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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사들이 한운사 선생의 빈소를 찾은 까닭은?

淸山에 2010. 7. 10. 09:44

조종사들이 한운사 선생의 빈소를 찾은 까닭은?

12일 오후 고 한운사 선생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는 공군 조종사들. (공군 제공)

12일 오후 김유정(왼쪽) 대령을 비롯한 공군 제15혼성비행단 조종사 30여명이 원로 방송작가 故 한운사 선생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아산병원을 찾아 조문했습니다. 한운사 선생은 잘 알려진대로 영화와 방송 소설 등의 장르를 넘나들며 50~60년대를 풍미한 대 작가셨죠. 공군과는 지난 1964년에 제작된 신상옥 감독의 영화 ‘빨간 마후라’로 각별한 인연을 맺었습니다.


사실 빨간 마후라가 한국 공군의 아이덴티티로 확실하게 부각된 데는 이 영화의 힘이 가장 컸습니다. 빨간 마후라가 탄생한 것은 한국전이 한창 벌어지던 1951년 10월 공군 강릉 기지에서였습니다. 이 때는 미군이 넘겨준 F-51 ‘머스탱’ 전투기 10대로 구성된 우리 공군 최초의 전투부대인 ‘제 10 전투비행전대’가 단독출격작전을 시작할 즈음이었습니다.

당시 전대장은 해인사에 대한 폭격명령을 거부해 민족의 유산인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보존한 김영환 장군이었죠. 그런데, 이 양반이 ‘한 멋’하는 분이셨습니다. 김 장군은 평소 1차세계대전 당시의 독일군 에이스 ‘폰 리히트호펜’을 흠모했다죠. 연합군 전투기 80대를 격추한 독일군의 영웅 리히트호펜은 자신의 전투기를 온통 붉은 색으로 도색해 ‘붉은 남작’으로 불렸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서른한살의 나이로 10 전투비행 전대장을 맡게 된 김 장군은 형수(그의 친형은 김정렬 초대 공군참모총장이었습니다)에게 부탁해 치마를 짓고 난 자투리 천으로 빨간 마후라를 만들었습니다.


고 김영환 장군, 1920~1954 (이미지출처=전쟁기념관 홈페이지)

1951년 10월 11일 아침, 한국 공군의 역사적인 첫 단독 출격을 지휘했던 김 장군의 목에는 이 빨간마후라가 둘러져 있었습니다. 사실 빨간 마후라의 유래에 대해서는 후일 공군 참모총장을 지낸 장지량 장군이 추락한 아군 조종사를 수색하는 방안을 논의하다가 눈에 잘 띄는 색깔의 빨간마후라를 지급했다는 설(장지량 장군 회고록 ‘빨간마후라 하늘에 등불을 켜고’)도 있지만 김영환 장군의 유족들과 윤응렬 전 공군 작전사령관 등은 이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어쩐 연유에서인지 전쟁 당시 출격조종사들이 목에 두른 빨간 마후라가 세간에 화제에 오른 적도 없었고, 공군의 간행물에나 신문, 잡지 등에 언급된 적도 없었습니다. 이 빨간 마후라가 한국 공군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데는 역시 신상옥 감독과 한운사 선생의 역할이 컸습니다. 아래의 글은 장지량 장군의 회고록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한운사씨는 신상옥 감독을 대동하고 내 방을 찾아왔다. 그는 빨간 마후라의 유래가 교훈적이고 노래도 히트하고 있으며, 거기 얽힌 파일럿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도 흥미로워 대본을 만들어 영화화하겠다고 제안했다. “여성과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던 전투조종사가 출격한 뒤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대신 조종사 친구가 그 여성을 위로하다가 새롭게 사랑이 무르익어 간다는 사연은 언제 들어도 감동적입니다. 이런 사연을 뼈대로 조종사들의 불굴의 의지, 조국 사랑 정신과 사명 의식, 사랑이야기를 소재로 영화할 생각입니다. 장 참모차장께서 영화제작위원장을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나로서는 불만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대중가요 ‘빨간 마후라’가 트로트 위주라 멜로디가 힘이 없고 너무 구슬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안했다. “영화화 하는 것은 좋은데 가요로 나온 노래를 행진곡 분위기로 바꿀 수 없을까요? 경쾌하면서 사나이의 의리를 담는 남성적인 톤으로 바꿔주면 좋겠는데요.” “맞습니다. 우리도 그런 생각을 해 왔습니다. 더 멋지게 만들 계획으로 있으니 안심하십시오.” 나는 즉시 장성환 참모총장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난색을 표명했다. “나는 괜찮은데.....좀 곤란하지 않겠나?” 젊은 파일럿이 전사하는데 사랑 타령의 멜로물은 이해되지 않았다(영화의 극적 장면을 위해서는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그래서 공군 사기 진작을 위해서도 좋은 일인가 하는 내부 의견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창작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고, 또 외국에서는 이런 영화가 비일비재하다. “총장님, 오히려 이런때 우리 공군의 위상과 활동상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기회로 삼으면 어떻겠습니까? 제가 철저히 검증을 하고 명예를 높일 수 있도록 지휘 감독하겠습니다.” 장 총장은 자신이 결정하기가 난처했던지 공군 선배인 김정렬 전 총장과 상의해 보라고 지시해 세사람이 한자리에 모였다. 김 전 총장은 좋은 아이디어라며 즉석에서 OK 사인을 했다. 대선배인 김 전총장이 OK를 했는데 장 총장이 안된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곧바로 한운사 씨와 신상옥 감독에게 이 사실을 통보했다. 어찌보면 그들은 굳이 공군의 재가를 받을 필요없이 영화를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공군의 협조를 받지 못하면 비행기 이용 등 난관에 봉착해 영화를 제대로 촬영할 수 없었다. 나는 이점을 최대한 활용해 파일럿의 세계를 널리 알리는 기회로 삼았다. 그래서 공군의 위상을 높일 아이디어를 제공할 심산이었다.


