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들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그동안 DMZ(비무장지대)는 금단의 땅이었습니다. 지금까지 DMZ를 소재로 한 수많은 언론 보도와 영상 제작물이 있었지만 이는 모두 민통선과 GOP 철책선내에서 이뤄진 것이고 DMZ 내부에는 들어갈 수 없었지요.
이번에 그 금단의 땅이 처음으로 열렸습니다. 저를 포함해 10여명의 조선일보 기자, 다큐 감독 등으로 구성된 특별취재팀이 지난해 가을부터 북한의 협박으로 출입이 중단된 지난 3월말까지 찍은 영상과 기사를 공개하는 것입니다. 'Inside DMZ'라는 제목의 초대형 프로젝트로 신문기사는 물론 방송 다큐멘터리, 사진전 및 백서 제작 등 다양한 형태로 제작이 됩니다. 사진전은 이미 지난 5월초부터 전쟁기념관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에는 여러 사람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습니다만 저 또한 '필생의 작품'으로 생각하고 재작년말부터 총력을 다해 국방부, 육군과 협의하고 진행해왔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8월 국방부, 육군본부와 'DMZ 종합기록물 제작'에 대한 양해각서를 체결했고, 그뒤에도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기본취지는 1953년 DMZ가 만들어진지 57년이나 지났지만 아직까지 DMZ 내부에 대한 기록이 없다시피 하다는 점, 이제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역사적인 기록물을 남길 때가 됐다는 점입니다.
그동안 많은 에피소드가 있었지만 보안 문제 때문에 회원 여러분께도 말씀드리지 못했고 당분간 못함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지난해 여름부터 가을까지 한동안 제가 기사도 안쓰고 조용히 지내 "요새 뭐하냐"고 주위에서 그러셨던 분들이 있었는데 "그냥 놀고 있다"고 본의 아닌 거짓말을 했었습니다. 뒤늦게나마 미안하다는 말씀 드리고요, 저는 성격상 항상 무슨 일을 만들어서 바쁘게 살아야지 그러지 않으면 몸살이 나는 사람입니다.
이미 전쟁기념관의 '6.25 특별기획전 및 DMZ 전시회'를 가보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이 프로젝트는 명실상부한 국내외 언론 사상 최초의 DMZ 내부 취재입니다. DMZ 남방한계선 철책선 바로 밑을 따라 DMZ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248km를 헬기를 타고 항공촬영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또한 사상 처음입니다. 지난 2월 추운 겨울날 항공촬영이 있었는데 이때 저도 밖에는 비밀로 하고 헬기를 탔습니다. 겨울철인데도 촬영을 위해 헬기 옆문을 모두 열어놓고 비행을 해 체감온도는 영하 30도를 넘어서 손이 얼어붙어 카메라 셔터도 누르기 힘들었고 카메라가 아예 작동을 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철책선에 너무 가까이 붙어 비행하다가 월경할 우려가 있다며 우리 군부대로부터 오색 신호탄 '경고사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앞으로 여러차례 시리즈 기사로 소개가 될텐데 중요한 기사들은 이곳 최신정보파일에도 올려놓겠습니다. 이 DMZ 프로젝트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제가 기자생활을 얼마나 더 하게 될지 모르겠지만(회사에서 언제 잘릴지 모르니까요ㅎㅎㅎ) 이것이 제 기자생활을 통틀어 가장 큰 초대형 기획 프로젝트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단순 취재뿐 아니라 해외 제휴, 펀딩 등 전반적인 프로그램 매니저 역할까지 하고 있으니까요. 그동안 많은 시련과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평소 안 다니던 성당도 매주 일요일 아침에 나가 기도까지 하게 됐지요. 독실한 신자분들께는 좀 죄송한 말씀이지만요.
