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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鄕愁) - 이동원, 박인수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 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 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음음음음 )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 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 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 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
정지용 시인의 향수(鄕愁) - 이동원, 박인수 노래
[시대의 등불이 된 재속 프란치스칸들] 시인 정지용 프란치스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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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과 신앙에 대한 열정, 시로 피어났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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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시 '향수'를 모르는 한국인이 있을까. 시인 정지용(프란치스코. 1902~1950?)은 그 시 한 편만으로도 이미 '민족 시인'이다.
하지만 그가 6ㆍ25전쟁 중 납북되면서 그의 시가 해금되기까지는 전쟁이 끝나고서도 35년이 걸렸다. 1988년이 돼서야 그의 시가 해금돼 가톨릭 시인으로서 교외 안팎에서 완전히 복권됐으며, 1989년에는 정지용 문학상이 제정된다. 또 재속 프란치스칸으로서 그의 삶과 문학, 신앙이 새롭게 재조명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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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 신앙과 민족주의, 모더니즘을 융합시킨 거장 정지용 시인.
사진은 1930년대 초 모교인 휘문고보 교사로 재직할 당시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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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 같은 문학으로 온 겨레 사랑 받은 시인
시인은 1902년생이다. 충북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에서 한의사이던 아버지 정태국씨, 어머니 정미하씨 사이에 맏아들로 태어났다.
충북 옥천보통학교(현 죽향초등학교)를 나온 그는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현 휘문고)에 진학, 박종화, 홍사용, 정백 등과 사귀며 문학의 길에 들어선다. 당시 박팔양 등과 함께 동인지 「요람」을 펴내고, 신석우 등과 문우회 활동에 참여했으며, 이병기와 이일, 이윤주 등의 지도를 받았다.
3ㆍ1운동이 일어나자 이선근과 함께 '학교를 잘 만드는 운동'으로 반일(半日) 수업제를 요구하는 학생대회를 열었다가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으나 박종화와 홍사용 등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났다. 이른바 '휘문사태'였다.
정지용 문학의 요람은 역시 휘문고보였다. 휘문고보 재학 시절인 1919년 12월 「서광(曙光)」지 창간호에 생애 첫 작품으로 소설 '삼인'을 발표했으며, 문우회 학예부장으로, 교지 「휘문」 창간호 편집위원으로 그는 휘문고보에서 문학적 재주를 발휘한다.
일본 교토에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하던 1923년 4월 무렵에 이미 자신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향수'를 써서 「조선지광」(65호)에 발표했다. 도시샤대학을 졸업한 뒤 귀국, 휘문고보 교사로 취임한 이듬해인 1930년에는 김영랑, 박용철이 창간한 「시문학」 동인으로 참가했다.
▲ 1931년 정지용 시인과 부인 송재숙 프란체스카, 장남 정구관 베네딕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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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은 특기할 만한 해다. 그해 6월 창간된 「가톨릭 청년」 편집고문으로 참여한 정지용은 이 잡지를 통해 이상의 시를 세상에 공개한다. 또 자신의 시 '해협의 오전 두 시' 등 시 8편과 산문 '소묘 1ㆍ2ㆍ3'을 발표한다. 당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즉 카프(KAPF)의 입장에 반대한 그는 순수문학의 기치를 세웠다. 이를 위해 결성한 9인회에 가담해 이태준, 이무영, 유치진, 김기림, 조용만 등과 함께 활동하면서 모더니즘운동을 벌였고 문학 공개강좌를 가졌으며 기관지 「시와 소설」 간행에 참여했다.
이후 「문장」지 시 추천위원으로 있으면서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등 청록파 시인을 등단시켰고, 해방이 되면서 이화여자전문학교(현 이화여대)로 옮겨 한국어ㆍ라틴어 담당 교수 및 문과과장이 됐다. 1946년엔 가톨릭계 신문인 경향신문 주간이 돼 고정란인 '여적(餘滴)'과 사설을 집필했고 이듬해 이화여대 교수로 복직했다. 서울대 문리대 강사로 출강하며 '시론'을 강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1948년 이화여대 교수직조차 사임한 뒤 서울 녹번리(현 은평구 녹번동) 초당에 은거하며 서예로 소일했다.
