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왜곡이고 모독인가를 밝혀 주는 귀중한 글을 上/中/下의 세 톰막으로 나누어서 여기 소개합니다. 이 감동적인 글은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을 역임한 이현표 선생이 1954년7월26일부터 8월13일까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국빈방문한 80세의 노(老) 대통령이 19일간에 걸쳐 전개한 외교활동을 엮어서 34회에 걸쳐서 <국방일보>에 연재한 내용입니다. 특히 이 글은 방미 기간 중 이 대통령이 행했던 모든 연설문을 담고 있는 소중한 사료(史料)이기도 합니다. 모쪼록 많은 분들이 이 글을 읽고 그 동안 사장(死藏)되었던 역사적 진실에 눈을 뜨고 왜곡된 사관(史觀)을 교정(矯正)하는 기회로 삼기를 바랍니다. 특히 초▪중▪고등학교 선생님들이 이 글을 읽고 학생들이 읽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기를 바라 마지 않습니다. 2012년1월1일 李東馥 올림
韓美財團 만찬회 ① (23)
한국 원조 위해 설립한 `美 상류 사교모임'의 전형
이승만 대통령은 훗날 국빈방문 중 가장 즐거워했던 행사로 1954년 8월 2일 한미재단이 주최한 만찬회을 꼽았다. 1955년에 발간된 이 대통령의 방미 영문기록인 ‘President Syngman Rhee's Journey to America’도 한미재단 만찬회 행사를 가장 비중 있게 취급하고 있다. 당시 미국 상류사회의 사교모임의 전형을 보여주는 이날의 행사를 본 연재물에서도 비중 있게 다루고자 한다.
한미재단 만찬회를 다루기 전에 한미재단(The American-Korean Foundation)이 어떤 단체인지를 우선 소개하고자 한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6·25전쟁의 휴전협상이 거의 마무리 되어 갈 무렵, 대한민국에 대한 미국 정부의 공식 원조 이외에 민간차원의 지원을 신중하게 고려하게 됐다. 그는 1953년 5월 5일 자신의 동생인 밀턴 아이젠하워(Milton Eisenhower, 1899~1985)를 이사장으로 하는 한미재단의 설립을 발표하고 같은 해 6월 7~14일까지 일주일간 대대적인 모금 운동을 전개했다.
이렇게 발족된 한미재단은 1954년 5월, 새로운 이사장으로 미국 재활의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하워드 러스크(Howard A. Rusk, 1901~1989)를 선출했다. 그는 1967년까지 재단을 이끌면서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나라를 위해 다양한 형태의 민간지원 사업을 전개했다. 한미재단은 러스크 이사장이 물러나고, 한국이 경제적으로 발전해가면서 지원활동은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잠시 한미재단이 이승만 대통령의 국빈방문 기간 중에 마련한 흥미 있는 사업 하나를 소개하기로 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뉴욕 방문을 마치고 시카고에 머물던 1954년 8월 4일 저녁,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의 리볼리 극장(Rivoli Theatre)에서는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 1899~1980)이 제작하고 감독한 영화 ‘Rear Window(1954)’의 시사회가 개최됐다. 각국에서 파견된 유엔 외교관을 비롯해 뉴욕의 저명인사 2000명이 참석한 이날 행사는 바로 한미재단이 대한민국을 돕기 위해 주최한 자선행사였다.
1950년대에 우리나라에도 ‘이창(裏窓)’이라는 제목으로 상영된 ‘Rear Window’는 히치콕의 걸작이자, 20세기 최고 명화의 하나이며 100만 달러의 예산을 투자해 무려 26배인 26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린 대박 영화다. 제임스 스튜어트(James Stewart, 1908~1997)와 그레이스 켈리(Grace Kelly, 1929~1982)가 주연한 이 영화는 오늘날에도 DVD로 제작돼 널리 팔리고 있다(포스터 사진 참조). 1954년 8월 5일자 뉴욕 타임스 신문은 이날의 자선 문화행사를 상세하게 보도한 바 있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서, ‘이창’ 시사회가 개최되기 이틀 전인 8월 2일, 한미재단이 주최한 이승만 대통령을 위한 만찬회장으로 독자 여러분을 안내하고자 한다. 뉴욕 월도르프 아스토리아에서 개최된 이 행사에는 호텔 연회장이 수용할 수 있는 최대의 인원인 1500명이 참가했다. 행사 참석 신청자가 3500명이나 되어서 부득이 2000여 명에게는 양해를 구했을 정도의 인기 있는 행사였다. 특히 이날 만찬회는 저녁 9시부터 공중파 TV와 라디오로 생중계되는 중요한 행사였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도 영어연설에 상당히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만찬회는 1954년 8월 2일 저녁 8시, 한미재단 러스크 이사장의 행사 개막을 알리는 인사말에 이어, 한국 소프라노 가수 김자경 씨가 미국 오르간 반주자의 반주에 맞춰 한미 두 나라의 국가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됐다. 이어 스펠만 추기경이 축원기도를 올렸다.
“성령이시여! 당신은 빛이요, 당신의 마음은 모든 나라의 빛입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나라들이 영광스럽거나 암울하거나 평화롭거나 전쟁 중이거나 기쁘거나 슬프거나 늘 함께하십니다. 한국이 지금 침략의 십자가에 못 박혀 있듯이 어느 나라건 그런 박해를 받고 있을 때 당신께서는 고통 속에 사는 그 민족의 버팀목이셨습니다.
한국의 하늘이 화염으로 가득하고, 조용한 땅이 행군 발자국 소리와 총성으로 전율할 때 당신은 그곳에 계셨습니다. 당신은 한국인의 사기를 높여주셨고, 한국의 아들들이 자유를 위해서 그들의 가정과 제단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의 영혼을 지키기 위해서 적과 맞서서 싸우는 데 힘을 보태주셨습니다.
성령이시여! 전쟁의 상처로 고통받는 한국을 위로해 주소서! 북쪽 땅을 잃어버린 한국을 위로해 주소서! 한국에 축복을 내려주실 것을 당신께 기도하나이다. 주여, 용맹스러운 마음과 헌신적인 영혼을 가진 한국이 당신의 영광을 실현하는 성전이 되고 당신이 존재하심을 보여주는 성지가 되게 하옵소서! 아울러 한국이 비록 작지만, 당신께 충성하며 독립과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헌신함으로써 서로 간에 믿음을 키워가는 위대하고 참된 남녀들이 사는 나라가 되게 하옵소서!”
축원기도가 끝나자 러스크 이사장이 행사의 의의를 소개했다.
“신사숙녀 여러분, 한미재단을 대표해서 저는 오늘 이 거대하고 상서로우며 역사적인 행사에 참석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우리의 환영 인사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우리는 세계의 위대한 애국자들 중의 한 분이며, 우리의 위대한 친구 중의 한 분이며,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영웅 중의 한 분을 만나서 경의를 표하고자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님의 연설이 전국적으로 TV와 라디오로 중계되는 관계로 방송스케줄상 뜻하지 않게 우리의 프로그램을 약간 변경해야만 하겠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처음에 하시고 불가피하게 시장이 대통령님 다음으로 연설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이어서 러스크 이사장은 이승만 대통령 내외를 비롯해 한미재단의 장학금을 받고 미국에서 유학 중인 100명의 학생과 200명의 한국 교포가 만찬회에 참석했다고 소개했다. 또한 그는 뉴욕을 비롯해 미국의 주지사 및 시장 20명도 만찬에 참석했다고 말하고, 한미재단의 첫 번째 사업으로 미국의 영화 산업의 한국에 대한 기여를 언급했다.
“1945년 해방 직후에 한국을 돕기 위한 모금행사를 개시한 적이 있었는데 8년 만인 금년(1954년) 봄부터 다시 한국을 돕기 위한 자선행사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모레(8월 4일)에도 멋진 자선 시사회가 예정되어 있으며, 가을에도 계속될 것입니다. 영화에서의 수익금을 한국에 지원하는 이 사업을 책임지고 있으신 분들이 이곳에 참석해주셨습니다. 박수로 맞아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러스크 이사장은 ‘Help Korea Train(한국 돕기 기차 사업)’과 한국 어린이 합창단의 미국 순회공연에 대해서 소개했다.
“현재 미국 철도협회 회장이며 ‘한국 돕기 기차 사업’을 개시한 분이 와 있습니다. 그의 노력으로 현재 기차의 화물칸으로 따져서 750량의 물품이 모아졌는데, 이중 9000톤의 물량이 배에 실려 한국으로 향하고 있으며, 10일 이내에 도착할 것입니다. 첫 배에 실린 물품은 11칸의 기관차, 25대의 버스, 200대 이상의 신형 차와 트럭, 500대의 트랙터 등 농기구, 차량 1대 분량의 연필, 차량 2대 분량의 가죽, 차량 20대 분량의 광목·아연·무쇠·인공수족과 부목(副木)·약품과 세제·분유·건포도 등입니다. 이와는 별도로 8대 기차 분량의 또 다른 물건들이 미국 대륙을 횡단해 여러 대의 배에 실려서 한국으로 가는 도중에 있습니다. 또한 이곳에는 한국 어린이 합창단의 미국 순회공연을 위해서 지원해준 항공사 대표들과 버스업체 대표들도 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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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美財團 만찬회 ② (24)
“한미재단이 이뤄 놓은 것은 기적과도 같은 것”
미국 상류사회의 만찬회·오찬회에 참석해 보면 우리와는 사뭇 다른 점을 느낄 수 있다. 식사하는 모임이라지만 식사보다는 적극적인 사교 모임의 성격이 강하다. 특히 참가한 사람들을 치켜세우는 발언을 반복하는 등 지루할 정도로 서로 간에 체면을 세워주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런 의례적인 행사에 익숙해지지 않고는 서구 사람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으며, 그들과의 교류도 불가능하다.
1954년 8월 2일, 이승만 대통령을 위한 한미재단의 만찬회 모습. 이날 만찬회에는 1500명이 참석했으며 이 대통령의 연설은 TV와 라디오로 미국 전역에 중계됐다.
1954년 8월 2일 저녁 한미재단의 이승만 대통령 초청 만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러스크 이사장은 6·25전쟁 휴전 이후 재단이 할리우드 영화의 자선 시사회 및 ‘Help Korea Train(한국 돕기 기차)’ 사업 등을 통해 한국에 대한 민간차원의 지원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고 소개한 후, 1500명의 참석자 중에서 주빈석에 앉은 인사들을 일일이 거명하기 시작했다.
“여러분이 한국에 가서 프란체스카 여사를 만났다면 그분을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우아함, 그 사랑스러움, 그 용기, 그 힘을 말입니다. 다른 분들에 앞서 우선 프란체스카 여사를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님, 와그너 뉴욕 시장님이 이 자리에 함께하셨습니다.
