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소설&드라마

어디로 가나 - 이재인作 7부

淸山에 2011. 8. 20.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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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 구름님 블로그에서
http://blog.daum.net/endless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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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가나
 

   " 실례 합니다."
   " 네, 잠깐만요."
   젖꼭지가 달린 우유병을 아기에게 물려 주고 있던 소영은 얼른 일어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벌써 몇 번째 사람들이 찾아왔다 갔는지 모른다.
   " 이 방입니다. 그 기사양반 댁이."
   " 아 그렀습니까. 고맙습니다."
   " 새댁 손님 오셨소."
   " 네. 나가요."
   소영은 좀 짜증스런 음성으로 대답하며 애기를 포대기에 싸서 아랫목에 눕혀두고 방문을 열었다.
   " 누구세요 ?."
   " 댁이 이강희씨의 부인되시는.... ?."
   정복을 입은 경찰관이 정중하게 물었다.
   통장 아저씨의 뒤에는 말쑥하게 차려 입은 신사 한 분이더 서 있었다.
   " 그런데요 ?."
   " 아이고 그렀습니까 ! 이거 걱정이 많으시겠습니다. 서울에서 손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 네에, 서울에서요 ?."
   그러자, 머리를 짧게 깎은 신사분이  앞으로 나서서
   " 아가씨가 황소영씨 입니까 ?."
   " 네, 그런데요 ?."
   " 아버님의 성함은 ?."
   " 황자 창자 우자입니다."
   " 아 틀림 없군요 ! 아가씨 밖에 어머님이 와 계십니다."
   " 네에 ! 어머니가요 ?."
   소영이 부엌문에 기대어 쓰려지려고 하자 통장과 순경이 얼른 부축을 했다.
   그때 밖으로 뛰어 나간 부관이 황여사를 부추겨 대문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 어, 엄마아 !."
   어머니를 향해 맨발로 달려 나가던 소영은 별안간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 어머니의 표정이 싸늘하게비쳐왔기 때문이었다.
    " 어 어머니 !."
   여전히 입술만 파르르 떨 뿐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소영은 멍청한 얼굴이 되어 다시 그자리에 주져앉았다.
   누군가가 떠다 준 물을 조금 마시고 나서 눈을 떠 보니 방 안이었고, 어머니의 품 안이었다. 그녀는 후다닥 놀라 몸을 일으켰다. 
   " 얘야, 영아야 !."
    황여사는 다시 와락 딸을 껴안았다. 그제야 소영은 병아리처럼 어머니의 가슴을 파고 들며 흐느꼈다. 그것을 보고 모두들 눈시울을 붉이며 하나 둘 밖으로 나갔다.
   " 죄송해요. 엄마 !."
   " 그래 괜찮다 !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
   " 엄마 지금은 다만 죄송하다는 말만 들려 줄 수 밖에 없는 저의 처지가 한없이 부끄러워요 ! 엄마 곁을 떠날 때는 그것이 아니었는 데, 그래서 잘 살아 보려고 무척 노력을 했고, 그이도 훌륭한 사람으로 출세를 시켜 떳떳하게 부모님을 찾아 뵈옵고 지난 일을 사죄드리고 싶었는 데, 엄마의 말마따나 세상 일은 그렇게 쉽지가 않았어요. 하늘 아래 둘 뿐인 우리는 어디에도 발 붙일 곳이 없는 때 늦은 철새처럼 외로웠어요 !."
   " 얘야, 우리가 잘 못했다. 네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구나 ! 아버지도 지금은 몹시 후회를 하고 계신단다."
   황여사는 딸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헤맨 후 집을 집을 비운 일이 없었다고 했다. 심지어 남편이 중요 임무를 띠고 외국을 떠나 갈 때나 돌아올 때도 비행장까지 마중을 나간 일이 없었고, 혹 불가피한 일로 집을 비울 때는 언제나 행선지를 알려 주었으며 계속 집으로 문의 전화를 하였다고 했다. 행여나 어머니가 안 계실 때 딸이 돌아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다시 집을 나갈까 봐 염려되어서였다. 그래서 딸이 집을 나간 후 오늘 날까지 대문을 걸어두지 않았던 것이다.
   " 엄마. 전 어쩌면 좋아요 ?."
   " 염려마라. 모든 것은 부관이 알아서 처리해 주실거다. 그 사람이 죄를 짖지 않은 것이 분명한 이상 곧 풀려나겠지. 그러면 내 너희들에게 식을 올려주마."
   " 네 ? 결혼식 말씀이세요. 엄마 ?."
   " 그래. 애기까지 둔 지금에서야 어쩔 수 없지 않으냐. 그렇지 않아도 네가 돌아오기만 하면 식을 올려주고 너희들이 살 집을 오래 전에 네 아버지가 마련해 두었단다.
  " 하지만 결혼은 안 돼요. 엄마."
  " 결혼은 안 되다니. 그건 도 무슨 소리냐 ?."
   소영은 다시 어머니의 품 안으로 파고 들며 흐느꼈다.
   " 얘야 그게 무슨 소리냐 ? 설마 그 사람이 구금 된 사실 때문에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 ?."
   " 그건 아니예요. 그인 죄를 짔지 않았어요 어머니."
   " 그래, 그건 나도 신문을 보아서 알고 있단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결혼을 할 수가 없다니. 이해할수가 없구나."
   " 모든 것이 끝났어요. 엄마. 제가 그이와 함께 있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어 졌어요."
   " 이유가 없다니. 난 도무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구나. 이렇게 애기까지 낳아 두고 말이다."
   " 엄마 그 아이는 제가 낳은 애기가 아니에요."
   그 말에 황여사는 잠시 어리둥절 하더니
   " 네가 방금 뭐라고 하였느냐 ?."
   " 이 애기는 제가 낳은 아기가 아니라고 했어요, 엄마."
   " 응 그래. 그럼 이웃집 아기인게로 구나 ! 난 또 너희들의 애긴 줄 알았지 뭐냐."
   그러면서 황여사는 안고 있던 애기를 슬그머니 도로 자리에 눕혔다. 남의 아이를 자기의 외손주인 줄 알고 귀여워 죽겠다는 듯 얼으면서 안고 있었던 것이 조금은 무안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소영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좋을 지 몰랐다.
   " 그럼 넌 여태 애기가 없었단 말이냐 ?."
  " 네, 멈마. 몇해 전에 자궁외 임신을 하고 부터는요."
   " 그래 그럼 수술을 잘 못 받은 게 아니냐 ?."
   " 모르겠어요."
   " 그렇다면 진찰은 받아 보았느냐 ?."
   " 아니에요. 그이가 별로 애기를 기다리는 것 같지도 않고 기럴 형편도...."
   황여사는 혀를 쯧쯧 차면서 몹시 안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네 얼굴이 말이 아니구나 ! 이제 아무 염려마라. 그만 울음을 그치고."
   황여사는 딸의 여윈 뺨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 주면서 자기의 얼굴에 흘러내리는 눈물은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 네 엄마. 인제는 안 울겠어요."
   그러면서도 소영은 더욱더 흐느꼈다.
   " 그런데 얘야. 아기 엄마는 어디 갔기에 여태 돌아오지 않느냐 ? 이 어린 것을 맡겨두고 말이다."
   황여사는 아무래도 여윈 딸이 마음에 걸려 데리고 나가서 영양 보충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 엄마 이 애기는 엄마가 없어요."
   " 엄마가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 그렇다면 이 아기를 너희들이 고아원에서 데려와 기른단 말인가 ?."
   소영은 잠시 망설이다 사실대로 어머니에게 털어 놓았다.
   두 눈을 깜고 조용히 애를 쓰며 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황여사의 손은 점점 거세게 떨고 있었다.
   " 오늘 아침이었어요. 그이의 면회를 가려고 새로 짜둔 쪼끼를 보자기에 넣고 있는 데, 여관 지배인이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아기를 안겨 왔더군요. 이른 새벽부터 하도 애기 을음소리가 시끄럽게 들리기에 방문을 열어 보았더니 생모는 간곳이 없고, 애기의 머릿맡에 약도가 그려져 있는 쪽지가 놓여 있더라고요."
   " 저런 천벌을 받을 사람이 다 있나 !  그래서 저 애가 네 남편 아이란 말인가 ?."
   " 네, 엄마."
   "가자 !."
   황여사는 윗목에 놓여 있는 핸드백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 났다.
   " 어디로요. 엄마 ?."
   " 어딘 어디야. 서울로 가야지."
   " 하지만 그이에게 말 한 마디 없이 어떻게...."
   " 말은 무슨 놈의 말이냐. 그 놈은 사람도 아니다 !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그런 일을 할 수가 있단 말이냐."
   " 저도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아요. 엄마."
   " 저 아이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느냐 ? 이 못쓸 것아."
   " 그렇지만 엄마. 전 이대로 떠날 수가 없어요. 그러기에는 그동안 살아온 것이 너무나 억울해요. 전 사랑을 위하여 저의 모두를 희생했고, 저의 모두를 바쳤어요. 그이는 한 직장에 오래 있지는 못했습니다. 직업이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느 날 갑자기 실직을 당하곤 하였어요. 그럴 때면 우리는 함게 슬프하지도 못하였습니다. 그이는 항상 저에게 그것을 숨겼습니다. 그래서 제 가슴은 찢어질 듯 아프고 괴로웠어요. 절망을 할 틈도 없었습니다. 그이의 심중에 부담을 더 할까 봐 내색을 하지 못하고 다시 직장을 얻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날들을 고통속에 지새웠는 지 몰라요. 그래도 그 때는 오직 그이의 사랑 하나만을 믿고 하나에서부터 차곡차곡 삶의 터전을 쌓아 왔어요. 먹을 것 먹지 않고 입을 것 입지 않고, 전 오직 그이가 다시 실직의 고통을 맛보지 않게 하기 위하여 힘겨은 적금을 넣었어요. 부끄러운 말이지만 전 지금도 팬티를 두 개나 입고 있어요. 그이의 낡고 구멍난 팬티를 요."
   황여사는 분하고 안쓰러운 얼굴로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 엄마 전 그렇게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도 그이의 건강을 위해 반찬은 남 못지 않게 해 주었어요. 아직 한 번도 찬밥을 준 일이 없구요. 그렇게 저의 모든 날들을 오직 당신의 건강과 즐거움을 위하여 받혀왔는 데, 어쩌면 그이는 저를 이 지경으로 만드셨는 지요."
   일은 자기가 절러 놓고, 어머니에게 하소연을 하는지 항의라도 하는 것인지 소영은 끝없이 울면서 씨부려 댔다.
   생각하면 할 수록 분하고 원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당장 그를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배신당한 분노 보다도 헤어져야 하는 슬픔이 살을 저미는 것 같이 쓰리고 아팠다.
 
