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성종의 제11자인 이성군(利城君) 이관(李慣:1489-?)의 종증손으로, 자는 수길(秀吉), 호는 낙파(駱 ?), 낙촌(駱村), 학록(鶴麓)이다. 특히 산수화에 뛰어났고, 인물·우마(牛馬)를 잘 그렸으며 모두 색감과 정취가 뚜렷하다.
그림내용
〈탁족도〉는 무릎까지 바지를 걷어 올리고 다리를 꼰 채 발을 물에 담그고 있는 (실제로는 그렇게 묘사되어 있지 않지만) 선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주변의 경관은 매우 간소하게 처리되어 있으며, 형식은 소경산수인물화(小景山水人物畵) 형식을 취하고 있다. 탁족도 류의 그림에는 보통 한 사람이 등장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 그림에서는 시중을 들고 있는 시동이 함께 등장하고 있어 이채롭다.
고사인물화의 개념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고사(故事)에 근거하여 그 내용을 설명적으로 그린 그림을 ‘고사인물화’라고 일컫는다. 예컨대 〈노자출관도 老子出關圖〉나 〈강태공위수조어도 姜太公渭水釣魚圖〉 같은 그림이 그것이다.
고사인물화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특정 인물과 그의 실제 행적을 주제 삼아 그리기 때문에 일종의 기록화와 같은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탁족도〉는 고사와 관련되어 있기는 하지만 특정 인물이라기보다 ‘탁족’행위 자체를 주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엄밀한 의미에서 고사인물화라고는 볼 수 없다.
탁족놀이의 성격
조선 시대의 세시 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 유월조(六月條)에,
“삼청동 남북 계곡에서 발씻기 놀이를 한다.”
(三淸洞... 南北溪澗 爲濯足之遊)
는 기록이 있다. 《동국세시기》가 당시의 풍속을 기록하고 있는 문헌이라는 점에 비추어 보아 탁족놀이가 일부 특수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 널리 유행했던 여름 풍속 가운데 하나였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일반 서민들에게 있어서 탁족놀이는 단순한 피서의 한 방법에 지나지 않았지만, 선비들에게 있어서는 피서의 차원을 넘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그들이 실제로 즐겼던 피서 방법에는 ‘탁족’ 외에도 ‘물맞이’나 ‘목물하기’등 여러 가지가 있었겠으나, 그런 것들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서 오직 ‘탁족지유(濯足之遊)’만을 소재로 그림으로 그리고 또 감상하기를 즐겼다는 사실은 이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탁족놀이와 창랑가
선비들이 특별히 ‘탁족지유’에 부여하고 있는 의미는 중국 고전인 《초사 楚辭》의 내용과 관련이 깊다. 《초사》 어부편(漁父篇)을 보면 어부와 굴원(屈原) 사이의 문답을 서술한 마지막 부분에,
“어부가 빙그레 웃으며, 노를 두드리며 노래하기를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을 것이요,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을 것이다’ 라고 하면서 사라지니 다시 더불어 말을 하지 못했다.”
(漁父莞爾而笑 鼓
而去 歌曰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遂去 不復與言)
라는 구절이 있다.
후세 사람들은 이 부분을 특별히 〈어부가 漁父歌〉, 또는 〈창랑가 滄浪歌〉라 이름지어 불렀는데, 이 노래에 나오는 ‘탁족’과 ‘탁영(濯纓)’이라는 말을 특별한 의미로 새겼다.
〈창랑가〉가 담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 맹자는,
“맑으면 갓끈을 씻고, 흐리면 발을 씻는다고 하니, 이것은 물 스스로가 그런 사태를 가져오게 한 것이다.”
(淸斯濯纓 濁斯濯足矣 自取之也)
라고 해석을 하였다.
그는 이것을 다시 인간의 삶의 태도에 비유하여 말하되,
“사람은 반드시 자신을 욕되게 한 뒤에라야 남이 그를 모욕하고, 가문은 반드시 그 자신들이 파괴한 뒤에야 남이 그 가문을 파괴하고, 나라는 그 자신들이 망친 뒤에야 남이 그 나라를 토벌한다. 그러므로 태갑(太甲: 書經의 편명)에 ‘하늘이 지은 재(災)는 그래도 피할 수가 있으나, 자기가 지은 재는 모면할 수가 없다’고 하였으니 바로 이런 점을 두고 한 말이다.”
