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술의 하늘에 뜬 별들 ☆☆☆
▩ 술과 풍류 ▩
세계 각 지역의 음식 문화가 다양하듯 술 마시는 습관도 각양각색이다.
옛날에는 술이 귀한 음료였기 때문에 대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사하거나
주인이 객을 대접하는데 쓰였을 것이다.
사회가 발달함에 따라 사교적인 모임이 늘어나 술은 어느 모임에서나 음용되게 되었다.
우리나라와 인접한 중국과 일본의 음주 습관만 해도 매우 다르다.
일본 사람들은 술자리에서 잔이 조금이라도 비면 항시 가득 채운다.
우리는 술잔이 완전히 비지 않은 상태에서 술을 더 따르면 첨잔이라 해서 결례로 생각한다.
따라서 일본인들의 그런 습관을 모르면 '야 이거 다 마시라는 것인가 보다'라고 착각하여
연거푸 마시다 술에 취해버릴 수도 있다.
중국인들은 자주 '깐빠이(건배)'라고 하면서 술잔을 들었다 놓곤 한다.
술잔을 부딪히면 다 마셔야 되고 술잔을 들었다 놓으면 자기가 마시고 싶은 대로 조금 마셔도 된다.
'깐빠이'했다 해서 무조건 다 마실 필요는 없다.
같은 동양이라 해도 술 권하는 습관이 다르다.
서양 사람들은 술을 권하는 데 있어서 동양 사람에 비해 인색하다.
첫잔을 권하기 전에 꼭 뭘 마실 거냐고 물어 보고, 다음부터는 자기가 따라 마신다.
술집에는 라운드(Round) 방식이 있는데 몇 명이 라운드에 든다하면 차례대로 한 사람씩
각 사람들이 원하는 술을 잔술로 사는 것이다.
우리네 풍습과는 너무 달라 어색하고, 그들이 쩨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음식을 권하는 인심이 매우 후하다.
술 권하는 인심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강제성이 많아 억지로 술을 마셔야 하는 경우가 많다.
서양 사람들은 그 반대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 보면 술 마시는 사람의 취향이나 컨디션을 존중하는 배려가 깔려 있는 것 같다.
70년대 이장희의 노래 '한 잔의 술'이 유행하던 때에는
소위'노틀카(놓지도 말고 트림도 하지 말고 술 마신 후 "카"하는 소리도 내지 말고 마시는 것)'가 유행하였다.
노래 가사와 같이 '마시자 마셔 버리자'는 것이 술을 마시는 음주 풍경이다.
그리하여 70년대에는 '꺾는다.'는 말이 유행을 했다.
꺾는다는 말은 잔을 들어서 손목을 꺾어(기울여) 입에다 붓는다는 말이다.
즉 빨리 마시고 빨리 취하자는 뜻일 것이다.
80년대에는 폭탄주가 유행하였다.
70년대의 고도성장으로 경제적으로는 풍요로워졌으나 정치적인 압제로 사람들이
내면의 스트레스를 표출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폭탄주는 맥주와 위스키를 섞어서 마시는 것인데 맥주 속의 탄산가스가
위벽을 자극하여 알코올 흡수를 촉진하기 때문에 술이 급히 취한다.
그래서 한잔 푸러 가자는 말이 유행했다.
술을 마셔서 마음속의 답답함을 없애버리려 한 것이리라.
얼마 전에 20대 후반의 후배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야 빨러 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이 친구들이 혹시 대마초를 빨러 가자는 것인가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술 한잔하러 가자는 말이었다.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줄어들면서 여성 음주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해서 그런지 말도 노골적으로 야해졌다.
말은 그 시대의 풍속을 반영한다.
따라서 말이 변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근래 한 30년간의 권주사의 변천을 보면 당시 사회 상황과 사람들의 내면을 엿볼 수 있을듯 싶다.
여보게 송암 한잔 드시게나. 그러시게, 청강도 한잔 드시게나.
한 100년 전 사랑방에서 술상을 놓고 친구끼리 마주 앉아 술을 권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이때는 자세를 꼿꼿이 하여 느릿느릿하게 마셨을 것이다.
