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소설&드라마

어디로 가나 - 이재인作 6부

淸山에 2011. 8. 20.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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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 구름님 블로그에서
http://blog.daum.net/endless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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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나
 
 
   사장님과 윤양과의 관계가 표면화 되자 미란은 강희에게 다시 접근해 오기 시작했다.
   " 아저씨, 저 가는 데까지만 태워다 주세요."
   " 가는 데까지라니 ? 너의 집은 남부민동이 아니야."
   미란은 기사에게 집으로 들어 가라는 사장님의 전화를 받고 아예 퇴근 준비를 하고 내려와서는 차를 놓아 주지 않았다. 그녀는 강희와 같은 총무과 소속으로 윤양과는 여학교 선후배 관계였다. 올해 21살인 윤양 보다 2년이나 선배로서,그녀 또한 사내에서 좀 난하게 논다는 쪽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미란은 대연동 친구네 집에 볼 일이 있다고 하면서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강희는 할수 없이 그를 옆에 태우고 차고를 향해 달렸다.
   문현 로타리를 지나 목골 고개를 넘어설 때까지 둘은 마무 말이 없었다. 미란은 한참 동안 멍하니 차창 밖을 바라 보고 있더니 조용히 고개를 떨구고 핸드백 끈을 만지작거리며 깊은 생각에 젖어 있었다. 친구네 집이 어디냐고 물어도 아무대답이 없었다.
   " 어디 쯤 내려줄까 ? 조금만 더 가면 차고데."
   그 말에는 대답도 없이
   " 아저씨는 제가 그렇게도 미우세요 ?."
   하며, 격한 음성으로 물었다.
   " 밉기는... ?."
   " 그럼, 왜 절 피하려고만 하세요 ?."
   " 오해를 받을 까 봐 겁이 나서 그래."
   " 오해가 겁이 나심 그 반대로 하심 되잖아요."
   " 그 반대라니 ?."
   어느새 자동차는 차고 가까이에 와 있었다.
   " 어디서 내릴거야 ? 차고 안으로 함께 들어갈까 ?"
   " 아니에요. 세워 주세요, 여기."
   " 친구 집이 어디야 ?  내 거기까지 태워다 줄께."
   " 괜찮아요. 여기서 내려 주세요."
   " 그럼, 잘 가."
   그 말에는 대답도 없이 또 작별 인사도 없이 미란은 차고 앞 버스 정유소에서 내렸다.
   강희는 차고에 차를 넣어 두고 경비실에서 잠시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눈 후 집으로 가는 차를 타려고 버스 정유소로 나갔다. 마침 온천장으로 가는 버스가 서 있기에 막 타려고 하는 데 뒤에서
   " 아저씨,"
   하고, 부르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 아니, 친구네 집에 간다더니 ?."

 

  " 없어요. 어디로 가고."
   그러나 미란의 눈치가 좀 이상했다. 친구네 집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그새 갔다 왔을 것같지 않았다.
   " 시내로 들어가는 차는 건너편이야."
   " 알고 있어요."
   " 그럼 왜 ?.....?."
   " 얘기 하고 싶어요."
   " 미스 정."
   " 네 ?.'
   " 내 심정 알지 ? 요즘."
   " 네, 알아요."
   " 그럼 건너가. 저기 마침 송도로 가는 버스가 오고 있어."
   " 아이 아저씨 정말 왜 그러세요 ?."
   그러다가 미란은
   " 알았어요. 아저씨가 먼저 가세요. 여기도 마침 차가 오네요. 온천장으로 가는 버스가요."
   " 그래, 오늘은 미안했어 ! 내일 또 봐."
   강희는 미란을 향해 두어 번 손을 흔들고 버스에 올랐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심사에서 인지. 차가 막 출발을 하려하자 마주 손을 흔들던 미란이 갑자기 차장을 밀치고 차에 올랐다.
   " 또 어딜 가려고 ?."
   " 묻지 말아요."
   조금은 토라진 음성이다.
   강희는 한참 가다가 자리가 나서 미란을 앉이며 또 어디에 가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여전히 없었다
   버스가 서면을 지나자 차안은 점점 분비기 시작했다.
   강희는 승객에 떠밀려 미란이가 보이지 않은 곳까지 말려와 있었다. 그는 문득 이 기회에 중도에서 내려 다른 차를 타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미란의 동태를 살피려고 승객들의 어깨 넘으로 그녀를 살펴보았으나 어찌된 것인지 미란은 애기를 업고 있는 아주머니의 엽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지 않았다.
   자기가 너무 냉정하게 대하였기 때문인지, 그렇지 않으면 볼 일이 있어 중도에서 내려 버렸는 지 차안에는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자기의 행동이 떳떳하지 못함을 느끼고 조금 부끄럽기도 하고 후회도 되었다.
   강희는 늘 하던 데로 금강원 입구에서 내려 기념품 가게가 좌우로 즐비한 공원길을 걸었다. 상가를 지나 차밭골로 올라가는 지름길로 들어 서니 비춰주는 불빛이 없어서 길은 어두웠다.
   계절의 탔인지 오늘은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쓸쓸하고 허전하고 외로워지기까지 했다. 지금까지 이렇다 할 까닭 없이 이처럼 우울해져 보기도 처음이었다.
   " 아저씨."
   강희는 고개를 떨구고 계속 걸었다. 누가 뒤에서 부르는 것도 같았으나 전에 없는 일이라 개의치 않았다.
   " 아저씨 저예요.  저."
   그제서야 그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보았다.
   " 아니 ! 네가 ?."
   "...."
   " 난 안 보이길래 중도에서 내린 줄 알았지."
   " 숨어 있었어요. 아저씨 바로 뒤에."
   미란은 손을 입으로 가져가며 쿡쿡 웃었다.
   강희는 이제 화를 내지 않았다. 장난기 어린 미란의 눈이 샛별처럼 단발머리 속에서 빛났다. 소문과는 달리 청조하고 아름다은 눈동자였다. 갑자기 갖고 싶은 충동까지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그런 마음으로 뒤돌아 서지는 않았다.
   떨어진 낙엽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스락 바스락 고요를 깨뜨렸다. 간간히 불어오는 늦가을의 산 바람이 솔밭 사이로 외로운 입새들을 떨어뜨리기도 했고, 떨어진 낙엽을 이리저리 굴리기도 했다.
   " 죄송해요. 아저씨."
   " 뭐가 ?."
   " 제가 밉죠 ?."
   " 배고프지 않아 ?."
   " 아이 묻는 말에 대답은 하지 안구서 ?."
   " 넌 ?."
   " 우리 그럼 차근차근 다시 얘기해요."
   "......."
   " 전 있잖아요. 아저씨가 자꾸만 좋아지니 어떡하지요 ?."
   " 농담 말리고. 난 아내가 있는 몸이야."
   " 에이 결혼을 해 달라고는 안 할테니 제발 제 앞에서는 아내,아내 하지 마세요."
   " 그렇다면 미스 정은 내가 어떻게 해 주기를 바라지 ?."
   " 모르겠어요. 지금은 다만 제 마음이 그렇다는 것만 전해 주고 싶어요."
   " 그게 정말이라면 야단인데 !."
   " 왜 빙그레 웃고 그래요 ? 남은 속이 타 죽겠는 데."
   " 미스 정."
   " 네 ?."
   " 우리 농담 그만하고 저녁이나 먹으려 가자고."
   " 그래요. 하지만 제가 한 말 믿어 주셔야 해요. 농담이 아니라는 걸 말이예요."
   둘은 바위에서 일아났다.
   강희는 또 다시 후회했다. 처음부터 밝은 데로 가지 않고 인적이 없는 산 속으로 데려가서 무드에만 젖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대성관 건너편 한식집에서 저녁을 먹고 나니 시간은 어느덧 10시가 넘어 있었다. 
   미란은 자기가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았아 죄송하다고 하면서 저녁 대접을 받은데 대한 보답으로 술을 사겠으니 딱 한 잔씩만 마시고 헤어지자고 했다.
   강희는 한시 바삐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순순히 그녀가 하자는 데로 따라 갔다. 그래서 들어간 것이 맥주 한 잔이 두 잔으로, 한 병이 두병 세 병으로 비워지자, 진로 두 병이 자기의 주량이라고 떠들어 대던 미란은 기어이 먼저 따운이 되고 말았다.
   강희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실로 그녀가 마신 술은 맥주 한 병이 채 못되었다. 나머지는 자기가 마셔 버렸던 것이다. 통금이 오기 전에 그녀를 돌려 보내기 위하여 빠른 속도로 연그퍼 마신 것은 이편인데 어디서 줏어 들은 풍월인지, 거품(맥주) 정도야 화장실만 가까이 있으면 끝이 없다던 아가씨가 여걸 답지 않게 먼저 뻗어 버렸던 것이다.
   강희는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비틀거리며 몸을 가누지 못하는 아가씨를 부축하여 걷기도 남 보기에 창피한 노릇인데, 이건 아예 축 늘어져 제발로 걸을 수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래도 처음 술집을 나섰을 때는 그렇게 취한 것 같지는 않았는 데 바깥으로 나와 그가 택시를 잡아오는 동안 미란은 창피도 잊은 채 길 바닥에  주저 앉아 있었다. 그 꼴을 보자 택시 기사는 무어라 욕설을 하며 총알 같이 달아나 버렸다.
   미란은 그래도 본 정신은 좀 있는 지 이런 상태로는 도저히 집으로 돌아 갈 수 없으니 술이 깰 때까지 여관 같은 데라도 좀 데려다 달라고 했다.
   " 무슨 소리야. 지금 택시를 탄대도 통금 안에 집까지 도착할까 말까야."
   " 그럼 잘 됐네요. 아예 여관에서 자고 가죠 뭐."
   그렇지 않아도 그러는 도리 밖에 없어서 강희는 미란을 추술려 업다 싶이 하여 가까운 여관으로 들어갔다.
   " 내 약 사 올께 잠깐 누워 있어."
   약방 문은 이미 닫았는 지도 모른다.
   "그럴 것 없어요, 아저씨. 목욕을 하면 좋아 질거예요."
   " 참 그렇기도 하겠구나 ! 약이라고 술이 금방 깨는 것은 아니니까. 그럼 목욕이나 하고 푹 한 숨 자. 난 시간이 없어서 그만 가봐야 겠어."
   " 아이 아저씨 저 혼자 두고 가면 어떻 해요."
   " 미안해. 통금이 10분 밖에 남지 않았서."
   " 그럼 목욕물 털어주고, 절 거기까지만 부축해 주실래요."
    별로 혀가 고부러진 음성은 아니었다.
   " 그래, 그럼 그렇게 하지."
   강희는 무엇에 쫓긴 사람처럼 초조한 얼굴로 황급히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온천지대라 그런지 더운 물은 힘차게 쏟아졌다. 그는 꼭지를 열어두고 재빨리 방으로 들어왔다.
   " 자 물 털어 놨어. 어서 들어 가."
   " 죄송하지만 옷 좀 벗겨 주실래요 ?  술이 취해서 그런지 팔을 가누지 못하겠군요."
   갈 수록 태산이라더니, 이건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
   명색이 처녀의 몸으로 유뷰남에게 옷을 벗겨 달라니, 아무리 술에 취했기로서니 그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 설마 등을 밀어 달라고는 않겠지.)
   그러면서도 그는 차마 몸에 찰싹 달라 붙은 검정색 원피스의 지프에 손을 대지 못했다.
   " 아이 뭘 그러구 있어요 ? 집에 돌아 가기 바쁘시다면서요."
   미란은 강희 앞으로 바짝 등을 돌려 대고 재촉했다.
   " 응, 그래."
   강희는 응급결에 한 발자욱 뒤로 물러서며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헤치고 목털미를 더듬었다.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지프를 찾아 아래로 내리자, 몸에 터질듯이 팽팽하던 옷은 바나나 꺼질처럼 좌우로 갈라지며 흘러 내리다 팔꿈치에 걸렸다. 그러자 미란은 다시 돌아 서며 두 팔소매를 강희 앞으로 내밀었다.
   제법 쌀쌀한 날씨인데도 그녀의 몸에는 속이 훤히 들어다 보이는 브라자 하나만 덮혀 있었다.
   그는 또 다시 놀란 시선으로 여인의 소매 끝에 있는 단추를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더듬어 풀고 옷소매를 벗겼다.
   ( 이래서 뭇 사나이들이  꿀벌처럼 이 육체의 주위를 맴돌았든가 ?.)
   눈 속 같이 흰 삼각 팬티에 까만 브라자만 걸처져 있는 미란의 몸매는 과연 소문대로 돌부처라도 아랫도리가 스물거릴 정도로 육감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얼른 눈길을 돌렸다. 그 아름다운 육체 위로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지나갔을 까 하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그녀가 천하게 비쳐왔기 때문이었다.
   " 자 어서 들어 가."
   강희는 외면을 한 채 뒤돌아 보지도 않고 욕실 문을 열었다.
   " 아이 이러고 어떻게 들어가요. 마자 벗겨 주셔야지."
   강희는 초조한 얼굴로 생각난 듯 후딱 시계를 보았다. 이미 12시가 지나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술이 확 깨면서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그래서 미란을 번쩍 들어 안고 씩씩거리며 안으로 들어가서 사정 없이 그녀를 욕탕 속에 던져 버렸다.
   " 어머머 !"
   그 다음 첨벙 하는 물 소리는 탕 안에서 났다. 거러니 집어 던진 사람도 더운 물을 험벅 뒤집어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꼴을 보고 미란은 고소해 죽겠다는 듯 물속에서 깔깔대며 배꼽을 쥐고 웃었다.
   " 그것 보세요. 숙녀를 그렇게 다루다간 금방 벌을 받잖아요."
   그러더니 미란은 또 갑자기 죽는 시늉을 했다.
   " 아이 아저씨 엉덩이에 멍이 들었나 봐요 ! 꼼짝 못하겠어요.
   그러면서 아픈 자리를 보려고 일어나다 도로 미끄러져 제 자리에 주져 앉았다.
   " 아이 아저씨 정말 큰 일 났어요. 이젠 영 일어나지 못하겠어요."
   그러니 옷을 벗고 들어와서 아픈 자리를 보아 주던지 만져 달라고 했다.
   강희는 들은 채 만 채 화가 난 얼굴로 욕탕 밖으로 나와 버렸다. 이제는 통금도 통금이지만 이렇게 함박 젖은 옷을 입고 집으로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 애궂은 담배만 빨고 있었다.
   탕 안에서는 요란게 물  끼었는 소리가 났다. 처음에는 술이 취해 몸을 가눌 수가 없다고 하였다가, 나중에는 엉덩이를 다쳐서 곰짝할 수도 없다고 엄살을 부리던 그녀가 스스로 목욕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래서 방 안으로 들어 온 그녀는 대담하게 알몸을 가지고 사나이의 등 뒤에 머리를 기대오며
   " 아저씨 오늘은 정말 죄송해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너무 속상해 하지 마세요. 저기 옷을 말려 드릴께 얼른 벗어세요, 네."
   그러나 이 날 밤 미란은 강희를 정복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정말 뜻 밖이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숱한 남자를 거쳐오면서 유흑을 당해 보기도 하고 제 스스로 몸을 맡겨 보기도 하였지만 아직 한 번도 자기의 육체를 보고 등을 돌린 사내는 없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유독 이 사나이만은 최후의 수단을 쓴 것 같은 데도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더욱더 화도 나고 물어뜯고 싶도록 그를 사랑하고 싶어 지기도 했다.
   ( 그 때는 왜 그랬을 까 ?  단순히 무드 때문이었을 까 ?.)
   오래 전, 어느날 둘은 우연히 송정 달맞이 고개로 드라이브를 하다가 차 속에서 포응을 한 일이 있었다.
   그 날 미란은 달맞이 고개에서 달을 보지 않고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때를 썼다.
   " 달은 아무데서나 볼 수 있어."
   " 싫어요 ! 다 같은 달이 아니라고 자기 입으로 말해 놓구서."
   " 그럼 할 수 없지. 달이 뜰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는 수 밖에."
   " 아이  자기만 혼자 누우면 어떡해요."
   그래서 시트를 뒤로 제끼고 팔베개를 하고 누웠던 강희가 몸을 일으켜, 미란이 앉은 조수대 우측에 붙은 레바를 잡으려고 하니 자연히 그녀의 무릎에 상체를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자 몸을 앞으로 약간 일으켜 봐."
   그러자 너무 앞으로 몸을 이르킨 바람에 미란의 젖가슴이 뭉클 하고 강희의 머리에 와 닿았다.
   " 자 이제 뒤로 기대어 봐."
   " 어머나 !..."
   갑자기 시트가 뒤로 넘어지자 미란은 응급결에 강희의 목을 잡고 늘어지며 뒤로 벌렁 나자빠 졌다. 포응을 하기 위해 고의로 그렇게 유도를 한 것인줄 았았던지 미란은 강희의 목을 잡고 한참 동안 놓아 주지 않았다. 강희도 그러한 그녀가 무안해 할까 봐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키스에 응하고 말았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미란은 그가 자기의 애인이라도 된 것처럼 눈 웃음을 흘리면서 더욱더 다정하게 굴었다. 일을 하다 말고 몰래 차고에까지 내려와서 요구르트도 사주고 껌도 까서 입에 넣어 주기도 했다.
   강희는 그러한 그녀가 과히 싫지는 않았으나 때로는 천하게도 보였다. 그것은 남자 관계가 복잡하고 좀 난하게 놀았다는 소문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었는 지도 몰랐다.
 
