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파헤친 歷史

난중잡록(亂中雜錄)과 조경남(趙慶男)

淸山에 2011. 3. 11. 13:48
 

 

 

 

 

 

난중잡록(亂中雜錄)과 조경남(趙慶男)

난중잡록(亂中雜錄)


남원의 의병장 조경남(趙慶男)이 쓴 임진왜란 때의 야사(野史), 4권 2책. 필사본. 저자가 13세때인 1582년(선조 15) 12월부터 쓰기 시작하여 1610년(광해군 2)까지 중요한 사실을 엮은 것이다. ‘난중잡록’이라 이름한 것은 임진․정유 두차례의 난의 기록이 주요부문을 차지한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 책에는 저자 자신이 의병장으로 활동한 사실뿐 아니라 당시 나라 전체의 역사적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이 중에 특히 임진왜란을 중심으로 수록한 자료 가운데는 《경상순영록(慶尙巡營錄)》의 기록이 대부분 실려 있다. 전쟁 등으로 나라가 분망한 시기에는사건기록이 많은 양을 치지하고 있으며, 그렇지 않은 때에는 필요 이상의 기록은 적지 않아 적은 분량이다. 그 후손에게 보존된 초본에 의하면 제1권은 1582년~1592년6월 사이, 제2권은 1592년8월~1593년 6월 사이, 제3권은 1593년7월~1598년12월 사이, 제4권은 1599년1월~1610년2월 사이로 나누어 편찬되어 4권 2책으로 편제되었다. 그 뒤 1964년 9월에 《속잡록(續雜錄)》4권 2책을 추가시켜 전 8권 4책으로 늘리고, 책머리에는 기정진(奇正鎭)․최시옹(崔是翁)과 저자의 서문을, 끝에는 한익철(韓溺哲)의 발문과 저자의 11대종손인 조태희(趙台熙)의 간행사를 붙여서 후손들이 석판으로 간행, 반포하였다. 이 간행사에 의하면 인조 때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하면서 이 초본이 사료(史料)로 참고되었고, 그 부본을 작성하여 정부에 보관하고 원본은 1657년(효종 8)에 본가에 돌려주었다 한다. 그 뒤 고서간행회(古書刊行會)에서 《대동야승》을 간행할 때 제26권부터 제34권까지 9편으로 나누어 수록한 것은 정부에 보존되었던 부본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그당시에 표기한 명칭 이외에 《속잡록》을 합하여 ‘산서야사(山西野史)’ 또는 ‘대방일기(帶方日記)’ 등의 명칭으로 불리고 있으며, 임진왜란사에 관한 연구뿐만 아니라 조선 중기의 정치․경제․사회․문화․당쟁․외교․군사 등을 연구하는 데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조경남(趙慶男)

조경남(1570~1641). 조선 중기의 무인.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선술(善述). 호는 산서(山西)․산서병옹(山西病翁)․산서처사․주몽당주인(晝夢堂主人)으로 불리우며 남원 주천면 은송리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사직 벽(壁)이며, 어머니는 남원양씨(南原梁氏)이다.
사대부 가문에서 태어나 사대부 의식이 투철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재(文才)가 뛰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으고 외조모의 손에 양육되었으나 기상이 활달하였다. 10세에 유인옥(柳仁沃)에게 입문하여 제술(製述)로 남을 놀라게 하였다. 13세에는 난리를 예견하여 일기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18세에는 조헌(趙憲)의 문하로 들어가 의리와 도덕을 터득하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는 군문에 들어가려 하였으나 뜻대로 하지 못하고, 29세에 전라도 병마절도사 이광악(李光岳) 막하에서 명나라 군대와 합세하여 금산․함양 등지의 왜군을 무찔렀다.
39세에는 향시(鄕試) 양장(兩場)에, 45세에는 삼장(三場)에 합격하고서도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비난하고 벼슬하지 않았다. 인조반정 후 54세에 겨우 진사에 등과하였으나 세상과 인연을 끊고 방장산(方丈山) 용추동(龍湫洞)에 별업(別業)을 짓고 산서병옹이라 자처하여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삼학사(三學士)의 심양(瀋陽)순절소식에 충의를 읊기도 하였다. 사후 주포서원(周浦書院)에 향사되었다. 1582년에서 1639년까지 58년간의 사적을 일기체로 기술한 《난중잡록》이 있다.
《속잡록(續雜錄)》과 더불어 의병활동의 생생한 기술과 명․청과의 외교활동의 객관적 기술로 그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그의 묘가 남원시 이백면 초동리에 있으며 사당 〈의충사〉에 영정이 있다.

난중잡록 정유년편(亂中雜錄 丁酉年篇)

정유년(丁酉年)

만력 25년 선조 30년(1597)

1월
5일
부천사(副天使) 심유경(沈惟敬)이 영남으로부터 남원에 도착 하였다가, 11일에 출발하여 서울로 향하여 곧 명나라(天朝)로 돌아갔다.

6일
한효순(韓孝純)이 전라 좌수영에 도착하니 이순신(李舜臣)이 한산도로부터 나와서 적을 막을 일을 상의하였다. 이튿날 부체찰사는 순천으로 돌아갔다.

10일
크게 바람이 불고 비가 왔다. 청정(淸正)이 병선 1만여 척을 거느리고 대마도로부터 바다를 건너와서 다시 서생포(西生浦)․두모포(豆毛浦)․죽도(竹島) 등의 옛 보루를 수리하였다. 이때에 이 순신이 좌수영으로부터 한산진으로 돌아가다가 중로에서 풍우를 만나서 남해현(南海縣)에 대어 머무는데, 정탐하는 배가 달려와 경상 좌수영의 소식을 보고하기를, “요시라(要時羅)의 사사로 전하는 말에 이미 본월 10일 풍우중에 청정 등의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와서 다시 옛 병영으로 들어갔다 합니다. 운운.” 하였다.
○ 변방의 보고로 적병이 크게 이른 것을 알고 배신 권협(權俠)을 보내어 중국에 아뢰는 글을 가지고 가서 급함을 고하였다.
○ 도체찰사가 재촉하는 일로 다음과 같이 명령하였다.
청야(淸野)하는 한 가지 일은 적을 방어 하는 데 가장 관계인데, 어렵지 않은 일을 진작 거행하지 아니하니 지극히 해괴하다.
종사관을 나누어 보내고 적간(摘奸)할 때에 각 고을 수령과 각 면의 도유사(都有司)와 이(里)의 유사 등을 군령으로 종사하여 삼령오신(三令五申: 군대에서 자세히 명령함) 한 연후에 죽음을 받아도 한이 없으렷다.
각처의 인민이 산성을 싫어하고 꺼려서 다른 고을로 옮겨 피한 자는 왜적에게 붙은 자이니 일일이 적발하여 먼저 목을 베고 뒤에 보고할 일이다.
이상을 3도에 관문(關文)으로 보내었다.
○ 이원익(李元翼)이 권율(權栗)과 의논하여 호남 군사 1만 명을 징발하여 군사를 나누고, 광양현감으로 장수를 정하여 거느리고 와서 영남에 부하게 하되, 담양․남원 등 산성이 있는 일곱 고을에는 군사의 징발을 제의하였다.
○ 남원부의 쌀과 콩과 첩입관(疊入官)인 운봉․진안․임실․구례․곡성등 여섯 고을의 쌀과 콩을 모두 교룡산성(蛟龍山城)으로 실어 들이고, 각 고을의 아문(衙門)을 성내에 지어 배설(排設)하여 장차 모두 아속(衙屬)에게 들게 하고, 대소 인민은 모두 막(幕)을 매고 가권(家眷)을 데리고 들어가 거처하도록 하였다. 각도 각읍의 산성에 다 그렇게 하였다.
○ 도체찰사는 단결을 위한 일로 다음과 같이 명령하였다.
각도 각 고을에서 향병(鄕兵)을 모집하되 수효가 많기를 기하고, 명망이 있어 아랫사라믈 통제할 만한 자로써 주장(主將)을 삼고, 그 고을에 무사(武士) 및 수령의 군관 가운데 무재(武才)와 용략(勇略)이 있는 자를 영장(領將)으로 정하여 각기 그 고을의 나장(羅將) 5인을 데리고 가도록 허락하고, 무릇 군무(軍務)에 관한 것은 영병장(領兵長)이 직접 체찰부에 보고하되 문서는 관인(官人)에게 주어서 왕래하도록 하라. 전직(前直)조관(朝官)이나 생원․진사중에서 물망이 있는 자를 도청유사(都廳有司)로 선택해 정하여 고을에서 문서에 능한 2명을 불러 사환(使喚)으로 삼도록 허락하라. 조련군(操練軍)으로 군적을 만든 외에 빠진 남정(男丁)과 전직 조관과 생원․진사․교생(校生)․좌수(座首)․한량(閑良)․재인(才人)․백정(白丁)을 60세 이하 15세 이상은 빠짐 없이 책(冊)을 만들어 별갑(別甲)으로 정하고, 조군(漕軍)․수군(水軍)으로 전에 도피하는 자는 한량의 예에 의하여 소속시키고, 양반의 종은 3명에 1정(丁)을 취하고, 부자(父子)가 동거하는 자는 그 아들을 취하고, 삼부자가 동거하는 자는 두아들을 취하고, 활과 화살은 각자가 준비하고, 화약과 조총은 관(官)에서 준비해 주고, 단결 훈련하여 죽음으로써 동맹하였다가 변방의 보고와 전령을 따라 즉시 거느리고 달려가되 일체 체찰부의 본부를 따르고, 원수(元帥) 이하는 절제하지 못한다. 운운․이상을 3도에 관문으로 보내었다. 이때에 이원익이 초계(草溪)에 있으면서 진주(晋州)로 하여금 제석당(帝釋堂) 산성을 쌓게 하였다.
○ 밀양인 이대천(李大川)과 구례인 성진실(成眞實)이 장군이라 자칭하고 망령되이 선문(先文)을 내기를 전일의 김덕령의 일(전라도․경상도를거쳐 대마도․대판까지 간다는 선문을 말함)과 같이 하였으므로 체찰사가 듣고 매우 기뻐하여 군사를 허락해 주고 충의로써 격려하였더니, 그 뒤에 속이고 망령된 것이 드러나 베임을 받았다.
28일
도원수가 경상 우병사 김응서(金應瑞)로 하여금 평행장(平行長)을 함양(咸陽)으로 청하여 잔치를 대접하고, 인하여 청정의 적정(賊情)을 탐지하였다.

2월

이순신이 계하기를, “신이 힘을 다하여 바다를 건너는 적을 막고자 하였으나 마침내 군기(軍機)를 놓쳐서 적으로 하여금 상륙하게 하였으니 신은 죽어도 남는 죄가 있습니다. 다만 각 고을 수령 등의 수군(舟師)의 일에 전혀 마음을 쓰지 않는데, 그 중에도 남원․광주가 더욱 만홀(慢忽)하였으니, 청컨데 명령을 내려 목을 베어 군중에 달아서 하나로써 백을 징계하소서. 운운.” 하였다. 비변사에 계하(啓下)하기를, “부체찰사로 하여금 두 고을 원을 문초하라.” 하였다. 그 뒤에 부체찰사가 순천에서 두 원을 잡아다가 치죄하였다.
○ 권율이 대구에 머물면서 각도의 군사를 모은 것이 모두 2만3천6백인이었다. 장수를 정하여 적이 오는 길에 나누어 방어하게 하였다.
○ 원수의 본부로 남원판관 이덕회(李德恢)가 부(府)에 있는 총통(銃筒)1천 자루를 대구에 가져다가 바치었다.

11일
남원부사 최염(崔簾)이 산성별장 신호(申浩)와 더불어 7읍의 군사를 모아 산성을 지킬 절차를 준비하였다.
○ 명나라에서 특별히 군사를 내어 은(銀)을 내어 두 번째 구제하기를 허락하므로 배신 윤승훈(尹承勳)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올려 사은(謝恩)하였다. 병부(兵部)에서 태복사(太僕司)를 시켜 마가은(馬價銀)2천 냥을 지출하여 오는 배신에게 주어 스스로 초약(梢藥)을 사도록 하고 차량(車輛)을 연도(沿途)에서 번갈아 보내주었다. 우첨도어사(右僉都御史:도찰원군문 정4품) 양호(揚鎬)를 보내어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로 삼아서 조선으로 나오는데 먼저 고시(告示)를 내어 군사를 금즙(禁楫:하지 못하도록 금하거나 방해함) 하였다.(고사(故事)에서 나왔다) 또 심유경(沈惟敬)을 조선에 보내어 먼저 적정을 탐하게 하므로 유경이 중로에서 돌아와 서울에 이르렀다.
○ 요시라(要時羅)가 본국 우리나라에 말을 전하기를, “청정이 한 척의 큰배로 건너오다가 바다 가운데서 바람을 만나 작은 섬에 대어 수일이나 머물렀는데, 내가 급히 이통제(李統制)에게 통지하여도 이통제가 의심내고 두려워하여 오지 않아서 일을 그르쳤소. 운운.” 하였다.
조정에서 바야흐로 순신이 헛되게 큰말을 떠벌려서 임금을 속였다고 아뢰므로 금부도사를 보내어 잡아다 문초하고, 전라병사 원균(元均)으로 3도수군통제사를 겸하게 하고, 나주목사 이복남(李福男)으로 전라병사를 삼았다. 남도 백성들이 한산도로 보장(保障)을 삼고, 순신을 간성(干城)으로 믿었다가 그가 파면되었음을 듣고는 사람들이 기댈 데가 없어서 짐을 꾸렸다. (요적(要賊)이 전후의 소위가 모두 우리를속이는 일인데도 우리나라는 알지 못하였으니 가통(可痛)할 일이다)

15일
심유경이 서울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였는데, 접반사 이광정(李光庭)과 감사 박홍로(朴弘老)가 따랐다.
22일
○ 전라도민을 위유(慰諛)하는 교서는 다음과 같다.
왕은 이렇게 이르노라, 멀리 있는 남도의 백성들아! 나의 말을 밝게 들으라, 내가 임금스럽지 못한 것이 너희를 신민(臣民)의 위에 있어 위태로이 여기고 두려워하여 항상 썩은 새끼로 말(馬)을 다루는 것처럼 조심되더니(朽索之戒) 불행이 섬 오랑케가 트집을 잡아 국가가 위급하게 되어 전란이 오래 얽히어 아직까지 섬멸하지 못하여 조종(祖宗)2백년 동안 길렀던 생령(生靈)으로 하여금 끓는 물과 불 가운데 허덕이게 하였으니, 나의 덕이 없는 소치라 또 어디에 허물을 돌리리요. 아! 임금은 백성이 아니면 부릴 이가 없고 백성은 임금이 아니면 섬길 이가 없는 것이니, 임금과 백성은 한 몸이라 어찌 공경하지 아니하랴. 하늘이 전란을 내리신 이래로 너희들의 힘을 번거롭게 하고, 너희들에게 일로 괴롭힌 것이 어찌 나의 본심이랴. 다만 내가 바다 도적에게 대하여 쌓인 원한과 깊은 노여움이 있으므로 마음을 태우고 생각을 괴롭혀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 주먹을 불끈 쥐고 6년 동안 경영한 거싱 오직 군사를 훈련하고 양식을 넉넉히 하여 수치를 씻고 흉한 놈들을 제거하는 데 있었는데, 영남에는 적의 피해를 혹독하게 입어서 싸우려해도 병사가 없고, 지키려 해도 양식이 없으니, 국가의 근본으로 믿을 것이 오직 호남지방뿐이라. 영남과 인접하여 적의 침입을 받을 길이 한 군데만이 아니므로 방어의 긴요함과 운수(運輸)의 노고가 다른 도 보다 백 밴 된다. 군사가 훈련되지 않았으니 속오(束伍)로 연습시키지 아니할 수 없고, 군량(軍糧)이 준비되지 못하였으니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징발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봄 조수(春迅)가 올 때 적이 덤빌 것이 염려되므로 산성 수축하는 것을 아니할 수 없고, 흉악한 꾀가 백가지로 나와 직접 서울을 두들길 우려가 있어 淸野하여 백성을 옮기는 것도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冊使가 왕래하는데 인부와 말의 징발이 끊이지 않고, 명나라 장수를 접대하는데 창졸의 부역이 서로 잇달았거늘, 하물며 지금 적병이 다시 건너와서 몰래 옛 소굴을 점거하였으니 국사가 심히 급하여 화가 아침저녁에 있으므로 장정을 뽑아서 전지로 가게 하고 양식을 운반하여 날마다 소비되는 것을 대여주니, 어느 것이나 백성을 편안케 하기 위한 도리로 백성을 사역함이 아닌 것이 아니언만 명령을 받들어 거행하는 자들이 나의 뜻을 바로 받들지 못하여 징발함이 민간을 소란하게 하고, 부역이 고르지 못하매 도망하여 떠나는 백성이 날로 많아서 호남 수천리의 자방으로 하여금 소란하여 살고 싶은 마음이 없도록 만들어 원망하는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치고, 근심하고 탄식함이 길에 가득하니, 백성의 부모된자(임금)로서 이것을 어찌 차마 하랴. 너희들이 집을 편히 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니 나의 잠자리가 편치 않고, 너희들의 배고픔을 생각하니 나의 먹는 맛이 없다. 애타는 생각으로 아픔이 내 몸에 있다. 슬프도다! 화란이 있다 해도 오늘날 처럼 심한 것이 없고, 살육의 참혹함이 오늘날보다 심함이 있지 않았다. 이것이 어찌 다만 국가의 원수일 뿐이랴. 또한 너희 선비와 백성들의 원수이니 무릇 혈기가 있는 자로서야 누가 분해 하고 수치스럽게 여기고 성내어 한 번 보복하기를 생각하지 아니하리요. 진실로 능히동지를 규합하여 충의(忠義)로써 서로 격려하여 혹은 날랜 군사를 모집하고, 혹은 군량을 모아서 모두 국가를 위해 죽을 마음을 가진다면 죽으러 온 적들이 하늘의 베임을 받을 것이다. 명나라 군사의 남북군 수십만이 연달아 나오고, 우리나라 서북도의 정예한 군사도 또한 징집되어 합세하여 남으로 내려가 일제히 용맹을 뽑낼 것이니, 너희 곰같고 범같은 장사들과 두 마음 가지지 않은 신하들은 전진하다가 죽는 것으로 영광을 삼고, 퇴각하여 사는 것을 욕으로 생각하여 과감하게 나아가 적을 죽여서 군공(軍功)을 이룩하라. 우리 선왕(先王)과 너희 조상들이 서로 믿고 걱정하여 편안히 살 터전을 작만하였는데, 후세의 우리들이 어찌 선왕이 너희 조상을 위하던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랴. 아! 일은 백성을 편리하게 하는 것을 위주하고, 정치는 실제의 혜택을 필요로 한다. 남방에서 오는 사람들이 모두 청야(淸野)에 대하여 말하니 사세를 보아 처치하여 농사 짓는 데 편리하도록 하고, 왕궁에 숙직 호휘하는 군사들을 특별히 제번(除番)하여 방어에 전력하도록 하되 군대에서 분발하여 국가에 공을 세운 자는 본도의 수령으로 임명하여 백성의 기대에 따르게 하노라. 또 생각하니, 역변(逆變:정여립 옥사)이후에 도내의 걸출한 인물들을 오랫동안 뽑아 쓰지 아니하여 그윽한 난초가 산 골짜기에 향기를 혼자 지니고, 아름다운 옥이 형산(荊山)에 광채를 감추게 되었으니, 오늘날 사방에서 인물을 불러들여 일을 같이 해야 할 본의가 아니므로 순찰사로 하여금 인재를 찾아서 기록하여 아뢰어 등용할 준비를 하도록 하였으니, 너희 선비와 백성들은 알아라. 아! 유독부(劉督府:유정(劉綎))가 주둔한 이후로 호남 사람들이 그들에게 공급하기에 재물은 부족되고 사역과 운반에 힘이 다 되어 전답은 황폐되어 쑥대가 하늘에 닿았으니, 어찌 이루 다 말하겠는냐. 지금 봄날이 따뜻하매 농사 시작할 철이 닥쳤는데도 쟁기를 잡고 호미를 쥔 백성들을 몰아다가 갑옷 입고 칼을 잡는 일을 시켜서 위로는 부모를 섬기지 못하고, 아래로 처자를 기르지 못하게 하니, 불쌍타! 이 사람들은 나의 백성이 아니란 말인가? 지금 널리 포고함에 당하여 부끄러워 낯가죽이 두껍구나. 아! 웃사람의 하는 바는 아랫 사람의 따를 바이므로 감히 섶에 눕고 쓸개를 맛보는 분함을 펼치노리 신하는 임금을 위해 죽고, 아들은 아비를 위해 죽어서 각기 충효(忠孝)의 마음을 굳게 하라. 운운.
○ 비변사(備邊司)에서는 남원은 호남과 영남의 요충인데 만일 이 성을 버려서 적으로 하여금 들어와 점거하게 되면 각처의 산성이 소문만 듣고 붕궤될 것이라 하여,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본성도 겸하여 수리하게 하였다.
○ 심유경이 의령에 이르러 사람을 시켜 평행장을 청하니 행장이 단기(單騎)로 나와서 의논하고 돌아갔다. 유경이 조선을 침범하지 말라고 극력 말하니, 행장이 말하기를, “나의 마음은 천사(天使:유경(惟敬)) 가 이미 아는 바이나, 청정(淸正)이 다시 나오고자 극력 주장하여 내 말을 듣지 아니하니 어찌하리요. 운운.” 하였다.
○ 이광정(李光庭)을 불러 돌아오게 하고, 황신(黃愼)으로 심유경의 접반사를 삼았다.
○ 전란이 일어난 지 6년에 군사들이 흩어져 도망하여 한산도의 수졸(戍卒)이 열에 한둘 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연변(沿邊) 시장에서 장사꾼을 함부로 잡아서 데리고 가는 폐단이 이때에 이르러 더욱 심하였다.
○ 황제가 총병 마귀(麻貴)로 제독(提督)을 삼아서 선대(宣大) 군사 1천명을 거느리고, 부총병 양원(揚元)은 요동 군사 3천명을 거느리고, 부총병 오유충(吳惟忠)은 남병(南兵) 4천 명을 거느리고, 유격장군 우백영(牛伯英)은 밀운(密雲)군사 2천명을 거느리고, 유격장군 진우충(陣愚衷)은 연유(延釉)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잇달아 건너오는데, 특히 계요총독군문(堺僚總督軍門) 형개(邢价)로 하여금 다 통솔하고, 참정(參政) 소응궁(簫應宮)으로 감군(監軍)하게 하고, 호부낭중(戶部郎中:정5품) 동한유(董漢儒)는 군량을 감독하게 하였다.(고사(故事)에서 나왔다

3월

황제가 또 어사(御使) 진효(陣效)를 명하여 감군(監軍)하게 하였다. 형군문(邢軍門)의 차관(差官)이 다음과 같은 칙서(勅書)를 받들고 왔다.
조선 국왕에게 이르노라. 짐(朕)이 생각하건데, 그대 나라가 가까이 동번(東藩)에 있어 대대로 공순하였는데 전년에 왜놈들이 그대 강토를 짓밟아 부수매 국왕이 의주로 파천해 와서 슬피 부르짖어 구원을 청하므로 짐이 측은히 생각하여 특별히 문무중신(文武重臣)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려 동정(東征)하여 불타는 것을 구하고 빠진 사람을 건지 듯할 뿐만이 아니었소. 그때에 그대의 온 나라가 오히려 굳게 지킬 뜻이 있어 천토(天討)를 함께 도와 다시 국토를 찾고, 왕자와 배신(陪臣)을 돌려왔고, 왜놈들이 겁내어 도망하여 머리를 숙이고 봉공(封貢)을 청하기를 짐이 그대 국력이 아직 회복되지 못하였음을 생각하여 우선 그의 청을 좇은 것은 그대를 편안케 하기 위함이 었는데, 어찌하여 휴식하는 수년 동안에 백성을 교훈하고 군사를 연습시키지 아니하다가 교활한 왜놈이 두 번째 침입하자 장황히 아뢰어 천조(天朝)에 구원을 청하므로, 이에 다시 동정(東征)하게 되어 군사를 괴롭히고 군량을 운반하여 험한 땅에 깊이 들어가 그대를 위하여 방어하고 구원하니, 짐이 소국을 사랑하는 인(仁)과 환란을 구해주는 의(義)가 가위 지극하였소, 이에 한 사람을 보내어 군사를 감시하여 싸움을 독려하고, 보검(寶劍)한자루를 군문(軍門)에 하사하여, “장사(將士)가 명령을 듣지 않는 자가 있거든 먼저 목베고 뒤에 아뢰라.” 하였으니, 그대 임금과 신하는 의당 온 나라가 노력하여 왕사(王師:명나라 황제의 군사)를 도와서 스스로 하늘에게 버림 받아서 후회를 남기지 아니하도록 하오. 운운.
배신 정곤수(鄭崑壽)를 보내어 표문을 받들고 가서 사은하였다. 고사(故事)에서 나왔다. 다만 고사에서는 이 칙서가 남원이 함락된 뒤에 있으나, 나는 문세(文勢)로 볼 때에 마땅히 이 때에 있었을 것이므로 여기에 싣는다.
○ 이원익(李元翼)이 권율(權栗)과 함께 영천(永川)에 머물면서 호남 출신들은 본도 조방장(助防將) 김언공(金彦恭)에게 소속시켜 진주의 제석당산성(帝釋堂山城)에 나아가 주둔하게 하였다.

