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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 바이블 《解前史》 필진의 이념적 성향

淸山에 2011. 8. 13. 13:39

 

  

  

  

 

 

 

 

운동권 바이블 《解前史》 필진의 이념적 성향
 
 
 歷史담당 교사 '左傾化 메커니즘' 해부 (3)
金泌材    
 
 

 
 
 ■《解前史》의 역사인식 및 筆陣이 속한 단체의 理念的 성향
 
 1) 역사인식:《解前史》는 1979년 10월 발행된 1권을 시작으로 지난 10년 간 임헌영(남민전 사건 연루자), 김남식(남파간첩 출신), 박현채(빨치산 출신 경제학자), 장상환(크리스찬아카데미사건 연루자) 등의 인사들이 필진으로 참여, 지금까지 모두 6권으로 완결됐다.
 
 저자들의 경력이 입증이라도 하듯《解前史》는 8.15를 단순한 일제로부터의 해방으로 보지 않는다. 이들은 좌파적 민중사관에 입각해 8.15가 민중이 주체가 될 수 있는 해방의 기회였던 것은 분명하나 민족 지도부의 역량 부족으로 미군정하에 들어가는 것을 피하지 못했다고 보았다. 미군정에 대한 필진들의 시각도 그 이전의 연구와는 매우 다른 견해를 보였다.
 
 이들은 미군정이 해방군으로서의 역할보다는 이데올로기적 이해관계 때문에 한반도의 분단을 묵인한 책임당사자로 보고 있다. 또한 한반도 상황에 대한 미군정의 몰이해로 일제 잔존 세력이 재등장해 친일 청산이라는 식민역사의 정리가 불가능해졌다는게 해전사의 주장이다.
 
 분단과 6.25전쟁의 책임에 대해서도《解前史》는 이승만과 미군정에 그 책임을 돌렸다. 이승만의 성공한 농지개혁에 대해서도 지주제를 온존(溫存)시키고 영세농민만 만들었다고 폄하했다.《解前史》의 필진들은 또 이승만이 개인적 탐욕으로 분단에 앞장섰고 장기집권으로 민중의 심판을 받았다는 식으로 기술했다.(세계일보 인터넷판 2006년 2월9일자 보도 참고)
 
 《解前史》의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이명박 정부들어 새로 발간된 6종의 고교한국사 교과서의 역사인식과 정확히 그 궤를 함께 하고 있다. 이념적으로 편향된 역사서임에도 불구하고 정규 교과과정에서 전혀 배우지 못했던 역사가 서술되어 있다는 장점 때문에 80~90년대 대학가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解前史》발간이후 젊은이들이 폭발적인 관심을 보이자 정치권이 견제를 하기도 했다. 1985년 11월 정부는 격화되는 학원가의 좌경화가 8.15 이후의 현대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에 원인이 있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은 “일부 대학생들이 8.15 이후의 현대사를 독재-부정선거-장기집권 등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보고 기성세대를 불신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역사가 야사-비사-소문에 의해 오염되고 흥미 위주로 왜곡되는 것도 사회혼란의 근본 요인이 되고 있으니 현대사를 시대별-정권별로 재정립하는 일이 추진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解前史》는 1987년 제3권이, 1989년에는 4~6권이 출간됐다. 70~80년대 10년 동안 해전사는 젊은이들과 함께 하며 이들을 좌경화의 길로 내몰았다.《解前史》는 지금까지 50만∼60만권 정도 판매됐는데, 이 가운데 1권이 40만 권 가량 팔렸다.
 
 2)《解前史》의 주요 필진이 속한 단체
 
 《解前史》의 주요필진은 상당수의 인원이 공안사건 연루자 및 좌파성향 인사들로 채워져 있다. 단체로는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 이하 민문연) 출신의 인사들이 가장 많았다. 민문연은《解前史》필진 가운데 한 사람인 임종국(역사학자, 친일문제 전문가)의 장례식장에 모인 사람들이 그의 자료를 물려받은 것을 계기로 시작됐다.
 