   누가 이들의 사랑을 불륜이라 욕하겠는 가.
   강희는 김해 벌판의 어느 수문 옆에 차를 세워두고 사장님과 여비서와의 사랑의 유희를 물끄럼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 갓 여고를 나 온 20대 초반의 윤양은 청조하고 가냘픈 들국화 한 송이를 꺾어 단발 머리에 꽂고 뚝 위를 한없이 달아나고, 그 뒤를 60대의 노장은 자기 머리처럼 허옇게 활짝 피어버린 억새풀을 꺾어 프로펠러 같이 휘휘 내 돌리며 천진난만한 소년처럼 쫓아 달려가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불륜이 가엽고 숭고하게도 보였다.
   사장님은 여전히 사내의 분위를 의식하지 않고 윤양이 하자는 대로 했다.그의 기분은 윤양의 서비스 여하에 달렸고, 어려운 결재를 받으려 갈 때면 먼저 여비서의 눈치부터 살펴볼 정도가 되었다. 일이 그렇게 되다 보니 윤양의 세도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회사의 기강은 점점 문어져 갔고 사원들 간에 불평도 늘어만 갔다. 그래도 사장님은 애욕의 포로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대외적으로 노랭이라 이름이 나 있는 것과는 달리 윤양에게 만은 아끼는 것이 없었다.
   언젠가 강희가 회사의 차고와 가까운 곳으로 셋방을 얻으려고 모자라는 돈 20만원을 가불 해 달라고 하였다가 꾸중을 들은 일이 있었다.
   " 이 사람아 회사에는 돈을 쌓아 두고 있는 줄 아나. 자네도 알다 싶이 직원들 급료도 제때에 못 주고 있는 형편이 아닌가."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이 회사에서는 급료를 제때에 주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가 보기엔 아마 경영주측에서 무슨 정책적으로 그렇게 하는 지는 몰라도 월급 날이 이삼 일 지나서야 어음을 할인 하느라 은행으로 어디로 쫓아 다니니 말이다.
   일년에 추석과 구정으로 나누어 주는 보너스도 다른 회사에서 지불하고 한참 있을 때까지 결재를 미루어 오다가 타사에서 지불한 그액 보다 조금 칼질을 하여 내어 주었다.
   그렇게 나가는 돈에 대해서는 무조건 인색하는 사장님이 윤양에게만은 자기의 구좌에서 강희의 손으로 찾아 준것만 하더라도 5백만 원과 3백만 원이 두 번이나 있었다. 그러니 도합 천백인 셈이었다.
   기사가 전세방을 옮기는 데 모자라는 돈 20만원을 가불해 달라고 할때는 돈을 쌓아 두고 기업을 하는 줄 아느냐고 핀잔을 주더니, 무려 그 돈의 오십다섯 배나 되는 거금을 여비서에게는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통째로, 그것도 하필이면 기사의 손으로 찾아 주라고 하니 아무리 요술구멍에 녹아 났기로 인간의 탈을 쓰고 그럴 수가 있을 까 싶었다.
   그런 것을 보면 확실히 있는 사람의 심장은 서민의 그것과 판이하게 다른 모양이었다. 부끄러워해야 할 곳에 오히려 떳떳해지는 것이 그들의 배짱인 듯 했다.
   강희는 요즘 정말 이해할 수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이번 해운의 날에 정부에서 상패와 하사품으로 내린 팔목시계를 사장님이 받아 온 것이다.
   감사패를 읽어 보지 않아서 국가에서 무슨 은혜를 사장님으로 부터 입었는 지는 모르지만 좀 모호한 점이 많았다. 물론 수재민 돕기라든가 불우 이웃돕기 같은데 돈을 조금 내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한 여비에게 던져준 돈의 오십 분의 일에도 해당되지 않은, 별로 이렇다 하게 사회에 봉사한 일이 없는 것 같은데 그런 어마어마한 상을 받다니. 강희는 여태 사장님을 잘못 보아 온 것같은 죄책감이 들기도 하여 무엇이 무엇인지 어리둥절 하기만 했다.
   그는 이 번에 그런 상을 받았다는 말은 들었으나 실제 눈으로 보지 않아서 설마했는 데, 어느 날 골프채를 가져 온 캐디가 이차의 사장님이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어마어마한 이름이 새겨진 팔목시계를 보여 주더라는 것이다.
   " 그래, 그럼 사장님에게 직접 물어보지. 어떻게 상을 탔느냐고 ?."
   " 그렇지 않아도 물어 봤어요."
   " 그랬더니 ?."
   " 저도 사회에 좋은 일을 많이 하면 탈수 있다고만 하든데요."
   그러면서 사장님의 인품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캐디로서도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사장님은 사원들의 대우에는 타사의 하위에 돌면서도 모든 일에는 추월을 강요했다. 심지어 그것을 기사에게도 적용 시켰다.
   강희가 해륙실업에 입사를 하고 처음으로 서울로 출장을 갈 때였다.
   그 날은 몹시 비가 왔다. 그래도 그는 법정 속도를 조금 초과하여 고속도로를 달렸다.  그런데 대구를 지나서 잠에서 깨어 난 사장님이 여기가 어디 쯤이냐고 물었다.
   " 뭐라고, 이제 겨우 대구를 지났다고 ? 이 봐. 좀 달리게. 이래서야 원 제시간에 도착하겠는 가 ?."
   " 사장님 이것도 무립니다.  특히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은 노면에 스마크 현상이..."
   " 이 사람아, 나는 스파크인지 스마트인지가 무언지 모르지만 전에 있던 황기사는 레코드를 가지고도 잘만 달렸네."
   강희는 약이 올랐다. 운전기사로서 가장 듣기 거북한 것은 승객으로부터 달릴 줄 모른다는 소리다. 그것은 무능과 직결되는 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기사들은 자기의 기술을 과시하 듯 달리기를 좋아 했고, 어리석게도 그것을 자랑으로 알았다.
   강희는 그렇게 생각을 하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아 악세레타에 지긋이 힘을주었다. 스피트 메타가 백사십으로 올라서자 차 안은 놀라울 정도로 조용해졌다. 엔진 소리가 안으로 들어올 새도 없이 뒤로 빠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차창을 두드리는 비바람 소리만이 그래도 폭풍 전야 같은 정막을 깨뜨려 주어 조금은 긴장을 덜하게 하였다.
   조그마한 커브에도 자동차의 뒷 부분이 씩씩 돌아가는 것 같고, 고인물을 자날 때마다 뿌죠도 별 볼일 없이 휘청거렸다. 어린애 같은 영웅심에서 정작 달리라고 큰 소리를 처 놓은 사장님도 마음이 편치 않았던지 껑 앓는 헛 기침을 몇 번 하였다. 그래도 속력을 낮추지 안차 나중에는 참다 못하여
   " 이 사람아, 자네는 한 마디 들었다고 앙갚음을 할 셈인가. 도대체 지금 몇 키로로 날고 있는 가 ?."
   라고, 나무랐다.
   강희는 요즘 해륙실업을 떠날 때가 왔다는 것을 가끔 느꼈다. 그것은 무엇 보다도 사장님이 사소한 일에도 일일이 거부 반응을 보여 왔기 때문이었다. 별로 야단을 칠 일이 아닌데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공연히 트집을 잡았다.
   오늘 일만 하더라도 그렇다. 운전을 하다 보면 남의 차를 받을 수도 있고 또 받힐수도 있었다. 그래서 고처주고 고치면 그만인데, 이건 얼토당토 않게 무조건 새 것으로 바꿔오지 않았다고 야단이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이건 처음부터 시비조로 나왔다.
   " 이 사람아. 차를 다 고쳤으면 고쳤다고 보고를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래. 후렌다를 갈았는 가 ?."
   " 저어..."
   " 우물쭈물 하지 말고 본론부터 얘기 해. 갈았어, 안 갈었어 ?."
    " 신호기 렌즈만 교환하고..."
   " 이 사람이 왜 엉뚱한 소리만 하고 있어. 난 후렌다를 묻고 있어, 후렌다를."
   " 그건 못 갈았는 데요."
   강희는 지난 일요일 아침 아리랑 호텔에 사장님을 내려드리고 사무실로 돌아오던 도중 영주 파출소 옆 버스 정유소에서 갑자기 꺽어 들어오는 버스를 피하여 남의 차선에 뛰어 든 픽업에 부딛혀 가벼운 접촉 사고를 당했다. 상대방의 일방적인 과실이어서 수리 일체를 약속은 받았으나 현금을 구하지 못하여 애원하다 싶이 하는 가해 차량의 단골 서비스 공장을 마다하고 사장님이 지시한 대로 뿌죠의 지정 공장으로 가서 수리를 했다.
   가해 차량은 어느 보세공장의 업무용이었다. 기사의 말로는 군에서 제대를 하여 몇 달째 놀다가 어렵게 그 곳으로 직장을 얻어 온지 겨우 3개월째 되었다고 했다. 그러니 그 회사의 규칙도 잘 모르고체면상 사고의 보상을 요구할 형편이 아니어서 부득히 자기가 수리비를 물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라고 하면서 관대한 처분을 바란다고 했다.
   강희는 다 같은 기사의 입장으로 할 수 있는 데까지 돈이 적게 드는 방향으로 차를 고치려고 하였지만 못 가진자의 사정을 모르시는 사장님은 기어이 조금이라도 상처가 난 곳에는 무조건 새것으로 교환을 해 오라고 했다.
   " 10만 원 밖에 목 구했어요.하지만 아모레 아줌마한테 부탁해 두었으니 나머지도 곧...."
   정비 공장 한 모퉁이에서 걱정스럽게 소근거리는 가해 기사 부부의 대화가 견적을 뽑고 있는 뿌죠 넘어에서 들려왔다.
   " 근데, 여보 무슨 일이에요 ?  사고를 냈어요. 사람은 안 다쳤어요 ?."
   " 아무 일도 아니래도 그러네."
   " 그럼 왜 이런 곳으로 갑자기, 그 많은 돈을...."
   " 제발 조용히 해. 내 나중에 다 말해 줄께. 지금 분명히 당신에게 말해 줄 것은 내가 한 달 늦게 취직을 한 걸로 생각하면 아무른 문제 될 것이 없다는 것 뿐이야. 그러니 그 돈을 이리 주고 얼른 마자 구해 와."
   강희는 슬펐다. 필경 자기의 남편이 무슨 일을 저지른 것만은 분명한 데, 돈이면 아무 일 없이 해결 된다고 하니 우선 남편을 무사하게 하기 위하여 더 이상 물를 겨를도 없이 돈을 구하려고 발길을 돌리는 그녀가 한없이 가여웠다. 그것은 정말 남의 일 같지 않게 가슴에 와 닿았다. 그래서 그는 견적을 내고 있는 정비 주임 앞으로 가서 수리비가 얼마나 들겠느냐고 물었다.
   " 신호기 렌즈와 후렌다를 교환 한다면 대충 25만 원정도..."
   " 아니 그렇게나 많이요 ?."
   " 그것도 열처리 도색을 빼고 그렀습니다. 야끼까지 한다면 아무래도 석 장은 넘어야..."
   " 그러지 말고 좀 싸게 하는 방법은 없습니까 ?."
   " 왜요. 신호기 렌즈는 어차피 갈아야 하지만, 후렌다를 판금해서 쓴다면야 10만 원 미만이지요."
   " 그래도 되겠습니까 ?."
   " 그러믄요. 사실 이 정도 끍힌 것을 가지고 새 것으로 교환해 달라고 하면 가해자측에 너무 부담을 주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강희도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사장님은 차를 순 엉터리로 수리해 왔다고 노발대발이었다.
   " 이 사람아, 그걸 말이라고 하는 가. 어째서 때워 붙인 것이 본래 것과 같단 날인가 ?."
   " 때워 붙인 것이 아닙니다,"
   " 그러면 ?."
   " 판금을..."
   " 이놈아, 판금을 해도 그렇지. 찌그러진 것이 불떼가 가지 않고 펴 진다더냐 ?."
   불 간 자리에 칠이 타 버리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그 뒷면에도 비치를 단단히 발랐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 사장님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살다보면 실수를 하는 수도 있는데. 조금 끍힌 걸 가지고 무조건 새걸로만.... 그 분의 형편도 딱하고요."
   " 아니 이놈이 점점 한다는 소리가...그래 회사 차야 어떻게 되던 네 얼굴만 내어 보이자는 거야, 뭐야 ?."
   " 죄송합니다. 사장님. 그 분이 근 한나절이나 돈을 구하지 못해서....그리고 무엇 보다도 정비공장 측에서 그 정도면 판금을 해서 써도 별 이상이 없다고 하기에...."
   " 내 여러 말 않겠네. 자네 돈을 들이더라도 새걸로 바꿔 오게."
   이건 완전히 생트집이었다. 어쩌면 사장님은 가해자 측에 기사가 받을 것은 다받아 챙기고 엉터리로 수리를 해 온 줄로 의심을 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요즘 사장님은 확실히 마음이 변해 있었다. 그것은 모두 비서 윤양과의 관계에서 온 히스테리인 것도 같고 노이로제인 것도 같았다.
   윤양은 드디어 많은 파문을 남기고 회사를 떠났다. 그것은 한 달 전의 일이었다. 사장님은 윤양이 교복을 입고 실습생으로 입사를 한지 3년이나 지난 오늘 날까지 하루하루를 즐거운 고통 속에서 살았다. 그것은 어쩌면 사장님에게는 즐거움 보다도 괴로움을 더 많이 주었는 지도 모른다.
   사실 윤양은 버릇이 없었다. 생활에 변덕이 심했고 무엇보다도 복잡한 남자 관계가 사장님을 피곤하게 했다. 그래서 사장님은 한때 그녀을 단념하려고 출근도 하지 않고 피해 다닌 일이 있었다. 그 때 윤양은 어린 나이로 대담하게 사장님 댁으로 찾아 가서 안방을 차지하고 들어누운 일이 있었다고 했다.
   사모님은 그제서야 자기의 영감을 주야로 파김치를 만들어 보낸 년이 바로 자기의 전화를 그처럼 사근사근 잘도 받아 주던 비서라는 걸 알고 이를 뿌두득 갈았다.
   " 내 그 불여우 같은 년을 발기발기 찢어 죽여도...."
   분이 풀리지 않는 다고 하면서 사장님은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정을 했다. 그래서 사장님에게 다려드릴 보약을 지어 가면서
   " 세상에 영감이 그 귀사때기에 피도 안 마른 년한테 얼마나 시달렸던지 학을 뗐단다, 학을....하도 찰거머리 같이 달라 붙어서 엄포를 놓는 통에 질질 끌려 다녔다는 구만 ! "
   그러면서 쯧쯧 혀까지 찼다.
   그런 것을 보면 역시 착하고 어리석은 것은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마나님인 모양이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사모님이 지어 주신 보약을 먹고, 사장님은 아직도 여전히 윤양의 치마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사장님은 어떤 의도에서 윤양을 피해 다녔는 지 알수 없었다. 아마도 그때는 불륜의 관계를 정리하려고 한 모양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윤양이 비서실에서 모 백화점의 양품부 주인으로 자리를 바꾼 것 뿐이었다. 물론 자금은 수 년 동안 몸 전체로 충실히 모셔온 비서양의 특별 퇴직금이었다. 그것을 사장님은 길전무를 내세워 대패질을 하게 한 것을 보면 그 당시는 분명히 윤양과 헤어질 결심을 단단히 한 것만은 사실인 듯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불륜의 관계는 오늘 날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남들은 윤양이 회사를 떠났고, 위자로로 양품점을 차렸다는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사장님과의 관계는 끝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장님도 이제 떳떳한 인간이라는 듯 잃어버린 위신과 체면을 찾느라고 어깨에 힘을 주고 다녔지만 강희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사장님도 그것을 의식하고 완벽한 비밀을 지키기 위하여 기사를 내보낼 결심을 하였는 지, 그 구실을 찾기에 급급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전에 없이 사소한 일에도 해고를 연관시켜 꼬투리를 달았다. 그러나 강희는 강희대로 거기에 말려들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쓰며 인내하고 있는 중이었다.
   " 사장님, 수리한 부분이 그렇게 의심스러우시면 제가 각서라도 쓰겠습니다. 앞으로 그 부분에 이상이 있을 때는 언제든지 저의 부담으로 고쳐 드리기로요."
   " 이 사람이 웬 말이 그리 많아. 바꿔 오라면 바꿔 올 것이지."
   " 사장님 정말 너무하십니다. 저의 회사에서도 사고를 내었을 때 피해 보상을 그런식으로 해준 일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습니까 ? 혹시 제가 가해자한테는 새것으로 교환한 걸로 해서 돈을 받아 챙기고.....?."
   ( 그렇지 않고서야 이처럼 무조건 몰아 붙일 일이 없지 않는가.)
   강희는 요즘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몇 일 전에도 하마트면 목이 달아날 뻔 했다.
   사장님 댁으로 가라는 연락을 받고도 제때에 차를 도착시켜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갈은 12시 반에 받았다. 그는 그때까지 점심을 먹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사장님 댁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차를 쓸지 몰라서 미리 점심을 먹고 가기로 했다.
   사모님은 자동차에 그름을 넣어야 가는 줄은 알아도 기사가 끼니 때가 되면 밥을 먹어야 하는 줄은 몰랐다. 언제든지 차에 올라 앉아 목적지만 얘기하면 그것으로 그만이었고, 지금까지 늘 당해 온 그로서는 스스로 알아서 챙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날은 그것이 화건이 되었다. 그가 식사를 하고 차고로 돌아오니 비서 김양이 차에 붙어 서서 질질 울고 있었다.
   " 아저씨 큰 일 났어요."
   강희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그를 찾으려 나섰던 몇 명의 사원들이 거기에 몰려 있었다.
   " 도대체 이 기사는 뭤하는 사람이요 ?."
   총무과장이 삿대질이라도 할듯이 대들었다.
   " 과장님은 여태 저의 직책을 몰라서.... ?."
   " 자기 직책을 아는 사람이 일을 그따위로 해요."
   " 그따위라니요 ?."
   " 사장님 댁으로 가라는 연락을 받았소 안 받았소 ?."
   " 받았는 데요."
   " 받고도 .....?."
   사모님의 모친이 사위의 차를 기다리다 서울로 가는 열차를 놓이고 택시를 잡아 타고 비행장으로 갔다고 했다.
   " 얼른 사장님한테 가 보시요."
   강희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수건을 닦으며 사장실을 노크했다.
   " 아니 너는 뭤하는 놈이야 ? 사장인 나를 뭘로 아는 거야."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고래고래 소리를 치면서 당장 열쇠를 두고 나가라고 했다. 온 몸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걸 보면 화가 나도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 총무과장 이 사람 계산할 것 계산해서 당장 내 보내게. 아주 윗 사람을 모시는 태도가 돼 먹지 않았어 !."
   " 사장님,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요. 고의로 사장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 아니라, 점심을 먹고 가느라고 그랬다는 군요."
   총무과장이 사정을 했다.
   강희는 욱하는 성미에 조금 전 총무과장에게 대든 걸 후해 했다.
   " 아니 뭐라고 ? ...열차를 타러가시는 어른을 두고 점심을 먹으려 가 ?."
   " 이 기사는 그걸 몰랐다는 군요. 아무려면 사모님이 역에 나가시는 걸 알고서야 어떻게 식사를 하려 갔겠습니까 사장님."
   " 뭐 ? 그럼 김양을 좀 오라고 해."
   무슨 큰 죄라도 지은 양 오들오들 떨면서 김양이 안으로 들어왔다. 잘 사는 집의 외동 딸인데도 매사에 자신이 없고 겁이 많았다. 차를 나르고, 걸레질을 하지 않아도 시집 갈 재산이 아버지에게 있는 데도 어째서 하루 군것질 값도 되지 않는 급료를 받으면서 그 고생을 하는 지 알 수가 없는 아가씨였다.
   " 너는 어찌된 것이 대학까지 나왔다는 애가 전달 하나 제대로 못하나 ?."
   그도 역시 사장님으로부커 단순히 차를 사장님 댁으로 보내라는 말만 들었지, 누가 몇 시에 역에 나간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래도 그는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오들오들 떨면서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온실에서 행여 볕을 너무 받아 시들까봐  곱게 끼워 나약하게 자란 그가 얼마나 놀랐든지 그 다음 날부터 출근을 하지 않않았다.
   그 무렵 사장님의 셋째 딸이 두 언니를 뒤에 두고 울산 모 기업채에 과장으로 있는 총각과 결혼을 했다.
   신랑되는 사람은 서울 장안에서 조금 산다는 집안의 차남으로서 이 사람 또한 자기 보다 수준이 조금 낮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는 아예 예의 같은 것을 지킬 줄 몰랐다. 이건 기사를 알기로 자기집 하인을 대하듯 했고, 어디다 돈을 쓰야 하는 줄도 몰랐다. 귀공자에 깊이 물들어 있었다.
   결혼 전후로는 유럽으로 신혼 여행을 떠날 때도 비행장까지 사장님의 차를 이용했는데 기사에게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없이 신부를 껴안고 유유히 사라지며 아니곱게도 짐까지 안으로 가져다 달라고 했다.
   추석이 몇일 지난 어느날이었다.
   강희는 사장님 댁에 들어 온 선물을 뒷드렁크와 조수대에까지 가득 싣고 그들의 보급자리인 울산으로 가다가 온천 입구 신호대에서 신호위반으로 교통 경찰관에게 적발된 일이 있었다.
   " 이 양반이 면허증을 제시하라면 했지 무슨 말이 많아. 아무려면 경찰관이 위반하지도 않은 차를 잡고 시비라도 한단 말인가 ?."
   " 그래, 무슨 위반을 했단 말이요 ?."
   " 신호위반도 몰라. 신호위반."
   " 신호 위반이라고요 ? 난 신호도 못 봤는 데."
   사실 그는 버스 뒤에 바짝 붙어갔기 때문에 신호가 바뀐 줄도 몰랐다.
   " 이 양반이 운전기사가 신호등도 안 보고 운전을 해."
   그러니 위반을 할 수 밖에 없지 않으냐고 빽 소리를 질렀다.
   " 죄송합니다.고의로 위반을 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버스에 가려서 신호등이 보여야지요."
   "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자동차는 반드시 신호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것처럼 그것을 조작하는 운전자는 신호등을 보아야 할 의무가 있어."
   " 정말 너무하십니다. 당신의 눈으로 상황을 똑똑히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
   신호를 대기하고 있는 곳에서 그것을 통과하는 교차로의 거리가 먼 신호대에서는 종종 그런 일이 있었고, 그 곳처럼 짧은 곳에서도 어쩌다 차량이 밀린다든지 진행하는 차의 속력이 느릴 때 버스나 콘테이너 같이 적재함이 높은 차의 뒤에 바싹 붙어 가다가는 본의 아니게 신호가 바뀐 줄도 모르고 가는 수가 있었다. 그것을 지성을 겸비 했다는 이 나라 경찰관들은 가로수나 전신주 뒤에 숨어서 노리고 있는 것이다.
   " 이 양반이 되게 말이 많네. 위반을 했으면 스티카를 받아갈 것이고, 억울하면 법을 만든 사람에게 가서 따질 일이지."
   "참으로 한심하십니다. 누가 로보트에 제복을 입혀 놓았는 지."
   " 아니 뭐라고 ? 이게 정말 따끔한 맛을 ...."
   " 예 공무 집행 방해에 공권력 모독죄도 함께 추가해서 끊어 주십시요."
   스티크에 그런 법 조항이 없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강희는 신호위반 딱지만 받았다.
   법을 어겼으면 처벌을 받아 마땅하나 웬일인지 기분이 씁슬했다. 세상이 원망스럽고 울고 싶도록 서글퍼 지기도 했다.
   그런데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격으로 경찰관과 입 시름을 할때는 쥐죽은 듯 입을 다물고 있던 사장님 사위가
   " 아저씨는 그 몇 푼 주고 적당히 하지 않고, 그 사람과 싸워서 이기겠다는 거요 ? 남은 바빠 죽겠는 데 !."
   하고, 핀잔을 주고 짜증을 부렸다.
   ( 모르면 가만히 죽치고나 있어. 땡전 한 잎 빼주지 않은 주제에 무슨 잔소리가 많아. 누구는 사바사바를 할 줄 몰라서그러고 있는 줄 아나. 제미 토큰 몇 개 들은 포켓으로 어떻게 그 친구의 입을 틀어막아 )
   강희는 이중 삼중으로 기분이 언잖았다. 화풀이를 할 곳은 역시 차 밖에 없었다. 그래서 마구 악세레타를 밟았다.
   " 아저씨, 좀 천천히 갈수 없어요 ?."
   아 다르고, 어 다르는 데 이게 또 나오는 말투가 시비조다.
   " 조금 전에 회사에 들어갈 시간이 바쁘다고 하지 않았소 ?."
   "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달리다가 무슨 일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요."
   " 염려 마시요. 아무리 못되어도 딱지 하나 쯤 더 받는 일 뿐일테니까."
   그래서 그는 그의 말대로 팔송공원 입구를 조금 지난 고갯마루에서 경찰 싸이카에 추월로 적발 되었다.
   " 자, 한 장 더 끊어 주시요."
  " 허허 이 친구 화통해서 좋구만 !."
   그러면서 어디 차냐고 물었다.
   " 어디 차나 마나 끊으려거든 얼른 끊어 주시요."
   " 허허 이 사람 성질 하나 되게 급하네 ! 그렇다고 차를 그런식으로 몰아서야 쓰나. 더욱이 사고 다발 지역이라고 푯말까지  붙어 있는  곡각지점에서 말이야. 보아하니 오늘 기사양반이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인데, 그럴 수록 독한 마음을 먹고 차를 얌전히 몰아야지.
   그러면서 스티카를 도로 내밀었다.
   " 그냥 주는 겁니까 ?."
   " 그럼 그 위에다 하나 더 끊어 줄까. 한 달 쯤 푹 쉬게."
   " 아이고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
   2시가 훨씬 넘어거야 공단 안에 있는 사원 아파트에 도착했다.
   그때까지 강희는 점심을 먹지 않고 있었다. 12시가 조금 지나서 그들 부부를 태우려 사장님 댁으로 갔기 때문에 식사를 할 시간이 없었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그들의 결혼식 때도 회사의 승용차 3대가 차출되어 아침부터 오후 3시까지 뛰었지만 기사 3명 모두 점심을 굶었다. 어느 누구 하나 밥을 먹으려 오라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기사들이 손님이 북적대는 집안으로 들어가서 밥을 달라고 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매사에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그러했다. 그들은 권력이나 금력이 자기 보다 나은 자에게는 무엇을 못주어 안달이었고, 없는 자는 아예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한 번은 또 이런 일이 있었다.
   사모님의 고향 친구 한 분이 새집을 지어 이사를 했는 데, 집들이를 한다고 하여 초대를 받아 갔다. 귀빈들은 2층으로 안내되었고, 강희는 밖에서 차에 앉아 있었다.
   점심때가 지났는 데도 누구 하나 안으로 들어와사 밥을 먹으라는 사람이 없었다. 배는 고프고 할 수 없이 길가 분식집에 들어가서 라면을 먹었다.
   한참 후에 나온 사모님은 약방이 있으면 차를 세우라고 했다.
   " 아이고 하도 권하는 바람에 갈비찜이며 온갓 음식을  어떻게나 많이 먹었든지."
   소화제를 먹지 않고는 도저히 못 견디겠노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강희는 갑자기 헛구역질이 났다.
   " 아니 자네도 속이 거북한가 ?."
   사모님은 기사도 그 집에서 음식을 먹은 줄 아는 모양이었다.
   " 네, 하도 많이 먹어서 소화가 잘 안 되는 거 같네요."
   하고, 비꼬아 주었더니, 이번에 또 한다는 소리가 가관이었다.
   " 확실히 우리 이북 사람들이 음식은 푸짐하게 하지. 이남 사람들 보다 ? "
   하고, 고향 인심을 자랑이라도 하듯 물었다. 그래서 강희는 피식 웃으며 배가 부르지도 않는 데, 사모님이 내미는 소화제를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강희는 그래도 종전처럼 무거운 짐을 에레배트가 없는 5층 아파트까지 날랐다.
   점심을 굶은 대다가 무거운 사과상자와 귤 상자를 두 번이나 나르고 나니 다리가 후들거리고 눈 앞이 아물아울 했다.
   " 아저씨 그만 가보세요. 나머지는 우리가...."
   사장님 딸은 핸드백 하나만 들고 올라가더니 아예 내려오지도 않고, 새신랑이 상의를 벗은 채못 마땅한 얼굴을 했다. 제딴에는 게으른 운전사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던 모양이었다.
   " 몇 개만 더...."
   " 괜찮다니까 그러시네요."
   " 그럼, 안녕히..."
   강희는 되돌아 오면서 영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새신랑은 차를 돌려보내 놓고 사장님한테 무어라고 전화를 하였는지 밥을 먹을 사이도 없이 도착 즉시 기사를 불러 드렸다.
   " 아니 자네는 어째서 갈 수록 그 모양인가 ?."
   " 네 ?."
   "손님한테 좀 친절하면 누가 잡아먹기라도 한다더냐 ?."
   " 무슨 말씀입니까, 사장님."
   강희는 은근히 좀 캥기는 것이 있어서 불안한 얼굴로 힐끔 사장님을 쳐다봤다. 뿔태 안경 넘으로 노인답지 않게 눈알이 매서웠다.
   " 어째서 오늘 아이들한테 그런 행패를 부렸는 가 ?."
   " 행패라니요 사장님 ?."
   " 자네가 하도 난폭하게 차를 모는 바람에 우리집 아이는 앓아 누웠다네."
   자네가 감히 그럴 수가 있느냐고 했다. 그것은 사장님을 능멸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노발대발이었다.
   " 사장님 저는 그때까지 점심을 먹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5층 아파트까지 세 번이나 짐은 날랐습니다. 끝까지 마자 올리려고 하였지만 그만 돌아가라고 하기에...그리고 갈때는 교통 순경한테 딱지를 끊기는 통에 기분이 좋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사장님."
   강희는 이제 자가용기사로서 너무나 많은 잘 못을 저질렀다. 그것은 모두 고용주 측의 일방적 생각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를 쫓아 내기 위해 티끌 하나라도 잡지 못하여 혈안이 된 그들에게 그런 허점을 보인 것만은 큰 잘못이었다.
   그는 벌써부터 떠날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갈 곳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더 버텨보아야 얼마 가지 않아서 더 많은 비애와 비참한 몰골이 되어 쫓겨가야 할 신세가 뻔하기 때문에 이 기회에 제 발로 걸어서 떠나기로 결심은 하였으나 당장 실행에 옮길 수 없는 것이 또 그의 실정이기도 했다.
 