22일
심유경(沈惟敬)이 영남으로부터 남원에 돌아와서 그대로 머무는데 접반사 가 따랐다.
○ 청정이 다시 건너오매 내지(內地)에서 불안하고 두려워하여 짐을 꾸리고 농사에는 뜻이 없고, 술과 고기로 날마다 놀이를 일삼았다.
감사가 각고을에 통첩을 보내기를, “한재가 잇달아서 파종(播種)이 때를 어겼으며 양맥(兩麥:대맥과 소맥)이 이미 말라서 어찌할 수 없는데, 무식한 어리석은 백성은 말할 것이 없거니와 이치에 밝은 선비들도 또한 장래에 대한 대책이 없이 곡식을 낭비하여 날마다 놀이로 일을 삼으니 앞날이 극히 염려된다. 이제부터는 일체 금지할 일이라.” 하였다.

28일
심유경이 부(府)의 남쪽 서원(書院)에 갔다 왔다.
○ 제독 마귀(麻貴)가 대군을 거느리고 요동으로부터 압록강을 건너 서울로 향하면서 먼저 절강(浙江) 유격장군 섭상(葉觴)으로 하여금 조선에 이르러 군량을 독려하고 군사를 모집하게 하였다. 상이 서울에 도착하여 권려가(勸勵歌:권면하고 격려하는 노래)를 지어 우리나라 선비와 백성에게 다음과 같이 돌려 보였다.(첫머리에 서문이 있다) 근일에 바다 왜놈이 불법하게도 조선을 삼키고 물어뜯으므로 천조에 소국을 생각하여 군사를 일으켜 멀리 구원하여 평양을 이기고 개성을 부수어 왕경(王京)을 회복시키고, 깊이 들어왔던 모진 오랑캐를 모두 부산으로 쫓아서 흉악한 것을 제거하고 수치를 씻어 공덕이 가장 높았고, 그 뒤에 봉공(封貢)을 의논하고 싸움을 파하여 조금 휴식하기를 바라면서 오히려 다시 재물을 소비하고 사람을 노고하게 하기를 해마다 잇달아 하여 날로 왜놈이 물러가기를 도모하여 본국을 편안케 하였으니 돌보아 줌이 가장 후하였다. 이제와서 도망했던 왜놈들이 구렁이처럼 서리어 점거하여 정세가 헤아리기 어려우매 번방(藩邦)에서 위급함을 고하니, 이치와 사세로 반드시 구원하여야 할것이므로 당사자가 이미 군사 10만 명을 훈련하여 기회를 보아 나아가 구원하나, 다만 군사가 많으매 양식이 부족되고, 전지(戰地)가 멀메 군사가 피로할까 하여, 먼저 본부(本府)에 통첩하여 국왕과 만나서 군사가 올 도로 변에 군량을 독촉하여 구원병이 쌓아두고, 다시 국내에 전달하여 장수를 선발하고 군사를 훈련하여 이르거던 서로 의각(椅角)이 되고, 물러가서 스스로 지켜서 다시는 스스로 기운을 잃어 참혹한 화를 달게 받지 말라. 아! 조선이 전일 왜란에 걸려 임금과 신하가 파천하고, 선비와 백성이 유리(琉璃)하고, 집은 무너지고 타고, 골육(骨肉)은 살육되었는데, 우리 군사가 와서 구원하자 도처에서 공급하느라고 두어 번 소란을 치루어 천리가 텅빈 것 같고, 처음에는 전란으로 다음에는 흉년으로 젊은 이는 칼날에 죽고, 늙고 약한 이는 구렁에서 죽고, 동타(詷駝)는 가시덤불 속에 있고, 백골은 쓰러진 삼(麻)과 같아, 보기에 참혹하여 이마가 절로 찡그러져 차마 말할 수도 없었다. 근자에 이 나라에 이르러 낮에 길을 다녀보면 격문을 가진 사신이 번갈아 달리매 공급하고 접대하는 것이 눈앞에 가득 찼고, 밤에 관성(錧城)에 자면서 보면 급한 문서를 가지고 밤에 달려 시끄러움이 귀에 가득하여 피와 기름이 다 마르고, 닭과 개도 편안하지 못하니, 접촉되는 것마다 상심되어 눈물이 흐름을 금할 수 없네. 조선이 무슨 연고로 이런 중한 앙화를 만났는고! 특히 왜놈에게 얕보였기 때문에 업신 여긴 바 되었고, 명나라에 구원을 빌었기 때문에 분요함을 면치 못한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에서 군사와 말을 손상시키고 금전을 소모하였고, 해마다 연달아 와서 고노와 비용이 헤아릴 수 없었으니 모두 조선을 위한 것이었다. 조선에서는 우리대군을 치르고 우리 공차(公差)를 응접하는 데 온갖 폐단이 생겨서 성내면서도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저 왜놈 때문이다. 만약 천조에서 조선 때문이 아니고, 조선이 왜놈 때문이 아니었다면 각기 일없이 편안할 것이니 어찌 전일과 오늘의 소란함이 있으리요. 그러고 본즉 조선이 아직도 스스로 강하여 왜놈을 막지 못한 고로 천조에 의뢰하고, 천조에서는 조선을 구원하기 위하여 드디어 안으로는 군사와 양식을 손실하고, 밖으로는 소란이 더하게 되었는데, 지금 만약 봉공이 성사되지 않고 왜놈이 다시 치성하면 구원병이 또 장차 올 것이다. 어찌 천조에서 먼곳에 군사 쓰기를 좋아하며, 군사와 말이 밖에 와서 고생하기를 기뻐 하랴 마는 부득이한 것이다. 만약 조선 사람이 스스로 분발할 줄 알아서 서로 겪려하여 각기 그 원수를 갚아서 성공하기를 도모한다면 나라에 남은 용맹이 있으면 어찌 왜놈을 두려워 하며, 천조에 구원을 청해 분요로운 해를 가져오리요. 그렇지 않고 약하면 남의 업신여김을 부르고 구원을 청하면 분요가 생기는 것은 반드시 자취(自取)하는 것이다. 본부가 이번에 와서는 사정을 잘 알아 돌보아 주기에 힘껏 애쓰고, 절약하여 폐를 덜도록 힘껏 애쓰건만 도움됨이 얼마이겠는가? 다만 원하기는 온나라가 군사(軍事)를 알고, 사람마다 용감히 싸워서 포악한 것을 제거하고 난을 물리치어 서로 태평을 누려서 원망도 할 필요가 없고 덕도 볼 필요가 없게 된다면 이것이 큰 다행이 될 것이다. 가령 한꺼번에 스스로 강해지지 못하더라도 어찌 구원병의 위세를 빙자하여 한 배에 타고 함께 건너는 것처럼 마음이 일치되어 혹은 죽을 힘을 내고, 혹은 군량을 수송하여 이 한 번의 노고를 각오하여 영원히 편키를 구하고, 조그마한 비용을 아끼지 말아서 큰일을 성취하지 않으리요. 일본이 다시 침범함을 어찌 족히 염려하랴. 일본은 어떤 사람이며 조선은 어떤 사람인가? 양편 군사가 싸움을 하면 피차가 서로 맞설 것이니 어리석게 사는 것이 어찌 장렬하게 죽는 것만 같으리요. 하물며 반드시 죽음을 각오하면 살 수도 있는 것이다. 어찌 범을 겁내 듯하고 솔개를 피하 듯하여 그들에게 살륙을 달게 받으랴. 또 왜놈들이 대병이 나와서 구원한다는 말을 듣고 선성(先聲)에 벌써 기운이 절로 꺾이었다. 우리 군사는 경략(經略)의 절제를 받으니 실로 전일의 폐단을 고친 것이므로 다만 해만 없을 뿐 아니라 공이 반드시 배나 되어 조선에 저버림이 없을 것이다. 조선은 미리 꾀를 같이 맞추고 기회에 당해 힘을 합하여 바다의 적을 소탕하여 조선을 영원히 편안케 하여 천조에서 간절히 돌보아 구원하는 뜻을 저버리지 말고 전일의 분요스러운 사단도 없게 하라. 나의 속된 시가 운류에 맞지 않지마는 감히 뜻 있는 이를 위하여 노래부르노니, “조선은 본시 예의지국이라 일컬어, 군사를 천히 여기고 문장을 숭상하였다. 당년에 섬 오랑캐가 방자히 덤비어, 모래 무너뜨리듯 대를 쪼개듯 평양에 들어왔네. 국왕은 파천하여 풀밭에 있고, 왕자는 포로되어 일본으로 갔네. 왕경은 불에 타서 반이나 재가 되고, 적지천리(赤地千里)에 눈앞이 참혹했네. 추억하니 이가 갈려 원한이 깊은데, 한 하늘 밑에 함께 살 수 없는 원수를 어찌 잊으랴. 뜻은 있으나 힘이 미치지 못한다고 말하지 말라. 일은 사람이 힘을 다하기에 달렸고, 창(戈)을 베개 삼고 벽돌을 운반하여 진나라를 강하게 하였다는 옛말을 그대는 듣지 않았나? 장사가 성을 내매 흰 무지개가 길게 뻗쳤고, 한 사람이 용감하매 뭇 사람이 당하지 못하는 것을 그대는 또 듣지 않았나. 남아의 기질이 하늘 땅과 대등하니, 7척의 몸뚱이로 마땅히 강상을 바로잡을 것이다. 분발하여 정치를 닦는 것은 묘당에서 힘쓸 것이요, 군사를 모집하여 근황함은 민간에서 일어나야 할 것이다.
웃사람과 아랫사람이 동심하여 서로 격려하면, 위험과 무력이 절로 떨침을 기대할 수 있으리. 구원병이 강성한데 함께 급히 서둘러, 왜적을 소탕하기를 양을 몰아냄과 같이하리. 동타(詷駝)의 왕기(王氣)가 정히 다함이 없으니, 문을 열고 호랑(虎狼)을 맞아들이 듯 하지 말라. 복숭아를 심고, 가시나무를 심는 것이 과연 어느 것이 좋겠으며, 기왓장이 되어 완전한 것과 옥이 되어 부서짐이 어느 것이 향기롭겠나, 예로부터 한 마디 말로 나라를 일으킬 수 있다하였으니, 나는 이제 노래를 사대부들에게 부르노라. 원컨대 맹령한 장사가 사방에서 일어나, 길이 동해를 맑히여 파도가 일지 않도록 하자.“ 하노라.(조선에서 등서(藤書)하여 각도에 돌려보였다).
○ 호조판서 김수(金睟)를 충청․전라도에 보내어 대군의 군량을 징수하게 하였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청정(淸正)이 두 번째 건너온 뒤에 인심이 흩어져서 편히 살 뜻이 없는데, 연해(沿海)의 각 읍에는 격군(格軍)의 일 때문에 농사와 장사가 모두 폐지되고 도로가 통하지 못하는데, 하삼도(下三道)중에 충청도가 더욱 심하여 이 봄철을 당하여 농기를 지고 나오는 자가 드므니 어찌 수확이 있으리요. 이것은 적이 없어도 스스로 패하는 형상입니다. 지금 호조판서는 역시 이 뜻을 알고 가서 권농(勸農)하는 일을 겸하여 할 일로 말씀하여 보냄이 어떠하오리까?” 하니, “그대로 하라” 하였다. 김수가 명을 받고 남으로 내려갔다.
○ 대군의 선봉 부총병 양원(揚元)이 군사 3천여 명을 거느리고 서울에 도착하므로 한성좌윤(漢城左尹) 민준(閔濬)과 예조판서 정기원(鄭期遠)으로 접반사를 삼았다.
한효순(韓孝純)이 순천으로부터 한산도에 들어가서 호군(犒軍)하였다. 권율(權栗)이 진주로부터 순천으로 향하였다.

4월

호조판서 김수(金睟)가 전주로부터 남원에 이르러 창고 곡식을 친히 검사하고, 창고의 문을 봉하고 인하여 사운(四韻)한 편을 지어 선비와 백성에게 돌려보이기를, “4월의 맑고 화창한 좋은 철이 돌아왔는데, 10년 동안 말 타고 갑옷 입은 객의 마음 재촉되네. 온갖 꽃은 나무에 피어 사람을 맞아 웃고, 좋은 비는 바람을 몰아 낯에 스쳐 오네. 쓸개를 맛본 지 여러 해에 손바닥에 침 뱉으나. 적을 평정할 계책이 없으매 홀로 누각에 오르네. 군량이 부족하니 걱정이 적지 않은데, 간 곳마다 눈썹 찡그림 또한 가소롭네.” 하였다. 이날 밤에 김수가 부의 서쪽 주포촌(周浦村)에 나와 머물고, 이튿날 심유경을 맞아 용두정(龍頭亭)에서 연회하고는 우도로 가서 관청 곡식을 검사하였다.

8일
권율이 영남으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였는데, 본도의 감사․병사가 모두 와서 모였다.

13일
권율이 영남으로 돌아갔다.
○ 임금이 ‘이순신(李舜臣)의 공과 허물을 상쇄(相殺)할 수 있다.’ 하여 놓아주어 죄를 다스리지 아니하고 원수부(元帥府)에 종군(從軍)하게 하였다.
○ 시랑(侍郞) 손헌(孫憲)이, “심유경이 오랫동안 조선에 머물면서 항상 강화한다는 것을 핑계로 자주 왕래하여 백성만 괴롭히니, 비록 전화(戰禍)를 푼다 하나 실은 왜놈을 도우는 것이니, 먼저 유경을 베어 죽여야 조선에 나갈수 있겠다.”하고, 차관(差官)을 조선에 파견하여 군량 사정을 묻고 인하여 유경이 왜놈을 도운 실정을 탐하게 하니, 유경이 듣고 급히 체찰사․부체찰사․도원수 및 3도의 감사․병사를 남원으로 청하여 미리 답사(答辭)를 만들었다.
○ 양원(揚元)이 군사를 거느리고 남원으로 내려오면서 우리조정에 통첩하기를, “본부(本府)는 남원성을 지키겟으니 본고을의 태수는 대관(大官)으로 임명해 보내 주시오. 운운.”하였다.
조정에서는 곧 문과통정(文科通政)전 남도병사 임현(任鉉)을 남원부사로 삼았다.
○ 집에서 기르는 닭들이 눈이 멀어 다 죽었다. 계역(鷄疫)이 이때에 비롯하였다.
○ 마귀(麻貴)가 모든 장수와 병마(兵馬)를 거느리고 서울에 들어왔는데, 접반사는 이조판서 장운익(張雲翼)이었다.

5월

문안사(問安使)를 남원에 보내어 심천사(沈天使)에게 문안하고, 5일에 연회를 베풀어 대접하였다.
○ 천사 심유경이 초청하므로 이원익(李元翼)․권율(權栗)․박홍로(朴弘老)가 모두 와서 모였다가 원익은 곡성으로 향하여 인하여 구례에 이르러 호남 출신의 군사들을 점검하여 제석당 산성으로 보내었다.
○ 대군의 군량을 준비하기 위하여 벼슬을 강제로 파니 가선(加膳)․통정(通政)이 길에 잇달았고, 명목도 없는 세금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지경이었다.
○ 양 총병의 중군(中軍) 이신방(李新芳)이 먼저 군사 2천여 명을 거느리고 접반사 정기원(鄭期遠)과 함께 남원에 도착하여 곧 본도 순찰사로 하여금 급히 각 고을의 군사를 불러 모아 성을 수리하는 것을 맡게 하여 여장(女墻)을 고쳐 쌓기를 전보다 배나 높고 견고하게 하고, 또 명병을 사역시켜 바깥 흙성을 쌓게 하여 기한을 정하고 역사를 독촉하여 밤낮으로 쉬지않았다.
○ 왜놈 요시라(要時羅)가 경상 우병사의 진에 이르러 병사에게 말하기를, 오는 가을 서울로 갈 때에 내가 사또님을 위하여 이 진주의 길로 오겠소.“하고는 곧 김해로 돌아갔는데, 막 영문(營門)밖에 나가자 우리가 준 의관을 모두 벗어 땅에 던지고 갔다.
(통분하다. 요시라놈이 간첩이 되어 전후에 우리를 그릇친 것이 한 가지가 아니다. 강화를 약속한 것이라던지. 이순신을 모함한 일 같은 것은 더욱 용서할 수가 없는 것이고, 이때에 와서도 소위가 역시 이와같이 멸시하는 데도 오히려 죽이지 못하고 임의로 왕래하도록 하였으니, 아! 나라에 사람이 없다.)

6월

양원(揚元)이 전주에 도착하였는데 중군이 달려가서 영접하였다.
○ 적의 괴수 평수길(平秀吉)이 또 금오(金吾)로 대장을 삼아 20여 추장(酋長)과 군사 50여 만을 거느리고 청정(淸正)․행장(行長)등의 두 번째 침범하는 세력을 도왔다.(금오는 이 때에 16세였다)

13일
양원이 전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남원에 도착하였는데 중군과 민준(閔濬)이 따랐다. 총병이 용성관(龍城館)에 유진(留陣)하고 심유경은 남정(南亭)으로 옮기었다.

19일
수군(舟師)의 여러 장수가 한산도로부터 바다에 내려가서 거제견내량(巨濟見乃梁)의 적과 교전하였는데, 보성군수 안홍국(安洪國)이 죽었다.
○ 양원이 심유경으로 하여금 의령으로 달려가서 행장을 보고 강화를 의논하고 인하여 적정(賊情)을 탐지하게 하니, 유경이 출발하여 영남으로 향하였다. 그날에 손시랑(孫侍郞)의 차관(差官)이 남원에 도착하여 유경의 간 곳을 물으니, 양원이 사실대로 고하고 차관과 함께 함양으로 향하여 27일에 의령에 도착하여 유경을 잡아 돌아왔다.
○ 이원익이 호남 향병(鄕兵)을 본도 도사 김순명(金順命)에게 맡기어 복수병(復雖兵)이라 칭하고, 순찰사가 금성(金城)을 지키는 데 가서 돕도록 하였다.
○ 제독 마귀(麻貴)가 유격장군 진우충(陣愚衷)을 시켜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전주성을 지키어 남원의 세를 돕게 하였다.

7월

7일
양원이 친히 심유경을 압송하여 차관과 함께 서울로 향하였다.
○ 적의 배가 이 달 초로부터 잇달아 건너왔다. 원균(元均)이 여러 장수로 하여금 나아가 탐지하게 하고, 8일 수병(水兵)여러 장수가 웅천 바다에 이르러 적을 만나 교전하여 배 10여 척을 부수었다. 적의 세력이 매우강성하므로 퇴진하여 원병(援兵)을 청하였다. 이때에 도원수 권율이 남원으로부터 하동에 도착하여 접반사에게 관문(關文)을 보내기를,“제도(諸道)도순찰사 권은 왜의 정세에 관한 일로 관문을 보내오. 8일에 수군 여러 장수가 부산 바다에서 시위(示威)하였는데, 경상 우수사 배설(裵楔)이 큰 배 두척으로 선봉이 되어 웅포(熊浦)에 이르러 창졸에 적을 만나 접전하기를 한참 동안 하였는데, 화살에 맞아 죽은 왜놈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소. 왜놈들이 모두 배를 버리고 상륙하여 달아나면서 빼앗은 군량 2백여 석을 배와 함께 불태우고, 또 1천여 척이 본도로부터 바다를 덮어 오는데 우리 군사가 가로막으니 적병이 피해 갔소. 운운.”하였다. 권율은 원균이 친히 바다에 내려가지 않고 적을 두려워하여 두류(逗留)하였다 하여 전령을 발하여 곤양(昆陽)으로 불렀다.

11일
○ 권율이 곤양에 도착하였는데 원균이 명령을 받고 이르렀다. 권율이 곤장을 치면서 말하기를, “국가에서 너에게 높은 벼슬을 준 것은 한갓 편안히 부귀를 누리라 한 것이냐? 임금의 은혜를 저버렸으니 너의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이다.”하고, 곧 도로 보내었다. 이날 밤에 원균이 한산도에 이르러 유방(留防)하는 군사를 있는 대로 거느리고 부산으로 향하였다.
○ 제석당 산성을 파하고 그 군사를 수군(舟師)에 이속(移屬)시켰는데 원수(元帥)의 본부였다.
○ 임금이 남쪽 변방에 일이 급하다는 말을 듣고 선전관을 각진(各鎭)에 나누어 보내 군사를 독려하여 방어하게 하였더니, 이에 이르러 선전관이 수군으로부터 남원에 이르러 민준(閔濬)에게 고하기를,"8일에 수군이 접전하였는데 소득이 손실을 보충하지 못하였고, 또 적의 배가 바다 위에 가득 차서 국사가 망극하오. 운운.“ 하였다.