   다음 날 저녁 강희는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 어어이 얼른 타지 않고 뭘 두리번 거리고 있어 ? 두부를 먹고 싶어서 그래 ?."
   만길은 교도소  옆 골목에 자기의 개인 택시를 세워두고 강희가 타기를 재촉했다.
   " 이럴 줄 알았으면 내 두부를 한 모 사올 걸 그랬구나. 난 또 네 놈이 무죄석방이라기에...."
   그래도 강희는 들은 채 만 채 여전히 출소자들이 그들 가족과 상면하는 관경을 뒤돌아 보고 있었다.
   "야, 얼른 타아."
   만길은 먼저 차에 올라 히터를 틀어 두고 조수대 문을 열었다. 그러자 강희는 다시 한 번 사방을 살핀 후 택시에 올랐다.
   밤이라도 교도소 정문은 대낮 같이 밝았다.
   " 어어이."
  만길은 차를 몰면서 힐끔 옆눈질을 했다.
   " 너 아무래도 집 사람을 찾고 있는 모양인데, 단념하는 게 좋겠어."
   " 단념.....?."
   " 그래. 잊어버려."
   강희도 어느 정도 짐작은 하였는 지 길게 한숨을 쉬었다.
   " 너에게 무슨 말부터 해야 좋을 지 모르겠구나. 어쨌든 네 부인은 서울로 떠났으니 그리 알아라."
   " 서울로 ?."
   " 그래, 별판을 가린 차가 와서 싣고 갔었지. 네 놈도 그 분의 덕택으로 쉽게 풀려난 줄 알아라. 그렇지 않으면 허위자백과 공무집행 방해가 그리 가벼운 줄 알았더냐. 아기는 우리 집에 데려다 놓았어. 고아원에 보내겠다는 것을  안 되면 내가 키우겠다고 했지. 애비가 걸어 온 형극을 자식에게도 걷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더냐.
   " 아니 그럼 미란이가 애기를 두고 갔단 말인가 ?."
   " 그래. 네 놈의 신세는 네가 꼬질대를 아무데나 잘못 놀린 바람에 낙동강 오리알이 되고 말았어."
   강희는 또 한 번 길게 한숨을 쉬었다. 소영이 자기의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떠났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았고, 미란이 그의 집에 아기를 두고 가버렸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았다.
   몇 일 동안 너무나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밀어 닫쳐와 끝없는 나락으로 곤두박질 치는 기분 뿐이었다. 그것이 비록 꿈이였다 하더라도 그 고통스러운 꿈에서 깨어나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몸은 지쳐 있었다.
   " 어이 어디로 갈까 ?."
   만덕 터널을 넘어서자 만길이 물었다.
   " 어디로 갈꺼냐고 ?."
   " 응,어디로 ?."
   강희는 후딱 놀리며 되물었다.
   " 그래. 어디로 ?."
   " 응, 아무데로나."
   " 아무데로 라니 ?."
   강희는 먼저 집으로 가서 정말 아내가 떠나고 없는 지 확인해 보고도 싶었고, 만길의 아파트에 가서 미란이 버리고 간 애기가 과연 자기를 닮았는 지 확인해 보고도 싶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어디에도 먼저 가 보기가 두려웠다.
   수 많은 날들을 하루도 빼 놓지 않고 반겨주던 아내의 미소가 거기 없을 때, 그 허무함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도 문제였고, 어린 아이의 어느 부분에도 자기의 육신과 닮은 데라고는 없어 과연 그가 제 자식인가가 의심스러울 때 오는 고통을 어떻게 감수해야 할 것인가도 염려스러웠다. 그래서 그는 몇 번이나 자기의 집으로 가자고 했다가
   " 아니, 네 아파트로 가.
   하고, 번복을 했다.
   " 그래 잘 생각을 했어 ! 날아 가버린 빈 새장은 역시 허전하고 서글퍼 보일테니까."
   그러니 자기의 집으로가서 누구의 새인지도 분간할 수 없는 아기 새나 정성껏 기럴 생각이나 하란 말인가.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그 놈이 진짜 자기 자식이었으면 싶었다.
   만길은 강희의 아기 때문에 급히 유모겸 가정부를 구했다. 그래서 그 아주머니는 주방에서 상을 보고 있었고, 만길은 욕실에서 세수를 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게 태어난 갓난 아기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세상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말든 제 알바가 아니라는 듯 따뜻한 아랫목을 차지하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러한 애기를 물끄럼히 내려다 보고 있던 강희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조심스럽게 아기의 곁으로 닥아갔다.
  너무 어려서일까.아무리 아기의 얼굴을 뜯어 보아도 자기를 닮은 데라고는 없었다.
   눈처럼 하얀 융옷소매 속에 감추어져 있는 애기의 손을 꺼내고 있는 강희의 팔은 마치 중풍 들린 사람 같이 떨렸다.
   ' 야 좀 펴봐 .이렇게 이렇게'
   그러나 고사리 같은 아기의 손가락은 펴 놓은 대로 있어 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한 손으로 애기의 손가락을 펴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자기의 것과  대조해 보았다. 역시 닮은 데라고는 없었다.
   실망한 얼굴로 힘없이 아기의 곁을 물러나던 그는 생각난 듯 몸을 돌려 애기의 포대기를 아래로 조심스럽게 걷어 올렸다. 계집 아이라 그런지 발가락은 더욱더 그림처럼 인형처럼 곱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가 바랐던 대로 닮은 데라고는 거기에도 없었다.
   강희는 원망스러운 얼굴로 한참 동안 애기를 내려다 보고 있다가 다시 포대기를 걷어 올렸다. 애기의 발가락은 새끼 발가락에서부터 엄지 발가락까지 원형을 사 분의 일로 깎아 놓은 것 같이 동그스름했다.
   ( 나도 어렸을 때는 이랬는 데 !.)
   고아가 되면서부터 여름에는 신을 신고 다니지 않아서 엄지 다음 발가락이 지금처럼 이렇게 멋대기리 없이 멀쑥하게 길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신을 신지 않았다고 해서 유독 그 발가락만이 콩나물 대가리 같이 자라라는 법이 없지 않는가 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금방 또 실망이 왔다.
   " 야 공주라면 공주님인 줄이나 알 것이지 네 놈처럼 실속없는 불알 두 쪽을 달고 나왔을까 봐 확인해 보는 거냐 ?."
   만길은 타올로 얼굴을 딲고 욕실에서 나오며 놀리느라 그러는 지 야유조로 한 마디 던졌다.
   " 아, 아니 !."
   강희는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훔짓 놀라며 얼른 포대기를 도로 덮어두고 멋쩍게 씩 웃었다.
   " 애기가 참 귀엽게 생겼지 ? 네 놈이 미쳐 날뒬만도 했겠어 ! 아기를 보니 애기 엄마가 얼마나 빼어난 미인이었나 알만도 해. 네 놈을 닮았다면야 저렇게 불란스 인형처럼 예쁠 수야 없지."
   ( 이 놈마저 남의 속을 또 끍어 놓을 작전인가.아기가 나를 닮지 않았다니.)
   강희는 몹시 기분이 언짢았다.
   " 야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라. 세월이 가면 다 해결이 되겠지. 그런데 내 너의 마음이 좀 진정되면 보여 주려고 했는 데. 일이 워낙 급한것 같아서....자 받아 봐."
   만길은 책상 서랍에서 편지 뭉치를 거내어 강희 앞으로 내밀었다.
   아내가 남겨준 편지인 줄 알았으나 그것은 뜻밖에도 순영이 만길에게 띄어 보낸 글이었다.
   " 나도 그것을 보고 허순영씨가 네 동생인 줄을 이제야 알았네 ?."
   " 아니 이럴 수가 !."
 