   벌금 만 원과 이틀간의 특별교양에다 그것으로도 한이 차지 않았든지 자그마치 10일간의 면허행정이 신호위반이라는 벌칙으로 강희에게 주어졌다.
   그런데 업친데 덥친 격으로 회사에서는 그의 급료에서 5만 원이라는 돈을 연장수당에서 잘라 버렸다. 말하자면 일을 하지 않는 만큼 근무수당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신호위반이 그에게 안겨준 고통은 또 그것만이 아니었다. 365일 하루도 쉬지 않고 굴리는 자가용을 열흘간이나 세워둘 수 없는 형편이어서 회사에서는 임시로 기사 한 분을 데리고 왔다. 마치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 그가 면허정지 처분을 받았다는 보고를 하자마자 달려온 사람은 사장님 가정부의 사촌 오빠가 된다는 사람이었다.
   그는 강희보다 한두 살 위인듯 했다. 첫 인상은 죽으라면 죽는 시늉을 할 정도로 간사하게 생겼고, 지나치게 친절했으며 아무에게나 굽신그렸다.
   사장님은 새로온 분에게 임시라든가 현직 기사의 면허행정 기간만이라는 말도 없이 무조건 인수인계를 받으라고만 했다. 그래서 강희는 씁쓸한 얼굴로 자동차 열쇠를 건네 주며 잘 부탁한다고 했다.
   " 인계할 것이 그것 뿐인가 ?."
   " 네 사장님."
   " 이 사람 보게나. 검사증이라든가 스페어 타이야와 공구 같은 것도 있을 게 아닌가 ?."
   " 그건 모두 차에 있는 데요."
   " 그럼 이 사람을 데리고 가서 인계를 시켜야지. 처음 온 사람이 그런 것이 어디 있는 지 어찌 알겠는 가 ?."
   그래서 강희가 새로온 사람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려니까
   " 자네는 잠깐..."
   하고, 새로 온 분은 남게 하고 강희만 먼저 나가게 했다.
   그 날은 할 일 없이 일찍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아내는 웬일이냐는 듯 불안한 얼굴로 남편의 눈치를 살폈다.
   " 왜 그러구 서 있어  ? 별일 아니니까 안심하라고. 아직은 이것두...."
   강희는 손바닥을 펴서 목에 칼질을 하는 시늉을 해 보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직업 치고는 정말 더러운 직업이었다. 어쩌다 좀 일찍 퇴근을 해도 아내의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했고, 밤 늦게 돌아오지 않으면 더욱더 집 사람을 애태우게 하는 것이 이놈의 운전사라는 직업이었다.
   " 영아 정말 미안해 ! 내 어쩌다 당신을..."
   " 자기는 왜 또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전 다만 반가워서..."
   " 아니야. 난 다 알고 있어. 당신이 얼마나 불안과 긴장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강희는 아내에게 일찍 집으로 돌아 온 이유부터 말해야 하는 현실이 서글펐다. 그러나 그는 오늘 날까지 살아오면서 아내에게 자기의 직장 생활에 대해서는 일체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순전히 남편으로서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슬플 때나 괴로울 때도 내색을 하지 않고 언제나 집에 돌아오면 명랑한 얼굴을 했고, 그래야 하는 자신이 때로는 울고 싶도록 외로웠다. 이제는 그런 것을 털어 놓고 이야기를 할수 없는 아내를 가진 것 조차 원망스러웠다.
   " 영아 내 한 가지 물어볼 말이 있는 데, 화 내지 않고 대답해 주겠어 ?."
   오늘 따라 자기의 이름을 부르고 하는 데 소영은 마음이 불안했다.
   " 무슨 말인데요 ?."
   " 무슨 말아든지."
   " 좋아요. 어차피 자기가 알고 싶은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대답해 드리겠어요. 기분이 좋고 나쁜 건 제 사정이니까요."
   " 아니 그렇게 말하면....."
   " 괜찮데두요."
   " 그래. 그럼 내 말하겠는 데, 혹시 내 곁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없어 ?."
   " 떠나다니요 ?."
   " 당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느냐고 ?."
   " 어머나 ! 어쩜 자기가 제게 그런 말씀을...."
   " 아니야, 내 말을 농담으로 듣지 말라구. 나는 요즘 영아의 표정에서 가끔 그런 것을 읽고 있어 !."
   " 점점...."
   소영은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 자기 요즘 이상해 졌어요 !."
   " 이상한 것은 소영 당신이야. 삶의 의욕을 잃은 것 같아. 하기야 오늘이 내일이고, 내일이 오늘이니 그럴만도 하겠지. 난 가끔 이런 생각이 들어."
   " 무슨 생각 ?."
   " 부담감아라고나 할까, 죄의식이라고나 할까."
   " 어머나 ! 누구한테요 ? 설마...."
   " 설마가 아니라고."
   " 왜 그러지요 ? 저도 아닌게 아니라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 누구한테 ?."
   " 누군 누구에요, 자기한테지.'
   " 남의 흉내을 내는 건 인격 문제라고."
   " 농담 아니에요. 지금 가만히 생각하면 제가 너무 성급하게 자기의 품에 뛰어든 것 같아요. 그래서 무거운 짐 때문에 자기의 어깨는 좀처럼 펴지지 않나 봐요."
   " 그래, 그럼 우린 다 같이 피해자인 셈이로군 !."
   그 말에 소영은 돌아 앉으며 기어이 흑 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전 자기가 나를 가해자라고까지 생각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 아니야, 그건 절대로...소영이 그런 생각이 든다고 하니 그래 본 것 뿐이야. 가해자는 나라고. 아닌게 아니라 난 요즘 당신을 대하기가 민망하다고."
   "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 남편이 아내를 대하기가 민망하다니요."
   " 우린 반 십 년이란 세월을 함께 살아 왔어. 처음에는 꿈도 많았고, 모든 것이 열심히 하면 다 이루어질 줄 믿었지. 그러나 현실은 늘 실망만 안겨 주었을 뿐 좀 더 나은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했어. 더욱이 문제는 그런 것이 앞으로 쉽게 올 것 같지가 않다는 거야. 지나 온 경험으로 봐서 말이야."
   이건 봉급이랍시고 말라 붙은 빈대 같은 봉투를  통째로 가져다 준들 옛날 그녀가 자기의 부모에게 타다 쓴 용돈 보다 적으니 반가울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그런대로 아이들의 동두깨비 살림처럼 재미도 있었겠지. 그러나 오늘도 내일이고 내일도 오늘이니 지겹고 짜증스럽지 않을 수 없으리라 . 강희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러니 그의 마음이 편할리 없었다.
   날이 가면 갈 수록 아내를 대하기가 민망스럽고 초조해지기까지 했다. 차라리 아내가 가난한 집안의 딸이였더라면 지금쯤 얼마나 아기자기한 행복을 느끼고 있을 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얼마되지 않은 급료라도 절약을 한다면 그런대로 조금은 저축을 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이 쌓이고 또 새끼를 치면 아담한 집도 작만할 수 있을 것이다. 조그마한 뜰이지만 한 쪽 구석에 단감 나무를 심고, 맞은 편엔 그 감이 익기 전에 따 먹을 수 있는 배 나무를 심고 또 이슬이 올 때까지 열매가 붙어 있어 주는 모과 나무도 한 그루 쯤 심으리라. 처음부터 과일이 여는 나무는 값이 바싸니 싸고 조그마한 묘목을 심어 정성껏 키우리라. 그러다가 개인택시 추첨에 당첨이라도 된다면 일약 차주겸 운전사가 될 것이고, 그러면 고아출신인 자기로서는 아닌게 아니라 부자가 눈 위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건 엉뚱하게도 감히 처다볼 수도 없었던 장군의 딸을 아내로 떠맞게 되었으니, 개인택시가 아니라 법인 택시회사 사장이라도 그녀에게 만족을 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너의 인생에 오점을 남겨 주었지만 더 큰 후회를 남겨주고 싶지 않아서 그래.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내가 너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내가 될때까지. 소영이 그 동안 행복을 찾으면 다행이고 . 그래서 나 다시 만나자는 전제 조건은 걸지 않겠어."
   " 제발 제발....."
소영은 강희의 입을 틀어 막으려던 이불을 덮어 쓰고 소리 내어 울었다.
 