끝으로 이 자리를 빌어 그동안 'DMZ 종합기록물 제작'에 관여하고 지원해주신 국방부 6.25전쟁 60주년 사업단과 육군본부 관계자분들, 그리고 허리까지 쌓인 눈을 헤집고 다니거나 진창에 빠진 차량을 함께 밀고 끌어내며 취재지원을 해주신 육군 최전방 사단 장병들께 머리 숙여 깊은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이 분들의 고생이 헛되지 않도록 훌륭한 역사 기록물이 되도록, 종합 작품이 나오도록 최선을 다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회원 여러분들께서도 많은 관심과 성원 보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금단의 땅' DMZ 속으로] [1부] 긴장 흐르는 현실
본지, 언론사상 첫 내부 취재
[1] 파주~고성 248㎞ 항공촬영헬기가 돌풍을 일으키며 떠올랐다. 비무장지대(DMZ)와 그 너머 북한 땅이 한눈에 들어왔다. 헬기의 굉음이 고막을 찢을 듯했고 열린 문 사이로 들이닥친 찬바람에 안경과 볼펜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남방한계선에) 너무 가까이 붙었다" "아니다, 아직 안 넘었다"…. 길 안내를 맡은 선도헬기 조종사와 취재팀을 태운 UH60 헬기 조종사 간의 실랑이가 헤드셋을 통해 생생하게 들려왔다. 그때였다. 갑자기 '펑!' 소리와 함께 폭죽 같은 것이 솟아오르더니 바로 눈앞에서 번쩍 터졌다. 폭죽은 붉은 연기 꼬리를 남기고 사라져갔다. 아슬아슬한 우리 헬기의 비행을 지켜보던 경기도
연천 부대의 GOP에서 월경(越境) 위험을 경고하는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이다.
6·25전쟁 이후 60년 동안 감춰져 있던 DMZ를
조선일보 특별취재팀이 헬기로 횡단한 것은 지난 2월이었다. 헬기는 한반도의 서쪽 끝
경기도 파주 금촌비행장을 이륙, DMZ의 남쪽 경계선인 남방한계선을 따라 동쪽 끝
강원도 고성까지 248㎞를 날았다.
북한을 1~2㎞ 지척에 둔 채 남방한계선 상공을 비행하는 것은 순수 군사목적으로도 드문 일이다. 취재헬기는 '○시 ○분 ○사단 ○○지점을 지나겠다'는 꼼꼼한 비행계획이 DMZ 경계를 맡은 11개 사단에 일일이 통보되고 승인이 난 뒤에야 비로소 시동을 걸 수 있었다.
이번 항공촬영은 조선일보와
국방부·육군본부가 6·25 60주년을 맞아 함께 추진하고 있는 'DMZ 종합기록물' 제작사업의 하나로 이루어진 것이다.
▲ 남·북방한계선, 그 뒤에 금강산댐 한반도를 가로지른 비무장지대(DMZ). 저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풍광 속에 숨죽인 동족의 긴장이 웅크리고 있다. 멀리 금강산 봉우리가 보이고, 그 아래 금강산댐이 머금은 푸른 물, 북방한계선과 북한 최전방 경계소초(GP), 그리고 오른편 아래쪽에 우리의
GP가 외롭게 서 있다(Canon 1D Mark Ⅳ 70~200㎜ 촬영). /DMZ 특별취재팀
DMZ는 처절한 동족상잔의 상흔을 간직하고 있는 비극의 현장(tragedy)인 동시에 수십 년 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생태의 보고(treasure)이기도 하다. 조선일보와 국방부는 DMZ의 군사시설·자연환경·문화유적 등 모든 것을 탐사해 신문·방송을 넘나드는 크로스미디어로 담아내기로 했다. 취재에 동참하는 전문가들과 함께 'DMZ 백서'도 펴낼 예정이다. 조선일보와 국방부는 작년 8월 이 같은 내용의 양해각서(MOU)를 체결했으며, 이에 따라 조선일보 특별취재팀은 지난 9개월 동안 세계 언론 최초로 국방부·유엔군사령부의 정식 허가와 육군본부의 지원을 받아 DMZ 내부에 직접 들어가 취재했다. 그동안 각종 매체에 소개된 대부분의 'DMZ' 기획물들은 사실은 DMZ 밖 민간인통제구역을 대상으로 한 것들이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DMZ는 예상 밖으로 한반도에서 가장 평화로운 곳이었다. 고라니가 물을 마시고 두루미가 철책을 넘어 날고 사람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적막만이 흘렀다. 57년 전 멈춘 전쟁, 그러나 57년간 계속돼온 전쟁의 한복판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였다. "DMZ의 평화가 깨지는 순간 한반도 전체의 평화도 끝장나기 때문에 DMZ는 늘 평화를 가장(假裝)해야 하는 곳"이라고 취재팀을 안내한 정훈장교는 말했다.
