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우리歌曲 愛

초우 - 나윤선

淸山에 2010. 7. 25. 16:40





초우 - 나윤선

가슴속에 스며드는
고독이 몸부림 칠때
갈길없는 나그네 꿈은 살아져
비에 젖어 우네

너무나 사랑 했기에
너무나 사랑 했기에
마음의 상처 잊을 길 없어
비소리도 흐느끼네


 

새벽 6시 기상, 8시 노르웨이. 새벽 5시 30분 기상, 7시 30분 독일. 새벽 4시 45분 기상, 7시 프랑스. 아침 9시 기상, 11시 30분 영국. 한국 찍고 홍콩, 중국, 말레이시아를 거쳤다가 핀란드로.... 
누군가 이런 스케줄이 적힌 수첩을 길에서 주웠다면 아마 이 수첩의 주인은 비행기 승무원이거나 출장이 많은 비즈니스맨 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직업은 가수입니다. 즐겨 듣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고, 쉽게 따라 부르기도 영 애매한 재즈를 부르는 가수입니다. 이 시간표는 이번 새 음반의 세계 발매를 기념해서 벌이고 있는 이른바 월드 투어를 앞두고 제가 대강 수첩에 끄적여 놓은 것입니다.

저는 스물 여섯에 음악을 시작했습니다. 음악을 시작하기엔 적지 않은 나이였죠.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생활을 하다가 우연한 기회로 뮤지컬에 몇 편 출연하고 난 후, 음악공부를 하기로 결심하고 유학을 떠나 평생 들어본 적도 없는 재즈를 한다고 여기저기 돌아다닌 지 올해로 만 15년째입니다.


프랑스에서 재즈를 공부하며 참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처음에 학교에 입학해서는 선생님들과 학생들로부터 쏟아지던 ‘넌 누구냐?’ 라는 질문에 대답하느라 거의 한 학기 이상을 보냈습니다. 당시에는 한국의 음악에 대해, 특히 한국의 재즈 시장에 대해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던 지라 무작정 재즈를 하겠다고 한국에서 날아 온 제가 그들의 눈에 마냥 신기했던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부푼 꿈을 안고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제 목소리가 재즈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끼게 된 것입니다. 재즈보컬 하면 떠오르는 저음의 허스키한 소리도 아니고, 그다지 성량이 풍부한 것도 아니며, 특유의 스윙 리듬이 녹아 들기 힘든 밋밋한 소리. 게다가 동양인이 영어로 프랑스의 무대에서 재즈를 노래하는 제가 왠지 어색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새 결국 제 자신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올바른 결정을 한 걸까?”

 

뒤늦은 진로와 정체성에 대한 고민으로 전전긍긍하고 있던 차에 평소 존경하던 선생님 한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 물음에 대한 선생님의 답은 명쾌했습니다. “재즈가 꼭 이래야 한다, 아니면 꼭 저래야 한다고 누가 그러던? 네 식대로 해, 네 식대로.” 라는 말씀과 함께 듣도 보도 못한 유럽의 재즈 보컬리스트들의 음반을 건네주셨습니다. 어떤 가수는 저보다 훨씬 더 고음으로 노래하고 있었고 어떤 가수는 마치 이게 재즈인가 싶을 정도로 ‘제 마음대로’ 부르고 있었습니다. 재즈라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각자 다른 환경에서 자란 다른 국적의 가수들이었습니다.

그 일 이후 저는 칠레, 아르메니아, 인도, 몽고 등 재즈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던 나라의 재즈 보컬리스트들의 음반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놀랍게도 다 달랐습니다. 재즈는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자유로운 음악이었던 것입니다. 만세!

내 식대로..... 이 말에 용기를 얻게 된 저는 오래 함께 활동한 Youn Sun Nah quintet과 같이 정말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노래 부르면서 공연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사람들이 그저 아시아 어딘가에서 잠깐 들르러 온 가수쯤으로 여기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저희는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재즈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제 목소리 덕에 오히려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온 재즈 보컬리스트’, ‘한국에서 날아 온 젊은 여가수의 투쟁과 영광’ 등 르몽드, 피가로 등 프랑스의 일간지에 기사가 나기 시작하면서 공연은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유럽을 넘어서 미국, 아시아, 오세아니아 등등으로 공연을 다니게 된 것입니다. 저와 같이 연주했던 뮤지션들의 덕이 큽니다만 ‘한국’에서 온 ‘재즈 싱어’에 주목해 많은 관심을 가져 준 기자들과 공연 관계자들, 그리고 팬들의 덕도 한없이 큽니다.


유럽의 재즈계는 생각보다 녹록치 않습니다. 재즈는 국경이 없는 음악이라고들 말을 하지만, 그리고 저도 거기에 상당 부분 동의는 하지만, 그 안에 들어가 보면 보이지 않는 텃세로 동양인이 발붙이기란 참 쉽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생겨난 재즈라는 장르에 자신들의 자랑이자 자존심인 클래식 음악이 상당히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자부심 때문일까요? 그래서 그렇게 자기들만의 ‘리그’를 지키려고 애를 쓰는 것일까요?

괜히 남의 집 싸움에 끼어드는 것 같아 불편하기도 했지만 다문화에 관대한 그들의 오랜 전통 때문인지 저는 계속 활동을 할 수 있었고 선생이 되어 (유럽인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여기까지 왔습니다.


재즈를 만나면서 인생의 대부분을 길 위에서 보내는 저는 며칠 뒤 독일 레이블 ‘ACT’에서 나온 새 음반 ‘Voyage’ 공연을 스웨덴 기타리스트 ‘Ulf Wakenius’와 함께 갖습니다. 투어는 노르웨이를 시작으로 여러 나라에서 이어질 예정입니다. 또 다시 재즈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다니던 회사의 사무실에 앉아서, 또 얼떨결에 하게 된 뮤지컬의 첫 무대에서, 처음 파리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지금의 내 모습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확 저지른 여러 일들이 돌이켜보면 다리를 후들거리게 합니다. 안 될 거라고 지레 겁을 먹었던 일들이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오랫동안 함께 일했던 이들의 등돌림도 있었습니다. 일상에서의 인종 차별에서부터 외국인이기에 받는 불이익들도 없었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군들 인생이 그리 쉽겠습니까? 그래도 저는 참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재즈가 제 인생의 전부는 아닙니다만, 그리고 재즈가 꼭 들어야만 하는 필수 음악도 아닙니다만 저는 이 음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것들을 배웠습니다. 제가 누구냐구요? 저는 ‘대한민국 재즈가수 나윤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