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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11) 감시당하는 朴正熙 장군

淸山에 2011. 1. 26. 11:01

 

 

 감시당하는 朴正熙 장군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11)
박정희는 송요찬 총장에게 ‘부정선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용퇴하라’는 편지를 쓰고
김종필은 연판장을 씀으로써 군대의 상층부를 흔들어 놓는다.
趙甲濟   
 

 

 
 조총련 사주說
 
 박정희 군수기지사령관을 만나고 올라온 김종필 중령은 5월8일 육사 8기 동기생 여덟 명과 회동하여 연판장을 쓰기로 합의한다. 8명은 김종필 이외에 崔俊明(최준명) 대령, 金炯旭(김형욱), 吉在號(길재호), 石昌熙(석창희), 申允昌(신윤창), 玉昌鎬(옥창호), 吳尙均(오상균) 중령이었다. 이들은 김종필에게 연판장의 초안을 작성하도록 맡겼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
 
 <4·19 혁명 정신으로 整軍(정군)해야 한다. 정군 대상자에게는 우선 개인적인 권고로 자진 사퇴 형식을 취한다. 권고에 응하지 않을 때는 지휘 계통을 통해서 건의하여 사퇴를 종용토록 한다. 그래도 정군이 부진할 때는 국방장관 직속으로 ‘정군 심사위원회’를 설치, 정군을 추진한다. 제2공화국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
정군은 새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 과도기나 진통기에 과감히 추진한다>
 
 며칠 뒤 최준명 대령은 서울 지구 계엄부대장인 15사단장 조재미 준장을 찾아갔다. 한국전 시절 직속상관이었던 조 준장은 자리에 없었다. 최 대령은 사단장 부관과 잡담을 하던 중에 사단장에게 할 말을 부관에게 다 털어놓고 떠났다. 그 후 부관은 사단장에게 ‘8기생 중심으로 참모총장 축출 운동이 일어날 것인데 그때는 사단장님이 중립을 지켜달라는 부탁을 최준명 대령이 하고 갔다’고 보고했다.
 
지금 대전에 살고 있는 조재미 당시 준장은 “내가 최 중령을 불러 주의를 주었다. 지금은 군이 안정되어야 할 시점인데 그런 일로 혼란을 일으켜선 안 된다고 나무랐다. 내가 송요찬 장군에게 알렸다는 말도 있는 모양인데 그런 일은 없었고, 송 장군이 다른 경로로 그런 움직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고 말했다. 송 총장은 방첩대에조사를 지시하여 5월17, 18일 양일간에 걸쳐 김종필 등 5명을 국가 반란 음모 혐의로 구속시켰다.
 
 박정희는 송 총장에게 ‘용퇴하라’는 편지를 쓰고 김종필은 연판장을 씀으로써 군대의 상층부를 흔들어 놓는다. 박─김 라인에 의한 최초의 협동이 이루어진 셈이었으며 처삼촌─조카사위 사이가 동지적 관계로 변모한 것이다. 김종필과 8기 동기생들이 연판장 건으로 분주할 때 박정희 부산 지구 계엄사무소장은 ‘조총련계 사주 시위설’에 휘말려
고생하고 있었다.
 
 5월2일 중고교가 휴교 15일 만에 개학하자 부산에서 특히 시위가 많이 발생했다. 2일 오전 부산에선 대학교부터 중학교까지 40여 개 학교 학생들 2만여 명이 시내로 쏟아져 나와 ‘국회는 해산하라’, ‘썩은 국회는 개헌할 자격 없다’, ‘기성 정치인은 물러가라’, ‘김일성을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쳤다. 중앙지 사회면 기사는 ‘학생 데모, 또 부산서’란 제목을 달 정도였다. 4·19 이전에 용감한 시위를 하지 못한 학생들은 그 열등감을 풀기 위해서 더 과격한 구호를
내걸기도 했다.
 
 

 


 5월3일자 <조선일보>에는 전남 광주에서 외과병원을 경영하고 있는 이모 씨가 데모를 하지 않았던 서울 유학 중의 딸에게 보내는 편지가 실려 있었다. ‘데모 대열에서 빠진 딸에게, 부끄러운 아버지로부터’란 副題(부제)가 달린 기고문의 제목은 ‘너는 그날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였다.
 
 <부모 있어도 넌 시대의 고아 / ‘비굴한 행복’보담 ‘당당한 불행’을 기다렸더니 / 애써 공부시킨 이 애비가 괴롭다>
 
 5월3일, 박정희 계엄사무소장은 부산 일원의 야간 통행금지 시간을 저녁 7시부터 다음날 오전 5시까지로 연장했다. 오후 4시부터는 차량 통행을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이렇게 되니 회사는 오후 3시에 문을 닫고 차 없는 거리를 걸어서 귀가하는 시민들이 많았다.
 