《孟子》, 離婁
라고 하였다.
맹자는 〈창랑가〉의 의미를 행복이나 불행은 남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처신 방법과 인격 수양 여부에 달려 있다는 뜻으로 풀이하였던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다른 관점에서 〈창랑가〉의 의미를 해석하기도 하였다. 즉, 창랑의 물이 맑다는 것은 도의(道義)와 정의가 지배하는 세상을 말함이고, 창랑의 물이 흐리다는 것은 도의가 무너진 어지러운 세상을 비유한 말이라고 했다. ‘맑은 물에 갓끈을 씻는다’는 것은 ‘세상이 올바를 때면 나아가 벼슬을 한다’는 뜻이요, ‘발을 씻는다’는 것은 ‘풍진에 찌든 세상을 백안시하고 은둔하며 고답을 추구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밖에 〈창랑가〉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시구(詩句)들이 많이 있는데, 예컨대 왕찬(王粲)은 〈칠석 七釋〉에서,
“창랑에서 몸을 씻고, 높은 산에서 옷을 턴다.”
(濯身乎滄浪 振衣乎高嶽).
라고 한 것은 풍진에 찌든 때를 씻고 털어낸 후 고답과 은일을 추구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또, 고사성어처럼 선비들의 시문에 자주 인용되고 있는 ‘탁족만리류(濯足萬里流)’라는 말은 속세에서 초연함을 상징하는 말이다. 이상의 몇 가지 내용을 미루어 볼 때 ‘탁족지유’는 인격수양이나 처신, 또는 은둔과 고답의 상징으로 해석되고, 또 수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탁족도의 역사
‘탁족’을 소재로 한 그림은 중국 송(宋) 무렵부터 등장하였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조선 중기 이후 다소 그려졌다. 〈탁족도〉의 화본(畵本)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그림이 청 대(淸代)에 간행된 《개자원화보 芥子園畵譜》의 인물옥우(人物屋宇) 조에 수록되어 있다. 어부 모습을 한 사람이 삿갓을 쓰고 바위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꼰 채 물에 발을 담그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그와 관련된 ‘강호만지일어옹(江湖滿地一漁翁)’ 이라는 설명문이 붙어 있다.
미학
이경윤의 〈탁족도〉의 주인공도 이 화본의 인물처럼 두 다리를 꼰 채 오른쪽 발바닥을 위로 제치고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탁족의 자세는 거의 정형화되어 그림에 나타나고 있는데, 이처럼 정형화된 모습을 답습하여 그리는 것은 동양화에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불상의 수인(手印)과 자세가 다른 불상과 같다고 탓하지 않는 것은 불상의 수인과 자세가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변하지 않는 영원무궁한 형태로 환원된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탁족도〉에서 볼 수 있는 주인공의 정형화된 자세도 단순히 다양한 행동을 부정한 모습이 아니라, 긴 세월 동안 수많은 화가에 의해 정제되고 정형화된 모습인 것이다. 군더더기를 떨어버린 정제된 모습은 가장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화가들은 그런 모습을 그리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감상
조선의 선비들은 관념 속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강과 계곡에서 ‘탁족지유’의 풍류를 즐겼다. 그들은 탁족놀이를 하면서 아득한 옛날 〈창랑가〉를 통해 어부가 말했고, 성현들이 해석한 ‘탁족’의 의미를 되새기며, 지금 자신도 그런 경지에 들어있음을 자부하기도 했다. 이런 마음의 경지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탁족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탁족지유’를 소재로 한 그림 중 현존하고 있는 작품으로는 이경윤의 그림 외에 이정(李禎)의 〈노옹탁족도〉(개인 소장), 작자 미상의 〈고승탁족도〉(개인 소장), 그리고 조선 후기 최북의 〈고사탁족도〉(간송미술관 소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