   오빠, 달은 어디서 뜨서 어디로 지는 겁니까 ?
   눈물을 지우려고 하늘을 쳐보니 조금 전까지 뜨 있던 희미한 그믐달이 보이지 않는 군요. 그러나 손바닥만한 하늘에는 헤아릴 수없는 수 많은 별들이 속세에 두고 온 저의 사연들처럼 무수히 흩어져 있습니다.
   오빠 이룰 수 없는 사랑의 고통을 안고 끝내 이 길을 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저의 심정은 이 세상 무슨 말로도 표현 할 수 없는 슬픔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저는 오빠를 사랑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지금은 비록 오빠를 사랑할 수 없는 몸이 되어 떠나 온 부정한 소녀이지만 그래도 저의 가슴은 찢어질 듯한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오빠 저는 머지 않아 삭발을 하게 됩니다. 한 많고 외로운 세상을 하직하고 싶은 마음은 날이 가면 갈 수록 더하였지만 어느 하늘 아래 살아 계실 저의 오빠를 만나기 전에는 차마 눈을 깜을 수 없었기에 저는 늘 괴로움을 참고 살아 왔습니다.
   오빠 , 저는 오빠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행복하고 호화로운 부잣집 외동딸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오빠가 한 분 있었습니다. 살아 있다면 만길 오빠와 비슷한 년령일 것입니다.
   우리는 강희 오빠가 초등학교 5학년때 헤어젔습니다. 제가 뜻하지 않는 교통사고로 지금의 양아버지 댁으로 실려 오면서부터 고아가 된 우리 두 오누이의 불행은 더욱더 뼈를 저미는 아픔으로 변하였습니다.
   사고를 엄폐하기 위하여 보호자한테 알리지도 않고 몰래 치료를 하다가 저는 급기야 그 집의 수양딸이 되고 말았습니다.비록 수양딸이라고는 하나 저를 향한 양어머니의 정성은 이 세상 어느 누구의 생모 보다 숭고하고, 이루 말할 수 없이 지극하였습니다. 저는 그것이 하도 눈물겨워 슬픔도 괴로움도 내색을 할 수 없이 겉으로는 행복한 채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저의 양아버지는 처음에는 뉘우치는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대하여 주시더니 지금은 제가 아버지의 눈에는 한 여인으로 비치는지 때때로 이상한 열기를 보여 왔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등골에 오싹 전율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양아버지가 피를 나눈 생부가 아니라는 선입감 때문이었는 지는 모르지만 아무리 노력을 하여도 아버지의 정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 무렵 만길 오빠가 저의 집 운전기사로 오셨지요.
   저는 처음 오빠가 고아출신이라는 데 동정이 갔고, 그것이 급기야는 외로운 저의 가슴에 사랑으로 변한 정을 심어 주었습니다.
   제가 대학 2학년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지난 여름 방학 때였지요. 아버지는 한 때 만길 오빠가 근무한적이 있는 신한토건에 많은 사채를 놓고 있었습니다. 신한토건은 여기저기서 많은 자금을 끌어들여 창원공단 부근에 대단위 아파트를 건립하였습니다. 그러나 불황으로 공단에 예상 외로 공장이 들어서지 않아서 아파트는 텅텅 빈 채 분양이 되지 않았지요. 그래서 신한 토건은 자연히 아버지의 손에 들어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도 많은 부채를 안고 인수하였기 때문에 별수 없이 자금 난에 허덕이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래서 아버지는 저를 사업의 재물로 이용하려 하셨습니다.
   " 아버지의 친 자식이 아니라서 일찍 혼사를 서두른다고 생각하지는 마라. 나도 너를 대학원이 아니라 외국 유학까지 시키려고 했단다. 그러나 너도 보다십이 갑자기 아버지의 사업이...."
   우리 모두의 살길은 저 보다 20살이나 더 많은 모 재벌의 장남과 결혼을 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겨우 상처를 한지 3개월이 지났다는 그분에게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과 중학에 다니는 두 아들이 있다는 말은 하지 않고, 모 투자금융의 사장이라는 것과 부산에서 대규모로 건립할 XX빌딩 건립의 결재권을 쥐고 있다는 것만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완강히 거부를 했습니다.
   "아니, 뭐라고 ?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장래를 약속한 놈팡이가 있다고 ?."
   아버지의 얼굴에는 실망과 질투의 불길 같은 것이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아버지의 그 놈팡이라는 말씀이 만길 오빠를 욕하는 거처럼 들리니 말이에요. 그래서 저는 몹시 불꽤한 얼굴을 하였다가 금새 낯을 붉혔답니다.
   오빠, 지금은 다 물거품이 되어 버린 일이지만 저는 그때부터 마음속 깊이 오빠를 저의 배필로 정해 두었습니다. 아버지의 성화가 크면 클 수로 저의 마음은 단단하게 굳어 갔습니다. 전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 보다도 오빠의 처지가 저와 같았기 때문이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가 다 허망한 꿈이 되고 말았습니다. 더욱이 가슴 아픈 소녀의 늬우침은 그토록 삶의 기쁨이요 회망이었던 양모에게 천추의 한을 남긴 일입니다. 그것은 타에 의하여 유린 당하긴 하여도 어머니의 남편에게 몸을 내맡긴 결과가 되었으니, 그 죄를 무엇으로 갚겠읍니까.
   지금에 와서 만길 오빠를 원망하는 건 아닙니다만, 그 날밤 오빠가 저를 강제로 저의 집에 실어다 주지만 않았더라면 저의 신세가 이처럼 비참해지지는 않았는지 모릅니다.
   그날 밤 저는 난생 처음으로 만길 오빠와 정을 나누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나 깨고 보니 도어를 열고 나가는 것은 오빠가 아닌 양아버지였습니다.
   ( 오오 이럴 수가 ! )
   꿈과 현실은 천당과 지옥, 그것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잘못된 꿈 때문에 양부의 탈을 쓴 허사장에게 몸를 바친 꼴이 되었지요.
   오빠, 오빠를 사모한 것은 제편입니다. 그러다가 끝내사랑을 이루지 못한 곳도저의 사정입니다. 그래서 오빠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음은 한이 되오나 오빠를 원망하지는 않아요.
  그런데 꿈도 회망도 멀리 가버린 제가 여태 삶을 버리지 못하고 출가한 것은 천추에 씼지 못할 양모에 대한 속죄를 영혼이 다하는 날까지 부처님께 기도 드리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행여나 뻔뻔스러운 변명처럼 들리거든, 어릴때 헤어진 강희 오빠가 그리워 죽지 못하였노라고 생각하여 주세요. 그러니 오빠, 이 후 행여나 저의 오빠를 만나시거든 외롭고 불쌍한 동생이 한평생 오빠를 그리다가 지쳐 불가에 귀의하였다고 전해 주시옵기 바랍니다.
   오빠, 이런 하소연이라도 띄워 보내지 않고는 도저히 두고 온 속세를 잊을 길 없어 여기 공양드리려오신 보살님 편에 이 글을 보내오니 오빠도 하루 속히저에게 삭발할 날이 오기를 빌어 주시옵기 바랍니다.
 
                                                              - 순영 올림
 
 
 
