 돕기 위한 수백만 달러의 기금이 모아졌습니다. 대한민국은 이러한 러스크 박사의 봉사와 사심 없는 헌신, 그리고 재능 있고 인도주의적인 러스크 박사 부인의 헌신에 감사하며 이 저명한 의사, 학자, 박애주의자 하워드 러스크 박사에게 이 훈장을 증정하는 영예를 가집니다. 증서에는 이승만 대통령께서 친필로 서명하셨습니다.”


 양유찬 대사의 훈장 증서 낭독에 이어 이승만 대통령은 러스크 이사장의 가슴에 훈장을 달아주며 말했다.


 “한국 국민에 대한 기여에 감사하며, 귀하와 귀하의 부인에게 한국 국민의 더 없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이 훈장을 달아드립니다.”


 러스크 박사는 이 대통령과 참석자들에게 큰 소리로 수상소감을 말했다.


 “저희 내외는 이 영광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저와 제 처, 그리고 우리 모두는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이 훈장이 한국을 위해서 일한 미국인 모두의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겸허하게 수용하겠습니다. 이 뜻을 기려 우리는 앞으로 남은 과제들을 완성하기 위해서 더욱 헌신하겠습니다.”


 1954년 8월 2일, 8시부터 진행된 만찬행사는 11시가 넘은 시각에 호레이스 도네건 주교의 축원예배로 끝이 났다.


 “하느님의 자비로운 은총과 보호에 우리를 맡기나이다.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한국 국민에게 주님의 빛, 평화, 용서, 인도, 힘, 그리고 기쁨이 이 밤에 그리고 영원히 내리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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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방문 및 트루먼 前 대통령과의 만남 (29)


“정의를 수호하고 깡패국가들을 응징해야”


올해는 우리나라가 유엔에 가입한 지 20주년이 되는 해다. 1991년 9월 17일, 유엔본부에 대한민국의 태극기와 북한의 인공기가 동시에 게양됐다. 그 후 15년 만인 2006년 말, 반기문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 유엔사무총장에 선출돼 재임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국빈방문이 이뤄지던 1954년과 비교해 보면 격세지감이 있다. 그 당시 우리는 유엔 가입을 바랐지만, 거부권을 가진 소련의 반대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 유엔 방문


 사정이 이러했으니, 우리나라의 국가원수가 유엔사무총장을 만난다는 것은 의미가 상당히 컸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8월 3일 오전 11시 뉴욕의 유엔본부를 방문, 다그 함마르셸드(Dag Hammarskjold, 1903~1961) 사무총장의 영접을 받았다. 스웨덴 외교관이자 정치가였던 함마르셸드는 1953년, 유엔사무총장에 당선된 후, 9년째 재임 중이던 1961년에 콩고 내전을 조정하러 가던 중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사후에 그는 노벨평화상을 받았으며, 고 케네디 대통령은 그를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외교관’이라고 칭송한 바 있다.


 이 대통령은 함마르셸드 사무총장과 잠시 환담한 후, 그의 안내로 새로 건축된 유엔본부의 중요시설을 시찰했다. 마침 한국 아동 구호를 위해 각국의 우표를 팔고 있는 한국 아동구호소에 들른 이 대통령은 우표책을 몇 권 산 다음, 인근의 기도실에 들러 조용히 조국의 통일과 안녕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


 이어 소회의실에서 외신기자회견을 했다. 이 자리에서 이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유엔 회원국이 아닙니다. 소련이 우리가 회원국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한국이 유엔회원국이 아니라고 불평하지는 않겠지만, 특정국가가 유엔 가입을 원하는 국가를 거부권으로 방해하는 문제를 민주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유엔헌장이 개정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엔은 국제적인 정의를 심판하는 일종의 국제재판소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중요한 사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힘이 없습니다. 그러니 특정국가가 유엔의 원칙을 침해하더라도 모두가 무기력한 것입니다. 모든 유엔 회원국들은 여하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정의를 고수해야 하며, 대동단결해 깡패 국가들을 응징해야 합니다.


 국제연맹의 활동이 실패한 것은 세계가 정의와 법으로 평화를 달성하려고 강력하게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거울 삼아 지금은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평화를 달성하겠다는 생각보다는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정의를 수호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한 시점입니다.”


 기자회견을 마친 이승만 대통령은 함마르셸드를 비롯한 간부들의 환송을 받으며 유엔본부 건물을 떠나, 뉴욕타임스 본사로 향했다. 뉴욕 타임스지의 발행인 아서 헤이스 설즈버거(Arthur Hays Sulzberger, 1891~1968)로부터 오찬 초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아서 헤이스 설즈버거는 1935년부터 1961년까지 뉴욕타임스 발행인을 역임하고, 1963년에 그의 아들 아서 옥스 설즈버거(Arthur Ochs Sulzberger, 1926~ )에게 발행인 자리를 넘겨 줬다. 현재 뉴욕타임스의 발행인은 아서 헤이스 설즈버거의 손자인 아서 옥스 설즈버거 2세 (Arthur Ochs Sulzberger, Jr., 1951~ )이며, 그는 1992년에 아버지로부터 발행인 자리를 물려받았다.


 미국 측에서 설즈버거 발행인을 비롯한 뉴욕타임스 주요 간부가 참석한 이날 오찬회의 주빈은 이승만 대통령이었고, 한국 측에서는 최순주 국회부의장, 갈홍기 공보처장, 양유찬 주미한국대사, 임병복 주유엔대사, 한표욱 주미한국대사관 정무공사가 참석했다.


