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노래 - 김노현 시, 김노현 곡 - Ten 박인수
아지랑이 하늘거리고 진달래가 반기는 언덕 깨어진 꿈 추억을 안고 오늘 나는 찾았네
내 사랑아 그리운 너 종달새에 노래 싣고서 그대여 황혼의 노래 나는 너를 잊지 못 하리 마음 깊이 새겨진 사랑이 아롱지네 맑은 시내 봄 꿈을 안고 어린 싹은 눈을 비빌 때 그 옛날에 아른한 모습 내 맘에 새겨진다
내 사랑아 그리운 너 종달새에 노래 싣고서 그대여 황혼의 노래 나는 너를 잊지 못 하리 마음 깊이 새겨진 사랑이 아롱지네 맑은 시내 봄 꿈을 안고 어린 싹은 눈을 비빌 때 그 옛날에 아른한 모습 내 맘에 새겨진다
실향민인 김노현은 1920년 9월 20일 김재조(치과의사)와 어머니 조재만의 3남 2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숭실전문학교와 경성치전(현 서울대 치대)을 졸업했고
집안은 부유했다.
그는 숭실중학 시절부터 노래를 잘 불러서 음악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성악가가 되기 위해 성악가 박원정, 숭실전문 교수인
루스 부인(선교사), 그리고 이화전문 교수인 일본인
성악가에게 지도를 받았다.
숭실중학을 졸업한 후 음악을 계속하고 싶어서 일본 무사시노음악학교에
입학원서를 제출했다가 아버지의 반대로 철회하고 서울로 올라와
부친의 모교인 경성치전에 입학했다.
1940년대의 초반은 그에게 파란만장한 고난기였다. 1942년 10월 학생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됐다.
그는 학교에서 학생회 총회장, 기독학생회장, 음악부장을 역임해
자연히 일제에 대항하는 학생운동의 선봉에 섰고, 왜경의 감시 대상이었다. 왜경에 잡혀가 무수한 고문을 당하고 1년간 징역을 살았다.
만기 출옥할 때는 일본인들이 그를 죽이기 위해 그의 밥에 콜레라균을 투입해 그 밥을 먹고 출감한 날로부터 두달 동안 사경을 헤메기도 했다. 약도 발달하지 못했던 때라 치료가 용이하지 않았다.
도저히 살아날 수 없던 절망상태에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만약 살려주시면 일생동안 음악으로 주님께 보답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일주일간을 사선을 넘나들며 간절히 기도한 끝에
기적적으로 소생했다.
그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교회음악 활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노래를 부르는 성악가가 되고 싶었으나 부친의 반대로 대학을
졸업한 후 치과병원을 개업했지만 노래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성악활동에만 적극적으로 메달렸다.
그가 운영하던 인성치과의 의사는 그 자신뿐이었지만 음악에 관한 일이라면 서슴지 않고 병원을 비웠다. 하고픈 일을 하면서 후회없이 산다는 신념이다.
1987년 9월 25일 그는 류관순기념관에서 김노현 가곡의 밤을 가져 '두고온 고향' 등 21곡을 발표했다.
그는 한국성악회 회장, 한국벨칸토회 회장, 작곡가회 회장을 역임했다. 1993년 4월 25일 별세한 그의 유족으로는 출가한 외딸 혜정씨와 부인김성식 여사가 있다.
이향숙 저 가곡의 고향, [한국문원]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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