   일년 내내 쉬는 날 없이 계속 일을 하였을 때는 단 하루라도 놀아 보았으면 원이 없겠다고 까지 생각했는 데. 막상 정부에서 주는 휴가를 열흘간이나 강제로 받고 보니 즐거움은 찾을 길이 없고, 오히려 정신적인 고통이 밀려와 그를 괴롭혔다. 무엇 보다도 그동안 자신의 위치가 허공에 뜨 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초조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삼 일째 되던 날 덕포동에 있는 시경 면허계에 가서 특별 교양을 곱빼기로 받고 나서 회사에다 전화를 걸었다.
   마침 미란이 전화를 받고 할 이야기가 있으니 퇴근 후에 좀 만나 달라고 했다.
   " 실은 우리 일이 아니고요. 아저씨에 대한 얘기에요."
   그러면서 미란은 전화를 귾어 버렸다.
   강희는 마무래도 미란의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오늘도 그녀의 작전에 말려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필경 회사 내에서 자기의 신상에 대하여 무슨 변화가 일어 나고 있는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6시 10분이라면 아직도 한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 버스를 타고 약속 장소로 나가는 데는 거의 30분이나 걸릴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 그녀를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30분 정도 밖에 안 되는 셈이었다. 그래도 그는 남자가 먼저 나가 여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도 쑥스러울 것 같아서 남포동에서 내려 광복동으로 들어갔다.
   서점을 몇 군데 들러서 바람다방에 가니 약속 시간이 10분이나 지났는 데도 미란은 와 있지 않았다. 그녀는 요즘 점점 소문대로의 여인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 한동안 강희에게 미처 날뛰였을 때는 사나이의 환심을 사려고 그의 온 영육을 다 바쳐 애정을 쏟았다. 언제나 약속 시간 몇 분 전에 와서 강희가 좋아하는 음식이라든지 다방에서는 꼭곡 커피를 시켜 놓고 기다렸고, 혹시 계획한 대로 일이 끝나지 않아서 약속 시간을 넘기더라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기다려 주었다. 그래서 그를 만나지 않고는 절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은 어찌된 일인지 약속 시간을 이삼십 분 어기는 것은 보통이었고, 심지어는 저편에서 철석 같이 해 놓은 약속도 아랑곳 하지 않고 바람까지 맞추기가 일수였다.
   담배를 다섯 개비나 피울 때까지 미란은 나타나지 않았다.
   강희는 불꽤한 얼굴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 값을 지불하고 막 다방 문을 열고 나서려는데 미란이 앞을 가로 막으며 숨을 할닥거렸다.
   " 지금 몇 시야 ?."
   " 죄송해요. 오다 아는 사람을 만나서..."
   " 아는 사람 누구 ?.....아니 아니, 할 말이 뭐야 ? 회사에 무슨 일이 있어 ?."
   강희는 속에서 끌어 오르는 질투 비슷한 분노를 심키며 말을 바꾸었다. 그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그는 어쩌다가 자신이 그와 함께 애욕의 늪에 빠지게 되었는 지 후회를 하면서도 여전히 그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처음에는 미란을 좋게 보지는 않았다.그래서 그의 유흑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고 기어이 그녀의 술수에 무릎을 꿀고 말았다.
   시초야 어떻게 됐던 그를 가까이 하다보니 정 같은 것도 들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지 모르겠으나 안 보면 보고 싶고 보면 헤어지기도 싫었다. 남들이 그 녀에게 찝적대면 질투심도 났다. 그는 요즘 사랑은 오직 하나라는 말이 어디서 흘러나온 말인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아내도 사랑하고 귀여운 미란도 같이 있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미란은 종전처럼 그렇게  애정을 적극적으로 쏟아주지 않았다. 그것이 늘 불만이었다.
   " 그래, 나에게 할 말이란 뭐지 ?."
   " 아이 길거리에서 자꾸 이러기예요 ?."
   " 우리 간단히 끝내자고, 너도 바쁜 몸일테니까 !."
   " 정말 자꾸 비꼬기만 하시기예요."
   다시 다방으로 들어가려는 강희를 가로 막고 미란은
   " 나 배고파요. 막 뛰어 오느라고."
   하면서 물만두를 먹으려 가자고 했다.
   " 아저씨 어쩌지요 ?."
   간장 접시에 식초를 붓고 고추가루를 뿌리면서 미란은 걱겅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 저 있잖아요. 새로온 기사한테 이럭서를 받으래요. 사장님이."
   강희는 묵묵히 입안에 만두만 집어 넣고 있었다.
   " 듣고 있어요 ?."
   " 그래, 계속해 봐."
   " 이상하잖아요. 차 한 대에 기사를 둘이나 쓸리는 없고."
   "......."
   " 아이 뭐라고 말이나 좀 해 봐요."
   " 만두나 먹어."
   미란도 걱정이 되는 지 만두를 두어 개 먹더니 젖가락을 놓았다..
   " 그럼 아저씨는 어떻게 되는 거죠 ?."
   " 산 입에 거미줄 칠라고."
   " 그럼 우리는 요 ?."
   " 산 넘어 산이 없을라고."
   " 싫어요. 전 아저씨 곁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시집 갈 때까지오."
   그 날 처음으로 강희는 그들이 종종 저녁을 먹고 누가 말을 하지 않아도 의례히 찾아 갔던 은밀한 곳으로 가자는 미란을 기어이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아침에 나올 때 분명히 형광등 스위치를 내린 것 같은 데 아파트 창가에 훤히 불빛이 비쳐오고 있엇다.
   만길은 혹시 다른 동으로 잘못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고 한 번 더 위를 쳐다 보았으나 7동이 분명했고 불이 켜진 곳도 역시 5층이었다.
   그는 개인택시 9459 포니를 경비실 옆에 세워두고 수입금 가방을 챙긴후 뒷 드링크를 열어서 안을 들어다 보았다. 별 할 일도 없이 늘 습관처럼 그렇게 해오고 있었다. 언젠가 회사 택시를 운전했을 때 사돈 집으로 보내는 손님의 상떡을 담은 광주리를 잊어 버리고 내려 주지 않았다가 이튿날 스페어 타이야를 거내다 발견하고 뒤늦게 실어다 주고 부터 그런 버릇이 생겼는 지도 몰랐다. 그때 시골에서 내려온 그 손님이 짐을 잃고 얼마나 당황하고 난처했을 까 생각하면 지금도 낯이 화끈거렸다.
   " 총각사장, 뭘 그렇게 멍청히 들어다 보고 서 있노 ?."
   경비실 아저씨가 어깨를 툭 치면서 동생이 오래전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올라 가보라고 했다.
   " 동생이라고요 ? 허 참 ! 아저씨도."
   천애고아인 자기에게 동생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와 하등의 관계가 없는 일이라 일축하고 차를 한 바퀴 둘러보며 이상 유무를 점검했다.
   " 얼른 올라 가보래도 그러네."
   " 농담 마십시요, 아저씨. 그런 말씀은 농담이라도 가슴 아픕니다."
   " 그럼 내가 실수를 했나 ! 외사촌 동생이라고 하길래 비상 열쇠를 내어 주었는 데..."
   " 정말 입니까 ? 아저씨."
   " 허 뭐라고 하던데."
   " 네, 허요 ?."
   만길은 후다닥 경비 아저씨를 밀치고 아파트 계단을 뛰어 올라 갔다.
   18평 서민 아파트라 엘레베이트는 없었다. 그것은 개인택시 추첨에 당첨되어 차를 굴린지 6개월 만에 차의 할부금을 넣고 남은 돈을 모아 선금을 치러고 나머지 4백만 원은 주택은행의 융자를 안고 구입한 것이었다.
   만길은 주인답게 노크도 없이 도어를 열었다. 그때 주방에서 찌개를 끓이고 있던 순영이 인기척에 뛰어나오다 안으로 들어 오는 만길과 탁 마주쳤다.
   " 어머나 ! 오...."
   뒷말은 만길의 가슴에 눌려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입술을 마주한 포응은 아니었어도 순영은 만길의 품 안이 한없이 아늑하고 포근함을 느꼈다.
   둘은 한 동안 그렇게 붙어 있었다. 만길의 수입금 주머니가 옆으로 기울어져 동전이 뒹굴어도 그들은 모르고 있었고, 주방에서 찌개를 끓며 간을 보던 숫가락이 딩구는 동전 위에 떨어저도 그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 아이 답답해 !."
   그러면서 순영이 만길의 가슴에 파묻인 얼굴를 뽑아 사나이를 빤히 쳐다 보아도 바보 같은 남자는 터질 듯이 빨간 여인의 입술에 자기의 입을 가져다 줄줄 몰랐다. 그래서 애가 타서 발가락 끝까지 발 돋음을 하였으나 순영은 기어이 자기의 입술을 사나이의 그것에 까지 가져가지 못했다.
   " 아이 오빤 왜 이렇게 키가 크세요 ?."
   " 남자니까."
   " 오빤 너무 크서 싫어요 !."
   " 언젠가는 키 큰 남자가 좋다고 하고서."
   만길의 눈에서도 이글이글 불똥이 떨어지고 있었다.
   " 이럴땐 나 하고 같았으면 좋겠다."
   " 왜 ?."
   " 마주 보게요. 쳐다 볼려니까 고개가 아파요."
   " 그럼 내가 고개를 좀 꾸부려 줄까 ?."
   " 그러지 말고 절 안아서 들어 주실래요 ? 꾸부림 오빠 고개가 아프잖아요."
   " 고개 보다 팔이 더 아풀걸 ! 네 히프도 보통 큰게 아니니까 말이야."
   " 아이 오빠도 싱겁긴 !."
   " 사실이잖아 . 꾀 중량이 나가겠던데 그래."
   " 아이 몰라요 !."
   그러면서 낯을 붉이자, 만길은 순영의 허리에 두 팔로 깍지를 끼고 번쩍 들어 올렸다. 그래서 가까워진 두 개의 입술이 더 가가워져 막 붙으려고 하는 데 어디서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둘은 후다닥 포응을 풀었다.
   순영은 어리둥절한 만길을 세워두고, 벨이 울리는 큰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오면서 옷 매무세를 고쳤다.
   "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
   " 시계예요."
   " 뭐, 시계 ? 내 방엔 그런거 없는 데...."
   " 제가 오빠 드릴려고 사 왔어요. 입주 기념으로요."
   " 입주 기념 한 번 빨라서 좋구만 ! 근데 학생이 무슨 돈이 있다고 그런 걸 사와. 그냥 오지 않고."
   " 비싼 거 아니에요. 오빠 늦잠자지 않고 돈 많이 벌라고, 시간만 맞춰 놓으면 벨이 울려주는 탁상 시계예요."
   " 그럼 지금 당장 차를 몰고 돈을 벌러 나가라는 거야 ?."
   " 아니에요. 그건 제가 하도 오빠가 안 오시길래 10시까지 안 오면 돌아 가려고 맞추어 둔 거예요."
   그것을  벌써 몇 번이나 그렇게 다시 돌려 놓은 지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벨이 울리면 한 시간이나 30 씩 연장을 하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이렇게 되었노라고 했다.  
   " 그런 줄 알았으면 내 진작 올 걸 그랬지. 그렇지 않아도 오늘은 자꾸 집에 돌아가고 싶더라니 까."
   " 근데 왜 제게는 연락은 주시지 않고 몰래 이사를 하셨나요 ?. 전에 있던 집에 몇 번이나 찾아 갔는 데...."
   연줄 연줄하여 여기까지 찾아 오는 데 애를 먹었다고 했다.
   " 미안해 ! 그런 일이 좀 있었어."
   이날 밤 순영은 11시가 훨씬 넘어도 집으로 돌아 갈 생각은 하지않고 시키지도 않은 방안 정돈에만 열을 올리고 있었다.
   " 영아."
   " 이제 그만 집에 가야지."
   " 네."
   그런 말이 수 없이 오고 갔으나 순영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벌써부터 닦고 있던 커피잔을 계속 만지작거리고만 있었다.
   만길은 할 수 없이 잔을 받아 윗목으로 밀어 놓으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이러다 정말 통금을 넘기겠어. 내 집에까지 태워다 줄께 나가자고."
   그래도 순영은 다소곳이 숙인 고개를 두어 번 끄떡였을 뿐이었다.
   " 영아 난 말이다. 네 마음을 다 알고 있어 ! 하지만 난 아무도 사랑을 하지 않을 거야, 결혼을 전제로는. 그래서 난 기어이 돌려 보내려는 거야. 차마 네게만은 상처를 남겨주고 싶지 않아서지. 그러기엔 넌 너무나 아까워 ! 그러니 제발 돌아가 줘. 내 앞에서 얼쩡거리지 말란 말이야."
   강희의 음성은 다소 격해 있었다.
   " 아이 오빠, 이제 세상을 좀 똑 바로 보세요. 물론 고아가 되면서부터 오빠의 가슴에 맺히게 된 한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하는 여자의 부정 때문에 일생동안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건 정말 병이에요, 병."
   " 뭐, 병이라고 ?.'
   " 그렇지 않고요."
   " 그래. 어쩌면 병인지도 모르지."
   " 그럼 그 병을 제가 고쳐드리면 안 될까요 ?."
   " 네가 무슨 제주로 ?."
   " 간호사로만 써주신다면 책임지고 고쳐드릴께요, 오빠."
   " 아서라 아서. 너도 지금은 소녀다운 감정에 젖어 쉽게 그런 말을 하지. 그것은 누구나가 다 마찬가지란다. 물론 그때는 순수한 마음으로지. 그러나 그 마음은 잠시 뿐 금방 고통스러운 현실에 실증을 느끼고 만단다. 동 떨어진 환경속에서 자기를 적용시키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거든. 거기서 실망이 오고 비애가 오고, 그러다 좀 더 나은 곳을 향해 철새처럼 가볍게 떠날 수 있는 것이 현대 여성이 아니겠느냐, 그래서 나는 광산 사고로 척추 마비가 된 아버지를 버린 나의 어머니를 지금은 원망하지 않는 단다. 물론 개중에는 계약된 양심을 버리지 못해 차마 떠나지 못하는 삶도 있겠지. 하지만 내 어이 날아가고 싶어하는 파랑새를 새장 속에 가두어 두고 보고만 있겠는 가.  좋은 모이로 그럴 즐겁게 해 주지 못하는 주인의 고통 같은 것을 너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느냐 ?."
   만길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순영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 영아 좋은 차를 타던 사람은 절대로 나쁜 차를 타지 못하는 법이란다. 목적지에 도착하기는 마찬가진데, 그는 항상 차주로 하여금 멋진 차를 그리워하게 하고 불만과 불평을 낳게 하거든."
   " 그럼 오빤 가난한 사람이 나타나면 태우겠다는 말씀이세요 ?."
   " 얼마나 더 말을 해야 알아 듣겠니. 난 그런 변덕스러운 인간을 아예 태우지 않겠다는 거야. 그러니 너두 이 소형 고물차 주위를 맴돌지 말고 일찌 감치 속차리고 넓은 도로에 나가 보란 말이야. 지금은 다리가 좀 아프고 외롭고 쓸쓸하더라도 참고 견디 노라면 언젠가 너에게도 너를 가두어 둘 훌륭한 사람이 나타날 거야. 사실 말이지만 나야 별 볼일 없는 사람이 아닌가. 알파벳도 제대로 모르는 고아가 어찌 대학 출신의 부잣집 외동딸과 일생을 같이 하겠느냐. 너야 말로 비오는 날 고급 승용차를 마다하고 다 떨어진 리어카를 타겠다는 격이 아닌가.  좀 더 현관에 서서 기다리면 될 것을 말이다."
   그래도 순영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만길의 끄는 뚜껑 없는 리어커를 타겠노라고 고집했다.
   " 영아 제발 그러지 말고 내 말을 잘 들어. 내 고아원  친구 중에 이런 사람이 있어. 그도 태어날 때는 자가용을 갖고 있는 부잣집이었지.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자 가문이 기울기 시작했어. 끝내 빔털틀이 고아가 되고 말았지. 그래서 한때는 나와 같이 깡통을 차고 거리의 천사가 되었고, 종이를 줍는 양아치에 수없이 고아원을 전전하다가 그놈은 그래도 고등학교는 졸업을 했단다. 그런데 학창시절 길거리에서 우연히  고아가 되기 전에 초등학교를 같이 다녔던 짝지를 만났데. 여고 뺏지를 달고 있는 장군의 딸이었단다. 둘은 사랑을 하게 되었지. 그러나 내 친구는 그 여학생의 장래를 생각해서 나중에는 몸을 피했다는 구나. 그럴 때마다 그 여학생은 식음을 전폐하다 싶이 오직 그를 찾아 헤매었데. 그래서 그 친구는 할 수 없이 머지 않아 떠날, 외국선교사가 주선해 준 외국 유학도 포기하고 군에 입대하고 말았어. 그런데 공교롭게도 자기의 부대장이 그 여학생의 아버지였어. 둘의 사랑은 다시 불 붙기 시작했지. 그래서 그 아버지가 그놈을 최 전방으로 전출을 보내 버렸어. 그런데 제대를 하던 날 부산행 열차에 그 여학생이 먼저 타고 있더란다. 둘은 무일푼으로 동거 생활을 시작했어."
   순영은 두 눈으로 눈물을 주루룩 흘리며
   " 그래서 어떻게 되셨나요 ? 두 분의 처지가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불행 해 졌나요 ?."
   " 처음에는 행복했었지. 그러나 날이 가면 갈 수록 사랑에도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어. 그래서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돈을 버는 데만 열중을 했지. 그러나 아무리 악을 쓰고 일을 해도 아내에게 만족을 줄만한 돈이 벌어지지 않았어."
   " 그것이 그분을 괴롭혔나요 ?"
   " 하루 밥 한 끼를 먹지 못하는 처지가 아닌데도 그는 늘 그런 죄의식에 젖어 있었어."
   " 그럼 그분의 아내도 가난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하던가요 ?."
   만길은 그 말에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는 볼 때마다 항상 미소를 잃지 않았고, 그러다가도 때로는 그녀의 얼굴을 스쳐가는 우수는 찾아 갈 수 없는 부모님이 그리워서인지, 그로서는 분간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 그 분이 아내는 절대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꺼에요. 남자들은 어쩜 자기 주장대로만 생각하는 지 몰라 ! 그 분도 역시 오빠와 비슷한 환자인가 봐 !."
   " 환자라니 ? 너 생사람 잡는 소리 작작하고 얼른 일어나기나 해. 30분 밖에 남지 않았어, 통금이."
   " 통금이 안 방에 있는 사람도 잡아 가나요 ?."
   "그럼 넌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거야 ?."
   " 오빠 확답을 받기 전에는 요."
   " 확답이라니 ?."
   " 간호사 말이에요."
   " 너 정말 내게 올가미를 세워서 진짜 환자를 만들겠다는거니 ? 제발 나를 이대로 있게 해 줘."
   순영을 강제로 자기의 집 앞까지 태워다 주고 돌아와서 만길은 한참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녀의 신변에 무슨 변화가 일어난 것만은 분명한 것 같은 데, 순영은 끝내 그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차 속에서도 그는 울고 있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느닷없이 사랑을 고백하고 기어이 그것을 확인해 보고 싶은 의도가 무엇이었는 지, 만길은 너무나 욱박질러 이야기를 할 틈도 주지 않고 그녀를 태워 보낸 것이 지금은 후회스러웠다.
   차가 떠날 때 옆차창에 반사되어 비친 그녀의 원망스러하던 모습이 마음에 걸려 , 그 환상을 지워버리려고 돌아 누워도 더 많은 얼굴이 겹쳐와서 그를 괴롭혔다.
   " 순영아 나를 무정한 사람이라고 원망하지는 말아다오. 이 모두가 다 너를 위해서란다. 너를."
   만길은 몽유병자처럼 눈을 감고 혼자 중얼거리면서 잠을 청하고 또 청했다.