파주를 뜬 헬기는 곧 임진강과 만났다. 총 면적 907㎢, 한반도 전체 면적의 250분의 1을 차지하는 DMZ는 강에서 시작돼 넓은 평야지대로 이어졌다. 군사분계선이 한반도의 배를 갈랐다면, DMZ는 양옆으로 벌어진 채 60년간 아물지 못한 상처처럼 보였다. 남북한이 공동 경비를 맡고 있는 판문점은 DMZ 안 군사분계선 인근 깊숙이 박혀 있고, DMZ의 유일한 민간인 마을인 대성동 자유의 마을은 북한 기정동 마을과 얕은 언덕 하나를
사이에 뒀다.
정지비행(hovering)하던 헬기가 고도를 높이자 멀리 북한 땅 임진강 상류에 시퍼런 물줄기를 막아선 하얀 둑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해 9월 무단 방류로 우리 국민 6명의 목숨을 앗아간 북한 황강댐의 실체가 최초로 확인된 순간이다. 강물은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남을 향해 흐르고 있었고 어른 키보다 높은 세 겹의 철책은 그 힘을 막기엔 역부족으로 보였다.
강을 건너면 낮은 구릉들이 죽 연결되는 긴 능선과 너른 들판이 강원도 철원까지 펼쳐진다. 6·25 당시 최고의 격전지였던 백마고지·김일성고지·오성산 등 철원평야를 둘러싼 크고 작은 봉우리들은 유난히 흙이 붉고 능선이 구불구불했다.
▲ 펀치 볼 전경…가운데가 움푹 파인 모양이 화채그릇을 닮았다 하여 6·25전쟁 당시 미군들이‘펀치볼(Punch Bowl)’이라 이름
붙였다는 강원도 양구군 분지(盆地). 해발 1100m가 넘는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이곳은 6·25 격전지였다.
(Canon 1D Mark Ⅳ 16~35㎜ 촬영). /DMZ 특별취재팀
고지마다 남한과 북한의 GP가 서 있는데 남한 GP는 성채와 같은 콘크리트 건물 전체가 드러난 반면, 북한 GP는 작은 초소 하나만 솟아 있었고 막사와 벙커는 초소 뒤와 땅밑에 숨겨져 있다고 한다. DMZ 안에 이런 GP를 남한은 80여개, 북한은 200개 이상 운영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철원 풍천원 벌판엔 1100년 전 궁예가 도읍을 정하고 세운 도성과 6·25 전까지 서울~원산을 잇던 경원선 철도의 흔적이 또렷했다. 궁예도성 성벽이 지나던 자리엔 키 큰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거나 돌무더기가 군데군데 놓였고, 경원선 철도가 놓였던 높은 둔덕은 DMZ를 지나 멀리 북쪽으로 뻗어가고 있었다. 깨끗한 환경이 보존돼 겨울 철새의 낙원으로 불리는 이곳에서 재두루미 수십 마리가 헬기 소리에 놀라 한꺼번에 날아올랐다.
평지를 곧게 달려오던 철책은 강원도 화천 산악지대로 접어들면서 거친 산등성이를 S자로 타고 돌며 올라갔다. DMZ 전체에서 산림은 75%를 차지한다. 초지가 20%, 농지와 습지가 각각 3%, 1%쯤 된다. 장엄한 산세가 거대한 파도처럼 출렁거렸고 뾰족한 산꼭대기마다 GP와 일반전초(GOP)가 위태롭게 걸려 있었다. 각각의 GP에서 남방한계선 통문까지를 잇는 수색·보급로는 마치 긴 뱀 꼬리가 엉켜 있는 듯했다. DMZ 안 남한 GP에서 북을 향해 놓인 추진철책(군사분계선 쪽으로 더 전진시켜 놓은 철책)과 북한 GP에서 남으로 설치한 추진철책이 아슬아슬하게 맞닿은 곳도 있었다.
