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사들이 한운사 선생의 빈소를 찾은 까닭은?
![]() 12일 오후 고 한운사 선생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는 공군 조종사들. (공군 제공) 사실 빨간 마후라가 한국 공군의 아이덴티티로 확실하게 부각된 데는 이 영화의 힘이 가장 컸습니다. 빨간 마후라가 탄생한 것은 한국전이 한창 벌어지던 1951년 10월 공군 강릉 기지에서였습니다. 이 때는 미군이 넘겨준 F-51 ‘머스탱’ 전투기 10대로 구성된 우리 공군 최초의 전투부대인 ‘제 10 전투비행전대’가 단독출격작전을 시작할 즈음이었습니다. 당시 전대장은 해인사에 대한 폭격명령을 거부해 민족의 유산인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보존한 김영환 장군이었죠. 그런데, 이 양반이 ‘한 멋’하는 분이셨습니다. 김 장군은 평소 1차세계대전 당시의 독일군 에이스 ‘폰 리히트호펜’을 흠모했다죠. 연합군 전투기 80대를 격추한 독일군의 영웅 리히트호펜은 자신의 전투기를 온통 붉은 색으로 도색해 ‘붉은 남작’으로 불렸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서른한살의 나이로 10 전투비행 전대장을 맡게 된 김 장군은 형수(그의 친형은 김정렬 초대 공군참모총장이었습니다)에게 부탁해 치마를 짓고 난 자투리 천으로 빨간 마후라를 만들었습니다. ![]() 고 김영환 장군, 1920~1954 (이미지출처=전쟁기념관 홈페이지) 어쨌든 어쩐 연유에서인지 전쟁 당시 출격조종사들이 목에 두른 빨간 마후라가 세간에 화제에 오른 적도 없었고, 공군의 간행물에나 신문, 잡지 등에 언급된 적도 없었습니다. 이 빨간 마후라가 한국 공군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데는 역시 신상옥 감독과 한운사 선생의 역할이 컸습니다. 아래의 글은 장지량 장군의 회고록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 하늘의 사나이는 빨간 마후라
![]() 영화 '빨간마후라'의 오리지널 포스터 (이미지 출처=영상자료원) ![]() 고 한운사 선생 (1923.1.15~2009.8.11) 고 한운사 선생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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