어찌 보면 친구들끼리 격식을 너무 차려 딱딱한 듯도 하지만 여유가 있어 좋다.
음주와 풍류에 관해서 우리 선조들은 가난과 좌절 속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미하였다.
조선시대 시가 문학의 양대 거장인 송강 정철과 고산 윤선도는 늘 음주를 즐겼는데 지나침이 없도록
스스로 경계하여 주도를 지켜 나갔다.
거기에다가 훈훈한 인정을 실어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는다면 한층 술맛이 좋을 것이다.
※ 정철은 권주가에서
한잔 먹세 근여 또 한잔 먹세 근여 꽃 꺾어 산 놓고 무진 무진 먹세 근여라고 읊조린다.
얼핏 보면 주량에 관계없이 무진장 마시자는 것 같다.
그러나 자세히 내용을 보면 자기가 얼마나 마시는지 잔을 세면서(꽃 꺾어 산 놓고)
주량의 한도 내에서 마시는 것을 알 수 있다.
※ 윤선도는 한 시조에서
술을 먹으려니와 덕 없으면 문란하고 춤도 추려니와 예 없으면 난잡하니
아마도 덕예를 지키면 만수무강하리라. 라고 하였다.
윤선도는 일생을 통해 수많은 유배 생활을
했으나 마음은 늘 풍요로웠다.
그의 오우가, 어부사시사는 자연과 합일된 경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술 대함에 있어서나 놀이에 있어서나 조화와 질서를 지키면 더욱더 즐거우리라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좋은 선현을 갖고 있다.
그들의 음주 문화와 풍류를 되살린다면 술은 생활에 멋과 여유를 주는 활력소가 될 것이다.
평소 자주 차지 못하던 자연 속에서 술 한잔 곁들이면 온갖 시름이 물러가고 한층 정감이 무르익는다.
여기에 돌, 바람, 풀, 나무, 물, 구름, 꽃, 정자 등을 완상하며
가까운 이들과 마음을 주고받는다면 풍류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자기의 마음이 우주의 사물과 어울려 생기고 흩어지는 것을 본다면 신선이 따로 없을 것이다.
※ 이태백
술의 하늘에 뜬 별을 헤아리노라면 자연히 이태백이 으뜸으로 꼽힌다.
그의 지기였던 두보는 그를 주중선이라 불렀으며, 이태백 스스로는 적선(지상에 귀향온 신선)으로 칭했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주선이었다.
술과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이태백의 아류로 생각하고 그의 경지를 동경하곤 했다.
그는 월하독작이란 시에서 "석 잔이면 큰 도에 통하고 한말이면 자연과 어우러진다."라고 읊으며
취중의 호연한 심정을 토로했다.
실로 이태백은 술과 자연을 즐겼으며 이를 노래했다.
그는 오강에서 뱃놀이 하던 중 술에 만취하여 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 빠져 죽었다는 전설을 남길 정도였다.
이태백의 시에서 절반은 술이 소재이다.
이러한 연고로 술에 만취하여 몸과 마음을 못 가누는 사람을 보고 주태백이라 일컫기도 한다.
그러나 이태백이 과연 그러한 사람이었을까?
이태백은 젊은 시절 도교에 귀의하여 신선도를 닦았으며 검술에도 달인이었다.
그는 벼슬길에 오르고자 많은 노력도 했다.
한때 현종과 양귀비가 노닐던 궁궐에 봉직하여 자기의 기개를 펴고자 했으나,
그는 한낱 궁정 시인으로만 취급 받아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 후에도 그는 단념하지 않고 안록산의 난을 진압하는 데 참여하는 등 오탁한 현실을 뛰어 넘고자 했다.
그는 정치적인 참여에 연관되어 임종 또한 유배지에서 맞게 된다.
물론 위의 오강에서의 전설은 후인이 저어낸 우스갯소리이다.
이태백의 생은 인간의 자유와 낭만을 현실 속에서 찾고자 부단히 노력했던 가장 인간다운 것이었다.
