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화폭의 예술

세잔의 사랑

淸山에 2009. 9. 15. 06:56

 

 

 
지독히 내성적이었던 세잔은 늘 고독했습니다. 어쩌면 그가 선택한 고독이었을 겁니다. 왜냐면 그는 자기 자신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이죠. 누구도 그 안에 들어갈 수 없었고, 그 또한 어느 누구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친구도, 가족도 함께 하지 못한 채 자신 안으로 들어가 버린 세잔의 자아에 대한 사랑 또한 그의 작품 세계만큼이나 독특하고도 철저합니다.

세잔의 인생 속에 등장하는 사랑의 대상은 아버지, 친구 그리고 자기 자신 정도 일겁니다. 선천적으로 여자를 꺼려했던 그였지만 물론 아내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지요. 잠시 그녀에 대해 말씀드리자면….서른 살의 세잔은 지나치게 밝아, 다소 경박스럽기까지 한 열 아홉 살의 모델에게서 아들을 낳습니다. 그리고 17년간 동거를 한 뒤 결혼도 합니다. 그의 인생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여자이자 공식적인 아내였지요.

그러나 그녀에 대한 세잔의 사랑은 의구심이 듭니다. 그들은 자주 떨어져 살았을 뿐 아니라, 부부라기보다는 친구와 같은 사이였다고 보여지니까요. 그리고 세잔은 죽을 때 한푼의 유산 도 그녀에게 남기지 않았고, 그녀 또한 세잔의 임종 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세잔에게 있어 부인 오르탕스는 전속 모델이자 그의 아들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로만 남았을 뿐입니다.

세잔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그의 아버지와 친구인 에밀 졸라였습니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생활을 하던 유약한 화가 세잔은 늘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하였습니다. 세잔이 그림 공부를 시작하고 나서 아버지는 법관이 아닌 화가로서의 아들을 어렵게나마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가 원치 않는 일을 하고 있다는 죄스러움과 그림에 대한 자신의 열망 사이에서 갈등하곤 했지요. 지나치게 소심했던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를 그림에 담아 내면서도 늘 불안해 했습니다.

세잔의 친구 에밀 졸라는 당대의 유명한 소설가이자 비평가였습니다. 과잉보호를 받고 자랐던 세잔과 힘든 가정환경 탓에 조숙했던 졸라는 어린 시절을 함께 지내면서 예술과 문학에 대한 소양들도 함께 키워나갔습니다. 세잔이 화가로서의 길을 고민하고 있을 때, 졸라는 강력하게 그 길을 걷도록 종용하기도 했지요. 세잔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그를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졸라는 세잔의 능력을 인정했지만 그의 우유부단함을 알았기에 늘 충고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같은 화가 드니에 의해 <세잔에게 경의를>이란 작품이 제작될 정도로 당시의 화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작가는 세잔이었고, 피카소 조차 자신의 유일한 스승은 세잔 뿐이라고 말할 정도였지만, 대중들이나 비평가들은 그를 외면했었습니다. 게다가 그에게 있어 가장 든든한 친구였던 졸라마저도 그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저 실패한 천재 화가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세잔을 가장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이해하더라도, 가장 신뢰하는 사람의 이해가 없다면 그것만큼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은 없을 겁니다. 누군가에게 기대하면 할수록 더욱 외로워지는 것이니까요. 세잔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던 친구 졸라의 이해만 있더라도 세잔의 삶이 그렇게 고독하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세잔은 늘 홀로 있길 원했습니다. 자신의 전시회를 할 때도 나타나지 않았고, 그림을 팔기 위해 화상을 만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림을 시작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그를 찾아왔으나, 그는 동요하지 않았고, 그들과 친밀한 교류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자연을 바라고 그리며 그 속에서 은둔자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그림으로 자신을 보이길 원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완벽한 화가로서의 세잔이었지요. 그리고 결국 그는 자신이 원하던 대로 사랑하고 꿈꾸던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 자화상 (1862) ]
20대 초반의 세잔이 막 화가로서의 삶을 시작할 때에 그린 자화상입니다. 이 작품은 당시에 찍었던 자신의 사진을 보면서 그린 것인데요, 다소 고의적으로 흉하게 그린 것입니다. 누런 안색과 악마를 연상시키는 눈빛이 험악한 얼굴이지요. 많은 자화상을 그렸지만 그림들 속 세잔은 결코 웃는 법이 없었습니다.