 
 
 

 

 
 
 
비 정
 
 
    " 실례지만 기사님은 어느 회사에서 오셨습니까 ?."
    " xx 클럽의..."
   " 아 네. 죄송합니다. xx 클럽에서 온 기사에게는 식사를 제공하지 말라는 지시가..."
   다른 기사에게 저녁상을 들여다 주고 나가던 종업원의 말이었다.
   " 보소 당신 장사 처음하요 ?."
   옆에서 화투를 치고 있던 한 분이 담배를 꼬나물고 야유조로 물었다.
   " 네, 장사를 요 ?."
   " 그 왜 거지 클럽인가 호롱 말코 클럽인가에 다니시는 오야지를 처음 모시느냐고요 ?"
   " 아 네, 몇 일 전에....."
   강희는 머리를 끍으면서 멋쩍게 웃었다.
   " 그라믄요. 일찌감치 속차리고 나가서 우동이라도 한 그릇 잡숫고 오이소. 그 놈아들은 아마도 불우한 세상 사람들을 돕고 봉사를 하다 보니 돈이 떨어져서 자기 기사 밥사 줄 돈이 없는 기라요."
   그 말에 모두들 화 하고 웃었다.
   그 곳은 부산에서 둘도 없는 최고급 요정인 동래 별장이었다.
   넓은 대기실에는 사장족들의 술 추념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기사들이 한방 가득 들어 앉아 있었다. 한 쪽 그석에서는 화투판이 벌어 졌고, 다른 한쪽 구석에서는 조금 늦게 도착한 패들이 상다리가 무겁도록 불고기에 갖가지 고급 요리와 맥주까지 곁들인 밥상을 받고 있었다.
   요리 집에 가면 손님을 모시고 온 기사에게 식사를 제공해 주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밥을 공짜로 주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러니 웬만한 요정에서는 기사에게 못 가져다 먹여서 안달이었다. 그것은 큰 요정일 수록 더 했다. 그래서 동래 별장에도 타에 지지 않게 기사 대접을 잘 해주는 곳으로도 유명했다. 그런데 유독 xx 회원을 모시고 온 기사에게 밥을 주지 못하게 하니 동료들 보기에 여간 창피하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동래 별장에서만 그런 푸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지구 회원은 어떻게 하는 지 모르지만 동 부산  xx 클럽은 가는 곳마다 그러했다.
   xx 크럽은 전 세계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인류의 봉사 단체로서 먹고 사는 데 별 지장이 없는 사람이면 누구나 회원이 되어 보고 싶을 정도로 권위가 있는 단체였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불우한 인류을 구제하려고 가입한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단지 세계에서도 손꼽히게 알아주는 봉사 단체이므로 남 앞에 자기를 과시하려고 들어온 사람이 아니면 대게 돈은 있어도 연줄이 닿지 않아 해외 나들이를 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강희는 대기실 분위기에는 도저히 어울릴 수가 없어서 화장실에 가는 채 슬그머니 밖으로 나왔다. 거기에 모인 기사들은 한결 같이 듣기 거북한 말투로 자기가 모시고 있는 상사나 사모님들의 헌담을 하지 않으면 바보 같이 스피트를 낸 자랑과 교통순경과 싸운 허풍이 아니면 여자를 고신 이야기들 뿐이었다.
   강희로서는 그들에게 들려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자기하고는 수준이 맞지 않았다.
   그는 3 년간이나 몸 담아 온 해륙실업에서 10 일 간의 면허행정 기간 동안 차를 세워둘 수 없다는 이유로 본의 아니게 권고 사직을 당했다. 표면상으로는 그렇게 되어 있으나 내면으로는 벌써부터 사장님의 눈 밖에 나 있었다.
   그 첫째 이유로는 비서 윤양과의 관계에 대하여 아직도 의심을 버리지 못했고, 또 자리 바꿈을하여 재결합을 한 그들의 관계가 다시 누설 될까 봐 염려스러워서였다. 그보다도 어쩌면 윤양이 강희를 대하기가 민망하여 이 기회에 내 보내라고 종용하였는 지도 몰랐다.
   예로부터 요망한 것이 계집이라고는 하지만 수 많은 종업원을 두고 기업을 경영하는사장님이 그철딱서니 없는 년의 치마폭 속에서 이성을 잃고 헤매는 꼴은 차마 눈 뜨고 볼수는 없었다.
   어쨌든 그는 철없는 남과 여의 사랑 놀음 때문에 실직을 당했다.
   월급쟁이로 해고를 당해보지 안고는 그 비참함과 절망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강희는 고아로 자라 오면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고통과 슬픔을 겪어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별로 당황하지는 않고 살아왔다. 그런데 성인이 되어 가정을 가지고 있는 지금은 전에 없이 실직이라는 것이 그럴 가장 비참하게 했다. 자기 한 몸이라면 최악의 경우 홀연이 이 세상을 떠나면 그 뿐이 겠으나 이제는 그럴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는 아내에게 면허행정 기간이라고 속이고 직장을 구하려 몇 일을 헤매고 다녔다. 그래도 아내는 무슨 행정 기간이 그렇게 기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무슨 눈치라도 채었는 지, 남편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는 것 같았다. 그것이 더욱더 그의 마음을 슬프고 초조하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다시 일자리가 주어졌다.
   양복 한 벌 값을 주고 들어 온 효성 산부안과 병원은 부전 역 앞에 있었다. 정문은 큰 도로와 인접해 있어서 사람의 왕래가 많았으나 건물 옆 골목으로 나 있는 후문은 비교적 한적했다. 30 대 이상의 주부들은 정문으로 진료를 받으려 왔으나 20 대의 젊은 여성들은 후문으로 들락거렸다. 그 수는 정문의 수배가 넘었으며 그들은 대게 미혼 여성들이었다.
   원장은 미남풍의 건장한 사나이로서 치마를 두른 동물이면 누구나 함께 자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 친료를 받으려는 친구를 따라 왔던 극성파 여성들은 다음 날 혼자 건강한 몸을 가지고 와서 원장을 괴롭혔다. 그것은 강희가 직접 보지는 않아서 잘은 모르지만 동료 의사들과 함께 차를 타고 가면서 이야기 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던 것이다.
   원장은 밤에는 대게 그런 환자를 치료하러 호텔이나 가까운 유원지 같은 곳으로 왕진을 다녔다. 그러면 강희는 밤새도록 차를 대기 시켜 두고 원장님의 물리치료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때로는 환자를 자기 집까지 태워다 주기도 하고 호텔에 그냥 버리고 돌아오기도 했다.
   그럴 때면 언제나 원장님은
   " 나 닥터 모임에 갔다고 하게."
   하고, 사모님에게 거짓말을 하게 했다.
   " 네. 염려 마십시요,원장님."
   강희는 그들이 무슨 지랄로 치료를 하건 말건 집으로 돌아 가라는 것이 반가워 얼른 차를 돌려 도망을 쳤다. 언제 마음이 변해서 다시 기디리라고 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원장님은 차를 돌려 보냄으로써 사모님에게 의심을 받아 때로는 상당히 고초를 격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돌아 가라고 하였다가 금방 뒤돌아 와서 기다리라고 하였다. 그때처럼 김 새는 일은 없었다.
   박원장이 소속되어 있는 동 부산 xx 클럽은 일본 시모노세끼 클럽과 자매 결연을 맺고 있었고, 오늘은 그 회원 일부가 친선차 한국 관광을 왔기 때문에 기사에게 저녁을 굶겨 가면서 그들에게 자신들의 권위를 내세우기위하여 일류 요정인 동래 별장에서 소위 말하는 기생파티를 얼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야 그들도 일본 여행을 갔을 때 그런 대우를 받는 지는 모르지만 라면으로 저녁을 때우고 풍악이 들려오는 숲속 바위에 홀로 앉아 있는 강희의 심기는 그리 편치 않았다. 아무리 운전자의 세계이서 사자가 붙은 차주가 짜다고 소문이 나 있기로서니 이럴 수가 있을 까 싶었다.
   다행이 게다짝을 위한 기생 파티는 10 시가 못되어 끝이 났다. 실로 이 곳 어르신네들의 술 추념에 비하면 엄청나게 빨리 끝난 셈이었다.
   일본 손님을 싣고 왔던 관광 버스는 그들을 내려주고 곧 바로 돌아 가고, 갈 때는 이 곳 회원이 타고 온 자가용에 분승하여 숙소로 향했다.
   강희의 차에는 섹스를 위해 술을 적당히 마신 일본 xx 클럽의 회원 둘과 그사이에 한복을 벗어 버리고 다른 옷으로 갈아 입은 기생 둘이 교과서에도 없는 일본 말을 언제 그렇게 배웠는 지 무어라 조잘거리며 노닥거리고 있었다. 앞좌석에 역시 안내 역활을 맡은 박원장이 타고 있었고, 뒤에 앉은 일본 양반들의 손은 기생년들의 젖가슴 속에서 빠져나올 줄을 몰랐다.
   다음 날 동 부산 xx클럽에서는 함안 어느 무의촌에 무료진료를 떠났다.
   회원중 보세공장을 하고 있는 분이 통근 버스 한 대를 내어주어 거기에다 자매 결연의 기념품으로 마을 회관에 걸어 둘 대형 벽시계 하나와 타올 등 여러가지 선물을 가득 싣고 본 역에서 출발을 했다. 회원 대다수가 그 버스에 탔으나 한국의 농촌을 보고 싶다는 일본 회원 세 명과 자기의 볼 일로 좀 늦게 출발을 한 회원 몇 명만이 자기들의 차를 타고 갔다.
   박원장도 환자의 재수술 때문에 예정 시간 30분 늦게 간호원 둘을 데리고 출발을 했으나 강희가 속력을 좀 내는 바람에 도착 시간은 거의 비슷했다.
   자매결연식이 끝나고 조금 쉬었다가 진료가 시작되었다.
   회원 중 병원을 개업하고 있는 사람은 10 명도 넘었으나 무료진료에 참가한 의사는 5 명 뿐이었다. 그래도 다행이 전문 분야가 달라서 진료는 별 불편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몇 일 전에 신문에도 내고 마을에는 미리 연락이 되어 있어서, 심지어 밥을 많이 먹으면 배가 부르고 술을 마시면 소변이 많이 나오는 데 무슨 병이냐고 진찰을 받으려 올 정도로 마을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다.
   밥을 먹으면 배가 부르다는 사람에게는 소화제를 지어 주고, 술을 마시면 변소에 자주 가야 한다는 환자에게는 될 수 있는 대로 따끔하게 아픈 주사를 놓아 주고 약은 마라리아에 먹는 키니네 몇 알을 갈아서 주었다.
   시골 양반들의 속을 훤히 들어다 보고 있는 박사님들이 그들을 빈손으로 돌려 보내지는 않았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약첩을 접는데 많은 인력이 필요했다.의사가 아닌 회원들이 그 일을 맡았다. 관광겸 남편을 따라 온 사모님들은 실크 부라우스를 펄럭이며 환자들의 안내를 맡았고, 접수부에는 몇몇 운전기사도 참석을 했다.
   환자를 따라 온 어린 아이들에게는 미리 준비해 간 과자 한 봉지와 사과 둘을 손에 쥐어 주었다.
   세상에 이 같이 흐뭇하고 보람찬 전경을 적어도 강희는 그가 자가용 운전을 하고 부터 돈 있는 어른들에게 아직 본 적이 없었다.
 
