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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스차일드 가문의 성공요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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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이 다섯개의 화살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문장인데, 로스차일드 가문의 출발이라 할 수 있는 마이어가 임종의 자리에서 자녀들에게 스키타이(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 흑해 북안에 건설되었던 강대한 유목국가)왕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화살다발처럼 하나로 뭉치면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나 만약 결속이 무너지면 그 힘을 잃고 번영도 사라질 것이다”를 이야기 하여, ‘다섯 개의 화살’이 그려진 방패를 가문의 문장으로 삼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로스차일드 사이트는 물론 런던의 은행에도 이 문장이 붙어 있습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기초를 세운 사람은 마이어 암셀(1744~1812년)입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게토(유대인 집단거주 지역)에서 태어난 그는 유대교 랍비 양성학교에 다니다가 11살 때 부모가 천연두로 죽자 학교를 그만두고 소년가장으로 경제활동에 뛰어듭니다. 친척의 도움을 받아서 하노버에있는 오펜하이머란 유대계은행에 취직함으로써 평생 은행원으로서의 편안한 생활을 할수 있는 환경을 제공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은행을 그만두고 프랑크푸르트로 되돌아와서 그의 아버지가 하던 고물장사를 동생들과 함께 계속 합니다. 그는 통일 이전 독일의 제후 귀족 부호들을 상대로 옛날 화폐와 골동품 등을 팔아 돈을 벌게 됩니다. 이와 함께 의도적으로 독일의 권세가들에게 접근해 결국 헤센카젤공국의 지배자인 하나우공 빌헬름의 신임을 얻어 궁정 어용상인이 되기도 합니다. 참고로 로스차일드라는 이름은 붉은색(rot)과 방패(schild)의 합성어로, 마이어 암셀의 집에 붙은 붉은 방패에서 비롯됐었습니다.


로스차일드는 5명의 아들과 5명의 딸이 있었는데. 첫째 아들 암셀은 독일에서 아버지 사업을 이어받았고 나중에 통일 독일의 재무장관이 됩니다. 둘째 아들 살라몬은 오스트리아에, 셋째 아들 나탄은 영국에, 넷째 아들인 칼만은 이탈리아에, 다섯째 아들인 야콥(제임스)은 프랑스로가 각각 그 나라에서 귀족이 되거나 경제권을 장악합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나라에 있는 형제 들과 서로 연락을 취해 공동으로 돈을 벌기도 합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다국적 금융기관이 되어 국제 대출업을 한셈입니다.
이때 제임스 로스차일드(프랑스로 간 야콥의 자손)의 1850년도 자산 규모는 자그마치 6억프랑으로 이는 나머지 전 프랑스 은행의 자산을 모두 합한것보다 무려 1억5천만프랑 이나 더 큰 액수였습니다. 한편 로스차일드 가문은 막대한 자금력으로 그나라에 통치자들로 부터 검열없이 국경을 드나들수 있는 특권을 얻기도 했는데 심지어 적국에까지 마음대로 드나들수 있는 특별한 신분의 소유자가 됩니다. 또한 그들은 그 무엇보다도 통신을 중요하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비밀리에 비둘기를 이용한 통신방법을 발전시킵니다.
마이어 암셀은 빌헬름 9세가 맡겨둔 엄청난 거금을 빌헬름9세의 요구대로 숨겨두는 대신 다섯아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이에 영국에 진출해 있던 야심적이고 모험적인 셋째 아들 나탄(1777~1836년)은 이 비밀자금을 정식으로 투자하기 전에 여러 나라의 국채를 사고 되팔아 엄청난 단기차익을 챙기고 사업적 명망까지 얻는 데 성공합니다. 반면 프랑스에 간 나탄의 동생 야콥은 아버지가 보내준 돈을 나폴레용에게 군비로 빌려준후, 1815년 워털투전투에서 나폴레옹과 웰링턴의 결전을 지켜봅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나폴레옹의 위력이 너무 강하므로 십중팔구 영국이 위털투전투에서 패할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워털투전투에서 영국이 승리하는것을 지켜본 로스차일드의 사자는 그길로 비둘기를 보내 영국에 있던 나탄에게 보고하고 그 소식을 접한 나탄은 즉시 런던의 주식시장에 여느때 와 마찬가지로 나타나 비장한 표정으로 한참 생각하는듯 하더니 팔아라 라고 외치고는 사라집니다.
