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인민군 아내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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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노획품 상자에서 발견한 인민군 아내의 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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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RA |
사랑하는 당신에게
흘러가는 세월은 어느덧 흘러서 당신이 떠나간 지도 벌써 8개월 경과하였습니다. 지난 8월에 소식 알고 아직까지 소식 몰라 답답하기 짝이 없는 저는 1월 22일 이른 저녁에 편지를 받아본 저의 마음은 매우 만족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양 부모님도 안령하시고 가족들도 다 잘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4월 15일 몸을 풀었습니다. 그리하여 기섭(아들)이 누이동생을 탄생하였으며 장난꾸러기 기섭이도 잘 놀고 있습니다.
금년도 농사는 잘 하지 못하였으며 생활이 곤란하여 문암리 농촌에 가서 아버님과 함께 생활하려고 1월이나 2월에 가게 되었음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당신은 몸 건강하여 미 제국주의자들과 힘껏 싸워달라는 것을 부탁하면서, 저는 후방에서 승리의 그날까지 국가사업에 로력하면서 당신이 돌아올 날을 기다리며….
이상 순서 없는 말로 몇 자 편지를 올림. 금강리 1반 김두칠 기록함. 1952년 1월 23일.
나는 2007년 2월 26일부터 3월 12일까지 미국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에 있는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에서 제3차 한국전쟁 기록물 리서치(탐사) 작업을 하였다. 이 편지는 NARA에서 마지막 검색날인 3월 9일 오후 2층 검색실에서 북한노획물 상자를 뒤지던 가운데 RG242 Box146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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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해남부전구 빨치산사령부 발행 '원호증'으로 민폐를 끼친 민간인에게 해방 후에 갚는다는 증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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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RA |
숱한 북한 노획문서 가운데 유독 이 편지를 떠듬떠듬 읽는 순간 나는 이데올로기를 초월하여 한 지어미가 지아비를 그리는 순결한 진정성에 가슴 뭉클하였다. 이 글은 전선으로 간 남편에게 보낸 한 인민군 아내의 편지로, 마을에서 글을 아는 이가 대필한 듯하였다.
이 편지의 주인공들이 휴전 뒤 다시 만났는지 그 뒷이야기가 궁금하였다.
이밖에도 북조선로동당 당원증명서, 빨치산들이 민폐를 끼치고 주민들에게 준 동해남부전구 빨치산 사령관 발행의 원호증, 경상남도 진주시 인민위원회가 거리에다 붙인 식량과 피복 원조를 부탁한 벽보, 조선인민유격대 전라남도 곡성군 유격대 대장 김훈 이름으로 만든 선전 삐라 등 처절했던 당시의 시대상을 짐작케 하는 문서들이 쏟아졌다.
또 인민군이나 중공군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가족이나 전우들의 사진, 그리고 공산군 측이 노획한 미군들의 소지품 가운데서 나온 가족사진과 다시 미군이 노획한 사진도 있었는데, 사진 속 주인공들의 이후 삶이 못내 궁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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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해군 전투기가 신의주 상공에서 압록강 철교 중 남쪽 부분을 폭파하고 있다(1950.1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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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R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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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도 패자도 없는 '끝나지 않은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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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당시 북한측 선전벽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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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RA |
1950년 6월 25일 평화롭던 일요일 새벽, 먼동과 함께 북위 38선 일직선에서 울려 퍼진 포성과 탱크 캐터필러 소리로 시작한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원한의 휴전선에서 포성이 멎으며 끝났다.
3년 남짓 동안 지루하게 계속된 한국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끝나지 않은 전쟁' '잠시 쉬는 전쟁'으로 일단 그 막을 내렸다.
이 전쟁으로 피아 150만 명의 전사자와 360만 명의 부상자를 낳았고, 1000만 명 이상의 이산가족으로 전란의 생채기를 앓았다.
그리고 반세기가 훌쩍 지나갔다. 그때 길거리를 헤매던 전쟁고아들은 그새 노인이 되고, 혹독한 전쟁을 겪은 기성세대들은 대부분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이제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은 전쟁을 체험한 일부 세대에게만 가물가물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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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중 다리를 잃은 특무상사가 목발을 짚고서 철조망 앞에 서 있다. 그의 다친 몸과 무거운 표정이 우리 민족의 수난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듯하다(195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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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R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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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04년 1월, 여러 네티즌의 도움으로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에 갔던 바, 5층 사진자료실에서 한국전쟁 사진을 보자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한국전쟁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하늘에서는 쌕쌕이(전투기)들이 굉음과 함께 폭탄을 염소 똥처럼 쏟았고, 산이나 강 들판너머에서는 총성과 포성, 그리고 탱크가 캐터필러를 굴러 돌진해 오는 소리들이 되살아났다.
