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朴正熙 照明

연재(8) 맞물려 돌아가는 軍心과 民心

淸山에 2011. 1. 22. 18:41

 

 
맞물려 돌아가는 軍心과 民心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8)/ “여러분 냉정해 주십시오. 우리가 싫어하던 이승만 부패 정권은 물러갔습니다. 우리 다 같이 만세를 부릅시다” 
趙甲濟    

 

 

 
 미국의 이상한 행동
 
 경무대 후원에서 학생 대표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미국 매카나기 대사가 오셨습니다”란 전갈이 왔다. 대통령은 “기다리라고 해”라고 한 뒤 대화를 계속했다. 대통령은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야지”라고 되뇐 뒤 학생들에게 “그러면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다. 고려대학생 유일나는 경무대로 오는 차 안에서 안내하던 이모 준장이 하던 말이 생각나 이렇게 말했다.
 
 “이집트의 나세르를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는 적과 대치 중이므로 2년 정도 군정을 실시해 질서를 회복한 다음 민간 정부를 출범시키면 될 것입니다.”
 
 유 군이 배석하고 있던 송요찬 계엄사령관을 쳐다보니 괜한 오해를 받게 되었다는 표정이었고 신임 외무장관 許政(허정)은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이 대통령은 한참 생각하다가 “군정은 안 돼. 우리는 이집트와 달라”라고 했다. 유일나의 이 건의가 송요찬의 使嗾(사주)에 의한 것이란 오해가 있었다.
 
 유일나는 “송 사령관은 오히려 우리가 대통령한테 하야를 권고하는 것조차 반대했다. 다만 우리를 육본에서 경무대까지 안내해준 이석봉 준장이 ‘정말 자네들이 하야 권고를 할 수 있나’, ‘군이라고 해서 정치를 하지 말란 법이 있느냐’고 말했을 뿐이다”고 증언했다.
 
 매카나기 대사가 경무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라디오에서 이승만의 하야 성명이 방송되고 있을 때였다.
 
 매카나기 대사가 이승만에게 하야를 권고하여 결심을 하도록 했다는 通說(통설)은 완전히 엉터리이다. 오전 10시40분부터 시작된 대사와 대통령의 면담에는 김정렬, 許政이 배석했다. 매카나기 대사는 당초엔 미국 정부의 강경한 압력을 전달하려고 했었는데 하야 성명이 나가는 바람에 성명서 내용을 확인하는 대화로 바뀌었다. 김정렬 장관이 옆에서 보충설명을 많이 했다. 김 장관은 “미국 정부가 빨리 이 성명을 지지하여 질서를 회복하는 데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 매카나기 대사는 “우리는 각하를 한국의 조지 워싱턴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우리는 각하가 역사에서 합당한 위치와 명예를 지킬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했다. 김정렬 회고록에 따르면 이 말을 듣고 있던 이승만은 천장을 바라보면서 우리말로 “저 사람 무슨 잠꼬대야”라고 혼잣말을 하더라고 한다. 매카나기 대사가 국무부로 보낸 면담 보고서엔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측의 배려와 관심에 감사했다’고 적혀 있지만.
 
 국군은 이승만의 하야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군은 계엄령하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임무를 맡게 되자 시위 진압을 포기하고 발포를 하지 않았다. 계엄군은 붙들린 시위 학생은 풀어주고 고문 경찰관들은 잡아넣었다. 군심이 민심과 맞물려 돌아가고 정권을 지탱하던 유일한 물리력 경찰은 계엄군에 의해서 무력화되어 버렸다. 4월26일 오전에 이승만의 하야 성명이 없었더라면 군의 봉기가 있었을 것이란 주장도 있다. 당시 1군 사령관 유재흥 중장의 비서실장은 鄭昇和(정승화·육군 참모총장 역임) 대령이었다.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박정희 1948년 송호성 준장과 광주에서 반란 토벌 작전 중

 

 

 

 
 “1군 사령부의 장교들이 계엄군으로 투입된 1군 산하 15사단 병력의 지휘관들에게 개인적으로 전화를 걸어 ‘절대로 발포해선 안 된다’고 부탁할 정도였습니다. 민기식 부사령관이 이 사태에 대한 1군의 태도를 결정하자고 사령관에게 건의하여 26일 아침에 군단장 회의가 열렸습니다.
 