그를 주시하던 사람들은 모두 나탄이 팔라고 할때에는 분명히 영국이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이라 짐작하고 너도나도 앞다투어 주식을 팔려고 합니다. 이렇게 모두 팔겠다고 나서자 주식시장은 한바탕 아수라장이 되었고 그 결과 주식가격은 끝모를 바닥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때 나탄은 미리 비밀조직을 조직해 놓은 다른 회사의 명의로 그 주식들을 몽땅 사들이게 됩니다.
다음날..월링턴이 보낸 사자가 승전소식을 알리자 영국전체는 국민들의 환호성으로 뒤덮혔고 주식가격은 하늘로 치솟듯 뛰어 올랐으며, 나탄은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게 됩니다. 이때를 빗대어 사람들은 나탄 로스차일드가 영국을 샀다고 평할정도 였습니다. 나탄은 영국에 온지 17년만에 처음 갖고 있던 돈을 2천 5백배로 불립니다. 한편 다섯 아들은 모두 유럽의 중심국가 오스트리아 제국으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게 됩니다.
작위를 받으며 5발의 화살을 쥔 손이 그려진 문장을 사용한 것을 계기로 그 뒤 형제에게는 ‘5발의 화살’이라는 별명이 붙게 됩니다. 나폴레옹 전쟁 뒤 로스차일드 가문은 사실상 ‘유럽의 숨은 지배자’가 됩니다. 전쟁 중에 로스차일드 가문은 영국의 전비를 조달하기 위한 국채를 대량으로 매입하는가 하면, 이베리아 반도에 진출한 영국군의 자금 조달에도 크게 기여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나탄은 영국을 겨냥한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을 뚫고 영국 상품의 비밀교역을 주도하기도 합니다.
결국 세계 최강대국 영국의 재정을 비롯한 금융시장은 나탄에 의해 좌지우지 됐고, 막내 제임스도 프랑스에서 국왕 루이 필립과의 친교를 바탕으로 엄청난 부와 영향력을 과시하는 지위에 오릅니다. “로스차일드의 지원이 없으면 유럽의 어느 왕도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고대 유대인은 한 왕에게 복종했다는데, 지금은 여러 왕들이 한 유대인에게 머리를 조아린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고 하니, 그 힘을 느끼기에 충분합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성공 요인
1. 단결 ? 가문의 형제들이 하나의 화살묶음처럼 뭉쳤다.
2. 네트워크 경영 ? 네트워크를 통해 전체의 효율을 최대로 높이고, 위험을 분산시켰다.
3. 신용경영 ? 좋은 제품을 싸게 공급해 신용을 쌓고 다음 단계에 더 큰 거래를 장악했다.
4. 정보경영 ? 가장 정확한 정보로 가장 빠르게 사업기회를 잡아나가는 선진 경영기법을 동원했다.
5. 정경유착 ? 정치의 중요성을 깨닫고 권력자와의 인맥을 형성해 사업기회를 잡는데 능숙했다.
6. 2세 체제 준비 ? 자녀들에게 일찍부터 경제교육(상황에 따라선 실무교육까지)을 철저히 시켰다.