 오찬 후, 이 대통령은 뉴욕타임스 본사 건물을 시찰한 다음, 웹 앤드 냅(Webb and Knapp)이라는 도시건축 전문회사를 방문했다. 1965년에 파산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건축회사지만, 당시에는 뉴욕의 매디슨 스퀘어에 본사를 둔 유명한 회사였다. 이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한 것은 이 회사의 대표인 윌리엄 젝켄도르프(William Zeckendorf, 1905~1976) 때문이었다. 젝켄도르프는 비록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당시 우리나라에 100만 가구를 건축하겠다면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회사 방문을 요청했고, 이날 저녁 이 대통령을 만찬회에 초대하기도 했다.


 ■ 시카고 방문


 1954년 8월 4일 오전 8시 30분, 이승만 대통령 일행은 월도르프 아스토리아 호텔을 출발해 뉴욕 라과디아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간단한 환송행사를 마친 대통령 일행은 미국 수송기를 타고 뉴욕을 떠나, 이날 하오 12시 11분 시카고 미드웨이 공항에 도착했다. 일행은 공항에서 마틴 케넬리 시카고 시장을 비롯한 시카고 상공회의소 토머스 콜터 회장의 환영을 받았다.


 특히 100여 명의 교민들이 항공기 주변에 모여 애국가를 부르며 태극기를 흔들었다. 15명으로 구성된 중국인 자선협회 대표단도 환영행사에 참가했다. 이 대통령은 모든 한인 동포들과 일일이 악수했으며, 리무진에 몸을 싣고 드레이크 호텔로 향했다. 호텔에서 이 대통령은 시카고 기업인들과 오찬을 함께 했다.


 ■ 트루먼 전 대통령 사저(私邸) 방문


 8월 5일 오전 9시 56분, 이 대통령 일행은 미 공군기편으로 미주리 주 캔자스 시티에 도착했다. 트루먼 전 대통령을 만나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공항에는 미국 측 인사들 이외에 캔자스 리븐워스 소재 육군참모대학에 다니는 우리나라 장교단도 마중을 나왔다.


 대통령 일행은 미국 국무부가 제공해 준 5대의 차량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인디펜던스 시로 출발했다. 트루먼은 그곳에서 요양 중이었다. 트루먼 내외가 흰색 저택의 현관 앞으로 나와 일행을 맞아 줬다. 저택 앞 길거리에서 약 500명의 주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李 대통령이 트루먼에게 말했다.


 “참으로 반갑습니다. 나는 귀하가 미군을 파병해 우리가 생존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기회를 이용해 위대한 결정을 해준 귀하에게 나와 한국 국민의 변치 않는 감사를 표합니다. 귀하의 결정은 우리 국민의 사기를 북돋아 줬고, 우리가 공산주의자들을 싸워 물리칠 수 있도록 해줬습니다. 한국인 모두가 이를 고마워하고 있으며, 귀하를 비롯한 미국 국민이 이러한 감사의 뜻을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트루먼의 저택 안에서 간단히 환담한 후, 밖으로 나온 李 대통령은 집 앞에 모인 군중들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이 세계를 자기네 통치하에 놓기 위해 밤낮없이 준동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을에서, 학교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가정에서 그들과 투쟁해야 합니다.”


 이어서 李承晩 대통령은 옆에 있는 트루먼에게 뼈있는 작별인사를 건넸다. “나는 1950년 비오는 날 깜깜한 새벽에 공산주의자들이 우리를 침략한 것을 결코 잊지 못합니다. 그때 나는 기도했고, 주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싸우지 않고 공산주의자들을 몰아낼 방법은 없습니다. 부디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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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 시의회 연설 (30)


“죽음보다 더 나쁜 것은 자유가 없는 나라”


트루먼 대통령의 사저를 방문한 다음, 이승만 대통령은 캔자스시티 페어팩스 공항으로 이동해 1954년 8월 5일 정오 로스앤젤레스로 출발했다. 비행기 안에서 대통령 일행은 모처럼 포커 게임으로 여가를 즐겼다. 로스앤젤레스 공항에서 LA시장을 비롯한 교민 등 300여 명의 환영을 받은 이 대통령은 숙소인 앰배서더 호텔로 향했으며, 저녁에는 교민단체인 LA 동지회가 주최한 만찬행사에 참석했다.

미국인들, 우리말로 애국가 불러줘 감동 

8월 6일 오전 10시, 로스앤젤레스 시 의회가 주최한 환영행사가 개최됐다. LA 시 의회 존 깁슨(John S. Gibson) 의장의 안내로 행사장에 들어선 이 대통령은 깁슨 시 의회의장으로부터 ‘극동지역 자유세계의 챔피언’이란 문구가 적힌 기념증서를 받았으며, 미국인들이 우리나라 애국가를 우리말로 부르자, 이 대통령은 크게 감동하며, 즉흥연설을 시작했다.


 “깁슨 시 의회 의장 내외분, 시 의회 의원 및 공무원 여러분, 그리고 귀빈 여러분.


