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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전 김일성 "남한이 北보다 강해져?" 코웃음

淸山에 2011. 11. 3. 08:46

 

 


 
 
40년전 김일성 "남한이 北보다 강해져?" 코웃음

연합뉴스
 
 
 
“우리가 잠자고 발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북한의 김일성은 한국이 북한보다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더 강력한 나라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아예 해보지 않은 듯하다.
미국 우드로윌슨센터가 최근 발간한 ‘한반도에서의 데탕트 부상과 추락:1970-1974’ 자료집에 수록된 1971년 김일성과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당시 루마니아 국가평의회 의장간의 대화록을 들여다보면 이런 사실이 잘 드러난다.
 
김일성은 1971년 6월 방북한 차우셰스쿠에게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정책과 남북통일 문제를 얘기하면서
“그(박정희)는 한국이 북한보다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더욱 강력하게 될 때 그것(통일)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면서 “이는 그의 단순한 꿈이라는게 내 생각”이라고 말했다.
 
김일성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면서
“그동안 우리가 잠을 자고 발전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가 상상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그렇기 때문에 공산주의를 무찌르고 통일을 하겠다는 그의 슬로건에 우리는 겁먹지 않는다”고 강한 자신감을 표현했다.
이런 대화 내용은 루마니아측이 작성한 당시 대화록에 따른 것이다.
 
김일성은 당시 “공산주의가 무너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말도 했다.
그는 당시 남한 내에서 민주주의를 향한 싸움이 더욱더 가열되고 있다면서 혁명의 기대감도 표시했다.
 
김일성은 1973년 방북했던 토도르 지프코프 불가리아 국가평의회 의장과의 대화에서는 중국에 대한 불신과 불만의 일단도 드러냈다.
그는 문화혁명 당시 중국이 북중국경 지대에서 대형 스피커와 홍보 수단을 동원한 대대적인 홍보전을 북한을 상대로 진행했다면서
“아들이 국경지대를 방문하고 돌아와서는 ‘아버지, 하룻밤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말하더라”는 내용도 소개했다.
 
또 중국이 구소련과 군사적 갈등을 이어갈 당시 중국군 100여명이 무단으로 북한 영토에 침입했다는 사실도 전했다.
 
 
 
 

 


 
 
“박정희엔 안 진다” 40년 전 김일성 오산
[중앙일보]
 

‘우드로윌슨센터’ 자료 공개

1971년 6월 북한의 김일성 주석(왼쪽)이 평양을 방문한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국가평의회 의장을 맞이하고 있다. 차우셰스쿠는 북한 체제를 모방해 개인 숭배를 강요하면서 공포정치를 하다가 89년 민중혁명으로 쫓겨나 부인과 함께 총살당했다.
[중앙포토]
 
40년 전 북한 김일성 주석은 절대로 한국이 북한보다 경제적으로 더 나아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 워싱턴의 외교안보전문 연구소인 우드로 윌슨센터가 2일(현지시간) 공개한 『한반도에서의 데탕트 부상과 추락:1970~1974』 자료집에 수록된 김일성과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당시 루마니아 국가평의회 의장의 대화록에 그런 기록이 남아 있다.
 
 김일성은 71년 6월 북한을 방문한 차우셰스쿠 의장에게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통일정책을 설명하면서 “그(박정희)는 한국이 북한보다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더욱 강력하게 될 때 그것(통일)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그의 단순한 꿈이라는 게 내 생각”이라고 말했다. 특히 김일성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그동안 우리가 잠을 자고 발전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가 상상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또 “그렇기 때문에 공산주의를 무찌르고 통일을 하겠다는 그의 슬로건에 우리는 겁먹지 않는다”고 강한 자신감을 표현했다. 김일성은 차우셰스쿠에게 “공산주의가 무너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한 뒤 당시 남한 내에서 민주주의를 향한 싸움이 더욱더 가열되고 있다면서 혁명의 기대감도 나타냈다.
 
 

 71년 6월은 제7대 대통령 선거(71년 4월)에서 3선 개헌으로 당선된 박정희 대통령이 김대중 당시 야당 후보의 통일론에 자극받아 대북한 통일정책을 강화하는 시점이다.
 