그는 유명한 장진주에서만고의 시름을 씻어 내리려 연거푸 삼백 항아리의 술을 마신다.고 읊었다.
인생의 유한함과 현실 속에서의 좌절을 달래기 위하여 술의 힘을 빌린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태백의 생애나 그의 시를 아무리 훑어보아도 그가 술에 의하여 정신을 잃은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술을 사랑했지 술의 노예로 전락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이태백의 시에 나오는 말이나 항아리라는 단위를 보고,
실제로 술독에 빠질 정도로 많이 마셔야 그런 경지를 맛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이다.
다만 정신이 그렇게 활달해야 참된 술맛을 알 수 있다는 행간의 뜻을 음미할 일이다.
※ 김시습과 김삿갓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중략)
술 한 잔과 시 한수로 떠나가는 김삿갓
한잔 마시고 마이크를 잡으면 술술 나오는 노래이다.
김삿갓은 구름과 같이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으며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자유인이었다.
고금을 통해서 술을 마시는 가장 큰 이유는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술꾼들이 그를 영원한 고참으로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과거에 급제했던 김삿갓은 왜 방랑 시인이 되었을까?
김삿갓의 본명은 김병연으로서 그가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에 나아가려던 차에
자기조상을 자세히 알아볼 계기가 있었다.
이때 그는 자기가 홍경래의 난 때 항복한 선천방어사 김일손의 손자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세상의 명리를 버리고 대 자유의 길을 택했다.
각지를 돌아다니며 서민들에게는 웃음을 주고 틀린 세상을 풍자하며 시를 지어 주고 술을 얻어 마셨다.
최초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를 지은 매월당 김시습은
쿠데타로 왕권을 탈취한 세조에게 굽히지 않았다.
그는 금오산에 들어가 은둔 생활을 하다 스님이 되었다.
그는 승복을 입고 각지를 주유하며 술을 마시고 시를 읊었다.
한때 술을 거나하게 먹고 거리를 지나가다가 당시 영의정인 정창손을 만났다.
그가 다짜고짜 "이 나쁜 놈아 네가 어찌 영의정이냐."고 소리치자 영의정은 혼비백산하여 사라졌다.
김시습의 곧은 절개는 부패한 대감들을 두렵게 만들었다.
그는 달콤한 타협보다 자유롭고 불의에 지배받지 않는 주선의 길을 걸은 것이다.
14대 국회에 참여했던 이주일 씨는 퇴임 소감으로 "국회에서 진짜 코미디를 많이 배웠다."고 심경을 토로했다.
바른 것보다는 이익을 따라 이합집산 하는 정치인들의 우스꽝스런 골을 잘도 지적했다.
요새 술판에는 씹어야 할 안주가 너무 많아 탈이다.
새삼 김삿갓과 매월당이 그리워진다.
비록 술에 취해 방랑하더라도 굽히지 않는 지조로 언제나 바른말로 불의와 맞서며
서민들에게는 웃음을 선사했던 선배들을 우러르고 싶다.
※ 정수동
조선 후기 기인 중에 정수동이 있다.
그는 재주가 뛰어나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추사 김정희는 수동의 총기를 기특히 여겨 자기가 아끼는 서책을 주었다.
수동은 책들을 다 통달하고는 어디론지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마치 물과 같이 세상에 매달림 없이 살았다.
그는 술을 좋아했고 어디서나 거침없이 말을 했는데 잘못된 일은 사정 없이 질타했다.
정수동이 하루는 아는 사람 집에 들렀다. 주인은 소실을 시켜 술상을 내왔다.
그 집의 크기와 비교하면 술상은 너무 보잘것없었다.
더구나 술잔은 도토리 껍질만 했다. 수동은 별안간 큰소리로 통곡을 했다.
주인은 깜짝 놀라 물었다. "무슨 변고 있소?" 그러자 수동은 울음을 딱 그치고 말했다.
"우리 형님 생각이 나서 그러오. 형님도 나처럼 친구네 집에서 술을 마시다 술잔이 작아
그만 목구멍에 걸려 돌아가셨소." 주인은 눈치를 채고 사발을 내왔다.