 우리가 미국에 온 지 일주일이 조금 지났습니다만, 이번에 나는 40년간 미국에 체류하면서 경험했던 것보다도 많은 것들을 보았습니다. 그중에서 놀라운 것 중의 하나는 성악과 기악으로 연주되는 한국의 애국가였습니다. 전에는 그 어느 곳에서도 한국어로 불리는 애국가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노래 부르는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고는 한국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미국인들이 애국가를 단어 하나하나 정확하게 발음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훌륭합니다! 잘 기억해 뒀다가 우리 국민에게 얘기해 주겠습니다. 내 얘기를 듣고 우리 국민들은 전율할 정도로 감동을 느낄 것입니다. (중략)


 또한 어디를 가나 미국 남녀노소가 우리를 환영해 주었습니다. (중략) 그것은 나와 일행에 대한 것이 아니라, 미국 국민의 위대한 대한민국 국민에 대한 환영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극진한 환영에 감사하며, 이제 전에 없이 강한 결의와 커다란 격려를 안고 조국으로 돌아갑니다.”


 서론을 마친 이 대통령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전쟁은 악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점에서 미국인이나 한국인은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전쟁에 반대하며, 세계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나 전쟁의 공포보다 더 끔찍하고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자유의 축복을 만끽하고 있는 미국인 여러분은 모르겠지만 자유가 없는 나라는 더 이상 국가가 아니며, 죽음보다 더 나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일제의 침략으로 경험했기에 공산 침략을 저지하려고 애썼습니다.


 나는 모든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을 조국이라고 말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공산주의자가 되면, 그는 더 이상 한국인, 중국인, 미국인이 아니며 혹은 다른 어떤 나라의 국적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철저한 공산주의자이며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는 더 이상 여러분의 형제가 아니며, 자매도 아닙니다. 그는 더 이상 여러분의 국적이 아니며, 친구도 시민도 아닙니다.


 우리 국민은 공산주의냐 민주주의냐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가져야만 했습니다. 현재 몇 개의 유럽 국가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공존이란 없습니다. 여러분! 천연두와 끔찍한 전염병과 어떻게 같이 산단 말입니까? 나는 공산주의가 이 시대에 전 세계에서 가장 나쁜 전염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공산주의와의 공존이 있을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반은 공산주의자이고, 반은 민주주의자인 사람은 없습니다. 동시에 반은 공산주의고, 반은 민주주의인 나라도 없습니다. (중략)


 어제 오후에 시카고에서 이곳에 오는 길에 우리는 미주리 주의 인디펜던스 시에 들렀습니다. 그곳에서 트루먼 전 대통령 내외를 만나 우리가 위기에 처했을 때 미국인들이 행한 일에 대해 나의 개인적인 감사와 한국 국민의 감사의 뜻을 전했습니다. (중략)


“미국에 대한 우리의 감사는 영원할 것”


우리는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아들들에게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시아의 일부인 작은 지역에서 민주주의라는 대의를 구해내는 데 도움을 주러 왔습니다.


 여러분의 아들들은 우리와 유엔의 젊은이들과 함께 고통을 겪고, 전투를 하고, 피를 흘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공산주의자들에게 그들이 생각했던 대로 쉽게 민주주의를 패배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려줬습니다. 우리는 북진해, 중공도 몰아내기를 바랐습니다. (중략)


유엔은 중국 공산주의자들과의 전투를 바라지 않았지만, 우리는 홀로 진격하기로 결정하고 착수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휘발유 통이 잠겨 있었고, 탄약은 단지 3일 동안 사용할 만큼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자살을 시도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착상태에서 전선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당면한 현실입니다. 4년간의 전쟁 중에서 단지 1년만 전면전을 벌였고, 3년은 대화로 허비했습니다. 그동안 남북한 양쪽에서 수많은 무고한 생명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침통한 어조로 본론을 마친 이 대통령은 결론을 얘기했다.


 “여러분에게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공산침략자들에 대항해 싸우는 한국을 돕기 위해 자식과 남편을 한국에 보내준 여러분과 여러분의 어머니들에게 우리 국민이 감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로스앤젤레스의 어디를 가나 미국인들이 내 손을 잡고 ‘나는 한국에 2년 있었다’ ‘3년 있었다’ 등등 말합니다. 나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어느 대령을 만났습니다. 그는 다리를 다쳐 목발을 하고 있었으나 그 어떤 불평도 말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만난 6·25전쟁의 부상자들 모두는 그 대령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고귀한 대의를 위해 싸웠고, 피를 흘렸다는 사실과 그들의 의무를 다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미국과 자유 국가의 시민들은 한국에서 그들의 의무를 용감하고 고귀하게 해냈습니다.


 또한 미국인들은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는 한국인들을 도울 뿐만 아니라, 전투 정신이 투철한 한국의 젊은이들을 모아서 훈련시켰으며, 이제 한국군은 동양에서 가장 막강한 반공세력입니다. 이제 우리는 미국 정부에 병력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국민이 우리 전선을 방어하고, 아시아 지역의 전선을 강화하며, 여러분을 더 안전하게 평화를 누리게 하기 위한 책임을 짊어지려고 합니다. (중략)


“이제 우리 스스로 지키도록 도와 줄 때”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우리 국군의 방위력을 높여주십시오. 여러분의 젊은이들이 더 이상 한국에서 고생하고 피 흘리는 것을 우리는 바라지 않습니다. 미국인들에 대한 우리의 감사는 영원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우리를 스스로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호소입니다.