다음은 본인의 왼쪽 끝 좌석에 앉은 한미재단 이사이자 한국에서 3가지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유진 테일러 씨를 소개합니다. 그 옆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신뢰하는 절친한 친구이자 저술가인 올리버 씨입니다. 그 옆에는 또 다른 한국 애호가 폭스 모트 씨입니다.”
러스크 이사장은 이런 식으로 10여 분 동안 30여 명의 인사들을 소개한 후 9시 정각에 미 공중파 TV와 라디오의 중계가 시작되자 다음과 같이 오프닝 멘트를 했다.
“TV를 시청하고 라디오를 청취하는 신사숙녀 여러분, 오늘 밤 이곳 월도르프 아스토리아 호텔 대연회장에 한미재단 회원과 손님들이 모여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분을 존경하고 찬사를 보내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이곳에 계신 분이나 세계의 시청자 여러분을 위해서 이 위대한 영웅을 소개하는 데 누구보다도 적합한 분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입니다.
밴플리트 장군은 한국에서 한국군의 아버지라고 사랑과 존경과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는 분입니다. 장군은 우리가 소개하려는 분과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이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선 여러분에게 미국의 가장 위대한 군인의 한 사람이자, 한국의 위대한 친구의 한 사람인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을 소개합니다.”
이어 밴플리트 장군이 마이크 앞에 서서 발언을 시작했다.
“오늘 행사에 참석해주신 여러분, 그리고 시청자 여러분, 제가 여기서 가장 위대한 세계 지도자 중의 한 분을 소개해 드리는 것을 특권이자, 영광이며, 기쁨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시대나 몇 명의 위대한 분이 있지만 흔히 한 세기가 지날 때까지 알지 못하곤 합니다.
그러나 여기 아직 살아계시는 동안 위대하다고 알려진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위대한 애국자요, 위대한 학자요, 위대한 정치가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분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경건한 숭배자이며, 그 때문에 더욱 위대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의로운 일만을 행하고 그른 일을 결코 하지 않는다는 신조로 삼고 살아온 분입니다. 저는 대통령이기보다는 정의로운 사람이기를 바라지만, 이승만 박사는 정의로울 뿐만 아니라 대통령이기도 하여 솔직히 부럽습니다.
한국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 저는 이승만 대통령이 우리 미국 병사들을 환영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분은 또한 내게 말했습니다.
‘장군, 나는 귀하의 젊은이들이 고향인 미국에서 그렇게도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싸우는 것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젊은이는 이제 자유를 위해 싸우고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부디 우리에게 무기를 제공하고 젊은이들을 훈련시켜서 우리 스스로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귀하의 정부에 건의해 주기 바랍니다.’
이 대통령이 말씀한 한국의 젊은이들, 강인한 한국군 장병들은 전투에 임해서는 정말 목숨을 개의치 않고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이것이 우리 미국 병사들이 한국의 젊은이들을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특히 위대한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장병과 우리 미군 병사들을 하나같이 사랑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자유를 위한 우리의 투사,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 각하를 소개합니다.”
드디어 밴플리트 장군의 극찬을 받은 이승만 대통령이 연단에 서서 영어 연설을 시작했다.
“나는 오늘 밤 한미재단이 미국에서 멀리 떨어진 우리나라에 놀랄 만한 관용을 베풀어준 데 대해 한국 국민의 이름으로 감사드리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끝이 없다는 것을 보았을 것이며, 이들 중 미국정부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한미재단은 조사하는 데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고, 까다롭고 번잡한 절차를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이루어 놓은 것은 기적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도움이 없었다면, 곤궁에 처한 수십만 한국인의 형편이 지금보다 훨씬 나빠졌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민간단체인 한미재단의 도움이 숭고한 의미가 있는 이유입니다. 이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지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간 원조 계획에 의해 제공된 재원·상품·식량은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의류는 우리 국민을 겨울 동안 따뜻하게 해 주었고, 여러분의 다른 활동은 한국 국민에게 그들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물질적인 도움을 즉시 주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한미재단과 다른 기관들이 미국인과 한국인 간에 맺어놓은 정신적 유대가 더욱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공산주의 위협을 받고 있는 세계 속의 두 민족입니다. 한국은 인구·자원·산업·국부 면에서 미국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와 민주주의에 관해서 같은 신념과 정서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용기 역시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적을 물리치고 이 땅에 영원한 평화를 실현하는 성전에서 미국 편에 서는 것, 그 이상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미국이 우리를 돕는 정신을 보여주는 작은 이야기를 여러분께 들려 드리고자 합니다.
워싱턴 DC에서 국무부 소속 운전기사 중 한 사람이 한국 돕기 운동의 하나로 시행되는 여러 행사 중의 하나로 의류 기부를 했다고 합니다. 그는 몇 년 전에 미국을 방문한 한국 공식대표단을 위해 운전한 것을 계기로 한국을 적극적으로 돕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의 부인과 두 딸도 절약할 수 있는 한 절약해 기부했고, 자신은 단 한 벌인 여름 신사복도 기부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한국 국민에 대한 미국 국민의 목소리입니다. 이런 얘기를 듣는 것은 정말 가슴 찡한 경험입니다.”
여기서 이승만 대통령은 북받치는 감동을 억제하려는 듯 잠시 연설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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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美財團 만찬회 ③ (25)
“한반도 통일 위해 다시 전투를 해야만 합니다”
1954년 8월 2일 저녁 9시, 뉴욕 월도르프 아스토리아 호텔 연회장에서의 한미재단 주최 만찬회. 이승만 대통령은 밴플리트 장군(6·25전쟁 중에 주한유엔군사령관을 역임하면서 북한 공산집단의 공격 저지 및 한국군의 군비증강에 큰 기여를 했을 뿐만 아니라, 6·25전쟁에서 아들을 잃었음)의 소개로 연단에 올라 우선 한미재단이 우리나라에 민간 차원의 지원을 해준 데 대해 감사를 생생하게 실례를 들어 소개한 후, 자신이 마음에 품었던 얘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1954년 5월 2일, 한미재단 만찬회 참석자 중 왼쪽부터 스펠만 추기경, 이승만 대통령, 와그너 뉴욕 시장, 밴플리트 장군.
“워싱턴 DC의 몇몇 미국 기자들이 내게 방미에 대해 만족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미 당국자들과 어떤 일을 해냈고, 얼마나 받아냈으며, 고무되었는지 혹은 낙담했는지를 알고 싶어 했습니다. 내가 미국을 방문한 임무가 단지 미국의 호의를 받는 데 있었다면,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시간적으로 기회가 없어 이야기하지 못한 다른 것들이 있습니다.
나는 미국 관리를 상대로 하는 공적인 차원에서 그다지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코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말하고자 합니다. 내가 여기 온 것은 더 많은 원조, 더 많은 자금, 기타 무엇을 요구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얻은 것이 부족하다거나 굶어 죽겠다는 등등의 불평을 말하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난관에 처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울면서 도움을 갈구하지 않습니다. 우리 국민은 눈물을 감추고 조용한 경의와 용감한 미소로 기아와 파괴를 이겨내는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구걸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구걸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친구들이 우리를 위해 제공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감사하며, 앞으로도 감사한 마음을 가질 것입니다.” (중략)
미국 정부나 민간의 지원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면서도 대한민국 국가원수로서의 최소한의 자존심을 강조한 이승만 대통령은 연설을 본론으로 몰고 갔다.
“이제 여러분이 내게 허락한다면, 한반도 통일이라는 내 마음 한가운데의 얘기를 하고자 합니다. 이 주제는 많은 오해가 있어 왔기에 나는 이 자리에서 우리나라의 입장을 명백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한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통일이 돼야 한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유엔과 미국이 그렇게 언급했고, 소련도 한반도에 자유 독립 국가를 만드는 데 동참했다는 점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미국은 부지불식간에 불유쾌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바로 한반도의 38선 이북을 소련이 점령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실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남의 것을 집요하게 자기 제도에 편입시키려고 합니다. 한반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련인들은 북한을 꼭두각시로 만들어 1950년 6월 한반도 남쪽을 침략하게 만들었습니다. 미국과 유엔이 우리를 구하기 위해 왔으며, 불리하던 전황이 역전되어 승리와 통일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다시 공격해 왔지만 우리는 전쟁에 승리할 자신이 있었습니다. 한국군은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 덕분에 막강한 전력을 갖게 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필사적으로 북진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미국 정부와 군 당국은 중공군의 주요 거점들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판문점과 제네바에서 적과의 쓸데없는 휴전회담과 소용없는 협상들이 계속됐습니다. 오늘날 한반도에는 평화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휴전도 없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이를 거부하고 날이면 날마다 수없이 위반하기 때문입니다. 사정이 이러한데 미국의 2개 사단이 철수하고, 공군 부대도 철수했습니다. 이는 바로 공산주의자들이 바라는 것이며, 휴전협정에 서명할 때 그들이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전략은 매우 단순합니다. 우리가 약해지고 그들이 강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4년 전처럼 아무런 예고도 없이 공격해 올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전투를 해야만 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적이 선택한 시점이 아니라 우리에게 형세가 유리할 때에 빨리 싸움을 하는 것이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우리 군 지도자들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미국의 여러 전략가들도 이에 동의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많은 미군 고위관계자들이 휴전을 끔찍한 실수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승리하지 못한 전쟁은 처음부터 다시 싸워야만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한반도 통일이 우리나라의 이해관계보다도 더 큰 의미를 갖는 결정적이고 긴박한 이유가 있습니다. 여태까지 자유세계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항해서 느슨한 전투를 함으로써 유럽·한반도·중국·인도차이나에서 물러났습니다. 동맹국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남아 있는 동맹국들은 저항할 의지가 없으며, 유화와 서서히 죽음에 이르는 공존을 선호합니다. 우리는 점점 약해지고 적은 점차 강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말하고자 합니다. 이런 추세가 반대로 돼야 한다고 말입니다. 노우랜드 상원의원이 지적했듯이 6·25전쟁은 올바른 곳에서 올바르게 치러진 전쟁입니다. 자유세계는 한국 국민이라는 강인하게 싸우는 동맹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이라는 동맹은 그 일을 하기 위한 수단과 기회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한국전쟁은 제한 전쟁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원하지 않는 한 한국전쟁이 세계대전으로 비화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친구들이여 나를 믿으시오. 만약 소련이 바랐다면, 제3차 세계대전이 벌써 지구를 휩싸고 있을 것입니다. 한국의 목표는 제한적입니다. 그 목표들은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물리적으로 우리는 중국 본토를 구하는 길을 열 수 있으며, 심리적으로는 자유진영 전체가 현재 극히 필요로 하는 사기를 엄청나게 북돋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을 저지할 수 있으며, 그들을 영구히 격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승리는 인간의 자유라는 대의를 위해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한국은 단지 우리의 통일과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계 도처의 모든 민족들에게 자유, 정의 그리고 평화가 보장되는 것을 돕기 위해 이러한 기여를 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도움을 주십시오! 150만 명의 한국 아들들이 전진하여 적을 무찌르고, 그들의 가정뿐만 아니라 미국의 가정도 방어하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격정적인 어조로 본론을 마치고,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은 이 대통령은 특유의 떨리는 목소리로 감동적인 연설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다. “나는 가슴이 너무 벅차서 이번 미국 방문이 내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말할 수 없습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듭니다. 우리를 구해주고, 결국은 승리하리라는 새로운 희망을 불러일으켜 준 미국 국민에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들·남편·형제들을 한국에 파견해 준 미국 어머니들에게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감사를 표합니다. 우리의 계곡과 산악에서 미국과 한국의 영혼들이 함께 신의 품으로 간 것을 우리는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듯이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그들을 소중히 아껴주시도록 기도합니다.