   그처럼 목메어 그리던 누이 동생을 지척에 두고도 몰랐다니.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강희는 편지를 읽어 내려가면서 수없이 이럴 수가를 연발했다. 뛸듯이 반갑고 또 가슴을 애는 슬픔이 왔다. 그 뒤에는 치가 떨리는 분노가 왔다. 그래서 그는 후다닥 현관 을 향해 뛰었다.
   만길이 도어 앞에서 그를 가로막았다.
   " 어딜 가려고 그래 ?."
   " 죽여야지. 내 손으로 당장 죽이고 말거다."
   강희는 두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 이리로 와 앉아. 그 놈은 벌써 피하고 없네. 오래 전에 사업차 일본인가 어디로 떠난 후 여태 돌아오지 않았다 더군."
   만길이 자기의 흥분을 진정 시키려고 그렇게 둘러대는 줄 알았던지 강희는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당장 무슨 일을 낼 듯이 날뛰었다.
   " 임마 그게 문제가 아니야. 그 보다도 한시 바삐 네 동생을 찾아야 해. 싹발을 하기 전에 말이다."
   편지 내용으로 보아 수도승이 되기 위해 입산을 한 것이 분명하나 주소가 명기 되어 있지 않으니 어느 절간에 있는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둘은 뜬 눈으로 밤을 새운 후 아침을 뜨는 둥 마는 둥 아파트를 나섰다.
   순영이 보내 온 편지의 겉봉에는 대전 우체국의 소인이 찍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쉽게 그녀를 찾을 수 있으리라 낙관을 했다.
   대전 근방의 절간이라면 계룡산의 동학사와 가야산의 수덕사 외에는 여승이 수도하는 사찰이 없기 때문이었다.
    둘은 바로 경부 고속도로를 타고 곧장 대전으로 향했다. 그러나 일 년 내내 눈이라고 구경조차 해보지 않은 부산의 택시가 월동 장비 하나 없이 동학사를 찾아가는 데는 참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추풍령을 넘어서니 눈발이 희끗희끗 내리기 시작했고, 대전 톨케이트를 빠져 나오니 유성으로 해서 동학사로 가는 국도에는 제법 많은 눈이 쌓여 있었다.그것은 산골로 들어가면 갈수록 더 했다. 그래서 죽을 고생을 한 보람도 없이 동학사에는 그들이 찾고 있는 순영은 없었다.
   둘은 눈이 더 쌓여 길이 막히기 전에 서둘러 절간을 물러났다.
   " 내가 좀 할까  몹시 피로해 보이는 군 !."
  " 괜 찮아. 담배나 한 대 붙혀 주게. 스님들 때문에 연기를 참았더니 ..."
   만길은 메기 같은 입을 쩝쩝 다셨다.
  " 정말 미안하네 ! 번번히 네 신세만 지게 되어서."
  " 임마 이게 어디 남의 일이니."
   만길은 한꺼번에 연기를 내 뿜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의 말마따나 이번에는 누구보다도 마음이 절박한 사람은 자신인지도 몰랐다.
   강희는 놈의 고함 소리에 다소 마음이 놓였다. 그래서 그런지 금방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 정말 그 아이가 내 자식일까 ?.)
   그의 아내가 집을 나갔다는 사실 보다도 자기를 닮은 데라고는 없는 아이에만 신경이 쓰였다. 이제 자신이 무엇 때문에 어디로 가고 있는 지 조차 모를 정도로 그의 머리에는 오직 그 생각만이 꽉 차 올랐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 발가락이라도 닮을 거 아이가 !."
   하고, 누구를 나무라 듯 중얼거렸다.
  무의식 중에 < 발가락이 닮았다>는 김동인씨의 소설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문란한 성생활 때문에 거의 생식기능을 잃은 노총각이 나이 많은 처녀에게 장가를가서 애기를 낳았는 데 아무리 보아도 자기의 아이가 아닌 것 같았으나 차마 자기의 생식기능 검사를 해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애기의 몸에서 자기와 닮은 데를 찾아 보았다. 다행하게도 자기의 발가락처럼 애기의 엄지 다음 발가락이 엄지 발가락 보다 길었다. 그것을 내세워 자기의 생식기능을 의심한 친구들에게 누가 묻지도 않은 아내의 부정을 스스로 변명하고 다녔다는 내용이었다.
   만길은 만길 대로 무슨생각에 잠겨 있었던지
   " 어이 너 금방 뭐라켔노 ?."
   하고, 물었다.
   " 아, 아무 것두 ! 바깥 날씨가 차가운 모양이라고 했어."
   그 때 마주지나던 트럭 때문에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던지 만길은 엉뚱하게
   " 물론 찾으면 식을 올려야지."
   라고. 했다.
   그래서 강희는 쓸쓸한 얼굴로 피식 웃기만 했다.
   동학사에서 공암으로 나오니 공주로 해서 예산으로 가는 국도가 눈사태로 두절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차를 돌려 호남 고속도로를 타고 다시 경부 고속도로로 들어 서서 천안으로 향했다. 천안에서 온양으로 하여 수덕사로 가려는 것이다. 그들은 이 방면에 길이 어둡기 때문에 지도를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더 많으 고생을 했다.
   고속도로는 국도와는 달리 그처럼 눈이 많이 오는 데도 별로 쌓여 있지는 않았다. 약품을 뿌려서 그런지, 그렇지 않으면 오가는 차량 때문에 쌓일 틈도 없이 녹아 버렸는 지는 몰라도 철벅거리기만 할 뿐 그렇게 미끄러운 것 같지는 않았다.
   청주에 도착하니 해는 벌써 기울고 있었다. 온 산야에는하얀 눈에 뒤덮혀 있고. 눈은 게속 내리고 있었으나, 온양으로 가는 아스팔트 길은 다행이 차가 굴러간 자리에는 눈이 녹아 있었다. 그러나 국도를 벗어나 지방도로로 들어 서자 택시는 얼음판에 뛰어 든 망아지모양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래서 몇 번이나 위험한 고비를 넘기며 찾아 간 수덕사에도 순영은 와 있지 않았다.
   둘은 몹시 실망한 얼굴로 허탈상태가 되어차가 빙판위를 굴러가면 가는 대로 이리저리 부딪치며 수덕사를 돌아 나왔다.
   만길은 무슨 일이 있도라도 삭발을 하기전에 순영을 찾아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으나 해동을 하기 전에는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 제미 씨팔! 어느 놈이 죽는 꼴을 보고 말라나. 허구헌 날 이래 펄펄거리기만 하니 원 !."
   만길은 그렇게 투들거리며 세차게 윈드 부라쉬를 돌려 댔다. 그는 또 이때처럼 눈이 미워지기는 처음이었다.
   강원도 어느 시골 여관에서 눈이 그치기를 기다리던 그 들은 여비도 떨어지고 눈도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아니하자 이틀 후 부산으로 내려오고 말았다.
   강희는 미란이 두고 간 아기가 있는 만길의 아파트로는 가지 않고 이번에는 자기의 집으로 갔다.
   출입구로 되어 있는 부엌문은 바깥으로 잠겨 진 채 유리에는 뽀얗게 먼지가 앉아 있었다. 그것이 자기가 한 달 전에 살았던 집이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그가 그 곳으로 이사를 온 후 그렇게 쌓여 있는 먼지는 처음 보았다.
   ( 정말 떠났구나 !.)
   슬슬하던 가슴이 어느덧 괴심한 생각으로 변했다.
   그는 소영이 이 세상 천지가 뒤집혀도 자기를 향한 마음만은 변치 않으리라 굳게 믿고 있었던 것처럼, 자신이 어떠한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아내가 자기를 버리고 떠나리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미란과 놀아날 때도 아내에게는 조금도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을 느끼지 않았고, 남의 변소에 잠간 소변을 보고 지나가는 기분으로 일을 치루었던 것이다.
   " 그까짓 일로 집을 떠나다니 !."
   강희는 분노마저 느끼며 그렇게 혼자  투들거리기까지 했다.
   주인 아주머니가 열쇠를 가지고 와서 부엌 문을 따주고 ,사각으로 접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그는 그 속에 아내가 써두고 간 편지라도 들어 있는 줄 알고 얼른 뜯어 보았다. 그 안에는 이외에도 자신의 이름으로 된 통장 두 개만이 들어 있을 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나는 400만 원이 들어 있는 예금 통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두 번만 넣으면 찾을 수 있는 300만 원짜리 적금 통장이었다.
   ( 아니 이러느라고, 그렇게 가난하게....!.)
   강희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비로써 무심코 저지른 행위가 한 여인의 가슴에 얼마나 엄청난 실망을 안겨 주었나를 뉘우치며 벽에다 머리를 쥐어 밖고 통곡을 했다.
 
   밤은 얼마나 깊었을 까.
   손바닥만 하게 쳐다 보이는 파란 하늘을 제외하고는 온통 하얀 눈에 뒤덮인 경내에 산 그림자가 내리는 가 했더니 금방 칠흑 같은 어둠이 왔고, 가끔가다 나무가지를 쓰치고 지나 가던 바람소리도 어느새 조용해 졌다.
   늦 겨울 밤의 절간은 바위 틈으로 흘러 내리는 개울물마저 얼어 붙어서 적막하기 이럴 때 없었다.
   어느새 그믐달이 떴을 까.
   " 보살님, 보살님. 주무시옵니까 ?."
   창호지를 바른 방문에 그림자가 움직이면서 가느다란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머니는 불공을 드리느라 고단하셨던지 벌써부터 코고는 소리가 간혈적으로 들려왔다. 그러나 소영은 어젯 밤 보다 더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을 청하려고 눈을 깜으면 잊어지지 않은 번뇌가 밀물처럼 밀려와 수없이 속으로 관세음보살을 외우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래도 오늘 낮에 만났던 그 행자승이 마음에 걸렸다. 승려가 되려고 수도를 하고 있는 행자답지 않게 그의 앳띤 얼굴에는 너무나 짙은 우수가 서려 있었다.
   " 보살님 주무셔요 ?."
   " 누구세요 ?."
   벽을 향해 모로 누워 염불을 외우며 잠을 청하고 있던 소영은 염주를 돌리던 손으로 뺨 위에 흘러 내리는 눈물을 닦았다.
   " 낮에 왔던 행자이옵니다 보살님."
   " 아 네! 들어 오세요."
   소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밤 늦게 죄송합니다 보살님."
   " 아니에요. 마침 잘 오셨습니다. 하도 잠이 오지 않아서 염불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 네 그랬군요. 행자는 또 보살님이 잠이 드셨으면 어쩌나 하고...."
  " 근데 이 밤중에 어인 일로...?."
   " 용서 하십시요. 아직 수양이 부족해서...."
   " 무슨 말씀을."
   " 죄송합니다 보살님. 한 가지 여쭐 말이 있어서 이처럼 계율을 어기고....나무관세음보살 !."
   " 물어 볼 말씀이라구요 ? "
   " 네, 낮에 총무스님의 심부름을 왔을 때 얼핏 보살님이 가지고 계시는 인형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잠시 이 행자에게 보여 주실 수 없겠습니까 ?."
   " 이 인형 말인가요 ?."
   소영은 흰 수건에 싸서 빽에 넣어 둔 인형을 꺼내보였다.
   " 참 오래전의 것 같군요."
   " 네. 그래요. 초등학교 때 제 짝지한테 선물로 받은 거랍니다.."
   인형을 받아 들고 요리 조리 자세히 들어다 보고 있던 행자는 실망한 얼굴를 하며
   " 역시 여자 친구였겠군요 ?."
   하고,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 아니에요. 남자 친구였어요."
   " 네. 남자친구라고요 ?."
   행자는 다시 인형을 요모조모 살폈다.
   " 근데 한 쪽 팔이..."
   " 네에, 빠지고 없는 것을 받았지요. 그 후 제가 완구점에 가서 다른 인형을 사다가 팔만 빼다 끼웠담니다."
   " 그래서 한 쪽이 조금 짧은 것 같군요."
   그것은 강희가 양아치시절 부평동 개다리 밑에서 홍수를 만났을 때, 왕초란 놈이 보수천에 집어 던져버린 것을 그가 죽음을 무릅쓰고 뛰어 들어가 간신히 건저 온 인형이었다. 그 때 누이 동생의 유품이었던 그 인형은 팔이 하나 달아나고 없었던 것이다.
   행자는 잠시 눈을 감고 나무관세음보살을 외우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 났다.
   " 아 !  잠간만."
  소영은 행자의 옷자락을 붙들고
   " 행자님, 저도 한 가지 물어 볼 말이 있는 데요. 혹시 그 인형을 ....?"
   " 아, 아니에요. 어렸을 때 인형을 좋아 했던 기억은 있지만요."
   행자는 당황한 얼굴을 감추려고 그러는 지 불빛을 등졌다.
   " 근데 인형을 선물 받았던 그 분은 지금도 살아 계시나요 ?."
   " 네에."
   소영은 그렇게 힘없이 대답하고 관세음보살을 외웠다.
   행자는 더 이상 묻지도 않고 떨리는 음성으로 계속 나무관세음보살을 중얼거리며 총총히 사라졌다. 그것은 마치 신음처럼 들렸다.
   소영은 3일 예정이었던 불공을 끝마치지 못하고 부랴부랴 서둘러 내원사를 떠나고 말았다.
   " 아니 왜 또 그러느냐 ?."
   어머니는 고통속에 허득이는 딸의 번뇌를 들어주기 위하여 벌써 여러 날 째 전국 사찰을 찾아 다니며 불공을 드리고 있었다. 그래서 좀 안정을 찾는 가 하였드니 오늘은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낼 듯이 괴로워 했다.
 