나도 이 회의에 배석했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는 길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결의를 미군 수석고문과 金鐘五(김종오) 육군 참모차장에게 전달하는 한편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에 대비한 일종의 후보 계획도 마련했습니다. 李鍾贊(이종찬) 육군대학 총장을 진해에서 모셔 와서 지도자로 옹립한다는 것이었는데 내가 이 장군을 태우러 갈 경비행기를 준비시켰습니다.”
 
 석 달 전부터 거사 계획을 꾸미고 있던 박정희도 한때 이종찬을 지도자로 모실 생각을 했었다. 육군대학 부총장으로 있던 金載圭(김재규)에게 “이 총장의 동참 의사를 타진해 달라”고 부탁했다. 박정희와는 육사 2기 동기이자 고향 후배인 김재규는 얼마 뒤 ‘이 총장을 관찰해보니 혁명에 가담할 분이 아니다’는 답을 해왔다. 많은 장교들이 이종찬을 그런 일의 지도자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그는 존경을 받기는 원해도 쿠데타 같은 일에 직접 나서서 모험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김정렬은 생전에 “이 대통령의 하야를 내가 건의했다느니 미국의 압력 때문이라느니 하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것은 이 박사를 욕되게 하는 일이다”면서 진상을 가장 잘 아는 자신이 언젠가는 기록을 남기겠다고 말하곤 했다. 그의 死後(사후)에 나온 회고록에 그때 상황이 실감있게 묘사되어 있는데 이 기록에는
중요한 秘話(비화)가 한 토막 있다.
 
 이승만의 하야 성명이 나온 다음날(4월27일) 김정렬은 육본으로 가서 송요찬 참모총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때 총장 부관 金雲龍(김운용) 소령이 들어오더니 “미군 군사고문단장 하우즈 장군이 편지를 보내 왔다”고 했다. 송 장군이 읽어 보라고 했다. 김 소령이 즉석에서 번역하여 읽어 내려가는데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김정렬이 편지를 가져오라고 하여 원문을 읽었다. ‘8군 사령관의 명을 받들어’라고 附記(부기)되어 있는 편지였다. 여기에는 ‘대단한 변동을 겪고 있는 한국에서 미국 정부는 앞으로 송요찬 장군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이다’라고 적혀 있었다는 것이다. 김 장관은 송요찬을 쳐다보고 물었다.
 
 

 

 
 “송 장군, 어떻게 생각하시오.”
 
 “아이고, 萬古逆賊(만고역적)이 되게요.”
 
 김정렬은 회고록에서 ‘긴장된 송 장군의 얼굴에서는 내심 좋아하는 듯한 표정이 어쩔 수 없이 새어나오고 있었다’고 썼다. 김정렬은 ‘다시 예기치 않은 역사의 소용돌이가 내 앞으로 다가와 내 손을 잡아 끄는’ 기분을 느끼면서 매그루더 8군 사령관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 편지는 펜타곤의 의도요, 국무성의 의도요, 아니면 당신들이 여기서 멋대로 만든 것이오?”
 
 “그야 국무성의 의도지요.”
 
 “아니 미국은 文民優位(문민우위)의 원칙을 견지하고 있는 나라인데 어떻게 군인이 수반이 되는 정부를 지원하겠다고 하시오? 국무성의 지시라고 하지만 여기서 그런 보고를 올리니 그런 지시가 내려온 것 아닙니까.”
 