<참고 사진>

로스차일드 부인

로스차일드 가문이 소유한 프랑스 포도농장

로스차일드 빌딩, Thrawl Street. 1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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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로스차일드(Rothschild)는 rot(붉은 색)과 schild(방패)의 합성어입니다. 그들이 왜 ‘붉은 방패’를 성으로 사용했는지 확실치는 않습니다. 다만, 그들의 조상이 1500년대부터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태인거주지인 게토 한 구석에서 살았고, 그 집앞에 방패모양의 붉은 간판을 달았다는 사실만이 알려져 있습니다. 가문의 기초를 세운 것은 마이어 암셸(1744~1812)입니다. 그는 돈많은 독일의 제후·귀족·부호들을 상대로 옛날 화폐를 팔아 돈을 벌었습니다. 고전(古錢) 장사를 하던 그는 헤센카젤공국의 지배자인 하나우공작 빌헬름을 만나는 행운을 얻습니다.
하나우공 빌헬름은 독일에서 가장 부유한 제후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가장 좋은 상품을 가장 저렴한 가격에 공급함으로써 신용을 얻은 마이어 암셸은 하나우의 궁정어용상인이 됩니다. 그후 마이어 암셸은 나폴레옹전쟁때 빌헬름의 재산을 비밀리에 돈을 필요로 하는 다른 제후들에게 비싼 이자를 받고 빌려주는 방식으로 막대한 재산을 모았습니다. 가문의 꽃을 피운 것은 마이어 암셸의 다섯 아들입니다.
암셸(1773~1855), 살로몬 (1774~1855), 네이선(1777~1836), 칼(1788~1855), 제임스(1792~1868)는 성년이 되면서 유럽 각지로 흩어져 나갑니다. 암셸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프랑크푸르트를 지키고, 살로몬은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로 합스부르크가문이 지배하던 비엔나로 갑니다. 네이선은 산업혁명의 열기에 휩쌓인 런던에, 칼은 나폴리에, 막내 제임스는 혁명의 위대함을 만끽하고 있던 파리에 각각 둥지를 틉니다.
다섯 아들 중의 백미는 네이선이었습니다.
그는 ‘정보’와 ‘시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깨닫고 있는 사업가였습니다. 1799년 영국 맨체스터에서 사업을 시작한 네이선은 1804년 런던에서 금융업을 시작합니다. 채권·금·주식 거래가 그의 전공이었죠. 1810년쯤 네이선은 런던에서 전도유망한 기업가로 인정받기에 이릅니다. 그때부터 일어나는 일들은 거의 ‘기적’에 가깝습니다. 단 5년이란 짧은 시간안에 네이선은 일개 사업가에서 세계최강대국 영국의 재정을 주도하는 자본가로 성장하게 됩니다. 역사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사람도 ‘웰링턴 장군’이란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겁니다.
워털루전투에서 나폴레옹을 패배시킨 영국의 위대한 장군이요, 수상까지 역임한 정치가였습니다. 사람들은 웰링턴이 나폴레옹에게 이겼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의 승리를 뒷받침한 것이 네이선의 돈이란 사실은 잘 모르지요. 1811년부터 네이선은 웰링턴 장군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나폴레옹 군대와 전쟁을 수행할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했고, 전쟁으로 빚이 늘어만가는 영국정부의 국채를 무한정 사들여 전쟁을 계속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연합군의 공식은행가자리에 올라 유럽각국과 왕조의 채무관계·보상금지급 문제 등을 맡게됩니다.
전후처리에 정신없던 네이선에게 또 다시 기회가 찾아옵니다. ‘나폴레옹의 엘바섬 탈출’ - 다시 전쟁이 시작되고, 유럽 각국의 경제는 혼돈 속에 빠집니다. 예나 지금이나 ‘돈’이란 존재는 불안정 한 것, 예측할 수 없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지요. 결국 영국·프로이센 연합군이 벨기에의 워털루에서 나폴레옹과 맞서게 되는데, 웰링턴이 이끄는 영국군이 가까스로 승리를 거둡니다. 이 승리의 소식을 네이선은 다른 기업가들보다 24시간 먼저알게 됩니다. 어떻게 먼저 알게 됐는지는 베일에 가려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네이선이 몇 시간 먼저 입수한 정보를 이용, 영국정부주식을 무차별 매입함으로써 상상할 수 없는 이익을 남겼다는 사실 뿐입니다. 전쟁 후에 로스차일드가문은 말 그대로 ‘유럽의 숨은 지배자’가 됩니다. 세계최강대국인 영국의 재정을 비롯한 금융시장은 네이선이 좌지우지했고, 루이필립왕의 친구였던 막내 제임스는 1830년부터 1848년까지 실질적인 프랑스의 통치자였습니다.