   강희는 이제 거의 폐인이 되다 싶이 했다. 자기의 애기가 있는 만길의 아파트에는 가보지도 않고 줄곧 불기없는 빈 방에서 아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끓여온 미음이 아직도 그대로
     네 머리 맡에 있구나
 
     친구야
     제발 오늘은 한 모금이라도 넘겨다오
 
          화자정리 거자필반
 
     사람은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또 다른 만남이 있으니
 
     헤어짐을 슬프하지 말라는 나의 말에
     돌아 눕는 너를 두고
 
     가는 발길 하도 허공을 멤돌아
     눈물을 감추고 다시 찾아왔건만
 
     너는 기어이 모든 한을 뒤에 두고
     저 세상으로 떠나려 하느냐
 
 
   만길은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 있는 강희를 달래고 구슬려서  한 군데 자가용을 소개하여 차를 몰게 하였으나 3 일도 못되어 쫓겨나고 말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머리가 좀 돌았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운전중에도 가끔 마음속에 깊이 쌓여 있던 고민이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 날도 그가 새로 일자리를 옮긴 사장님을 모시고 포항제철까지 갈 때는 아무 일이 없었다. 그런데 오후 늦게 부산으로 돌아오면서 경주 톨케이트를 들어서니 고속 도로가 넓고 장애물이 없어서 그런지 뭇 상념이 안개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특히 미란이 두고 간 아이가 정말 자기의 핏줄일까 하는 의심을 풀길이 없어서 영 마음이 꺼름직 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처음부터 별로 아이를 원치 않았다. 그러나 이왕 일이 이렇게 된 거, 같은 값이면 그것이 자기의 씨였으면도 싶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남자 관계가 복잡한 미란이가 자기의 씨라고 두고 달아났으니 이거야 말로 울며 겨자 먹기가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애기가 계집 아이고 보니 자연히 제 어미를 닮을 확율이 높을 것이고, 그러니 그 아이가 자기의 혈육이라는 것을 증명하기가 여간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제 자식으로 명확하게 판명이 나지 않는 한 일생 동안 우울하게 살지 않으면 안 될 운명이라 생각하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차는 계속 달리고 있었고, 강희의 머리에는 여전히 무수한 잡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 이 봐 이봐. 양산으로 빠지라고."
   " 네에 ?."
   강희는 잠에서 깬 사람처럼 어리둥절 하여 물었다.
   " 이 사람이 왜 이러나 ? 정신 좀 차리게. 속력부터 줄이고."
   강희는 이유를 몰라서 더욱더 허둥댔다. 퇴근을 하기 전에 담당 이사을 만나야 한다고 하면서 눈치껏 밟으라고 하시던 사장님이 왜 갑자기 양산으로 나가자고 하는 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사장님이 하자는 대로 하지 않을 수 없어서 강희는 급히 양산 톨케이트 쪽으로 차 머리를 돌렸다.
   " 저기 저 타이야 방 앞에 좀 세우게."
   차가 멈추기가 무섭게 사장님은 강도라도 만난 것처럼 타이야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디다 전화를 하는지 한참 있다가 나온 사장님은 차를 공터 안으로 세워두고 강희를 좀 나오라고 했다.
   " 열쇠 이리 주게."
   " 네 ?."
   " 혹시 자네 정신 질환을 앓은 일이 있는 가 ?."
   " 네 ?."
   " 아닐세. 열쇠를 이리주고 이 돈을 가지고 버스가 오거든 타고 가게."
   " 네. 버스를 요 ?."
   " 그래. 자네의 집으로. 그리고 내일 이군을 우리 집으로 좀 보내 주게. 나쁜 사람 같으니라고 !."
   사장님은 몹시 화가 난 얼굴이었다.
   ( 무슨 이유 일까. 나에게 잘못이라도 있었단 말인가. 제미 밟으라고 해서 좀 밟은 것 뿐인데.)
   그러나 이유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경주에서 거기까지 오는 동안 수없이 한숨을 쉬면서 < 발가락이라도 닮을 거 아이가 >라고 혼자 중얼거렸기 때문이었다.
   마침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 쓴 시골 택시 한 대가 올라오자 사장님은 자동차 열쇠를 챙겨 넣은 서류봉투를 흔들어 차를 세운 후 급히 도어를 열고 들어 갔다.
  강희는 한참 동안 넋 나간 사람처럼 택시가 사라진 쪽을 멍청히 바라 보고 있다가 이윽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지나가는 시외 버스가 있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이미 사장님이 쥐어주고 간 지폐 두 장은 땅에 떨어져 그와는 반대 방향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 어디로 가나 ?.)
   " 어어이 어디로 가나 ?."
   그는 술 취한 사람처럼 가끔 가다 그렇게 중얼거렸다.
   또 한 차레 구름 같은 먼지가 사정없이 갈 곳 잃은 나그네의 몽둥아리를 에워싸고 지나갔다. 만길의 개인 택시가 지나 가면서 일으킨 먼지였다. 그는 발신인의 이름도 주소도 없는 전보 한 장을 받고 불이나게 내원사로 향해 달리는 중이었다.
   그 놈의 먼지 때문에 강희는 한동안 눈 앞이 캄캄했다.
   너무 많이 걸어 허기가 져서일까.
   몇 바퀴 제자리에서 맴돌던 그는 정말 방향 감각을 잃고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다.
   내원사로 올라가는 양산 국도에서 오던 방향으로 되돌아 걷고 있는 그의 뽀얀 머리위엔 어느새 빨간 석양이 내리고 있었다.
 
 
 
 

 

 
 
 
사 미 승
 
 
   " 스님, 주무시옵니까 ?."
   " 왜 그러느냐 ?."
   " 웬 젊은 보살님이 한사코 큰 스님을 뵙고자 하는 데요."
   " 무슨 일인지 모르겠으나 다음 날 보자고 하여라. 내 몸이 몹시 고단하구나 !."
   " 그렇게 여러 번 일렀는 대도 막무가넨데요."
   하루 종일 꼼짝 않고 부처님께 합장하여 있노라고 비구니가 일렀다.
   " 그래 ! 할 수 없구나. 얼른 안으로 들라 일러라."
   그래서 순영이 비구니를 따라 주지의 방으로 들어가니 정말 몸이 불편한지 큰 스님은 자리에 누운 채 대뜸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 네,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넘어서 왔습니다 스님."
   그 말이 순영의 입에서 떨어지자 큰 스님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며
   " 그럼 너는 이미 속세를 떠나 출가를 하였단 말이냐 ?."
   순영은 말없이 주지스님께 삼배를 드리고 나서
   "이 외로운 중생을 불제자로 인도하여 주소서."
   " 그건 안 될 말이로다. 보아하니 너는 네 자신의 번뇌를 잊고자 산사를 찾아 온 모양인데, 그로인해 수행자의 길을 걷고자 함은 당치도 않아. 그것은 참다운 구도자의 경지로도 극복할 수 있네. "
    " 스님, 지금 제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안 사옵니다. 더욱이 제가 걸어 온 길이 보이지 않는 데, 어찌 돌아가라고만 하시옵니까. 원컨데 부처님의 자비로 눈 먼 이 중생이 앞으로 나아 갈 길을 열어 주서서."
   " 정 너의 결심이 그러하다면 할 수 없는 일이로다. 비구니를 따라 행자의 처소로 가거라."
   이래서 순영은 출가의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행자의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더욱이 불타에 뜻한바 있어 길 떠난 몸이 아니고 보면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내면의 모순과 갈등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불가에서도 초기 불교의 실천 덕목을 정견에 두었는 지도 몰랐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철저한 각성이요, 그 각성을 통해서 자기의 변혁과 인격의 전환에 목적을 두었으며, 그럼으로 자기모순, 즉 번뇌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 집착에서 벗어나야 했다.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집착에 있기 때문이었다.
   승가에서 처음 출가한 행자에게 궂은 일을 많이 시킨다. 그 또한 그들을 부려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견디기 어려운 일을 통해 인욕하고 정진하라는 뜻에서다. 제 몸 하나 다스리지 못하여 집을 나온 사람에게 공허하고 사변적인 이론이란 사실상 무력한 것이다. 그래서 견디기 어려운 일을 통해서 번뇌하는 틈을 주지 않고 또 일을 통해서 새로운 이치를 터득하게 할 뿐 아니라, 그럼으로서 인간이 재구성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순영은 단지 고통을 주기 위하여 비생산적인 일을 시킨다는 것은 참으로 불꽤했으며 불교의 교리에 대하여 비애를 느키기까지 했다.
   그가 행자로서 처음 맡은 일은 채공( 음식을 만드는 중)이었다.
   어느 날 그녀는 절간 뒤에 있는 채소 밭을 뒤지라는 명령과 함께 광에서 꺼낸 꼭갱이 하나를 지급 받았다. 그야 말로 무른 땅에 단 한 번 찍으면 자루가 남아나지 않을 낡은 것이었다. 삼척동자가 아니라 두 척 바보가 생각해도 그것으로 얼어 붙은 땅을 파 헤친다는 것이 불가능 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순영은 아예 밭에는 가보지도 않은 채 겨우내 비워진 김치독을 꺼내어 딱기 시작했다. 대 가족의 부식을 저장했던 것이라 독의 높이가 그의 키와 맞먹었다. 그런 것을 세 개째로 마지막 씻어서 옆으로 옮기려다 산그늘이 내리면서 얼어 붙은 빙판에 미끄러져 독을 안고 넘어졌다. 말할 것도 없이 엉금엉금 기어 일어나 보니 독은 두 쪽으로 갈라져 있었다.
   그 일로 순영은 대중방에 불려가서 호된 추궁을 받았다. 이럴테면 징개에 회부된 것이다. 일부에서는 행자의 돌리를 어겼으니 산문출송(사찰에서 옷을 벗고 쫓겨나는 것 )하여야 한다고 노발대발을 했고, 또 일부에서는 고의로 독을 깬 것이 아니니 자비를 배풀어 용서해야 한다고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문제는 스승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은 데 있었다. 그것이 비록 자신의 판단으로 불자의 가는 길이 아니라 하더라도 행자는 무조건 스승의 가르침에 순종을 해야 한다. 그런데 순영은 케케묵은 제도로 자신을 시험하려 하는 데 모욕마져 느끼고 거기에 반항이라도 하듯 시키지도 않은 엉뚱한 일을 하다 시물을 못 쓰게 만들었으니 무사할리 없었다.
   " 너는 어찌하여 시키지도 않은 독을 닦으려고 하였느냐 ?."
   눈을 감은 채묵묵히 염주를 돌리고만 있던 주지스님이 이윽고 눈을 뜨며 순영에게 물었다.
   " 때가 일러 땅이 녹을 동안 먼저 독을 씻으려고 하였습니다."
   " 그래 !."
   주지승은 자리를 고쳐 앉으며
   " 실수는 네 스승이 했네 ! 자네는 벌써 행자의 경지를 넘어선 것 같으이 !."
   꾸중은 고사하고 큰 스님은 비구니에게 당장 순영을 삭발시켜 중이 되게 했다.
 
