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05.04.25 18:07 / 수정 2005.04.26 05:06
▶ 75년 영수회담을 갖기 위해 청와대에서 만난 박정희 대통령(右)과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
박정희 대통령이 단행한 유신개혁의 커다란 흐름은 두갈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쟁의 비능률을 줄이기 위해 정치 분야는 바짝 조이고 경제면에서는 모든 것을 확 풀어주어 자유주의적 시장경제정책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박 대통령이 가장 싫어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참아왔던 것은 대의민주제도를 유지한다는 명분 아래 정치자금을 방만하게 걷는 데서 발생하는 부패와 낭비였다. 이에 더하여 국회 운영의 비능률과 계속되는 정치 투쟁도 문제였다.
박 대통령은 대의민주주의의 비용이 우리가 감당하기엔 너무 비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야당은 '낮에는 야당, 밤에는 여당'이라는 유행어가 무색할 정도로 후안무치한 존재라는 것이 박 대통령의 인식이었다. 오죽했으면 박 대통령은 경제 장관들에게 "정치바람은 내가 책임지고 막아줄테니 걱정말고 시장경제원리에 따라 소신껏 일하라"고 격려하기까지 했겠는가.
박 대통령은 한 선거구에서 한 명을 뽑는 제도로는 경쟁이 과열되고 선거자금도 많이 들어간다고 보고 두 사람을 뽑는 복수당선제로 고쳤다. 이 제도로 선거자금의 지출이 줄고 선거 구민 사이에 발생하는 지나친 감정적 대립을 피할 수 있었다는 평가가 있었다.
그러나 유신개혁으로 정치자금의 낭비를 단속하자 여야 가릴 것 없이 불만이 대단했다. 박 대통령은 평소 "해마다 커다란 공장 두 세 개를 지을 돈이 정치자금으로 허공에 날아가 버린다"고 불평하곤 했다. 능률의 극대화와 국력의 조직화는 바로 이런 것을 고치자는 말이었다. 일부 야당은 이를 대의민주주의의 축소니, 정치 탄압이니 하면서 비판했다.
선거제도의 개혁과 더불어 경제 각 부처에는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자금과 관련한 요청이나 압력이 들어오면 즉각 청와대로 보고하라"는 지시가 내려갔다. 이후 정계로부터의 압력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자금의 대폭적 절감이 결과적으로 경제를 부양시켰다는 것은 당시의 경제
통계가 입증한다.
유신개혁의 와중에서 내가 걱정하면서 지켜보았던 것 중 하나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으로 생겨난 남북조절위원회에 관한 입법조치였다. 기구를 운영하려면 설치 근거를 입법화해야 한다는 것은 민주국가의 상식이다. 이 기구는 처음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마치 백지 위에 밑그림부터 새로 그리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 화공(畵工)이 제2인자로 소문이 자자한 권력자 이후락 정보부장 겸 남측 조절위원장이 될 게 뻔한 일이었다. 신비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모나리자의 그림이 나올지, 공포의 상징인 프랑켄슈타인의 그림이 나올지 그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이후락씨 뿐이었다.
그러나 73년 중반 북측이 남북대화를 사실상 중단하면서 그림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사라진 것은 천행(天幸)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상한 모습의 권력기관이 출현하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다.
김성진 전 청와대 대변인·문공부 장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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