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철(金秀哲)의 송계한담도(松溪閑談圖)
화첩/종이에 담채, 33×45 cm, 간송 미술관 소장
김수철(金秀哲, ?-?)
조선 말기의 화가로 자는 사익(士益), 호는 북산(北山)이다. 그의 출신이나 생애 등은 알려져 있지 않다. 김정희파(金正喜派) 화가들과 교유가 있었으며, 초기의 화풍은 정형화된 남종화풍을 토대로 김정희파 화가들과 상통하는 특징을 보였다. 후기에 이르러서는 대담하고도 참신하게 생략된 뼈대있는 묘선(描線)이 보여주는 문기와 가락잡힌 왜곡의 선묘에서 오는 멋진 근대감각으로써 자신의 개성을 이룩하였다.
자연으로서의 소나무
옛 화가들은 소나무 자체라기보다 어떤 관념의 상징형으로서 소나무를 그렸다. 소나무에 대한 그들의 관념은 크게 다음의 두 가지로 형태로 나타나고 있었다. 즉, 절의나 지조 등 유교적 윤리 규범과 조응(照應)하는 상징물로, 또한, 장생사상(長生思想)과 관련된 장수의 상징물로 보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송계한담도〉의 일련의 소나무는 상징화, 인격화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소나무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한국적 미감
〈송계한담도〉는 근경의 바위와 시냇가에 서 있는 몇 그루 안되는 소나무, 그리고 소나무 밑에서 한담을 즐기고 있는 선비들의 모습을 주제로 그리고 있다. 이 그림의 소나무는 추사의 〈세한도〉나 이인상의 〈설송도〉 등 절의나 지조의 상징물로 그린 소나무에서 볼 수 있는 관습적인 정체성(停滯性) 같은 것은 찾아 볼 수 없다. 자유분방한 필선을 구사하여 묘사된 소나무들은 참신한 회화적 멋이 깃들어 있다. 화면의 여백이 넓고 시원하게 보이는 것은 경물들이 중심에 몰려 있기 때문일 것인데, 이렇게 확장된 여백에 한국 회화 특유의 청기(淸氣)와 삽상(颯爽)한 기운이 배어 있다.
자연회귀의 심성
소나무 아래에서 서거나 앉은 자세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다섯 선비들의 모습은 보는 사람에게 ‘인간’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흐르는 물과 같고, 소나무와 같다. 완전히 자연 형성의 일부이다. 군데군데 서 있는 나무의 일종이다. 인물도 소나무와 바위와 냇물과 마찬가지로 풍경의 일부가 되어 있다. 이처럼 옛 화가들은 대규모의 자연 속에 있는 조그마한 인물이나, 소규모의 자연 속에 있는 인물이나 모두 자연의 일부로 그리는 것은 물아일체를 염원하는 자연 회귀의 성향에서부터 나온 것이다.
소나무 아래서 한담을 즐기는 모습을 그린 〈송계한담도〉는 자연과 인간이 일체된 세계를 그린 것이며. 세속을 떠나 자연에 회귀한 은자(隱者)들의 세계를 그린 것이다. 그림은 아니지만 여기서 송계연월옹(松溪煙月翁)으로 알려져 있는 조선 시대 시인의 작품으로, 속세를 떠나 송림에 묻혀 있는 은자(隱者)의 세계를 노래한 시 한수를 감상해 보자.
벼슬을 매양하랴 고산(故山)으로 돌아오니
일학송풍(一壑松風)이 이내 진구(塵口) 다 씻었다.
송풍(松風)아 세상 기별 오거든 불어 도로 보내어라
작자는 이 시조에서 명예를 찾아 헤매던 세속을 멀리하고 산 속을 찾아 드니 솔바람이 속세에 더럽혀진 몸을 말끔히 씻어 준다고 했다. 그리고 이왕에 속세와 인연을 끊었으니, 오염된 속세의 기별일랑 돌려보내라고 하면서 그 역할을 솔바람에게 맡기고 있다.
송계연월옹의 시조가 송림에 묻힌 자신의 심정을 노래한 것이라면, 〈송계한담도〉는 소나무 그늘 아래서 여럿이 함께 즐기는 풍류의 세계를 그린 것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마음을 같이 하는 벗들이 모여서 소나무 숲이나 계곡 등 자연 속에서 풍류를 즐기는 풍속은 조선 시대의 문인과 선비들 사이에서 흔히 있었던 일이다. 그들은 송림 사이를 스치는 솔바람 소리를 악보도 없고 곡조도 없는 무현금(無絃琴) 소리로 삼고, 세속의 일을 잊어버리고 화두(話頭) 같은 한담으로 소일하는 것을 참다운 낙으로 여겼다.
이와 같은 태도는 탈속의 경지에서 유교적 절의나 명분을 지킨다는 고답주의(高踏主義) 성향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노장사상(老莊思想)의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다. 노장(老莊)은 사람들에게 현실에 대한 아집을 버리고 대자연과 함께 만사에 무심히 응하면 홀연히 모든 것을 잊은 것 같고 적적할 수 있어 마음의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집단 풍류의 선례
몇몇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어 자연과 벗하면서 탈속의 풍류를 즐기는 전통은 동양에서는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그 대표적인 선례를 죽림칠현(竹林七賢), 상산사호(商山四皓)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죽림칠현이란 진(晉)나라 때 사람인 완적(阮籍), 유령(劉伶) 등 7인의 은사(隱士)를 말하고 있는데, 이들은 서로 깊이 사귀면서 노장(老莊)의 허무(虛無)를 숭상하였고, 사회의 예법은 인간의 천부적 심성을 속박하는 것이라고 경시하면서 세속을 피해 죽림에 은거한 사람들이다. 상산사호는 같은 시대에 상산에 숨어 생활한 네 노인 즉, 동원공(東園公),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 녹리선생(
里先生)을 일컫는데, 이들도 죽림칠현과 마찬가지로 탈속의 경지에서 함께 하는 풍류를 즐겼던 사람들로 널리 알려진 사람들이다. 그들이 선례를 따라 〈송계한담도〉의 다섯 명의 선비들은 스스로를 ‘송림오현(松林五賢)’이라 자처했을는지 모를 일이다.
감상
소나무에 관계된 말 중에는 문학적인 여운을 가진 단어들이 많다. 예컨대 송간(松間, 솔밭 사이), 송성(松聲, 소나무에서 이는 바람소리), 송영(松影, 솔 그림자), 송풍(松風, 솔바람), 송하(松下, 소나무 아래), 송단(松壇, 소나무가 서 있는 낮은 언덕) 등이 그것이다. 이 단어들은 주로 탈속과 풍류의 의미를 담은 말로 쓰이고 있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는데, 〈송계한담도〉는 바로 이런 단어들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