미국이여, 그대는 지난 며칠 동안 그대의 위대함을 내게 보여주었습니다.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결코 우리를 패퇴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그대와 함께 서 있으며, 항상 그대의 편입니다.
이러한 경험은 실로 멋진 일이며, 나의 영혼은 미국 국민의 넘치는 후의와 지지에 의해 한껏 고무되었습니다. 우리가 힘을 합하면 무적입니다. 정의라는 대의(大義)의 갑옷을 입고 신의 가호를 받고 있는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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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美財團 만찬회 ④ (26)
“기다림이 길수록, 재앙은 더욱 커지는 법이죠”
앞선 연재물에서 이야기했듯이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국빈방문 행사 중 1954년 8월 2일 뉴욕의 월도르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한미재단이 주최한 만찬행사를 가장 즐겁고 의미 있는 행사로 꼽았다. 그것은 저녁 9시부터 이 대통령의 연설이 미국 TV와 라디오로 생중계되었고, 중계가 끝난 후에는 1500명의 참석자에게 진솔하게 개인적인 감정을 털어놓을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방송중계 이후에 행한 이승만 대통령의 즉흥 영어 연설이야말로 미국 땅에서 행한 그 어느 나라 국가원수의 연설도 따를 수 없는 명연설이었다고 감히 소개하고 싶다. 독자 여러분을 그날의 현장으로 모시고자 한다.
“신사숙녀 여러분, 그리고 나의 친구들이여! 여러분은 내가 원고를 그대로 따라 읽는 연사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실 것입니다. 몇 시간 전에 쓰인 연설은 결코 효력이 없습니다. 그것은 상황이나 정서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쓰인 연설에 열중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TV와 라디오 중계가 끝났으니, 추가로 한두 마디 더 해야겠습니다. 나와 마미(프란체스카 여사)의 마음속뿐만 아니라 한국 국민 모두의 가슴속에 있는 말을 해야겠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여러분 모두에게, 그리고 미국의 국민 모두에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밤이 새도록 감사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우리에게 베풀어준 모든 도움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여러분과 같은 친구를 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이 위대한 도시, 뉴욕에서의 퍼레이드와 미국 어디에서나 내게 보여준 격려의 환호와 갈채는 내게 너무도 멋진 경험이었습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압니다. 그것은 자유와 인류의 가장 큰 적과 대항함에 있어서 미국이 우리와 어깨를 맞대고 함께 서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와 내 민족, 그리고 다른 나라의 민족들에게 감격적인 것입니다. 나는 우리가 얼마나 큰 격려를 받고 고무되었는지를 일일이 설명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민족과 나라의 반공주의자들에게 커다란 격려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친구들이여! 나는 여러분이 그러한 격려를 계속해주기를 희망합니다. 격려를 계속해 주십시오! 세계 도처에 있는 여러분의 동맹국이나 친구들을 실망시키지 말아 주십시오. 그들 중 많은 수가 이미 낙담하고 포기한 채, 노선을 바꿔 적들과 같은 편이 되었습니다. 그들을 실망시키지 마십시오.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나와 마미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내외에 대한 영원한 감사의 마음을 갖고 미국 땅을 떠날 것입니다. 두 분은 우리에게 이곳 미국을 방문할 기회를 주었으며, 진솔하고 따뜻하게 우리를 맞아 주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아이젠하워 내외의 우정과 신의가 넘치는 마음씨를 보았고, 깊은 감사와 격려를 마음에 새기고 돌아갑니다.
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위대한 친구라고 항상 생각해왔습니다. 우리의 대화 중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내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미래 세대가 걱정입니다. 우리는 밤낮으로 걱정합니다.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세계대전이 발발하면, 핵무기와 수소폭탄이 세계 문명과 인류의 절반을 파괴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나는 전적으로 그의 의견에 동의한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이 옳습니다. 나는 당신과 의견을 함께합니다.’ 그러나 또한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우리가 생명보다도 귀중하게 생각하는 우리의 민주적인 제도나 우리의 자유를 포기하려는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않는 한, 우리는 세계대전을 피할 수 없습니다. 달리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다른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미국 국민이 자신의 안전과 평화를 지키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안전과 평화의 보장이라는 미국의 위대한 유산인 민주적인 원칙들은 조지 워싱턴과 토머스 제퍼슨에 의해 주창되었고, 국민의 국민에 의한 그리고 국민을 위한 정부는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링컨에 의해 확립된 것입니다. 나는 미국 국민이 이러한 원칙들을 하늘이 무너져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아내가 매우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군요. 곧 끝내겠습니다.
이미 얘기했다시피, 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거의 모든 면에서 의견을 같이하며, 그의 감정을 존중합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의 기다림이 길면 길수록 재앙이 더 극복하기 힘들어지고 더욱 커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단 하나 우리 사이에 다른 점입니다.
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미국 국민 여론의 뜻에 따라야만 합니다. 미국 국민인 여러분이, 미국 여론과 세계 여론의 위대한 지도층인 여러분이 공산주의자들의 팽창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빨리 할수록 상황은 더 나아질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할지를 훨씬 수월하게 느끼게 될 것으로 이 사람은 굳게 믿습니다.”
이 대통령은 미국의 한복판에서 아이젠하워를 공개적으로 몰아붙이는 무서운 인물이었다. 그는 뛰어난 연설가였으며, 용감한 한국의 지도자였다. 요즈음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모욕적인 언사와 심지어는 6·25전쟁과 미국의 역할에 대한 그릇된 사실을 공공연히 유포시키는 분들에게 이 대통령의 이런 간담이 서늘한 즉흥 명연설이 한 번쯤 읽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어 러스크 이사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저는 이곳의 모든 분들이 위대한 애국자의 마음속을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얻고 크게 감동을 받아,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지를 통감하고 있으리라고 봅니다. 다음 차례로 넘어가기 전에 잠시 뉴욕 유대교 목사 협의회장 데이비드 셀리그손 목사의 기도가 있겠습니다.”
셀리그손 목사의 기도.
“아버지 하나님, 자유의 창시자이신 당신께 기도하나이다. 당신은 시나이 언덕에서 당신의 이름을 인간에게 알게 하셨나이다. ‘나는 애급의 속박으로부터 너희를 인도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그 말씀은 퍼져나갔습니다. (중략) 우리는 당신께서 우리에게 자유 국가라는 비전을 주신 데 대해 감사합니다. 자유 국가의 비전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에게 힘을 주었고, 인간의 마음속에 그 어떤 형태의 폭압에 대해서도 영원한 적대감을 가져야 한다는 맹서를 하게 했습니다. (중략)
정의와 신념으로 무장한 이승만 대통령과 그의 국민을 지켜주소서. 그들이 중시하는 인간 본연의 가치가 번창하도록 하시어, 악의 힘을 누르고 그들의 가치가 승리하게 해 주옵소서. 한국과 한국 국민이 폭정과 인간 노예화의 위협 세력에 대항하는 데 있어서 홀로 서 있지 않도록 이 축복받은 땅의 도시와 평원들에서 결단과 결의가 일어나게 하소서.
한국의 어린이들과 그곳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라는 당신의 빛바래지 않는 말씀이 충만한 날이 빨리 오도록 해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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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美財團 만찬회 ⑤ (27)
“이 대통령은 80평생 오직 나라 위해 살아온 분”
1954년 8월 2일, 한미재단 만찬회. 이승만 대통령이 6·25전쟁 이후 아이젠하워의 한반도 정책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연설, 셀리그손 목사가 한국과 한국인을 위한 기도를 한 후, 하워드 러스크 한미재단 이사장은 또다시 10분 동안, 데이비드 록펠러 등 한미재단의 이사들과 최순주 국회부의장, 양유찬 대사 등 주요 참석자 20여 명을 소개했다. 이어서 와그너 뉴욕 시장이 소개됐다. 로버트 와그너(Robert F. Wagner, Jr., 1910~1991)는 뉴욕 시장을 3차례나 역임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공교롭게도 그는 1954년 1월 시장에 취임한 후, 8월에 이승만 대통령을 뉴욕에서 영접했으며, 1965년 5월에는 대한민국 역사상 2번째로 미국을 국빈방문했던 박정희 대통령을 뉴욕에서 다시 영접한 후, 그해 12월 시장직에서 사임했다.
하워드 이사장의 소개를 받은 와그너 시장이 연설을 시작했다.
“오늘은 뉴욕시가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친애하는 이승만 대통령님께서도 뉴욕 방문을 기억에 남을 만한 날로 기억해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800만 뉴욕 시민은 오늘 위대한 인물에 대해 존경과 경의를 표했습니다. 그분은 민주주의 동맹의 대표를 넘어 인간 본성의 가장 중요한 상징인 용기의 표상입니다.
이상을 신봉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수적으로 압도하는 적에 맞서서 대의를 위해 싸우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살인과 약탈을 일삼는 적에게 저항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자유를 위해서 타협하느니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는 것은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용맹스러운 사자와 같은 용기를 갖고 믿기 어려운 역경 속에서 한국 국민을 자유의 기치 아래 규합한 영웅입니다. 그는 아시아의 민주주의 생존을 위해, 전 세계 자유인들의 안전을 위해 전쟁을 치렀습니다. 이 대통령은 불굴의 정신과 신념이 무신론과 폭정에 의해 소멸되지 않는다는 자유세계가 영원히 잊지 못할 교훈을 주었습니다.
