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화폭의 예술

추사 김 정 희 (1786~1856)

淸山에 2011. 8. 22. 13:43

  

  

  

 

 
 

김 정 희 (1786~1856)
 
본관은 경주,자는 원춘,호는추사,완당,예당,시암,노암,
등270여가지를섰다.권문세도가의 장남으로태어나 1819년문과에급제 여러벼슬을지냈다.제주도와북청에서
10여년이상 유배생활을 하였으며 그후정계에복구하지못하고 향리에은거하면서 학문과 서예에
몰두하다가 생을마쳤다.

추사는어릴때부터 천재적인예술성을 발휘하여20세전후에 이미국내외에 이름을떨쳤을만큼
시,서,화및 전각에뛰어났다.
 
[이작품은 추사예서의 뛰어난조형법을 살필수있으며, 잘정돈되어 있으면서도 고졸한 필치를 보여주는
수작이며 당시족자표구로 보존되어 작품상태가 매우좋은편이다]
 
 
 
 

 

 
 
 
조선전기 200여년간의 서단(書壇)은 조맹부의 '송설체(松雪體)'가 풍미하였지만,
외형미에 치중한 나약한 서체에 싫증을 느낀 성리학자들은
왕희지의 서법으로 돌아간다.
 
석봉(石峰) 한호(韓濩, 1543-1605)로 대표되는 중기의 이런 서예경향은
 왕희지의 원형을 접하지 못하고 그 형체만 겨우 익힐 뿐 이어서 중기 이후의 글씨는 전반적으로
후퇴하게 된다.

'석봉체'가 유행한 중, 후기 서단에서 몇몇 개성적인 일가를 이룬 이로는,
독특한 전서체의 허목(許穆, 1595-1682) 이나 여러 서가의 장점을 잘 조화시킨 윤순(尹淳, 1680-1741)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윤순의 제자인 이광사(李匡師, 1705-1777) 는 새로운 발상으로 서법의 혁신을
시험하여 <서결(書訣)>을 지어서 이론적 체계를 수립하였지만 필력과 품격은 스승에 미치지 못하였다.
 
 18세기말에 이르면 위대한 천재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나타나 각체를 두루 섭렵하다 청의 고증학에 힘입어 마침내 전한(前漢)의 예서에서 서예의 근원을 찾아 이를 응용하여 서예사의 큰 혁신을 일어켰다.
 
그의 영향을 받은 권돈인(權敦仁)의 행서, 조광진(曺匡振)의 예서가 우수한 경지에
이르렀으며, 추사의 제자인 조희룡(趙熙龍), 전기(田琦), 허유(許維), 이하응(李昰應)등은 모두 글씨와
 그림에 뛰어난 성과들을 이루면서 조선말기 문화계를 주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