16일
적병이 수군을 습격하여 부수매 통제사 원균이 죽었다. 처음에 원균이 원수에게 곤장을 맞고는 분을 품고 물러나와 남은 군사를 있는 대로 거느리고 달려서 부산에 이르렀는데, 적선 1천여 척이 또 본토로부터 나왔다. 원균이 노를 재촉해 저어 배를 전진시키니 적병이 물결처럼 흩어져서 우리를 대적하지 못할 것닽이 보였다. 원균이 이 틈을 타고 전진하여 그칠 줄을 모르니, 뱃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물고기(수령(水嶺)를 이미 지나서 대마도가 장차 임박하였으니 뱃길을 잘못 들어 우리는 살아날 도리가 없게 되었다. 천만의 수병이 적을 한 놈도 잡지 못하고 스스로 죽을 땅에 들었으니, 오늘의 일은 누가 그 허물을 책임질 것이냐?”하였다. 원균이 듣고 드디어 배를 돌리게 하니 배가 거센 물고개를 넘으매 노를 저어도 소용이 없어 전라 우수영의 배 7척이 동해로 표류하여 떠내려갔다. 원균이 여러 배를 독촉하여 급히 물러나서 밤낮으로 노를 저어 겨우 가덕도(加德島)에 이르렀는데 적병은 우리 군사가 기세를 잃은 것을 알고 곧 신구(新舊) 병선 5백여 척을 동원하여 날 듯이 어지러이 추격하니 우리 군사는 또 영등포(永登浦)로 물러났다. 적병은 우리 군사가 영등포에 도착하면 반드시 땔나무와 물을 구하려 상륙할 것을 예측하고 밤에 날랜 배 50여 척을 영등포로 보내어 상륙시켜 매복하고 있었다. 우리 군사가 과연 그곳에 이르러 적이 조금 멀어지자 여러 장수들이 급히 군인들을 상륙시켜 땔나무와 물을 준비하느라고 분주한데 문득 포(抱)소리와 고함치는 소리가 바다를 진동하며 복병이 사면에서 일어나 이리 저리 베고 찍었다.
원균 등이 황급회여 어쩔 줄을 몰라 구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급히 배를 끌고 물러와 온라도(溫羅島)에 도착하니, 적의 배가 많이 와서 수도 없었다. 해는 이미 서쪽으로 기울고바다는 어두우매 피차가 군사를 거두고 적을 엄중히 경계하여 아침이 되기만 기다렸다. 원균이 밤에 여러 장수를 모아서 의론하기를, “적세가 이 모양이니 아무래도 지탱할 수 없다. 하늘이 우리를 돕지 않으니 어찌 하랴. 오늘의 일은 일심으로 순국할 따름이다.”하였다. 배설(裵楔)이 팔을 걷어 붙이며 큰소리로, “용맹을 낼때는 내고 겁낼때에 겁낼 줄 아는 것은 병가(兵家)의 요긴한 계책이오. 우리가 부산 바다에서 기세를 잃어 군사들이 놀래어 소란하게 되었고, 영등포에서 패하여 왜적의 기세를 돋구어 주어 적의 칼날이 박두하였는데, 우리의 세력은 의롭고 약하여 용맹은 쓸 수 없으니 겁내는 것을 써야겠소.”하였다. 원균이 그 뜻을 알고 노하여 말하기를, “죽이고야 말겠으니 너는 많은 말을 말라.”하였다. 설이 이에 제 배에 돌아가 사사로이 적에게 소속된 여러 장수와 더불어 군사를 퇴각시킬 것을 꾀하였다. 밤중에 적이 가만히 비거도(鼻居도)10여 척으로 하여금 몰래 우리 배 사이를 뚫어 형세를 정탐하고, 또 병선(兵船)5․6척으로 가만히 우리의 진을 둘러쌌는데, 우리 복병선(伏兵船)의 장수와 군사들은 모르고 있었다.
이날 이른 아침에 복병선이 이미 적에게 불태워져 부서졌다. 원균이 크게 놀래어 북을 치고 바다를 울리고 화전(火箭)을 쏘아 변(變)을 알리는데, 문득 각 배의 옆에서 적의 배가 충돌하며 총탄이 쾅쾅하니 군사들이 크게 놀래어 실색하였다. 원균이 비로소 적이 와서 정탐한 것을 깨닫고 추격하여 잡으려 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묘시(卯時)에 적의 배가 가까이 포위하여 고함소리가 하늘을 울리고 총알이 비오듯 하였다. 원균이 여러 장수와 더불어 닻(碇)을 내리고 접전하는데 형세가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휘마는(卷)것 같아 감히 당적할 수 없었다. 배설이 바라보고만 있다가 퇴각하므로 균이 군관을 시켜 잡아오게 하니, 설이 항거하다가 싸움이 한창일 때에 管下 12척과 더불어 달아났다. 균이 힘을 지탱할 수 없어 여러 장수와 더불어 닻을 올리고 흩어져 달아나 배를 버리고 언덕에 오르니, 적병이 추격하여 내려와서 함부로 죽였다.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충청수사 최호(崔湖)등이 죽었고, 여러 장수와 군사가 죽은 것이 이루 헤일 수 없었다. 원균이 살찌고 웅장하여 한 번에 밥 한말(一斗), 생선 50마리(五束), 닭과 꿩 3․4마리를 먹었다. 평상시에도 배(腹)가 무거워 행보를 잘하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싸움에 패하자 앉아서 죽음을 당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기롱하였는데, 곡성에 사는 생원 오천뢰(吳天賚)가 시를 짓기를,“한산도는 나라의 남문인데, 무슨 일로 조저에서 장수를 자주 바뀌었나, 처음부터 원균이 나라를 저버인 것이 아니라, 원균의 배(腹)가 원균을 저버렸네.”하였다. 표류하였던 전라 우수영의 배 7척은 그 뒤에 경상좌도에 돌아왔다.
(원균이 비록 패하여 죽었으나 불충불의(不忠不義)한 무리는 아닌 듯한데, 그 뒤에 기롱하는이가 심히 많고 달천(達川)의 기록에는 빼고 넣지를 않았다. 그 기록에 든 사람들은 과연 모두 충의를 다한 사람으로써 균이 그들의 만분의 1도 따라갈 수 없는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어찌 취하고 버리는 것이 그리도 공정하지 못하고, 당시에 장수된 자들이 원균보다 뛰어난 자가 몇 명이나 있었는고, 그 뒤에 논공(論功)할 때에 균도 역시 선무원훈(宣武元勳)의 반열에 참여 되었으니 아! 왕법(王法)이 공정한 것을 볼수 있도다. 만약 균을 불충하다 하여 적에게 죽은 사실을 죄준다면 저 관망(觀望)하고 퇴각하여 달아나서 목숨만을 위한 자에게는 장차 무슨 죄를 주어야 할꼬.)
○ 적병이 수륙으로 아울러 전진하여 살육 약탈함을 이루 헤일 수 없었다. 한산도에 이르러 진막(鎭幕)을 불태우고 돌아갔다. 한산도에서 피하여 나가지 못하고 있던 남녀들은 모두 살육을 당하였다. (당초에 수길(秀吉)이 금오(金吾)를 내어 보낼 때에 명령하기를, “해마다 군사를 보내어 그 나라 사람을 다 죽여 빈 땅을 만든 연후에 일본서도(西道)의 사람을 이주시킬 것이니, 10년을 이렇게 하면 성공할 수 있으리라, 다만 사람이 귀는 둘이 있고 코는 하나 뿐이니 코를 베어 한 사람 죽인 것을 표시하여 바치고, 각기 코를 한 되(升)씩 채운 뒤에야 생포(生捕)하기를 허락하라. 운운.”하였으므로, 이번에 나와서는 사람만 보면 죽이건 안 죽이건 문득 코를 베었으므로 그 뒤 수십 년간에 본국 길에서 코 없는 사람을 매우 많이 볼 수 있었다.)
○ 도로 이순신(李舜臣)으로 삼도수군통제사를 겸임시켰다. 이때에 순신이 영남에서 원수의 막하에 있었다.
○ 양원(揚元)이 서울로부터 남원에 돌아와 적세가 급하다는 말을 듣고 모든 군사가 성 수리하는 역사를 독촉하였다.
○ 경상 우병사 김응서(金應瑞)가 아병(牙兵:호휘하는 친병)정옥수(鄭玉壽)를 시켜 가만히 창원 지경에 들어가서 적을 정탐하게 하였더니, 적의 패(牌)가 길가에 서 있는 것을 옥수가 가지고 왔는데, 그것은 금오(金吾)등이 길을 갈라 올라온다는 글이었다. 그 글에, “8월 3일에 각 진에서 출발하여 수륙다섯 길로 전진하여 바로 대명(大明)에 범하기로 하는데, 청정(淸正)은 군사 10만 명을 거느리고 밀양을 거쳐 초계․거창으로 향하고, 윤직무(允直茂)는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김해․창원을 거쳐 진주로 향하고, 성친(盛親) 등은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남해․홍양을 거쳐 나주․영산포(榮山浦)로 향하고, 행장(行長)․의지(義智)․의홍(義弘)은 군사 수십만을 거느리고 거제․남해를 거쳐 구례(求禮)를 향하고, 정성(正成)․갑비수(甲斐守)등은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광양․순천․구례를 거쳐 15일에 모두 남원․전주에 모이도록 하는데, 전장(戰將)이 27명이요, 군사가 60만 명으로 혹은 충청도로 향하고, 혹은 서울로 향하고, 혹은 경상좌도를 거쳐 도로 내려올 일. 운운.”하였다.
(적의 선성(先聲)이 비록 허장(虛張)한 데 가까우나 마침내 그들의 거친 길이 이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 뒤에 호남 각 고을에 바둑처럼 널려진 것이 거의 50여 둔(屯)에 이르고, 도로 경상좌도로 내려온 것과 연해(沿海)에 먼저 둔친 것이 몇 진(陳)이 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본즉 패에 쓰인 숫자가 거의 그럴 듯도 하였다.)
○ 조방장 김언공(金彦恭)이 호남 군사를 거느리고 한산도로 가다가 중로에서 수군(舟師)이 패했다는 말을 듣고 퇴각하여 진주로 돌아왔다. 권율이 언공으로 하여금 섬진강에서 질러 막게 하였더니 거느린 무사(武士)들이 본도가 급하다 하여 모두 장수를 버리고 돌아왔다. 권율이 듣고 언공을 잡아다가 신문하였다.
○ 체찰사 이원익과 도원수 권율이 경상좌도의 장수와 군사를 거느리고 대구의 공산산성(公山山城)을 지키고, 진주목사 등으로 정개산성(鼎蓋山城)을 지키게 하고, 조방장 김해부사 백사림(白士霖)등으로 안음 황석산성(安陰 黃石山城)을 지키게 하고, 우병사로 악견산성(岳堅山城)을 지키게 하였다.
○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이 순천에 나아가 진을 쳤다.
○ 남원의 교룡산성(蛟龍山城)을 파하였다.
○ 호조판서 김수(金睟)가 우도로부터 도로 남원에 이르러 주포(周浦)에 머물렀는데, 조정에서 또 호조참판 이광정(李光庭)을 남원으로 보내어 힘을 합하여 군량을 주선하게 하였다.
○ 양원(揚元)은 민준이 나이 늙었으므로 서울로 돌려보냈다.(이때에 곽재우는 경상좌도 방어사로 있었다)
○ 곽재우(郭再祐)가 영산(靈山)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키었다.(이때에 곽재우는 경상좌도 방어사로 있었다)

8월

3일
적병이 대거(大擧) 수륙으로 함께 전전하는데, 밀양․김해․진해․거제 의 길에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닿았다.(금오(金吾)는 대장으로서 부산에 머물렀다)

4일
여러 갈래의 적이 이미 내지(內地)에 들어와서 행장 등 선봉은 사천 남해등지에 분탕질을 하고, 청정 등은 이미 초계․함안을 통과하고, 이튿날 의홍 등의 군사는 곤양(昆陽)의 금오산(金熬山)과 노량(露梁) 등지에 배를 대고 산중을 수색하여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고, 관청과 민가를 모두 불태우고, 선봉이 하동을 지나 진주․섬진으로 들어왔다. 진주목사는 정개산성을 버리고 우병사는 악견산성을 버리었다. 갑비수 등 적병이 광양으로 향하니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이 퇴각하여 옥과로 향하였다.

6일
적선이 나아와 악양(岳陽)에 대었는데, 영남 바다로부터 5․60리 사이에 배가 가득 차서 미치 바다가 물이 없는 듯하였다. 척후(斥候)의 정탐이 이미 끊어져 소식을 알 수 없었는데, 남원부에서 하인(下人) 양제(梁齊)등 다섯 사람을 시켜 달려가 적의 경계를 탐지하게 하였더니, 삽암(揷岩)에 이르러 높은 곳에 올라 바라보고는 곧 돌아와 적세를 보고하였다.
○ 통제사 이순신이 원수의 진중(陣中)으로부터 출발하여 진주의 서로를 거쳐 구례로 향하다가 적선이 이미 나루터(津口)에 대어 있는 것을 보고는 곡성을 거쳐 서해로 향해 갔다. 이때 설이 배 12척으로 퇴각하여 진도의 벽파정 밑에 있었는데, 순신이 그리로 달려갔다.
○ 구례현감 이원춘(李元春)이 석주(石柱)로부터 퇴각하여 본성으로 돌아와 창고를 불사르고 피하여 남원으로 갔다.

7일
적병이 구례에 들어왔다. 이때 심유경이 요동에 있다가 일이 급한 것을 듣고 관하(管下)의 우파총(牛把摠)으로 하여금 가정(家丁:집안에 부리는 병사)5명과 통사 1명을 거느리고 행장의 진으로 보내었는데, 이날 파총이 서울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였음으로 본부에서 군관 하원서(河冤瑞)로 길을 인도하게 하였다. 구례 성 밖에 이르니 적병이 우루루 나오다가 심유경의 성명을 쓴표기(標旗)를 보고는 그쳤다. 이때 의홍 등 여러 추장(酋長)이 악양에 있으므로 파총이 악양으로 가서 여러 추장을 보고 유경의 뜻으로써 물러가라고 타이르니, 행장 등이 말하기를, “관백이 여러 장수에게 명령하기를, ‘반드시 전라도를 함락시키라.’ 하니, 사세가 중지할 수 없소.”하고, 금․은․칼을 보내었다. 파총이 이내 돌아와서 서울로 향하였다. 의홍 등이 구례에 이르니 적의 선봉이 남원 지경에 들어가 분탕(焚蕩)질하였다. 양원(揚元)이 성중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출발하여 원천(原川)으로 향하는데, 정기원(鄭期遠) 임현(任鉉)이 따랐다. 숙성령(宿星嶺)에 이르러 군사를 사열하고 돌아왔다. 이날 밤에 성중에 있던 우리 군사는 모두 도망하여 흩어졌다. 청정 등 적이 이미 창녕․초계․합천․삼가(三嘉)를 지났는데 지나간 각 고을에는 적지(赤地)가 되어 남긴 것이 없었다.

8일
양원이 군사를 나누어 성을 지키는데, 성 위에 8백 명이요, 토장(土墻)안에 1천 2백 명이고, 유군(遊軍)이 1천 명이었다. 우리 나라 각진에 가정(家丁)을 나누어 보내 들어와 함께 지키기를 독려하였다. 이날 운봉 현감의 급한 보고 가운데는, “영남 좌우도의 적이 이미 거창․산음 등지에 이르러 모두 분탕질하였습니다. 운운.”하였다.
○ 이때 본도의 피난민이 혹은 경상좌도로 들어가고 산중으로 들어간 사람도 또한 많았다.
○ 문안사(問安使) 오응정(吳應井)을 남원 총병부에 보내고 바로 응정을 본도 방어사로 임명하였는데, 성중에 머물러 있으면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 이광정(李光庭)이 남원 성중에 머물러 있다가 이날 남문으로 향하여 나오면서, “우리 나라 군사가 산성을 맡아 지킨다면 직책은 비록 다르나 나도 또한 죽음으로써 함께 지키려 하였더니, 산성은 이미 파하였으니 여기에 있어야 무슨 소용이fi."하고 주포(周浦)에 이르러 김수(金睟)와 함께 향교로 가서 변란을 대기하였다.

9일
흉악한 적이 둔산령(屯山嶺)을 넘어서 산안의 여러 마을을 불질렀다.
○ 운봉현감의 급한 보고에, "적병이 진주․구례로부터 산에 들어와 수색하는 놈들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하였다. 이때 내가 부사(府使)의 서기(書記)로 성중에 있으면서 가족을 먼저 산중으로 들어가게 하였더니 지금 흉악한 적이 연일 산을 수색한다는 말을 듣고는 충성할 마음도 비록 간절하나 노모(老母)가 의지할 데가 없으므로 부득이 동문으로부터 나와서 집에 이른즉 동리는 텅 비었고, 다만 두어 명 하인이 산에 숨어 내가 오기를 고대(苦待)하고 있었고, 처자는 영(嶺) 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상룡추(上龍湫)가에 있는 산막(山幕)에 들어갔다.(내가 부모를 일찍 잃고 외조모에게 의지하여 자랐으므로 외조모를 어머니라고 불렀다.)
○ 임금이 체찰사와 도원수에게 전교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 호위하게 하였다. 이때에 체찰사와 도원수의 거느린 군사들이 이미 다 흩어져 갔고, 왕이 부르매 단기(單騎)로 서울로 달려갔다.

10일
구례현감 이원춘(李元春)이 퇴각하여 남원 성으로 들어갔다.
○ 양원이 적병이 들어와 점거할까 염려하여 부사 임현(任鉉)으로 하여금 산성 안에 있는 가옥을 모두 불사르게 하고 본성 밖의 인가도 불태우게 하였다.
○ 김수(金睟)가 이광정(李光庭)과 더불어 향교에서 출발하여 부(府)\의 북촌(北村)으로 퇴각하였다가 서울로 향하였다.

11일
오후에 흉악한 적이 숙성령(宿星嶺)을 넘어서 혹은 10여 명, 혹은 10여 명씩 끊임없이 잇달아 내려 보내 원천(原川)의 촌락을 정탐하고, 밤에는 성밑에 들어와서 엿보고 돌아갔다. 다음날 행장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영(嶺)을 넘어 원천(原川) 원평(元坪) 등에 둔을 치고 선봉이 이미 요천(蓼川)강에 진출하였는데, 동남 4․50리 안에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가리우고 포성이 땅을 진동하였다. 나는 아직 왜놈을 직접 겪어보지 못하였으므로 용추(龍湫) 일동(一洞)은 군사를 피할 수 있다 하여 동형(洞兄) 진사(上舍) 정사달(丁士達)과 양덕해(梁德海) 형과 상의하여 적이 이리로 오리라는 소문을 들었을 처음에 정 진사는 파근원(波根源) 아래로 들어가고, 양형은 나를 따라서 상룡추(上龍湫) 가로 들어갔더니 이날 밤에 본촌 사람이 적에게 잡혀 결박되었다가 도망해 왔다. 이것을 보고 비로소 병화(兵禍)의 참혹한 것을 알았으며, 여기에는 잠깐도 머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곧 양형과 더불어 가권 80여명을 이끌고 달아나 모산(母山)으로 향하여 장차 멀리 가고자 하였더니, 팔량현(八良峴)에서 무너진 병사가 달려와서 말하기를, “영남의 적이 이미 산음․안음에 이르러 아침이나 저녁에 여기에 도착할 것이다.”하므로, 양형과 더물어 노상에서 바야흐로 오도가도 못하게 된 것을 걱정하였더니, 운봉현 선비 주난수(周蘭秀)란 사람이 지리산(方丈)서쪽 기슭으로부터 달려와서 큰소리로 급히 외치기를, “당신들은 적병이 가까이 닥친 것을 모르오? 대방(帶方)의 연기와 불꽃은 하늘에 넘치고, 영남의 포성은 땅을 진동하니 이 깊은 산 험한 골짜기를 잃으면 중로에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오. 우리는 이미 큰산에 막을 쳐 놓았으니 당신들은 피할 수 없다하지 말고 한 곳에 함께 머물면서 같이 죽기로 마음을 맹세하면 산을 수색하는 날 도적(蕶賊)은 걱정할 것이 없오.”하였다. 나는 양형에게 말하기를, "이 말도 역시 이치가 있다. 지금 만약 거기에 갔다가 화를 당한다 해도 그것은 주군(周君) 때문이요, 가족을 보존하고 생명을 건진다 해도 그것은 주군 때문이다.“하고, 곧 망랑현(望郞峴)에 올라가 밤을 지내었다.
○ 병사 이복남(李福男)․조방장 김경로(金敬老) 산성별장 신호(申浩)등이 모두 남원 성중에 들어갔다. 처음에 복남이 순천으로부터 옥과현에 이른즉 현감 홍요좌(洪堯佐)가 창고를 다 불지르고 단신으로 변란을 대기하고 있었다. 복남의 거느린 군사도 또한 거의 다 흩어지고 다만 수하의 편비(編裨) 50여 명만이 있었다. 남원 서창(西倉)으로 가서 성중으로 향하는데, 김경로가 금성(金城)으로부터 오다가 시전(柿田)에서 복남을 만났다. 복남이 기뻐하며 손을 잡고 같이 죽기로 맹세하고 말고삐를 나란히 하여 진군하여 비홍령(飛鴻嶺)을 넘어서니 적병이 이미 성 밑에 박두하였다. 북남이 바라보고 눈을 부릅뜨고 손에 침 뱉고 말하기를, “군부(君父)의 급난(急難)위해 일할날도 이 날이 아니냐! 국가의 큰 은혜를 갚을 날도 이날이 아니냐! 병졸은 분발함으로 말미암아 날래지고, 군사는 곧음으로써 씩씩하나니, 사생(死生)화복을 어느 겨를에 따지겠느냐고?”하고, 크게 나팔과 호각을 불며 북을 치며 서서히 행군하여 만복사(萬福寺) 앞 대로를 따라 행군하여 남문으로 해서 조용하게 들어갔다. 외촌에서 불지르고 노략질하던 적들이 불을 멈추고 물러서서 손가락질하면서 구경하고, 성 밑에 있던 적들은 군대를 머물러 움직이지 아니하고 놀라서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여러 왜적이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힐문하여 말하기를, “저 사람은 누구이기에 당돌함이 이 같으냐?” 하므로, “본도의 병사 이복남(李福男)이다.” 하였더니, 그를 장히 여기지 아니하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13일
적병이 크게 성 밑으로 진군하여 오니, 산에 가득 차고 들을 뒤덮어 호호탕탕(浩浩蕩蕩:물이 광대하게 흐로는것과 같이 몰려 오는것)하였다. 선봉 행장(行長)과 의지(義智)등이 먼저 방암봉(訪岩峰)에 이르러 진을 치고 큰 기를 세우고 포를 터뜨리고 호각을 부니 여러 괴수들이 이것을 신호 삼아 전진하여 요천(蓼川)가에 이르러 세 길로 나누어 포위하였다. 1운(運:군대편성의 단위 4대)은 방천(防川)에서 선원(禪院)을 거쳐 향교 앞까지 뻗쳐 장성교(長城橋)를 지나 서문 밖에 이르러 결진하고, 1대는 칠장(漆場)으로부터 시내를 가로질러 덕암봉(德巖峰) 밑에 구지소(舊紙所) 앞을 지나 도로 내를 건너 율장(栗場)으로 뻗쳐 대모천(大母泉)을 지나 서문 밖의 적과 서로 결진하니, 연하여 뻗치고 돌고돌아 달무리처럼 백겹이나 에워쌌다. 유격병(遊擊兵)은 바로 평탄한 길을 따라 동문으로 향하여 포를 쏘고 고함을 지르면서 나왔다 물러났다 하며 도전하고, 왜장은 혹은 향교산(鄕校山)․기린산(麒麟山)에 올라 가고, 혹은 덕암봉(德巖峰)․빙고봉(氷庫峰)으로 올라가 군막을 지어 진을 치고, 혹은 진중에 있어 지휘하기도 했다. 이때 양원과 이신방은 동문에 있었고, 천총 장표(蔣表)는 남문에 있었고, 모승선(毛承先)은 서문에 있었고, 병사 이복남은 북문에 있어 군대를 나누어 성첩을 지켰다. 양원이 군사를 시켜 주라를 불며 포를 쏘게 하고, 성중에 전령하여 군기(軍器)를 함부로 허비함을 엄하게 금했다. 오시에 적 5명이 곧장 동문 밖으로 들어와 돌다리 위에 벌려 섬으로 양원이 몰래 문을 나가 외성(外城)안에 서서 장사를 뽑아 적을 쏘게 하였다. 우리나라의 능한 포수 부장(部將) 김익룡(金翼龍)과 겸사복(兼司僕) 양득(梁得)과 별패진(別牌陳) 정금(鄭金) 등이 일시에 총을 쏘니, 세 놈이 그 자리에서 죽자 남은 놈들이 시체를 운반해 물러갔다. 미시에 거의 수만 명에 이르는 적병이 칠장(漆場)․선원(禪院)으로부터 고함치며 전진하여 성 바깥 백 보 지점에 벌여 서서 연달아 총을 쏘며 소리 높여 크게 고함쳤다. 성중에서 잇달아 진천뢰(震天雷)를 발사하니 적병의 사상자가 매우 많이 발생하자 적은 도로 물러갔다. 양원(揚元)은 적이 생명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백주에 감히 전진하여 오니 밤에 반드시 난입할 것이라 예측하여, 마름쇠(菱鐵)를 참호 밖에다 많이 박고 못판(釘板)을 만들어 몰래 다리에 묻었다. 이 날 밤에 양원이 친히 문밖에 있으면서 변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밤 2경(二更)이 되어 잠간 발자취 소리가 있으므로 고개를 쳐들고 이들을 기다리니 과연 세 적병이 벌써 못판을 제거하고 다리를 건너오려 하므로 명나라 군사 수명이 창을 들고 출전하여 그들을 베었다. 양원이 즉각 4개 문의 다리를 철거시켰다. 사면의 적진에서는 아침까지 불을 놓고, 밤새도록 쉬지 않고 고함을 지르며 방포(方袍)하였다. 그 나머지 적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분탕질을 하니 백 리 안이 연기와 불길로 하늘이 뒤덮혔다. 이때 본도 감사(監司) 박홍로(朴弘老)가 이미 바뀌고 황신(黃愼)이 그를 대신하여 감사가 되었으나, 변산(邊山)으로 달아나 왜병을 피하고 있었다. 도사(都事) 김순명(金順命)은 군대가 무너진 뒤에 홀로 금성(金城)에 있다가 총부(總府)의 징원차관(徵瑗差官)과 같이 남원(南原)으로 향하여 가다 적성진(赤城津)에 이르러 왜적을 만나 물러갔다.