   효성 산부인과 박원장은 고학을 하여 서울 S 의대를 나 온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미동 산꼭대기에서 딸의 집에 얹혀 살고 있는 노모의 말을 들으면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강희가 무의촌 진료를 갔다 온 다음 날 간호원을 태우고 이상한 곳으로 왕진을 간 일이 있었다.
   그 날 원장님은 어디서 걸려온 전화인지 수화기에다 대고 한참 짜증을 부리더니 간호사를 불러 왕진 준비를 시켰다.
   " 미스 문, 내 차를 타고 가서 주사를 좀 놓아 주고 와요. 이 약은 시간 맞추어 드시게 하고."
   " 원장님은 ...?
   " 그래, 혼자 갔다 와요. 난 아무래도 환자 때문에 안 되겠어."
   곧 수술 환자가 오기로 예약이 되어 있다고 했다.
   " 저어 노인이 아무래도 기력이 없을 테니까 혈압부터 재어 보고, 칼슘과 사르부르는 천천히 놓아 줘요. 아주 천천히 . 그리고 참 ! 그 보다도 먼저 포도당을 놓아 주는게 좋겠구만. 지아민을 하나 섞어서 말이야."
   문 간호사는 약병을 가방에 챙겨 넣으면서
   " 그 보다 페리스톤(고영양재)을 한 병 놓아 드리는 게 ...."
   하려다가
   " 네, 알겠습니다."
   하고, 말았다.
   " 그래, 얼른 다녀와요. 그리고 이 기사. 자네 옛날 화장을 아는 가 ?."
   " 아미동에 있었던 곳 말씀 입니까 ?."
   " 그래, 지금 그 앞으로 가면 사람이 나와 있을 걸세."
    과연 옛날 화장막이었던 길목에 남루한 옷차림을 한 중년 여인이 올라오는 차마다 두루 살피고 있었다.
   " 아줌마 안녕하세요 ?."
   간호사는 아는 사람인지 차에서 내리며 먼저 인사를 했다.
   " 아이고 또 아가씨가 왔군요. 그래 오빠는 오늘도...."
   " 네, 수술 환자가 밀려서요."
   " 정말 너무하시는 군요. 모친이 위독하다는 데도."
   " 죄송해요."
   " 아가씨가 죄송할 건 없어요."
   강희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 어리둥절 하기만 했다.
   부산에도 아직 이런 토담이 있었나 싶도록 스레이트 지붕마다 비바람에 부서지고 모스리가 날아 간 낡은 토옥에 그 아주머니는 정말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문간호사의 말나따나 주위의 집들은 모두 돼지우리 같이 지저분 하였으나 그래도 토담 사이사이로 잡초가 욱어져 운치가 있었고, 하늘과 맞닿은 듯 낭만이 있었다. 더욱이 눈 아래로 까마득히 내려다 보이는 송도 앞 바다와 그 옆으로 더 멀리 바라보이는 오륙도 위에는 뭉개구름이 솜처럼 피어 있었다. 푸른 물결 위를 나는 갈매기들은 때마침 구름속에서 나타난 햇빛을 받아 은가루를 뿌린 듯 빤짝이고 있었고, 그것은 마치 공중에서 살포한 삐라와도 같았다.
   아미동의 최고 높은 산꼭대기에 자리 잡은 토옥 속은 지붕이 낮아서 그런지 바깥과는 달리 어둠침침하기 이럴데 없었다. 그 흔해 빠진 비닐 장판 한 번 깔아보지 못한 세멘포대 장판 위에 나이 많은 할머니 한 분이 기진맥진하여 누워 있었다. 뼈에다 가죽만 씌워 놓았는 지 살점이라고는 하나 없는 팔에다 혈압을 재려고 하자
   " 저리 가아. 가만 죽게 저리 가아."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힘 없이 팔을 하우적거렸다.
   " 아이 엄마 왜 또 이러세요. 그렇다고 금방 죽어지나요. 얼른 주사나 맞고 일어 나세요. 그래야 아들을 만날께 아니에요. 엄마가 그토록 못 잊어 하시는 외동 아들 말이에요."
   달래는 건지 비꼬는 건지 딸은 허우적대는 할머니의 팔을 잡았다.  그래서 간호사는 혈압을 재고 주사기를 꽂았다.
   " 나는 죽어야 헌다. 그 놈은 내 자석이 아이다. 내 자석이...."
   주사를 맞는 동안 할머니는 수없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요즘은 아주 죽기로 작정을 하였는 지 미음도 들지 않고 약도 먹지 않는 다고 했다.
   꼬불꼬불한 골목을 돌아 쫍고 긴 돌 계단을 내려오면서 문간호사도 강희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 참 이상하지요 ?."
   " 네,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이....."
   이 한 마디 밖에 주고 받지 않았다.
   문간호사가 효성 산부인과에 들어 올 때만 하더라도 할머니는 아들의 학비를 대주느라고 그 많은 논을 다 팔아 버리고 홀로 시골 움막에서 사셨다고 했다.
   그때 할머니는 지나가는 사람마다 붙들고
   " 우리 효성이가 병원을 채리먼 대리고 갈라 카더라.  그래서 내 이래 안 기다리고 있나."
   하고, 자랑을 했고, 서울에서 어떤 부잣집 딸과 결혼을 하여 병원을 차렸다는 소문이 나돌고 부터는 어쩐지 아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결혼을 했는 지 안 했는 지 어머니에게는 물론 고향의 친구들에게도 아무른 연락이 없었다. 그런데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졌다. 부산 어디서 큰 병원을 차렸는 데 환자가 구름처럼 몰려 들어서 도저히 몸을 뺄 수 없어서 자기의 모친을 모셔가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라고 했다.
   그런 소문이 나고 일 년이 지나도록 아들이 나타나지 않자 할머니는 홀로 지팡이를 짚고 늘 동구 밖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할머니는 이제 실성한 사람처럼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 보소, 야아. 우리 효성이 못 봤능기요 ?."
   하고, 아들의 안부를 물었다.
   온 마을에서는 그 불효막심한 놈을 잡아 요절을 내어야 한다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무렵 무역업을 한다는 떠돌이 장사군한테 속아 시집을 갔다가 오래전에 혼자 몸이 된 딸이 나타나서 그 할머니를 데리고 가버렸다.
   그 후 그 할머니는 외아들의 병원인 효성 산부인과 어느 구석진 병실에 환자 아닌 환자로 입원해 있었다.
   명문의 집안에서 일류 대학을 나온 서울 며느리는 어쩐지 꾀죄죄한 시골 어머니를 절대로 친정에서 사 준 고급 맨션에는 들여 놓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서 아들은 할 수 없이 모친을 병실 모퉁이에 기거하게 했다.
   뒤 늦게 이 사실을 안 딸은 펄쩍 뛰었다.
   원장실 벽에는 각개각층에서 보내 온 수 많은 감사장이 걸려 있었다. 그에 못지 않게 넓고 호화로운 책상 위에는 자개로 수놓은 감사패들이 박원장의 관록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여기저기 얹혀져 있었고 책상 옆으로는 유리곽 속에 우승컵들이 버섯처럼 나란히 줄을 서 있었다.
   " 오빠, 사람의 탈을 쓰고 그럴 수가 있어요. 자기 부모 하나 제대로 모시지 않은 주제에 봉사활동을 해요. 저 감사패는 얼마를 주고 샀죠 ? 거기에 던진 돈을 아깝지도 않던 모양이죠."
   " 야가 미첬나 ? 왜 떠들고 야단이야. 여기가 어디라고."
   " 그래 미첬어요. 그러니 나도 엄마처럼 입원을 시키시죠.  그 학덕 높은 올깨 언니가  그러더군요. 어머니가 정신이 이상한 것 같아서 입원을 시켰다구요."
   " ........"
   " 오빠, 여기가 정신 병원인가요 ? 그렇다면 간판부터 고치셔야죠."
   그 날로 딸은 자기가 살고 있는 아미도 별동내로 어머니를 모시고 갔다.
   딸은 부모 형제를 닮아서 원래는 미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가난에 찌들어 형편없는 몰골이 되었다. 부모님은 오직 외아들의 뒷바라지에만 몰두하여 온 재산을 다 털어 넣었기 때문에 딸은 겨우 국민학교 밖에 나오지 못했다.
  아들이 의과 대학을 졸업할 무렵 집안은 빈털틀리가 되었고, 딸은 결혼 정년기를 넘어 서고 말았다. 그런데 업친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마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인물 하나만 보고 장가를 오겠다는 사람은 모두가 별 볼일 없는 사내들 뿐이었다.
   어머니의 한숨은 날이 갈 수록 더했다. 그래서 보다 못한 딸은 어머니의 근심을 들어주기 위해 아무렇게나 시집을 갔다. 무역업을 한다는 작자가 나중에 보니 장돌뱅이 건달이었다.  그는 끝내 세 살 박이 딸 아이 하나를 아내에게 남겨두고 간다온다 말 한 마디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소식이 없었다.
  어버이 날이 되어도 박원장 내외는 병석에 누우신 노모를 찾아 가 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가슴에는 카네이션 한 송이씩 꽂혀져 있었다. 유치원에 다니는 딸 아이가 꽂아준 것이었다. 중학에 다니는 사내 녀석은 벌써 애비를 닮아 가는 지 새벽 같이 야구방망이를 들고 나간 후 한 나절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강희는 구청 부녀회장으로 있는 사모님과 몇 부녀회원들을 태우고 벌써 두 번째 양로원을 돌고 있었다. 떡과 의류 등 많은 선물을 들고 가는 곳마다 노인들을 극진히 대접하고 위로를 했다. 그러면서도 양로원 보다 시설이 형편 없는 토옥속에 누워 계시는 시어머니에게는 콧배기도 내어 보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강희는 양로원에다 폭신한 카시미론 이불을 내려줄 때 문득 아미동 산꼭대기에서 아직도 두터운 겨울 이불을 덮고 있는 할머니의 생각이 났다.
   ( 차라리 자식이 없었더라면 배신의 슬픔 같은 것을 느끼지 않고 양로원에서 죽는 날까지 채념속에서 조용히 사실텐데 !.)
   강희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차에서 내려 트링크을 열었다. 부녀회원들이 양로원을 들어가 노인들을 위로하고 있는 틈을 이용해서 차에 실린 물건을 한 가지씩 빼냈다.
   여자용 춘추 내의 한 벌과 양말 두 컬레, 그리고 떡과 과자를 조금씩 꺼내어 신문지에다 싸서 스페어 타이야 뒤에다 감추었다. 그러고 나니 또 때국이 질질 흐르는 할머니의 누더기가 마음에 걸렸다.
   ( 에라 모르겠다. 이왕 도둑질을 하는 김에.)
   무엇보다도 부피가 크고 숫자가 적어 한 장만 꺼내어도 금방 들통이 날 것 같아서 여러 번 망설이다가 이윽고 이불보에 손을 넣고 말았다. 정말 도둑질을 하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이 떨렸다. 그는 스페어 타아야의 덮게를 들어 올리고 그 밑에다 신문지를 깔고 카시미롱 이불을 넣었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선물 보따리를 실었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 이까짓 돈으로 처보아야 몇 푼 되지도 않을 텐데, 차라리 도로 넣어두고 내 돈으로 사서 드릴까.)
   그는 여러번 그렇게 망설이면서 트렁크를 열었다 닸았다 하였다. 영 마음이 불안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자기의 몫을 도둑질 당한 양로원 노인들을 생각하니 또 다른 괴로움이 겹쳐왔다. 그래서 도로 제 자리에 넣어 놓으려고 트렁크에다 열쇠를 꼽느데 사모님패들이 세상에서 자기들 보다 착하고 선한 사람은 없다는 듯 스스로 인자한 얼굴이 되어 양로원을 나오고 있었다. 할 수없이 강희는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그런데 실상 따지고 보면 그렇게 지독한 도둑질도 아닌데 다리가 후들거려 악세레타가 잘 밟혀지지 않았다. 그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
   " 미숙 엄마. 우리 이러다가 오늘 다 못돌겠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대강대강 준비해간 물건만 내려주고 인사만 하고 나오자."
   그래서 그런 지는 몰라도 시내에서 구석진 곳에 떨어져 있는 양로원을 네 군데 돌고나서 서면 천우장에 내릴 때까지 부녀회원들의 입에서는 부족품에 대한 말은 없었다.
   병원으로 돌아오니 원장님은 퇴근을 했는 지 외출을 하였는 지 병원에는 없었다. 그래서 강희는 퇴근 시간이 벌써 넘었기 때문에 얼른 차를 넣고 온다 간다는 말 없이 밖으로 나와 버렸다.
   그가 짐을 맡겨둔 병원 옆 구멍가게 쪽으로 막 돌아 서려는 데 등 뒤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는 데 옆 골목에서 난데없이 미란이 방그레 웃는 얼굴로 뛰어 나왔다.
   "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 봐. 휘파람을 다 부시고."
   " 난 또 누구라고."
   " 근데 왜 그리 급하시죠 ? 불러도 모르시고. 누굴 만나려 가는 길인가 봐."
   " 아니야."
   둘은 구멍가게 앞까지 나란히 걸었다.
   " 잠깐 여기 서 있어."
   강희는 얼른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커다란 종이 뭉치를 들고 나왔다.
   " 그게 뭐예요 ?."
   " 응, 어디 좀 전해 주려고. 근데 참 어쩐 일이지 ? 어디 가던 길인가 ?."
   " 아뇨."
   " 그럼 일부려 날 찾아온 거야 ?."
   미란은 말없이 고개만 두어 번 끄덕였다. 힘없이 축 처진 나약한 어깨가 웬지 오늘은 좀 가엾게 보였다. 그래서 강희는 좀 더 독한 마음을 먹고 냉정해지려고 애를 썼다. 그는 언제나 미란의 그런 술수에 넘어가서 절교를 선언했다가도 다시 관계를 이어왔던 것이다.
   " 저 할 말이 있는 데요."
   저 불쌍한 음성에 동정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웬일인지 또 마음이 문어지는 것 같았다.
   " 어떡하지. 난 좀 갈데가 있는 데 ?."
   " 설마 절 따돌리려고 ?."
   " 물론 관계가 끝난 사람끼리 따돌리고 자시고 할 거야 없겠지."
   " 왜 자꾸 끝났다는 소리를 하세요 ? 전 지금 심각해요."
   "네 마음대로 다른 남자품에 안겨 있을 대는 아무렇지도 않다가 ?."
   " 아이 왜 자꾸 있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서..."
   " 그래, 할 말이란 ?."
   " 여기선 할 수 없어요. 참 아까 어디 간다고 하셨죠. 저도 가면 안 되나요 ?."
   그러자 강희는 대뜸
   " 너 물건 잘 깍지 ?."
   " 갑자기 그건 왜요 ?."
   " 깍어, 못 깍어 ?."
   " 저 그런 거 자신 없어요."
   " 그럼 가 봐."
   그러자 미란은 바싹 달라 붙어서 매달리 듯
   " 해 볼께요. 하는 데까지요."
   이럴 때 미란은 매력이 있었다.
   " 그런데 무얼 사려고 그래요 ?."
  " 무얼 사든지. 넌 내가 고른 걸 깍기만 하면 돼."
   둘은 팡짱을 끼고 나란히 걸었다.부전역 옆에 있는 의류가게에서 강희는 미란에게 눈짓을 했다. 값을 깍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미란은 골이 난 얼굴로 강희를 흘키고만 있었다.
   " 왜 그러고 있어 ?."
   " 아저씬 너무 잔인해요."
   " 그건 또 무슨 소리야 ? 시킨 일은 하지 않고. "
   " 그건 언니 옷이 아니에요 ?."
   " 생각하는 거 하고는 !.그래 이것이 젊은 여자가 입을 수 있는 스웨터라고 생각해 ? 이런 회색을 말이야."
   " 그럼 뭐예요 ?."이건 어떤 할머니를 드리려는 거야. 오늘이 어버이 날이라는 건 알고 있겠지. 우리 할머니는 아니지만."
  허리에 고무줄을 넣은 흰 치마 한 벌을 포함해서 부르는 금액의 반을 짤라 5천 원을 주고 스웨타를 샀다.
   둘은 산복 도로로 가는 마이크로 버스를 타고 아미동 산꼭대기에 도착하니 날은 어둑어둑하였으나 딸은 행상을 갔갓는 지그때까지 돌아오지 않았고 할머니만 전등도 켜져 있지 않은 방구석에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기력이 떨어져서인지 잠이라도 들었는 지 눈을 감은 채 그들이 들어가도 아무른 반응이 없었다.
   딸의 것일까. 할머니에게는 별로 어울리지도 않은 노란 계통의 스웨터 앞에는 그래도 종이로 만든 카네이숀 한 송이가 반쯤 찌그러진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강희는 준비해 간 생화 카네이숀을 그 옆에 나란히 달아주고 가지고 온 보따리를 풀어 카시미롱 이불을 꺼내었다. 그것은 대학출신 며느리와 부녀 봉사원이 공동으로 투자하여 구입한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할머니에게 덮어 주고 행여나 잠이 깰세라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미란이 지꾸만 누구냐고 물어도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 우리 여기 좀 앉았다 가요. 어지러워요."
   " 왜, 어디 아픈가 ?."
   " 조금 있으면 나아질 거예요."
   미란은 머리를  강희의 무릎에 기대여왔다.
   그녀는 아예 돌계단에 주저앉아 있었다. 얼굴이 창백한 걸 보니 엄살은 아닌 듯 했다.
   하늘에는 별이 쏟아지고 멀리 눈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송도 앞 바다에는 배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휘황찰란 했다.
   " 강희씨 ?."
   " 왜 그래 ? 갑자기."
   "......."
   " 본래대로 불러. 아저씨라고."
   " 전 어떡하지요 ?."
   " 어떡하다니 ?."
   " 낳고 싶어요 ! 애기를 요."
   " 애기라니 ?."
   " 저 임신했어요."
   " 뭐 ?."
   강희는 미란의 어깨를 잡고 흔들며
   " 지금 뭐라고 했지 ?."
   "........"
   " 말해 봐. 임신이라고 했어 ?."
   " 네."
   미란은 강희의 무릎에 고개를 묻은 채 모기 소리만큼 가늘게 대답했다.
   " 왜 그런 말을 나한테 하지 ?."
   " 그럼 누구한테 그런 말을 해요 ?."
   " 그렇다면 그 애기 아빠가 나란 말인가 ?."
   " ........."
   " 왜 말을 못하지 ?."
   " 삼 개월 째래요."
  " 자신할 수 있느냐고 ? 애기 아빠가 나라고 ?."
   미란은 울고만 있었다.
   " 너무해요. 아저씬 !."
   " 너무하다니. 그 동안 네가 나에게 보여준 행동을 생각해 보구서 하는 소리야 ?."
   " 그 동안은 죄송했어요."
   " 그래. 지금 내게 와 와서 어쩌자는 거야. 내가 너에게 어떻게 해 주기를 바라느냐구 ?."
   "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전 다만 애기를 낳고 싶다는 말만 전해 주고 싶어요."
   " 안 되. 그건 비록 네 뱃속의 아기가 내 것이라도 말이야."
   " 전 낳을 거에요. 무슨 일이 있어도."
   미란은 강희를 잡고 애원을 했다.
   " 의사 선생님이 그러는 데, 이 번에 수술을 하면 다시는 애기를 낳을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잖아요."
   강희에게 애기를 가젔다고 한 말은 이 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의사가 했다는 말을 들으면 그간 소파수수을 받은 경험이 몇 번 있다는 뜻이다.
   ( 다른 남자에게도 이런 짓을.....?.)
   별난 그녀의 기교에 그런 생각이 들때가 가끔 있었다. 그래서 일이 끝난 후 영 기분이 좋지 않아, 다시는 만나지 않으려고 수없이 맹세를 하였지만 지금까지 딱 뿔어지게 관계를 끊어 오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미란에게는 아내 보다 나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녀를 버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남들에게 빼았기고 싶지 않은 소유욕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는 고아로 자라오면서 항상 남들 보다 가난하다는 것을 의식했고 그만치 소유욕이 강했다. 그래서 자기에게 별로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이라도 있으면 가져다 모았고, 그것 때문에 소영과 입 다툼도 했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거지 혼신인지도 몰랐다.
   만약 아내가 배운데 없는 여자라면 서슴치 않고 남편에게
   " 거지 출신은 할 수 없어 !."
   하고 핀잔을 주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남편을 이해하고 오히려 제편에서 먼저 사과를 하고 병적인 버릇을 고쳐주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미란은 그 약점을 이용하여 오히려 그를 고통속에 몰아 넣었다. 그녀는 본의로는 물론 절교를 당한 강희를 다시 사로 잡기 위해 그가 보는 앞에서 다른 남자와 만났고, 그래서 사나이의 질투심을 충동질하여 관심을 끌게 했다.
   " 나 말고도 다른 사람과 관계를 해 온 네가 나를 찾아 왔을 때는 어느 정도 짐작은 했겠지. 그러나 나로서는 그 오염된 아기의 아버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두고 싶어. 그러니 이걸 가지고 다시 병원을 찾아가 봐."
   강희는 지갑을 떨어 미란에게 내밀었다.
   " 싫어요. 전 절대로 그럴 수는 없어요. 이 번에 아기를 지우면 전 영원히 애기를 가질 수 없다 잖아요."
   미란은 빨딱 자리에서 일어나 총총 걸음으로 계단 아래로 넘어질 듯 뛰어 내려갔다.
   " 야 그렇다고 처녀의 몸으로 애기를 낳아 어쩌겠다는 거야 ?."
   " 앞으로 일어 날 일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지금은 오직 낳아야 겠다는 일념 뿐이에요."
   산복도로까지 뛰어 내려온 미란은 계속 달리고 있었다.
   " 야, 이걸 가져가. 이걸 가져가라고."
   돌뿌리에 채여 넘어지려는 미란을 강희는 간신히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미란은 몸을 돌려 사나이의 품에 안겨오며
   " 제발 소원이에요. 오빠한텐 아빠 의 위치를 지켜 달라고는 하지 않을 게요 네."
   " 그럼 무슨 이유로 나를 찾아 왔지 ?."
   " 모르겠어요. 지금은 그것을 후회하고 있어요."
   " 어쨌든 이 돈을 갖고 가. 그렇지 않으면 난 너를 죽일지도 놀라."
   강희의 눈에는 살기가 돌았다.
   미란의 원망스러운 얼굴에 흘러내리는 두 줄기의 눈물이 자꾸만 눈 앞에 어른거려 그는 대학병원 옆 버스 정유소까지 오는 동안 몇 번인가 넘어질 뻔 했다.
   ( 내가 아내 아닌 여인의 배에 아기를 가지게 하다니 !.)
   그는 지금까지도 미란과의 관계에 대하여 뻔뻔스러울 정도로 아내에게는 아무른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처음 그녀와 관계를 가졌을 때는어디까지나 그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동물적인 욕구로 교접을 했을 뿐이라고 뇌까렸고. 그녀에게 애정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 지금에 왔어도 남의 변소에 잠간 실례하는 기분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미란의 몸에 자기의 애기가 자라고 있다니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무엇 보다도 그것이 자기의 씨라고 믿어지지 않았고, 그래서 더욱더 알 수없는 골이 났다.
   " 아저씨 차비 주셔야지요."
   " 응, 그래."
   그러나 아무리 포켓을 뒤저도 동전 한 잎 손에 쥐어지지 않았다. 빈 지갑인 줄 알면서도 그는 또 패스포드를 꺼내어 이리저리 뒤져 보았다. 역시 면허증과 주민등록증 하나만이 들어 있을 뿐이었다.
   차장은 여전히 물러나지 않고 야유가 섞인 매서운 눈길을 강희에게 보내고 있었다. 그것이 보기에 딱했던지 옆에 타고 서 있던 학생풍의 아가씨가 핸드백을 열고 토큰 하나를 꺼내어 차장 앞으로 내밀었다.
   차장은 그것을 받아 
   " 흥."
   하고 돌아섰다.
   " 죄송합니다. 아가씨 !."
   " 아니에요."
   아가씨가 수집어서 자리를 피했는 지 승객에 뜨밀려서인지는 몰라도 둘의 사이에는 어느새 다른 사람이 가로 막고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볼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강희는 그 여학생이 꿈에도 그리던 자기의 누이 동생 순영인 줄 알아 보지 못했고, 순영 또한 수줍어서 토큰 하나로 도움을 준 자기의 친오빠를 똑 바로 처다보지 못했다. 그래서 두 오누이는 같은 방향의 버스 속에서 17년만에 만나 대화 한 마디씩만 주고 받은 채 그대로 헤어졌다.
 
   유달리 내리던 비가 거치자 금방 가을이 왔고 금강원 기슭에 낙엽이 쌓이는가 했더니 어느덧 그 위에 찬 서리가 하얗게 덮혀 있었다. 다가오는 하루하루는 지겹고 허망하여도 뒤돌아 보면 언제 그렇게 많은 날들이 흘러갔나 싶게 세월은 빨랐다.
   지난 초여름 아미동 산복도로에서 헤어진 후 미란으로 부터는 더 이상 소식이 없었다. 종전 같으면 헤어 졌어도 일 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전화질을 해 대던 그녀가 어쩐 일인지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도 영영 소식이 없었다. 이제 정말 그의 수첩에서 강희라는 사나이의 이름을 지워버리기로 작정을 한 것인지. 연락이 닫지 않으면 곧잘 병원앞까지 찾아와서
   " 아저씨."
   하고, 옆 골목에서 튀어나와 퇴근을 하는 강희의 앞 길을 가로 막는 일이 허다 했다. 그도 처음에는 다시 그녀가 나타날까 봐 지래 급을 먹고 병원 뒷문으로 내빼기도 하고, 교환양에게 여자한테 전화가 오면 무조건 없다고만 하라고 부탁까지 해 두었다. 그러나 예상 외로 미란에게서 연락이 없자 그녀를 피하는것이 싱거워졌고, 이제는 응근히 다시 찾아오지 않은 그녀가 야속하고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래서 전에없이 통제구역인 교환실에도 들락거려 보았지만 이렇다 할 정보를 구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껌까지 사다주며 여자한테서 온 전화를 차단해 달라고 부탁을 한 교황양에게 전화가 온데가 없느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싱겁게 나와 버리기가 일쑤였다. 퇴근을 할 때도 행여나 옆 골목에서 뛰어 나오지나 않을 까 하여 다른 곳에 들릴 일이 있어도 일부려 그 골목 앞을 지났고, 그러다가 또 뒤돌아 보기도 하였지만 역시
   " 아저씨."
   하고, 방그레 웃으며 나비처럼 나타나는 미란은 영영 없었다.
 