   그래서 부랴부랴 의식을 갖추어 삭발을 시작 했으며 그의 멀카락이 마지막으로 땅에 덜어질 무렵 만길이 절간 안으로 뛰어 들었다.
   그렇지만 그 날 만길은 기어이 순영을 불가에서 구해 내지 못했다.  여기에서 구해 내지 못했다고 함은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그의 경우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는 철저한 무신론자였다.
   적어도 이 세상에 신이 있다고 하면 지금 쯤 이 지구상에는 악이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 이 세상에는 선을 배풀고도 고통속을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 이것은 신이 있으면 병신이거나 믿어 보았자 별 볼일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이것을 두고 신의 추종자들은 선을 배푼자는 죽어서 극락이나 천당에 간다는 감은이설로 변명을 게을리 하지 않는 다. 그러면 또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대로, 악한자는 악한대로 부정하개 끍어 뫃은 재물로 시주를 하거나 헌납을하여 죽어서 까지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냐.
   만길은 순영이 출가를 한 이유가 자신의 번뇌를 잊고자 함이라든가, 해탈을 하여 불행한 중생을 구하고자 함이 아니라 단지 양어머니에 대한 속죄에 있다고는 하나, 사람이 일단 믿음에 빠지면 최면술에 걸린 것처럼 헤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를 환속 시키지 못한 안타까움은 비할 길이 없었다.
   그가 발신인의 주소도 이름도 없는 전보를 받고 순영을 찾으려 내원사로 달려 갔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그가 절간 아래에 택시를 버리고 숨을 헐뜩이며 경내에 뛰어 올라 갔을 때 순영의 머리카락은 마지막으로 비구니의 면도날에 짤려 당에 떨어지고 있었다.
   만길은 풀썩 땅바닥에 주저 앉았다. 집을 나설 때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순영을 데려 올 자신이 있었는 데 그녀의 머리카락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 그리고 또 그의 사늘한 눈길과 마주친 순간, 틀렸구나 하는 절망과 가슴을 섬뜩하게 하는 무엇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 어쩌면 사람이 저처럼 변할 수가 있을 까 ?.)
   그때 그는 자기의 지론을 의심했다. 신의 조화가 아니고서야 멀정한 사람의 얼굴이 저처럼 웃음과 귀여움과 온화함은 간 곳이 없고, 돌부처처럼 싸늘한 차가움만 있을 까.
   벌써 부처의 경지에 도달이라도 했단 말인가.
   만길은 굳게 가젔던 마음을 하나도 행동에 옮기지 못한 채 귀신에 쫓긴 사람처럼 허둥지둥 절간을 물러났다.
 
     어둠은 아직도
     숲 속에 차지 않았는 데
     돌뿌리는 어찌하여
     내 발가락을 멍들게 하는 가.
 
     뜻두고 찾아 온
     이 몸은
     할 말을 잃고 떠나는 데
     냇물아 너는 무슨 사연이 많아
     앞서거니 뒷서거니 그리 조잘 대느냐.
 
   아아 세상은 왜 이다지도 뜻대로 되지 않는가. 쫓아가면 달아나고, 쫓아 오지 않으면 섭섭하고, 그래서 다시 쫓아 가면 엉뚱하게 저편에서 달아나 버리는 것이 인생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인생이란 삶 자체가 영원히 행복을 추구할 수 없는 고통이란 말인가.
   만길은 전보를 받아 쥐고 집을 나설 때는 정말 자신이 만만했다. 순영이 비록 삭발을 하고 중이 되었다 하더라도 기꺼이 자기를 따라 나설 줄 알았다.
   그 첫째 이유로는 수많은 사찰를 두고 하필이면 자기가 살고 있는 부산과 가까운 내원사를 출가 본사로 택한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무의식중에 구원의 손길이 쉽게 뻗어올 것을 기대하였기 때문이었으리라.
   둘째로는 평소에 그를 너무나 따랐고 인생의 반려자가 되어 달라고 애원하다 싶이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게 중이 되었다고, 비록 말은 걸어보지 않았지만 사람을 모르는 채 하다니. 그는 이제 배신이라도 당한 듯 분노마져 느꼈다.
   만길은 산사를 헐씬 벗어나서야 차츰 제 정신이 돌아왔고, 그렇게 정신이 돌아오자 괘심한 생각이 더 들었다.
   ( 좋다. 두고 보아라, 나에게 생명이 있는 한 너를 꼭 내 것으로 만들겠다.)
   만길은 복수하는 마음으로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순영을 불가에서 끌어낼 결심을 했다
   그러나 인간의 뜻이 좀처럼 바라는 곳에 머물러 주지 않듯 그 후 순영은 늘 구름 저편에서 만길의 가슴을 애태우게 했고, 한 사나이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 찻잔을 내어 가도록 하여라. "
   " 네, 큰 스님 ?."
   연심( 순영의 법명 )은 어리둥절하여 큰 스님을 쳐다 보았다. 근엄한 얼굴로 눈을 감은 채 열심히 염주 꾸러미만 돌리고 있었다.
   " 왜 그러고 있느냐. 이제는 귀까지 멀었단 말이냐 ?.'
   " 네, 스님 !."
   연심은 얼른 찻잔을 받혀 들고 어찌할 줄을 몰랐다.
   차가 잘못 다려졌단 말인가. 뒷말에 가시가 잇는 듯 하여 차를 거부하는 큰 스님의 심경을 헤아릴 수 가 없었다.
   차를 싫어하는 선승이야 없겠지만 이 곳 큰 스님은 다른 선승처럼 차를 마시는 데는 까다로운 격식을 두지 않았으나 차를 다리는 데는 온 정성을 쏟게 했고, 그것을 남달리 좋아 했다. 그래서 연심은 하루 일과 중 그것에 제일 많이 신경을 썼다.
   다로에는 아직도 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연심은 다시 바위틈에서 흘러 대나무 사이를 타고 흐르는 찬물을 길러와서 정성껏 다구를 씻고 물을 긇였다. 불이 사서 그런지 다관에서는 금방 솥바람 소리가 들리고 힘차게 김이 뿜어 올랐다.
   연심은 정성껏 찻잔과 차관을 뜨거운 물에 가셔낸 다음 끓는 물을 70도 정도로 알맞게 식혀 차를 넣은  차관에 물을 붓고 뚜껑을 닫았다. 그래서 2분 쯤 우려서 잣잔에 따랐다.
   녹황색이 감도는 찻잔에는 맑고 은은한 향기가 나는 김이 가늘게 피어 오르고 있었다.
 연심은 소리나지 않게 뚜껑를 닫고 조심스럽게 차반을 받혀들고 다시 큰 스님의 방문을 열었다.
   큰 스님은 아직도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염주꾸러미를 돌리고 있었다.
   " 큰 스님, 차를 드소서."
   " 왜 이다지도 성가시게 하느냐. 차는 개울에 버리고 얼른 떠날 차비를 하도록 하여라."
   " 네, 떠나다니요 ?."
   " 나무관세음보살."
   " 큰 스님. 제 잘못을 뉘우치지 못한 미거한 소승을 깨우처 주소서."
   " 너는 빛을 잃었어 ! 차에 향기가 없음은 네 마음이 흐려져 있음이 아니겠는 가. 수행자가 빛을 잃으면 그 둘래에까지도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게 되느니라."
   "........"
   " 왜 그러고 있느냐 ?  날이 어둡기 전에 얼른 떠날 차비를 서두러지 않고."
   죄인처럼 엎드려 합장하고 있던 연심은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 뒤돌아 보아라."
   " 네 ?."
   " 네가 갈 길이 보이느냐고 물었다."
   " 하오면....?."
   " 그래. 지금도 네가 돌아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는 않겠지 ?."
   " 정녕 산문출송( 사찰에서 옷을 벗고 쫓겨나는 일 ) 하라는 분부시옵니까 ?."
   " 애초에 이루지 못할 뜻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변혁하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
   " 아니옵니다, 큰 스님. 앞으로 더욱더 열심히 정진하겠아오니 잠시 부처님을 소흘이 한 소승을 용서하여 주소서."
   " 네 귀에는 지금 무엇이 들리느냐 ?."
   큰 스님은 대뜸 그렇게 물었다.
   " 네 ?."
   " 무엇이 들리냐고 물었다."
   " 소슬바람 소리만....."
   " 자세히 들어 보도록 하여라."
   " 그것 밖에는 달리....."
   " 그래. 그럼 얼른 떠날 차비를 하여라. 내 한 번 더 너를 두고 보겠다."
   연심( 순영의 법명 )은 가까스로 산문출송을 면하여 길을 떠났다.
   그가 청성산의 깊은 산중에 있는 암자로 길을 떠날 때는 아무도 몰랐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큰 스님은 연심을 사찰 후문으로해서 오솔길로 빠져 나가게 했다.
   " 네 정녕 불도에 뜻이 있다면 암자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듣고 보지도 않아야 하느니라."
   그것을 몇 번이나 강조하며 홀로 전송을 해 주었다. 그리고 또 큰 스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 내 궂이 너를 떠나 보내려는 것은 네 존재에 대하여 자각을 하라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홀로 있는 것이 필요 해."
   " 하오면 쉬히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아옵니까 ?."
   " 외부와의 잡음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훨씬 자기 내심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겠느냐. 그래서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응시 함으로써 지헤로운 변혁을 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열반이 아니겠느냐."
 