 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미국 젊은이들이 결코 다시 한국에 올 필요가 없도록 한국의 국방력을 증강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에게 행복한 날을 기약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 국민이 우리나라를 방위할 책임을 지게 될 것이고, 바라건대 미국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자주국방에 도움을 주었으면 합니다. 그러면 적들은 더 이상 팽창을 못 하고 여러분에게도 더 이상 가까이 올 기회를 잃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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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世界情勢協議會 주최 오찬회 (31)


美 유력인사 앞에서 비장한 어조로 연설


이승만 대통령이 LA에서 가진 두 번째 공식일정은 세계정세협회(World Affairs Council)가 주최한 오찬회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세계정세협회는 미국 시민들에게 국제정세와 글로벌 이슈에 대해 일깨워주고 교육할 목적으로 지역별로 조직한 비 당파조직이다. 1918년 창설했으며, 현재 미국 전역에 94개 협회가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1954년 8월 6일 정오 빌트모어 호텔에서 개최된 행사에는 1000여 명의 LA 유력인사가 참석했으며, 이 대통령에게 뉴욕의 한미재단 오찬회만큼 성대하고 의미 있는 행사였다. 오찬회가 시작되자, 존 어윈(John Erwin, 1909~1995) 로스앤젤레스 부시장이 참석자들에게 이 대통령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우리의 국경 안팎에서 미국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흔히 우리가 사생활이나 국민적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일을 할 때 너무 이상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순진하게 미국 젊은이들 마음속에 신과 국가와 자유를 향한 열정적 사랑을 주입한다는 말을 합니다. 이들은 또한 원칙이란 유치한 환영이며, 진리란 확인할 수 없거나 개인적 해석이 만들어 놓은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릇된 논거를 내세웁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도덕을 결여한 국민은 타락한 국민이며, 신념이 흔들리고 원칙을 세우지 못하는 나라는 불운한 국가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또한, 진리의 존재를 부정하고 지속적인 탐구를 포기하는 국민은 지도나 나침반 없이 방황하는 탐험가와 같다는 사실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 조국, 또는 이웃을 위해 용감하게 투쟁하고, 싸우며 죽어간 사람들의 행위를 찾아내고 반복해 소개하곤 합니다. 이런 남녀들의 삶을 연구해 우리가 진정으로 표방해야 할 성품과 행위를 찾아내기도 합니다. 즉, 고통을 감내해야 할 만큼 옳은 것은 무엇인지, 투쟁할 가치가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보다 인내할 가치가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밝혀내려 합니다. 이렇게 역사상 위대한 인물들에서 발견되는 미덕을 이 나라 젊은이에게 일깨우고 심어주고자 합니다.


 사정은 이렇지만 사실, 우리가 칭찬하는 사람들은 흔히 과거의 인물들이므로 시간 장막에 의해 그들 행위가 빛이 바랬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여 일관된 비전, 강인한 목표의식, 용기의 살아 있는 화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분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은 우리에게 보기 드문 특권입니다. 그분은 또한 자신의 비전·목적·용기를 자국민들에게도 간곡히 권고하고 모범을 보임으로써 충분히 전수시켰습니다.


 이 모임 참석자들 중 많은 분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승만 대통령은 조국의 해방과 자유를 요구했습니다. 그 벌로 그분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장 혹독한 고문을 겪고 살아남았습니다. 이후 7년간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수감생활 중 그는 유년시절 그를 가르쳤던 감리교 목사들의 방문과 보살핌에 감동받아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1904년, 석방된 그분은 미국으로 와서 6년 동안 수준 높은 대학교육을 받았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간 그분은 억지로 망명하기 전까지 조국의 자유라는 대의를 위해 지하에서 활동했습니다. 망명생활은 33년이나 됐습니다. 그 기간 중 그분은 조국의 해방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당시 그분의 활동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는 그분의 목에 걸렸던 30만 달러의 현상금으로 증명됩니다.


 그분은 망명 기간 중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직을 맡았으며,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에 대한민국 대통령이 된 것은 반세기 동안 그러한 목표를 위해 노력한 데 따른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그렇게 오랜 동안의 투쟁 경력은 우리 같은 국가에서 최대의 찬사와 존경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미국은 이상과 원칙을 중시하고, 이런 가치들을 용감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입니다.


 미국은 대한민국의 용감한 군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공산주의 무리들에게 대항해 싸운 친척들과 친구들을 가진 나라입니다. 그들로부터 우리는 대한의 용사들, 나아가 대한민국 전 국민의 신념·용기·용감성·근면함 등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의 모범적인 생애가 한국에서 자랑스러운 본보기가 됐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님! 당신의 삶·신념·고통 그리고 불굴의 인내심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마음속에 자유와 해방을 위한 불타는 욕망의 불길을 밝혔으며, 그 불길이 살아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조지 워싱턴이 미국에 특별한 존재였고, 앞으로 그러한 존재로 남게 될 것처럼, 미구엘 히달고 신부가 멕시코에서 각별한 추억을 불러일으키듯이, 시몬 볼리바가 남미인들의 마음을 흔드는 힘을 갖는 것과 같이 당신은 어제, 오늘 그리고 영원한 내일까지 조국이 항상 주위로 모여드는 자유의 자석이었고, 그러한 역할은 계속될 것입니다.


