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흘러간 사진

사진속에 담긴 舊韓末의 풍경

淸山에 2010. 7. 27. 13:59

사진속에 담긴 舊韓末의 풍경


▲ 무악재 오르는 길 서울에서 북한산으로 가는 길의 첫 고개인 무악재. 지게를 진 사람과 소를 몰고 있는 사람이 보인다. 1907년 9월 헤르만 산더 일행이 촬영한 사진.
지금부터 꼭 100년 전 한 독일인이 한국을 여행하며 만든 옛 사진 160여 점이 서울에서 처음으로 공개된다. 국립민속박물관이 14일부터 8월 28일까지 여는 기증사진전 ‘독일인 헤르만 산더의 여행’은 주일(駐日) 독일대사관 무관이었던 산더(Herman Sander·1868~1945) 중위가 1906~1907년 서울·원산·성진·길주 그리고 만주·사할린 등을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들이다. 산더 중위의 지시를 받아 실제로 사진을 촬영한 사람은 동행 사진가인 일본인 나카노씨였다.

구한말 격변기를 살았던 한국인들의 모습과 풍속, 역사적 현장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 전당포와 갓수선 노점 전당포 건물 앞에서 갓을 수선하는 노점상이 우산을 펴고 앉아 있다. 헤르만 산더는 “이 전당포의 이자는 월 5%”라 기록했다. 1907년 3월 촬영.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또 산더 중위가 수집한 엽서·문서 그리고 갓·놋그릇·부채·화첩 등도 함께 전시된다.

 유물들은 그의 손자인 슈테판씨가 지난 2004년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20세기 초 함경도 길주에서 찍은 사진이라던가?

조선에 왔던 서양인들의 기록을 보면 조선사람을 두고 키도 크고 잘 생겼다며 심지어 코카서스인의 후손이 아닌가 주장하는

사람마저 있었는데... 보다시피 위의 사진에서도 서양인 주위에 둘러 선 조선사람 치고 서양사람보다 작은 사람이 없다.

서양사람이 작은 편이라 쳐도 하나같이 키가 크다. 반듯한 이마 하며 곧은 콧날 하며 생기기도 잘 생겼고.

특히 저 짝다리의 포쓰는!!!

구한말 조선인의 평균신장이 남자 162센티미터정도였다고 한다.

같은 시기 중국인의 평균신장이 161센티미터, 일본인의 평균신자이 157센티미터였고, 유럽에서도 1820년 프랑스 남성의

평균신장이 164센티미터 정도였다고 하니 아시아에서는 가장 큰 편이고, 유럽과 비교해서도 그리 작은 편이 아니었던 셈이다. 조선 말기 세도정치로 말미암아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크게 혼란스럽던 시기임을 감안하면 정말 대단한 수치다.

하기야 지금도 아시아에서 평균 신장이 가장 큰 나라 가운데 하나이니.

하지만 그러면 뭐하는가. 한참 작던, 그래서 왜놈이니 쪽바리니 비웃던 일본인에게 곧 굽신거리는 처지가 되어 버렸으니. 

그리고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 조막만하던 일본인보다도 키가 더 작아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인의 평균신장이 한국인의 그것보다 조금 더 컸으니, 다시 일본인을 내려다 보기까지

무려 1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것이다. 그 잘난 위정자들 때문에. 말만 많았지 제대로 하는 일이라고는 없던 고종과

민씨 일족과 권문세가와 기타 가문과 문벌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던 양반 사대부들 때문에.

하여튼 개인개인이 잘나고 못나고보다, 그 민족이 잘나고 못나고보다, 정치를 맡아 책임지는 이가 얼마나 자신의 일을

책임을 갖고 열심히 하는가에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사이의 모든 것이 결정된다 하겠다.

그리 잘 난 조상들도 무능하고 무기력하고 무책임한 위정자들로 말미암아 그 조막만한 쪽바리 왜놈들에게 그리 수모를

당했으니. 메이지 유신을 일구어냈던 일본과 여전히 찌질거리며 구습을 놓지 못하던 조선과의 차이가 키차이까지 거꾸로

뒤집어 놓은 것이리라.

어쨌거나... 정말 잘들 생기셨다. 훤칠하니 키도 크고. 서양인이 완전히 죽어 보인다.

차라리 그 조막만한 녀석들과 전쟁이라도 한 번 화끈하게 치러보고 당했다면 이리 억울하지나 않으련만. 

개념없이 무능하기만 한 왕을 만나 그리 고생을 해야만 했으니. 참으로 백성 스스로의 손으로 그 왕을 처단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 백성들의 손으로 그 왕을 처단하고, 저들과 대결하여 설사 같은 결과가 나올 뿐이라 하더라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 해 보았으면. 정말 아쉽기 이를 데 없다.

참, 오해할까 말해 두는 건데 차별적인 의미에서 쪽바리니 왜놈이니 한 것이 아니다.

단지 당시 조선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얘기다. 설마 개명한 국제화시대에 진심으로 그리 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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