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6월 6일, 아이젠하워 장군의 지휘 아래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한 작전. 이 작전의 성공으로 프랑스가 나치 독일군으로부터 해방되었으며, 제이 차 세계 대전 판도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Operation Overlord라고도 함.
1944년 6월 6일 개시한 연합군의 북유럽 상륙작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세가 연합군 쪽으로 기울자, 미국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은 육·해·공군 합동으로 프랑스 북부해안 상륙작전을 감행하기 위해 사상최대의 진격함대를 조직하는 일을 맡았다. 상륙작전이 성공할 경우 대규모의 연합군이 동쪽으로 진격해, 프랑스를 지나 나치 독일의 심장부까지 들어갈 예정이었다. 영국에서 미국군과 영국군 사령관들이 진격계획을 짜고 있을 때, 에르빈 로멜 독일 육군원수는 예상되는 침공의 방어책임을 맡고 독일군의 방비시설을 강화하기 위해 프랑스 해안에 수중장애물·방공호·지뢰를 설치하고 있었다.
영국의 프랑스 북부 공격은 처음에 정한 5월이 아닌 그 유명한 제2차 세계대전의 'D-데이' 6월 6일에 시작되었다. 함선 1,200척, 항공기 1만 대, 상륙주정(上陸舟艇) 4,126척. 수송선 804척과 수백 대의 수륙양용 특수장갑차로 편성된 대부대가 15만 6,000명의 병력(미군 7만 3,000명, 영국·캐나다 합동군 8만 3,000명)을 노르망디에 상륙시켰는데, 13만 2,500명은 배로 영국해협을 건넜고 2만 3,500명은 공중수송되었다. 오른 강 어귀에서 코탕탱 반도 남동쪽 가장자리까지의 해안이 상륙지점으로 선정되었고, 영국·캐나다 합동군은 동부해안으로 미국군은 서부해안으로 상륙했다. 영국 장군 버나드 몽고메리 경의 지휘로 선두 공격을 감행한 지상군은, H. D. G. 크리라 중장이 이끄는 캐나다 제1군, 중장 마일스 뎀시 경이 이끄는 영국 제2군 및 영국 제1·6 공수사단과, 오머 N. 브래들리 중장이 이끄는 미국 제1군 및 제82·101 공수사단으로 구성되었다.
영국해협의 날씨가 25년 만에 최악의 상태였기 때문에 작전이 24시간 연기된 뒤 6월 6일 동트기 전 영국기습부대가 주요교량을 점거하고 나치의 통신망을 두절시키는 동안 미국 제82·101 공수사단이 생메르에글리즈 시 근처에 야간상륙하면서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날 아침 연합군 공격부대가 유타·오마하·골드·주노·소드라고 암호명을 붙인 노르망디 해안의 5곳에 상륙했다. 그중 4곳은 빨리 손쉽게 점거했지만, '피의 오마하'에 상륙하던 연합군은 독일군의 거센 저항에 부딪쳤다. 해질녘 연합군은 5개 해안지역 모두에서 상당한 교두보를 확보하고, 독일군을 격퇴하기 위한 마지막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오마하 해변).
연합군의 제공권 확보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공군이 동쪽의 센 강과 남쪽의 루아르 강에 있는 거의 모든 다리를 폭파했기 때문에 교두보에서 포위된 독일군 전위부대의 병력보강이 빨리 이루어지지 못했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영국군은 상륙 첫날 캉을 점령해야 했다. 그러나 영국군은 오전 9시경 해안 수비대를 물리쳤지만 해안의 교통이 매우 복잡했고 현장의 지휘자들이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던 탓에 오후가 될 때까지 캉을 향해 진격하지 못했다. 마침내 캉으로 진격하려고 할 때 침공지역에 있던 유일한 독일의 기갑사단이 해안에 도착, 영국군의 진격을 막았고 다음날에는 2번째 기갑사단이 도착했다. 결국 1개월 이상의 격전을 벌인 뒤에 영국군은 7월 9일 캉을 점령했다. 한편 서부 전투지구의 미국군은 코탕탱에서 독일군의 거센 저항에 부딪쳤으나 결국 6월 26일 중요한 항구인 셰르부르 항을 점령했다.
독일군의 주요약점은 서부 유럽 해안선 4,828㎞와 이탈리아 산악국경 쪽의 네덜란드 절반을 방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서부 유럽의 독일군 59개 사단은 고정병력으로, 긴 해안선의 전투 지구에 못박혀 있었다. 그러나 다른 절반의 병력은 야전사단이었으며 이 가운데 10개 기갑사단은 기동성이 뛰어났다. 따라서 독일군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모아 연합군이 거점을 잡기 전에 바다로 밀어붙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독일군 사령부는 공격 예상지역과 가장 좋은 대응책에 관해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즉각적이고 강도높은 반격을 하지 못했다. 공격이 있기 전에 연합군의 상륙지점을 판단하는 데 장군들의 계산보다 히틀러의 직관이 옳았다. 상륙이 시작된 뒤부터 히틀러는 장군들의 행동을 엄격히 통제하여 독일은 전세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고, 일부 지역에 묶여 있던 연합군은 프랑스를 가로질러 파죽지세로 진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