▲ DMZ 특별취재팀이 탑승한 헬기의 항로를 인도하고 있는 선도 헬기. /DMZ 특별취재팀
헬기가 강원도
양구에 진입할 무렵 갑자기 흰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DMZ 북한지역에 산불이 난 것이다. 산줄기가 층층이 앞을 가려 불이 난 지점이 보이진 않았지만 DMZ 안에선 이런 날이 자주 있다고 했다. 나무와 수풀을 태워 없애 시계(視界)를 확보하려고 일부러 불을 지르는 화공작전 탓이다.
단장의 능선, 피의 능선 등 양구에서 인제를 지날 때 보이는 산봉우리들은 하나같이 수많은 사람이 피 흘려 죽은 6·25 격전지들이었다. 헬기가 남방한계선 위로 이동했기 때문에 민통선 지역인 펀치볼·용늪·향로봉 등은 DMZ 반대쪽인 남쪽에서 보였다.
창공을 날아오던 헬기는 백두대간에 들어서면서 산속으로 비행했다. 사천리계곡·고진동계곡·오소동계곡을 넘어갈 때 헬기는 나무와 나무 사이를 스치듯 날았다. 그만큼 봉우리는 높았고 골짜기는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공중에서 보이지 않을 만큼 깊었다. 산의 꼭대기가 지붕처럼 길게 연결된 뾰족한 선을 따라 철조망이 말의 목덜미에 난 갈기처럼 돋아 있었다. 거기서부터 천길만길 아득한 골짜기 아래까지를 잇는 수천 개의 계단을 오르내리며 경계근무를 서느라 무릎 관절염에 시달린다는 병사들 얘기가 실감이 났다.
눈 덮인 백두대간을 뚫고 나오니 곧바로 탁 트인 동해바다였다. 강원도 고성의 우리나라 최북단·최동단 GP가 동해를 배경으로 서서 금강산을 향해 호령하고 있었다.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하던 호수라는 감호와 아홉 명의 신선이 바둑을 뒀다는 구선봉의 기암절벽은 한 폭의 그림 같았지만, 바위 사이사이로 보이는 북한군 벙커들이 감상에 젖을 수 없는 DMZ의 현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헬기는 고성을 찍고 돌아 속초비행장에 내려앉았다. 60년을 기다려온 풍경을 가로지르는 데는 3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 최전방 경계소초(GP·Guard Post)
DMZ 안에서 상대편 동향을 감시하는 곳. 한국은 80여개, 북한은 280여개를 설치해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일반전초(一般前哨·GOP·General Outpost)
남방한계선에 설치된 소초. 소초(小哨)는 적은 인원으로 경계 임무를 맡은 부대, 초소(哨所)는 보초를 서는 장소를 뜻한다.
☞ 군사분계선(MDL·Military Demarcation Line)
1953년 7월 정전협정 체결 당시 만들어진, 남과 북을 가르는 경계선. 서해안 강화부터 김포·파주·연천·철원·화천·양구·인제를 거쳐 동해안 고성까지 길이 155마일(248㎞)이다.
☞ 비무장지대(DMZ·Demilitarized Zone)
MDL로부터 남과 북으로 각각 2㎞ 떨어진 남방한계선~북방한계선 사이 폭 4㎞의 완충지대. 적대행위 발생을 방지하기 위해 정전협정 당시 설정했으며 군대 주둔·무기 배치가 원칙적으로 금지돼 있다.
☞ 민통선(CCL·Civilian Control Line)
남방한계선에서 남쪽으로 5~20㎞에 군사작전·시설보호·보안유지를 목적으로 만든 민간인통제구역 구분선. 농사·개간 등을 위해 민간인 출입통제를 완화한 마을들(통일촌 등)이 있다.