순간 NARA 자료실의 사진들을 몽땅 한국으로 옮겨다 전후 세대에게 한국전쟁의 참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다행히 NARA 자료실에서 스캔이 가능해 동포의 스캐너를 빌려 한국전쟁 사진들을 부지런히 담았다. 이를 즉시 오마이뉴스에 <사진으로 보는 한국전쟁>이라는 연재로 주요 사진 모두를 공개한 다음, 사진전문 눈빛출판사에서 <지울 수 없는 이미지>라는 제목으로 한국전쟁 사진집을 펴냈다.
이 사진집이 나오자 매스컴에서 대서특필해 주고, 독자들의 성원도 커서 2005년 11월에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다시 NARA에서 제2차 한국전쟁 기록물 리서치 작업을 한 뒤 귀국하여 눈빛출판사에서 <지울 수 없는 이미지·2>와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 장면>을 펴냈다.
이 사진집 또한 독자들의 반응이 좋아 2007년 2월에 다시 제3차 한국전쟁 기록물 리서치 작업 길에 올라 500여 점의 사진과 문서를 입수하여 <지울 수 없는 이미지·3>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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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상륙작전 때 유엔군에게 백기를 들고 투항하는 인민군 병사들(1950. 9.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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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R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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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란의 상흔으로, 탱크도 사람도 망가진 채 어수선하게 널브러진 도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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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R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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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인가? 멧돼지인가? 총구 앞에서는 사람도 짐승이 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인민군 전사가 짐승처럼 기어오면서 투항하고 있다(1951. 9.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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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R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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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기록의 무서움을 깨닫다
나는 제1~3차 70여 일 검색기간 동안 내내 수백만 파일의 기록물이 보관된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자료실에서 마치 광맥을 찾는 탐사자로 연일 눈에 핏발을 세우며 한국전쟁 관련 문서 상자를 훑었다. 영어에 어둔한 내가 감히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곁에서 도와준 재미 동포 박유종 선생 덕분이었다.
그분은 조부 백암 박은식(상해 임시정부 대통령, 사학자)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은 까닭에 한국전쟁 역사자료 복원 일에 매우 열성적이었다. 심지어 생손앓이까지 하면서도 단 한 번도 시간 약속을 어기거나 일방으로 쉬신 적이 없었다. 솔직히 그 분이 아니었다면 나는 한국전쟁 자료를 한 점도 입수해 올 수 없었다.
서울에서 미국으로 출국 전, NARA에 북한에서 노획한 자료가 소장되었다는 정보를 가지고 갔지만, 문외한이 방대한 NARA 자료실에서 북한 측 자료를 입수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정말 운 좋게 20여 년 NARA를 드나들며 한국관련 문서 리서치 작업에 전력해 오신 재미 사학자 방선주 박사를 그곳에서 만나게 되었고, 그분 도움으로 북한 측 노획물 180 자료 상자를 검색할 수 있었다.
내가 방 박사였다면 당신이 수십 년간 노고 끝에 알게 된 검색방법을 아무 대가도 없이 쉬 가르쳐줄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아마도 그분은 역사의 진실을 찾아 후세에 남기려고 만리 타향을 찾아온 한 문사의 열정을 가상히 여겨 쉬 마음의 문을 열었으리라. 이 자리를 빌려 깊이 감사드린다.
북한 노획물(RG 242) 상자에서는 별 것이 다 나왔다. 각종 작전보고서, 지령문, 신문 잡지 등. 마치 빗자루로 쓸어 담은 것처럼 북한 문서들이 고스란히 NARA에 옮겨져 있었다. 특히 Box 23에서 나온 '남하(남파) 공작원 명단'을 보고서는 새삼 기록의 무서움을 깨달았다. 세포수첩의 암호문에서는 비밀 공산당 조직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었는데 내 실력으로는 암호들을 풀이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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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동당 간부들이 소지한 듯한 세포수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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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R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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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제3차 한국전쟁 기록물 리서치 작업에서 특이점은 앞선 제1차, 제2차 작업과는 달리 NARA에 소장된 북한 측 노획문서를 리서치한 점과 맥아더 장군의 고향 버지니아 남쪽 항구 노폭(Norfolk)까지 달려가서 맥아더 기념관의 자료도 수집해 온 점이다.
버지니아 남단 맥아더 기념관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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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버지나아 주 노폭에 있는 맥아더 기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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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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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6일, 재미 동포 이도영 박사의 길안내로 버지니아 남단의 '노폭'이라는 도시에 있는 맥아더 기념관을 찾았다. 그 도시는 맥아더의 고향으로 그곳 기념관에서 맥아더 장군의 전 생애, 특히 만년의 맥아더 모습을 고스란히 볼 수 있었다. 한국전쟁에서 유엔군 측의 대역전 전환점이 된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전선 시찰, 그리고 만주 북폭 주장으로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진다"면서 맥아더 장군이 물러나는 장면까지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었다.