이 대통령은 크렘린의 독재자들에게도 결코 잊지 못할 교훈을 주었습니다. 자유세계의 국민들은 자유를 빼앗기기보다는 죽음을 택할 것이며, 인간의 존엄성을 희생시키기보다는 그 어떤 희생도 치르겠으며, 침략에 굴복하기보다는 고통을 감수하며 싸운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줬습니다. 그는 소련에 나라를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민족의 의지가 그 어떤 무기보다 강하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이승만 박사는 민주주의는 불굴의 의지로 싸워서 지켜야 하는 이상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험난한 시대를 살고 있으나 이승만 대통령과 같은 용기 있는 지도자가 있고, 한국 국민과 같이 존경할 만한 민족이 있는 한, 인간의 고결함과 품격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는 우리의 노력은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어서 뉴저지 출신 상원의원 하워드 스미스(Howard A. Smith, 1880~1966)가 연설했다.
“나는 미국 상원의 대외관계위원회 소속 위원으로 일하면서 한국을 3번 방문했습니다. 1949년, 첫 번째 방문에서 이승만 박사 내외를 만났으며 두 분이 대의를 위해 목숨을 기꺼이 버릴 각오로 사는 것을 보고 존경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1951년, 손자가 미군 병사로 근무하고 있는 한국을 두 번째로 방문해 손자와 미군 장병들이 이 박사 내외의 감사와 사랑을 받고 전투 중인 것을 알고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그리고 1953년 휴전을 앞두고 세 번째로 한국을 방문해 이 대통령과 한국 국민의 환대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개인적인 인연 때문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내게 오늘 이 자리에서 자기를 대신해 인사를 해주도록 부탁했습니다. (중략)
이승만 대통령은 80 평생을 오직 조국을 위해서만 살아온 분입니다. 고문·감옥 생활·망명 생활이 이어졌지만, 조국이 자유의 땅이 되리라는 믿음을 결코 버리지 않고 목표를 향한 노력을 결코 게을리 하지 않았던 분입니다. 흔히 이 대통령과 조지 워싱턴을 비교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분은 독립의 아버지요 초대 대통령이며, 자신이 정한 노선을 흔들림 없이 따랐던 분들입니다. (중략)
3년간의 6·25전쟁에서 한국 국민의 영웅적인 자기희생 정신은 자유세계의 무한한 찬사를 받아왔습니다. 이제 미국은 한국에 적정한 군사방위력을 유지하면서, 전쟁의 화를 입은 한국의 부흥이라는 중대한 과제를 소홀히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해에 미 의회에 보낸 교서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미국이 즉각 한국을 지원해야 한다고 천명했습니다. 원조계획은 미 의회의 신속한 지지를 얻었으며, 첫해에 2억 달러가 제공돼 한국 국민들이 자신의 미래와 조국의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원조는 앞으로도 활발히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 차원의 원조 이외에도 수백만 미국 시민이 한미 재단 활동에서 보듯이 한국 국민에 대한 우정과 동정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밤 이 만찬회는 한국 국민과 미국 국민 간에 전쟁으로 맺어진 연대감을 강화하는 사업이 성공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미국 대통령을 대신해서 나는 모든 미국 국민이 한국의 미래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점을 말해 두고자 합니다. 우리는 위대한 애국자 이승만 대통령이 대표하는 강하고 용감하며 끈질긴 한국 국민의 정당한 열망을 계속 지원할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한국 국민에게 신의 가호가 함께하실 것을 기원합니다.”
스미스 상원의원의 연설이 끝나자마자, 이승만 대통령은 사회자의 양해도 구하지 않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마이크를 잡았다.
“내 아내가 시간이 너무 늦었다고 합니다. 물론 늦은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두 마디 해야만 하겠습니다. 오늘 이곳이 내게 너무도 영광스러운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위대한 마술을 부렸습니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격려를 주었습니다. 친구들이여! 방금 매우 고무적인 메시지를 보내준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스미스 의원에게 감사드립니다. 그 메시지는 한국 국민 모두에게 커다란 격려일 뿐만 아니라, 반공 대열에 서 있는 세계 모든 국민들에게도 큰 격려가 될 것입니다.
나는 미국 의회에서 아시아를 구하기 위해 중국을 구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아시아를 잃는다면, 다른 대륙을 구하기 매우 힘들어집니다. 중국을 구하는 일은 6억의 중국인을 정복하기 위해 미국이 육군과 공군을 파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유를 갈망하는 중국인을 격려해 주는 것입니다. 자유를 위해 싸우는 모든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주는 것입니다.
‘여기 증거가 있다. 이승만이 공산주의에 저항하는 시범을 보였다. 그리고 위대한 미국이, 위대한 미국 대통령이 이승만의 배후를 굳건히 지켜주고 있다. 너희도 자유를 위한 투쟁을 하면, 미국이 도울 것이다.’
이것이 격려입니다. 이것이 고무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힘입니다. 우리가 중국에 이기지 못하면, 우리가 수백만의 소련 공산주의자를 이기지 못하면, 공산주의를 격퇴하는 일은 매우 힘든 과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하는 방법을 갖고 있습니다. 중국과 소련의 모든 반공세력에게 자유를 위해 싸우도록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하나 둘씩 뒤따라 올 것입니다. 나는 이를 확신합니다. 이러한 노선을 따라 갑시다.”
이승만 대통령은 상대방의 영어연설을 완벽하게 알아듣고 이렇게 영어로 즉흥적이고도 멋진 발언을 할 수 있었던 대한민국 최고의 외교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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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美財團 만찬회 ⑥ (28)
“미국 국민은 한국의 영원한 친구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4년, 국빈방문 기간 중에 가장 즐거워했던 행사가 한미재단 만찬회라는 사실을 앞서 소개한 바 있으며, 오늘까지 총 6회에 걸쳐 그날의 행사를 상세하게 연재했다. 그 이유는 57년 전의 한·미 관계를 단순히 반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대통령을 비롯한 러스크 이사장, 스펠만 추기경, 밴플리트 장군, 와그너 뉴욕 시장, 스미스 상원의원 등 당대 지성인들의 발언을 육성 그대로 접함으로써 우리가 오늘과 내일을 사는 지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다.
이날 행사의 마지막 연사로 나선 인물은 메리 로드(Mary Pillsbury Lord, 1904~1978) 여사였다. 우리에게는 친숙하지 않은 인물이지만, 그녀는 당대의 저명한 시민운동가이자 사회봉사활동가였으며,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각별한 관계에 있었다. 이런 인연으로 그녀는 1953년, 루즈벨트 대통령의 부인 엘리노어 루즈벨트(Eleanor Roosevelt, 1884~1962)의 후임으로 유엔인권위원회 미국 대표가 됐으며, 유엔총회 미국 대표로도 활동했다. 이날 만찬회에서 로드는 다음과 같은 인사말을 했다.
“저는 유엔에서 다뤄지는 인권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용감한 지도자, 위대한 애국자, 위대한 친구인 이승만 대통령님, 그리고 용맹스러운 대한민국 국민을 찬양하는 이곳에 초청받아 발언하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세계평화는 유엔의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유엔은 한반도에서 북한의 무력침략을 막기 위해 역사상 최초로 강제조치를 결의했으며,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단결된 힘으로 무력침략자를 격퇴했습니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 미래의 무력침략 위협을 저지하기 위해, 분단된 나라가 올바른 통일의 길로 가도록 하기 위해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들은 동반자로서 단결해야만 합니다. 동반자란 자유를 소중히 생각하며, 자유가 공격받을 때 방어하기 위해 함께 투쟁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 국민은 자유를 위한 투쟁의 성공을 위해서는 크나큰 희생, 피나는 노력, 성실함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습니다. 지구상의 영구적인 평화와 밝은 미래를 위해서는 한국 국민과 같은 투쟁정신이 필요합니다.
자유는 모든 국가와 개인의 권리이자 책임입니다.
이승만 대통령님, 세계 모든 나라는 대한민국이 자유를 위해 권리와 책임을 다하고 있는 데 대해 찬사를 보낼 뿐만 아니라 이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로드 대표의 발언이 끝나자, 러스크 이사장이 말했다.
“로드 여사의 말대로 우리가 어제와 오늘 한국을 위해 무슨 일을 하고, 무엇을 제공하는지에 관계없이 이 자리를 떠날 때 자유와 권리를 지키려고 피나는 투쟁을 하고 있는 한국 국민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 대한 우리의 지원은 우리가 한국 국민에게 지고 있는 큰 빚을 갚는 조그만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 미국 국민은 오늘 한국 국민의 영원한 친구가 될 것이라는 약속, 자유민주주의가 가장 나은 삶의 방식이란 신념, 앞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 국민의 용기와 스태미너에 더욱 감사를 표해야겠다는 각오를 지니고 이 자리를 떠나게 될 것입니다.”
러스크 이사장의 말을 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신사숙녀 여러분, 이렇게 자주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용서하세요. 앞서 발언한 와그너 뉴욕 시장님에 대한 감사의 말을 못 했네요. 좋은 말씀 영원히 간직하겠습니다. 그리고 로드 여사님의 우아한 말씀 감사합니다.
그리고 할 말이 더 있습니다. 러스크 이사장에게 증정하기 위해 한국에서부터 훈장을 가져왔습니다. 여러분들이 보는 앞에서 수여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보입니다. 훈장을 수여하는 이유가 담긴 증정서가 있습니다. 한글로 쓰여 있으며, 대한민국의 국새가 찍혀 있습니다. 양유찬 주미한국대사가 이 증정서 내용을 영어로 번역해 러스크 이사장님과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어서 양유찬 대사가 훈장증서를 읽었다.
“대한민국은 인도주의자, 의사, 편집인 하워드 러스크 박사에게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수여합니다. 러스크 박사는 전쟁으로 파괴된 한국 난민을 구원하고, 이들에게 희망·건강·자립의 수단을 회복하도록 하는 위대한 과업을 매우 성공적으로 도왔으며, 이를 위해 따뜻한 이해심을 갖고 엄청난 능력을 발휘해주었습니다.
러스크 박사는 전쟁으로 수족이 절단된 많은 한국 환자들의 비극적인 고통을 조사하고 그들의 정상적인 생활을 위해서 인공수족을 연구ㆍ개발했으며, 이를 제공했습니다. 또한 한국의 고아와 빈민들에게 미래의 희망이 되는 기금을 모으는 데 적극적으로 앞장섰습니다. 또한 러스크 박사는 큰 파급효과를 지닌 뉴욕 타임스지의 지면을 통해 미국 여론에 한국 국민이 필요로 하는 것과 용감한 정신을 알렸습니다.