 매그루더 사령관이 매카나기 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주었다. 김정렬은 대사에게 곧 거기로 가겠다고 했다.
 
 軍-學 지방 정권
 
 4월27일 오전, 미국 대사관으로 간 김정렬 국방장관은 매카나기 미국 대사에게 따지고 들었다.
 
 “미국 정부가 민주주의를 표방한다면서 군인이 수반이 되는 정부를 지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아니, 지금 한국 상황에서 다른 代案(대안)이 있는 겁니까?”
 
 “지금 허정 씨를 외무장관으로 임명하여 과도 정부의 수반으로 사태를 해결하도록 다 되어 있는데 이것을 뒤엎고 송요찬 장군에게 정권을 잡으라는 투로 의사를 전달하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이오?”
 
 “하지만 나는 허정 씨를 모릅니다.”
 
 “당신이 허정 씨를 모르는 것이 미국 측이 이런 결정을 내리게 한 원인이오?”
 
 “그렇지는 않습니다. 미국은 민간 정부를 원하고 있지만 현 단계에서는 송요찬 장군을 수반으로 한 정부가 당분간 소요 사태를 진정시키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하였을 따름입니다.”
 
 “그렇게 하면 미국 역사상 汚點(오점)으로 남을 것이오. 이 정책을 수정할 여지는 있소?”
 
 “오늘 전보를 쳐서 다른 訓令(훈령)을 받기를 요청하면 가능할 것입니다.”

 

 

 
 김정렬 장관은 허정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소개를 하고는 미국 정부가 허정 과도 정부를 지지하는 성명을 내줄 것을 요망했다. 매카나기 대사는 “알았소. 그러면 본국에 다시 보고서를 올려 새로운 훈령을 받아 보기로 하겠소”라고 약속했다. 미국은 1952년 부산 정치 파동 때부터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면 한국군의 육군 참모총장을 내세워 질서를 유지하도록 한다는 비상 계획을 유지하고 있었다. 매카나기 대사와 매그루더 8군 사령관은 이런 비상 계획에 따라 송요찬 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과도 정부 수반으로 밀려다가 이승만의 합헌적 권력 이양으로 해서
 제동이 걸린 것으로 추정된다.
 
 박정희 군수기지사령관이 계엄사무소장으로 있던 부산에서는 이승만 하야 방송이 퍼진 26일 오후부터 축제 같은 일대 혼란에 휩싸였다. 시위대는 수많은 트럭과 버스들을 빼앗아 타고 시내를 질주했다. 시외로 나가다가 차가 뒤집혀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시민들은 큰 길로 몰려 나와 정권이 뒤집어지는 현장의 흥분을 체험하려 했다. 
 당시 중학교 2학년생이던 기자도 그 구경꾼들 사이에 있었다.
 
 부산진역 앞 동부산 경찰서는 모든 경찰관들이 달아나 버린 상태에서 시위대의 수중으로 넘어 갔다. 시위대는 경찰서에서 탈취한 서류를 길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뿌렸다. 대로를 허옇게 덮을 정도로 서류들이 흩어졌다. 끝도 없이 밀려오는 트럭 대열에는 시위대가 빼곡히 타고 있었다. 제지하는 군인은 보이지 않았다. 군인들도 경찰과 함께 철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군인도 경찰도 아무도 제지하지 않는 데모의 자유 속에서 시민들은 정권이 뒤집어지는
쾌감을 맛보고 있었다.
 

 


 일단의 시위대는 경남도청으로 몰려갔다. “신도성 지사를 잡아라!”하고 함성을 지르면서 도청을 포위한 시위대를 향해서 헌병들을 태운 트럭이 달려왔다. 박정희 소장은 병력을 도청 주변에 배치한 뒤 덮개를 걷은 지프로 올라갔다. 예복 차림이었다. 박정희는 확성기를 잡더니 침착하게 연설하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시민 여러분! 우리 군은 여러분을 해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이 앞에 보이는 군인들과 장갑차는 여러분의 피땀이 스며 있는 세금으로 지어진 이 도청과 귀중한 국가 재산을 지키려고 온 것입니다. 여러분 냉정해 주십시오. 우리가 싫어하던 이승만 부패 정권은 물러갔습니다. 우리 다 같이 만세를 부릅시다.”
 