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 하늘의 사나이는 빨간 마후라
빨간 마후라를 목에 두르고 구름따라 흐른다 나도 흐른다
아가씨야 내 마음 잊지 말아라 번개처럼 지나갈 청춘이란다

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 하늘의 사나이는 빨간 마후라
석양을 등에 지고 하늘 끝까지 폭음이 흐른다 나도 흐른다
그까짓 부귀영화 무엇에 쓰랴 사나이 일생을 하늘에 건다.



이렇게 해서 ‘빨간 마후라’ 노래도 멜로디로 새롭게 작곡되어 대중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영화 주인공은 최은희, 최무룡, 신영균 등 초호화 캐스트들로 더욱 화제를 모았다. 나는 영화 촬영 세트장으로 수원비행장과 F-51전투기를 제공했다. 오늘날처럼 컴퓨터 영상처리나 시뮬레이션 기법이 도입되지 않아서 실물을 그대로 활용했다. 그러다보니 애로가 적지 않았다. 부품 하나 망가져도 엄청난 손실을 가져왔기 때문에 나는 시간이 허락하면 촬영지인 수원비행장에 나가 감독 못지않은 지휘를 했다. 부품 때문에 촬영이 중단되는 경우도 있어 영화사가 나에게 불만을 표시할 정도였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별다른 사고 없이 영화가 완성되어 국내는 물론 일본, 대만, 홍콩, 태국 등지에서 까지 크게 히트했다. 우리 공군의 이미지가 크게 신장되었음은 물론이다.


영화 '빨간마후라'의 오리지널 포스터 (이미지 출처=영상자료원)

장 장군의 말대로 이 영화는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했습니다. 관객 동원 15만(개봉 당시인 1964년의 한국 경제상황을 감안하면 이는 엄청난 히트였다고 하네요)에 제 11회 아태영화제 감독상과 남우주연상 등을 수상해 작품성도 인정받았습니다. 특히 영화에 사용된 같은 제목의 주제곡(한운사 작사, 황문평 작곡)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대만 공군도 이 노래를 번안해 부를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빨간마후라는 국민들에게 한국 공군의 상징으로 인식되었고, 또 전투조종사들에게는 자신들의 정열과 신념을 고취 시키는 정체성 확립의 촉매제가 되었던 것이죠. 오늘날에도 공군은 비행교육과정을 수료하는 조종사들에게 참모총장이 직접 빨간마후라를 목에 걸어 주는 것을 전통으로 이어오고 있습니다.

고 한운사 선생 (1923.1.15~2009.8.11)

고 한운사 선생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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