그의 노력으로 세계 자유의 보루인 한국에서 자유를 지키기 위한 전투를 치르다가 심각한 고통을 겪게 된 사람들을 돕기 위한 수백만 달러의 기금이 모아졌습니다. 대한민국은 이러한 러스크 박사의 봉사와 사심 없는 헌신, 그리고 재능 있고 인도주의적인 러스크 박사 부인의 헌신에 감사하며 이 저명한 의사, 학자, 박애주의자 하워드 러스크 박사에게 이 훈장을 증정하는 영예를 가집니다. 증서에는 이승만 대통령께서 친필로 서명하셨습니다.”
양유찬 대사의 훈장 증서 낭독에 이어 이승만 대통령은 러스크 이사장의 가슴에 훈장을 달아주며 말했다.
“한국 국민에 대한 기여에 감사하며, 귀하와 귀하의 부인에게 한국 국민의 더 없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이 훈장을 달아드립니다.”
러스크 박사는 이 대통령과 참석자들에게 큰 소리로 수상소감을 말했다.
“저희 내외는 이 영광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저와 제 처, 그리고 우리 모두는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이 훈장이 한국을 위해서 일한 미국인 모두의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겸허하게 수용하겠습니다. 이 뜻을 기려 우리는 앞으로 남은 과제들을 완성하기 위해서 더욱 헌신하겠습니다.”
1954년 8월 2일, 8시부터 진행된 만찬행사는 11시가 넘은 시각에 호레이스 도네건 주교의 축원예배로 끝이 났다.
“하느님의 자비로운 은총과 보호에 우리를 맡기나이다.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한국 국민에게 주님의 빛, 평화, 용서, 인도, 힘, 그리고 기쁨이 이 밤에 그리고 영원히 내리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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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방문 및 트루먼 前 대통령과의 만남 (29)
“정의를 수호하고 깡패국가들을 응징해야”
올해는 우리나라가 유엔에 가입한 지 20주년이 되는 해다. 1991년 9월 17일, 유엔본부에 대한민국의 태극기와 북한의 인공기가 동시에 게양됐다. 그 후 15년 만인 2006년 말, 반기문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 유엔사무총장에 선출돼 재임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국빈방문이 이뤄지던 1954년과 비교해 보면 격세지감이 있다. 그 당시 우리는 유엔 가입을 바랐지만, 거부권을 가진 소련의 반대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 유엔 방문
사정이 이러했으니, 우리나라의 국가원수가 유엔사무총장을 만난다는 것은 의미가 상당히 컸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8월 3일 오전 11시 뉴욕의 유엔본부를 방문, 다그 함마르셸드(Dag Hammarskjold, 1903~1961) 사무총장의 영접을 받았다. 스웨덴 외교관이자 정치가였던 함마르셸드는 1953년, 유엔사무총장에 당선된 후, 9년째 재임 중이던 1961년에 콩고 내전을 조정하러 가던 중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사후에 그는 노벨평화상을 받았으며, 고 케네디 대통령은 그를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외교관’이라고 칭송한 바 있다.
이 대통령은 함마르셸드 사무총장과 잠시 환담한 후, 그의 안내로 새로 건축된 유엔본부의 중요시설을 시찰했다. 마침 한국 아동 구호를 위해 각국의 우표를 팔고 있는 한국 아동구호소에 들른 이 대통령은 우표책을 몇 권 산 다음, 인근의 기도실에 들러 조용히 조국의 통일과 안녕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
이어 소회의실에서 외신기자회견을 했다. 이 자리에서 이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유엔 회원국이 아닙니다. 소련이 우리가 회원국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한국이 유엔회원국이 아니라고 불평하지는 않겠지만, 특정국가가 유엔 가입을 원하는 국가를 거부권으로 방해하는 문제를 민주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유엔헌장이 개정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엔은 국제적인 정의를 심판하는 일종의 국제재판소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중요한 사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힘이 없습니다. 그러니 특정국가가 유엔의 원칙을 침해하더라도 모두가 무기력한 것입니다. 모든 유엔 회원국들은 여하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정의를 고수해야 하며, 대동단결해 깡패 국가들을 응징해야 합니다.
국제연맹의 활동이 실패한 것은 세계가 정의와 법으로 평화를 달성하려고 강력하게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거울 삼아 지금은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평화를 달성하겠다는 생각보다는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정의를 수호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한 시점입니다.”
기자회견을 마친 이승만 대통령은 함마르셸드를 비롯한 간부들의 환송을 받으며 유엔본부 건물을 떠나, 뉴욕타임스 본사로 향했다. 뉴욕 타임스지의 발행인 아서 헤이스 설즈버거(Arthur Hays Sulzberger, 1891~1968)로부터 오찬 초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아서 헤이스 설즈버거는 1935년부터 1961년까지 뉴욕타임스 발행인을 역임하고, 1963년에 그의 아들 아서 옥스 설즈버거(Arthur Ochs Sulzberger, 1926~ )에게 발행인 자리를 넘겨 줬다. 현재 뉴욕타임스의 발행인은 아서 헤이스 설즈버거의 손자인 아서 옥스 설즈버거 2세 (Arthur Ochs Sulzberger, Jr., 1951~ )이며, 그는 1992년에 아버지로부터 발행인 자리를 물려받았다.
미국 측에서 설즈버거 발행인을 비롯한 뉴욕타임스 주요 간부가 참석한 이날 오찬회의 주빈은 이승만 대통령이었고, 한국 측에서는 최순주 국회부의장, 갈홍기 공보처장, 양유찬 주미한국대사, 임병복 주유엔대사, 한표욱 주미한국대사관 정무공사가 참석했다.
오찬 후, 이 대통령은 뉴욕타임스 본사 건물을 시찰한 다음, 웹 앤드 냅(Webb and Knapp)이라는 도시건축 전문회사를 방문했다. 1965년에 파산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건축회사지만, 당시에는 뉴욕의 매디슨 스퀘어에 본사를 둔 유명한 회사였다. 이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한 것은 이 회사의 대표인 윌리엄 젝켄도르프(William Zeckendorf, 1905~1976) 때문이었다. 젝켄도르프는 비록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당시 우리나라에 100만 가구를 건축하겠다면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회사 방문을 요청했고, 이날 저녁 이 대통령을 만찬회에 초대하기도 했다.
■ 시카고 방문
1954년 8월 4일 오전 8시 30분, 이승만 대통령 일행은 월도르프 아스토리아 호텔을 출발해 뉴욕 라과디아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간단한 환송행사를 마친 대통령 일행은 미국 수송기를 타고 뉴욕을 떠나, 이날 하오 12시 11분 시카고 미드웨이 공항에 도착했다. 일행은 공항에서 마틴 케넬리 시카고 시장을 비롯한 시카고 상공회의소 토머스 콜터 회장의 환영을 받았다.
특히 100여 명의 교민들이 항공기 주변에 모여 애국가를 부르며 태극기를 흔들었다. 15명으로 구성된 중국인 자선협회 대표단도 환영행사에 참가했다. 이 대통령은 모든 한인 동포들과 일일이 악수했으며, 리무진에 몸을 싣고 드레이크 호텔로 향했다. 호텔에서 이 대통령은 시카고 기업인들과 오찬을 함께 했다.
■ 트루먼 전 대통령 사저(私邸) 방문
8월 5일 오전 9시 56분, 이 대통령 일행은 미 공군기편으로 미주리 주 캔자스 시티에 도착했다. 트루먼 전 대통령을 만나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공항에는 미국 측 인사들 이외에 캔자스 리븐워스 소재 육군참모대학에 다니는 우리나라 장교단도 마중을 나왔다.
대통령 일행은 미국 국무부가 제공해 준 5대의 차량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인디펜던스 시로 출발했다. 트루먼은 그곳에서 요양 중이었다. 트루먼 내외가 흰색 저택의 현관 앞으로 나와 일행을 맞아 줬다. 저택 앞 길거리에서 약 500명의 주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李 대통령이 트루먼에게 말했다.
“참으로 반갑습니다. 나는 귀하가 미군을 파병해 우리가 생존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기회를 이용해 위대한 결정을 해준 귀하에게 나와 한국 국민의 변치 않는 감사를 표합니다. 귀하의 결정은 우리 국민의 사기를 북돋아 줬고, 우리가 공산주의자들을 싸워 물리칠 수 있도록 해줬습니다. 한국인 모두가 이를 고마워하고 있으며, 귀하를 비롯한 미국 국민이 이러한 감사의 뜻을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트루먼의 저택 안에서 간단히 환담한 후, 밖으로 나온 李 대통령은 집 앞에 모인 군중들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이 세계를 자기네 통치하에 놓기 위해 밤낮없이 준동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을에서, 학교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가정에서 그들과 투쟁해야 합니다.”
이어서 李承晩 대통령은 옆에 있는 트루먼에게 뼈있는 작별인사를 건넸다. “나는 1950년 비오는 날 깜깜한 새벽에 공산주의자들이 우리를 침략한 것을 결코 잊지 못합니다. 그때 나는 기도했고, 주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싸우지 않고 공산주의자들을 몰아낼 방법은 없습니다. 부디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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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 시의회 연설 (30)
“죽음보다 더 나쁜 것은 자유가 없는 나라”
트루먼 대통령의 사저를 방문한 다음, 이승만 대통령은 캔자스시티 페어팩스 공항으로 이동해 1954년 8월 5일 정오 로스앤젤레스로 출발했다. 비행기 안에서 대통령 일행은 모처럼 포커 게임으로 여가를 즐겼다. 로스앤젤레스 공항에서 LA시장을 비롯한 교민 등 300여 명의 환영을 받은 이 대통령은 숙소인 앰배서더 호텔로 향했으며, 저녁에는 교민단체인 LA 동지회가 주최한 만찬행사에 참석했다.
미국인들, 우리말로 애국가 불러줘 감동
8월 6일 오전 10시, 로스앤젤레스 시 의회가 주최한 환영행사가 개최됐다. LA 시 의회 존 깁슨(John S. Gibson) 의장의 안내로 행사장에 들어선 이 대통령은 깁슨 시 의회의장으로부터 ‘극동지역 자유세계의 챔피언’이란 문구가 적힌 기념증서를 받았으며, 미국인들이 우리나라 애국가를 우리말로 부르자, 이 대통령은 크게 감동하며, 즉흥연설을 시작했다.
“깁슨 시 의회 의장 내외분, 시 의회 의원 및 공무원 여러분, 그리고 귀빈 여러분.