1830년대부터 본격화된 프랑스의 산업혁명은 제임스의 돈으로 이뤄진 것입니다. 비엔나의 살로몬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실권자였던 메테르니히 재상의 오른팔이었습니다. 1822년에 메테르니히는 유태인 로스차일드를 비판했던 ‘알게마이네 차이퉁’ 신문의 판매를 금지할 정도로 로스차일드와의 유대를 중시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이라는 대혼돈의 시기. 그들이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정확한 정보수집능력과 형제들간의 긴밀한 유대관계, 과감한 결단력때문이었습니다.
1. 비스마르크에게 일격을 가하다.
1871년 프랑스를 항복시킨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전쟁배상금으로 50억프랑을 요구하고, 배상금을 갚을 때까지 프랑스에 군대를 주둔시키기로 합니다. 그의 계산은 배상금을 갚지 못해 허덕이는 동안 프랑스를 완전히 굴복시키고, 독일군대를 오래도록 머물게 함으로써 프랑스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할 생각이었지요. 그러나, 50억 프랑이란 거액을 프랑스는 2년만에 다 갚습니다. 비스마르크가 로스차일드의 힘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이지요.
프랑스로 이주했던 제임스의 후손들은 영국·독일·오스트리아 등에 흩어져있는 친척들의 도움을 바탕으로 유럽의 금융가들을 모아 연합을 결성합니다. 그 ‘연합’은 프랑스 통화를 최대한 안정시켜 경제를 되살리고, 국채를 발행해서 배상금을 갚아버립니다. 독일 군대는 한숨을 쉬며 프랑스를 떠났습니다. 참, 프로이센의 왕이며, 독일제국의 황제가 된 빌헬름이 프로이센군의 파리포위작전 당시에 본부로 삼았던 곳을 제임스 남작(로스차일드의 후손들은 각국에서 귀족의 작위를 받았음)이 지었고, 프랑스 로스차일드 가문의 거성이었던 ‘페리에르성’이었습니다.
성에 처음 도착한 왕이 뭐라고 외쳤냐하면, “왕에게는 너무 훌륭한 곳이구나. 로스차일드에게나 어울려.” 페리에르성의 규모와 화려함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저도 가본 적이 없거든요.
2. 수에즈 운하를 사들이다.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수에즈운하. 세계 상업지도를 뒤바꾼 이 운하는 당시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속해있던 이집트의 총독 이스마일이 1860년대에 프랑스 기술자 페르디낭 드 레셉스의 도움으로 건설합니다. 영국은 운하건설이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에 투자하지 않았고, 결국 운하는 프랑스의 재정원조로 완성됩니다. 수에즈 운하의 완공으로 인해 유럽에서 극동까지의 항해시간이 반으로 줄었고, 인도·중국·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등 영국의 주요식민지로 가는 뱃길도 거의 직선으로 열렸습니다. 드 레셉스는 운하가 개통된 이후 선박통과요금을 계속 올렸고, 영국은 울며겨자먹기로 돈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식민지를 놓고 다투는 경쟁국 프랑스의 영향권에 있는 수에즈 운하길이 언제 막힐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지요. 불안해하고 있던 영국에게 기회가 찾아옵니다. 1875년 11월, 현금이 바닥난 이스마일 총독은 돈을 모으기 위해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수에즈운하 주식 44%를 비밀리에 시장에 내놓았습니다. 당시 영국의 수상은 제국주의자로 알려진 보수당의 벤자민 디즈레일리였는데, 그는 이번 기회에 꼭 운하를 매입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디즈레일리 수상은 빅토리아 여왕에게 강력하게 운하매입을 권하는 한편, 비밀각료회의에서 만장일치로 매입을 결정합니다. 문제는 신속함과 기밀엄수였습니다. 프랑스때문이었지요. 이스마일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액수인 400만 파운드를 요구합니다. 영국에서 그런 거액을 단기간내에 마련할 사람은 로스차일드 밖에 없었습니다. 디즈레일리는 친구인 라이어닐 로스차일드에게 개인적으로 400만 파운드를 대출해 달라고 합니다. 라이어닐은 즉각 그 돈을 마련해 주었고, 수에즈 운하는 영국정부의 것이 됩니다.