 민문연은 명목상 친일청산을 주장하는 민간단체이나 실제로는 친일 문제를 통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폄훼하고 건국 및 산업화 주도세력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주장을 해왔다. 이 단체는 ▲국보법 폐지연대 참여단체로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 ▲노무현 탄핵 무효운동 ▲광우병대책회의 등에 참여해왔다.
 
 민문연의 사상적 편향성은 이 단체의 주요 활동인 친일인명사전(이하 사전)편찬에서 확인된다. 단체가 2008년 4월29일 편찬한 사전의 경우 좌파의 친일은 덮어주고 그렇지 않은 이들의 친일은 침소봉대(針小棒大)하는 방식을 취했다. 일례로 사전은 일제 말기 징병을 권유하는 글까지 썼던 여운형을 친일파 명단에서 뺐다. 반면 1905년 11월 ‘시일야방성대곡’과 함께 애국계몽운동을 벌였던 장지연은 1916년 일본총독 부임을 환영하는 넉 줄짜리 한시(漢詩)를 썼다는 이유로 친일파에 포함시켰다. 민문연은 또 박정희 대통령을 만주군관학교를 나와 보병중위로 복무했다는 이유로 친일파에 포함시켰다.
 
 반면 일본 장교 출신인 高宗의 손자 이우(李鍝)는 친일파에서 배제시켰다. 이우는 일본육사를 나와 육군 중좌(중령)까지 지낸 인물로 33세 때 히로시마에서 원자 폭탄에 피폭되어 병원에서 사망했다. 언론학자인 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는 좌파들이 박정희의 친일을 운운하는 데 대해 “국가정통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친일 문제를 정치적 무기로 삼고 있다”면서 “마음에 안 맞는 이들의 친일에는 현미경을 들이대고, 그렇지 않은 이들의 친일은 무시한다”고 비판한다. 그는 또 “당시를 살아보지도 않고 이들이 이데올로기로 상대를 재단하며, 점점 더 친일파에 가혹해진다”면서 좌파 주도의 친일청산이 역사왜곡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解前史》주요 필진 리스트
 
▲김남식(金南植): 충남 논산 출생으로 본명은 김동만(金東滿, 2005년 사망)이다.《解前史》 제5권 집필에 참여한 이종석 前 통일부장관의 스승으로 알려져 왔다. 6.25전쟁 당시 월북(越北)했다 1963년 간첩으로 남파된 후 당시 방첩부대(現기무사)에 검거됐던 인물이다. 이후 對共수사에 협조하는 조건으로 기소유예처분을 받고 풀려났으나, 1980년대 후반 들어 親北的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의 주장 가운데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金日成 수령을 영원한 수령으로 모시는 조건에서 선군(先軍)정치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2004년 7월9일 통일뉴스 ‘북한의 영생(永生) 10년의 이해를 위하여’), “(북한) 주체(主體)의 사회주의는 무엇보다도 사람을 귀중히 여긴다.”(2004년 「우리민족이야기」), “선군(先軍)정치는 金正日 국방위원장이 ‘영원한 수령’金日成 주석이 개척하고 전진시킨 주체(主體)혁명위업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정치방식이다.”(2004년 12월30일)
 
▲강만길(姜萬吉): 송건호와 함께 민족문제연구소의 전신인 반민족문제연구소(1991년 2월 설립)의 지도위원을 지낸 인물로 현재 고려대 명예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학계에서 줄곧 국보법폐지, 주한미군철수, 한총련 합법화를 주장해온 인물이다. 상지대 제5대 총장을 지냈으며,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이 됐다. 
 
