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애송詩 모음

2008년은 한국 현대시 100주년의 해

淸山에 2010. 10. 7.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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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ㄹ썩, 처…ㄹ썩, 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출처=동아일보 12.31>



《1908년 11월 열여덟 살 청년 최남선이 잡지 ‘소년’의 권두에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했다. 정형시의 틀을 무너뜨린, 한국 현대시의 들목이 된 작품이었다. 이를 기점으로 하면 2008년은 한국 현대시 100년의 해다.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 산업화 시대와 민주화 시대 등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고스란히 담아내 온 현대시 100년사를 정리한다.》

1910, 20년대- 김소월 한용운 정지용 ‘서정시 트로이카’

1930, 40년대- 이상 실험정신, 백석 서정주 지평 확대

1950, 60년대- 김수영 참여시, 김춘수 무의미시 눈길

1970년대 이후- 저항시대 거쳐 대중문화적 상상력 만발

○ 현대시의 불을 지핀 1910, 20년대

식민지에 살고 있다는 자의식과 새로운 것에 대한 동경이 함께했던 시대에, 재능 있는 시인들이 현대시사의 초석이 되었다. 최초의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를 낸 김억, ‘불놀이’의 주요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이상화, 최초의 서사시 ‘국경의 밤’의 시인 김동환…. 특히 도드라진 시인은 김소월과 한용운, 정지용이다. 1925년 나온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그를 ‘국민시인’으로 만든 시집이다. ‘진달래꽃’뿐 아니라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산유화’ ‘엄마야 누나야’ 등 전통적인 가락 속에 서정적인 정서를 전달하는 명작들이 오랜 시간 애송시가 되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그 작품이 쓰인 시대(1926년 발표)가 얼마나 가팔랐는지를 확인시켜 준다. 절절한 연시 아래에 역사성과 종교성을 스며 넣은 작품들은 시인의 굳은 심지와 예술성을 한눈에 보여 준다. 우리말을 아름답게 벼리는 시인의 임무를 탁월하게 맡아 낸 시인이 이 시기 중점적으로 활약한 정지용이다. 탁월한 언어감각으로 빛나는 ‘향수’ ‘유리창1’ 등도 많은 사랑을 받아 온 시다.

○ 아름답고 침울한 1930, 40년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을 중심으로 전개됐던 프로문학이 쇠잔해지는 것으로 1930년대가 시작됐다. 문화적·문학적으로 다양한 실험이 전개된, 한 사람의 시작()이 하나의 경향이 됐던 시기였다. 많은 스타 시인이 나온 시기이기도 했다.

1930년대 모더니즘 바람을 일으킨 이상과 김기림. 해독이 어려운, 그럼에도 폭발적인 마니아를 만들어 낸 ‘오감도’의 시인 이상은 그림과 건축 분야도 수월하게 넘나들었던 천재였다. ‘바다와 나비’ 같은 시뿐 아니라 앞선 시대와는 전혀 다른 시의 경향을 창작과 이론으로 함께 알린 시인이자 평론가 김기림도 돋보였다.

월북 문인 해금 조치로 뒤늦게 빛을 본 백석의 존재는 귀하다. 평북 방언을 시적으로 부리면서 내면의 감정을 세련되게 묘사한 시편들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등으로 시사가 풍요로워졌다. 노천명 모윤숙이 등장해 광복 이후 김남조로 이어지는 여성 시인의 계보를 만들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1941년 서정주가 낸 시집 ‘화사집’은 충격이었다. 원죄의식과, 그럼에도 싱싱한 생명력을 관능적인 모국어로 묘파한 ‘화사집’에 이어 서정주는 ‘귀촉도’ ‘신라초’ ‘동천’ ‘질마재 신화’ 등 60여 년 생애에 펴낸 시집 한 권 한 권마다 다양한 시세계를 선보였다. 서정주와 더불어 생명파로 분류되는 유치환도 ‘깃발’ ‘생명의 서’ 등을 통해 허무의식 속에서도 도도한 시심을 노래했다.

끝이 가까워 오는 일제 강점기의 압제를 시인들은 순결한 시 쓰기로 견뎌 냈다. 자연에 대한 청아한 정서를 노래함으로써 시의 본령을 지키고자 한 청록파의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진실한 인간과 시인의 길을 탐색했던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그랬다.

○ 혼돈의 시대, 6·25전쟁과 1960년대

좌우 이념으로 대립된 해방공간의 혼란과 6·25전쟁으로 인한 분단의 비극, 뒤이어 민주화와 근대화 과정에서 일어난 4·19혁명과 5·16군사정변. 시는 그 혼돈의 역사에서 솟아났다. 이 시기가 온전히 시력()이 된 시인이 김수영이다. 해방공간에서 모더니즘 정신으로 충만한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냈으며, 4·19 이후 ‘풀’ ‘푸른 하늘을’ 등의 작품에서 날카로운 현실 참여의식을 보인다. 김수영과 더불어 한국 현대시의 주춧돌을 놓은 시인으로 김춘수가 꼽힌다. ‘꽃’ ‘꽃을 위한 서시’ 등 이른바 ‘무의미 시’를 통해 인간 내면의 순수한 표정을 발견한 공이 크다. 1960년대를 가장 치열하게 살아 낸 시인 중 한 사람인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금강’ 등에서 그 치열한 사회참여 정신이 형형하게 드러난다.

순수와 무욕을 시뿐 아니라 삶 전체로 증거한 천상병의 ‘귀천’, 절제된 언어로 모더니즘 정신을 구현한 김종삼의 ‘북치는 소년’, ‘한의 미학’이 미학적인 시어로 표현된 박재삼의 ‘울음이 타는 가을강’…. 혼란의 시대에 우리 시의 성과는 컸다.

○ 쉼 없는 열정, 1970년대 이후

1970, 80년대 시는 억압적인 군부 정권에 맞서 온몸으로 저항했다. 1970년 발표한 담시 ‘오적’으로 김지하가 구속됐다. 신경림의 ‘농무’, 고은의 ‘백두산’도 가파른 시대에 맞서 쓴 작품이었다. 서정성을 다양한 형식으로 감각적으로 표출해 낸 황동규 정현종, 여성 시인의 맥을 이으면서 ‘허무’를 시적 주제로 승화시킨 강은교 등의 시작()이 의미 있는 문학적 성과를 이루었다.

1980년대 황지우의 실험적인 ‘해체시’, 이성복의 낯설고 독특한 이미지의 시편들이 주목받았다. 다른 한편에 창작자의 노동 체험을 새로운 소재와 주제로 자리 매김시킨 박노해의 시편들이 있었다. 죽음의 관념이 짙게 드리워진 기형도의 시는 시인의 짧은 생애와 달리 오래도록 사랑받는다. 이전까지 시에서 온전하게 발화하지 못했던 여성성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고정희 김혜순 최승자의 작품은 이후 여성시의 중요한 흐름의 하나가 되었다.

1990년대 들어 장석남은 눈으로 보이는 장면이 아니라 마음의 풍경을 서정적으로 묘사하는 ‘신()서정’의 세계를 보여 준다. 대중문화적 상상력과 어법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유하와 장정일의 시가 다른 한편에 서 있다. 그리고 2000년대에 이르러 시인들의 세대는 어느 때보다 폭넓다. 그만큼 다양한 시편으로 우리 시단은 풍요롭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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