 김일성은 뒤이어 73년 방북했던 토도르 지프코프 불가리아 국가평의회 의장과의 대화에서 “문화혁명 당시 중국이 북·중 국경 지대에서 대형 스피커와 홍보 수단을 동원한 대대적인 홍보전을 북한을 상대로 진행했다”며 “아들(김정일)이 국경지대를 방문하고 돌아와 ‘아버지, 하룻밤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말하더라”고도 했다. 또 중국이 소련과 군사적 갈등을 이어갈 당시 중국군 100여 명이 무단으로 북한 영토에 침입했다는 사실도 언급했다.
 
 그러나 이런 대화가 오간 지 40년이 지난 2011년, 한국과 북한의 국력은 비교가 무색할 정도로 크게 벌어졌다. 김일성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한국이 북한보다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훨씬 부강한 나라가 됐다.
 
 2일 한국은행이 내놓은 2010년 북한 경제성장률 추정치에 따르면 북한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124만원으로 한국(2400만원)의 19.3분의 1 에 그쳤다. 교역규모 격차는 더욱 크다. 북한이 2010년 한 해 동안 41억7000만 달러어치를 수출입하는 동안 한국은 8915억 9000만 달러어치를 사고팔았다. 북한의 213.8배다.
 
 산업구조도 한국에 비해 후진적이다. 북한 산업구조는 여전히 농업(20.8%)·광업(14.4%) 비중이 커 서비스업(58.2%)·제조업(30.6%) 중심의 한국과 큰 차이를 보인다.
 
 
 워싱턴=박승희 특파원, 안혜리 기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1965~89년 루마니아를 통치한 독재자. 도청을 통한 불만세력 색출과 친위대 조직 등을 통해 공포정치를 펼쳤으며, 89년 공산주의 정권이 무너지자 해외로 도망가려다 붙잡혀 총살됐다.
 
 
 

 

 


 
 
北,이럴 때도 있었나? 40년동안 진화보다 퇴보한 북한 …
1972년과 현재[온라인 중앙일보]
 
1970년대 초반까지 한국은 북한보다 못살았다. 오죽하면 신성일씨가 중앙일보에 연재중인 `청춘은 맨발이다`에서 "68년 도쿄에서 영화를 찍을 때 북한 공작원이 `우리보다 못 사는 것들이 어디, 비싼 데 와서 촬영해`라고 협박했다(9월15일자)"고 공개했을까.

실제로 한국이 북한과 어느 정도 경제적 균형을 맞춘 것은 72년이었다. 당시 한국은 국내총생산(GDP) 106억 달러를 기록했다. 53년만해도 한국의 GDP는 13억 달러에 불과했다. 100억 달러 달성은 국가적인 경사였다.

그래서인지 당시 북한은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 해 7·4 남북공동성명이 채택되고, 한국을 둘러본 북한 당국은 급속한 경제성장에 적잖이 긴장했다. 북한은 이후 국제적인 긴장완화의 바람을 타고 서방과의 무역확대에 총력을 기울인다. 경제적 우위를 계속 이어가려면 국제적인 무역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하지만 4년만에 북한의 계획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76년 대서방채무불이행 사태에 빠졌다. 당시 유일한 채무불이행 공산권 국가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이후 남북간의 경제격차는 갈수록 크게 벌어졌다. 2007년 북한의 GDP는 148억 달러로 70년대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한국개발연구원 북한경제리뷰). 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한국경제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으로 북한의 GDP는 한국의 38분의 1 수준이다.

온라인 중앙일보는 72년 북한의 경제상황이 담긴 사진과 현재 사진을 비교했다. 중국 언론과 네티즌들은 72년 북한의 사진을 `1972년 황금기의 북한`이라는 제목으로 올리기도 했다. 이 사진들은 당시에는 국내 정치상황과 남북 대치 상황 때문에 공개되지 않았다.

#보육시설

[사진=중앙포토, 중화왕, 치앙구어왕, CN뉴스, 조선중앙TV]

1972년 6월에 찍은 직장인을 위한 보육시설이다. 자연채광을 이용한 넓은 실내 놀이터를 갖추고 있으며, 아이들도 비교적 자유롭게 뛰어논다.
하지만 현재 유아원은 선전용인데도 시설은 물론 아이들의 옷차림도 열악하다. 보육교사의 지시에 맞춰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어릴 때부터 자유가 철저히 통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나마 평양과 같은 대도시를 벗어나면 시설이 더 형편없다(작은 사진).