20년을 관찰한 155마일 DMZ의 야생
[유용원의 군사세계] DMZ 순례, 구름과 병사의 숨소리만 머물 수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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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 속으로] 南北 쪼갠 MDL(군사분계선)… 덤불 속 푯말은 노란 철판 사라진채 기둥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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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 속으로] 본지, 언론 사상 첫 내부 취재
코앞에서 본 군사분계선… 서해 강화~동해 고성까지 1292개 푯말 듬성듬성 세워
불에 타거나 홍수로 유실… 60년 세월에 하나 둘 사라져
지난 2월 23일 오후 3시
강원도 고성 DMZ 안. 남북을 가르는 최종 경계선인 군사분계선(MDL) 코앞까지 갔을 때 MDL로부터 불과 250m 떨어진
북한 명호초소의 군인 3명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이리 오라우! 넘어오라우!"
초소에 묶여 있는 개들도 덩달아 맹렬히 짖었다. 현재 서 있는 곳에서 MDL까지의 거리는 10m. 북한 군인의 말대로 몇 발짝만 더 가면 북한으로 '넘어갈' 수 있는 위치인 것이다.
DMZ 안에서 따져도 최전방. 군인들도 가기를 꺼리는 이곳까지 MDL 푯말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본지 정경열 기자가 다가갔다. 한반도를 남북으로 쪼개 놓은 MDL은 철조망이 아니라 300~500m 간격의 푯말 1292개로 듬성듬성 표시돼 있다. 취재팀은 DMZ 전 지역을 돌아다니며 촬영이 가능한 푯말을 물색한 끝에 금강산 관광객들이 이용하던 동해선 도로변의 1290번 푯말을 찾아냈다. DMZ를 통과하는 동해선 도로는 금강산 관광객들이 차를 타고 오갈 수 있지만 촬영이나 도보 이동은 엄격히 금지돼왔다.
동해선 도로 왼쪽 나무 덤불 사이에 선 푯말은 시멘트 기둥뿐이었다. '군사분계선'이라고 앞면(남쪽 방향)에 한글과 영어로, 뒷면(북쪽)엔 한글과
중국어(한자)로 적혀 있어야 할 노란 철판은 사라진 채였다. 도로 위 남북을 경계로 금이 가 있는 자국이 푯말을 대신해 MDL임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남북이 각각 MDL까지만 아스팔트 공사를 맡아 맞닿은 부분의 높이가 달라져 자연적으로 금이 생긴 것이다. 동행한 경계병들은 "커다란 카메라가 북한군을 자극할 수 있으니 북쪽으로는 들이대지 말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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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P주변 수색작전… 강원도 철원 지역 비무장지대 내 최전방 경계소초(GP) 주변에서 수색대원들이 수색작전을 벌이고 있다. /DMZ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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푯말 앞면은 남한, 뒷면은 북한실질적인 남북 분단선인 MDL은 정전협정 제1조 1항에 '한 개의 군사분계선을 확정하고 쌍방이 이 선으로부터 2㎞씩 후퇴함으로써 한 개의 비무장지대를 설정한다'는 내용에 명시돼 있다.
협상 당시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접전선을 따라 서쪽 끝 임진강변(1번)부터 동쪽 끝 동해안 해변(1292번)까지 총 248㎞ 구간에 똑같은 모양의 푯말을 세웠다. 북한·중국측이 596개, 유엔군측이 696개씩 나눠 유지·관리하는 것으로 돼 있다.
70년대까지는 넘어진 푯말을 세우고 보수하기 위해 군인들이 주기적으로 MDL까지 갔지만 수리하던 우리 군인들이 북한군의 총격으로 전사하는 일들이 생기면서 중단됐다. 이후 오랜 세월 동안 푯말들은 홍수에 떠내려가거나 DMZ 내부에 불을 질러 시야를 확보하는 화공작전으로 소실됐고, 풀숲이 우거져 대부분 가려졌다. 현재 DMZ 안에서 군인들이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푯말은 몇 개 되지 않는다.
경기도 연천 25사단의 이모 상사는 "예전엔 남북 군인들이 '영토 확장'한다며 MDL 푯말을 뽑아 더 먼 곳에 박아놓고 오기도 했지만 10년쯤 전부터는 아예 근처에도 가지 않게 됐다"고 했다. 강원도 철원지역의 한 사단장은 "MDL이 선으로 꼼꼼히 표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발적으로라도 넘게 될 경우 충돌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며 "교전이 일어날 만한 상황을 피하려다 보니 시간이 갈수록 점점 접근이 어려워졌다"고 했다.
