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1992년>
참혹은 '당신'으로 상징되는 모든 것들이 불러일으키는 총체적 참혹이다. 사랑을 떠나 보낸 실연의 참혹, 아버지를 여읜 망부의 참혹, 신념을 잃은 한 시대의 참혹.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고 무를 수도 없는, 죄다 마음에 묻어야 하는 당신들이다. 그런 당신을 웃으면서 울면서 혹은 취해서 부르는 이 시의 언어는 언어 이전이거나 언어 이후다. 단속적인 말줄임표와 쉼표, 어쩔 수 없이 새어 나오는 '킥킥'이라는 의성어에는, 참혹인 줄 알면서도 참혹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자의 내면풍경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나와 당신, 사랑의 마음과 마음의 무덤, 환후와 치병이 '각각 따로'이기에, 당신과 함께했던 세월과 사랑과 상처와 그 상처의 몸이 모두 적요이고 울음이다. 그런 울음을 짊어지고 가는 시인, 세간의 혼몽을 잘 먹고 잘 노래하는 시인이야말로 자신의 불우함을 다해 노래하는 시인의 지복(至福)일 터, 이 시는 그 지복의 한 자락을 걸쳐 입고 있다. 허수경 시인은 울음 같은, 비명 같은, 취생몽사 같은 시집 '혼자 가는 먼 집'을 낸 직후 독일로 휘리릭 날아가버렸다. 1990년대 초반이었고, 시인의 생부가 돌아가시고 난 직후였다. 동안(童顔)에, 대책 없는 맨몸이었다. 고고학을 공부한다 했다. 잘살고 있다고 했다. 독일로 날아간 지 벌써 16년째다. 당신… 당신이라는 말은 언제 불러도 참 좋다, 그리고 참 참혹하다, 킥킥 당신…. 입력 : 2008.02.11 0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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