영국은 환호했고, 프랑스는 분노했습니다. 영국은 운하매입으로 국제무역에서 큰 이익을 얻게되고, 아프리카·아시아 진출이란 측면에서도 큰 도움을 받습니다. 훗날 영국은 수에즈 운하 보호를 명목으로 이집트를 보호국화하게 되고, 여세를 몰아 수단까지 식민지화 합니다. 영국이 3C(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이집트의 카이로-인도의 캘커타를 잇는 영국의 대표적인 식민정책) 정책을 세울 수 있었던 것도, 그 지역에서 프랑스·독일세력을 견제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수에즈운하의 매입덕분이었습니다.
3. 이스라엘을 건국하다.
로스차일드는 유태인입니다. 엄청난 부와 사회적 영향력으로 인해 그들은 결국 유태세계의 지도자 역할을 ‘자의반 타의반’ 맡아왔습니다.
1880년, 세계에는 약 500만명의 유태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중 서유럽에 사는 사람은 15%에 불과했고, 대다수 유태인은 러시아·폴란드·발칸반도에서 빈곤 속에 학대받는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러시아가 반유태주의를 국가정책으로 삼으면서 엄청난 수의 유태인이 서유럽으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이와 함꼐 예류살렘으로도 많은 유태인들이 모여듭니다. 그러나, 이들은 거의 빈손이었고 누군가의 재정적인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그때 나타난 것이 에드몽 로스차일드입니다. 프랑스 로스차일드의 시조 제임스 남작의 막내아들인 그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주하는 유태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자금을 댑니다. 에드몽의 개척지를 중심으로 예루살렘은 이슬람의 도시에서 유태인의 도시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총리 벤 구리온은 근대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에드몽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유태인이 유랑민으로 지낸 2000년의 세월 동안, 에드몽 드 로스차일드에 버금가는, 또는 그와 비교할 만한 인물을 발견하는 일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또 이스라엘의 개척항구 카에사리아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라마트 하나디브에 있는 에드몽의 무덤에는 이런 묘비명이 써있다고 합니다.
“이 땅의 아버지 에드몽 드 로스차일드 남작과 그의 부인, 하느님을 높이 받든 여인 아델하이드 남작부인 여기 잠들다”
1차세계대전으로 오스칸투르크 제국이 몰락하면서, 불가능해 보였던 유태인국가건설이란 꿈이 현실로 다가옵니다. 로스차일드는 영국정부를 움직여서, 이 작업을 해냅니다. 영국의 외무대신 벨푸어는 당시 영국 로스차일드의 수장이었던 월터경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씁니다.