14일
적병이 숙성(宿星)․원천(原川)으로부터 산으로 흩어져 학익진(鶴翼陣:학이 날개 펴듯 좌우익을 펴고 몰려오는 진법의 하나)을 벌리고 내려오는데 잠깐도 쉴 사이 없이 성밖에 와서 사면으로 나누어 에워싸고 토목(土木)의 역사를 전보다 더욱 급하게 서두르며 비운장제(飛雲長梯:성 공격에 쓰이는 사닥다리)를 많이 만들어 성에 오르는 기구로 삼고, 대모천(大母泉) 모퉁이에다 풀․흙․돌을 운반하여 참호를 매워 길을 내고 그 밖에다 장대를 가로 매었는데 그것이 거의 백여보에 이르렀다. 민가의 판자를 가져다가 장대에 기대여 죽 늘여 세우고, 또 성밖의 장벽을 뚫어 모두 총쏘는 곳으로 삼았다. 또 높은 사다리를 삽교(揷橋) 모퉁이에다 매어 성안을 굽어보면서 무수한 탄환을 쏘아대니, 이 성의 안팎을 지키던 명병들이 일시에 모두 죽어벼려 동남 모퉁이의 성첩이 다 비게 되었다. 정오에 적병이 또 칠전(漆田)으로부터 고함치며 돌진하면서 일시에 총을 쏘아대니, 탄환이 우르릉거리는 뇌성과 쏟아지는 우박 같아 그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서문의 왜적은 수송용 차에다 만복사(萬福寺:절이름 서문밖 2리 앞에 있는데 나한(五百羅漢)이 있었다) 의 사천왕(四天王)을 싣고 와 성밖을 돌며 시위하니 대군이 더욱 놀랐다. 양원이 말하기를, “적병은 연일 도전하고 아군은 움츠려들어 약세를 적에게 보인 것이 진실로 적지 않았으니, 이제 군대를 내보내 공격해야 한다.”하자, 중군(中軍)은 말하기를, “이것은 만전한 계책이 아니니 성을 굳게 지켜 응원군을 기다리는 것만 같지 못하옵니다.”하였다. 그러나 양원은 듣지 아니하고 곧 천여 명의 군병을 모아 문을 열고 나가 싸우게 하니, 적병은 속임수로 물러갔다. 아군이 돌다리 밖까지 따라가자 적병은 문밖으로부터 상하로 잠복하였다가 기어서 앞으로 나와 포위하고 무찔러 죽일 심산이었다. 양원이 급히 주라를 불게 하고 초요기(招搖旗)를 자주 펄렁거리니 성밖의 군사들이 도로 들어왔는데,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이 수삼 명이었다. 날이 저물자 군사를 거두어 굳게 지켰다. 이날 적병 50여명이 운봉현(雲峰縣)에 가 분탕질을 치고 산을 뒤져 가면서 사람을 죽이고 노략질을 하였다.

15일
양원이 동문의 성위에 있으면서 주리를 몇 차례 불게 하였으나 성중은 고요하므로 관가(管家:하인)를 시켜 성위로 나가서 크게 두어 번 소리치게 하니, 왜놈 5명이 달려서 동문 밖 돌다리까지 와 끓어앉아 전갈이 있기를 청하였다. 양원이 통사(通事)로 하여금 몇 마디 말을 퍼뜨리니, 다섯 왜놈이 방암봉(訪岩峰)으로 달려 돌아갔다가 곧 다시 돌아와 또한 몇 마디를 하였다. (어떤 사람은, “양원이 적병에게 서로 사자(使者)를 내왕하게하자” 말하였으나 행장이 “먼저 명병을 보내라.”고 회보하였다고 말하나, 자세하지 못함)
양원이 그 자리에서 관가(管家) 두 사람을 불러 이야기하여 내보내니, 왜놈의 사자가 명병을 대동하고 방암봉을 향하여 갔다. 적의 장수와 만나 일을 의논하였는데, 행장(行長)은 음식을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저녁때에 왜장의 사자 5명이 말을 타고 곧장 동문에 이르러 오니, 양원이 용성관(龍城館)에 들어가 앉아 왜사를 보고 의논하니, 왜사는 행장(行長)의 말이라면서, “빨리 성을 비우기 바랍니다.” 하였다. 양원이 말하기를, “내가 15세부터 장수가 되어 천하를 횡행하면서 싸워 이기지 못한 적이 없소. 이제 정병 10만명으로 이 성을 지키는데, 퇴각하라는 명령은 없었소.” 하니, 왜사들이 도로 남문으로 나아갔다. 왜사가 또 전언하기를, “천여 명의 잔졸을 가지고 어떻게 백만의 군대를 당할 것입니까? 천장(天將)께서는 조선에 무슨 은혜가 있어 후회할 일을 남기려 하시오?” 하였다. 양원이 몇 마디 말을 일러 보냈다. 여러 날 포위당하였는데 적의 형세는 더욱 성하여 호호탕탕하고 위급하기 바람탄 불과 빠른 우레 같았다. 점차 성에 다가와 공격전을 더욱 독촉하니 형세는 다급하여 날마다 점점 외롭고 위태해 갔다. 성 내외의 천병들이 서로 부르짖기 시작하고, 우리 나라의 남녀들도 동분서주하며 울었다. 적이 이것을 알고 침공을 배나 더했다. 이 날 밤에 큰비가 오니, 적병은 어둠을 틈타 성을 공격하였다. 우리 군대와 중국 군대는 대전하느라 잠자고 밥먹을 틈도 없었다. 이때 심산궁곡까지도 왜적의 발굽에 거의 짓밟혔고, 운봉(雲峰)․주성(周性)의 무리들도 모두 약탈을 당했다. 나와 양형(梁兄) 및 백암(白巖) 이공직(李公直)의 형과 가족 수백 명이 돌으 모서리를 붙잡고 기어서 내려갔다. 황류동(黃流洞:지리산의 황령사(黃嶺寺)와 향로봉의 사이에 있는데, 수원(水源)은 반야봉(般若峰)에서 나와 삼기(三岐)묘봉(眇峰)을 두루 돌아서 내려온다.)에 이르러 밤을 지냈다. 날마다 고성(孤城)을 바라보니 적병이 달 무리처럼 에워싸 위급하였다. 포성은 하늘을 진동하고, 불빛은 낮과 같이 밝았다. 저 관군들이 힘을 다하여 지키고 방어하는 고생과 흉한 왜적이 제멋대로 날뛰는(匪茹隆梁) 형상을 생각하니 가슴 아픔을 이기지 못하여 울음소리와 눈물이 함께 나오고, 한숨 짓고 탄식하였다. 여러 사람에게 말하기를, “만일 1개 여단의 군대가 내 손에 있다면, 한 번 죽음을 무릅쓰고 전진하여 다가가 성원하여 아군의 갈망하는 마음을 풀어 주고, 저 왜적들의 물어 뜯는(呑筮)기세를 꺽는 것이 무슨 어려움이 있으랴만 가석하다! 양양(襄陽)한 성이 함락에 임하였는데 장순(將順)의 외 손(隻手)으로 할 수가 없었고, 하란(賀蘭)의 주둔병이 이미 흩어지니 제운(霽雲)의 혈성(血誠)도 무엇에 쓰겠소. 뜻은 있으나 속수무책(束手無策)이니 다만 통분할 뿐이요.”하니, 모든 병사들이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 청정(淸正)등의 군사가 함양(咸陽)에 이르렀는데, 선봉 수천 명이 진군하여 황석성(黃石城) 밑에 진군하여 통사(通使)를 시켜 개산(介山)을 불러 말하기를, “너희 부친이 여기 있으니 문을 열고 나와 보라.”하였다. 백사림(白士霖)이 개산을 참수하여 성밖으로 내던졌다. 왜적이 말하기를, “비록 백 명의 개산을 죽인다 하더라고 우리가 무엇을 아깝게 여기겠는가?”하였다. 다음날 적ᄇᄋ이 고함쳐 말하기를, ‘성을 비어 두고 나가면 쫓아가 죽이지는 않겠다.“하니, 백사람이 줄을 타고 성에서 매달려 내려가고 군사는 무너져 달아났다. 적이 잆성하여 마구 죽이니, 함양군수(咸陽郡守) 조종도(趙宗道)․안음현감(安陰縣監) 곽준(郭焌) 등은 가족과 함께 죽었으며, 근처 첩입관(疊入官)가 장졸 등 죽은 자가 5백여 명에 달했다.(개산은 김해(金海)사람이다. 아버지는 임진란 초부터 적에게 붙어 적이 성을 함락시키는 계획을 도왔다.)

 

 

 

 

 

 16일
흉적(凶賊)이 남원을 함락했다. 총병(總兵)의 중군(中軍) 이신방(李新芳), 천총(千摠) 장표(蔣表)․모승선(毛承先), 접반사(接伴史) 정기원(鄭期遠), 병사(兵使) 이복남(李福男), 방어사(防禦使) 오응정(吳應井), 조방장(助防將) 김경노(金敬老), 별장(別將) 신호(申浩), 부사(府使) 임현(任鉉), 통판(通判) 이덕회(李德恢), 구례현감(求禮懸監) 이원춘(李元春) 등이 다 남원에서 죽었다. 양원이 50여 기(騎)로써 서문으로 나와 포위망을 뚫고 달아났다. 이 날 적의 괴수 등이 양원이 성을 나가도록 최촉하였고, 양원도 또한 결국 함락을 면하지 못할 줄 알고서 군사를 버리고 갈 계획을 하자, 성중의 사람들이 법석대며 두려워하여 곡성이 우레 같았다. 적병이 성 밑에 육박하며 더욱 급히 공격하여 이경에 이르러 남문으로 마구 몰려들어(어떤 사람은 대모천 모퉁이로 해서 성에 올라왔다고 하자만 그렇지 않았음) 어둠을 틈타 마구 찌르니 명병과 우리나라 장사들이 달려가 북문 안에 몰렸다. 적병이 칼을 휘드르며 딸라와 죽이니 명병과 우리 군사 양군이 북성 안에서 모두 죽었다. 성주에서 전후하여 죽은 자가 거의 5․60명에 이르렀다. 왜적은 성 안팎의 관사와 민가를 다 불살라 버렸다. (양원이 접반사(伴臣)를 살리고자 그가 타지 않는 남은 말에 태워 같이 나왔다. 정기원은 말타는 데 익숙하지 못하여 누차 떨어져 잘 따라오지 못했다.)
당초에 마귀(麻貴)가 여러 장수에게 본부하여 말하기를, “혹시 위급한 사태가 있게 되면 남원은 전주에 알리고, 전주는 공주에 알리고, 공주는 서울에 알려 차례차례로 달려가 응원하도록 하라.”하였는데, 이때에 진우충(陣愚衷)이 전주에 있었으나 와서 응원하지 아니하고 또 급함을 알리지도 아니하여 대군이 몰사하게 되었다. 이 날 밤에 나는 양형(梁兄)더러 말하기를, “성이 이미 함락되었으니 사람들이 살아날 길이 없소.”하고, 서로 슬퍼하며 탄식했다. 양형이 말하기를, “성이 함락된 뒤에 적은 반드시 대거 산을 수색할 것이요, 그대는 모름지기 노복을 인솔하고 산을 내려가서 양식을 운반하여다 산에 머무를 밑천을 장만하시오.”하여, 나는 곧 창두(蒼頭:하인)10여 명을 인솔하고 문현(文峴)에 올라 망을 보았다. 이날은 바로 청정(淸正)의 군대가 함양으로부터 운봉으로 넘어 들어갈 때이다. 황산(黃山) 상하에는 적병이 가득 찼고, 밤중에 고촌(高村)으로 내려가 본즉 적병이 넘쳐나 길을 건너기 어려운 형세이므로 바로 그대로 돌아왔다. 즉시로 양(梁)․이(李) 여러 사람과 같이 황류천을 건너 은신암(隱身菴)의 옛터로(향로봉의 북쪽기슭 아래 있다) 들어가 막을 치고 머물렀다.

17일
행장(行長)의 선봉은 임실(任實)을 지나 분탕질하며 도둑질하고, 청정의 군대는 모두 운봉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행장 등이 전주로 향하자, 진우충은 성을 버리고 도망쳐 달아났다. 청정의 군사가 운봉으로부터 두 길로 나누어 남원으로 향하였는데, 1대는 바로 안신원(安信院)으로 향하고, 또 1대는 행진하여 구등굴(九等窟)을 거쳤다. 왜적 5명이 원주(原州)로부터 구등굴에 이르러 대화(對話)하고, 양로(雨路)의 군대가 모두 물러나 운봉으로 돌아가 몇일을 머무르면서 지리산으로 들어가 수색하다가, 혹은 사찰에 유숙하고, 혹은 산꼭대기에 모여서 잤는데, 사람ᄋ르 죽이고 물건을 약탈하는 참상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19일
적병이 전주로 들어와 모두 분탕하여 없애고 성과 참호를 헐어버렸다.

20일
청정의 군대는 운보으로부터 장수로 향하여 남워느이 동천(東川)을 지나 번암(番岩)․철천(鐵川) 등지에 머무르면서 차산(此山)에 가 대수색을 벌였다. 근읍의 사람들은 이 산이 군읍과 거리가 약간 멀고, 또 적병이 서울로 향하는 직로가 아니라 하여 피해 들어간 자가 부지기수였는데, 씨도 남기지 아니하였다. 이튿날 적병은 장수(長水)와 진안(鎭安)을 지나 그대로 전주로 향하여 갔는데, 거치는 촌락과 산골짝에서 분창하고 살략(殺掠)함이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전주로 이르러 양정포(良正浦)에 주둔하고, 행장등의 군대와 같이 시장을 열고 남원에서 얻은 중국 물건을 뽐내 보였다. 적의 괴수들이 상의하여 말하기를, “임진년 싸움에 8도가 모두 함락되었으나 조선이 이때까지 부지(扶持)해 온 것은 수로(水路)로 서로 통하여 호서․호남 양호의 힘이 서로(西路)에 미친 소치니, 지금의 계책으로는 군대를 수륙으로 나누어서 응원하는 길을 막응ᄅ 것만 같음이 없다.”하고, 즉일로 군사를 나누어 청정 등은 경기로 직행하고, 수가(秀家)와 행장(行長)등은 회군하여 도로 내려가고, 의홍(義弘) 등의 적은 나누어 우로(右路)로 내려가 열읍(列邑)에 주둔했다.
○ 적의 경보가 대단히 급하기 때문에 중전(中殿)과 대가(大駕)가 사울을 떠난 관서(關西)의 강계(江界)길로 향했다.

22일
적병 16명이 몰래 은신암의 산막으로 들어와 두 사람을 살해하므로 내가 그들을 격파하고 양(梁)․이(李) 등과 같이 월락동(月落洞)으로 넘어 들어가 머물러 있었다.

30일
수가와 행장 등의 군대가 임시로부터 남원을 지나 원천(原川) 원평(元坪)에 진을 치고 산골짜기를 대수색하며 무수한 사람을 죽이고 약탈했다.

9월

1일
행장 등의 구례로 해서 순천으로 향하여 왜교(倭橋)에 결전하여 성을 쌓고 막을 치고, 본부의 사람들에게 패(牌:일종의 신분증명서)를 주어 속여서 꼬여 소집하고, 군대를 나누어 본성과 광양성(光陽城)을 지키고, 사방으로 군대를 흩어 외촌에 주둔하며, 항복하여 붙은 사람과 같이 집결하여 한 마을을 만들고, 벼와 곡실을 수확하여 식량을 준비했다. 패를 받은 사람은 각각 쌀 3말씩을 납부했다. 수가는 섬진강(蟾津江)으로해서 한산도(閑山島)에 유둔했다. 적의 괴수들은 먼저 천여 척의 배를 서해로 보냈다. 이때에 통제사 이순신은 잔병(殘兵)을 가지고 진도(珍島)의 울돌목(嗚梁口)에다 유진하고 사태의 추이를 기다렸다.

2일
양․이 여러 사람과 같이 도로 은신암으로 내려갔다. 이때에 왕래하는 왜적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산골짜기를 날마다 수색하게 되어 길이 꽉 막혀버려 식량주머니가 텅 비었으나 어쩔 수 없이 향로봉으로 해서 도로 은신암으로 돌아왔다. 하루를 머무르니 왜적의 형세가 약간 멋게 되었다. 이(李) 등은 운봉으로 나갔다가 이어서 연상산(烟象山)으로 내려가고, 우리들은 밤에 황류천을 건넜는데, 늙은이와 어린이들이 병들고 고단하여 행보가 더디었다. 밤새도록 가서 겨우 정령성(鄭嶺城)에 도달하여 잠간 수고, 아침에 서운암(瑞雲菴)터에 내려가 매복하여 날이 저물기를 기다리니 올라 왔던 산적이 모두 내려갔다. (수색하는 왜적이 연락부절하였다.)
월운령(月雲嶺)을 달려 지나가 노숙(露宿)하고, 아침에 파근산(波根山)에 올라가 정찰하다가 처음으로 한 동리 사람을 만나 왜적의 형세와 고향 소식을 들었다. 그대로 숲속에 숨었다가 저녁때에 경덕사(敬德寺)로 내려가 유숙했다. 인솔한 늙은이와 어린이도 아직까지 모두 탈이 없다. 보는 사람마다 눈물 흘리며 말하기를, “본촌 사람으로 왜적에게 죽은 자가 백여 명에 이르렀고, 유아들을 모두 내버렸다.”했다. 며칠을 머물면서 왜적의 형세를 염탐하여 보고 노복(奴僕)을 본촌에 보내 벼를 베어 오게하여 비로소 조석 끼니를 잇게 되었다. (이와같은 사사로운 일은 기록할 만한 것이 못 도나 이런 사실을 예로 들면 다른 일을 알기 때문이다.)

6일
명나라 장수 부총병(副總兵) 해생(解生) 등이 적병을 직산(稷山)의 금오평(金烏坪)에서 대패시키니 청정 등은 쫒겨 도망쳐 영남으로 내려갔다. 처음 양호(揚鎬)가 평양에 있으면서 적병이 이미 경기에 다달았다는 말을 듣고, 밤낮으로 달려 서울에 도착하여 조선으로 하여금 부교(浮橋)를 동작나루(銅雀津)에 가설하게 하고, 먼저 부총병 해생․참장(參將) 양등산(陽登山), 유격 파새(擺賽)․파귀(頗貴) 등의 군사 수만 명을 보내 적을 호서(湖西)의 땅에서 맞이하였다. 해생 등이 금오평(金烏坪)에 이르러 군사를 쓰기에 편리한 곳을 둘러보고, 군대를 3협(三協)으로 나누어 좌우로 엄습할 계책을 했다. 진우충은 전주로부터 도망질치니, 적병이 뒤를 따라와 벌써 금강(錦江)을 건었다. 임금이 밤낮으로 울면서 경리(經理)에게 호소하니 경리(經理)는 위안시키며 말하기를, “혹시 관군(官軍)이 불리하더라도 주군(主君)의 궁권(宮眷)들은 탈이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하고, 곧 마귀(麻貴)와 같이 대군을 영솔하고 길을 떠나 수원에 이르러 목채(木寨)를 치고, 갈원(葛院)에 군대를 보내어 개천(介川)의 상하에다 매복시켜 후원부대로 삼았다. 적병이 공주(公州)․천안(天安)으로부터 바로 서울로 향하여 5일 동틀 무렵에 전추참(田秋站)을 경유하여 홍경원(洪慶院)으로 향하니, 선봉이 벌써 금오평에 이르렸다. 명병의 좌협(左協:좌익(左翼))은 유포(柳浦)로 나가고 우협(右協:우익(右翼))은 영통(靈通)으로 출발하여 대군이 곧장 평탄한 길을 따라갔다. 바라 소리가 세 변 일어나니 함성이 사방에서 어울렸다. 빠르게 대포를 쏘고, 모든 깃발이 일제히 흔들리고, 철마(鐵馬)들이 구름처럼 떼지어 날뛰고, 창검이 번개처럼 번쩍였다. 달려가 돌입하면서 마구무찌르니 적의 시체가 들에 가득했다. 하루에 6차례나 맞붙어 싸우니 왜적의 형세가 산란해졌다. 날이 절물어서 각각 군사를 거두어 둔취하였다. 청정은 밤에 여러 군대에 명령하여 내일 아침에 죽음으로써 싸울 계책을 결정토록 했다. 해생은 비밀리 여러 장수에게 명령하기를, “오늘 왜적의 형세를 본즉 내일에 결사적으로 싸울 것을 결심하고 물러갔으니 부디 죽음을 걸고 용감하게 싸워서 군율에 어기지 말라. 그리고 저 왜적은 교활하니 패하여 물러가게 되면 반드시 산길로 해서 갈 것이다. 험한 곳에서는 기병과 보병이 형세가 다르니 끝까지 추격하는 것은 불가하다.” 하였다. 다음날 먼동이 틀 때 적병은 일제히 계속 쏘며, 학익진(鶴翼陣)을 벌이고 진군하여 오는데 흰 칼날을 서로 휘둘러 살기가 하늘까지 뻗치고 기괴한 형상은 사람들의 눈을 매혹하게 하였다. 명병이 포를 응사하면서 돌연히 이러나니 철편(鐵鞭)아래에 왜적은 손을 쓸 사이도 없었다. 싸움이 붙은 지 얼마 안되어 적병이 패하여 도망하여 목천(木川)․청주(淸州)를 향하여 달아났다. 대군의 힘이 다 되고 또 산간 벽지의 길로 나갔기 때문에 마귀(麻貴)는 추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군사를 휴식시켰다가 길을 나누어 추격하는 것을 내려갔다. 그 뒤에 왜적이 본국으로 돌아가 조선에서의 3대전(三大戰)을 말하기를, “평양(平壤)․행주(幸州)․금오평(金烏坪)이라.”하였다 한다.
(어떤이는 말하기를, 금오평 싸움에 명병은 홍경원에 결진하고 비밀리 화약을 군막의 풀 숲에 묻었다가 왜적이 이르어 오자 거짓 진을 버리고 달아나ᅵ, 적병이 앞을 다투어 들어와 막을 불사르다가 화상(火傷)되고 죽은 자가 많았다.“하니, 이 말이 근사하다. 경리(經理)는 수원에 가지 아니 하고 있다가 같이 종남산(終南山)에 올라가 멀리 기세를 바라보고 말하기를.” 적병이 패하여 달아났다.“고 하였다.)