 4일 오전에도 부산의 학생 시위는 계속됐다. 중학생 수백 명이 중심지 중앙동 거리를 행진하고 있었다. 사이렌을 울리면서 헌병들이 탄 트럭과 장갑차 대열이 나타나 학생들을 쫓기 시작했다. 헌병 트럭 대열의 맨 앞에 박정희 사령관이 탄 세단이 달렸다. 차량 대열이 데모 대열을 서서히 관통하자 중학생들은 달아나 버리고 데모대는 흩어져버렸다.
 
 부산역 광장 앞에 도착, 정렬한 헌병들을 해산시킨 박정희는 자신의 승용차로 돌아오더니 문짝의 손잡이를 잡고 머리를 숙인 채 한참 생각에 잠겼다.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 생각에 빠져 있는 박정희의 레인코트가 한쪽 어깨에서 벗겨져 내리고 있었다. 모자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이 군복을 적셨다.
 
반짝이는 두 개의 별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던 구두닦이 소년이 벗겨져 내리는 코트를 다시 걸쳐주었다. 박정희는 명상에서 깨어나 미소를 지으면서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부산일보 김종신
기자를 발견하자 박정희는 화풀이를 했다. 
 

 

 

   
  “당신네들, 선동하다가는 이 모양이오. 글쎄, 데모도 좋지만 저런 중학생들이 무얼 알아서 거리로 나오는 거요.”
 
 박정희는 자신의 화풀이에 겸연쩍어졌는지 김 기자를 향해서 “우리 차나 한 잔 할까”라고 했다. 두 사람은 다방에 들어갔다. 김종신은 “연장된 통행금지 시간으로 사무실 근무자들은 집에도 못 가고 회사에서 잠을 자기도 한다”면서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데모보다 더한 사태가 날 겁니다”라고 했다.
 
 “그럼 오늘부터 통금시간을 종전대로 환원하지.”
 
 김종신 기자는 벌떡 일어서면서 “그렇게 기사를 써도 좋습니까”라고 다짐을 했다.
 
 “물론 기자라면 기사를 써야지.”
 
 박 사령관을 다방에 혼자 남겨 놓고 김종신 기자는 회사로 달려가 마감 시간을 3분 넘긴 특종을 했다.
 
 박정희는 유언비어 날조와 유포를 방지한다는 이유로 5일부터 언론 검열을 부활시켰다. 5월6일 경남 지역(당시 부산은 아직 직할시로 독립하기 전이라 경남도 소속) 여야 국회의원들은 국회 해산과 기성 정치인의 퇴진을 요구하는
부산 시위에 위협을 느끼고 손을 쓰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날 허정 내각수반과 이종찬 국방장관, 그리고 송요찬 계엄사령관을 국회로 불러 “부산 시위는 조총련계가 남해안으로 침투하여 사주하고 있다는 설이 있다”면서 대책을 따졌다. 일부 의원들은 “조총련이 10억 환의 음모 자금을 대고 있고 군의 유력한 장성이 이 시위를 묵인하고 있다”고 박정희를 겨냥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崔榮喜 장군의 현지 조사
 
 이낙선은 이 무렵의 기록 《正義(정의)의 受難(수난)》에서 조총련 사주설은 부산 지역 민주당 국회의원 두 사람이 만들어내어 허정 수반에게 고해 바친 것이란 주장을 하고 있다.
 
 <兩人(양인)은 허정을 방문하여, 박정희 소장이 부산일보 황용주 주필·국제신보 이병주 주필과 작당, 조총련으로부터 정치 자금 10억 환을 유입받아 혁신 세력을 규합하여 부산 지방을 중심으로 혁명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고 밀고했다. 박정희 장군으로부터 용퇴 충고를 받은 송요찬 중장은 과잉반응을 보였다.
 
 포항에 있는 해병 1개 사단의 일부 병력을 부산으로 보내고, 원주에서 헌병 1개 대대를 차출하여 부산으로 급파한다는 계획을 세워 매그루더 미 8군 사령관에게 제출했다. 아울러 崔榮喜(최영희) 중장을 통합지휘관으로 임명하여 부산에 파견, 박정희 현지 계엄사무소장을 포함한 여러 파견 부대를 통합 지휘케 하려고 했다>
 
 먼저 부산에 도착한 것은 1군 사령부 소속 헌병대대였다. 박정희 소장이 요청도 하지 않았는데 부산 지역의 치안 유지 능력을 보강한다면서 부산역에 이 헌병대 병력을 주둔시켰다. 누가 보아도 박정희 장군을 감시하는 임무를 띠고 온 것 같았다. 이낙선의 기록에 따르면 이종찬 국방장관은 송요찬 총장의 조치에 대해서 다소 비판적이었다고 한다. 이 장관은 직접 박정희 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부산의 상황이 병력을 증강해야 할 정도인가’라고 물었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현재 병력으로도 충분한데 이런 대병력을 집결시켜 민심을 자극한다는 것은 무슨 일입니까. 문제는 저를 믿지 못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차라리 군복을 벗겨 집어넣을 것이지 이 자리에 두면서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모욕입니다.”
 

