統計廳調査, 慶州 金海 密陽 晋州 全州順으로 많아
◆명문가 종친회를 찾아갑니다. 유서깊은 성씨의 종친회를 찾아 종친회장 인터뷰를 비롯하여 본관 시조와 유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재음미 하고
그 성립과 발전, 인물배출 등에 대해 살펴봅니다.
명문거족의 본향은 제각각 명망성에 걸맞는 고유의 전통과 가풍이 있습니다. 명문과 종친회에 대한 이번 기획 시리즈에 많이 참여바람니다.
200년 통계청 인구주택 총조사 내용을 분석한 결과 인구의 압도적 다수의 본관이 경상도인 경주, 김해, 밀양, 진주, 안동, 등이고 뒤를 이어 전주,
광산, 나주등 전라도 쪽에 본관을 두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주[김·이·최]와 김해(김), 밀양(박), 진주(강)등은 상위 10대 大姓氏의
고향으로 그 인구수만 해도 1300만명에 이룬다.
그외 상위권 성씨의 본관들도 경상도 쪽에 많다.
오릉의 전경

박씨시조 박혁거세와 알영부인,2대,3대,5대 왕등5인의 무덤
◆ 인구수 상위 12대 성씨 본관
|
구 분 |
가 구 수 |
인 구 수 (명) |
1 |
金海金氏 |
1,295,080 |
4,124,934 |
2 |
密陽朴氏 |
946,307 |
3,031,478 |
3 |
全州李氏 |
808,511 |
2,609,890 |
4 |
慶州金氏 |
542,018 |
1,736,798 |
5 |
慶州李氏 |
446,598 |
1,424,866 |
6 |
慶州崔氏 |
304,702 |
976,820 |
7 |
晋州姜氏 |
300,724 |
966,710 |
8 |
光山金氏 |
258,936 |
837,008 |
9 |
坡平尹氏 |
221,477 |
713,947 |
10 |
淸州韓氏 |
199,642 |
642,992 |
11 |
安東權氏 |
196,566 |
629,291 |
12 |
仁同張氏 |
184,863 |
591,315 |
전라도 쪽이 본관이 인구수도 전주(이) 광산(김)등 수백만명에 이른다.
그런데 전라도 쪽 본관인 이들 대성씨도 그 시조는 신라계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전주이씨 시조 이 한(李 翰)은 신라 문성왕 때
사공(司空)벼슬을 지냈다" 고 하며, 조선의 태조(이성계)는 그 22세손이다.
또 광산김씨의 경우 대종회 홈폐이지에 따르면 "신라 제45대 심무왕의
제삼왕자 흥광공이 광산(光山)으로 이적" 하여 시조가 됐다고한다.
신라계가 아닌 10위 권에 드는 성본은 9위 파평윤씨와 10위 청주한씨뿐이다. 파평윤씨는 고려태조의 개국공신 윤신달을 시조로 하고 있고, 청주한씨는 기자조선에서 발원하고 있다. 고조선 사회가 실상 한씨조선이며, 그 명맥이 청주한씨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
한편 "2000년 인구주택 총조사"에서 성씨 및 본관을 집계한결과, 외국에서 귀화한 인구를 제외한 한국인의 성은 모두 286개이고 이중 본관(本貫)
은 4179개인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본관 중에서 이들 대성씨를 비롯하여
인구수가 중상위권인 본관들도 경상도와 전라도 쪽이 압도적으로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이 본관들이 성세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이수건씨가 쓴 "한국의 성씨와 족보"에 나타난 조선중기(1509∼1720년) 문과급제자 성관의 도별 통계"를 보면 오늘날의 성본과 큰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문과 급제자를 1명이라도 배출한 경상도 쪽 본관이 총169개 이고
이중 20명 이상을 배출한 본관도 30개에 이른다. 전라도 쪽도 총125개
본관에서 문과 급제자를 냈으며 20명이상 급제자를 낸 본관이 14곳이나된다.
다음으로 충청도,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 순으로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다. 이수건씨는 위 책에서 경상도 쪽 본관과 전라도 쪽 본관이 번성한 이유로 도성과 멀리 떨어진 지리적 이점을 지적했다.
명문이 될 만한 호족은 고려태조 왕건과의 연결과정에서 개국관료와 삼한
공신이 되면서 각기 성관을 부정, 또는 하사받고 상경 종사하거나 재경관이 되기도 했는데, 이들이 정치적 소용들이에 휘말려 사라지거나 옛 본관을 지속하거나 낙향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 이라는 것.
또 평안도와 함경도 쪽의 본관이 드문 것은 이지역이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국경 부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본관별 지역 연고성은 어떨까. 조선조 이래 명문 거족의 후손들
이 전국 각지로 퍼져나갔기 때문에 大姓氏의 경우 본관에 따른 지역의식은 약해지고 있다. 상위 10위권 대성씨의 경우 전국적으로 고루 분포하고 있으며, 인구20만 여명으로 중상위권인 성주이씨의 경우도 남원, 고흥,파주 등 전국적으로 후손이 분포하고 있다.
'安東權氏 성화보' 체계 갖춘 첫 族譜
'문화유씨 가정보' 17세기 후반부터 명문가 족보의 표본
'고려사' 등 옛 문헌에 가첩 형식으로 집안 내력을 기록한 것이 있었으나
족보 체계를 갖춘 것은 성종7년(1476년)에 만들어진 "안동권씨 성화보"
(安東權氏 成化譜)가 첫 족보다. 이후 조선명종 20년(1565년)에
'문화유씨' 가정보 (文化柳氏 嘉靖譜)가 혈족 전부를 망라하여 간행되고,
17세기 후반부터는 이것이 명문가 족보의 표본이 됐다.