 온 자유세계가 진정으로 크게 기뻐하고 감사해야만 한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우리는 당신을 통해 대한민국의 모든 용감한 국민들에게 인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당신이 국민들을 위해 계속 봉사하는 동안, 당신 개인과 부인에게 건강과 행복이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어윈 부시장의 소개를 받은 이 대통령은 12시 30분, 감격 어린 표정으로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분은 이 캘리포니아로부터 아시아 쪽을 바라보고 있으므로 아시아에서 진행되는 일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수많은 여러분의 자제가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을 상대로 싸웠으며, 또한 공산주의자들에게 대항해 한국을 방위하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이 소집됐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여러분은 극동의 평화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족, 또한 이 풍요한 땅의 복지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나는 오십 년 전에 여러 가지 일을 배우고자 미국으로 건너왔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단지 한 가지만을 알아보고자 이곳에 다시 왔습니다. 세계를 정복해 국가통제 절대주의와 개인의 노예화라는 그들이 생각하는 모습대로 개조하는 일에 착수한 자들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는 그들과 함께 평화로이 살아 나가려고 노력할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들에게 항복을 할 것인가? 또는 그들이 우리를 공격할 때마다 필사적으로 싸울 것인가? 이러한 것들은 중요한 질문이며, 나는 세계의 운명이 이에 대해 어떤 대답을 주느냐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40년 전에는 볼셰비즘이 유럽·아시아·미주에서 금기시된 왕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중략)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어떤 처지에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자유국가들이 위성국가가 돼 이미 철의 장막과 죽의 장막 뒤로 사라져버렸는지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친구들이여, 이것이 진보며 성공이라는 것입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으며, 또한 여러분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평화를 말하는 동안 공산주의자들은 세계를 얻고 있습니다. 지도를 보세요. 적색과 핑크색이 지배적인 색채로 돼 있습니다.”


 비장한 어조로 서론을 마친 이 대통령은 잠시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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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커먼웰스(Commonwalth) 클럽 오찬회 (32)


“나의 조국 우리 국민에게 보여준 관심에 감사”


이승만 대통령은 LA 세계정세협회(World Affairs Council)가 주최한 오찬회 연설에서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미미했던 볼셰비즘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전 세계적으로 팽창하고 있다고 경고조의 서두를 꺼낸 다음, 공산주의와 공존하자는 안이한 주장을 하는 평화론자들에게 포문을 열었다.


 “성서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쓰여 있습니다. 만일 평화론자들이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 준다면, 나도 그들을 축복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평화를 가져다 주지 않습니다. 한반도에서의 잠정적 휴전이 진정한 평화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공산주의자들이 다음의 맹공격을 준비하기 위해 바라는 휴식기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평화는 총검의 평화입니다. 제3차 세계대전을 피할 수 있다고 믿습니까? 세계대전은 어디로부터 오겠습니까? 평화를 바라고 애호하는 자들로부터 오지 않을 것입니다. 전쟁은 세력 확장을 추구해 다른 국가를 탐하는 자들로부터 올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며, 범죄자를 체포해 재판정으로 데려갈 정직한 경찰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악행 추구에 집착하는 자들의 악행을 단념케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 처벌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재산과 우리의 국민을 안전하게 하는 오직 하나의 길입니다.


 법을 지키며 평화로운 세계시민으로 살아가려 하지 않는 자들에게 무기를 사용할 것이라는 명백한 의지를 표명해야 합니다. 혹자는 우리를 호전가라고 부를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싸움을 해야만 한다면, 평화를 위해 싸울 것이며, 이를 결코 수치스럽게 생각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민주주의와 인류의 자유를 구하려 한다면, 전쟁을 포함한 일체의 필요한 수단을 모두 사용해야만 합니다.


 실로 전쟁은 가공할 것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압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다수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지구상에서 전쟁을 소멸시키기 위해 힘이 닿는 한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생명보다 더 귀중한 무엇이 있습니다. 자유 없이 살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자유의 가치를 압니다.


 한국인은 일본제국주의 압제의 용광로 속에서 담금질된 경험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 없이는 자기 생명도 자기 것이 아님을 이해하게 됐습니다. 자유가 결여된 생존은 죽음보다도 더 못한 것입니다.


 조지 워싱턴은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워서 미국의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링컨도 싸움에 의해 여러분의 나라를 구했습니다. 윌슨 역시 평화적 인물이었지만 여러분이 신봉하고 있는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여러분을 전쟁으로 인도했습니다. 여러분은 평화를 사랑하지만, 싸워야 할 때에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대의는 언제나 정당했고, 여러분은 그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항상 승리했습니다.


 나는 미국이 우리 시대의 위기를 점차 깨달아가고 있으며,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무엇을 하려는 결의를 점점 강화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나는 새로운 용기와 커다란 낙관적 감정을 갖고 한국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중략)


 미국인들은 민주주의 원칙이라는 대의를 수호하기 위해 두 차례의 세계에서 유럽과 아시아에서 싸워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보전해 냈습니다. 이들 전쟁에서 싸운 수백만의 여러분 자녀들은 무엇이 최고의 가치인지를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싸운 용사들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여러분의 생활방식을 보존하고, 미국의 아름다운 해안으로 전쟁이 번지지 않게 하기 위해 싸웠던 것입니다. 그들은 매우 용감하게 싸웠으며, 한국은 여러분처럼 그들을 자랑으로 생각합니다. 생존한 사람이나 영웅적으로 죽어간 사람이나 모두가 우리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과실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침략자들에게 침략의 열매를 계속 갖도록 허용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과일을 갖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치 적이 국제사회의 존경할 만한 일원인 것처럼, 극악무도한 산적이 법을 지키는 양민으로 급변하기나 한 것처럼 생각하고 싸움을 중지하고 그들과 회담을 시작했습니다.”


