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韓國戰(한국전)이 진행 중이던 때로부터 5·16 군사혁명 전해인 1960년까지 해외(주로 미국) 유학을 다녀온 군인(86%가 장교)들은 1만 1506명이었다. 육군이 약 7000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 기간에 민간인들이 해외 유학을 간 숫자는 군인들의 반도 안 되는 5423명이었다. 유학파 군인들은 군사학뿐 아니라 조직경영, 기획감사에 대하여도 배웠다. 장교들은 미국식 선진 조직 경영술을 배웠다.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戰果(전과)를 올리는 게 전술의 핵심이듯이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이익을 거두는 게 회사의 목표이다. 이들이 배운 경영술은 근대화를 주도할 때 공무원과 기업을 경영하는 데 이용되었다. 이들은 1950년대의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는 미국을 보고 천국에 온 것 같았다. 이들이 6개월~1년의 연수를 끝내고 돌아온 조국은 부패, 무능, 좌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자연히 이들의 가슴속에서는 국가 개조의 熱望(열망)이 불타고 있었다. 5·16 주체 장교들은 대체로 유능하고, 청빈하고, 개혁적이었다. 이들은 최강의 조직이었을 뿐 아니라 最良(최량)의 인재들이었다. 그들 중에서도 朴正熙(박정희)와 金鍾泌(김종필)은 최고 엘리트였다. 박정희의 武士的(무사적) 성격에 김종필의 유연한 머리가 더해졌다. 둘은, 신라 삼국통일을 이룬 세 원훈, 金春秋(김춘추·무열왕), 金庾信(김유신), 文武王(문무왕)의 트리오에 버금가는 콤비였다. 교양과 추진력을 겸한 두 사람이 ‘역사의 大勢(대세)’를 타고, 혁명을 지도하였으므로 無血(무혈)로 성공할 수 있었다. 쿠데타 때 피를 흘리지 않았으므로 박정희 18년의 혁명기도 비교적 순탄하였다. 박정희는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집권을 하였으므로 마음에 여유가 생겨, 엄청난 사회적 구조적 변화에 비교하면 최소한의 희생으로 근대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작년에 별세한 황장엽 선생은 “無産者(무산자)는 無識者(무식자)이다. 무식자가 통치를 하려면 필연적으로 폭력을 쓴다”고 말한 적이 있다. 有識者(유식자)가 통치하면 논리적으로 설득을 할 수 있으므로 피를 덜 흘리게 되는 것이다. 박정희는 20세기에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사람 중에 거의 유일하게 경제개발에 성공,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있는 기틀을 놓았다. 민족주의적인 군인임에도 군사비를 동결하고 경제제일주의 노선을 선택, 外資(외지)도입을 추진, 對外(대외)개방전략과 수출立國 정책을 썼다. 다른 나라에선 군인들이 집권하면 민족자본을 육성하고, 수입代替(대체) 및 폐쇄정책을 쓰고 군사비를 늘리는 게 보통이다(그러다가 망하는 게 常例였다). 군인이면서도 세상을 넓게 깊게 본 경륜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44세에 집권했을 때 이미 중국, 만주, 일본, 미국 생활을 한 사람이었다. 見聞(견문)이 넓었다. 김일성은 후진국인 중국과 소련에서 살았다. 李承晩(이승만)은 세계를 가슴속에 품은 이였다. 오늘의 남북한 차이는 불학무식한 김일성, 김정일과 교양과 배짱을 겸한 이승만, 박정희의 차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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