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宋 말기 徽宗(휘종)의 시대. 이것은 바로 《수호전》의 시대였다. 《수호전》은 講談으로부터 발생한 소설인데, 그 시대 배경은 北宋 말기이다. 無法者(무법자, out-law)가 梁山泊이란 소굴에 웅거하는 얘기지만, 이 시대엔 그밖에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公田法 등 착취를 일삼는 정책이 잇달아 나왔기 때문이다.
‘아우트로’의 소굴, 梁山泊
梁山의 기슭은 湖沼(호소)지대로서 어로를 生業(생업)으로 삼는 어민이 적지 않았다. 이런 어민에 대해 어선 1척 당 얼마라고 하는 세금이 매겨졌다. 전매품인 소금을 암거래하는 私鹽業者(사염업자)처럼 관청에 신고하지 않은 闇漁船(암어선)의 橫行(횡행)도 당연한 일이었다. 官에 적발되면 나포된다든지 투옥된다든지 하기 때문에 사염업자처럼 闇어선이 무장해서 관헌에게 저항하는 것이 역시 자연스러운 추세였다.
《수호전》의 삽화 |
《수호전》은 소설이기는 하지만, 그 두목 宋江은 실존인물이다. 그의 별호 及時雨(급시우)는 가뭄 때 내리는 비처럼 고마운 사람이라는 뜻이다. <宋史>의 張叔夜(장숙야) 傳에 그가 宋江을 포위해서 항복시킨 史實이 기록되어 있다. <宋史>의 侯蒙(후몽) 傳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宋江(송강) |
36인이 소설에서는 3배인 108인의 두령으로 되어 있다. 부하는 5000명 이상이었던 것 같다.
《수호전》에서는 北宋 말의 정치를 그르친 四奸(사간)을 蔡京(채경)·高俅(고구)·童貫·楊진(양진: 환관)으로 지목하고 있다. 북송 멸망 직전 태학생 陳東이 올린 상서에서는 六賊(육적)이 등장했다. 六賊에는 四奸 중 고구와 양진이 빠져 있고, 公田法·花石綱 등의 惡政을 주도한 梁師成·李彦·朱勔·왕보 등이 거명되어 있다.
方臘은 會昌法亂에 살아남은 마니敎 신도
山東으로부터 河南에 걸쳐 횡행하던 宋江을 귀순시켜 방랍 토벌에 동원한 것은 史實이다. 史書에서도 방랍 토벌 총사령관 동관의 部將에 宋江의 이름이 보인다. 방랍의 난(1120년)은 宋代 최대의 민란. 이것은 北宋 멸망의 원인되는 중요한 사건이다.
방랍은 원래 漆園(칠원)의 소유자였다. 휘종의 사치를 만족시키기 위해 杭州에 궁정의 器物을 제조하는 造作局(조작국)이 설치되었다는 것은 전술했다. 아마도 조작국은 방랍의 칠원으로부터 칠을 강제적으로 징발했던 것 같다.
방랍은 채식주의자이고, 비밀교단의 지도자로 전해진다. 휘종도 절강의 반란 원인이 造作局 및 화석강에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토벌군을 파견하는 동시에 이것들을 폐지하기로 했다. 조작국과 화석강의 폐지에 의해 조금이라도 民怨을 줄이려고 했던 것이다. 방랍은 항주를 함락시키고, 聖公이라 자칭하고 永樂이라는 年號를 사용했다.
<宋史>에 방랍은 喫菜事魔(끽채사마)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菜食(채식)주의자이며 마귀를 섬긴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唐의 武宗의 會昌 연간에 단행된 ‘法亂’(법란)으로 불교를 비롯한 마니교·조로아스터교·景敎·회교 등 다른 외래 종교들도 모두 탄압을 받고 지하로 잠적했는데, 방랍 등은 마니敎의 잔당으로 보인다. 마니교는 이란에서 발흥한 자연숭배의 종교이다. 당연히 반란지도부는 神佛을 믿지 않고 日月에 절하고 평등사상이 강하며, 상호부조가 발달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방랍의 반란군은 관리와 부호를 용서 없이 살해했다. 특히 화석강의 책임자인 朱勔(주면)의 주살을 擧兵의 명분으로 삼았다. 6州 52縣에 걸친 450일간의 반란이었다.
환관 장군인 동관이 이끈 정부군은 항주를 탈환하고, 방랍을 생포했다. 그러나 이 반란은 宋에 엄청난 데미지를 가했다. 왜냐. 절강 지방은 宋에 대해 매우 중요한 財源이었다. 그것이 戰禍를 입어 한동안 납세 능력을 상실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사실, 방랍의 반란은 의외로 빨리 진압되었다. 그것은 물량작전의 효과였다. 이것은 宋-金 비밀동맹에 의해 遼를 공략하기 위해 미리 동원해 두었던 大軍을 轉用(전용)하여 南下시킴으로써 가능했다. 이것은 金과 약속한 軍期(군기)를 맞추지 못하는 사태를 빚고 만다.
휘종은 변함없이 예술생활을 계속했지만, 이 무렵 道敎에 깊이 빠져 있었다. 林靈素(임영소)라고 하는 浙江 溫州 출신 도사가 휘종의 신임을 얻어 通眞達靈先生(통진달령선생)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는 원래 佛僧(불승)이었지만 그 수행이 엄격함을 꺼려 道士로 전향한 인물이다.
중국 최대의 민간신앙인 도교는 불교의 자극을 받았고 여러 가지 면에서 불교를 모방한 점이 많지만, 그 본질은 壽福(수복)을 얻기 위한 기도와 주술들을 集成한 것이다. “도교는 不老長生의 가능성을 믿는 중국 특유의 神仙說을 모아 성립되었기 때문에 그 사상은 조잡해서 거의 고려할 가치가 없다”는 등의 비판을 받기도 한다.
徽宗 |
휘종은 스스로 敎主道君皇帝(교주도군황제)라 일컫고 천하에 도교의 仙經(선경)을 구하는 조서를 내렸다. 또 林靈素(임영소) 등에게 도교를 講(강)하게 하고, 千道會라는 도교의 大齋(대재)를 올렸지만, 그때마다 엄청난 비용을 들였다고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