우리가 미국에 온 지 일주일이 조금 지났습니다만, 이번에 나는 40년간 미국에 체류하면서 경험했던 것보다도 많은 것들을 보았습니다. 그중에서 놀라운 것 중의 하나는 성악과 기악으로 연주되는 한국의 애국가였습니다. 전에는 그 어느 곳에서도 한국어로 불리는 애국가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노래 부르는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고는 한국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미국인들이 애국가를 단어 하나하나 정확하게 발음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훌륭합니다! 잘 기억해 뒀다가 우리 국민에게 얘기해 주겠습니다. 내 얘기를 듣고 우리 국민들은 전율할 정도로 감동을 느낄 것입니다. (중략)
또한 어디를 가나 미국 남녀노소가 우리를 환영해 주었습니다. (중략) 그것은 나와 일행에 대한 것이 아니라, 미국 국민의 위대한 대한민국 국민에 대한 환영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극진한 환영에 감사하며, 이제 전에 없이 강한 결의와 커다란 격려를 안고 조국으로 돌아갑니다.”
서론을 마친 이 대통령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전쟁은 악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점에서 미국인이나 한국인은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전쟁에 반대하며, 세계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나 전쟁의 공포보다 더 끔찍하고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자유의 축복을 만끽하고 있는 미국인 여러분은 모르겠지만 자유가 없는 나라는 더 이상 국가가 아니며, 죽음보다 더 나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일제의 침략으로 경험했기에 공산 침략을 저지하려고 애썼습니다.
나는 모든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을 조국이라고 말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공산주의자가 되면, 그는 더 이상 한국인, 중국인, 미국인이 아니며 혹은 다른 어떤 나라의 국적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철저한 공산주의자이며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는 더 이상 여러분의 형제가 아니며, 자매도 아닙니다. 그는 더 이상 여러분의 국적이 아니며, 친구도 시민도 아닙니다.
우리 국민은 공산주의냐 민주주의냐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가져야만 했습니다. 현재 몇 개의 유럽 국가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공존이란 없습니다. 여러분! 천연두와 끔찍한 전염병과 어떻게 같이 산단 말입니까? 나는 공산주의가 이 시대에 전 세계에서 가장 나쁜 전염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공산주의와의 공존이 있을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반은 공산주의자이고, 반은 민주주의자인 사람은 없습니다. 동시에 반은 공산주의고, 반은 민주주의인 나라도 없습니다. (중략)
어제 오후에 시카고에서 이곳에 오는 길에 우리는 미주리 주의 인디펜던스 시에 들렀습니다. 그곳에서 트루먼 전 대통령 내외를 만나 우리가 위기에 처했을 때 미국인들이 행한 일에 대해 나의 개인적인 감사와 한국 국민의 감사의 뜻을 전했습니다. (중략)
“미국에 대한 우리의 감사는 영원할 것”
우리는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아들들에게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시아의 일부인 작은 지역에서 민주주의라는 대의를 구해내는 데 도움을 주러 왔습니다.
여러분의 아들들은 우리와 유엔의 젊은이들과 함께 고통을 겪고, 전투를 하고, 피를 흘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공산주의자들에게 그들이 생각했던 대로 쉽게 민주주의를 패배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려줬습니다. 우리는 북진해, 중공도 몰아내기를 바랐습니다. (중략)
유엔은 중국 공산주의자들과의 전투를 바라지 않았지만, 우리는 홀로 진격하기로 결정하고 착수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휘발유 통이 잠겨 있었고, 탄약은 단지 3일 동안 사용할 만큼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자살을 시도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착상태에서 전선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당면한 현실입니다. 4년간의 전쟁 중에서 단지 1년만 전면전을 벌였고, 3년은 대화로 허비했습니다. 그동안 남북한 양쪽에서 수많은 무고한 생명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침통한 어조로 본론을 마친 이 대통령은 결론을 얘기했다.
“여러분에게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공산침략자들에 대항해 싸우는 한국을 돕기 위해 자식과 남편을 한국에 보내준 여러분과 여러분의 어머니들에게 우리 국민이 감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로스앤젤레스의 어디를 가나 미국인들이 내 손을 잡고 ‘나는 한국에 2년 있었다’ ‘3년 있었다’ 등등 말합니다. 나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어느 대령을 만났습니다. 그는 다리를 다쳐 목발을 하고 있었으나 그 어떤 불평도 말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만난 6·25전쟁의 부상자들 모두는 그 대령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고귀한 대의를 위해 싸웠고, 피를 흘렸다는 사실과 그들의 의무를 다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미국과 자유 국가의 시민들은 한국에서 그들의 의무를 용감하고 고귀하게 해냈습니다.
또한 미국인들은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는 한국인들을 도울 뿐만 아니라, 전투 정신이 투철한 한국의 젊은이들을 모아서 훈련시켰으며, 이제 한국군은 동양에서 가장 막강한 반공세력입니다. 이제 우리는 미국 정부에 병력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국민이 우리 전선을 방어하고, 아시아 지역의 전선을 강화하며, 여러분을 더 안전하게 평화를 누리게 하기 위한 책임을 짊어지려고 합니다. (중략)
“이제 우리 스스로 지키도록 도와 줄 때”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우리 국군의 방위력을 높여주십시오. 여러분의 젊은이들이 더 이상 한국에서 고생하고 피 흘리는 것을 우리는 바라지 않습니다. 미국인들에 대한 우리의 감사는 영원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우리를 스스로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호소입니다.
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미국 젊은이들이 결코 다시 한국에 올 필요가 없도록 한국의 국방력을 증강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에게 행복한 날을 기약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 국민이 우리나라를 방위할 책임을 지게 될 것이고, 바라건대 미국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자주국방에 도움을 주었으면 합니다. 그러면 적들은 더 이상 팽창을 못 하고 여러분에게도 더 이상 가까이 올 기회를 잃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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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世界情勢協議會 주최 오찬회 (31)
美 유력인사 앞에서 비장한 어조로 연설
이승만 대통령이 LA에서 가진 두 번째 공식일정은 세계정세협회(World Affairs Council)가 주최한 오찬회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세계정세협회는 미국 시민들에게 국제정세와 글로벌 이슈에 대해 일깨워주고 교육할 목적으로 지역별로 조직한 비 당파조직이다. 1918년 창설했으며, 현재 미국 전역에 94개 협회가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1954년 8월 6일 정오 빌트모어 호텔에서 개최된 행사에는 1000여 명의 LA 유력인사가 참석했으며, 이 대통령에게 뉴욕의 한미재단 오찬회만큼 성대하고 의미 있는 행사였다. 오찬회가 시작되자, 존 어윈(John Erwin, 1909~1995) 로스앤젤레스 부시장이 참석자들에게 이 대통령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우리의 국경 안팎에서 미국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흔히 우리가 사생활이나 국민적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일을 할 때 너무 이상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순진하게 미국 젊은이들 마음속에 신과 국가와 자유를 향한 열정적 사랑을 주입한다는 말을 합니다. 이들은 또한 원칙이란 유치한 환영이며, 진리란 확인할 수 없거나 개인적 해석이 만들어 놓은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릇된 논거를 내세웁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도덕을 결여한 국민은 타락한 국민이며, 신념이 흔들리고 원칙을 세우지 못하는 나라는 불운한 국가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또한, 진리의 존재를 부정하고 지속적인 탐구를 포기하는 국민은 지도나 나침반 없이 방황하는 탐험가와 같다는 사실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 조국, 또는 이웃을 위해 용감하게 투쟁하고, 싸우며 죽어간 사람들의 행위를 찾아내고 반복해 소개하곤 합니다. 이런 남녀들의 삶을 연구해 우리가 진정으로 표방해야 할 성품과 행위를 찾아내기도 합니다. 즉, 고통을 감내해야 할 만큼 옳은 것은 무엇인지, 투쟁할 가치가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보다 인내할 가치가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밝혀내려 합니다. 이렇게 역사상 위대한 인물들에서 발견되는 미덕을 이 나라 젊은이에게 일깨우고 심어주고자 합니다.
사정은 이렇지만 사실, 우리가 칭찬하는 사람들은 흔히 과거의 인물들이므로 시간 장막에 의해 그들 행위가 빛이 바랬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여 일관된 비전, 강인한 목표의식, 용기의 살아 있는 화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분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은 우리에게 보기 드문 특권입니다. 그분은 또한 자신의 비전·목적·용기를 자국민들에게도 간곡히 권고하고 모범을 보임으로써 충분히 전수시켰습니다.
이 모임 참석자들 중 많은 분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승만 대통령은 조국의 해방과 자유를 요구했습니다. 그 벌로 그분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장 혹독한 고문을 겪고 살아남았습니다. 이후 7년간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수감생활 중 그는 유년시절 그를 가르쳤던 감리교 목사들의 방문과 보살핌에 감동받아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1904년, 석방된 그분은 미국으로 와서 6년 동안 수준 높은 대학교육을 받았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간 그분은 억지로 망명하기 전까지 조국의 자유라는 대의를 위해 지하에서 활동했습니다. 망명생활은 33년이나 됐습니다. 그 기간 중 그분은 조국의 해방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당시 그분의 활동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는 그분의 목에 걸렸던 30만 달러의 현상금으로 증명됩니다.
그분은 망명 기간 중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직을 맡았으며,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에 대한민국 대통령이 된 것은 반세기 동안 그러한 목표를 위해 노력한 데 따른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그렇게 오랜 동안의 투쟁 경력은 우리 같은 국가에서 최대의 찬사와 존경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미국은 이상과 원칙을 중시하고, 이런 가치들을 용감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입니다.
미국은 대한민국의 용감한 군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공산주의 무리들에게 대항해 싸운 친척들과 친구들을 가진 나라입니다. 그들로부터 우리는 대한의 용사들, 나아가 대한민국 전 국민의 신념·용기·용감성·근면함 등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의 모범적인 생애가 한국에서 자랑스러운 본보기가 됐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님! 당신의 삶·신념·고통 그리고 불굴의 인내심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마음속에 자유와 해방을 위한 불타는 욕망의 불길을 밝혔으며, 그 불길이 살아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조지 워싱턴이 미국에 특별한 존재였고, 앞으로 그러한 존재로 남게 될 것처럼, 미구엘 히달고 신부가 멕시코에서 각별한 추억을 불러일으키듯이, 시몬 볼리바가 남미인들의 마음을 흔드는 힘을 갖는 것과 같이 당신은 어제, 오늘 그리고 영원한 내일까지 조국이 항상 주위로 모여드는 자유의 자석이었고, 그러한 역할은 계속될 것입니다.