9일
양형과 같이 그대로 파근사(波根寺)에 있었다. 본부의 아전 정대인(鄭大仁)․배입(裵立)등이 내가 여기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산으로 올라와 말하기를, “근자에 왜적의 형세를 보면 결코 근절될 이치가 없습니다. 겨울이 깊어져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적이 수색이 그치지 아니하오면, 애잔한 우리 남은 백성은 몸둘 곳이 없을 것이니 아무개는 강개하고 용감한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가 본래부터 아는 터인즉 격문을 사방으로 띄워 모집한다면 얼마의 장정을 얻을 것입니다. 그래서 험한 곳에 웅거하여 적이 오는 길을 끊어버린다면 부모 처자는 걱정 없이 보호하게 될 것 입니다.”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내 뜻과 같다. 그러나 적의 떼가 가득 차있어 한 장의 격문도 통과하기 어려워서 민망함을 참고 이 곳에 머물러 있자니 다만 통분할 뿐이었는데, 그대가 이토록 꾀하니, 실로 내 마음을 알았다.” 하고 서로 날짜를 약속하여 장사를 모집하기로 하였으나 또한 왜적의 형세가 갑절이나 치열하여져 사람과 물건이 통과하지 못하게 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5일
양형과 같이 가족을 인솔하고 송림사(松林寺)터로 내려가니 상사(上舍) 정사달(丁士達) 형제가 처음 파근원(波根源)에게 패배를 당하여 몸만 빠져 남으로 달아났다가 내가 고향에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남촌에서 밤에 몰래 오다가 들 가운데서 나와 만나게 되어 서로 손을 잡고 통곡하였다. 이어서 산으로 들어가 한 곳에다 초막을 쳤다.
○ 청정 등 적이 청주에 이르러 길을 나누어 내려갔다. 1대는 청산(靑山)황간(黃澗)을 지나 성주를 거쳐 남도로 내려가고, 다른 1대는 함창(咸昌)상주(尙州)로부터 인동(仁同)․대구(大邱)를 거쳐 내려가고, 또 1대는 문경(聞慶)․군위(軍威)․비안(比安)으로 해서 내려가 모두 전에 있던 소굴로 들어갔다. 윤직무(允直茂) 등은 청주로부터 공주로 도로 나와 청정의 군대 수만 명과 호서의 우로(右路)를 분탕질하고, 여러 고을에 나누어 주둔하여 민패(民牌)를 내주며 백성을 달래고 쌀을 주니 곤궁한 인민이 다투어 들어갔다.
○ 의홍(義弘) 등 적은 순창(淳昌)․담양(潭陽)으로부터 사방으로 흩어져 주둔하고 지켰다. 창평(昌平)․광주(光州)․옥과(玉果)․동복(同福)․능주(綾州)․화순(和順) 같은 데는 적병이 많고, 죽이고 노략질 하는 것을 엄금하며 민패를 발급하여 불러다 항복시키니, 달려가 붙는 자가 날로 많아져서 저자를 열어 교역함에까지 이르렀는데, 연도(沿道) 각읍의 왜적도 모두 이같이 하였다. 동복(同福)의 생원(生員) 김우추(金遇秋)가 본현의 왜장(倭長)에게 드린 글에 이르기를, “누구나 부리면 백성이요, 누구나 섬기면 임금이니 한 호(戶)로 편입되어 성인의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하고, 끝에다 시를 지어 붙이기를, “칼을 짚고 동해를 건너오니, 장군은 왕의 보필감이요. 사람 죽이기를 즐기지 않으면, 천하가 모두 돌아올것이요.”(杖劒渡東海 殺人 如不嗜 四海盡歸來.) 하였다. 그 뒤 난리가 평정되자 사림(士林)들이 왜적에게 붙었다는 것으로 죄수었다. 이때에, “창전(昌全)․옥삼(玉三)․동이(同二)․곡일(谷一).”이란 말이 있었는데, 전(全)이란 것은 창평 한 고을 사람이 전부 들어갔다는 것을 말함이고, 3․2․1이라 함은 그 괴수가 옥과에서 셋, 동북에서는 둘, 곡성에서는 하나라는 말이다.

17일
적장 평조신(平調信)이 만여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임실(任實)로부터 남원(南原)에 이르렀다가, 다음날 구례로 향하여 그대로 본현에 유둔하고, 산에 들어간 사람을 유인해 내다가 민패를 주고 쌀도 주었다. 도로에다 난동을 금지하는 군대를 두어 왕래하는 왜적으로 하여금 수색하고 노략하지 못하게 하니, 궁한 백성이 우선 당장에 편안함을 다행으로 여겨 투항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이때에 적병이 상도(上道)로부터 혹은 백여명, 혹은 5․60명, 혹은 천여 명, 만여 명에 이르는 집단이 연속하여 내려왔다.
○ 적장 요시라(要時羅)는 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우도(右道)로부터 곡성(谷城)으로 와 주둔하여 민패를 주며 백성을 달래니, 투항해 들어가는 자가 여간 많지 않았다. 그리고 민간에 가서 약탈하는 것은 엄하게 금지하니 본현과 남원 남서면의 무지한 어리석은 백성들이 앞을 다투어 들어가 민패를 받았다. 남원 출신(出身) 하원서(河鴛瑞)의 딸이 곡성의 왜적에게 포로가 되었는데, 하원서는 민패를 차고 적진으로 들어가 그 딸을 보고, 요시라에게 원통함을 호소하니, 요시라는 주관하는 왜장을 불러 물은즉, “하씨의 딸은 금법을 내리기 하루 전에 붙들려 왔다.”하여, 원서를 찾아서 데리고 올 수가 없었다.

18일
적병 수천 명이 우도로 해서 남원에 이르렀고, 다음날 구례로 향하였다가 이어서 사천(泗川)으로 들어갔다.

19일
적병 만여 명이 우도로부터 남원에 이르렀다가 다음날 운봉으로 향하였는데, 산을 수색하여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곤 하였다. 근일에 내려오는 왜적은 다 남원을 거쳐 구례로 향하여 갔다. 운봉․함양 사람들이 산에서 내려가 추수를 하는데, 이들 왜적이 불의에 몰려 닦쳤기 때문에 살해 당하고 약탈 당한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栗) 찬획사(贊劃使) 이시발(李時發)이 서북의 정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별장(別將) 한명련(韓明連)․경상좌방어사(慶尙左防禦使) 고언백(高彦伯)으로서 선봉을 삼아 청정을 추격하여 비안(比安)까지 이르렀으나 따라 잡지 못하였다.

22일
내가 왜적 5명을 불우(佛隅:부의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에서 죽였으나 그 머리를 베이지 아니하였다. 이때에 정(丁)․양(梁) 제형과 함께 한 곳에 있으면서 낮에는 산에 올라가고, 밤에는 막사로 모이기로 하였다. 날마다 왜적의 동태를 바라보는데, 도로에 그들이 연락부절하였다. 많은 왜적은 그대로 간혹 하루 걸러 내려오지만, 낱 왜적은 항상 내려왔다. 우리 나라에는 두려워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여겨서, 행군함에 있어서도 항오를 바로하여 습격에 대비하는 태도가 없었다. 내 여러 형더러 다음과 같이 명하였다.
“가슴 아프다, 흉한 적들이여! 부끄러울지고, 우리 나라여! 영남에서 당초에 사변을 당하였을 때, 사람들이 군사(軍事)에 익숙하지 못하여 각자가 살길을 도모하는데, 곽재우(郭再祐)는 한 비난한 서생으로 남보다 앞서 자진하여 일어나, 혹은 공격하고 혹은 추격하여 매우 많은 적을 베이니, 우도의 여러 고을이 12일 동안에 수복되었소. 이것은 국사(國士)의 기풍이 감발(感發)한 바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소? 오직 우리 도는 본래부터 예의의 고을이라 일컬어 왔고, 충절과 효행이 고금에 드러났으니 임금께서 오늘날에 바라는 것은 호남과 영남이 다를 바 없는데, 왜적이 본도에 들어온 뒤로 한 사람도 의를 들고 일어나 왜적을 토벌하여 사로잡고 목베어 바치는 사람이 없소. 비록 혹독한 왜적이 득실거려 어떻게 할 만한 방책이 없다. 하지만 임금님의 수복(收復)하려는 소망을 생각하고 신민(臣民)의 직분상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생각한다면, 꼭 한 번 죽어야 할 처지인데 그대로 산 숲속에 매복하여 편안히 있으면서 자신만을 도모해서야 되겠소. 이것으로 논하면 척수공권(隻手空拳)으로라도 참으로 나아가 적과 싸워 죽어야 마땅할 것이니, 한 몸의 화복을 어찌 헤아릴 겨를이 있겠소? 더욱 지금 적병은 사방으로 흩어져 왕래하는 것이 고약(孤弱)하고, 우리 인민은 사변에 익숙해져서 밤을 이용하여 서로 통하니 만일 이때에 효유하여 장정을 모집해서 복병을 설치하여 왜적을 사로잡고, 군사를 몰아쳐 추격하면, 곽의사(郭義士)가 우도를 수복한 공격을 우리도 오늘에 쉽게 얻을 것이오. 고군(孤軍)을 이끌고 뱃전을 치며(擊楫)강을 건너가면 용맹을 날릴 수 있거니와 초수(楚囚)가 되어 산중에서 서로 마주앉아 우는 것이 무엇이 충성이 될 수 있소. 어떻게 하면 적당한 사람을 얻어, 여러 형과 같이 그를 도와 대사를 도모하겠소? 이 서투른 말을 괴이하게 생각 마시고, 오직 나라를 살리고 백성을 구제하는 것을 급선무로 생각하여 힘을 합쳐 그것을 도모하면 다행하겠소.”
여러 형들은 모두 충의를 가진 선비라 내 말을 듣고 크게 탄식하여 말하기를, “그러한 사람이 적격자 가까이 있는데 하필 멀리 가 구하겠소?” 하고, 동시에 바로 나에게 한 번 죽을 것을 격려하였다. 나는 분한 나머지 마음을 스스로 누르지 못하였다. 여러 사람과 모의하여 군사를 모집하고 왜적을 토벌한다고 소리쳤으나, 교활한 썩은 선비로 일찍이 향리에서 믿음을 받지 못하여 한 사람도 같이 일하겠다고 응모해 오는 사람이 없고, 말하기를, “간신히 생명을 보존하여 오늘까지 왔는데, 아무개는 무슨 꼴로 또 남은 백성을 죽이려 하는가?”하였다. 나는 여러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기를, “근일에 피살된 사람들이 모두 의병 때문이란 말이요? 붙들려서 죽는 것보다는 순국(殉國)하여 죽는 것이 낫지 않소. 나 역시 이들 왜적의 천심(淺深)을 알지 못하지만 한 번 죽음으로써 시험하여 사인(士人)들의 의혹을 풀어주기 원하오.” 하였다. 이날 이른 아침에 식구들을 풀속에 은신시켜 두고 단지 두사람으 종만을 인솔하고 성부(城府)로 향하여 출발하였다. 박언량(朴彦良)은 사람됨이 강개(慷慨)하여 실로 충용(忠勇)한 사람인데, 내가 간다는 말을 듣고 활을 끼고 따라나섰다. 불우(佛隅)에 이르러 높은 데로 올라가 망을 보니, 흉적(凶賊) 5명이 성중으로부터 총을 메고 검을 휘두르며 이리로 왔다. 나는 박언량한테 말하기를, “우리는 4명이고 적들은 5명으로 중과부적(衆寡不敵)이지만 우리는 의리에 분발한 신예병(新銳兵), 저들은 바로 멀리 와 싸워 피곤한 군사다. 더욱 그대는 일당백할 용사요, 내 또한 한 번 죽음을 결심하였으니 이것으로서 헤아린다면 적은 바로 안중에 들어온 것이다. 힘써 싸우라.”하고 말이 끝나자, 길가에 매복했다. 적병이 앞으로 오자 박언량과 함께 일시에 발사하니 잇달아 5명의 적이 맞았는데, 두 놈은 거꾸러지고 세 놈은 검을 던지고 살려주기를 구했다. 나는 하인(蒼頭)에게 명령하여 쳐죽이게 하니, 하인은 내가 수급(首級)을 필요로 하는가 여겨 귀를 베고자 하므로 내가 제지하며 말하기를, “내가 왜적을 토벌하는 것은 수급을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고, 백성된 직책을 다하는 것 뿐이다.”하였다. 휴식하는 사이에 포성이 들리므로 잠간 산 위에 피하여 망보니, 적병 수백 명이 부(府)로부터 오다가 적의 시체를 보고 떠들썩하게 기리키며 부오(部伍)를 정돈하고 높은 데 올라가 망보다 달아났다. 나는 고갯 길에서 축격하고자 하였으나 군사는 고단하고 화살도 다 없어져 분개하며 산으로 돌아왔다. 제형이 왜적을 섬멸한 것을 듣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군자정(軍資正) 유지춘(柳知春)이 오차산(於差山)에서 패하여 단신으로 달려와서 내가 왜적을 친 것을 기뻐하며 말하기를, “흉한 왜적들이 들이밀리자 사람들이 저마다 삶을 도모하니, 비록 크게 의병을 일으키고자 하나 군사를 모집하기가 극히 어렵소. 참으로 그대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기오.”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정위(精衛)도 나무를 물어 나르면 큰 바다도 메울 수 있고, 노계(魯鷄)도 알을 품을 때에는 미친 개도 쫓는 법이니 다만 진력함에 있는 것이지 어찌 수효가 많음을 일삼겠소.”하였다.
23일
우리 군사가 왜적 36급(級)을 궁장현(弓藏峴)에서 죽였다. 이날 새벽에 또 가족을 숲속에 숨겨 두고 몇 사람의 하인을 거느리고 왜적을 토멸한다고 성명하니 따르기를 원하는 자가 20여 명이 되었다. 선달(先達) 김(金)은 영암인(靈巖人)인데 새로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영남좌방어사(嶺南左防禦使) 고언백(高彦伯)의 진중으로 가다가, 본도가 대패함을 듣고 노모(老母)가 있는 까닭에 말을 버리고 나와(納馬出來) 남원에 이르렀으나, 길이 막혀 도달하지 못하고, 마침 서로 만나게 되어 한 곳에 머물게 되었다. 그는 내가 왜적을 토벌하는 것을 기뻐하여 함께 일어났고, 정사달(丁士達)군은 강개(慷慨)한 선비로 나의 뒤를 따르니 박언량 등과 아울러 28명이 되었다. 송림으로부터 출발하여 가다가 요천(蓼川)위의 방암봉에 올라가 숨어서 망을 보니 흉적 50여 명이 임실(任實)로부터 소와 말을 몰고 축천정(丑川亭:성 북쪽5리에 있으며 금우정(金牛亭)은 물 가운데 있다)을 지나 곧장 동도역(東道驛) 앞 소로를 향하여 행진하는 것이었다. 나는 김군한테 말하기를, “이 왜적들이 길을 별운교(別雲橋:부의 동쪽 7리쯤에 있다)로 들어가니 반드시 무산(毋山)으로 향할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반드시 궁장현으로 나아가 구례로 향할 것이다. 궁장현은 길이 좁고 좌우에 막힌 곳이 많아 방연(龐涓)을 잡을 만한 곳이다. 이제 따라가면 잡을 수 있을 것이요, 만일 무산으로 향한다면 여원곡(女院谷)에서 추격하여 죽일 수 있을 것이요,”하고, 말이 끝나자 망을 보니 적병이 과연 궁장현으로 향했다. 내가 달려가며 약속하여 말하기를, “군대란 정(精)한데있지 수효 많은 데 있지 않소. 적을 만나면 후퇴하여, 적으로 하여금 형세를 이용하게 하면 많은 것이 더욱 유해(有害)하오. 그대들 가운데 만일 적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자가 있다면 이제 뒤로 처지시오.”하니, 말을 듣고 퇴축(退縮)한 자가 7․8명이었다. 단지 수십 명을 거느렸는데, 궁시(弓矢)를 가진 자는 나와 김․정․박언량 네 사람뿐이었다. 나머지 사람은 모두 몽둥이를 들고 산 위로 해서 달려 궁장현에 당도한즉 왜적은 이미 요긴한 목을 지나갔다. 우리는 이미 형세를 잃어버려 용맹을 쏠만한 곳이 없어졌으므로 적을 버리고 헛되이 돌아오게 되니 나의 뜻이 아니었다. 마침내 고함을 치며 활줄을 세게 당겨 가지고 전진하니 적병이 칼을 뽑고 총을 안고 후퇴하고 들어가지 아니하고 나를 따라 죽기로 나선 자는 6명뿐이었다. 싸움이 한창 붙게 되자 구릉(丘陵)을 한계로 삼아 왜적으로 하여금 난입할 수 없게하고 또 먼저 총 가진 자 3․4명을 쏘아서 죽였기 때문에 멀리서 덤빌 염려는 제거되었으나 적은 많고 우리는 적어 힘이 서로 대적이 안 되었다. 비록 활 쏘는 것을 정확하게 한다 하더라도 한꺼번에 모두 맞칠 수는 없었다. 왜적의 전봉(前鋒)인 5명의 적이 곧 맞아 죽은 뒤로 나머지 왜적이 일시에 포위하고 들어오니 우리들은 포위망 속에 들어서 사면으로 발사하였다. 얼마 동안 치열하게 싸우자 왜적은 더욱 목숨을 내걸고 먼저 정군(丁君)을 쳐서 왼발 복숭아뼈를 찍어 대고 그 ,다음으로 박언량을 치니 박언량이 활과 살로 그것을 막아서 활은 쪼개졌으나 사람은 죽음을 면했다. 박언량은 맨손으로 포위를 뚫고 나와 모난 몽둥이를 들고 다시 들어가니 정군도 자기 상처를 돌보지 아니하고 굳게 서서 난사하였다. 나와 김군도 죽음을 각오하고 혈전하는데, 뜻밖에도 김군의 활이 또 부러지니, 한 놈의 왜적이 김을 쫓아가서, 일이 매우 귀급하므로 내가 돌아서며 그를 쏘니, 한 살에 바로 죽었다. 나는 살을 뽑아 난사하고, 또 박필남(朴弼南)을 불러 말하기를, “그대는 김군을 축겨하던 왜적이 내 한 살에 굴러 떨어지는 것을 봤는가?”하니, 필남은 따라서 뒤로 오다가 대답하기를, “그것을 봤습니다. 좠습니다.”하였다. 박언량이 급하게 김군을 부르며 말하기를, “우리들은 홀로 포위망속에 있으면서도 죽기로 결심하고 물러가지 않는데 너는 어찌하여 달아나고 돌아오지 아니하느냐?”하였다. 이때에 적병으로 죽은 자가 15․6명이 넘었는데, 모두 싸움을 경험해 본 놈들이라 감히 결사적으로 싸워왔다. 그런데 나도 화살이 떨어져 급하게 경계(庚癸)를 부르니 필남은 뒤에 처진 사람이 가지고 있던 화살을 던져 주므로 나는 살을 주워서 쏘곤 하였다. 진시(辰時)부터 교전하여 날이 신시(申時)․유시(酉時)에 이르기까지 싸우니 여러 왜적이 모두 죽었는데, 그 수효는 36명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포로된 사람들이라 다 거두어 돌아오니, 부북(府北)의 둔덕촌(屯德村) 사람 고한전(高漢傳) 등이었다. 두 왲거이 개울가에서 짐을 지키며 관망하다가 도망쳤는데, 날이 어둡자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했다. 산꼭대기에 앉아서 군사를 쉬게 하고 다시 싸움터를 돌아보니, 넘어져 있는 시체가 서로 베고 누웠는데 비린내 나는 피가 강을 이룰지경이었다. 바로 노획한 왜놈의 행장을 나누어 군인에게 주고 뒷날의 거사에 자료로 하였다. 밤중에 산에 돌아오니, 여러 사람이 나를 위로하여 말하기를, “뜻밖에 파목(頗牧: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의 명장 염파(廉頗)와 이목(李牧)을 말함.)이 우리들 가운데 계셨소. 만일 조정에서 이런 줄을 알게 된다면 충갑(沖甲)의 공은 홀로 여실(麗室)에서만 아름다움을 독차지하지 못할 것이오. 운운.”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김씨․박씨 몇 사람이 궁장(弓藏)으로가 머리를 베어 왔다.(바야흐로 난투할 때에 사람이 모두 상처를 입었는데, 나만 홀로 종 대손(大孫)이가 모난 몽둥이를 가지고 곁에 있으면서 타격하는 것을힘입어서 미침내 완전하게 이겼음.)
○ 왜적의 괴수인 내도수(來島守)는 병선 수백 척을 거느리고 먼저 서해로 향하여 진도(珍島)의 벽파정(碧波亭) 밑에 이르렀다. 이때에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은 울돌목에 유진하고 피란한 배 백여 척이 뒤에 있어 성원하였다. 이순신은 왜적이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여러 장수에게 명령하기를,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경솔히 대적하지 말고 기회를 따라 대책을 세워야 할것이니, 이렇게 이렇게 하라.”하였다. 왜적은 우리 군대가 외롭고 힘이 약함을 보자 삼킬 듯이 서로 다투어 먼저 올라와 사면을 포위하고 엄습하여 왔다. 아군은 싸울 뜻이 없는 양 보이며 거짓으로 적의 포위 속으로 들어가니, 왜적은 아군의 두려워하고 겁냄을 기뻐하며 육박하여 나전이 되었을 때 홀연히 장수 배에서 주라가 번갈아 불어대고, 지휘기가 일제히 흔들리고 도고(鼗鼓)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불이 적의 배에서 일어나 여러 배가 연소되니, 불길은 하늘을 뒤덮었고, 화살을 쏘아대고, 돌을 던지고, 창 검이 어울려서 찌르니, 죽는 자는 삼대가 쓰러지듯 하였고, 불에 타 죽고 빠져 죽는 자가 그 수효를 알 수 없었다. 먼저 내도수(來島守)를 베어 머리를 돛대 꼭대기에 매달으니, 장수와 사병이 용맹을 떨쳐 달아나는 놈을 축격하고 패배하여 가는 놈을 따라가 목 베어 죽인 것이 수백여 급(級)이 되었으며 도망하여 탈출한 것은 겨우 10여 척 뿐이었는데 아군의 병선은 모두 무사하였다. 그놈들이 고국으로 돌아가 전쟁담을 논할 때에는 반드시 울돌목의 싸음을 말하였다 한다.
○ 곡성에 머물러 있는 요시라는 복병을 4개 도로 나누어 보내 잠깐 죽이고 노략질하는 것을 금하였다. 부성(府城)의 동문 밖의 요천(蓼川)에도 또한 와서 8명이 막을 치고 머물러 있으면서 어리석은 백성을 달래어 모아들였다. 내가 박․김과 같이 그들을 치는데, 먼저 왜놈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왜적의 군막으로 직접 들어가 그들의 형세를 탐지하게 하니, 왜적은 민패를 받은 사람으로 여겨 싸울 생각이 없이 말을 지껄이고 있으므로 우리들은 그들의 준비 없음을 이용하여 갑자기 습격하였다. 그래서 박언량은 베인 머리를 거두어 돌아왔다.
○ 적병 50여 명이 오수역(獒樹驛)에 주둔하고 곡식을 거두어 군량을 준비하였다.
○ 명나라 군사가 서울로부터 처음으로 호남지방에 당도하여 선봉 30여명이 전주로 경유하여 이르러 와 말을 달려 돌격하니 적병은 짐을 모두 다 버리고 도망쳐 구례로 향했다. 전주 이상에서 적병이 다 내려온 것을 비로소 알았다.
○ 적의 괴수 평수가(平秀家)는 한산도(閑山島)로부터 순천(順天)의 왜교(倭橋)로 돌아나와 행장(行長)과 합진(合陳)하였다.
○ 이광악(李光岳)으로 전라병사(全羅兵使)를 삼고, 원신(元愼)으로 방어사(防禦使)를 삼았다.