중앙청 메인홀 9·28 서울 수복 기념식장에서 맥아더 장군의 손을 잡고 대한민국을 지켜준 데 대한 감사를 표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눈에는 눈물이 서린 듯 보이는 사진도 있었다.
이 맥아더 기념관에 소장된 한국전쟁 관련 사진들은 모두가 대한민국 역사의 귀중한 한 장면들이라 시간이 허용한 대로 최대한 복사해 왔다. 또, 이 기념관에 소장된 한국관련 앨범에 수록된 사진들 중 한국전쟁 이전의 좌익사범 처형 장면은 호기심 많은 나그네를 흥분시켰다. 하지만 한 장 당 복사비로 거금(100달러)을 요구해 주머니가 얇은 나그네는 대신 디지털카메라에 담아왔다. 그네들이 거금을 요구할 만큼 끔찍한 장면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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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상륙작전 후 전선을 시찰하는 맥아더 장군(1950. 9.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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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R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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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아더 기념관에 소장된 한국관련 앨범으로 주로 한국전쟁 이전의 좌익사범 및 빨치산 처형 장면이 많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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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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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힘들었지만 행복했던 시간들
이번 제3차 한국전쟁 기록물 리서치 작업에서도 가장 감동적이고 기분 좋았던 장면은, 전란 가운데도 설날을 맞아 한복으로 예쁘게 설빔을 차려 입은 소녀들이 동네 마당에서 널뛰기놀이를 하는 장면이었다. 구김살 없는 소녀들의 표정이 어찌나 맑은지 전란을 겪는 소녀들의 모습 같지 않았다. 고난 속에서도 어려움을 모르고 살아온 백성들이기에 전후 잿더미를 딛고 오늘의 경제대국 번영을 이루어낸 듯하다. 새삼 우리 겨레의 강인한 저력을 확인케 하는 사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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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중이지만 설빔을 차려입은 천진난만한 소녀들이 널뛰기를 하고 있다(1953. 2.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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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R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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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사진 자료의 보고(寶庫)가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일 수밖에 없는 것은 1950년 당시 우리나라 언론기관은 질과 양에서 오늘날과 견줄 수 없을 뿐더러, 우리 백성들은 피란 다니기에 급급해 전쟁 실상을 제대로 기록으로 남길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카메라가 무척 귀한 시절인 데다가 전 전선에 투입할 만큼 인적 자원이 넉넉하지 못했다. 이에 견주어 유엔군들은 부대별 홍보 사진사와 각 언론기관 종군기자로 그날그날 전황을 전 세계에 타전해 사진자료가 비교적 풍부한데다가 전쟁 후 미 정부에서 이를 통합하여 NARA에 영구 소장하면서 방대한 자료를 유지할 수 있었다.
나는 그동안 세 차례 70여 일간 NARA에 머무르면서 한국전쟁 사진자료는 대부분 섭렵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곳에는 워낙 방대한 자료가 소장돼 있기에 섣불리 그 자료들을 다 보았다고 장담할 수 없다. 3차 리서치 작업을 끝내고 떠나오면서 NARA 소속 아키비스트에게 작별인사를 하자 낯이 익은 그들은 한결같이 나에게 "Mr Park, See you again!"이라고 말하면서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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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인민군 전사의 소지품에서 나온 사진으로 김용호, 리영록, 김기원, 김용생, 김두형, 주중환 여섯 동무가 568연대 직속 사격장 밑에서 촬영하였다고 기록돼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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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RA |
처음부터 끝까지 곁에서 도와주시던 박유종 선생도, 그곳에 사는 제자도 꼭 다시 NARA에 찾아와서 <지울 수 없는 이미지>를 계속 발간하기를 기원하였지만 나로서는 확답을 드리지 못하였다. 솔직히 아직도 미국 출입국이 그리 쉽지 않고 비용도 만만치 않다.
아무튼 그동안 수집한 사진과 문서들이 우리나라 기록문화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하기를 바란다. 특히 현대사 자료가 빈곤한 작가, 방송인, 영화인 등 예술인들에게는 그 당시의 모습과 상황을 바로 알 수 있게 하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이번 제3차 방미는 시차부적응과 피로누적으로 여느 때보다 매우 힘들었지만 그런 가운데도 열심히 일했기에 어느 때보다 행복했던 시간들이었다. 검색 중, 좋은 사진이나 문서를 발견할 때의 그 기분은 월척을 낚은 강태공의 손맛보다 더 좋았다.
이번 방미 길에도 곁에서 줄곧 도와 준 박유종 선생, 북한 측 자료 검색방법을 자상하게 일러주신 방선주 박사, 맥아더 기념관 길안내를 해주신 이도영 박사님께 심심한 사의를 드린다. 그리고 그동안 이 일에 성원해 주신 독자 여러분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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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하(남파) 공작원 명단, 기록은 언젠가는 드러나기 마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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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R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