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 200여년간의 서단(書壇)은 조맹부의 '송설체(松雪體)'가 풍미하였지만,
외형미에 치중한 나약한 서체에 싫증을 느낀 성리학자들은 왕희지의 서법으로 돌아간다.
석봉(石峰) 한호(韓濩, 1543-1605)로 대표되는 중기의 이런 서예경향은
왕희지의 원형을 접하지 못하고 그 형체만 겨우 익힐 뿐 이어서 중기 이후의 글씨는 전반적으로
후퇴하게 된다.
'석봉체'가 유행한 중, 후기 서단에서 몇몇 개성적인 일가를 이룬 이로는,
독특한 전서체의 허목(許穆, 1595-1682) 이나 여러 서가의 장점을 잘 조화시킨 윤순(尹淳, 1680-1741)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윤순의 제자인 이광사(李匡師, 1705-1777) 는 새로운 발상으로 서법의 혁신을 시험하여 <서결(書訣)>을 지어서 이론적 체계를 수립하였지만 필력과 품격은 스승에 미치지 못하였다.
18세기말에 이르면 위대한 천재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나타나 각체를 두루 섭렵하다 청의 고증학에 힘입어 마침내 전한(前漢)의 예서에서 서예의 근원을 찾아 이를 응용하여 서예사의 큰 혁신을 일어켰다.
그의 영향을 받은 권돈인(權敦仁)의 행서, 조광진(曺匡振)의 예서가 우수한 경지에 이르렀으며, 추사의 제자인 조희룡(趙熙龍), 전기(田琦), 허유(許維), 이하응(李昰應)등은 모두 글씨와
그림에 뛰어난 성과들을 이루면서 조선말기 문화계를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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