“친애하는 로스차일드경, 정부를 대표하며 유대시오니스트의 절망에 공감의 뜻을 나타내는, 아래와 같은 선언을 각의에 제출하여 승인받은 일을 큰 기쁨 속에 알립니다. ‘정부는 팔레스타인의 유태인 향토건설에 동의하며(이하 생략)’
1917년11월2일 외무성에서 아서 제임스 벨푸어”
벨푸어 선언에 앞서, 월터 로스차일드의 손에 쥐어진 이 한장의 편지. 새로운 유태국가 건설이란 희망을 담았지만, 돌이켜보면 아랍과 이스라엘간의 끝없는 피의 투쟁이 시작됨을 알리는 메신저이기도 했습니다. 로스차일드에게 가장 화려했던 시절은 벨에포크(아름다운 시절이란 의미로, 1880년대부터 1차 세계대전이전까지 평화롭고 번영했던 유럽의 전성기를 일컫는 말) 때였을 겁니다. 시조였던 마이어암셸을 1대로 봤을 때, 3~4대에 해당하는 로스차일드들은 유럽 각지에서 선조들이 쌓아올린 거부(巨富)를 토대로 인생을 만끽합니다. 권력·명성, 이에 걸맞는 거대한 저택, 온갖 미술품들, 귀족작위…
20세기가 시작되면서 암울한 그림자가 로스차일드를 덮칩니다. 우선 종가인 프랑크푸르트 라인의 대가 20세기의 시작과 함께 끊기게 됩니다. 어쩔수 없이 급작스럽게 세대교체가 이뤄집니다. 런던·파리·비엔나를 이끌던 3~4대의 주요구성원들이 1904년부터 1918년 사이에 모두 사망하고, 4~5대가 사업을 물려받게 됩니다. 문제는 후계자들의 능력이 선조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는 겁니다. 너무나 빨리 변하는 세상도 상황을 악화시켰습니다.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1차 대전이 터지게 됩니다. 전쟁은 끝난 후, 유럽은 기력을 잃습니다. 로스차일드와 상부상조하던 옛유럽이 사라지고, 미국이 강력한 경제의 중심지로 떠오른 겁니다. 히틀러의 부상과 2차대전의 발발은 로스차일드에게 더 치명적이었습니다. 히틀러는 유태인인 로스차일드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모든 재산을 내놓으라고 협박합니다. 히틀러의 직접 영향권하에 있었던 비엔나 라인의 로스차일드는 모든 재산을 압수당한 채, 추방됩니다. 프랑스가 나치에 정복되자 프랑스 라인도 같은 운명을 맞게됩니다. 이들은 대부분 미국에서 피난생활을 합니다.
전쟁이 끝난 후, 런던과 파리의 로스차일드만이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됩니다. 살아남은 런던과 파리의 로스차일드들은 선조들처럼 완벽하게 단합하지 못했고, 각자의 길을 가게 됩니다. 우선 런던에서는 5대에 해당하는 앤서니 구스타브가 재건에 앞장섭니다. 그는 가족회사를 주식회사로 변화시킵니다. ‘외부인에게 경영을 맡겨서는 안된다’는 선조의 유훈을 폐지, 능력있는 은행가들을 영입하고 미국진출도 적극적으로 추진합니다. 런던 로스차일드내에서는 그러나, 불화가 계속됩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개인은행을 대규모 상업은행으로 변모시키자는 제이콥과 개인은행을 유지하면서 특정분야에 치중하자는 에블린이 반목하고, 결국 제이콥이 회사에서 쫓겨납니다. 파리에서는 4대인 기 드 로스차일드 남작이 중심이 됩니다. 그는 로스차일드 형제상회를 단순한 상업은행에서 금융·상업복합기업으로 변신시키고, 1960년 로스차일드의 상징이었던 페리에르성의 문을 다시 엽니다. 로스차일드의 평생친구였던 퐁피두가 1962년부터 68년까지 프랑스 총리, 69년부터 74년까지 대통령을 지내는 등 권력을 장악하고, 로스차일드도 금융계와 상류사회에서 전통적인 지도력을 회복합니다.