 박 소장은 시위대와 함께 만세 3창을 했다. 만세를 부르고 난 시위대는 그만 돌 던질 마음이 사라져버려 자진 해산하고 말았다. 박정희는 이날 오후 경고문을 발표했다.
 
 <야간 통행금지 시간을 저녁 7시부터 다음날 5시까지로 연장한다. 군 및 보도용 차량을 제외한 모든 차량의 통행을 무조건 금지한다. 폭행 방화범은 계엄법에 의거하여 처단한다. 시위 중 입수한 무기나 흉기는 즉시 당국에 신고하라. 유언비어를 유포하지 말라. 파괴와 약탈, 방화를 일삼는 불량배와 깡패들은 백만 시민 스스로가 철저히 단속해 주기 바란다. 시민은 주권을 찾았으니 흥분된 마음을 질서 회복에 돌려주기 바란다>
 
 박정희 소장은 시내 전 경찰서가 경찰관들의 피신으로 마비 상태에 빠지자 임시 경찰을 편성했다. 소령급 장교들을 경찰서장으로, 소위와 중위를 파출소장으로 임명했다. 부산대학교 등 5개 대학교 학생 대표들을 불러 각 대학별로 6개 경찰서를 맡아 학생들이 치안을 유지해 주도록 했다.
 
 부산대학 총학생회장 李東龍(이동룡)은 박정희 사령관을 보는 순간 ‘대추방망이’를 연상했다. 박정희는 학생회 간부들에게 다과회를 마련해주면서 질서 유지를 위해 군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박정희는 이동룡을 문화방송으로 보내 ‘내일 아침 9시까지 대학생들은 부산 시청 앞에 집합하라. 질서 유지에 우리가 나서자’는
방송을 하도록 했다.
 

 

  
 이렇게 하여 부산에서는 일시적으로 군인과 학생이 합동하여 일종의 지방 정권을 만든 셈이 되었다. 부산대학교는 중부산 경찰서와 동래 경찰서, 수산대학은 동부산 경찰서, 연세대학은 영도 경찰서, 부산사대는 부산진 경찰서, 동아대학은 서부산 경찰서를 맡았다. <국제신보> 27일자 사회면 기사들.
 
 <분노의 군중이 휩쓸고 지나간 경찰서 안에는 정복 경찰관은 한 사람도 찾을 길이 없다. 주인은 없어지고 소총으로 무장한 군인들만으로 꽉 차있다. 경찰관들은 사복으로 나타나서 인근 다방에 앉아 기가 막히다는 듯이 커피만을 마실 뿐… 파괴된 파출소에선 사환 아이만이 폐허를 지키고 있었다>
 
 이런 아수라장 속에서도 박정희 사령관은 군을 직접 투입하지 않았다. 부산일보 김종신 기자가 그를 찾아가서 계엄군의 이런 자세를 비판했다.
 
 그러자 박 소장이 퉁명스레 말했다.
 
 “군대가 왜 그런 데 나가노.”
 
 “군대가 국민의 재산을 지켜 주어야 할 것 아닙니까.”
 
 “지금 내보내면 군대와 민간인 사이에서 불상사만 난다고.”
 
 부산일보 사장이자 유명한 기업인인 김지태의 집도 시위대로부터 위협을 받았다.
김종신은 박정희를 찾아가 헌병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안 돼. 그런 사람은 혼 좀 나봐야 돼.”
 
 할 수 없이 김종신은 개인적으로 친한 헌병대장에게 부탁하여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타이케 (Hermann Teike) - 옛 친구 (Alte Kamera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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