#신발공장

[사진=중앙포토, 중화왕, 치앙구어왕, CN뉴스, 조선중앙TV]

1972년 6월 평양에 있던 자동화공정을 갖춘 신발제조 공장. 컨베이어벨트를 따라 생산된 신발이 지나가고 있다. 이를 여직원이 품질검사를 하는 등 상당한 수준의 제조기반을 보여준다.
그러나 현재의 신발공장에선 첨단 장비를 찾아볼 수 없다. 고무신이 가득하다. 신을 찍어내면 쌓아서 별도로 포장하는 등 낮은 수준의 기술력을 볼 수 있다.

#인쇄공장

[사진=중앙포토, 중화왕, 치앙구어왕, CN뉴스, 조선중앙TV]

1972년 7월에 찍은 것이다. 포장지가 인쇄되면서 동시에 상품을 자동으로 포장한다. 당시 이런 공정인 세계적인 수준이었다.
현재 인쇄공장 사진은 한국을 비롯한 외국의 돈을 끌어들여 설립된 공장이다. 인쇄된 것을 수작업으로 고르는 등 70년대보다 못한 수준이다. 외국에서 투자해 공장을 만들더라도 최첨단 장비는 북한에 반입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제약회사

[사진=중앙포토, 중화왕, 치앙구어왕, CN뉴스, 조선중앙TV]

한 눈에 봐도 현대적인 시설을 갖추고 있다. 작은 사진은 당시 북한이 생산한 각종 의료장비들이다. 자체 의료장비를 생산하고, 자동화시설을 이용해 의약품을 만들 정도로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북한의 의료산업 수준은 한국보다 높았다.
현재 북한의 의료관련 산업은 열악하기 짝이 없다. 외국의 지원이 없으면 유행성 독감 조차 다스릴 수 없을 정도로 기초 의약품도 제대로 주민들에게 공급하지 못한다. 열악한 실험실에서 실험을 하고, 만들어진 약품은 직원들이 수작업으로 분류하고 포장한다.

#봉제공장

[사진=중앙포토, 중화왕, 치앙구어왕, CN뉴스, 조선중앙TV]

1972년 6월에 찍은 평양의 의류공장이다. 직원들의 알록달록한 유니폼부터 자동재봉틀을 갖추고 있다. 당시로는 첨단시설이다.
우측의 봉제공장은 2009년 재일동포들이 돈을 모아 북한에 전달, 건설한 애국모란봉제공장이다. 기계의 수준이 70년대와 달라진 것이 없다. 직원들의 옷차림은 72년에 비해 남루해졌다.

#보건소

[사진=중앙포토, 중화왕, 치앙구어왕, CN뉴스, 조선중앙TV]

함경남도 흥산군의 한 보건소. 왕진용 자전거와 가방을 멘 보건직원들의 옷차림이 눈길을 끈다. 보건소의 외형도 상당히 깨끗하고 아늑해 보인다.

우측 컬러 사진은 현재의 보건진료소. 선전을 위해 외벽에 도색을 하는 등 신경을 썼지만 허술해보인다. 내부에 배치된 의료장비와 위생상태는 주민을 대상으로 한 현재 북한의 의료수준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나마 이 의료장비도 방문하는 외국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비치한 선전용이다.

#상점

[사진=중앙포토, 중화왕, 치앙구어왕, CN뉴스, 조선중앙TV]

1972년 6월 평양의 한 상점. 편의점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각종 식료품과 의약재 등이 즐비하다. 연출된 사진이라고 해도 풍부했던 당시의 북한 사정을 이해하는데는 무리가 없다.
하지만 현재는 이런 상점은 북한의 최고위층이나 관광객들만 드나든다. 주민들은 길바닥에 장마당을 펼쳐놓고 생필품을 조달하고 있다. 그나마 평양에 있는 상점도 70년대 상품진열방식 그대로여서 시간이 멈춘 듯 하다.

 
유혜은 리포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