▲박현채(朴玄埰): 전남 화순 태생으로 6·25전쟁 당시 16세의 어린 나이로 빨치산에 가담했다. 그는 20세 미만의 소년들이 중심이 된 소년중대의 문화부 중대장으로 활동했는데, 훗날 이는 조정래의 장편소설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위대한 戰士’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전주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경제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20여년 간 재야 경제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자립적 민족 경제의 건설을 변혁운동의 과제로 삼고 이를 사회구조의 혁명이론으로 연결시켰다. 1964년 박현채는 인민혁명당 조직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이듬해 도예종 은닉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그 후에도 1979, 1980년에 2차례 복역과 구금을 당했다. 1989년 조선대학교에 자리잡기 전까지 여러 대학을 돌며 경제학 강의를 했다.
 
▲백기완(白基琓): 사회주의자 백기완은 1964년 韓日협정반대운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1970∼1980년대 재야 운동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74년 ‘유신헌법철폐 100만명 서명운동’을 주도, 긴급조치 1호에 의해 구속되었다가 이듬해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1979년에는 ‘YMCA위장결혼 사건’을 주도해 계엄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1972∼1980년 백범사상연구소 소장, 1984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을 지냈고, 1992년 대통령선거에 무소속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저서로는《통일이냐 반통일이냐》, 《백두산 천지》등이 있다.
 
▲이종석(李鍾奭): 1958년 경기도 남양주에서 출생하여 성균관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희대, 부산대, 서강대, 서울대 등에서 강사를 거쳐, 노무현 정권 시절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 대통령직 인수위 외교통일안보분과 위원, 제32대 통일부 장관을 지냈다. 성균관대 78학번으로 고시준비를 하다 실패한 후 일반 기업체에서 잠시 일하다 스물아홉 나이에 대학원에 진학했다. 이종석은 석사 2년차이던 88년 8월 최장집(고대 교수), 손호철(서강대 교수), 손학규(現민주당 대표) 등이 이끄는 좌파성향 ‘한국정치연구회’에 가입,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집중 공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통해 李 씨는 송두율의 내재적 접근법을 차용하고 김남식 등과 교류하며, 북한에 대한 냉전적 접근방식에서 벗어난 ‘내재적 접근방식’을 채택하게 된다. ‘내재적 접근방식’이란 ‘북한원전을 통해 북한을 먼저 이해한 뒤 비판하자’는 것이 골자이다.
 
▲임헌영(任軒永):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임헌영(본명 임준열)은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사건 등 수차례 공안사건에 연루됐던 인물이다. 남민전 사건은 1960년대 인혁당, 통혁당사건 관련자들이 출감 후 노동자․농민․청년학생 등 각계각층을 규합, 북한과의 연계 속에 결성된 지하공산혁명조직이다. 이 사건은 1970년대를 대표하는 간첩사건으로 관련자만 해도 84명(불고속자 포함)이 넘었다. 구체적으로 남민전은 안용웅(安龍雄)등이 월북(越北), 김일성에게 사업보고서를 제출하는 등 북한으로부터 구체적 통제를 받았으며, 남한 내에서 북한이 요구하는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할 경우 게양할 붉은 별이 그려진 대형 ‘전선기’(戰線旗)를 제작하기도 했다.
 
▲임종국(林鍾國): 1956년 《이상(李箱)전집》을 출간하면서 재야 문학평론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1957년《한국시인전집》을 발간하면서 문인들에 대한 자료를 모으던 중, 대한민국 문단의 유명 문인들이 일제 강점기 동안 친일 글을 다수 발표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때부터 오랜 기간 자료를 모아 친일파 연구의 효시가 된 《친일문학론》을 1966년에 펴냈다. 임종국은 《친일문학론》을 시작으로 다른 분야의 친일파에까지 연구를 확장해《실록 친일파》등 여러 저서를 계속 펴내면서 친일파 연구의 전문가로 활동했다. 임종국이 행적을 발굴해 친일파로 지목한 인물 가운데는 아버지 임문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친일파 인물에 대한 자료를 집대성할 계획으로 《친일파총사》를 집필하던 중 1989년에 사망했다. (계속)
 
김필재 기자 spooner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