 본론을 끝낸 이승만 대통령은 강한 어조로 결론을 말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들을 결연히 상대해, 그들에게 말해주는 것입니다. 침략은 끝났으니 탈취한 것을 모두 포기하고 우리와 함께 평화롭게 살자! 그러지 않으면 자유세계 국가들의 단합된 힘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공동목표는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이뤄야 하는 평화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단지 패배와 인간 자유의 종말을 초래할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표상은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지켜야 하는 정의여야만 합니다. 정의란 우리가 다른 방법으로는 획득할 수 없는 평화, 옳은 것의 승리, 그리고 자유에 이르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합된 힘으로 공산주의 세력에 대항할 준비를 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전쟁 없이 승리할 수 있고, 전쟁을 해서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우리 모두가 그렇게도 바라는 영원한 평화, 자유세계, 그리고 승리를 기필코 달성하고야 말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8월 7일 오전 9시 로스앤젤레스를 출발해 오전 10시 40분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간단한 환영행사를 한 후에 바로 미 제6군 사령부가 있는 프레시디오로 향했다. 그곳에서 이 대통령은 한국전 참전용사들로 구성된 의장대 를 사열한 후, 미 제6군 사령관 윌리엄 와이먼 중장과 6·25전쟁의 영웅 윌리엄 딘 소장의 환영을 받았다. 이어 그는 여독을 잊은 채 샌프란시스코 팰리스 호텔로 향했다. 커먼웰스 클럽 주최 오찬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오후 1시, 400명의 여론지도층 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시작된 행사에서 이 대통령은 차분한 어조로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분, 샌프란시스코는 언제나 다정다감한 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와 내 아내에 대한 정중한 환영으로 이러한 사실이 다시 한번 입증됐습니다. 그리고 나의 조국과 우리 국민에게 보여준 여러분의 큰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이번 미국 여행에서 나는 미국 국민이 우리나라와 국민에 대해 거대한 저수지와 같은 호의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깨달았습니다. 고국으로 돌아가면 우리 국민에게 미국이 기대했던 것보다 더 견실한 우방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겠습니다. 이는 가진 것 모두를 공산주의와의 투쟁에 사용하고 있는 그들에게 멋진 뉴스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미국 정부가 민주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국민의 공공의지에 의해 인도된다는 것에 대해 크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전 국무장관 코델 헐은 어느 라디오 연설에서 이러한 이념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여러분의 정부는 여러분보다 훨씬 앞서 나갈 수도 없고, 여러분보다 훨씬 뒤처져 있을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미국 정부의 정책이 없다고 합니다. 나는 이런 주장이 결코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부에 정책이 없다면, 그 책임이 정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국가를 실제로 구성하고 있는 미국 국민에게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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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國 大陸에서의 공식 일정 마무리 (33)


“미국 여론만 충분히 조성됐더라도 어찌 휴전협정을 수락했겠습니까”


1954년 8월 7일 (토요일), 이승만 대통령의 샌프란시스코 커먼웰스 클럽 오찬회 연설은 그의 미국 국빈방문 행사 중에서 마지막 연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대통령은 7월 26일 워싱턴에 도착한 이후 그간 하지 못했던 모든 감회를 털어놓는 계기로 활용했다.


 “친구 여러분, 오늘날 여러분과 내가 당면한 문제는 여러분의 나라와 이 세계 자유 국가들의 생사와 관련된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에는 세 부류가 존재합니다. 첫째는 공산주의를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공산주의의 폐해를 이해하지만, 그것을 믿고 그 성공을 위해 공개적으로 또는 비밀리에 활동하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공산주의가 행하는 악을 알고는 있으나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거나 적대시함으로써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끔찍한 현실입니다. 공산주의 치하에서는 생존이 위협을 받는다는 사실을 아는 우리가 할 일은 단 한 가지 있습니다. 당당히 우리의 의견을 밝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일들에 관련된 선입견을 버리고 우리 자신, 자녀들 그리고 우리의 조국을 구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일어서서 공산주의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여러분은 전염병과 싸우는 것처럼 공산주의와 싸워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점점 많은 시민이 종전에 여러분이 알았던 것과 같은 애국적인 남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조만간 알게 될 것입니다.


 항상 표를 더 얻어서 선거에서 승리하기를 갈망하는 정치인들은 공산주의자들과 협상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끔찍한 대가를 지불하게 됩니다. 유럽의 몇몇 정치가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십시오. 반공적이던 어떤 이들은 가장 열렬한 공산주의 지지자가 됐고, 또 어떤 이들은 무저항주의, 공존, 또는 노골적인 유화주의 같은 정책을 씀으로써 적색 음모를 방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도자들은 자기 조국이 노예국가가 되느냐 아니면 자유국가로 남느냐 하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스스로를 중립주의자라고 부릅니다. 한때 고귀했던 중립이라는 단어에 대한 이 얼마나 가소로운 곡해입니까?


