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엔 '다빈치 코드' 뺨치는 비밀 10가지가...
<사진출처 : http://blog.daum.net/leejhmy/15967744>
조선왕릉은 중국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식과 구조를 띠고 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계기로 조선왕릉만이 간직하고 있는 비밀 10가지를 동아일보가 29일 보도했다.
1.조선왕릉은 왜 서울 경기에 몰려 있을까?
강원 영월로 유배돼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단종의 장릉(영월군)을 제외한 조선왕릉 39기는 서울 경기 일대에 모여 있다. 왕릉을 한양의 궁궐에서 10리(4km)∼100리(40km) 떨어진 곳에 조성했기 때문이라고 이 신문은 보도했다. 왕이 왕릉에서 제례를 올리기 위한 행차를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도록 거리를 고려한 결과이기도 하다.
2.어느 쪽 봉분이 왕이고 어느 쪽이 왕비일까?
태종과 비 원경왕후가 나란히 묻힌 헌릉(서울 서초구 내곡동)의 태종 능 위치는 봉분 뒤에서 봤을 때 오른쪽이다. 동아일보에 따르면 조선왕릉은 우상좌하(右上左下) 원칙으로 왕이 오른쪽에 묻혔다.
덕종의 경릉(경기 고양시)만은 덕종이 왼쪽에, 비인 소혜왕후가 오른쪽에 묻혔다. 덕종은 왕세자로 죽었고 소혜왕후는 아들 성종이 즉위해 왕대비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3.조선왕릉은 왜 거의 도굴이 안 됐을까?
이 신문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훼손된 성종의 선릉, 중종의 정릉(서울 강남구 삼성동)을 빼고 도굴된 적이 없다. 세종의 영릉(경기 여주군) 석실 부재들의 이음매는 대형 철제 고리로 고정했고 입구에 ‘이중 돌 빗장’을 채웠다. 석실 사방은 석회 모래 자갈 반죽을 두껍게 채웠다. 부장품을 의궤에 상세히 남겼는데 부장품으로 모조품을 넣은 것도 도굴을 막은 한 요인이다.
4.왕과 왕비가 항상 함께 묻히지 못한 까닭은?
왕릉은 당대 정치권력의 향방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조성됐다고 동아일보는 보도했다. 중종의 두 번째 계비로 명종을 수렴청정한 ‘여걸’ 문정왕후는 중종 옆에 묻히고 싶어 중종의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의 희릉(고양시) 옆에 있던 중종의 정릉을 삼성동으로 옮겼다. 하지만 문정왕후 사후 정릉에 물이 찬다는 이유로 결국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외로이 묻혔다. 태릉이다.
5.봉분 앞 혼유석의 정체는?
이 신문에 따르면 봉분 앞 돌상인 혼유석(魂遊石)은 영혼이 노니는 돌이라는 뜻. 북을 닮은 고석(鼓石) 4개가 혼유석을 받치고 있다. 이 큰 돌은 제사 지내는 상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혼유석 밑에 석실로 연결되는 통로가 숨어 있다 혼유석은 ‘지하의 밀실’을 봉인한 문인 셈. 실제로 고석에 새겨진 귀면(鬼面)은 문고리를 물었다.
6.최장신 문·무석인은 어디에 있을까?
문석인(문관)과 무석인(무관)은 대체로 사람 키를 훌쩍 넘어 권위를 뽐낸다. 가장 큰 문·무석인은 철종의 예릉(고양시), 장경왕후의 희릉에 있다. 3m 이상이다. 중종 시대(16세기)는 석물의 장엄미가 최고조였던 때다. 철종은 19세기의 왕이 아닌가. 전문가들은 흥선대원군이 왕권 강화를 꿈꾸며 예릉을 위엄 있게 꾸몄다고 말한다.
7.정자각의 계단은 왜 측면에 있을까?
참배자가 동쪽(오른쪽)으로 들어가 서쪽(왼쪽)으로 나오도록 설계됐기 때문이라고 동아일보는 보도했다. 해가 동쪽(시작과 탄생)에서 서쪽(끝과 죽음)으로 지는 자연 섭리를 인공 건축물에 활용한 것. 동쪽 계단은 2개, 서쪽 계단은 1개다. 올라갈 때는 참배자가 왕의 영혼과 함께 하지만 내려올 때는 참배자만 내려온다는 것. 왕의 영혼은 정자각 뒤 문을 통해 봉분으로 간다고 생각했다.
8.봉분 뒤에는 왜 소나무가 많을까?
이 신문에 따르면 왕릉에 우거진 숲을 계획적으로 조성했다. 봉분 뒤 소나무는 나무 중의 나무로 제왕을 뜻했다. 봉분 주변에 심은 떡갈나무는 산불을 막는 역할을 했다. 지대가 낮은 홍살문(왕릉 입구) 주변에는 습지에 강한 오리나무를 심었다. 태조의 건원릉(경기 구리시) 봉분에는 억새풀을 심었는데 고향인 함흥을 그리워한 태조를 위해 태종이 함흥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9.고종의 홍릉과 순종의 유릉은 황제릉?
고종은 1897년 조선이 중국과 대등한 나라(대한제국)라고 선포했다. 경기 남양주시 홍릉과 유릉은 황제릉으로 조성됐다. 홍·유릉은 정자각(평면이 ‘丁’자 모양) 대신 중국의 황제릉처럼 ‘一’자 모양의 침전(寢殿)을 세웠다. 능의 석물도 코끼리, 낙타 같은 낯선 동물을 배치했다. 왕릉의 석물이 왕을 호위하는 상징인 반면 홍·유릉의 석물은 황제의 위용을 드러낸다고 동아일보는 보도했다.
10.서삼릉에는 왕족의 공동묘지가 있다?
세 왕릉이 있는 서삼릉(고양시)에는 왕자, 공주, 후궁의 작은 묘 46기가 모여 있어 공동묘지를 연상시킨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뒤 도시화 과정에서 자리를 잃은 묘와 원(왕세자와 왕세자비의 무덤)들이 서삼릉으로 쫓겨 왔다. ‘공동묘지’ 옆에는 왕족의 탯줄을 보관하는 태실 54기도 있다. 원래 태실은 전국의 명소에 묻었는데 일제가 서삼릉으로 몰아넣었다고 동아일보는 보도했다.
*********************************************<조선일보 2009.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