안동권씨와 문화유씨 등 초기 족보는 남자와 여자, 친손 · 외손의 구분이
없이 평등하게 기록됐으나, 17세기 후반 유교문화가 심화되면서 족보상에
큰 변화가 생겨남다. 17세기 이후 병자호란과 임진왜란 등을 거치면서
민중이 성장하고 천민층의 양민화와 신분질서의 해이현상이 나타난것.
그리고 이때 가족제도가 변화하게 됨에 따라 호적이나 족보위조 등도
생겨났으며, 족보의 내용도 크게 달라졌다. 이때부터 전대의 족보와는 다른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부계친손, 상내약외, 선남후녀로 보다
엄격한 가부장제와 남존여비적인 이데올로기가 반영되었다.
이를 근거로 남녀평등주의가 조선시대 후기에 와서 '변질' 됐다고 주장
하는 경우도 있다.
18세기 후반에 나오는 족보들은 위작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신분상승과 양민화가 대거 이루어지는 시점이라 사료적 가치가 떨어질 정도로 위작, 과장이 많다. 특칭이라면 시조가 신라 내지 고려조 왕실부마,
공신, 고관요직 역임, 명문출신, 고려조 때 '불사이군' 원칙에 따라 공직에
나가지 않은 명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는 것이다.
19세기 이후 현재까지도 족보가 꾸준히 발간되고 있으며, 국립 도서간의
계보확 자료실에는 무려 1만3000여권(600여종)의 족보가 소장돼 있다.
한편 족보의 종류는 대동보(大同譜:같은 시조의 씨족), 족보(族譜: 본관단위), 세보(世譜: 한종파), 파보(派譜:시조부터 종파의 이름과 벼슬 업적),
가승보(家乘譜: 본인부터 시조 윗대와 업적)등이 있다.
◆조선중기 20명 이상 문과 급제를 배출한 본관
경기 |
파평윤, 남양홍, 여흥민, 광주이, 양천허, 풍양조, 덕수이, 여주이,한양조, 양주조,용인이,
광주안. |
충청 |
청주한, 전의이, 한산이, 청풍김, 은진송, 죽산안, 죽산박, 진천송. |
경상 |
안동권, 안동김, 밀양박, 진주강, 청송심, 동래정. 경주김, 경주이, 진주유, 창녕조, 의령남,
창녕성, 영일정, 성중디, 순흥안, 의성김,풍산홍, 창원황, 기계유, 함양박, 고령신, 김해김,초계정, 해평윤, 서산김, 고령박, 상주김, 현풍곽, 고성이, 영천이. |
전라 |
전주이, 광주김, 완산이, 반남박, 전주유, 전주최, 남원유, 여산송,함평이, 장수황, 능성구, 광주정, 남원양, 압해정. |
황해 |
연안이, 연안김, 문화유, 평산신, 풍천임, 해주오, 해주최. |
강원 |
강릉김, 원주원. |
신라말∼고려초기 한식성본 일반화
고대사 연구가인 김성호씨는 '씨성으로 본 한일민족의 기원'에서 "단군은 할아버지 환인(桓因)과 아버지 환웅(桓雄)으로 이어지는 환씨였으며,
중국 문헌은 이 환씨가 韓氏로 성을 바꾸었다고한다"고 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네이버' 백과사전은 이와 맥을 같이하여 고조선 사회가 실은 한씨조선이며 청주한씨가 그후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환(馬韓 弁韓辰韓)과 대한민국의 국호로 봐도 한씨를 한국최초의 성씨로 볼 근거가 된다.
하지만 우리가 쓰고 있는 성씨와 본관 개념은 민족의 토착적 개념은 아니다. 성씨와 족보 연구가인 이수건씨는 "신라말에서 고려 초기에 韓式성분이 일반화 됐다" 고 한다.
그 근거로 신라 진흥왕 순수비와 진지왕 남산신성비 등을 곱는다. 즉 7세기 이전 금석문에 중국식 인명을 쓴 기록이 없다는것. 중국식 성씨가 정착한 것은 고려태조 왕건의 통치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토성분정'을 하면서 부터라고 한다.
한민족의 뿌리는 여러 갈래성씨 · 본관 토착 개념 아니다
이수건씨는 저서에서 중국에 보내는 처음 나타난 우리민족의 성씨는 근초고왕(346-374) 여씨이고 고구려 장수왕(413-491) 때 고씨와 신라 진평왕 때의 김씨 등이다.
구당서(舊唐書)에 진평왕을 김진평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곧 676년에 삼국통일이 완료되면서 승자인 신라중심의 역사가 되고, 성씨의 시조 설화도 거기에 탄생하여 발전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박혁거세, 김알지, 석탈해 등 신라 3성씨와 신라 이전의 6부를 구성하고
있던 李,崔,鄭,孫,裵,薛 등 성씨, 그리고 김해김씨 시조 김수로왕 설화 등
우리나라 대성씨가 거의 신라 쪽에서 나와 확대재생산 되는 것도 그래서다.
백제와 고구려가 역사에서 사라진 뒤에 성씨 개념이 수입됐기 때문에 백제나 고구려계 성씨는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성씨 시조설화도 전해지는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김 창 제 역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