 나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간의 투쟁에 있어서는 중립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어느 쪽이든 한쪽이 이겨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유 문화의 숭고한 표현방법들을 신봉한다면, 우리가 가진 모든 것과 우리 전부를 자유와 정의를 위해 바쳐야 합니다. 미국의 정책은 정당, 의회, 행정부, 대통령의 것이 아니고, 그들에 의해 통제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6억의 중국인이 여러분의 적에게 넘어갔을 때 그것이 여러분 정부의 실책이었다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에 반대하는 의견을 피력하신 적이 있습니까? 6·25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졌을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휴전회담은 우리가 한반도 통일문제와 공산주의 문제들을 명백한 승리로 해결할 수 있었던 바로 그때 시작됐습니다. 만약 미국 여론이 민주주의 수호에 공감해 충분히 조성됐더라면, 어찌 휴전협정을 수락하도록 설득됐겠습니까? 나는 미국 여론이 완전히 환기되지 않았었다고 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여러분은 여태 실패하고 있었다고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그렇더라도 아직 늦지는 않았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지금부터 싸움을 시작한다면, 아직 승리의 희망은 남아 있습니다.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나는 단지 그것이 옳은 선택이 되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여러분이 곧 싸움을 개시하지 않으면, 미국이 옹호해 오던 모든 것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적에게 단호하게 저항한다면,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를 구원하고 인류의 자유를 영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할 것입니다.”


 본론을 마친 이 대통령은 의미심장하게 결론을 말했다.


 “끝으로 혹시 내가 여러분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을 한 것이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 자유세계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민주주의 옹호자들이 마음을 모아 단결하고 신속하게 행동을 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임을 밝혀두고자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가 자유와 가진 소중한 모든 것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몇몇 사람들이 얘기하듯 전면적인 핵전쟁을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며, 여러분의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수소폭탄의 사용을 두려워하며 힘이 닿는 한 제3차 세계대전을 피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데 전적으로 그와 의견을 함께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민주주의를 희생시키는 대가로 이뤄져서는 안 됩니다.


 끊임없이 축소되는 우리의 지구는 반은 노예상태로 반은 자유 상태로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함께 행동하는 데 실패한다면, 우리의 날들은 수명이 길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단합된 힘으로 공산주의 세력에 대항할 준비를 갖춰야 합니다. 결국, 우리는 단합된 힘으로 승리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승리를 쟁취하고 자유세계를 이루며, 우리 모두가 그렇게 바라는 항구적인 평화를 성취할 것입니다.”


 30분간 연설한 후, 이 대통령은 엘너 로빈슨 샌프란시스코 시장으로부터 캘리포니아산 삼나무로 만든 의사봉을 선물로 받았으며, 이것을 “세계의 질서와 평화를 촉구하는 데” 사용하겠다고 말했다.


 미국 대륙에서의 출발


 1954년 8월 8일(일요일) 아침, 이 대통령 내외는 샌프란시스코 주재 한국총영사관에서 개최된 아침예배 행사에 참석했다. 그곳에는 1000킬로미터가 넘는 먼 거리에서 온 동포들도 있었다. 이 자리에서 이 대통령은 간략하게 인사말을 했다.


 “우리는 계속 싸울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과거에 여러 차례 우리 한국이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여건 아래에 있었으나, 우리는 일어섰고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습니다. 아직도 가장 센 놈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우리는 용기와 신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신은 공산주의와의 전투라는 결정적 순간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배가 끝나고 이 대통령 일행은 경찰 모터사이클의 선도 아래 샌프란시스코 공항으로 향했다. 미국 대륙에서의 국빈방문 일정을 마치고, 하와이로 가기 위해서였다. 공항에서 그는 “미국에서 받은 환대”에 대해 미국 국민에게 감사를 표하는 출발성명을 발표했다.


 “한국 국민과 정부를 대신해 나와 일행은 아이젠하워 대통령, 미국 정부 그리고 미국 국민이 우리에게 보여준 친절함, 그리고 한국의 정당한 열망에 대해 보여준 사심 없는 지원에 대해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나는 한미 양국이 완전히 협조함으로써 앞으로 한반도 통일을 가져오고, 세계를 정의와 자유가 상존하는 영원한 평화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오후 12시 5분, 이승만 대통령은 2주일간의 성공적인 미국 본토에서의 국빈 방문을 마치고, 하와이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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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방문, 그리고 귀국 (34 - 최종회)


“自由美國 없이는 자유세계의 희망이 없다”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한 이승만 대통령 일행은 1954년 8월 8일 오후 6시 30분(호놀룰루 시간),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하와이는 이 대통령이 1915년부터 1938년까지 23년간 망명생활을 하면서, 일제침략으로부터 도피해 온 한국인 피난민들을 위해 학교·교회·애국단체를 만들어 한국 국민에게 자유의 불꽃이 살아 있도록 한 곳이다.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비행기에서 내리자, 호놀룰루의 200여 한인 동포와 태평양 함대사령관 펠릭스 스텀프 제독 등 저명한 인사들이 열렬히 환영해 줬다. 일행은 진주만에 있는 마칼라파 영빈관에 투숙했으며, 미 태평양 함대사령부의 스텀프 제독이 이 대통령 내외를 극진히 대접했다.


 8월 9일 월요일 아침, 사무엘 킹(Samuel King) 하와이 주지사가 마칼라파 영빈관을 방문해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했다. 이어 이 대통령 일행은 태평양 함대사령부에서 의장대 사열을 하고, 미군 지도자들과 대화를 나눴다. 저녁에는 스텀프 제독이 베푼 리셉션에 참석했다.


 ■ 하와이 옛 친구들과의 만남, 펀치볼 국립묘지 참배


 8월 10일 아침, 이 대통령 일행은 이올라니 궁전으로 가서 사무엘 킹 주지사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이 대통령은 킹 주지사에게 이상범 화백의 ‘아침’이라는 한국화를 선물했다.