파국은 1981년에 찾아옵니다. 사회주의자 프랑스와 미테랑 대통령은 민간금융부문의 국유화를 추진하고, 로스차일드 은행은 창립 165년만에 문을 닫습니다. 기 남작은 물러나고, 아들 다비드가 나섭니다. 그는 1984년 ‘파리오를레앙은행’을 만들어 다시 실업계로 돌아오고, 옛날의 명성을 다시 찾습니다. 그는 파리는 물론이고, 런던의 사업에도 깊숙이 개입합니다. 최근 기사에 의하면 파리의 다비드 남작은 런던의 수장 에블린으로부터 런던 로스차일드 사업을 물려받아 전세계 로스차일드 사업을 총괄하게 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상으로 로스차일드 집안에 대한 약사(略史)를 마치고, 몇 가지 에피소드를 덧붙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은 몇 년이나 됐을까요? 1897년 한성은행이란 이름으로 설립됐던 오늘날의 조흥은행이 가장 오래된 기업 아닐까 싶네요. 그런데 조흥은행은 개인기업이 아닙니다. 어떻게 로스차일드는 200년이 넘는 세월동안 자신들만의 왕국을 유지해올 수 있었을까요.
아마 ‘단결’이 첫번째 요인이었을 겁니다. 로스차일드의 문장은 질끈 묶여있는 ‘다섯개의 화살’입니다. 이 화살은 전유럽으로 흩어져 집안의 부를 팽창시켰던 중시조 마이어 암셸의 다섯 아들을 의미합니다. 마이어 암셸이 평소에 아들들에게 자주 했고, 유언으로 남겼던 한 일화가 있습니다. 다섯명의 아들을 둔 스키타이의 한 왕이 죽기 직전에 다섯 아들을 불러놓고 화살을 한 대씩 주면서 부러트리라고 하자 모두 쉽게 부러트렸는데, 다섯대를 한꺼번에 주자 부러트리지 못했다는, 우리도 어디선가 들었던 경험이 있는 그런 일화입니다.
어쨌든 로스차일드의 형제들은 최소한 100년 동안은 굳건하게, 그 후 100년 동안은 느슨하게 그들만의 연대를 유지해왔고, 그들만의 단결은 세계최대의 금융제국 건설에 큰 힘이 됐습니다. 마지막으로, 로스차일드는 지난 200년 이상 세계경제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지만, 지금은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왜 일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로스차일드가 미국진출에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로스차일드에서는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훨씬 전인 1840년대에 제임스 대남작의 장남 알퐁소를 ‘특사’ 자격으로 미국에 파견합니다.
미국진출여부를 결정하기 위해서였죠. 미국의 무한한 가능성을 한 눈에 알아본 알퐁소는 ‘미국진출’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본인이 직접 그 임무를 맡고 싶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시 로스차일드를 이끌던 파리 로스차일드의 제임스 대남작은 별다른 이유없이 장남의 의견을 무시하고 그를 유럽으로 불러들입니다. 남북전쟁 직전 로스차일드에서는 또 다른 가족을 특사로 보내는데, 이 사람은 힘차게 움직이는 미국사회의 활력을 시끌벅적하고 천박한 것으로 단정짓고, 미국진출을 반대합니다.
남북전쟁이후 미국에서는 급속도로 산업혁명이 진행되고, 미국나름대로의 경제질서가 형성됩니다.
19세기 후반부터 로스차일드는 미국진출을 시도하지만, 이미 견고해진 기득권 세력들의 저항을 뚫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밴더빌트·카네기·록펠러·모건·포드 등 새로운 기업가·자본가들이 신세계를 발판으로 역사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동안, 로스차일드는 화려함속에 저물어가던 구세계의 맹주자리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1840년대에 로스차일드가 알퐁소의 주장대로 미국에 진출했다면 어땠을까요. 미국에서 소위 대기업가들이 등장한 시기가 1880년대 이후라는 것을 생각하면, 로스차일드는 40여년 동안 막강한 자본의 힘으로 미국의 금융·산업계를 지배했을 것이고, 우리도 1800년대의 유럽사람이 그러했듯이, 매일같이 로스차일드란 이름속에 묻혀 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전시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