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알면좋을 庫

朝鮮朝 四大名筆

淸山에 2009. 10. 4. 15:49

    

 

^


朝鮮朝四大名筆

 


         安平大君 李瑢(이용, 본관 전주, 1418∼1453)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端宗의 王자리를 넘보자 단종편에 섰다.

계유정란으로 金宗瑞·皇甫 仁등이 죽임을 당했다. 이 때 아들 이우직은 진도에서 죽었다.
호는 梅竹軒, 世宗의 셋째아들, 의춘군의 아버지, 명필로 아려졌으며 작품으로「世宗大王英陵神道碑」「심은묘표」등이 있다.

 


             
              楊士彦(양사언, 본관 청주 1517∼1584) 


              자연을 사랑해 지방에서만 벼슬살이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르를리 없건만는/

사람이 제 아 닌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이 시를 지은 양사언은 조선 明宗1年 문과에 급제한 뒤 벼슬길에
올라 대동승 거쳐 함흥·평창·강릉 군수에 이어 여러지방의 都護府使를 지냈다.
자연을 사랑하여 자원하여 지방에서 벼슬살이를 했으며, 금강산을 구경하고 지은「금강산 유람기」라는 책을 남겼다. 풍수가로 유명했던 남사고에게 역슬을 배워 임진왜란을 정학히 예언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글씨도 잘 써 조선의 4대명필로 꼽힌다.
호는 蓬萊山人. 찬성사 之壽의 5世孫, 황해병사 治의 손자. 부사 萬古의 아버지.

작품집에 「봉래시집」이 있다.

 


             
                韓濩(한호, 본관 청주 1543∼1605)


                한석봉으로 알려진 조선 시대의  명필
秋史 金正喜와 쌍벽을 이루는 朝鮮의 名筆로 흔히 ‘韓石峯’으로 불렀다.

朝鮮時代에는 다른 文化도 그러했지만 붓끌씨의 書體와 書風도 中國 것을 흉내내는 풍조가 流行했다. 韓石峯은 이런 풍조에 벗어나 獨創的인 書體를 確立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韓石峯의 글씨를 귀하게 여긴 宣祖는 그를 可平郡守라는 한가한 자리로 보내면서

꾸준히 글씨 공부를 하라고 당부했다.
특히 어릴 적 韓濩가 공부를 게을리하자 떡장사를 하던 어머니가 불을 끄고

글쓰기와 떡 썰기 시합을 벌여 큰 깨우침을 주었다는 有名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韓濩는 明宗때 進士가 된 薦擧를 받아 宣祖39年 사옹에 이어 가평군수·흡곡현령·존승도감

 사서관 등을 지냈다. 호는 石峯.

 


               
                  金正喜. 本貫 慶州(西紀1786年∼1856年)


                  金石學과 秋史體로 有名한 最高의名筆
북한산 비봉 꼭대기에는 언제 세웠는지 모르는 비가 이끼가 가득한 채로 있었다.
전해오는 이대조에게 한양 도읍을 천거한 무학대사의 비라고했다.

그러던 것을 김정희가 西紀560年 무렵 신라 진흥왕이 세운 유명한“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냈다.

왕이 높은 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백성을 다스리는 내력들을 적어 세운 비를

흔히 巡狩碑(순수비)라고 한다. 중국 진나라 진시왕때 시작되었다.

김정희는 金石學(금석학)에 깊은 지식을 지녔고. 특히 秋史體(추사체)로 有名(유명)하여

우리나라 최고의 명필로 평가받고 있다.
어렷서 실학의 대가인 박제가에게 글을 배워 순조 14년 과거에 급제하여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그러나 도합 13년이나 귀양살이를 하는 등 불우한 생을 보냈다.
【완당집】【금석과안록】【실사구시설】같은 고증학에 바탕을 둔 책들과

【목죽도】같은 유명힌 서화를 남겼다.

호는 秋史. 阮(완)堂(당) 등. 영의정의 현손,영조의 사위 월성위 한신의 증손자, 예조핀서

 

*

 

 

'역사.정치.사회 > 알면좋을 庫'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리랑의 의미   (0) 2009.12.04
화투 48장에 숨겨진 비밀   (0) 2009.11.28
꼭 없애야 할 7가지 나쁜 버릇  (0) 2009.09.16
사찰(寺刹) 예절  (0) 2009.09.12
도리도리·잼잼·짝짜꿍의 의미는  (0) 2009.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