   그날도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까운을 벗어 던진 원장님이 차에 오르더니 해운대 쪽으로 가자고 했다. 강희는 또 운전 교습을 받으려 가는 줄 알았다. 그러나 자동차가 수영 다리를 건너고 있어도 원장님은 아무 말이 없었다.
   자동차 운전 교습소는 수영다리를 건너자 마자 바로 우측에 있었다. 그 곳을 말없이 통과하는 걸 보면 오늘은 아무래도 운전 교습을 받으려 가는 것이 아니라 열병을 앓고 있는 여성을 물리 치료를 하려가는 모양이었다.
   해가 있을 때 극동호텔에 내리면서 잠간 들어 갔다 나오겠다던 원장님은 밤 10시가 훨씬 지나서야 혼자 나타나 차에 올랐다. 그렇게 비틀거리는 것 같지는 않아도 창문이 닫혀서인지 역겨운 술 냄새가 차안에 확 풍겼다.
   차가 수영비행장 앞을 지나 자동차 교습소가 보이자 원장님은 생각이 난 듯 차를 세우라고 했다.
   " 내 오늘은 운전 연습을 못했단 말이야."
   " 학원은 벌써 문을 닫았는 데요."
   " 그래, 알고 있어."
   원장님은 차에서 내려 운전대 쪽으로 걸어오며
   " 자네는 옆으로 타게."
   " 안 됩니다, 박사님. 무면허자에게 운전을 하게한 자는 벌금 만 원에다 면허행정 10 일입니다. 물론 운전을 한 사람은 형사 입건이고요."
   " 이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자네만 면허증이 있는 줄 아나. 나도 있네. 나도 있어. 자 보라고."
   원장님은 언제 면허증을 땄는 지 안 주머니에서 파란수첩을 꺼내어 강희의 코 앞에다 내밀었다.
   " 그렀습니까. 하지만..."
   " 하지만 뭔가 ? 시장님께서 운전을 해도 좋다는 데, 자네는 안 된다는 건가, 뭔가 ?."
   " 저 오늘은 아무래도 술이 좀....더욱이 밤이라."
   " 웬 잔소리가 그리 많아. 자네가 교통순경인가 ? 되지 못하게."
   원장님은 정말 취했는 지, 병아리운전사라 얕잡아 보느냐고 호통을 치기도 했고. 나중에는 내차로 내가 운전을 하겠다는 데무슨 상관이냐고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그래서 강희는 할 수 없이 차에서 내렸다.
   " 어어이 이 기사 안 타고 뭐하는 거야 ? 설마 잘란 그 목숨이 아까워서 그러구 서 있는 건 아니겠지."
   원장은 강희를 끌어 내다 싶이 하여 운전대에 올라 앉아 조수대 문까지 열어두고 소리쳤다.
   강희는 그렇게 야유를 받으면서도 차마 버스 정유소로 발걸음을 돌리지 못하고 조수대에 올라 앉았다.
   11시가 가까운 수영로는 지나가는 차도 오가는 사람도 없었다.
   원장님은 스타트를 하다가 두 번이나 시동르 껐다.
   " 어이 차가 왜 이래 ?.'
   " 싸이드를..."
   " 이 사람아 평지에서 싸이드를 체우면 어떻게 해."
   그러나 핸드 부레이크를 풀고도 차는 전진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크랏치를 너무 빨리 떼었기 때문에 시동이 꺼진 것이다. 그렇게 몇 번인가 울커대다가 푹 하고 앞으로 나갔다. 차가 일단 전진하자 기아 변속도 순조롭고 속력도 점점 빨라졌다.
   박원장은 정말 신이 났다. 어두운 망망 대해를 헤트라이트 불빛이 쫙 갈라 주었고 그 불빛을 따라 자동차는 기를 쓰고 달렸다.
   " 박사님 제발 속력을 좀 낮추어 주십시요.."
   순식간에 수영 삼 거리가 눈 앞에 다가왔다. 거기에는 제법 많은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뒤엉켰다 사라졌다 하였다.
    " 이 사람아 운전은 운전사한테 맡겨. 무슨 잔소리가 그리 많은가."
   농담인지 핀잔인지, 박원장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차를 몰았다.
   " 박사님 차를 우측으로 붙이셔야지요. 망미동으로 넘어가시려면요."
   " 응, 그래."
   신호대기선이 눈 앞에 다가왔기 때문에 차는 급히 1차선에서 우회전 선에 꺽어 들었다. 그 통에 강희의 어깨가 조수대 문짝에 와서 부딛쳤다.
   " 어어어...'
   만약을 대비해서 강희가 잡고 있었던 핸드부레이크가 절로 당겨졌다. 갑자기 속력이 떨어지자 박원장의 이마가 앞 유리를 박으려다 다시 뒤통수가 시트베개에 와서 부딪쳤다. 강희가 급히 핸드 부레이크를 풀었기 때문이었다.
   한 동안 S자로 요동을 치던 자동차는 간신히 제 진로를 찾았다.
   " 박사님 이제 그만..."
   " 괜찮네 .도로가 넓어서 좋구만 ! 허허."
   원장님은 술이 과한 것인지 실성한 것도 같아서 강희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금방 무슨 일이 일어 날 것 같았다.
   " 박사님 제발 차를 좀 세워 주십시요. 이러다간...."
   " 그 사람 되게 말이 많구만 !."
   차는 어느새 망미도 고개를 오르고 있었다.
   강희는 다시 손으로 핸드 부레이크 레바를 잡았다.
   고개를 넘어서 100M가까운 지점에 버스정유소가 있고 거기엔 막 도착한 버스 한대가 정차해 있었다.
   술 취한 레코드 로얄이 오육 미터를 앞 두고 그 버스 옆을 통과하려는 찰라에 버스에서 내린 승객 한 분이 그 버스 앞을 지나 도로를 횡단하려고 뛰어 나오고 있었다.
   " 스톱, 스톱."
   강희는 있는 힘을 다하여 핸드 브레이크를 잡아 당겼다. 그러나 내리막 길에 내달리는 탈력에 핸드 브레이크는 당기나 마나였다.
   순간 검은 물체가 둔탁하게 앞 반바에 부딪치는 것 같더니 금방 앞 유리가 탁 하고 운전대 안으로 밀려왔다.
   자동차는 사고 지점에서 50M지나서, 그것도 순전히 강희가 잡아 당긴 싸이드 부레이크에 의해 세워졌다.
   " 원장님 사고가 났습니다 . 앞으로 타십시요."
   강희는 원장님을 조수대로 밀어 붙이고 운전대에 올라 앉아 급히 후진을 했다.
   통금에 쫓긴 버스가 떠나 버린 길 바닥에는 피투성이가 된 환자가 내버린 마네킹처럼 나딩굴어져 있었다.
   강희는 얼른 차에서 내려 웅성거리고 서 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가 환자를 들쳐 안았다. 덩치는 그렇게 대단해 보이지는 않은 데 천 근 같이 무거워 혼자서는 도저히 들 수가 없었다. 피투성이가 되어서 그런지 아무도 나서서 도와주지 않았다. 그는 할 수없이 환자를 추술려 안고 질질 끌었다. 그러자 어떤 야간 여학생이 책가방을 땅에 놓아 두고 끌려가는 두 다리를 들어 주었다. 달아나던 아가씨가 되돌아 와서 자동차 문을 열어 두고 발을 동동 굴었다.
   그 때까지 박원장은 찌그려진 앞 유리에 머리를 쥐어 밖고 죽은 듯이 꼼작하지 않고 엎드려 있었다. 연산동 시립병원 앞에 차가 멎자, 그제야 정신이 돌아 왔는 지 황급히 내려 혼자 병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병원 복도는 그믐달 밤의 공동 묘지처럼 음산하고, 어느 제약회사에서 선전용으로 만들어 가져다 놓은 길다란 나무의자는 얼음 속 같이 차가웠다.
   강희는 바지에 배어 든 피가 굳어서인지, 그렇지 않으면 얼어 붙어서인지 옷이 뻣뻣하여 오줌을 싼 것처럼 아주 기분이 찝찝했다.
   " 이 기사. 자네 살기가 딱하지 ?."
   응급실에서 나온 박원장은 덥석 강희의 손을 잡고
   " 자네 살기가 딱하지 않는 가 ?."
   하고, 재차 물었다.
   " 염려 마십시요, 박사님. 운전자의 인적사항은 제가 말씀 드렸습니다."
   " 뭐라구 ? 인적 사항을..."
   원장님은 붙들었던 손을 놓고 절망적인 어조로 물었다.
   " 네. 저의 면허증을 제시해 보였습니다."
   " 뭐 ! 자네가...?."
   강희는 그것이 모두가 사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 정말 잘 했네 ! 내 자네의 은공은 평생 잊지 않겠네. 뒷 수습은 내가 책임지고 할테니까 자네가 대신 고생을 좀 해 주게. 일이 잘만 해결되면 내 자네가 살만치....."
   그 때 병원으로 부터 신고를 받고 달려 온 경찰관 두 명이 급히 응급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대화는 거기서 잠시 중단되었다.
   " 박사님."
   " 응. 그래 ?."
   " 제가 박사님 대신 나선 의도가..."
   그때 응급실 문이 열리면서 경찰관 한 명이 이 편을 걸어 오고 있었다. 그래서 대화는 다시 중단되었다.
  경찰관은 사고를 낸 운전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강희는 말없이 나무의자에서 일어나 경찰관 앞으로 걸어갔다.
   " 당신이 사고를 냈소 ?."
   " 네."
   " 날 따라 오시요."
   동래경찰서 페트롤카가 시동이 걸린 채 병원 현관 앞에 서 있었다.
   " 어서 타라고."
   먼저 경찰관이 운전대에 올라 앉았다.
   " 어디로 가는 거니까 ?."
   " 어디로 가다니 사고를 냈으면 조서를 받아야지."
   경찰관은 이런 일이 처음이냐고 물었다.
   " 네."
   차 안은 히타를 틀어서 그런지 따뜻했다.
   " 아 잠간만..."
   원장님에게 전할 말이 있다고 하니 경찰관은 몇 바퀴 굴러가던 차를 세워 주었다. 그래서 차에서 내려 병원 안으로 뛰어가던 강희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현관에 나와 자기 대신 잡혀가는 기사를 바라보던 원장과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 원장님 저의 집에는 이 일을 알리지 말아 주십시요."
   " 그래. 내 내일 사람을 보내서 자네 부인한테는 적당한 구실을 붙혀 말해 둘테니. 그 점은 염려말고 몸 조심이나 하게."
   차는 동래결찰서를 향해 붉은 불빛을 번떡이면서 떠났다.
   " 어이 너거 사장님 정말 좋은 사람인데 !."
   페트롤카를 운전하고 있는 경찰관의 말이었다.
 
   오늘도 늦는 것일까.
   소영은 교정이 끝난 강희의 원고를 설합 속에 넣어 두고 부엌으로 나가 찌개 냄비를 내려두고 대문 밖으로 나갔다. 어느 때 같으면 남편이 돌아 왔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여태 돌아오지 않은 걸 보면 오늘도 12시를 체울 모양이었다.
   소나무 숲에 부딛치는 바람소리와는 달리 대문 밖에는 겨우 머리카락을 날릴 정도로 약한 바람이 불었다. 그래도 한겨울 밤바람이라 살을 애듯 차가웠다.
   그녀는 돌각담 아래로 꼬불꼬불 하다가 기어이 어둠속으로 묻혀버린 오솔길를 내려다 보며 한참 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그래도 남편은 소나무 가지가 늘어진 바위 옆 길로 올라 오지는 않았다.
   소영은 한숨을 푹 쉬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서 윗목에 놓여 있는 실 바구니를 들고 이부자리가 깔린 아랫목으로 내려왔다. 바구니 안에는 조금만 더 짜면 입을 수 있는 남편의 쪼끼 스웨타가 들어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초가을 어느 날 시장 근방에 있는 수예점 쇼윈드에서 발견하고 하도 색갈이 곱고 감촉이 부드러워 보이기에 남편의 쉐타를 짜주려고 사온 것이었다.
   처음부터 실이 좀 모자랄 것 같았으나 수예점에서 충분하다고 하기에 구입한 것인데, 짜다 보니 역시 자기의 예상대로 팔소매 하나가 조금 모자랐다. 그래서 다시 점포에 가서 말을 했더니 미안하다는 말은 없고, 오히려 이편에서 욕심을 내어 뚜껍게 짰기 때문이라고 했다.
   " 그럼 어쩌지요 ? 주먹만큼 더 있으면 되겠는 데."
   실은 보세공장에서 흘러 나온 것이라 더 이상 없다고 했다. 그래서 소영은 할 수 없이 그것을 디시 풀어서 소매가 없는 쪼기를 짜고 있는 것이다.
   이불 속에 발을 넣고 뜨개질을 하던 그녀는 밤이 깊어서인지 차가운 벽에 등을 기덴 채 깜박 잠이 들었다.
   100M 남짓한 곳에 건너가는 다리를 두고도 남편은 갈대가 듬성듬성 돋아 난 늪지대를 가로질러 차를 몰고 있었다.
   " 안 돼요.여보. 제발 저기로 돌러서...."
  짙은 구름과 억수 같이 퍼붓는 비 때문일까, 벌판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 여보 제발...."
   그러나 순식간에 자동차의 빨간 후미등 불빛마져 물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사방은 칠흑 속에 묻혀 버렸다.
   " 오오 이럴 수가 ? 이럴 수가....."
   빗줄기는 더욱더 거세였고 물은 점점 더 불었다. 그래도 소영은 남편을 애타게 부르며 불빛이 사라진 어둠 속을 달렸다.
   그런데 갑자기 환해지며 앞으로 길다란 자기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뛰던 걸음을 멈추고 반사적으로 획 뒤돌아 보았다. 멀리 신작로에 서 있는 자동차에서 두 줄기 강한 헤드라이트가 그를 향해 비추고 있었다. 그 불빛속으로 누군가가 물을 첨벙이며 이 편을 달려오고 있었다.
   " 아가씨. 소영 아가씨."
   숨을 흘덕이고 팔을 내져으며 달려오는 부관을 소영은 멍청한 얼굴로 뒤돌아 서서 보고만 있었다.
   " 아가씨 가십시다. 어머님이 기다리 십니다."
   " 네, 엄마가요 ?."
   " 그렀습니다. 장군님의 차에서..."
   " 하지만 안 돼요. 전 그이를 찾아야 해요."
   소영은 부관이 잡은 손을 뿌리쳤다. 그러자 부관은 그녀를 강제로 끌고 짚차가 있는 쪽으로 데리고 갔다.
   차 속에는 꿈에도 그리워했던 어머니가 두 손을 합장한 채 눈을 깜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가까이에 와 보니 와락 품에 안기고 싶은 충동은 사라지고 어쩐지 싸늘한 거리감이 왔다.
   " 사모님. 아가씨를 모셔왔습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눈을 뜨지 않았다.
   " 타시지요."
   " 안 돼요. 그일 찾아야 해요."
  소영은 차를 타지 않으려고 팔을 내저었다.
   " 부관."
   " 네, 사모님."
   " 그 애를 얼른 태우게."
   " 네 사모님."
   부관은 소영을 보고 정중히 차 안으로 손짓을 했다. 그래도 소영이 차에 오르지 않고 되돌아 가려고 하자 부관은 운전병과 합세하여 강제로 그 녀를 짚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소영은 달리는 차 속에서 남편의 이름을 부르면서 발버둥치다가 기어이 문을 박차고 바깥으로 몸을 던졌다.  
   " 아아 꿈이었구나 !."
   차에서 떨어지며 놀라 깨어 보니 꿈이었다.
   차가운 벽에 기대어 잠이 든 그녀는 모로 넘어졌다. 어깨가 뻐근하고 팔은 움직일 수없을 정도로 뻣뻣했다. 그러나 소영은 남편과의 슬픈 이별이 현실 아닌 꿈이었기에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그러다가도 꿈 치고는 너무나 괴상한 악몽이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가슴이 뛰고 불안하기 시작했다.
   어디서인가 괘종소리가 은은히 세 번이나 들려왔다. 그 후 그녀는 다시 눈을 붙이지 못한 채 병원에서 사람이 올 때까지 얼마나 대문 밖을 들락거렸는 지 모른다.
   " 네에, 그런 일 같으면 천천히 연락을 하셔도 될 텐데. 정말 죄송해요. 이른 새벽에."
   남편을 어제 밤 갑자기 원장님의 장모가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고 사모님을 태우고 서울로 출장을 갔다고 했다.
   " 실로 저도 그럴려고 했는 데, 원장님이 여러 번 당부하셨어요. 언니가 걱정을 하실테니 통금 해제와 동시에 택시를 타고 가서 연락을 하라구요."
   " 정말 자상하고 고마우신 분이군요 ! 아가씨에겐 미안하지만요. 근데 그건.... ?."
   " 돈이애요. 몇 일이나 걸릴지 모른다고, 그간 생활비에 보태 쓰라고 하던데요."
   간호사는 두툼한 봉투 하나를 내밀고 돌아갔다.
   빨리 가야한다는 간호사 아가씨을 배응하고 돌아 와 소영은 봉투속에 있는 것을 꺼내었다. 5천 원짜리 한 다발이 들어 있었다. 세어 보지 않아도 50만 원은 될 것 같았다.
   소영은 어리둥절하여 어쩔 줄 몰랐다.
   ( 무슨 일일까 ? )
   급료를 받은지도 얼마되지 않았는 데, 추석 명절이 되어도 떡 값은 고사하고 양말 한 쪽 주지 않던 원장님이 아무리 자기 장모님의 병환 때문에 출장을 보냈기로서니 그 많은 돈을 줄 까닭이 없지 않은가. 그녀는 지난 밤의 악몽이 생각 나 자꾸만 불안해졌다.
   삼 일이 지나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병원에서도 더 이상 아무른 연락이 없었다. 그렇다고 남편의 근무처에 전화로 물어 볼 수도 없었다. 아내란 모름지게 어떻한 경우에도 남펴의 직장 일에 관여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또 다시 불안하고 초조한 가운데 이틀 밤이 비몽사몽으로 지나갔다.
   소영은 아무래도 더 이상 가슴만 태우고 있을 수 없어서 이침 일찍 서둘러서 집을 나섰다. 남편의 친구 만길씨의 도움을 청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막 대문을 나서려는 데, 어떤 아가씨가 담 넘으로 기웃거리다 깜짝 놀라며 돌아 서서 머뭇거렸다. 어제 해질 무렵에도 그 아가씨는 그렇게 서성대고 있었다.그 때는 등에 업힌 애기를 잠 재우느라고 그러는 지 몸을 흔들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이 다급한 소영은 그저 이웃에 새로 이사 온 새댁이러니하고 가볍게 목례를 하며 지나치려는 데
   " 저어...."
   하고, 더듬거리며 말을 걸어 왔다.
   " 혹시 이 댁에 이강희씨라는 분이....? "
   " 네, 제가 바로 그 분의 아내되는 사람인데요."
   " 네에, 역시 그렇군요 ! 근데 집에 계시나요 ?."
   서을 출장 중이라고 했다.
   " 네 역시 그랬군요 !."
   " 대관절 무슨 일로 그일 찾으시나요 ?.'
   " 조용히 말씀 드리고 싶은 데요.'
   " 그럼 안으로 들어 오세요.'
   " 이나에요. 언닌 지금 외출중이신가 본데, 저어 제가 묵고 있는 여관으로 잠깐 들려가시면 안 되겠어요 ?."
   " 여관 이라고요 ?."
   " 네 여관요. 바로 요 아래 금강원 입구에 있어요."
   소영은 마치 여우에라도 홀린 것처럼 멍멍한 가슴이 되어 그 여인을 따라갔다.
   여인숙의 구석진 방 아랫목엔 포대기에 싸인 갓난 애기가 잠이 들어 있었다.
   " 누추하지만 잠간 들어 오세요."
 