온 자유세계가 진정으로 크게 기뻐하고 감사해야만 한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우리는 당신을 통해 대한민국의 모든 용감한 국민들에게 인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당신이 국민들을 위해 계속 봉사하는 동안, 당신 개인과 부인에게 건강과 행복이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어윈 부시장의 소개를 받은 이 대통령은 12시 30분, 감격 어린 표정으로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분은 이 캘리포니아로부터 아시아 쪽을 바라보고 있으므로 아시아에서 진행되는 일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수많은 여러분의 자제가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을 상대로 싸웠으며, 또한 공산주의자들에게 대항해 한국을 방위하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이 소집됐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여러분은 극동의 평화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족, 또한 이 풍요한 땅의 복지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나는 오십 년 전에 여러 가지 일을 배우고자 미국으로 건너왔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단지 한 가지만을 알아보고자 이곳에 다시 왔습니다. 세계를 정복해 국가통제 절대주의와 개인의 노예화라는 그들이 생각하는 모습대로 개조하는 일에 착수한 자들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는 그들과 함께 평화로이 살아 나가려고 노력할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들에게 항복을 할 것인가? 또는 그들이 우리를 공격할 때마다 필사적으로 싸울 것인가? 이러한 것들은 중요한 질문이며, 나는 세계의 운명이 이에 대해 어떤 대답을 주느냐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40년 전에는 볼셰비즘이 유럽·아시아·미주에서 금기시된 왕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중략)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어떤 처지에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자유국가들이 위성국가가 돼 이미 철의 장막과 죽의 장막 뒤로 사라져버렸는지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친구들이여, 이것이 진보며 성공이라는 것입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으며, 또한 여러분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평화를 말하는 동안 공산주의자들은 세계를 얻고 있습니다. 지도를 보세요. 적색과 핑크색이 지배적인 색채로 돼 있습니다.”
비장한 어조로 서론을 마친 이 대통령은 잠시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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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커먼웰스(Commonwalth) 클럽 오찬회 (32)
“나의 조국 우리 국민에게 보여준 관심에 감사”
이승만 대통령은 LA 세계정세협회(World Affairs Council)가 주최한 오찬회 연설에서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미미했던 볼셰비즘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전 세계적으로 팽창하고 있다고 경고조의 서두를 꺼낸 다음, 공산주의와 공존하자는 안이한 주장을 하는 평화론자들에게 포문을 열었다.
“성서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쓰여 있습니다. 만일 평화론자들이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 준다면, 나도 그들을 축복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평화를 가져다 주지 않습니다. 한반도에서의 잠정적 휴전이 진정한 평화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공산주의자들이 다음의 맹공격을 준비하기 위해 바라는 휴식기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평화는 총검의 평화입니다. 제3차 세계대전을 피할 수 있다고 믿습니까? 세계대전은 어디로부터 오겠습니까? 평화를 바라고 애호하는 자들로부터 오지 않을 것입니다. 전쟁은 세력 확장을 추구해 다른 국가를 탐하는 자들로부터 올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며, 범죄자를 체포해 재판정으로 데려갈 정직한 경찰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악행 추구에 집착하는 자들의 악행을 단념케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 처벌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재산과 우리의 국민을 안전하게 하는 오직 하나의 길입니다.
법을 지키며 평화로운 세계시민으로 살아가려 하지 않는 자들에게 무기를 사용할 것이라는 명백한 의지를 표명해야 합니다. 혹자는 우리를 호전가라고 부를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싸움을 해야만 한다면, 평화를 위해 싸울 것이며, 이를 결코 수치스럽게 생각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민주주의와 인류의 자유를 구하려 한다면, 전쟁을 포함한 일체의 필요한 수단을 모두 사용해야만 합니다.
실로 전쟁은 가공할 것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압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다수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지구상에서 전쟁을 소멸시키기 위해 힘이 닿는 한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생명보다 더 귀중한 무엇이 있습니다. 자유 없이 살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자유의 가치를 압니다.
한국인은 일본제국주의 압제의 용광로 속에서 담금질된 경험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 없이는 자기 생명도 자기 것이 아님을 이해하게 됐습니다. 자유가 결여된 생존은 죽음보다도 더 못한 것입니다.
조지 워싱턴은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워서 미국의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링컨도 싸움에 의해 여러분의 나라를 구했습니다. 윌슨 역시 평화적 인물이었지만 여러분이 신봉하고 있는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여러분을 전쟁으로 인도했습니다. 여러분은 평화를 사랑하지만, 싸워야 할 때에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대의는 언제나 정당했고, 여러분은 그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항상 승리했습니다.
나는 미국이 우리 시대의 위기를 점차 깨달아가고 있으며,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무엇을 하려는 결의를 점점 강화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나는 새로운 용기와 커다란 낙관적 감정을 갖고 한국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중략)
미국인들은 민주주의 원칙이라는 대의를 수호하기 위해 두 차례의 세계에서 유럽과 아시아에서 싸워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보전해 냈습니다. 이들 전쟁에서 싸운 수백만의 여러분 자녀들은 무엇이 최고의 가치인지를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싸운 용사들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여러분의 생활방식을 보존하고, 미국의 아름다운 해안으로 전쟁이 번지지 않게 하기 위해 싸웠던 것입니다. 그들은 매우 용감하게 싸웠으며, 한국은 여러분처럼 그들을 자랑으로 생각합니다. 생존한 사람이나 영웅적으로 죽어간 사람이나 모두가 우리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과실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침략자들에게 침략의 열매를 계속 갖도록 허용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과일을 갖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치 적이 국제사회의 존경할 만한 일원인 것처럼, 극악무도한 산적이 법을 지키는 양민으로 급변하기나 한 것처럼 생각하고 싸움을 중지하고 그들과 회담을 시작했습니다.”
본론을 끝낸 이승만 대통령은 강한 어조로 결론을 말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들을 결연히 상대해, 그들에게 말해주는 것입니다. 침략은 끝났으니 탈취한 것을 모두 포기하고 우리와 함께 평화롭게 살자! 그러지 않으면 자유세계 국가들의 단합된 힘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공동목표는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이뤄야 하는 평화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단지 패배와 인간 자유의 종말을 초래할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표상은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지켜야 하는 정의여야만 합니다. 정의란 우리가 다른 방법으로는 획득할 수 없는 평화, 옳은 것의 승리, 그리고 자유에 이르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합된 힘으로 공산주의 세력에 대항할 준비를 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전쟁 없이 승리할 수 있고, 전쟁을 해서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우리 모두가 그렇게도 바라는 영원한 평화, 자유세계, 그리고 승리를 기필코 달성하고야 말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8월 7일 오전 9시 로스앤젤레스를 출발해 오전 10시 40분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간단한 환영행사를 한 후에 바로 미 제6군 사령부가 있는 프레시디오로 향했다. 그곳에서 이 대통령은 한국전 참전용사들로 구성된 의장대 를 사열한 후, 미 제6군 사령관 윌리엄 와이먼 중장과 6·25전쟁의 영웅 윌리엄 딘 소장의 환영을 받았다. 이어 그는 여독을 잊은 채 샌프란시스코 팰리스 호텔로 향했다. 커먼웰스 클럽 주최 오찬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오후 1시, 400명의 여론지도층 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시작된 행사에서 이 대통령은 차분한 어조로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분, 샌프란시스코는 언제나 다정다감한 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와 내 아내에 대한 정중한 환영으로 이러한 사실이 다시 한번 입증됐습니다. 그리고 나의 조국과 우리 국민에게 보여준 여러분의 큰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이번 미국 여행에서 나는 미국 국민이 우리나라와 국민에 대해 거대한 저수지와 같은 호의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깨달았습니다. 고국으로 돌아가면 우리 국민에게 미국이 기대했던 것보다 더 견실한 우방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겠습니다. 이는 가진 것 모두를 공산주의와의 투쟁에 사용하고 있는 그들에게 멋진 뉴스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미국 정부가 민주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국민의 공공의지에 의해 인도된다는 것에 대해 크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전 국무장관 코델 헐은 어느 라디오 연설에서 이러한 이념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여러분의 정부는 여러분보다 훨씬 앞서 나갈 수도 없고, 여러분보다 훨씬 뒤처져 있을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미국 정부의 정책이 없다고 합니다. 나는 이런 주장이 결코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부에 정책이 없다면, 그 책임이 정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국가를 실제로 구성하고 있는 미국 국민에게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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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國 大陸에서의 공식 일정 마무리 (33)
“미국 여론만 충분히 조성됐더라도 어찌 휴전협정을 수락했겠습니까”
1954년 8월 7일 (토요일), 이승만 대통령의 샌프란시스코 커먼웰스 클럽 오찬회 연설은 그의 미국 국빈방문 행사 중에서 마지막 연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대통령은 7월 26일 워싱턴에 도착한 이후 그간 하지 못했던 모든 감회를 털어놓는 계기로 활용했다.
“친구 여러분, 오늘날 여러분과 내가 당면한 문제는 여러분의 나라와 이 세계 자유 국가들의 생사와 관련된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에는 세 부류가 존재합니다. 첫째는 공산주의를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공산주의의 폐해를 이해하지만, 그것을 믿고 그 성공을 위해 공개적으로 또는 비밀리에 활동하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공산주의가 행하는 악을 알고는 있으나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거나 적대시함으로써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끔찍한 현실입니다. 공산주의 치하에서는 생존이 위협을 받는다는 사실을 아는 우리가 할 일은 단 한 가지 있습니다. 당당히 우리의 의견을 밝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일들에 관련된 선입견을 버리고 우리 자신, 자녀들 그리고 우리의 조국을 구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일어서서 공산주의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여러분은 전염병과 싸우는 것처럼 공산주의와 싸워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점점 많은 시민이 종전에 여러분이 알았던 것과 같은 애국적인 남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조만간 알게 될 것입니다.
항상 표를 더 얻어서 선거에서 승리하기를 갈망하는 정치인들은 공산주의자들과 협상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끔찍한 대가를 지불하게 됩니다. 유럽의 몇몇 정치가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십시오. 반공적이던 어떤 이들은 가장 열렬한 공산주의 지지자가 됐고, 또 어떤 이들은 무저항주의, 공존, 또는 노골적인 유화주의 같은 정책을 씀으로써 적색 음모를 방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도자들은 자기 조국이 노예국가가 되느냐 아니면 자유국가로 남느냐 하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스스로를 중립주의자라고 부릅니다. 한때 고귀했던 중립이라는 단어에 대한 이 얼마나 가소로운 곡해입니까?