 


 송요찬 총장은 해병대 사령부를 통해서 포항에 주둔하고 있던 해병상륙사단이 유사시에 부산으로 출동할 준비를 갖추도록 지시했다. 해병사단장은 김동하 소장. 그는 3·15 부정 선거 이전부터 이미 박정희와 자주 밀담을 나누면서 이승만 정권을 뒤엎을 모의를 하고 있었다. 김 소장은 미 고문관을 데리고 부산으로 내려가서 박정희 소장과 요담했다. 박, 김 두 사람은 이 자리에서 미 고문관에게 병력 동원의 불필요성을 역설했다.
 
 송요찬 총장은 자신의 은혜를 크게 입은 박정희가 ‘3·15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용퇴하라’는 편지를 써 올린 데 배신감을 느끼고 있던 터에 이제는 여당 행세를 하고 있는 민주당에서 박정희가 조총련 및 부산 언론과 작당하여 시위를 선동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고 나서자 반격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5월 초, 그는 대전에 있는 육군 교육총본부 총장 최영희 중장을 서울로 불렀다. 송, 최 두 사람은 말을 놓고 지내는
사이. 최영희의 기억에 따르면 총장실에서 있었던 두 사람의 대화는 이러했다.
 
 “최 장군, 지금 부산에서 폭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어. 박정희가 좌익분자들과 손잡고 반란을 기도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네. 당신이 내려가서 정세를 파악해줘.
첩보가 사실로 밝혀지면 현장에서 박정희를 체포해 버려. 그리고 당신이 부산을 포함한 경남 일원을 담당하는 지역 계엄사령관으로 취임해.”
 
 “이 사람아, 박정희를 1군 참모장으로 발탁한 사람이 자네고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밀어 준 것도 자넨데 그러면 발탁은
 자네가 하고 잡아넣는 일은 내가 하라는 건가.”
 
 “이건 명령이다.”
 
 “명령? 그래 명령해 봐. 그래서 내가 명령에 불복종했다고 군법회의에 넘겨봐.”
 
 송요찬은 답답했던지 이종찬 국방장관과 매그루더 미 8군 사령관에게 가서 상의한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최영희를 불러 “송 장군과 협조하라”고 권했다. 매그루더 대장은 “박정희 장군은 사상적으로 좌익이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최 장군은 어떻게 생각하나”라고 물었다. 최영희 장군은 “그는 정의감이 강하고 정직한 사람이다”라고 말해 주었다.
최영희 중장이 대전으로 돌아와서 참모회의를 열었다. 한 참모가 이런 말을 했다.
 
 “박 장군이 부산과 포항에서 장교들과 자주 만나면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는 말들이 많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최영희 중장은 徐鐘喆(서종철) 소장과 부관을 데리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기차 안에서 최 중장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송요찬 총장이 박정희 소장을 제거하는 데 자신을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영희는 자유당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던 송 총장이 이승만 하야 뒤 분명한 거취를 밝히지 않는 것이 불만이었다. 최 중장은 부산역에 도착하자마자 키가 큰 서종철에게 말했다.
 
 “자네는 남의 눈에 잘 뜨이니 어디 돌아다니지 말고 집에 가 있어. 내가 연락할 테니.”

 

 

    
 최영희 중장이 그 길로 동래에 있는 육군 휴양소에 가서 쉬고 있는 데 박정희가 찾아왔다. 연락도 하지 않았는데 그가 나타난 것은 자신의 움직임이 박정희의 정보망에 걸려든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최영희와 박정희는 함께
근무한 적이 없었다. 최영희는 박정희에 대해서 아주 좋은 평판을 듣고 있었다.
 
 자유당 실세이던 辛道煥(신도환) 의원이 박정희에 대해서 묻자 “청렴한 군인이니 많이 도와주라”고 부탁한 적도 있었다. 정복 차림의 박정희는 최 중장에게 “각하, 일찍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라고 인사했다.
 
 “이봐, 박 장군. 자네하고 송 총장하고는 절친한 사이가 아닌가. 그런데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었길래 자네를 조사하라고 명령을 내리게 했는가 말이야.”
 
 “뭐, 별것 아닙니다. 건의서를 한 번 올렸는데 그것 때문에 그러시는 것 같습니다. 혁명이 일어났으니 총장으로서
부정선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나가시라는 건의문이었습니다.”
 
 박정희는 최 중장을 모시고 군수기지사령부로 와서 의장대 사열을 받게 하고 김용순 참모장, 박태준 인사참모 등 부하들을 배석시킨 뒤 현황 보고를 하는 등 예우를 깍듯이 했다. 박정희는 송요찬에게 올린 편지의 사본을 보여주었다. 최영희 중장은 찬찬히 읽어 보고는 말했다.
 
 “잘했구먼. 말이야 맞네. 나도 해당되겠지만 군 사령관 이상은 모두 책임지고 물러나야 해. 옳은 말 했소.
당신 같은 사람이 참모총장이 되어 군을 쇄신해야 해요.” 
 

 

 

 
 
Hunters Choir Opera 'Der Freischutz'- Hunters Choir Bavarian Radio Symphony Orchestra 
 Eugen Jochum, Cond Karl Maria Friedrich Ernst
 von Web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