   소영은 눈 앞이 캄캄했다.
   한참 지나고 나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조금 전 여인이 자기의 입에 물을 먹이고 있었다.
   " 죄송해요. 언니. 어떻게 하던 저 혼자 키워 보려고 했는 데...."
   " 아가씨, 그럴 것 없어요. 그이하고 함께 사세요. 제가 떠나겠어요."
   " 언니, 아니에요."
   " 미안해 할 것 없어요. 어차피 일은 저질러진 거니까요."
   " 아니에요. 저어.....전 사실 강희씨를 사랑하지 않아요."
   " 그럼 새 사람이라도 생겼단 말인가요 ?."
   소영은 언성을 높혔다.
   " 그럼 어째서 사랑하지도 않은 사람의 애기를..... ?."
   "...."
   "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본의에서 든 타이에서 든 지금은 어쩔 수 없잖아요."
   " 전 다른 뜻으로 강희씨를 찾아 온게 아니에요. 조금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처음에는 혼자 키워 보려고 했는 데, 막상 산달이 가까워 집을 나오고 보니...."
   여인은 울고 있었다. 그간 얼마나 고생을 하였던지 아직도 애티가 가시지 않는 얼굴이 누렇게 뜨서 부석부석했다.
   ( 못쓸 사람 ! 철없는 아가씨에게 이처럼 가혹한 고통을 안겨 주고도 뻔뻔스럽게 여태 말 한 마디 없다니.)
   소영은 배신의 분노와 뼈에 사무치는 고독이 밀물처럼 몰려 왔다.
   " 아가씨 저로서는 당장 그 애기를 받을 수가 없군요. 그러니 그이가 돌아오거든 상의해 보세요. 죄송해요. 될 수 있는 대로 하루 속히 돌아오도록 노력해 보겠어요."
   소영은 여인숙을 뛰쳐나오면서 수없이
   " 이럴 수가 ! 이럴 수가 !."
   하고 ,되뇌였다.
   하루 종일 물 한 방울 넘기지 않고 어디를 어떻게 헤매고 다녔는 지. 만길이 아파트로 들어가는 입구 화단에 멍청히 앉아 있는 소영을 발견한 것은 밤 10시가 훨씬 지나서였다.
   " 아니 볼 일이 있으면 관리실에 가서 열쇠를 받아방에 들어가서 기다리지 않고 이 추운 날에...."
   " 아니에요. 우리 그이에 대해서 몇 마디 물어 볼 일이 있어서...."
   소영은 입이 얼었는 지 말이 잘 되지 않았다.
   " 그래도 그렇지요. 어쨌든 들어가서 애기 합시다."
   " 아니에요."
   " 허허 참 !."
   만길은 소영의 등을 떠밀다 싶이 하여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갔다.
   " 그래 이군한테 무슨 일이 있습니까, 재수씨 ?."
   입술이 파랗게 얼어서 소영은 턱을 들들 떨었다.
   " 죄 죄송합니다."
   " 아 !. 잠간 기다리십시요. 내 차를 따끈하게 끓여 오겠습니다. 그리고 우선 이걸 한 잔 마셔 보십시요."
   만길은 먹다 남은 소주 한 잠을 부어서 안주 없이 내밀었다. 소영은 손을 내져었다.
   " 그러지 마시고 한 모금만."
   갑자기 들어대는 바람에 소주 몇 방울이 목구멍으로 넘어 갔다. 빈 속이라 그런지 창자가 찌르르 하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소영은 만길이 맥주잔에다 가득 부어 주는 따끈한 우유를 두어 모금 마시고 나서 한참 있다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만길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 다는 듯 계속
   " 그럴리가 ? 그럴리가 없는 데."
   라고 중얼거렸다.
   " 나에게도 통 그런 눈치를 보이지 않았는 데, 혹시 그 여자가 사람을 잘 못 알고...."
   " 그렇지 않을 거에요. 지금 가만히 생각하니 지난 일 년 간 행동이 좀 이상했어요. 하지만 전 그이가 애정 문제로 저를 속이리라고는 꿈에도 상상 못했어요."
   " 어쨌든 그놈의 입으로 직접 말을 들어 보고 이야기 합시다. 난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일이라 놔서...내가 내일 병원으로 찾아가서 출장이고 나팔이고 다 때리치우고 당장 내려오라고 하지요."
   " 정말 그래 주시겠어요. 그 출장이라는 것도 이상해요."
   소영은 병원에서 돈 50만 원을 보내 왔더라는 말도 했다.
   " 아니 뭐라구요 ? 돈을 50만 원이나 !."
   만길은 여자 문제 보다도 거기에 더 큰 의혹이 갔다.
   " 어쨌든 내가 내일 찾아가서 알아 보겠습니다."
   만길은 혹시 지금 쯤 남편이 돌아와 있을 지도 모르니 집으로 돌아 가겠다는 소영을 붙들지는 않았다.
   다음 날 기사의 아내가 갑자기 위독하여 입원을 하였다는 말에 박원장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 그러니 원장님. 죄송하지만 강희를 좀 내려오게 했으면 좋겠는 데요.'
   박원장은 심히 난처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 원장님도 알고 계시는 지 모르지만 강희는 물론 그의 부인에게도 일가 친척이라고는 없거든요."
   "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떻겠소 ?."
   어느 병원인지는 모르지만 보호자가 없어서 수술을 못한다면 자기가 보증을 서 주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 원장님 단순이 병원에서 필요로 하는 보호자 때문만은 이닙니다. 환자가 남편을 몹시 찾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만약 남편이 부재중에 불행한 일이라도 당한다면 그 원망을 어떻게 감당하시겠습니까 ?.'
   " 정말 난처하군 !."
   " 원장님 원장님의 처가에 강희가 없어서 불편한 점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다 같은 인간의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십시요. 이 편에는 직계 가족의 생사가 걸려 있는 문제입니다."
   " 내가 왜 그걸 모르겠소  일이 이렇게 된 바에야 내 솔직히 애기하리다. 이 기사는 지금 경찰서 유치장에 있소."
   " 네, 유치장에요 ?."
   " 그렇소. 집 사람이 놀랄까 봐 비밀을 지켜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하길래."
   " 물론 인사 사고 겠지요 ? 피해자가 얼마나 다쳤나요 ?."
   "죽었소."
   처음에는 죽지 않아서 빨리 해결이 날 줄 알고 그랬다고 했다.
   " 이거 정말 큰일 났군요. 우리는 그런 줄도 모르고 사실 원장님을 원망까지 하였답니다. 용서 하십시요."
   " 뭘요. 오해를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요.'
   피해자가 젊은 사람인데다 1급 건축기사라 보상금을 어마어마하게 요구해 온다고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자기가 책임지고 해결을 할테니 강희의 아내에게는 계속 비밀을 지켜주면 좋겠다고 했다.
   " 환자의 건강을 위해 당부 드리는 겁니다."
   " 감사합니다. 원장님 ! 정말 감사합니다."
   박원장은 친절하게도기사의 아내가 입원한 병원이 어디냐고 물었다.
   자기가 직접 찾아 가지는 못하더라도 전화로 담당 의사한테 부탁이라도 하고 싶다고 했다.
   " 아닙니다 원장님. 그 일은 염려마십시요. 제가 어떻게 하든 잘 되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효성 산부인과를 물어 나온 만길은 동래 경찰서로 차를 몰았다. 그러나 강희는 경찰서 유치장에는 없었다. 이틀 전에 법원 구치소로 넘어 갔다고 했다.
   만길은 경찰서를 나와 교도소를 향해 달리면서 이상한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모든 것이 박원장의 말대로라면 강희의 집에 그 많은 돈을 보내 줄까닭이 없지 않는가.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종일 교도서 앞에 차를 세워두고 면허를  한 결과 강희의 입에서도 별 신통한 말이 흘러나오지 않았다.그놈의 행동에는 수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으나 말은 억지로라도 박원장과 일치했다.
   그는 자꾸 피해자 측과의 합의가 어떻게 되어가는 것 같더냐고 물었고, 죄를 지은 놈 치고 뻔뻔스러울 정도로 태연했다. 어떻게 보면 자기가 무슨 독립운동 같은 것을 하다가 잡혀와서 앉아 있는 놈 같이 당당하기 까지 했다.
   " 너 눈두덩이 많이 상했구나 ! 사고 때 다친거니 ?."
   처음에는 아니라고 했다가 금방 또 고개를 끄덕이며
   " 응 그래. 핸들에 조금....."
   하고 , 얼버무렸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 입감신고 때 당한 부상이었다. 그런 곳은 처음이라 문지방을 밝고 넘었기 때문에 신고는 배로 가중되어 호된 고통을 당했던 것이다.
   "근데 참 ! 내 너한테 한 가지 물어 볼게 있는데, 깜박 잊을 번 했구나."
   " 물어 볼 말이라니 ?."
   " 너 혹시, 미 뭐라더라 ? 그래 미란이라는 아가씨를 알고 있나 ?."
   " 미란이라고 ?."
   " 그래, 미란. 네가 전에 있었던 회사에 다녔다 더군."
   " 그래서 ?.'
   " 깊은 관계였나 ?."
   " 그건  갑자기 왜 ? "
   " 임마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 한 때 조금......."
   " 나쁜 놈 ! 아니 그런 아내를 두고 네가 감히..."
   "  할 말 없네. 처음에는 그러려고 그런 것은 아니었는 데....."
   " 임신을 한 건 알았냐 ?."
   " 돈을 주었는 데. 병원에 가라고."
   " 나쁜 인간 ! 애기를 업고 왔네. 네 놈의...."
   " 뭐라고 ? 아이를...."
   강희는 뒤로 주춤 물러 나다 다시 가끼이 오며
   " 그래. 여기 함께 왔단 말이야 ?."
   하고, 신음처럼 물었다.
   " 왜, 보고 싶은 가 ? 니놈의 새끼를."
   그 때 간수가 시간이 넘었다고 해서 면회는 그것으로 끝이 났다.
   만길은 다시 차를 돌려 강희의 집으로 달리면서 그의 부인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몰랐다. 박원장의 말대로 계속 비밀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그렇지 않으면 사실대로 이야기를 하고 주어진 운명에 대처해 나갈 준비를 하는 것이 현명한 일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만길은 여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강희의 직장으로 그를 만날 구실을 만들어서 갔다가 엉뚱하게도 그 일을 해결할 장본인이 사고를 내고 영어의 몸이 되었다는 대는 아연하지 않을 수가 없었었다. 이제는 그까짓 여자 하나가 아이를 낳아온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소영은 눈이 뚱뚱 부은 채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 원장님을 만나셨나요 ?."
   거기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만길은 소주 한 병을 사오라고 했다.  그래서 순영이 사 온 것을 연거퍼 두 잔을 마시고 나서  
   " 제수씨. 당분간 그 놈을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 네, 그렇게 심각한가요 ? 그 쪽 일이."
   "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일이 빨리 끝날 것 같지 않아서 마냥 속이고 있을 문제가 이니였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손으로 또 한 잔을 부어 마시고 나서
   " 제수씨 놀라지 마십시요. 그 놈은 지금 큰 집에 들어가 있습니다.'
   " 네, 큰 집이라니요 ?."
   " 사고를 냈다는 군요."
   소영은 얼굴에 핏기를 잃어가며 오들오들 몸을 떨었다. 냉정을 찾으러고 그러는 지 잇빨 깨무는 소리가 뿌드득 들렸다.
   " 너무 걱정 하지 마십시요."
  " 네, 피해자가 죽었다는 데두요 ?."
   " 그런데 석연 찮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두고 보십시요. 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꼭 흑막을 밝히고야 말겠습니다.
   그러면서 만길은 처음 목적한 여자 문제에 대해서는 일언방구 하나 없이 집으로 돌아 가버렸다.
   다음 날 그는 다시 교도소로 강희의 면회를 갔다.
   " 너의 원장님이 운전을 배우려 다닌다더니 면허증을 땄니 ?."
   만길은 흘러버리는 이야기처럼 물었다.
   " 그건 갑자기 왜 ?."
   " 응, 전에 그런 말이 들리기에 물어본 것 뿐이야. 요즘 기사가 없어서 많이 불편하겠구만."
   "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할 줄만 알면 아무한테나 내주는 걸 박사님이라고 못 따라는 법은 없겠지.'
   " 그래. 낸 것이 분명하구나 ! 그런데 말이야. 너도 생각을 좀 달리 해야 겠더라."
   " 그건 또 무슨 소리야 ?."
   " 아무래도 원장님이 합의를 서두러지 않는 것 같아서 말이야."
   그러면서 만길은 슬쩍 강희의 눈치를 살폈다. 분명히 배신의 분노 같은 것이 그의 얼굴에 떠오르고 있었다.
   " 너 의리도 좋고 돈도 좋지만, 의란 그것을 진실로 받아 드리는 데 가치가 있고, 돈을 순리대고 일 원에서 부터 쌓아 올려야문어지지 않는 법이다."
   " 너 오늘 정말 이상한 말만 하는 구나 !."
   강희는 참다 못하여 미란의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사고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쓸 문제가 아니라는 투다.
   " 임마. 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그건 네 놈이 나가서 해결할 문제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풀려날 궁리나 해.'
   " 들어 앉아 있는 놈이 무슨 수로 ?."
   " 이 멍청아, 네 놈이 택한 앞길은 끝없는 수렁이다. 그래도 남의 총대를 매겠다는 거냐, 이 등신아 ?."
  그러자 찌그러진 나무책상의 서랍에 못질을 하고 있던 간수가
   " 어어이 젊은 친구. 핏대만 올리지 말고 말을 좀 크게해. 통 뭤이 들려야지."
   " 네 죄송합니다. 이놈이 자꾸 공초라도 하나 달라기에..."
   만길은 어색한 얼굴로 씩 웃고 나서 또 다시 나지막한 음성으로
   " 어어이 시간 없다. 내 딱 한 가지만 물어 보겠는 데, 네가 한 일이 아니지 ?."
   "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
  " 좋아. 네 놈이 정 입을 열지 않는 다면 다른 방도를 쓰는 수 밖에. 그럼 실컨 고생이나 해라 이 먹통아."
   그러면서 돌아서려는 데
   " 야 제발 조용히 좀 있어 주라 응."
   하고, 애원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래서 만길은 더욱더 심중을 굳히고 다시 병원으로 달려갔다.
   " 여보 젊은 양반. 듣자니까 나에게 보상 문제를 빨리 해결해 주지 않는다고 따지려 온 것 같은 데 ?."
   " 그럼 언제까지 죄 없는 사람을 옥살이 시키겠다는 겁니까 ?."
   만길이도 지지 않고 음성을 높혔다.
   그러자 박원장은 훔짓 놀라는 것 같더니 얼른 태연을 가장하며
   " 아니 죄가 없다니 ? 사람을 치어 죽였는 데도."
   " 물론 치어 죽인 사람이야 죄가 있겠지요.'
   " 그런데 ?."
   " 왜 이러십니까 박사님. 하루를 살아도 의리를 의리로 받아주는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까 ?."
   " 그건 또 무슨 소리요 ?."
   박원장의 이마에는 진땀이 흐르고 있었다. 기사에게 무슨 말을 들었느냐는 눈치다.
   " 바보는 바보답게 입을 다물고 있더군요. 그런데 원장님! 원장님은 그 바보의 충절이 불쌍하지도 않습니까 ?."
   입을 다물고 있더라는 말에 원장은 용기를 얻어 크게 소리를 질렀다.
   " 여보 젊은 친구 ! 당신이야 말로 의리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요. 물론 법적으로 보상 문제는 차주에게 있지만, 그렇다고 나에게 그런 무례한 짓을 할 수 있는 가 말이요 ?."
   박원장은 만길에게 앞으로 한 번만 더 허튼 수작을 하면 명예회손과 공갈 협박 죄로 고발하겠다고 얼음장을 놓았다.
   박원장이 그렇게 세게 나오니 만길은 또 다시 어리둥절 했다.어느 놈이 숫까마귄지 암까마귄지 분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굽실거리거나 사죄를 하지 않고 조근 풀이 꺾인 얼굴로 병원을 나섰다.
   잠시 후 그는 동래 경찰서에 와 있었다. 혹시 거기에서 무슨 단서를 잡을 수 있지 않을 까 해서였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별 하자를 발견하지 못했다. 경찰 조서에는 물론 현장 검증 때도 역시 가해자의 자백과 일치되어 있었다.
   " 젠장 !."
   만길은 몹시 실망한 얼굴로 머리를 갸우둥거리며 조사과를 물러나와 경찰서 마당에 세워둔 자기의 개인택시에 몸을 실었다.
   " 아 잠깐만 !."
   차가 출발을 하려는 데 수사과에서 뛰어나온 신사 한 분이 도어를 열고 그의 옆으로 올라 앉았다.
   " 죄송합니다. 일이 좀 있어서 손님을 모실 수가 없는 데요."
   " 좀 바빠서 그러는 데, 당신 가는데까지만 좀 태워다 주시요."
   " 전 온천장으로 가는 데요."
   " 아 나도 그쪽으로 가는 길이요."
   만길은 강희의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 기사양반 뭐 골치 아픈 일이라도 있소 ? 기분이 좋지 않은 얼굴인데."
   신사는 차창 밖을 내다보며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 아 네, 친구가 교통사고를 냈는데 좀 미심쩍은 데가 있어서..."
   " 미심쩍은 ?..... 그렇다면 교통사고를 가장한 야바위꾼한테....?"
   " 그건 아닙니다. 피해자가 죽었거든요."
   " 그럼....?"
   만길은 무심코 사건의 전말을 투들대며 시부렸다. 신사는 별 뜻이 없다는 듯 가끔가다 고개를 끄덕이더니 원예 고등학교 앞에서 차를 좀 세워달라고 했다.
   형식적으로 꺾은 메타에는 기본요금 그대로였다.
   " 처음부터 영업은 하지 않는 다고 했는데요. 그냥 내리십시요."
   " 그럼 메타는 ?."
   " 손님을 태우고 그것을 꺾지 않으면 메타 불사용으로 걸리는 데요. 벌금에다 차량 행정까지요."
   " 네 그렇군요 ! 그럼 택시에 요금을 줘도 안 받는 것은 위반이 아닙니까 ?."
   " 글쎄요. 법인택시라면 사규에 걸리는지는 모르겠네요."
   손님은 씩 웃고 나서 억지로 돈을 시트에 던져주고 가버렸다.
   이날 밤 만길은 아파트로 배달 된 석간 신문을 보고 기겁을 하고 놀랐다.
   ( 이럴 수가 !  그게 아니였는 데 !.)
   신문에는 대문 짝만한 활자로 < 의리를 악용한 병원장 >이라는 제하의 기사에 사건 전모가 세세히 파해쳐져 있었고, 박원장의 비 인도적 사생활과 기사의 슬픈 과거까지 상세하게 나 있었다.
   만길은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몰랐다. 모든 것이 짐작대로 였지만, 일이 이렇게 엉뚱한 방향으로 터질 줄은 몰랐다. 그가 사건의 내막을 알고자 한 것은 박원장의 약점을 충동질 하여 하루 속히 피해자 측과 합의를 봄으로 해서 강희를 빨리 풀려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놈의 신문기자 때문에 일을 이렇게 망쳐 놓았으니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모두가 한꺼번에 망하는 골이 아닌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