나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간의 투쟁에 있어서는 중립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어느 쪽이든 한쪽이 이겨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유 문화의 숭고한 표현방법들을 신봉한다면, 우리가 가진 모든 것과 우리 전부를 자유와 정의를 위해 바쳐야 합니다. 미국의 정책은 정당, 의회, 행정부, 대통령의 것이 아니고, 그들에 의해 통제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6억의 중국인이 여러분의 적에게 넘어갔을 때 그것이 여러분 정부의 실책이었다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에 반대하는 의견을 피력하신 적이 있습니까? 6·25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졌을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휴전회담은 우리가 한반도 통일문제와 공산주의 문제들을 명백한 승리로 해결할 수 있었던 바로 그때 시작됐습니다. 만약 미국 여론이 민주주의 수호에 공감해 충분히 조성됐더라면, 어찌 휴전협정을 수락하도록 설득됐겠습니까? 나는 미국 여론이 완전히 환기되지 않았었다고 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여러분은 여태 실패하고 있었다고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그렇더라도 아직 늦지는 않았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지금부터 싸움을 시작한다면, 아직 승리의 희망은 남아 있습니다.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나는 단지 그것이 옳은 선택이 되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여러분이 곧 싸움을 개시하지 않으면, 미국이 옹호해 오던 모든 것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적에게 단호하게 저항한다면,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를 구원하고 인류의 자유를 영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할 것입니다.”
본론을 마친 이 대통령은 의미심장하게 결론을 말했다.
“끝으로 혹시 내가 여러분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을 한 것이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 자유세계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민주주의 옹호자들이 마음을 모아 단결하고 신속하게 행동을 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임을 밝혀두고자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가 자유와 가진 소중한 모든 것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몇몇 사람들이 얘기하듯 전면적인 핵전쟁을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며, 여러분의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수소폭탄의 사용을 두려워하며 힘이 닿는 한 제3차 세계대전을 피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데 전적으로 그와 의견을 함께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민주주의를 희생시키는 대가로 이뤄져서는 안 됩니다.
끊임없이 축소되는 우리의 지구는 반은 노예상태로 반은 자유 상태로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함께 행동하는 데 실패한다면, 우리의 날들은 수명이 길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단합된 힘으로 공산주의 세력에 대항할 준비를 갖춰야 합니다. 결국, 우리는 단합된 힘으로 승리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승리를 쟁취하고 자유세계를 이루며, 우리 모두가 그렇게 바라는 항구적인 평화를 성취할 것입니다.”
30분간 연설한 후, 이 대통령은 엘너 로빈슨 샌프란시스코 시장으로부터 캘리포니아산 삼나무로 만든 의사봉을 선물로 받았으며, 이것을 “세계의 질서와 평화를 촉구하는 데” 사용하겠다고 말했다.
미국 대륙에서의 출발
1954년 8월 8일(일요일) 아침, 이 대통령 내외는 샌프란시스코 주재 한국총영사관에서 개최된 아침예배 행사에 참석했다. 그곳에는 1000킬로미터가 넘는 먼 거리에서 온 동포들도 있었다. 이 자리에서 이 대통령은 간략하게 인사말을 했다.
“우리는 계속 싸울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과거에 여러 차례 우리 한국이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여건 아래에 있었으나, 우리는 일어섰고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습니다. 아직도 가장 센 놈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우리는 용기와 신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신은 공산주의와의 전투라는 결정적 순간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배가 끝나고 이 대통령 일행은 경찰 모터사이클의 선도 아래 샌프란시스코 공항으로 향했다. 미국 대륙에서의 국빈방문 일정을 마치고, 하와이로 가기 위해서였다. 공항에서 그는 “미국에서 받은 환대”에 대해 미국 국민에게 감사를 표하는 출발성명을 발표했다.
“한국 국민과 정부를 대신해 나와 일행은 아이젠하워 대통령, 미국 정부 그리고 미국 국민이 우리에게 보여준 친절함, 그리고 한국의 정당한 열망에 대해 보여준 사심 없는 지원에 대해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나는 한미 양국이 완전히 협조함으로써 앞으로 한반도 통일을 가져오고, 세계를 정의와 자유가 상존하는 영원한 평화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오후 12시 5분, 이승만 대통령은 2주일간의 성공적인 미국 본토에서의 국빈 방문을 마치고, 하와이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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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방문, 그리고 귀국 (34 - 최종회)
“自由美國 없이는 자유세계의 희망이 없다”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한 이승만 대통령 일행은 1954년 8월 8일 오후 6시 30분(호놀룰루 시간),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하와이는 이 대통령이 1915년부터 1938년까지 23년간 망명생활을 하면서, 일제침략으로부터 도피해 온 한국인 피난민들을 위해 학교·교회·애국단체를 만들어 한국 국민에게 자유의 불꽃이 살아 있도록 한 곳이다.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비행기에서 내리자, 호놀룰루의 200여 한인 동포와 태평양 함대사령관 펠릭스 스텀프 제독 등 저명한 인사들이 열렬히 환영해 줬다. 일행은 진주만에 있는 마칼라파 영빈관에 투숙했으며, 미 태평양 함대사령부의 스텀프 제독이 이 대통령 내외를 극진히 대접했다.
8월 9일 월요일 아침, 사무엘 킹(Samuel King) 하와이 주지사가 마칼라파 영빈관을 방문해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했다. 이어 이 대통령 일행은 태평양 함대사령부에서 의장대 사열을 하고, 미군 지도자들과 대화를 나눴다. 저녁에는 스텀프 제독이 베푼 리셉션에 참석했다.
■ 하와이 옛 친구들과의 만남, 펀치볼 국립묘지 참배
8월 10일 아침, 이 대통령 일행은 이올라니 궁전으로 가서 사무엘 킹 주지사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이 대통령은 킹 주지사에게 이상범 화백의 ‘아침’이라는 한국화를 선물했다.
이 대통령은 이어 하와이 신문사 두 곳을 방문했다. 우선 호놀룰루 애드버타이저 신문사에서 로린 써스톤 발행인과 레이먼드 콜리 편집인을 만나 환담하고, 호놀룰루에서 1913년에 코리안 퍼블릭 위클리를 창간했던 것을 회상했다. 다음에는 호놀룰루 스타 불레틴 신문사를 방문해 릴리 알렌 편집인을 만났다.
예정에 없던 신문사 두 곳을 방문한 후 이 대통령은 미 헌병과 호놀룰루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호놀룰루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분화구에 위치한 국립 태평양 군인묘지로 달렸다. 이곳은 6·25전쟁에서 사망한 많은 미국인들의 영원한 안식처다.
이 대통령 일행이 탄 차량이 묘지에 들어서자, 군 의장대가 `받들어총'을 해 영접해 줬다. 차량에서 내릴 때부터 클라크 라프너 소장이 이 대통령을 안내했다. 그는 미 육군 태평양 사령관이며, 인천상륙작전 당시 미 10군단 참모장이었고, 그 후 한국에서 미 2사단을 지휘했었다.
오후에 이 대통령은 1919년, 자신이 창건한 한인기독교회를 찾았다. 그는 그곳에 모인 수백 명의 신자들에게 한국어로 미국이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공산주의자들이 세계를 전복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어서 누나누 묘지에 묻힌 친구들의 묘소, 한국동지회 사무실, 칼리 계곡의 양로시설 등을 방문했다.
늦은 오후에 하와이 주재 한국총영사관에서 이 대통령 내외를 위한 리셉션이 개최됐고, 저녁에는 킹 주지사 주최 만찬회가 열렸다.
■ 귀국길에
8월 11일 수요일, 호놀룰루 주재 한국총영사관에서 70세 이상의 노인들과 점심을 함께 한 이승만 대통령은 고별 기자회견을 열고, 미국 국빈방문을 마무리하는 공식성명을 발표했다.
“오늘 미국 땅을 떠나자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내가 제2의 고향 땅을 다시 밟게 됐던 것은 멋진 체험이었으며, 나와 아내에게 베풀어준 정중한 환대를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헤어지면서 나는 미국의 모든 친구들이 미국과 앞으로 올 세대의 안전과 복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라고 촉구하고 싶습니다. 또한 그들이 전 세계의 안전과 평화를 생각해 보기를 희망합니다.
공산주의자의 함정에 빠진 사람들이 철의 장막 뒤에서 구조해 달라고 울부짖고 있습니다. 그들 모두가 미국이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행동을 취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인간의 자유를 포함한 민주주의 원칙의 챔피언이자 옹호자입니다. 나는 미국인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과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시적인 평화는 절대로 평화가 아닙니다. 항구적인 평화를 표방하는 사람들은 그를 위한 확고한 토대를 건설할 것을 주장해야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국가들만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평화의 원칙들도 포함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인간의 자유가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이자 영속적인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라는 것을 확립시킨 분들에게 보답해야 합니다. 그것은 오로지 인간의 모든 자유를 파괴하려 하는 자들을 패퇴시키기 위해 우리의 생명과 우리에게 귀중한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를 할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의 적은 무자비하며, 문명사회의 국가나 국민들이 소중히 생각하는 품격을 갖추지 않은 존재들입니다. 적의 유일한 목표는 모든 자유 국가들을 정복하고 그들의 재산과 주민들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나는 미국에 한국을 구하기 위해 오늘이나 내일 선전포고를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조국 하나라면 그리 큰 의미가 없습니다. 나는 아주 겸허하게 미국에 촉구합니다. 도움을 갈구하는 6억 중국인들과 아시아 및 그 이외 지역의 수많은 사람들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나의 가장 절실한 호소이며, 나의 진심 어린 기도입니다. 이는 한국, 중국 그리고 노예화 위협을 받고 있는 국민들과 국가들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미국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자유 미국, 투쟁하는 미국이 없이는 자유세계의 희망이 없습니다. 나의 기도는 미국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적시에 결정을 내리고, 그로 인해 나머지 우리 모두를 구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8월 11일 오후, 하와이 히캄 공군기지에서 미 공군기에 탑승해 귀국길에 올랐다. 비행기는 웨이크 섬과 유황도를 경유해 8월 13일 오전 11시 김포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이 대통령은 귀국소감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제네바 회의 실패 이후 우리 국군과 국민은 6·25전쟁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기대를 하고 있었고, 상황이 나아지기를 기다렸습니다. 미국으로 출발할 때 나는 경제원조나 기타 물질적인 원조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가장 큰 희망은 유엔군이 우리 국군과 똑같은 조치를 취하든지, 혹은 우리가 독자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우리의 정책을 따르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미 최고위층이 호의적이지 않아서 이런 제안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원조문제와 방위문제에 관해서는 책임 있는 미국 관리, 상하원의원, 미국 국민이 매우 공감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이 같은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적의 도발로 시작된 6·25전쟁을 휴전이 아니라 기필코 자유와 정의의 승리로 마무리하기 위해, 아이젠하워를 설득하려 했지만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는 회한의 외침이었다. 미국 국빈방문을 통해 한반도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완전히 몰아내고, 자유와 정의가 꽃피는 통일한국의 꿈을 실현하고자 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시도는 이렇게 좌절되고 말았다. [大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