10월

명나라 군사가 오수역으로부터 나아가 남원성을 탐색하다가 향교의 뒷산에서 말을쉬고 있는데, 곡성의 왜적 30여 명이 소와 말을 몰고 만복사(萬福寺)에 이르러 동철(5백 나한(羅漢)을 녹인 구리쇠)을 싣고 가므로 명나라 군사는 말을 달려 뒤쫓아가 4급(級)을 베어 죽였다.

8일
청정 등 여러 도의 왜병이 두모(豆毛)․서생(西生)․도산(島山)등의 그전 보루로 들어가 진을 쳤다.
○ 마귀(麻貴)는 대군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뒤따라 전라도로 내려와 남원의 북쪽 밤고개(栗峙)에 이르러 곡성에 적이 있음을 탐지하고 전주로 도로 물러갔다. 배신(陪臣) 우상(右相) 이항복(李恒福)․반신(伴臣) 장운익(張雲翼)이 이들을 따라갔으나 미구에 서울로 도로 향했다.

9일
아군은 왜적을 산동촌(山洞村)까지 추격하여 수급 다섯을 베어 가지고 돌아왔다. 이보다 앞서 왜적의 괴수 평조신(平調信)이 남원을 경유하여 구례로 향할 때, 그들의 군대 4백여 명을 산동촌에 머물러 두어 벼를 베어 양식을 준비하게 하였는데, 그 왜적들은 원내촌(院內村)에 주둔하여 복병을 원하천(院下川)강가에 배치하고 날마다 곡식을 거두어들이고, 겸하여 산골짜기를 탐색하며 사람을 죽이고 가축을 노략질 한 것이 그수효를 이루헤아릴 수없다. 본촌의 선비 형덕흥(邢德興)은 연일 급함을 고하여 왔으나, 나도 또한 가까운 적이 급급하여 가서 축격할 겨를이 없었다. 이달 이후로 부터는 가는 낱 왜적(零賊)은 아군이 요지에 점거함을 꺼려 원천(原川)을 경유하지 아니하였다. 내가 방금 떠나가서 그 왜적을 잡으려 하는데, 이날에 형덕흥이 또 와서 살려 줄 것을 요구하므로 즉시 김완(金完)․박언량 10여 명과 같이 산동촌으로 향해 떠나니, 양덕해(梁德海) 형이 따라가 구경하기를 원했다. 숙성령(宿星嶺) 위에 이르니 작은 밤고개에 수십 인이 늘어서서 아래를 내려다 봄으로 불러서 그들을 오게한 바 모두 진안(鎭安) 사람이었다. 이때에 원수(元帥) 권율(權栗)이 호남과 영남의 경계로 와서 주둔하였으나, 각관의 수령들이 달아나 숨고 나오지 아니하며, 왜적을 토벌하는 데 뜻이 없는 까닭에 그 우심한 자를 조사하여 장차 극형에 처하려 하였다. 본현의 현감 오장(吳長)이 이것을 두려워하여 우리에게 군사를 보내어 왜적의 귀를 얻어서 후환에서 벗어나려고 도모했으나, 그들은 아군의 소재를 알지 못하여 이 곳에서 정찰하고 있다가 이제야 비로소 서로 만나게되니, 기쁘고 다행함을 이기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진안의 영장(嶺將)한테 말하기를, “네가 내 뒤를따르면 왜놈의 머리를 얻을 수 있지만, 그러나 싸움에 임하여 어물거리면 군법에는 피차가 없다,”하니, 영장이 말하기를, “죽건 살건 명령을 따를 뿐이요.”하였다. 행진하여 운제(雲梯)에 이르러 박언량․형덕흥에게 명령하여 산에 올라가 정탐하게 한 바, 많은 왜적이 원내촌(院內村)에 결진하고 복병한 군막은 원 아래에 있었다. 저녁때에 적병 16명이 큰 진으로부터 와서 원 아래 군막을 지켰다. 내가 김완한테 말하기를, “왜적의 세력이 매우 성하여 싸울 수 없으니 마땅히 기계(奇計)를 내어 적을 제압하여야 하오. 이렇게 이렇게 하시오.”하고, 즉시 군인으로 하여금 연관사(烟觀寺) 남쪽으로 올라가게 하였다. 자모장(自募將) 고민덕(高敏德)이 군사 30여 명을 거느리고 벌써 여기에 와 있으면서 여러날 틈을 엿보았으나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나를 보더니 기뻐하며 말하기를, “일은 잘 되었소.”하였다. 밤 2경(二更)에 여러 군사와 같이 몰래 숨어 내려가 원후(院後)에 이르러 세 곳으로 나누어 매복하니, 하나는 큰진의 길목을 끊고, 한 패는 개정(介亭)의 길목을 지키고, 한 패는 모전(茅田)의 험새를 제압했다. 또 박언량 등 7․8명과 같이 직접 왜군의 군막을 공격하니, 왜놈이 살에 맞아 그 자리에서 죽은 자가 5․6명이 되었다. 나머지 왜적은 화살을 맞은 채 달아나 큰 진으로 들어갔다. 요로에 있던 군병이 살과 돌을 함께 쏘며 던지니, 빠져 달아난 왜적은 얼마 없었다. 나는 빼앗은 당마(唐馬)를 타고, 향로를 바꾸어 중산(中山)으로 올라가 잇달아 3혈 총통(三穴銃筒:세 구멍으로 된 탄환을 넣어서 쏘던 옛날의 총)을 놓으며, 그 소리에 따라 고함치니, 왜적도 또한 불을들고 떠들어대며 총을 쏘고 고함쳤다. 나는 다시 연관사(烟觀寺)로 올라가 잠깐 쉬었는데, 고민덕과 진안 사람들이 다 흩어져 갔다. 이날 밤에 큰 진의 왜적들이 숲으로 숨어 들어 흩어져 매복하였으므로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했다. 다음날 닭이 울 때에 김․박과 같이 군사를 이교(梨橋)의 높은 봉우리로 이동하여 총을 쏘며 고함치기를 어제 밤과 꼭 같이 하고, 즉시 다른 봉우리로 이동하여 숨어 엎드려 망을 보았다. 왜적은 진에서 2백의 기치가 세워져 있었고, 또 몇 사람의 기병이 구례로 파견되고 이어서 8명의 적병이 중산으로 올라가 연기를 피워 사변을 알리고는 한참 망을 보다가 내려갔다. 잠깐 있노라니 5․6기의 적병이 구례로 향하였다. 아군은 겨우 5명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돌아왔다. 김․박 등은 적의 귀를 많이 얻어 가지고 은전(恩典)을 입기 위하여 나와 같이 상의하고 즉일로 사람을 전 초계군수(草溪郡守) 첨지(僉知) 정이길(鄭以吉)에게 보내어 맞이하여서 대장을 삼으니, 정이길은 나와 재종(再從)간이다. 부모가 다 오차산(於差山)의 왜적에게 죽었기 때문에 초계로부터 와서 곡하고 바야흐로 동지를 모집해서 복수를 도모하고자 하다가 나의 소식을 듣고 기뻐서 달려왔다. 그가 우리 산막에 이르자 맞이하여 대장을 삼고, 보수(報雖) 두 글자로써 장표(章標)를 삼았다. 그리고 나를 출전장(出戰將)으로, 정사달(丁士達)을 종사(從事)로, 유지춘(柳知春)을 참모(參謀)로, 양덕해(梁德海)를 병량유사(兵粮有司)로 삼았다. 이날로 원수(元帥)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다.
의병장(義兵將)은 군공(軍功)을 보고합니다. 나라 운수가 두 번째 비색하여 흉한 왜적이 제멋대로 날치니, 관군은 무너져 흩어지고, 중국 군대는 패전하고,남은 백성이 어육(魚肉)이 됨을 면한 자 거의 드뭅니다. 지난 아무달 아무 날 제 부모가 왜적의 손에 죽었다는 말을 듣고 죽은 고승로 달려가 가슴을 두드리고 발을 구르며 슬피 울고(僻湧) 망극(罔極)해 하여 동지들과 의거하여 적을 토멸해 적의살점을 찢어 원수를 만분지 일이라도 갚고자 하였습니다. 본부(本府)의 유학(幼學) 조(趙) 아무 등은 본래 충성되고 용맹한 하람으로서 복수의 대의를 떨쳐 정예(精銳)를 모집하여 같이 죽고로 맹세하고 싸울 때에는 반드시 앞장서서 용감히 굽히지않아서 여러차례 크게 이겨 수급을 베인 것이 많았습니다. 위에게 여쭙지 아니한 것이 사체에 옳지 못하다 여기고 군수를 청하여 주장(謀主)을 삼았습니다. 어버이를 여의고 아직 장례도 치르지 못하여 참으로 미안한 줄 압니다만 복수에 급급한 나머지 감히 거절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전후의 군공(軍功)과 수급을 베인 수효와 왜놈의 짐을 모두 올려 보냈습니다. 본도가 함몰을 당한 뒤로 감히 한 사람도 왜적을 칠 계책을 하지 못하였는데, 다만 이 서생만이 용맹을 떨쳐 적을 공격하였으니 나라를 위한 정성이 실로 비길 데 없습니다. 이같은 사람을 급히 표창하도록 아뢰어 뒷길을 넓히는 것이 어떠합니까? 왜적의 상황으로 말하오면 남원 이상엔 현재 적의 둔병이 없사온데, 곡성에 머무른 왜적은 1만여 명에 이르러 패를 주어 인민을 유인하고, 살생과 노략을 엄금하므로 본현 사람과 남원 남서면 사람들 중, 먼저 들어간 어리석은 백성들이 당분간이나마 편안함을 다행으로 dru 민패를 받고 쌀을 바치니, 저놈들이 그대로 눌러 있으면서 철수해 갈 뜻이 없습니다. 지나간 아무 달 아무날 적병 50여 명이 상도(上道)로부터 내려와 오수역에 두둔하자 명군 30여명이 전주로 해서 이 곳에 이르러 말을 몰아 돌격하니, 적병이 도망쳐 구례로 향했습니다. 명군은 행진하여 향교 뒷산에 매복했는데 곡서으이 왜적 30여 명이 소와 말을 가지고 만복사(萬福寺)에 이르렀으므로 명군이 기마병을 보내어 추격케 함으로써 4명을 베었는데, 그 후로 곡성 읍내에 연기와 불길이 하늘을 뒤덮었으니 아마도 소굴을 불태우고 철거한 듯합니다. 우도(右道)로 말하면 적병이 열읍(列邑)에 가득 차 있어 민패를 주고 쌀을 바치라하며, 왕래하는 적들은 모두 옥과(玉果)․곡성으로 해서 구례로 향하여 갔습니다. 본부로 말하면, 산동(山洞)에 있는 왜적의 수효가 4백여 명에 달하는데 벼를 베어 군량을 준비하며 오래 머무를 채비를하고 있습니다. 이달 9일에 조 아무개는 군대를 거느리고 재 꼭대기에 둔을 치고 적의 형세를 엿보았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이어서 감히 부닺쳐 싸우지 못하고, 밤을 틈타 습격해서 다수의 적을 베어 죽이니 적병이 두려워하여 즉일로 철수하였습니다. 몇 명이 되지 않은 군인이오나 분탕(焚蕩)을 당한 나머지라 군량을 보급할 길이 없사오니, 한 집안이 모두 없어진 사람이나 도망한 군대의 전답에서 나오는 벼를 군용으로 가져다 쓰려 하오니 그렇게 허락해 주심이 어떠 할는지요?
이때에 원수는 영남으로부터 장수현(長水縣)에 이르렀다가 다시 남원의 목동촌(木洞村)으로 갔다가 전주로 향하였다.
○ 배설(裵楔)은 교만하고 패악하여 군율을 어겨 이순신(李舜臣)에게 죄를 얻자, 자기 마음대로 군사를 버리고 도망하여 성주(星州)의 본집으로 돌아가니, 이순신이 즉시 죄목을 갖추어 아뢰였다. 설은 도망하였다가 그뒤에 체포되어 복주당했다.

15일
곡성의 왜적이 철수하여 구례․순천으로 향하여 왜교(倭橋)에서 합진하였다.
○ 명군 30여 명이 남원으로부터 곡성으로 향했다. 이 때에 창평(昌平)의 왜적은 하동(河東)으로 철수하여 가면서 민패를 받은 사람을 몰아서 쌀과 콩을 싣고 끌고 가다가 섬진(蟾津)에 이르러 놓아 돌려보냈다. 사람들이 적의 괴수에게 고하기를, “일본 병사가 끊임없이 왕래하니 중도에서 피해당할까 두렵습니다.”하니, 괴수는 인솔한 왜군 수십 명으로 하여금 압송하게 하여 남원의 남촌(南村)에 이르러 명군과 서로 만나게 되었다. 명군은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쳐 돌아오는 사람들로 생각하고 바야흐로 적의 정세를 물으려 할 때 왜적이 칼을 뽑아들고 달려와 명군을 살해하니, 명군이 쏘아대어 적 두놈을 베자, 나머지 왜적과 민패를 찬 사람 수백 명이 달아나 흩어졌다. 명군은 그대로 압록(鴨綠)으로 해서 강을 따라 내려가 구례의 잔수역(潺水驛)에 이르러 잠복하여 망을 보니, 순천의 왜적 40여 명이 강을 건너왔다. 명나라 기병 수명이 먼저 나아가 약점을 보이니 적병이 칼을 휘두르며 일시에 돌입하였다. 뒤에 있던 명군이 고함치며 돌격하며 난사하니 적병이 패하여 흩어져 모두 강물로 들어가므로 20여 급을 베었다. 곧 구례성으로 들어가 고함치며 달려드니 적병이 사방으로 나와 포위하므로 명군이 후퇴하여 달아났다. 조신(調信)은 전날 산동(山洞)의 밤 습격에 놀랬고 또 이날 낮에 돌격하는 데 놀라서 많은 군대가 잇따라올까 염려하고 즉시 철수하여 섬진으로 향하였다가 이어서 남해로 들어가 군대를 유산도(流山島:이 현의 동문 밖 5리의 지점)에 주둔하여 섬을 빙 둘러 성을 쌓고, 호를 파서 배를 다니게 하였다. 평의지(平義智)는 한산도(閑山島)로부터 이리로 나와 이곳에서 합진하고 본현의 인민을 유인하여 민패를 주어 편안히 살게 하였다. 그리고 서울 사람 손문욱(孫文彧)으로 본현의 원을 삼고, 하동출신(河東出身) 김광례(金光禮)로 하동의 원을 삼아 본읍의 일을 관장하게 하고 민패를 발급하여 쌀을 받게 하고, 또 왜놈을 시켜 여러 빈에 나누어 보내어 본현의 사람을 찾아서 하나하나 쇄환(刷還포를 데려옴)하였다. (문욱(文彧)은 임진년에 왜놈에게 사로잡혀 다년간 왜국에 있었기로 왜말을 잘해서 남해에 있어서는 살생과 노략질을 엄금해서 사람이 많이 보전하여 살게 되었다. 그 뒤에 조선으로 살아 돌아오니 포상하고 만호(萬戶)의 직을 제수했다.)
○ 적의 괴수 의홍(義弘)․윤직무(允直茂)․청정(淸正)등이(이것 또한 한때의 소문이 이같았고 사실에 있어서 그 진위(眞僞)는 자세치 않다.) 각각 3․4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함께 남해 등지에 머물렀다. 한 번 울돌목에서 패전함으로부터 올 배가 와 닿지 아니하니 직무(直茂) 등은 우로(右路)를 경유하고, 의홍(義弘) 등은 좌로(左路)를 경유하여 아울러 남원을 지향하고 내려왔다. 21일에 선봉 30여 명의 왜적이 소와 말과 포로된 사람 등 40여 바리의 짐을 몰고 남문 밖에 이르렀다. 명군 6기(騎)가 인천(忍川)으로부터 성 아래에 가서 망을 보다가 적을 삽고개에서 만났는데, 적병은 우리 나라의 옷을 입고 갓을 쓰고 속여서 명군을 부르며 말하기를, “재상(宰相)님! 재상님!”(우리나라 사람들이 명군을 부를 때 재상님이라 함을 적이 아는 까닭에 그랬다고 함.)하니, 아군이 그들이 왜놈인 줄 알고도 형세가 서로 맞서 싸울수 없어 후퇴하였다. 적병은 인천(忍川)까지 따라와 산에 불을 지르고 돌아갔다. 날이 어두워서 동문 밖의 토성 안에 주둔했다. 이때에 나는 마침 일 때문에 산에 있으면서(양형과 같이 용추동(龍湫洞)으로 이사해 내려간 까닭에 일이 많아 못 갔다) 다만 박언량 등 4․5명을 보내어 정탐하게 하였다. 박언량 등이 적병이 토성으로 들어가는 것을 망보고 나서, 야밤에 숨어서 성 위로 올라가 화살과 돌을 마구 퍼부으니 적병이 가지고 있던 짐을 다 버리고 동문으로 달아났다. 박언량은 그들의 점유물과 소․말을 거두어 가지고 돌아왔다.
(박언량의 용맹은 참으로 무쌍한데, 지식이 천박하여 병가의 기정(奇正)의 계책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왜적이 도망하여 탈출하게 되었음.)