#가톨리시즘은 2000년간 교양의 원조
일제 강점기 말은 우리말로 시를 쓰는 일조차 '죄'가 되는 엄혹한 시대였다. 그래선지 그는 신앙에 더 매달렸다. 그가 언제 세례를 받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일본 도시샤대학 유학 시절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그는 신앙생활과 기도문 번역에 특히 열심을 보였다. 경성대목구 종현(현 명동)본당 청년회장으로 활동하던 그는 청년회 활동이 일제 강압으로 무산되고 재속 프란치스코회 서울형제회가 설립되자 조종국, 한창우, 류홍렬 등과 함께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입회, 1937년 백동(현 혜화동)성당에서 오기선 신부 주례로 착의식을, 3년 뒤 허원식(서약식)을 한다. 다만 재속 프란치스칸으로서 그의 활동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 1939년 1월 서울 혜화동성당에서 재속 프란치스코회 허원식을 마치고 허원자들과 함께한 정지용(왼쪽에서 여덟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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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주일이면 부천 소사성당 전신인 소사공소에서 미사 참례하고, 시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슴에 깊이 묻어둔 채 신앙인으로서만 살았다. 아울러 부천 소사공소에 상주사제를 영입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고, 종내 경성대목구에서 임세빈 신부를 모셔왔다. 해방 직후엔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하는 작업에 착수, 숱한 어려움 끝에 본당 승격의 기쁨을 안게 된다. 이로써 현재 부천에 있는 본당 20곳이 탄생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처럼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순수 시인으로 활동했지만, 광복 후 좌익 문학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있다가 전향해 보도연맹에 가입하는 수난을 겪었으며, 6ㆍ25전쟁이 일어나자 그해 7월께 좌익계 제자들에 의해 연행돼 공산군에 끌려갔다. 정확한 사망 시점은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평양교화소에서 이광수, 계광순 등 33명이 같이 수감돼 있다가 폭사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문학에서 신앙과 직접 관계를 맺고 있는 작품은 첫 시집 「정지용 시집」에 수록된 시 9편이다. '임종' '별' '갈릴레아 바다' '은혜'(이상 1933년 작, 「가톨릭청년」 통권 제4호) '다른 한울' '또 하나 다른 태양' '불사조' '나무' '승리자 김안드레아'(이상 1934년 작, 「가톨릭청년」 통권 제9ㆍ10호) 등이다.
그의 가톨릭 문학 운동을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는 건 1933년 「가톨릭 청년」지 창간 때 일화다. 당시 카프 서기장이던 임화가 조선일보에 "가톨리시즘은 문화의 퇴화"라고 비판하자, 그는 "가톨릭은 2000년간 교양의 원조"라고 당당히 맞선다.
두 아들을 사제로 만들고자 수도원에 보낼 정도로 신심이 돈독했던 그는 당시 '시의 옹호'라는 시론을 통해 신앙의 정신적 가치를 설파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최상의 정신적인 것은 신앙이며, 이 신앙을 이루는 것은 애(愛)와 기도, 감사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신앙을 갖지 않은 시인은 드높은 정신적 가치를 마련할 수 없다고까지 했다.
그의 저서로는 시집 「백록담」과 「정지용 시집」이 있으며, 산문집 「지용문학독본」과 그의 평문과 수필, 번역시 등을 묶은 「산문(散文)」이 있다. 그를 기려 부천복사골문학회는 1993년 정지용이 1944년부터 3년간 은거했던 경기도 부천군(현 부천시) 소사읍 소사리에 기념 푯돌을 세웠으며, 부천시는 2000년 11월 부천 중앙공원에 '정지용 향수' 시비를 건립했다. 자료 제공=재속 프란치스코회 한국국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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