수동은 사발로 술을 마신 후 껄껄 웃으며 말했다. "진작 그래야지 술잔만이라도 커야 하지 않겠소?"
한번은 대감 조두순이 여러 대신과 재사들을 모아 놓고 연회를 베풀었다.
술이 몇 순배를 돌아 거나해졌다.
이야기가 돌다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이겠노?"라는 화제에 이르렀다.
어떤 이는 '호랑이가 무섭다' 어떤 사람은 '역적이 무섭다'고 한마디씩 했다.
수동은 "이 사람은 호랑이를 탄 양반 도둑이 무섭습니다."라고 말했다.
좌중의 분위기는 갑자기 싸늘해졌다.
벼슬 높은 양반들이 뇌물 도둑질하는 것을 비꼬았기 때문이었다.
당대의 세도가인 김홍근 대감은 평소 수동의 기상천외한 재주에 그를 아꼈다.
그러나 수동은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어느 해 세모에 김대감은 수동의 집에 선물과 함께 술과 안주를 보냈다.
짐을 나르던 하인이 수동과 마주쳐 사유를 말했다.
수동은 다짜고짜로 길바닥에 물건들을 펴놓고 하인과 행인들을 불러 권커니 잣거니 술을 마셨다.
하인은 겁이 덜컥 났다. 수동은 아랑곳없이 술을 선물에 뿌리며
"이 재물은 부정한 것이니 술로 씻어야 해."라고 했다.
하인을 돌려보낸 후 마침내 대취하여 물건을 버린 채 가버렸다.
오늘날 수동이 있다면 정치가들의 집골목에는 술 냄새가 진동하지 않을까?
씻어야 할 재물이 한도 없으니... 술꾼들이여 대 선배 수동에게 텅 빈 충만의 주도를 배우라.
※ 도연명
전원이 황폐해지니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
(중 략) 지난날의 벼슬살이가 잘못이었음을 이제 깊이 깨달았노라...
그 유명한 도연명의 귀거래사이다.
도연명은 가족들의 가난을 구제하고자 벼슬길에 올랐으나 당시의 관리들이 부정한 것을 개탄하고
10여 년 간 출사와 퇴임을 거듭했다.
그는 마침내 관리들과 결별을 하고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가난해도 농사일을 하면서 천성을 바르게 지키는 것이 바른 삶이라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오탁한 난세의 출세를 버리고 향리에 돌아가 자연의 섭리대로 산 선인 도연명은
애주가들에게 참된 삶과 주도에 대하여 많은 것을 시사한다.
도연명은 본시 술을 즐겨 누가 술을 권하여 부르면 사양하지 않고 갔으나 취하면 홀연히 사라졌다 한다.
그의 시에는 거의 대부분 술이 등장한다.
그는 초탈한 경지를 스스로 즐겼다.
그의 음주 후 심경은 다음의 시에 잘 나타나 있다.
마을의 옛 친구들 나를 반겨 술병 들고 찾아왔네.
소나무 아래서 자리 잡고 마시니 어느덧 술기운 올라 취하네.
서로 격의 없이 떠들며 술잔을 돌리며 어울리니
스스로 존재조차 의식 못하고 더욱 명리 귀한 줄 모르노라
유연히 아득한 경지에 드니 술 속에 삶의 참뜻이 있더라.
그는 인생의 유한함과 명예와 재물의 덧없음을 노래했다.
그는 혼자서도 술을 즐겨 마셨다.
달빛 아래 비친 자기의 그림자와 대화를 나누고
현실의 자기와 이상적인 자기를 대비시키고 둘이 합일하기를 꾀했다.
그의 은둔 생활은 현실 도피가 아니었다.
단지 자기의 가치관을 일관되게 관철한 것뿐이었다.
그의 또 다른 시에서는 "자기가 죽은 후
에 초상을 치르거나 제사를 지낼 때 상에 제물과 술을 놓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광경을 그려 놓고
그때는 이미 술을 보고도 못 마실 테니 후회되지 않도록 평소 음주를 즐기리라" 할 정도로
현실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요즘 공직을 남용해서 각종 비리를 저지른 사례가 미간을 찌푸리게 한다.
