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우리歌曲 愛

사랑 - 이은상 작사, 홍난파 작곡 - 난파의 생애

淸山에 2010. 8. 12. 13:04

 

     

    이   름  :  홍난파
    본   명  :  홍영후
    출   생  :  1898년 4월 10일
    사   망  :  1941년 8월 30일
    직   업  :  작곡가
    학   력  :  셔우드음악학교
    경   력  :  1931년 조선음악협회 상무이사 역임 1936년 경성중앙방송국 방송관현악단 조직
    대표작  :  저서-음악만필
    대표곡  :  봉선화, 고향의 봄, 성불사의 밤
    특   이  :  한국 최초의 서양음악 작곡가

     




    화성시 활초동에 있는 난파(홍영후)의 생가. 원래 생가 소멸로 1986년 다시 복원한 모습. 초가와

    옛모습을 그대로 복원하였고 달랑 한채 뿐인 생가와 주위가 정말 산골짝.




    옆 모습으로 본 생가와 싸립문. 달랑 방 두개 부엌 마루 뿐, 마당도 없다.



    생시에 사용했던 바이올린 설명문.
    마루 우측에 설명되어있는 액자가 달랑 서너개.



    마루 모습.



    부엌 모습.


    홍난파 선생의 생애



    홍난파는 1898년 4월 10일(음력 3월 19일)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활초리에서 아버지 혼준과

    어머니 이씨부인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영후, 호는 난파, 본관은 남양이다.
    난파는 7세때 서울로 이사하여 이화학당 근처에서 살면서 정동감리교회에 나가면서부터

    서양 음악인 찬송가를 듣고 배웠으며 중앙기독교 청년회(YMCA)중학부 1학년때 이미 간단한

    찬송가는 독보법을 스스로 해독하는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중앙기독교청년회

    중학부를 졸업한 난파는 이듬해인 1913년 9월 당시 우리나라의 유일한 음악교육기관이던

    조선정악전습소의 양악부에 입학하여 김인식선생으로부터 바이올린 및 악전대요등을 배웠다.

    - (중략) -

    한편 신문과 잡지에 음악에 대한 교양면 보급에 힘을 기울였으며 제일 처음 음악 평론도로서

    후학도들에게 충고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경성방송국에 근무하던 중 난파는 흥사단 단가를 작곡하였다는 이유로 1936년 도산 안창호와

    함께 종로경찰서에 수감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이때 받은 고문으로 머리를 다친 것이 원인이 죄어 결성 요양원(현 위생병원)에 입원하였으나

    해방의 서광을 보지 못한채 1941년 8월 30일 44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생가 앞부분 입니다. 밭이 있고 사방이 언덕길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생가 초가 위로 보이는 초생달이 요절한 천재의 아픔처럼 처량했습니다.



    생가 앞의 이 이름 모를 꽃은 난파 선생님의 恨을 알런지요...

    사랑 (이은상 작사, 홍난파 작곡) 소프라노 이진희 바리톤 이요훈 탈대로 다 타시오 타다말진 부디마소 타고 마시라서 재될 법은 하거니와 타다가 남은 동강은 쓸곳이 없느니다 반타고 꺼질진대 부대 타지 말으시오 차라리 아니 타고 생낙으로 잊으시오 탈진댄 재 그것조차 마저 탐이 옳으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