23일
의홍(義弘)의 군사 4만여 명이 옥과․곡성을 경유하여 순진(鶉津)․홍령(鴻嶺)으로 갈라져 진군하고, 직무(直茂) 등의 군사 수만명은 순창(淳昌)으로부터 비홍령(飛鴻嶺)을 넘어 진군하여 이언(李彦)․가방(加方)․방장(方丈) 등지에 결진하였다. 다음날 의홍 등의 군대는 구례로 향하여 원천(原川)․원평(院坪)․연화산(烟花山)의 상하에 이르고, 직무 등의 군대는 운봉으로 향하여 호산원(虎山院)에 이르러 진을 쳤다. 도처의 왜적이 종일 산을 수색하며 인명을 살해하고 재산을 노략질하였는데, 그것은 이루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이날 이른 아침에 왲거이 대거하여 온다는 말을 듣고 그들의 후방을 공격하려 도모하여 5․6명을 거느리고 성부(城府)로 향하다가 길에서 대적(大賊)을 만나 달아나 산막으로 돌아와, 양형과 같이 노모를 업고 많은 식구를 거느리고 달아나 무상굴(無上窟:용추동 북쪽에 있는데 철벽(鐵壁)이다)로 올라가 한 곳에 앉히고, 나는 요충지에서 적병을 바라보니, 종일 온 산에 가득 찼으나 오직 이곳에 오지 아니한 것을 스스로 다행으로 여겼다. 잠깐동안 있는데 마을 친구 박대호(朴大虎)가 가족을 거느리고 구등령(九等嶺)위에 숨어 있다가 졸지에 몇 놈의 왜적을 만나 조개와 황새의 형세(鷸蚌)로 서로 버티고 있는데, 또 7명의 적이 뒤에 있어 형세가 매우 위급하게 되자 가까이 있는 줄 알고 살려 주기를 청함이 지극히 긴박하였다. 나는 노복에게 말하기를, “적이 만일 와서 범하거든 봉우리로 올라와 나를 부르라.”하고, 바로 활주을 힘껏 당겨가지고 달려가니 적이 바라보고 도주하는데 사람마다 모두 구우(口虞)를 가졌다. 박대호와 같이 꼭대기에 앉아 관망하면서 한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6명의 왜적이 내 말의 발자취를 밟아 벼랑으로 기어올라 이르니 노복이 나를 무르지 못하고 도망쳐 달아나자 왜적은 앉아 있는 여러 사람을 보고 사면에서 에워싸니, 늙은이와 어린이가 놀래고 두려워 했으나 도망할 곳이 없어서 나를 비록 급하게 불렀으나 멀어서 잘 들을 수가 없었는데, 문득 한놈의 왜적이 큰 소리를 치며 봉우리를 지나가므로 내가 비로소 적이 노약(老弱)들이 있는 곳에 들어온 것을 알았다. 달아나면서 또 박을 불러 말하기를, “그대 때문이 아니라면 무엇하러 여기에 왔겠는가?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뒤에 처지지 말아라.”하고 그와 같이 활을 당겨 적진중으로 돌입하였다. 그들 왜적은 내가 둔하고 겁쟁이인 줄을 알지 못하고 후퇴하여 산봉우리 위로 올라가 모였다. 나는 사람을 구하기에 급하여 왜적과 교봉을 하지 아니하고, 달아나 굴속으로 들어가 두 집의 가족을 불러 모으니 한 사람도 상해가 없었다. 나를 보자 흐느껴 울며 죽었던 사람을 만난 것처럼 기뻐했다. 적병은 오래 서서 우리의 허실을 탐지하다가 칼집에 칼을 꽂고 내려가버렸다. 어둘 녘에 높은 데로 올라가 바라보니, 30리 내에 적병의 불들이 낮과 같이 밝았다. 연화(烟花)․원평(院坪) 상하의 장수가 있는 군막들에는 붉은 담요 휘장을 치고, 큰 깃대를 세우고 큰 호각을 불어 여러 군인으로 하여금 흩어졌다가 모이게 했다가 하는데 거의 10여 곳이 되었다. 나는 많은 적들이 이곳에 있음을 알고 명일에 만일에 만일 대거 탐색하게 되면 화단을 예측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즉시 두 집의 노약을 거느리고 밤에 고촌(高村)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새벽에 각처의 왜적이 불을 밝히고 호각을 불며 일시에 출발하여 갔다. 원천(原川)의 왜적은 구례로 향하여 가 화정(花亭)에 이르러 유둔하고, 호산(虎山)의 왜적은 함양(咸陽)으로 향하여 인월(引月)에 이르러 결진하여 사면의 산골짜기를 밤새도록 수색하였다. 이날 나는 정령성(鄭嶺城)으로 향하였는데, 몇 대의 빠른 인마가 월운령(月雲嶺)으로부터 달려와 나에게 고하기를, “적병이 벌써 산과 들에 가득 찼고, 살상과 노략질이 한창 혹심하므로 우리들은 패해 달아나왔다.” 하는 것이었다. 나는 즉시 돌아서 무산(毋山)으로 향하니 적병이 또한 가득하므로, 판왕령(板王嶺)으로 올라가 부운령(浮雲嶺:모두 지리산 서쪽 기슭의 고개 이름)을 지나 도로 고촌으로 내려왔다. 이튿날 용추의 산막으로 돌아오니 본촌 사람으로 화패(禍敗)를 입은 자가 매우 많았다. 인월(引月)의 왜적은 다 영남으로 들어갔다가 이어서 좌도(左道)의 옛 소굴로 돌아갔다. 구례의 적은 길을 하동으로 잡아 이어서 사천(泗川)으로 들어가 법도(法島)에 주둔하여, 섬을 빙 둘러 성을 쌓고, 엄하게 기계를 설비하여 오래 머무를 계책을 하며 군대를 나누어 포진하니, 곤양(昆陽)․진주(晋州)․단성(丹城)․산음(山陰)의 지방 촌락에서 벼를 거두어들이는 왜적의 그 수효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하동(河東) 유학(幼學) 하응구(河應龜)로 진주목사(晋州牧使)에 임명하고 가까운 고을의 일도 아울러 관장하게 하였다. 또 왜놈을 남해(南海)․거제(巨濟) 등의 진으로 나누어 보내어 사천 고을 등의 인물을 찾아 돌아오게 하니, 다른 곳에서 포로가 되어 섬 가운데 있으면서 도망칠 기회를 얻지 못한 다들이 거짓으로 사천․진주 사람이라 핑계하고 육지로 탈출하였다. 그래서 달아아 돌아오게 된 자가 다수였다.
○ 명나라 조정에서 남원의 패전을 듣자, 수길(秀吉)이 조정의 대은을 져 버리고 관병을 무찔러 죽이고 조선에 해독을 주었다 하여, 황제는 크게 성을 내어 정전(正殿)을 피하고 수라를 감하고 주악을 철폐하였다. 병부상서 석성(石星)을 하옥하고, 심유경(沈惟敬)을 나포하여 국문하는 한편 급하게 군대의 양식을 발송하고정벌에 전념하여, 제독 동일원(董一元)․유정(劉綎)과 수병제독(守兵提督) 진린(陳璘)으로 제장의병마를 통솔하게 하여 각도로 나누어 동정(東征)하게 하였다.
29일
나는 박언량 등 10여 명을 거느리고 구례로 향했다. 다음날 진주와 하동으로 향했다.(지난 24일에 본촌 사람중 포로된 자가 매우 많았다. 나는 그 집에서 울며 서로 사실을 늘어놓는 소리를 듣고 모두가 다행히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구례와 전주에 이르러서도 많은 생명들이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11월

4일
내가 섬진에 이르러 높은 데 올라가 멀리 바라보니 왜적이 놓은 불이 산을 태워 곳곳에서 연기가 일어났다. 잠깐 동안 있는데 몇 놈의 왜적이 말을 타고 달려왔다. 내가 별안간 습격하자 왜적은 말을 버리고 도주하므로 그 말을 거두었다. 초저녁에 하동현으로 들어가 숲속에다 군대를 숨기고 박언량과 같이 나아가 성중을 탐색하니, 성중이 고요한데 단지 금오산(金熬山)북쪽 한 곳에서 불빛이 밝았다. 박언량이 말하기를, “성중에 도적이 없으니 산 북쪽의 적을 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므로, 나는 그를 제지하며 말하기를, “그대는 있어도 없는 듯, 찼어도 빈 듯이 한다는 기묘한 방법을 알지 못해서이다. 대낮에 멀리서 본성을 바라보니 살기가 등등하고 밥짓는 연기가 어지러웠는데 지금은 숨을 싹 감추고 영영 인기척을 끊었으니, 이것은 반드시 교활하고 속임수 잘하는 왜놈이 우리를 속이려는 계책이다. 내일 자세히 망을 보아서 거사함이 옳겠다.”하였다. 새벽이 되어 성의 서산으로 올라가 정탐하여 보니, 과연 성에 머무른 적이 그 수효가 대단히 많고 인가와 왜군의 군막이 성내에 그물코처럼 연락되어 소․말․닭․개․거위․오리 등의 소리가 진동하였다. 박언량이 혀를 내두르며 말하기를, “아마 우리 장군님이 적을 예측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들은 어육(魚肉)이 되었을 것입니다.”하였다. 즉시 군인과 같이 물러와 숲속에 매복하여 낱 왜적을 도모하려고 했으나 적병이 흩어져 손을 쓸 도리가 없었고, 겸하여 날이 오래되니 양식이 떨어져서 군사를 거느리고 물러 돌아왔다.

8일
화정(花亭)에 이르렀다. 선전관(宣傳官) 김식(金軾)은 정장(鄭將)의 종제(從弟)인데 피란했다가 처음 돌아와 의병대에 입속하였더니, 내가 적진으로 싸우려 나갔다는 말을 듣고, 군사 40여 명을 거느리고 뒤따라와 나를 보고 크게 기뻐하면서 나와 같이 일하기를 요구하였다. 나는 정과 김과 다 같은 재종(再從)간이다. 비록 오랫동안 무인지경으로 들어와 곤란과 고생이 막심했지만 다정한 벗의 두터운 바램을 홀로 저버릴 수 없어 적을 토벌함에 성심껏하여 조금이라도 게으른 적이 없었다. 바로 군사를 연합하여 다시 구례로 향하여 노전촌(蘆田村)에 이르렀다.

11일
본현의 자모장(自募將) 강보기(姜甫起)와 합군하여 80여 명을 거느리고 순천으로 향하여 삽고개에 이르러 앉아 쉬면서 먼저 박언량 등 10여 명에게 정혜사(正惠寺)강청(江淸)죽전(竹田) 등지로 들어가 염탐하라 하였다. 왜놈의 권농(勸農:왜놈은 지미리(止彌里)라 부른다.) 유수복(劉守福) 등 3명이 왜교(倭橋)에 부역(赴役) 할 승군(僧軍)을 일으켜 보낼 양으로 말을 타고 절에 왔다가 박언량 등에게 포박되었다. 내가 휘파람 소리를 듣고 달려서 절에 가니 김식(金軾)이 유수복 등을 보자 불문곡직하고 그들을 죽이려 하였다. 내가 그것을 말리며 말하기를, “이놈들이 왜적에게 가 붙어서 심부름을 하였으니 그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하오. 그러나, ‘위협에 못 이겨 따른 것이니 다스리지 아니 한다.’는 말은 옛사람이 경계하였고, ‘살인을 즐기지 않는다.’는 아성(亞聖:맹자)의 교훈도 있으므로, 비록 난리 소게 있다 하더라도 인명은 지중한 것이라, 어찌 함부로 다시 살아나지 못할 형벌을 써서야 되겠소? 원수부로 붙잡아 보내어 죄상을 끝까지 심문한 뒤에 그를 죽여도 늦지않소.”하였다. 김식(金軾)은 잔인한 사람이라 듣지 아니하고 무부(武夫) 박만귀(朴萬貴)로 하여금 그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유수복 등은 목숨을 살려 달라고 빌며 말하기를, “곤궁하여 왜적에게 부역하였지만 본심은 안닙니다. 우리들에게 각각 소와 말이 10여 말리씩 있으니 의병에 바쳐서 한 몸의 목숨을 속(贖)하기 원합니다.”하였다. 나는 지극히 그들이 죽음에 나아감을 민망하게 여기고, 김식한테 말하기를, “군수품을 보충해쓰는 것도 또한 좋은 일이니, 마땅히 그들의 말을 들어 피차의 이익이 되게하는 것이 무방하겠소.”하니, 김식이 말하기를, “소와 말이 비록 만 마리라 하더라도 지금 왜적 가운데 있사온데 누가 그것을 잘 가져 오겠소?”하므로 나는 쾌히 대답하여 말하기를, “내가 담당하여 끌고 오겠소.”하고, 그 자리에서 절의 중에게 명하기를, “너희들은 형세가 급박하여 민패를 받았으니 한편으로 생각하면 가련하다. 숨어 있어도 소용 없으니 모두 와 내명령을 들어라.”하자, 중들이 말을 듣고 달려 나와 울면서 배알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지금 수복 등 세 사람이 바야흐로 사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소와 말이 많이 있다 하며 그것을 바칠 터이니 생명을 살려 달라고 한다. 너희들 가운데서 이 사람과 서로 절친한 자가 있을 것 같으면 군인을 인솔하고 들어가 소와 말을 끌어 오라.”하니, 한 중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바로 저와 절친합니다. 제가 명령에 따라 하겠습니다.”하였다. 나는 박언량 등 8명을 중과 함께 내려보냈다.(이때에 순천 광양 외촌에 두둔한 왜적이 우리나라 사람과 이쪽 저쪽에 나누어 막을 치고 있었다) 중은 박언량 등을 인솔하고 인가(人家)에 몰래 들어가서 우마 27두를 몰고 돌아왔다. 그런데 박만귀는 김식의 밀부(密符:병부(兵符))로서 세 사람을 절 아래에서 베어 죽였다. 나는 김식과 같이 일을 할 수 없음을 알고 한참 동안 통찬하였다. 다음날 나와서 노전(蘆田)으로 돌아와 소를 잡아 군사를 먹이고, 박언량 등을 김식에게 넘겨주고 단지 5․6명과 같이 우마를 몰고 돌아와 정장(鄭將:정이길)을 만나니, 정장도 역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것을 잘못으로 여기고, 또 나한테 말하기를, “우리 군대의 공은 전적으로 그대가 일을 먼저 시작함에 있는데, 그대는 공을 헤아리지 아니하니 무엇으로써 그것을 보상하겠소?”하였다. 정(丁)․양(梁)이 자리에 있다가 말하기를, “아무는 중추(中秋)로부터 왜적 토벌에 마음을 다하느라고 가사를 돌보지 아니하였고, 얼마 안 되는 가을 곡식도 거두어들이지 못하여 노모와 처자가 앞으로 긂주림을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후부터 싸워서 얻은 우마를 그에게 주어 의사(義士)의 많은 식구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기 바랍니다.”하니, 정장이 혼연히 그것을 허락하고 또 즉각 표창 하도옥 원수부에 보고하려 하므로 나는 모두 굳이 사양하였으나 응락하지 아니하였다.
○ 이광악(李光岳)과 원신(元愼)이 본도에 이르러 불탄 나머지를 수습하며, 부(府)의 주포촌(周浦村)에 유진(留鎭)하였다.

24일
나는 왜적을 함양 음리(陰里)까지 추격하여 17․8명을 사살하고 쇄환한 사람과 짐승이 20여 구(口)나 되었다. 이때에는 내가 본래부터 데리고 다니던 왜놈과 싸워온 경험이 있는 자 10여 명을 구례에 있을 때 김식에게 전부를 이속시켰기 때문에 내 수하에는 한 사람의 병사도 없었다. 산음(山陰)과 사천(泗川)의 왜적이 함양․운봉을 분탕질하고 찾아다니며 살생 노략질한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맨주먹을 흔들어 봤자 어찌할 수 없어 미칠 듯이 분격한 마음이 다시 일어나 마음을 스스로 억제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감히 단신(雙手)으로써 몇 명의 하인을 데리고 출발하여 운봉으로 향하니, 양․박 두 선비도 또한 의기가 솟아서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따랐다. 길을 떠나 함양 산내(山內)에 이르니, 어떤 사람이 훨훨 뒤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앉아서 기다리니 그는 바로 고향 친구 안선달(安先達) 사제(嗣悌)였는데 부모가 모두 오차산(於差山) 싸움에서 죽었기로 항상 왜적을 죽여서 조금이라도 원통함을 풀고자 하나 맨손뿐이라 계책을 쓸 도리가 없었는데, 내가 왜적과 싸우러 나간다는 말을 듣고 뒤따라 찾아온 것이다. 그래서 피차에 기뻐하고, 그와 같이 동행하여 당벌촌(唐伐村)에 이르니, 온마을이 텅 비어서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어둘 녘에 한 사람이 와서 알리기를, “왜적 50여명이 오늘 두류암(豆流菴)으로 들어와 이내 흩어져 산을 뒤지고 있습니다.”하였다. 다음날 나는 인원을 나누어 적의 정세를 탐지하기 위해 망을 보게 하였더니, 저녁때에 정탐한 사람이 알리기를, “왜적은 두 패(二運:2개 부대)로 나누어 한 패는 마천곡(馬川谷)으로 들어가고, 한 패는 陰里로 향하였습니다.”하였다. 이날 밤에 이동하여 등구현(登丘縣)에서 잤다.(함양의 남면 산내에 창고가 있다) 산음 사람 배의중(裵義重)은 날래고 건장한(驍健)이 남보다 뛰어났는데, 병란을 피하여 이곳에 와 있다가 嚮導가 되기를 자원하므로 나는 기꺼이 허락하였다. 이튿날 출발하니 근처 사람이 모두 괴이히 여겨 말하기를, “저 사람들이 몇 개의 활을 가지고 50여명의 적을 당할 수 있겠는가? 어찌 경솔하게 적과 싸우러 나간단 말인가? 운운.”하였다. 음리(陰里)건너편에 내의 얼음이 살짝 얼어 붙어 군사가 건너갈 수 없었다. 앉아서 망을 본즉, 왜적 20여 명이 음리로부터 사람과 짐승을 몰고 군막을 불사르고 내려가는 것이었다. 나는 군사를 시켜 고함을 치게 하면서 서로 바라보며 그들을 추격하여 탄구지(炭九之)에 이르니, 개울은 좁고 산은 험준한데, 우리와 놈들이 서로 부딪쳐서 개울을 사이에 두고 교전하였다. 적은 다수가 총을 소지하여 그칠 사이 없이 연발하므로, 나와 안선달․박군이 돌을 의지하고 쏘아 연달아 6명의 왜적을 맞추니, 적은 사람과 가축을 버리고 엄천촌(淹川村)을 향하여 달아나므로 나는 사람을 시켜 물을 건너가 거두어 오게 하였다. 돌아오다 등구현 앞에 당도하니, 포성이 가까이 들리고, 고함치는 소리가 진동하므로 급히 달려가 망을 본즉 본현의 원(倅) 남간(南侃)이 내가 왜적을 토벌한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스스로 편안치 못하여 아병(牙兵)과 산장이(山尺) 수십 명을 산내로 보내어 성세를 돕게 하였는데, 적병 30여 명이 馬川谷으로부터 나와 의탄(義灘)에서 서로 만나 방금 접전을 하고 있었다. 나는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 합세하여 크게 싸웠다. 날이 저무랒 우리와 놈들이각각 동서로 후툏였다. 황현촌(黃峴村)에서 자려고 하였으나 적의 야습을 염려하여 물러나 백장사(白丈寺)로 올라갔다. 그러나 화살이 다 떨어진 고군(孤軍)이 머물러 있댔자 무익하므로 새벽이 되기를 기다려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에 적은 수백 명의 군사를 합하여 곧 황현에 이르러 수색하며 약탈하고 불지르며 우리편 사람을 보면 반드시 의병의 거처를 물었다 한다. 드디어 운봉을 지나 몰래 남원의 동촌(東村)․번암(番岩)․견천(肩川)으로 들어가서 장수(長水)에 이르렀다. 병사 방어사(防禦使)와 원수부의 별장(別將) 조신옥(趙信玉)․홍대방(洪大邦) 등이 왜적이 온다는 경보를 듣고서 군사를 인솔하고 운봉에 이르렀다가 왜적이 간 곳을 잃어버리고 바로 회진(回鎭)하였다.
○ 진주․사천 여러 곳에 주둔하였던 왜적이 길을 나누어 침범해 오는데 1대는 1백 50여 명으로 함양을 경유하여 장수로 향하고, 또 1대는 2백여 명으로 안음․거창을 향하여 수색하며 살육 약탈하였다.
○ 경리(經理) 양호(揚鎬)․제독(提督)마귀(麻貴)가 대군을 거느리고 영남으로 내려갔다. 이때에 원수 권율은 명을 받들고 서울로 돌아왔다가 이에 이르러 수행하였다. 양호가 우리 임금이 같이 일할 수 있는가의 여부를 알고자 하여 어느 날 청하여 말하기를, “불녕(不佞:재능이 없다고 낮추는 말임)이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남쪽에서 도산(島山)의 적을 토벌하려 하옵는데, 국왕께서는 의당 같이 가 주십시요.”하니, 임금께서는 그말이 떨어지자마자 곧 응락하였다. 이튿날, 명군이 진을 이동하여 남하하는데, 경리는 주상과 같이 말꼬 비를 나란히 하여 성을 나와 강가에 이르자 말을 채찍질하여 달리는데 형세가 바람과 번개 같았다. 임금께서도 빨리 달려 뒤지지 아니하였다. 부교(浮橋)를 건너서 준령(峻嶺)으로 올라가는데 벼랑 꼭대기에는 길이 없어서 말발굽이 미끄러지는데도 능히 말고삐를 당겨 위태롭지 아니하고 옥안(玉顔)에는 안한하여 여유마져 보이니, 경리는 돌아보고 크게 껄걸 웃었다. 이어 말에서 내려앉아 경리는 의자에서 일어나 위로하여 말하기를, “왕께서는 같이 일을 할 만하옵니다.”하였다. 이때에 백관과 호위들이 모두 임금 계신곳을 잃어버리고 한 사람도 행진하여 따라온 자가 없었는데, 오직 선전관(宣傳官) 유승서(柳承緖)만은 말 뒤에 있다가 임금이 방금 말에서 내리려 할 때에 앞에서 나가서 고삐를 붙들어 드렸다. 비록 위급한 경우에 이르러도 능히 체모를 잃지 아니하시니 저 대록(大麓)․풍뢰(風雷)와 무엇이 다르랴. 며칠 후에 경리는 바야흐로 군대를 정돈하여 남정(南征)하는 데 임금께서 같이 동행하기를 청하니 경리(經理)는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12월

양호(揚鎬)는 군사를 이끌고 경주(慶州)에 이르렀다. 이때에 청정이 여러 장수를 나누어 두모(豆毛)서생(西生)등의 진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대군을 거느리고 도산(島山)에 머물러 있다가 대병이 온다는 말을 듣고 복병을 나누어 보내어 요충지대를 질러막고, 또 각진에 왜병을 파견하여 위급함을 고하며 구원을 청했다.
○ 이덕필(李德弼)을 남원부사로, 유승서를 판관으로 삼았다.(유승서는 특병으로 교지를 받음.)

7일
아군이 적 1백 23명을 산음의 사촌(蛇村:현 서쪽30리에 있음)에서 죽였다. 이때에 정이길(鄭以吉)은 친상에 아직 장례를 치르지 못하여 병사(兵使)에게 보고하고 병권을 내놓았다. 내가 당초에 모집한 박언량의 무리는 모두 관군에 이속하였고 음리(陰里)의 싸움에는 단지 새로 얻은 약간의 군대로 적을 추격하였는데, 집에 돌아가자 그마저 모두 흩어졌다. 의분심을 떨쳐 왜적을 치려는 정성은 지금도 변함 없으나 척수공권(隻手空拳)으로는 계책이 서지 아니하니, 처음에 같이 도모하던 사람들은 통탄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내 또한 어느 것이 복이 되며, 어느 것이 화가 되랴 하여 비록 스스로 마음을 달래기는 하나, 왲거을 죽이려는 마음은 언제나 조금도 해이한 적이 없다.