   바랑은 어찌 이다지도 무거운가. 든 것이라고는 몇 권의 불경책과 자질구래한 세면도구 뿐인데.
   산은 넘고 넘어도 암자는 보이지 않았다.
   길을 잘못 든 것일까.
   연심은 허기진 몸을 바위 위에 올려 놓고 한숨 대신 " 나무관세음보살 "을 외웠다.
   바위 아래로 개울물이 유유히 흐르는 데, 어디서인가 낙수물 소리가 산골짜기를 진동했다.
   물이 너무 맑아서일까. 돌바닥이 훤히 들어다 보이는 냇물 속에는 고기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 아아 어찌 이끼 한 점 없단 말인가.
   그러다 연심은 갑자기 맑은 냇물 위에 유령처럼 나타난 그림자를 발견하고 얼른 검정 고무신을 신은 발을 거두었다.
   " 나무관세음보살 . 나무관세음보살."
   연심은 일그러진 자기의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일어 나려다 도포자락을 밝고 다시 바위 위에 주져앉았다.
   눈을 감으니 봇물 터지 듯 억압되었던 뭇 상념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그러나 아무리 손에 쥔 염주 꾸러미를 빨리 돌려도 번뇌의 물결은 멈추어 주지 않았다.
   시간은 얼마를 흘렀는 지 어느덧 바위위에 합장하고 앉아 있는 사미승의 머리 위에 빤짝이던 햇빛도 사라지고 어두운 산그림자가 내리고 있었다.
   " 내 한 눈을 팔지 말라고 그렇세 일렀거늘, 너는 어찌하여 여태 그러고 있느냐. 썩 일어나 길을 떠나지 못할까."
   " 네. 큰 스님 !."
   사미승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라곤 칠흑 같은 어둠 뿐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수 조차 없었다.
   "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부처님 모쪼록 빛을 주소서. 소승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 미련한 놈 ! 눈이 어두우면 귀로 가면 되지 않느냐."
   " 네, 귀로 가다니요 ?."
   " 네 귀에 지금 무엇이 들리느냐 ?."
   " 바위 틈으로 흐르는 냇물 소리와 산등성이를 스치는 솔바람소리 뿐이옵니다."
   " 그래. 그럼 네 앞으로 흐르는 냇물이 네 허허로운 마음을 씼어 주더냐 ?."
   "......"
   " 왜 대답이 없느냐 ?."
   " 하오면 산등성이의 솔바람이 소승의 가슴을....?."
   " 왜 그리도 말이 많으냐."
   큰 스님은 앉아서 염불을 할 작전이냐고 꾸짓었다.
   사미승은 바랑을 어깨에 걸고 다시 솔바람 소리가 나는 산등성을 향해 길을 떠났다.
   아직도 연심의 마음이 흐려 있기 때문일 까.
 바람소리가 나는 산 봉우리를 향해 아무리 기어 오르고 올라도 정작 바람소리는 가까운 듯 멀리서 들려왔다. 이거야 말로 구름 잡는 격이 아닐 수 없었다.
   사미승은 벌써 몇 번째 재를 넘고 산을 넘었는 지 모른다.
   귀신에 홀린 듯 바람소리를 쫓아 어두운 숲을 헤치고 산마루에 오르니 하늘은 넓고 별빛은 밝았으나 갈기갈기 찢어진 장삼 자락을 펄럭이는 산 바람은 사미승의 허허로운 가슴을 달래 주지는 못했다.
 