 이 대통령은 이어 하와이 신문사 두 곳을 방문했다. 우선 호놀룰루 애드버타이저 신문사에서 로린 써스톤 발행인과 레이먼드 콜리 편집인을 만나 환담하고, 호놀룰루에서 1913년에 코리안 퍼블릭 위클리를 창간했던 것을 회상했다. 다음에는 호놀룰루 스타 불레틴 신문사를 방문해 릴리 알렌 편집인을 만났다.


 예정에 없던 신문사 두 곳을 방문한 후 이 대통령은 미 헌병과 호놀룰루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호놀룰루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분화구에 위치한 국립 태평양 군인묘지로 달렸다. 이곳은 6·25전쟁에서 사망한 많은 미국인들의 영원한 안식처다.


 이 대통령 일행이 탄 차량이 묘지에 들어서자, 군 의장대가 `받들어총'을 해 영접해 줬다. 차량에서 내릴 때부터 클라크 라프너 소장이 이 대통령을 안내했다. 그는 미 육군 태평양 사령관이며, 인천상륙작전 당시 미 10군단 참모장이었고, 그 후 한국에서 미 2사단을 지휘했었다.


 오후에 이 대통령은 1919년, 자신이 창건한 한인기독교회를 찾았다. 그는 그곳에 모인 수백 명의 신자들에게 한국어로 미국이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공산주의자들이 세계를 전복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어서 누나누 묘지에 묻힌 친구들의 묘소, 한국동지회 사무실, 칼리 계곡의 양로시설 등을 방문했다.


 늦은 오후에 하와이 주재 한국총영사관에서 이 대통령 내외를 위한 리셉션이 개최됐고, 저녁에는 킹 주지사 주최 만찬회가 열렸다.


 ■ 귀국길에


 8월 11일 수요일, 호놀룰루 주재 한국총영사관에서 70세 이상의 노인들과 점심을 함께 한 이승만 대통령은 고별 기자회견을 열고, 미국 국빈방문을 마무리하는 공식성명을 발표했다.


 “오늘 미국 땅을 떠나자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내가 제2의 고향 땅을 다시 밟게 됐던 것은 멋진 체험이었으며, 나와 아내에게 베풀어준 정중한 환대를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헤어지면서 나는 미국의 모든 친구들이 미국과 앞으로 올 세대의 안전과 복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라고 촉구하고 싶습니다. 또한 그들이 전 세계의 안전과 평화를 생각해 보기를 희망합니다.


 공산주의자의 함정에 빠진 사람들이 철의 장막 뒤에서 구조해 달라고 울부짖고 있습니다. 그들 모두가 미국이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행동을 취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인간의 자유를 포함한 민주주의 원칙의 챔피언이자 옹호자입니다. 나는 미국인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과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시적인 평화는 절대로 평화가 아닙니다. 항구적인 평화를 표방하는 사람들은 그를 위한 확고한 토대를 건설할 것을 주장해야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국가들만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평화의 원칙들도 포함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인간의 자유가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이자 영속적인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라는 것을 확립시킨 분들에게 보답해야 합니다. 그것은 오로지 인간의 모든 자유를 파괴하려 하는 자들을 패퇴시키기 위해 우리의 생명과 우리에게 귀중한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를 할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의 적은 무자비하며, 문명사회의 국가나 국민들이 소중히 생각하는 품격을 갖추지 않은 존재들입니다. 적의 유일한 목표는 모든 자유 국가들을 정복하고 그들의 재산과 주민들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나는 미국에 한국을 구하기 위해 오늘이나 내일 선전포고를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조국 하나라면 그리 큰 의미가 없습니다. 나는 아주 겸허하게 미국에 촉구합니다. 도움을 갈구하는 6억 중국인들과 아시아 및 그 이외 지역의 수많은 사람들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나의 가장 절실한 호소이며, 나의 진심 어린 기도입니다. 이는 한국, 중국 그리고 노예화 위협을 받고 있는 국민들과 국가들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미국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자유 미국, 투쟁하는 미국이 없이는 자유세계의 희망이 없습니다. 나의 기도는 미국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적시에 결정을 내리고, 그로 인해 나머지 우리 모두를 구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8월 11일 오후, 하와이 히캄 공군기지에서 미 공군기에 탑승해 귀국길에 올랐다. 비행기는 웨이크 섬과 유황도를 경유해 8월 13일 오전 11시 김포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이 대통령은 귀국소감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제네바 회의 실패 이후 우리 국군과 국민은 6·25전쟁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기대를 하고 있었고, 상황이 나아지기를 기다렸습니다. 미국으로 출발할 때 나는 경제원조나 기타 물질적인 원조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가장 큰 희망은 유엔군이 우리 국군과 똑같은 조치를 취하든지, 혹은 우리가 독자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우리의 정책을 따르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미 최고위층이 호의적이지 않아서 이런 제안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원조문제와 방위문제에 관해서는 책임 있는 미국 관리, 상하원의원, 미국 국민이 매우 공감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이 같은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적의 도발로 시작된 6·25전쟁을 휴전이 아니라 기필코 자유와 정의의 승리로 마무리하기 위해, 아이젠하워를 설득하려 했지만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는 회한의 외침이었다. 미국 국빈방문을 통해 한반도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완전히 몰아내고, 자유와 정의가 꽃피는 통일한국의 꿈을 실현하고자 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시도는 이렇게 좌절되고 말았다. [大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