▲ 군사분계선을 가로지른 푯말들. 고성에서 근접 촬영한 푯말은 머리가 떨어진 상태지만
〈위〉파주 지역에서 확인한 것은 녹슨 채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DMZ 특별취재팀
◆푯말, 파주 제외하곤 찾기 어려워
현재 온전한 형태의 푯말을 비교적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곳은 경기도 파주의 판문점 부근이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의 경우 다리 중간에 있던 푯말(90번)을 남쪽 끝으로 옮겨 세워두었고 판문점 내부 유엔군 5초소 앞에도 93번 푯말이 있다. 대성동 자유의 마을에서는 북한 기정동 마을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왼쪽과 오른쪽에서 각각 푯말 하나씩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파주를 제외한 대부분의 DMZ지역에서는 DMZ 내부 수색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불에 타다 남은 기둥이 보이거나 성능이 좋은 감시 장비를 동원해야 겨우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고성 ○○○OP에서는 금강산 감호 바로 앞의 시커멓게 타버린 1289번 푯말, 무성한 수풀 사이 1292번 마지막 푯말의 기둥을 감시 카메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평야지대인 철원지역 DMZ 수색대원들은 "화공작전 직후 수풀이 다 탔을 때 GP에서 푯말 2~3개를 본 적 있다"고 했고 산세가 험한 인제지역 DMZ 관측병은 "나무가 우거져서 MDL의 위치는 추정만 하고 있지만 한겨울엔 글씨가 지워진 푯말 몇 개가 곳곳에 보인다"고 했다.
MDL이 푯말로만 표시되는 것은 아니다. 판문점에는 1976년 미군 장교 2명이 북한군에게 살해당한 도끼만행사건 이후 폭 50㎝, 높이 5㎝의 콘크리트 MDL이 설치됐고 군사정전위원회와 부속 건물 주변으로 높이 1m의 콘크리트 기둥 59개가 10m 간격으로 세워져 MDL 역할을 하고 있다. 회담장 내부 바닥의 타일 선, 테이블 가운데 마이크를 꽂는 전기 콘센트와 깃발 위치까지도 MDL과 정확히 일치하도록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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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 속으로] "DMZ 종합기록물 제작" 각계 전문 자문위원단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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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사는 DMZ 내 전쟁의 상흔과 군사 대치 등 분단 현실과 병영생활을 보여주고, 문화·생태계 전반을 관찰한 DMZ 종합기록물 제작을 목표로 지난해 8월 국방부와 양해각서(MOU)를 맺고 특별취재팀을 구성했다. 이후 본지는 ▲군사 ▲역사·문화재 ▲생태·환경 ▲경제·관광 분야에서 학식과 경륜을 지닌 전문가들로 자문위원단을 구성했다. 자문위원단은 지난해 9월 제1차 회의를 열어 취재방향을 설정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이후에도 동행취재·자료제공 등 취재를 지원했다.
위원들은 "현재 시점에서 정적(靜的)으로 보지 말고 60년 전과 미래의 변화상을 포괄적으로 논하라" "남북 공동으로 문화유적을 연구·발굴하는 기획을 해보라" "궁예 궁터를 심층 연구해 왜 이곳에 도읍을 정했고 왜 패망했나를 밝힐 필요가 있다" "대학 캠퍼스·병원 등 DMZ 미래 활용 방안까지 포괄적으로 다루라" "냉전적인 데 집착하지 말고 전향적인 시각을 갖춰라" 같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DMZ 취재팀 자문위원 명단〉
▲군사 홍두승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김국헌 전 국방부 군비통제관(예비역 육군 소장) ▲환경·생태 김귀곤 서울대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 김태식 환경부 자연정책과 사무관, 전영우·김기원 국민대 산림자원학과 교수, 임종환 국립산림과학원 산림보전부 산림생태연구과 연구관,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한상훈 국립생물자원관 척추동물과장 ▲역사·문화재 조유전 경기문화재연구원장, 이재 육사 명예교수, 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관광·경제 김영윤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김흥식 경기개발연구원 문화관광연구센터장, 강석훈 성신여대 경제학과 교수, 고병욱 경기관광공사 전략사업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