   밤이 얼마나 깊었을 까.
   사미승은 하체에 몹시 아픈 통증을 느끼고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딘가.
   낮고 어두운 천정엔 세월에 그을린 석가래가 들잔불이 일렁이는 대로 구렁이처럼 꿈틀그렸고, 흙벽 통나무 기웅에는 싸리나무 껍질을 엮어 만든 망태기 하나가 떵그란히 걸려 있었다.
   " 어머나 !."
   사미승은 후다닥 몸을 우추렸다.
   누군가가 그를 등지고 그의 하체를 내려다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아 이제야 정신이 좀 드나 보군요."
   돌아 앉는 걸 보니 장발을 한 노인이었다. 손에는 약초를 짓이겨서 산 삼배수건을 들고 있었다.
   " 아 그대로 누워 계십시요, 스님."
   그렇지 않아도 자제력으로는 도저히 일어 나 앉을 수 없어, 간신히 장삼자락으로 옷매무세만 여미었다.
   " 어쩌다 이렇게 몸을 상하셨소. 가씨에 끍힌 상처도 상처지만 왼 발목이 몹시 삐었군요."
   그러면서 노인은 다시 돌아 앉아 상처에 약을 발라 주고 발목에도 지왕을 찌어 수건으로 동여 매어 주었다.
   " 처사님. 혹시 조개암이라는 암자를 알고 계시는 지요 ?."
   " 조개암이라구요 ?."
   " 네."
   " 조개암은 한 등 넘어 있소만...."
   " 그럼 죄송합니다만 소승을 좀 일으켜 주십시요."
   " 아니 됩니다, 스님. 이런 몸으로는 도저히. 이 한밤중에...."
   더욱이 그 암자에는 지금 아무도 기거하지 않는 다고 했다.
   " 아무 염려하지 마시고 몸조리나 하세요, 스님."
   노인은 약 그릇을 챙겨 싸리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어떻게 해야하나 . 큰 스님은 암자에 도착하기 전에는 절대로 한 눈을 팔지 말라고 하였는 데. 승복을 입고 산중 속가에 누워 있다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짓인가.
   사미승은 " 나무관세음보살"을 외우며 다시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몸은 조금도 움직여 주지 않았고, 몹시 아픈 통증만 왔다.
   문풍지가 울고 어디서인가 솔바람소리가 쏴 하고 들려왔다.
   바람소리를 따라 가라고 하셨는 데. 그러나 여전히 일어 설 수가 없었다. 그래도 연심은 몇 번인가 일어 나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제풀에 지쳐 잠이 들었다.
   한참 후, 부엌으로 나간 노인이 미음을 끓여와도 사미승은 눈을 뜨지 않았다.
   " 스님, 몸이 몹시 허하옵니다. 이 미음을 좀 드소서."
   장삼자락을 잡고 흔들어도 눈을 뜨지 못하자 노인은 할수 없이 미음을 떠서 사미승의 입에 부었다.
   무의식 중에서일까. 노인은 마치 손주나 아기에게 암죽을 먹이 듯 미음을 뜬 숫가락을 자기의 입에 넣어 조금 빨고 나서 호호 분 후에 연심의 입에 부어 넣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 지. 미음 그릇이 조금 줄어 들었을 때 사미승은 희멀건 눈을 떴다.
   " 이제 기력이 좀 드시는 지요 ?."
   연심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몸둘바를 몰라했다.
   " 그런데 여기는 어디옵니까 ?."
   " 예. 요 아래 서넷 가호 사는 한덤이라는 마을이 있지요."
   " 그럼 여기에는 처사님 홀로....? "
   " 예. 약초나 케며 죄 많은 여생을 보내고 있다오."
   노인은 길게 한숨을 쉬었고 연심은 누운 채 염주꾸러미를 더듬어 잡고 돌리며 " 나무관세음보살 "를 외웠다.
   " 스님은 어인 일로 이 밤중에...."
   사미승은 내원사에 출가를 해서 수도를 하다가 조개암으로 발령를 받아가는 도중 길을 잘못 들었노라고 했다.
   " 그 빈 절간에 스님 홀로 어찌 감당하시려고...."
   노인은 난감한 얼굴로 혀를 껄껄 차며 먹다 남은 미음 그릇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어디 멀리서 새벽 종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사미승은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금방 제자리에 모로 쓰러졌다. 삔 말목이 체중을 자탱해 주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날은 언세 밝았는 지 비틀어진 문틈으로 서너 줄기 햇빛이 창살처럼 방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노인은 없고 , 곁에서 잔 흔적도 없었다. 벽에 걸려 있던 망태기도 보이지 않고 그 자리에는 나뭇가지에 끍혀 군데군데 찢어진 그의 바랑이 걸려 있었다.
   어디로 간 것일까.
   사리문 옆에는 갓 준비한 듯한 누릎나무 지팡이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연심은 그것을 짚고 바깥으로 나왔다.
   먼 계곡 아래에는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고, 건너 숲 속에서는 길 잃은 새 한 마리가 간헐적으로 울어 댔다. 웬일인지 바위틈으로 흘러내리는 물소리도 적막하게 들리고 가끔가다 장삼자락을 펄럭이게 하는 바람마져도 어찌할바 를 몰라해 하는 사미승을 허허롭게 했다.
   "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노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약초라도 케려간 것일까.그래서 연심은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어 후일 다시 들려 인사를 드리기로 하고 길을 떠났다.
   암자는 노인의 말마따나 한 등 넘어 멀지 않는 곳에 잇었으나 산이 험하고 길이 쫍아 지팡이를 짚고가기에는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큰 스님은 거기에 대해서 아무련 언급이 없었으나 노인은 분명히 암자에는 아무도 기거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방금 안에서 사람이라도 나올 듯이  앞뒤 뜰이 깨끗이 비질이 되어 있었고, 법당으로 올라 가는 돌계단 좌우에도 풀을 뽑은 흔적이 있었다.
   지나가던 등산객이나 불제자가 청소라도 한 것일까.
   사미승은 절간을 향해 합장을 한 후 법당으로 들어갔다.  역시 오래 비워둔 것 같지 않게 법당 안에도 깨끗이 정돈이 되어 있었다. 큰 부처 앞 좌우에는 금방  불이 꺼진 촛대 두 개가 나란히 서 있고, 그 바로 옆에 향과 초 봉지가 몇 개 포게어져 있었다.   
   사미승은 우선 예불을 놀리기 위해 부엌으로 나갔다.
   " 어쩌면 !."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커다란 가마솥 옆에는 누가 가져다 놓은 것인지 누더기를 기워 만든 전대에 쌀이 반 넘게 들어 있었고, 싹다리 ( 마른 나무가지 )가 부엌을 마주한 구석진 곳에 가득 채워져 있었다. 지나가던 길손이나 등산객이 두고 간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게 많은 불량이었다.
   ( 그새 큰 스님이 사람은 보내셨단 말인가 ?.)
   그러나 큰 스님이 보낸 사람은 한나절이 훨씬 지나서야 도착을 했다.
   연심은 이상한 예감이 들어 이튿 날 아픈 다리를 끌고 초막으로 내려갔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연심은 할 수 없이 사리문을 열었다. 역시 방 안에도 노인은 없었다.  토방구석에 놓여 있던 궤짝도 보이지 않고 처마 밑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약초 봉지도 간 곳이 없다.
   "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사미승은 부엌으로 가 보았다.
   방금 떼어낸 듯 냄비가 걸을린 자욱이 새까만 부엌 아궁이에서는 아직도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 아니 !  이건 ?."
   연심은 타다 남은 사진 한 장을 집어 들고 이상한 얼굴을 했다.윗 부분이 새까맣게 타버린 자동차 옆으로는 주름치마를 입은 여자 아이와 바짓가랭이만 보이는 남자 아이. 그리고 어른들은 구두만 보였고, 사진 귀퉁이에는 멀리 가득 쌓인 목재가 보였다.
   < x  3 4 5> 그것은 앞 부분이 타버려서 잘 보이지 않고 뒷 부분만 남은 찦차의 번호였다. 자세히 보니 재가 되다만 희미한 앞 부분이 2 자로 짙게 말여 있었다. 아버지의 차 번호가 2345 였다. 그것을 지금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가 막 유치원에 들어갔을 때 오빠가 우리집 자동차 번호인 2345도 쓸 줄 모르냐고 핀찬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 노인이 누구길래 아버지의 자동차 번호가 있는 사진을 태우고 떠났을 까 ?
   ( 외 삼촌 ?.)
   그렇다. 외 삼촌이 분명했다.
   어제 밤에는 등불이 희미해서 잘 보지는 못했지만 ( 사실 자세히 모았더라도 지금은 외 삼촌을 알아볼 수도 없지만 ) 목이 쉰듯한 특이한 음성은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였고,연심의 출생지를 묻고 아버지의 죽음과 외 삼촌 때문에 파산이 되어 천애 고아가 되었다는 것과 두 오누이가 헤어지게 된 이야기를 듣고 돌아 앉아 괴로워하시던 모습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그렇다면 그때부터 외 삼촌은 이미 연심이 자기의 조카임을 알아 본 것이 틀림 없었다. 그래서 지금은 속죄하는 심정으로 자기의 전 재산인 쌀을 털어 절간에 두고 떠났으리라.
   천륜을 버리고 얻은 재물이 오래 가지는 않았던지 그렇지 않으면 그로인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스스로 고행의 길을 택했든가. 부도 빈도 기쁨도 슬픔도 지나고 보면 모두가 다 허무인 것을 !.
   "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그 무렵 만길은 거의 매일 순영( 연심)을 만나려고 내원사를 찾았으나 사찰측의거절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 이미 출가한 사람을 잡고 새삼스럽게 무엇을 어떻게 하겟다는 거요. 젊이의 말마따나 잚은이가 그처럼 연심을 아꼈다면 그롸의 해후가 그의 수행에 보탬이 될 수는 없는 게아니겠소."
   " 스님, 저희들의 처지러서는 지금 그의 수행이 문제가 아니옵니다. 불교의 실천 덕목이 제도에 있다면 어찌 한 중생의 소원을 이다지도 외면 하시옵니까."
   " 때를 기다리시오. 나로서는 지금 이 단계에 연심은 만나게 할 수는 없소. 그가 개안을 한 후 제 스스로 사물을 판단할 수 있을 때를 말이오
   " 그 때가 언제이옵니까 ? 스님."
   " 그건 나도 모르오. 연심 자신 밖엔."
   " 스님, 제발 한 번만이라도 연심을 만나게 하여 주소서. 이제는 그를 환속시켜 달라고 떼를 쓰지는 않겠습니다."
   " 그것이 진심이라면 아무래도 그냥 돌아 가는 게 좋겠구려."
   만길은 오늘도 할 수 없이 절간을 뒤로 해서 경내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산 중턱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행여 뒷뜰에 나온 순영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 까 해서였다. 그러나 아무리 원망스러운 얼굴로 눈을 딲고 내려다 보아도 경내엔 승복을 입은 사람 하나 나타나지 않고, 산 그림자는 오늘도 어김없이 만길의 가슴을 저미게만 했다.
   " 아아 저기...."
   저녁 공양이라도 짓는 것일까.
   토담 꿀둑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하더니 승복을 입은 여승 한분이 부엌 쪽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순영인지 분간 하기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만길은 바위 아래로 뛰어 내리며 무의식 중에 소리 내어 순영을 불었다.
   어느 등산객이 여자 친구의 이름이라도 부르는 줄 알았을 까. " 순영아 "라는 메아리가 되돌아 오기 전 장작개비를 안은 여승은 어디로인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 후 그는 매일 사찰 주위를 맴돌며 순영을 불렀으나 역시 대답은 없고, 절간을 찾아 온 사람들은 미친 놈으로 일소해 버렸다. 아무도 그의 애타는 심정을 알려고도, 그리고 또 알아주지도 않았다.
   이제 너무나 지쳐서 일까.
   그처럼 미친 개처럼 울부짓으며 순영의 이름을 부르던 그도 한동안 어디로 사라졌는 지 조용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승려들이 기거하는 별채와 마주한 헛간에서 불꽃이 치솓았다.
   평소에 재을 뫃아두는 한 쪽 구석을 재외하고는 절에서 사용하는 자질구레한 기구들을 보관하는 창고여서 인명 피해는 없었으나 칠흑 같이 어두운 산정에 불꽃은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
   " 미련한 놈 ! 내 때를 기다리라고 그렇게도 일렀거늘 어찌 이다지도 무엄한 짓을 저지른단 말인가."
   토담 넘으로 불을 끄느라 물통을 들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승려들을 하나하나 눈이 뚫어지게 살피고 있던 만길은 어깨에 지팡이를 맞고 뒤로 벌렁 나자빠 졌다.
   " 스님, 지은 죄는 달게 받겠습니다. 하오나 벌을 내리기 전 부처님의 자비로 단 한 번만이라도 연심을 만나게 하여 주소서."
   만길은 이슬이 함북 젖은 풀밭에 꿇어 앉아 두 손을 비비면서 애원을 했다.
   " 그 일이라면 조용히 떠나게."
   " 네, 또 그냥 이대로 말씀이옵니까 ?."
   " 네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느냐."
   " 하오면...."
   " 벌써 떠났네. "
   " 네, 어디로 말씀 입니가 ?."
   " 그건 나도 모른다네."
   " 스님 분명히 말씀해 주십시요. 다른 절간이옵니까. 그렇지 않으면 환속이옵니까 ?."
   " 나무관세음보살.나무관세음보살."
   힐긋 불꽃이 비친 스님의 이마에 허망한 그림자가 지나갔다.
   " 스님, 그대로 돌아 가시면 어떡합니까 ? 연심의 스승이신 스님께서 그의 행방을 모르신다 하심은....재발."
   " 딱하기는 나도 마찬가지라네. 좀 더 때를 기다려 보게나."
      순영의 스승은 정말 그의 행방을 모르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깨닭인지 주지스님이 몰래 조개암으로 보내 버렸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