그러나 그 끝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여실히 알 수 있다.
술 한 잔으로 허욕을 씻고 청정한 자아를 회복할 수 있다면 도연명의 후예라 할 수 있지 않으랴!
※ 로버트 번즈
헤어짐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불려지는 구성진 노래 올드 랭 사인.
오랫동안 사귀었던, 정든 내 친구여
잊어야만 하는 건가 우리 옛날을 (중략)
그 옛날을 위해서, 나의 친구여
멀리 흘러간 옛날을 위해
우린 항상 다정히 잔을 들리라
멀리 사라진 옛날을 위해
이 시는 스코틀랜드의 민족 시인인 로버트 번즈의 생애를 그대로 담고 있다.
18세기 영국의 시단은 시어가 정형화되어 대부분의 시가 진부하였다.
이때 스코틀랜드 방언으로 쓴 로버트 번즈의 시는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술을 좋아하였으며 위스키를 스코틀랜드의 나라 술로 만드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스코틀랜드 각지를 고루 다니면서 시를 짓고 술을 마셨다.
그의 시에는 서민적이고 민족적인 것이 총망라되어 있다.
어떤 농부의 장날 술주정 이야기, 부도덕한 목사, 악덕 지주,
시골 처녀 총각의 사랑 등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번즈의 시를 읽노라면 내용이 한국의 이야기인지 스코틀랜드 이야기인지 모를 정도이다.
옛날 한국의 농촌에서 일어났던 일과 똑같은 상황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집집마다 보리농사를 지었던 옛 시절, 처녀 총각들이 보리밭에 숨어서
밤새도록 속삭인 사랑 이야기 '금빛 보리 이랑'은 우리나라에서도 흔한 일이었다.
촌로들의 이야기 속에서 도깨비와 씨름한 일(오 탬샌더)이 스코틀랜드에서도 일어났다니
재미있는 일이다.
그가 표현한 음주의 즐거움은 다음의 시에 나타나 있다.
축복의 한잔이여/
활기의 근원이여/
어떠한 공부보다도/
위트에 불을 붙이고/
지혜를 다져 주네/
위스키 한잔이면/
시름이 오간 데 없네./
걱정 말게나 만취할 일 없으니/
우리의 관념을 간질이게나/
밤이고 낮이고
그는 식구가 많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가족 부양에 삶의 뼈저린 아픔과 몇 차례의 실연도 겪었다.
그러나 그의 시는 낭만과 여유가 있었으니 술은 그의 시름을 승화시키는 활력소였다.
현자여 눈을 감으라./
철학적 냄새를 거두고/
위스키의 이름을 그리스어로 말해 보려무나/
'생명의 술'이 아니던가/
스코틀랜드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여/ (중략)/
자유와 위스키는 함께 하나니/
꿈을 향해 용솟음 칠지니.
그는 당시 산업혁명으로 사라져 가는 스코틀랜드 민요와 설화를 낱낱이 조사하여
친구와 함께 민요집을 펴내면서 스코틀랜드인의 생활에 깊이 박혀 있는 위스키 문화를 찬양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이 낭만 시인을 로비 번즈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잉글랜드인들이
워즈 워스를 기리는 것 이상으로 번즈를 사랑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매년 1월 15일 밤에는 친지들이 모여 로버트 번즈의 생일을 기린다.
스코틀랜드 민속 명절인 번즈 나이트(Burn's Night)는 사람들이 다음 내용의
로비 번즈의 '셀커크 그레이스'를 암송하면서 시작된다.
가진 게 있는 이는 먹을 수 없고
먹을 수 있는 이는 가진 게 없네.
우리는 맛있게 음식을 나누노니
신의 은총이 여기에 있네.
이날 밤에는 위스키를 건배하고 스코틀랜드 전통 음식인 하기스를 들며
밤이 늦도록 대화와 노래를 한다.
한 잔의 위스키를 마시며 인생의 고뇌와 사랑, 낭만과 그리움을 노래한 로비 번즈는
영원히 스코틀랜드인들의 가슴속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