동리 노인 진사(進士) 유인옥(柳仁沃)이 나의 뜻을 알고 박․양 제군과 같이 동리 사람을 뽑아 내니(括出) 장정이 거의 60여 명에 이르러서 단결시켜 편대를 만들었다. 나보고 거느리고 가 나라를 위하여 한번 죽기로 행하라 요구하므로, 본래부터 정한 계책이 있기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다시 그 군대를 관장하기로 하였다. 이때에 산음과 잔주의 땅에는 왜적의 주둔처가 바둑같이 포진되었고, 함양․운봉․안음․거창․장수 등의 고을에 남아있는 백성들은 여러 번 약탈을 당했고, 관군은 먼 곳으로 물러가 큰 화가 만연(蔓延)하여 우리 동촌(東村)도 위험이 조석에 다달았으므로, 여러 동지들은 내가 적을 막아 주기를 원하였다. 이달 3일에 나는 여러 군사를 거느리고 재를 넘어 운봉으로 향하니, 박대호(朴大虎)․유정진(柳挺震)․홍충갑(洪忠甲)이 다 의분을 떨쳐 이일에 따랐다. 4일에 본현의 남면 가장동(加藏洞)에 이르니, 어둘 녘에 어떤 사람이 왔으므로 탐문한즉 바로 본현의 원 남간이 보낸 사람인데, 전언하여 말하기를, “나으리(進賜)께서 북촌에 머물러 계시는데 오늘 낮에 적병 수백 명이 장수로부터 돌연히 이르러 각 촌을 수색 약탈하고 산막을 분탕하니, 나으리도 역시 쫓김을 받아 겨우 몸만 부지하여 달아나 삿점(簟店)에 와서 생원님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곳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간절히 면담하고자 하오니, 명일에 꼭 相見한 후에 떠나가십시요.”하므로,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남간이 편비(偏裨) 몇 사람을 거느리고 왔다. 내가 전날 군대를 거느리고 현을 지날 때에 현하(縣下)의 아전들이 왜적을 토벌하는 사람을 업신여기므로 나는 군령으로써 곤장 수십 대씩을 치게 한 일이 있었는데, 남간이 나와 만나 안부와 왜적에 대한 이야기를 물은 다음이 사건에 언급하면서 나를 허물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왜적을 토멸하는 일은 공사요 국사인데, 본 고을 사람들이 이것을 사사(私事)로 간주하고 패만(悖慢:온순하지 못하고 거칠음)무례하므로 그 죄에 대해 죄를 준 것인데, 영감은 어찌 그것을 탓하시오?”하니, 남간이 그 말을 그만 두고, 아병(牙兵) 3명을 붙여주며, “적의 정보를 탐지하는 대로 그들을 시켜 연락해 주오.”하고 또 말하기를, “왜적이 성하고 날래어 형세를 당할 수 없으니 진퇴를 헤아려 하시고 부디 경솔하게 대적하지 마시오.”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영감의 말이 진실로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병법에 어럽고 쉬운 형세가 있는데, ‘어려움을 범하면 패전하고, 쉬운 것을 이용하면 이긴다.’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나를 알고 남을 아는 기틀이니, 많고 적음은 논할 것이 아닙니다.”하였다. 말이 끝나자 1지대의 군사가 구등령(九等嶺)으로부터 오는데 바로 본부 서면의 자모장(自募將) 박경춘(朴景春)이었다. 달려와 절하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오합(烏合)의 졸병을 가지고, 낱 왜적(零賊)을 치고자 하오나 의뢰할 곳이 없어 여러 달을 지나오다가, 마침 의병장께서 군대를 거느리고 적을 추격한다는 소문을 듣고 기뻐서 목숨을 버릴 마음을 가지고 달려왔습니다.”하였다. 나는 그를 위로하여 말하기를, “군사를 일으킨 것은 전혀 왜적을 치기 위한 것이고 왜적을 치는 것은 전혀 나라를 위한 것이다. 너는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 나라의 은혜를 갚을 줄 아니 소위 철(鐵)가운데서도 쟁쟁한 것이(鐵中錚錚)아니겠느냐? 나의 지휘를 따라 전진이 있을 뿐이요. 후퇴는 말아라.”하였다. 경춘이 말하기를, “오직 명령을 따라 죽거나 살거나 해보겠습니다.” 하였다. 나는 이에 사람을 황산의 봉 위로 보내어 적병을 정찰한 바 벌써 산내로 들어가 원효(元曉)․실상(實上) 등 마을을 분탕질하고 있으므로 두 대의 군사를 인솔하고 진군하여 비도현(非道峴)에 이르러 적의 행방을 정탐하니, 적병은 황현으로 내려가 함양의 등구현(登丘縣)을 향하여 갔다. 나는 제군들에게 말하기를, “적을 뒤밟아 여기에 이른 것은 진실로 적을 죽이고자 함이요, 적을 죽이는 요결은 싸움을 제외하면 다른 방법이 없다.

이제 적의 형세를 자세히 살피니, 강성하고 날래어 범하기 어려우니, 승패의 형세는 싸우지 아니하여도 결단할 수 있다. 오늘의 형편으로는 반드시 어렵고 쉬훈 형세를 가려서적응ᄅ 제어할 만한 형세를 타서 화(火)로 할만하면 화로 하고, 경(驚)하게 할 만하면 경하게 하고(이것은 화공(火攻)과 야경(夜驚)을 말한 것인데 글을 생략함은 군기(軍機)라 비밀로 함.)혹은 낮에 혹은 밤에 반드시 옛사람의 많은 적을 대적하던 기계(奇計)를 낸 연후에야 거의 희망이 있을 것이요.“하니, 제군이 말하기를, ”그러하온데, 적병이 곧장 내려와 대병이 점점 가까이 오니, 야경(夜驚)이나 화공(火攻)을 할 도리가 없습니다.“ 하므로, 나는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날이 저물자 백장사(白丈寺)로 들어가기를 의논하는데, 문득 1대의 군사가 본사로부터 나오는데 바로 본부 북면의 자모장(自募將) 출신 구희로(具希老)였다. 그는 보고하기를, ”제가 오늘 일찍부터 적을 추적하여 여기까지 이르렀으나, 적의 형세가 너무 강성하므로 서로 교전하지 못하고 군사를 거두어 귀환하였다가 다시 출동할 생각입니다.“하므로, 나는 기뻐서 말하기를, ”기약하지 아니하고 모인 군사가 3군(軍)이되니 오늘의 일은 하늘이 진실로 도운 것이라. 각각 마땅히 힘써서 전진하며 후퇴하지 a라라.“하니, 수희로는 대단히 난색하여 말하기를, ”왜놈의 자취가 벌써 멀어졌는데 물러나지아니하고 무었하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대는 적병이 벌써 다 바다를 거넌간 줄 아느냐? 산음과 함양땅에 적진이 바둑처럼 깔렸다. 이 왜적이 비록 멀리 갔다지만 중지하지 않고 깊이 들어가면 수일내에 반드시그놈들을 만날 것이다. 오직 힘을 다하여 싸우는 데 목적이 있을뿐이요, 물러가는 것은 불가하다.”하자, 구희로는 말하기를, “저는 비둔(肥鈍)하기 때문에 행보를 잘하지 못하고, 군사 역시 마구 긁어모은 것이라 명령에 순종하지 아니하니, 죽음을 각오하고 멀 리가 싸으는 데는 같이 따르기 어렵습니다. 물러나 집으로 돌아가 한번 죽음을 늦추려 합니다.”하므로, 나는 그를 책망하여 말하기를, “백면서생(白面書生:지위없는 한낱 선비)으로 의를 들고 일어나 왜적을 치느라고 여러 달 분주하게 다니며, 험한 고생을 꺼리지 않고 바람과 서리와 굶주림을 골고루 맛보며 오늘날까지 구사십생(九死十生)하여 온 것은, 상을 바라고 한 거도 아니고 벼슬을 목적해서 함도 아니다. 국가가 위급하여 임금께서는 소간(宵旰)의 근심이 있으시고, 생민은 어육(魚肉)이 되고, 원수 왜적은 세력이 성하게 뻗었다. 이때를 당하여 진실로 신하와 백성된 자가 참으로 몸을 버리고 목숨을 바쳐 조그마한 힘이라도 다해야겠기에 마침내 피를 땅에 바르기로 결심하고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한을 풀려고 생각한 것이다.

하물며 너는 명색 없는 데서 뽑혀 이름이 홍지(紅紙)에 나타났으니 은혜가 지중하다. 의리상 어떻게 하겠느냐? 정예를 소집하고 왜적을 추격해서 여기까지 온 것을 보고서 나는 사람의 천성은 속일 수 없는 것이라 믿었는데, 어찌하여 한 번 적병을 만나자 바로 은혜를 저버릴 꾀를 내느냐? 또 병법에, ‘적에 임하여 군사를 후퇴시키는 자는 목 베이고 싸움에 임하여 구원하지 않는 자도 목 베인다.’ 하였다. 네가 비록 무식하여 이것을 잘 모르지만 나는 대강 들었으니, 조금이라도 용서할 수 없다.“ 하니, 구희로는 이에 항거하여 말하기를, ”주장(主將)은 제가 당신 군사에 소속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당연히 진퇴의 자유가 있는데, 어찌하여 망령된 말씀을 이와 같이 하십니까?“ 하였다. 나는 말히기를, ”병법에 퇴군을 가지고 곧다(直)하고 전진하는 것을 굽다(曲) 하였느냐? 진퇴의 사이에서 곡직(曲直)이 판단되는 것이다. 나는 공(公)과 직(直)을 가지고 논할 뿐이라, 주장의 소속이고 아니고는 따질 것 없다.“ 하니, 구희로는 말이 수구러져 마침 내 백장사(白丈寺)로 따라 들어왔다.

이날 밤에 그는 병을 핑계하여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척하고 슬그머니 군인으로 하여금 모두 도망가게 하였다. 나는 이말을 듣고 구희로를 불러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의 심장은 개 돼지와 다름이 없다. 한 번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는 것을 너같은 유(類)에게서 바랄 것이 못된다. 마음대로 해라, 너 같은 놈을 어찌 책하겠느냐?“ 하였다. 구희로는 하직하고 물러갔다. 다음날 새벽에 아군이 등구현(登丘縣)에 이르니 적병이 이미 지나갔다. 배의중(裵義重)이 또 산골짜기로부터 와 나를 보고 기뻐하며 다시 전도(前導)가 되었다. 박경춘(朴景春)은 깊이 들어가는 것에 겁을 먹고, 양식이 떨어졌다고 칭탁하여 굳게 돌아가기를 청하므로 나는 의리로서 회유하여 말하기를, ”현군(縣軍)으로 깊이 들어와 보거(輔車)처럼 서로 의지하며 마음에 맹서하고 힘을 합하여 함께 나라를 위해 죽기를 기약하였는데, 어찌하여 생각이 잘못 들어 구희로의 그릇된 자취를 밟고자 하느냐? 당초에 기병(起兵)한 것은 정희 적을 죽여야 한다는 의를 떨침이니, 오늘 싸움에 임하면 선등(先登)하는 용맹을 부릴만한 기회다.“ 하고 즉시 아군이 운반하는 양곡 10여 두를 그에게 주면서 다시 격려를 하니 박경춘은 부득이 따랐다. 이튿날 엄천촌(淹川村) 앞에 진군하니, 박경춘이 굳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억지로 고군을 이끌고 깊이 적의 소굴로 들어갔다가 혹 불리함이 있게 되면 누가 그 허물을 지겠습니까? 하므로, 나는 그를 꾸짖기를, “무기란 흉기요, 전쟁이란 위험한 일이다.

사는 것을 좋아하고 죽는 것을 싫어함은 사람의 상정이니 너 같은 용렬한 사람이 어찌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할 줄을 알겠는가? 다만 네가 여기까지 온 것은 본래 왜적을 토벌하기 위함인즉 왜적을 탐지하여 역전하다가 다행히 살아나면 살 뿐이지 어찌하여 기가 꺾여지고, 또 군대를 철수할 뜻을 나타내느냐? 아! 마음대로 하라. 우리 군사는 너 같은 놈들에게 의뢰할 것이 못 된다.” 하였더니, 박경춘이 즉시 이끌고 돌아서려 하다가 적군을 중도에서 만날까 두려워서 산골짝에 들어가 숨어서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나는 고군(孤軍)으로써 죽음을 무릅쓰고 더욱 전진하여 모곡촌(毛谷村)의 뒤에 이른즉 척후병이 달려와 보고하기를, “건너편에 적이 있습니다.”하므로, 나는 군사들을 일제히 입에다 재갈 물리고 엎드리게 하고, 박생과 같이 자취를 감추어 엿보니 왜놈의 기병 6명이 방금 산음의 자례촌(子禮村)에서 수색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사람을 박경춘에게 급히 보내어 부르니, 경춘이 즉시 산골짜기로부터 나오므로 나는 아군 10여 명을 박생에게 주어 경춘과 군대를 합쳐 대진(大陣) 사이에 매복케 하고, (이때에 산음의 방곡(方谷)․저품(苧品)․흑석(黑石)등 마을에 모두 적이 주둔하였는데, 여기와의 거리가 10여리 방곡(方谷)은 4․5리쯤 되었다.) 나는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모곡의 앞 못을 거쳐 얼음을 타고 물을 건너가 적 앞으로 바로 들어갔다. 적병이 달려 흑석으로 향하는데, 이때 여울에 살얼음이 얼어 박생과 박경춘은 건너지 못하였다. 나는 추격하여 쌍현(雙峴)에 이르렀으나 따라 잡지 못하고 돌아와 군사를 모곡의 뒷산에 주둔시켰다. 얼마 있다가 정찰하니 미시(未時)에 적병이 함양의 남촌 유등포(柳等浦)로부터 나와 바로 아군을 향해 오는 것이었다. 사람마다 그 수효를 세었는데, 혹은 1백 25명이라 하고 혹은 1백 23명이라 하였다. 군사들이 중과(衆寡)가 현격함을 보자 위태롭게 여겨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박경춘의 병사는 아직도 왜놈과 전투한 경험이 없어서 두려워함이 더욱 심하였다. 나는 군정(軍情)이 이와 같음을 살피고 용인(龍仁)의 사변이 있을까 염려하여, 거짓으로 큰소리로 말하기를, “궁장(弓藏)에서의 싸움에 우리들 세 사람이 50여 명의 왜적을 다 섬멸하였는데, 오늘은 아군이 70여 명이라 각각 한 놈씩만 당하게 되면 그 가운데 또 어찌 10명을 당하고 20명을 당하는 사람이 없겠는가? 다만 힘을 다함에 있는 것이니 너희들은 힘쓰라.” 재삼 효유하니, 군심(軍心)이 약간 안정되었다. 여러 군사와 같이 활을 당겨 버티어 기다렸다. 군사 가운데 김대호(金大好)란 자가 있어 정예라 자칭하면서 항상 싸우고 싶다고 말하며 여러 차례 군사를 나눌 때, 반드시 선봉되기를 원하더니, 이번 왜적을 만나서는 넋이 벌써 떨어져 활을 끌고 살을 던지고 산으로 달아났다. 유생(柳生)이 가만히 말하기를, “김대호가 도망쳤습니다.” 하므로, 나는 급히 그 입을 막으며 말하기를, “합부로 말하지 말라.” 하자, 유는 말하기를, “왜 그러십니까?”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그가 도망가는 것을 알고도 죽이지 아니하면 군사는 반드시 해체될 것이고, 그 죄를 다스려 형률에 처하게 되면 군사 기밀이 반드시 탄로될 것이니, 보고도 보지 못한 척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공과 죄를 따질 날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마침 적병이 산밑으로 돌아 내려와 바로 큰개울을 건너 사촌(蛇村)으로 흩어져 들어가 수색하면서 지껄여댔다. 이윽고 해가 서산으로 떨어지자 사방이 어둑하게 되니 여러 왜적이 머뭇거리면서 밤을 지낼 계획을 했다. 나는 박생한테 말하기를, “먹는 것이 군사에서는 첫째니 그대와 의중(義重)은 여기에서 적을 기다리면 나는 마땅히 이리 이리 하껬다.” 하고, 즉시 군인에게 명령하여 산골짜기로 들어가게 하여 밥을 지어 나누어 준 다음 그전 장소로 돌아왔다. 의중이 말하기를, “적병이 한 곳으로 소집되어 불을 밝히고 왕래하다가 밤이 으슥해서야 불이 꺼졌으니 무엇을 하는지 자세하지 않습니다.” 하므로 즉시 군사를 물가로 진출시켜 군사로 하여금 입에다 제갈을 물리고 달이 떨어지기를 기다려 얼음을 타고 물을 건너 모래밭에 군사를 멈추고 의중에게 말하기를, “군사는 졸속(拙速)한 것을 귀히 여기고 교지(巧遲)를 숭상하지 아니한다. 다만 모든 일을 미리 서둘면 군색하지 아니하고, 주밀하면 근심이 없는 법이니 먼저 탐지하고 나중에 들어가는 것도 불가하지 않은 듯하다.” 하였더니, 의중은 그 뜻을 알고 두 박씨와 함께 가서 망을 본즉, 적병이 세 개의 토막집으로 들어갔는데 같은 담장 안이었다. 돌길은 험악하여 형세가 매우 어려웠다. 세 사람이 와서 보고하자 여러 군사는 마음에 위태롭게 여기고 의심하여 나아갈 듯 물러 갈 듯하며 공포심을 갖는지라, 박생이 말하기를, “깊숙이 이곳에 들어온 것은 적을 토벌하기 위함이다. 이제 만일 적을 버리고 도망하여 돌아간다면 어린애 장난과 같은 것이니, 어찌 남의 견문이 부끄럽지 아니한가.” 하였다. 내가 군인을 깨우쳐 말하기를, “저놈들은 일찍기 생각지도 못했고, 우리는 게세를 탔으니 화공(火攻)으로 하고 야경(夜驚)으로 한다는 것이 바로 오늘의 일이다. 너희들은 마음놓고 종사하라.” 하니, 군인들이 명령대로 따르겠다고 하였다. 나는 두 박씨한테 말하기를, “적병이 세 막집으로 나뉘어 들어갔으니 일제히 행동하지 아니하면 갑(甲)이 을(乙)을 구할 것이다.‘ 하고, 즉시 아군을 둘로 나누어 하나는 박생이 거느려 북쪽 작은 막을 맡고, 박경춘은 남쪽의 작은 막을 맡고, 나는 서쪽의 큰 막을 맡았다. 그리고 명령하기를, ”시종 행사를 이리이리 하라.“ 하였다. 그리고 각각 군인을 거느리고 몰래 담 안으로 들어가 맡은 군막을 포위하였다. 내가 휘파람을 세 번 소리내어 부니 3군이 마름 막대기(菱杖)를 늘어 세우고 막 안에다 불을 지르고 또 이엉을 맡아서 계속 던지니, 막사 안에서 불이 활활 일어났다. 적들은 놀라 뛰므로, 우리는 어두운 곳에 서서 무수하게 난사하며 어쩌다가 뛰어 나오는 자가 있게 되면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나오건 안나오건 간에 항상 두들겨대고 또 마름 막대기 꾼들을 시켜, 막을 둘러쌓고 공격하게 하여 구멍을 뚫고 나오는 것을 대비하니, 적이 어찌 할 방법이 없어서 앉은 채로 재가 되었다. 마침내 불이 화약과 조총에 붙어 토막은 공중으로 날고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였다. 크게 고함을 치니 군인들이 약간 퇴각하여 그 불을 피하였다. 이때에 눈(雪)이 얼고 심하게 추웠는데 밤새도록 힘을 쓰고 나니 군졸들이 피곤하여 바로 물러가 산골짜기에 숨었다. 이튿날 새벽에 귀를ᄅ 베어 오고자 군사를 거느리고 도로 들어가니 문득 포성이 땅을 흔들고 고함 소리가 하늘로 이어졌다. 마침내 적병 수백이 苧品의 대진으로부터 쇄도하여 오는데 형세가 실로 범하기 어려우므로 이내 좌차(左次)로 후퇴하여 실상촌(實上村)에 이르니 김식(金軾)이 군사를 거느리고 뒤따라 와 나보고 다시 들어가기를 요구했다. 나는 허락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이번 거사에서는 적을 기만하고 가지만 이 뒤에는 적에게 기만당할지는 알겠는가?“ 하니, 김식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나를 따라오다가 중도에서 분산하였다. 김식의 사나운 졸개들이 산막을 출입하면서 숨어있는 사람들의 소와 말과 잡물을 노략질하여 수없이 탈튀해 오니 그 해는 왜놈들보다도 더 심하였다.

○ 흥양․장흥 연도의 왜적이 항상 내지로 들어와 분탕질하여 도둑질하였다.

○ 통제사(統制使) 이순신이 고금도(古今島)로 나와 진을 쳤다.

○ 경리 양호(揚鎬)는 경주로부터 제장을 독려하여 청정을 도산(島山)에서 진공하여 반구정(伴鷗亭) 등처의 왜적의 소굴을 소각하여 머리를 베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는데 청정이 형세가 궁해지니 도망할 꾀를 하였다.

○ 체찰부(體察府)의 장계에 의하여 3도의 수령 60여 명을 잡아다 옥에 가두고 심문하고 진작 관으로 돌아가 일을 보게 하지 않고 수개월 동안 형틀을 씌우고, 그 중에서 더욱 심한 자를 가려서 처형(處刑)하니, 안성군수(安城郡守) 유몽경(柳夢經)․용인현감(龍仁縣監) 임충간(林忠幹) 등이 사형 되었고, 그 나머지 사람은 쌀 30석을 경창(京倉)에 바쳐서 속죄하였다.

○ 양남(兩南:영남 호남) 여러 곳에 주둔(屯)한 왜적이 도산(島山)이 위급하다는 말을 듣고 군대를 발동하여 달려가 웅원하는데, 왜교(倭橋)는 행장이 지키고 있고 수가(秀家)는 군사를 이끌고 갔다.

○ 면라 군문 형개(邢价)가 요동(遼東)으로부터 압록강(鴨綠江)을 건넌 서울로 향하니, 이원익(李元翼)․윤두수(尹斗壽)로서 접반사(接伴史)를 삼아 내보냈다.

○ 본도의 방어사(防禦使)는 광양(光陽)의 왜적이 외롭고 약하단 말을 듣고, 본월 18일에 여러 장수와 같이 군사를 거느리고 곧장 달려 밤을 무릅쓰고 가서 어두움을 이용하여 성을 포위하니 적병이 진에 나와 방어하자, 아군이 스스로 궤멸되었다. 능성현(綾城縣)의 원과 본현의 원 김응서(金應西)등이 탄환에 맞아 죽었다.

○ 명나라 장수 사(司)․송(宋)․동(董) 3유격(遊擊)이 각각 군사 수천을 거느리고 서울로부터 남원에 이르러 이언(李彦)․시라산(時羅山)에 진을 쳤다.

23일
왜적 백여 명이 함양․안음을 경유하여 장계현(長溪縣)을 분탕질 하므로 병방어사는 군사를 보내어 잡으니 적병을 물러갔다. 관군은 인하여 육십현(六十峴)을 지켰다.
○ 명나라 장수 절강유격(浙江遊擊) 계금(季金)이 주사(舟師:수군) 수천명을 거느리고 호서에 정박하고 상륙한 다음 남원에 이르러 시라산에 진을 쳤다.

○ 형군문(邢軍門)이 서울로 들어와 유진했다.

27일
이광악(李光岳)이 군사를 이끌고 장수(長水)로 향하다가 적이 물러갔다는 말을 듣고 돌아왔다.
○ 평안병사(平安兵使) 이경준(李慶濬)이 마병 수천을 거느리고 남원에 이르러 흑성촌(黑城村)에 진을 쳤다. 이광악(李光岳)․원신(元愼)은 주(周浦)로부터 백평촌(白坪村)으로 진을 옮겼다.

○ 양호(揚鎬)와 마귀(麻貴)가 도산(島山)을 13일 동안 포위하여 밤낮으로 성을 공격하니, 왜병이 크게 곤하였다. 거기에다 양식이 떨어지고 우물물에 말라서 죽는 자가 날마다 쌓이니 청정이 자결하려 하였다. 그들은 매양 금․은과 여러 가지 보물을 성 밖으로 던져 싸움을 늦추고 있다가 갑자기 큰비가 와서 날씨가 대단히 추워 아군은 힘이 다하고 각처의 응원군이 바다를 덮고 몰려와서 학익진(鶴翼陣)을 벌이고 돌진하여 오므로, 좌차(左次)하여 물러났다. 양호는 바로 서울로 돌아오고, 마귀와 본국의 원수 권율은 군사를 거느리고 경주(慶州)에 머물렀다.

 

 

 

편저자 남원문화원 李 錫 鴻

 

 

정유재란 남원성 싸움은 1997년에 만들어진 책의 원고입니다.
그 중 그림과 사진 등은 제외하였습니다.

아마도 1986년인가 봅니다.
故 최규진 선생님이 남원문화원 향토학교에서 남원성 싸움에 대한 강의가 있었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만인정신]에 대해 언급하였습니다.

최규진 선생님은 한 평생 교육계에 몸담으시면서 정유년 남원성 싸움을 연구하고 교육하시면서 남기신 결과가 [남원의 정신은 만인정신]입니다.

이로 부터 10여년만에 자주적인 향토사에 입각해 이 책을 만들었습니다.


이 내용을 사용하실때는 발행처, 편저자 등을 꼭 밝혀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