 

[ 팔렛트를 들고 있는 자화상 (1887) ]
세잔은 다른 화가들 보다는 자화상을 많이 그린 것으로도 유명한데요, 자화상을 그려도 결코 자신을 미화시키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벗겨진 머리를 그대로 볼품없이 그려내고, 뻣뻣한 수염을 사실적으로 그려내었습니다. 그는 과장되지 않는 자화상을 통해 살아있는 리얼리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 세잔 부인 (1887) ]
세잔에게 있어 가장 휼륭한 모델이었던 그의 부인 오르탕스 입니다. 부인의 뛰어난 인내심 덕분에 세잔은 그녀를 모델로 하여 많은 작품들을 남겼는 데요, 달걀형 얼굴의 부인 또한 꾸밈없이 사실적인 색감을 그대로 드러내었습니다.

 

[ 노란 의자 위 세잔 부인 (1890) ]
한번 초상화를 그릴 때는 모델에게 150번의 자세 교정을 원할 만큼 엄격했던 화가 세잔에게 오르탕스는 무척 고마운 존재였지요. 그녀 덕분에 세잔이 그나마 여성 초상화를 그릴 수 있었거든요. 밝고 쾌활했던 오르탕스였지만 세잔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그녀의 얼굴은 세잔만큼 늘 진지하고 엄숙합니다.

 

 빨간 조끼의 소년 (1890) ]
빨간 조끼의 소년은 세잔의 사과 만큼이나 유명한 작품인데요, 깊은 상념에 잠긴 예쁘장한 소년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많은 고민 속에서 방황하던 자신의 젊은 날들을 떠올리기도 하죠. 덕분에 소년의 지나치게 긴 오른팔조차도 사람들에게 순수의 감정과 아름다움에 대한 공감을 불러 일으키기도 합니다.

 

 해골이 있는 정물 (1890) ]
17,8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의 정물화에 해골이 등장했던 것처럼, 세잔의 정물화에도 해골이 곧잘 등장합니다. 이는 과일과 같은 싱그러운 정물들을 앞에 두고 그리면서도 그의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 인생 무상의 생각에 대한 그의 표현으로 보입니다.

 

[ 긴 머리의 세잔 부인 (1892) ]
머리를 풀고 고개를 기울인 채 상념에 잠긴 세잔의 부인 오르탕스 입니다. 많은 작품에서 모델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준 부인이었지만 남편인 화가를 바라보지 못하는 시선이 왠지 화가와 부인 사이의 미묘한 거리감을 느끼게 합니다. 세잔은 부인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는 것조차 참을 수 없을 만큼 모든 관계를 거부한 모양입니다.

 

 모자를 쓴 자화상 (1894) ]
세잔은 종종 짐꾼의 모자나 정원사의 모자 혹은 터번과 같이 다소 어울리지 않는, 기괴한 모자를 쓴 모습으로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곤 했습니다. 아마도 반사회적인 자신의 기질을 표현하고자 함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그를 두고 비평가들은 “거친 얼굴에 짐꾼이 입는 볼품없는 모직 외투를 입었지만 외양과 상관없이 세잔은 대가이다.” 라고 격찬했습니다.

 

[ 초록 모자를 쓴 세잔 부인 (1894) ]
초록색 벽지를 배경으로 푸른색 드레스를 입고, 초록색 나무 의자에 앉은 부인에게 초록색의 모자를 씌웠군요. 그런 배경을 두고, 여전히 심각한 그녀의 얼굴빛도 창백해 보이는 군요. 세잔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얼굴에 대한 섬세한 묘사를 거두고, 눈,코,입 조차 단순화 시킨 그림을 남김으로써 미래의 입체파에게 그들이 가야할 길을 제시해주었습니다.

 

[ 해골과 소년 (1896) ]
젊은 소년이 해골을 앞에 두고 인생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 듯 합니다. 인생의 말년을 보내고 있는 세잔은 젊은 시절에 더욱 고민했었어야 했다고 느끼는 자신의 감상을 이 그림을 그리면서 보여주고 있는 듯 합니다. 그리고 이 그림을 보는 모든 이들에게 인생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부탁하고 싶은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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