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이 blog의 독자, 특히 해병가족들(현역장병)에게 한국전쟁 중 가장 어려웠던, 지역적으로 오지에 위치하여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미 해병 제1사단의 동계작전인 "장진호 전투"를 소개하므로서 오늘의 해병들의 전투정신을 보다 강하게, 보다 철저하게 함양케하는 데 도움이 되는 보조자료를 제공하는 데 이 내용의 목적이 있다.
또한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의 대부대에 포위되어 전멸의 위기 속에 있던 제2대대의 F 중대를 직접 병력을 인솔하여 구출한 제1대대장 데이비스 중령(Lt.Col. Raymond G. Davis)의 용감하고 탁월한 전투지휘와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고립된 1개중대의 병력으로 1.000여 명의 중공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준 제2대대 F 중대 중대장 '발버' 대위(Capt. William E. Barber)의 용감한 전투지휘 중의 행동으로 인하여 미국의 최고훈장인 'Congressional Medal of Honor'를 '트루만'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백악관에서 수여받은 모든 해병들의 귀감이되는 '데이비스' 대대장(후일에 미 해병대의 부사령관)과 '발버' 중대장을 소개하므로서 해병대 장교들의 전투의식에 강인성을 추가하며 또한 전우애(상경하애)의 정신을 본받는 자료를 제공하는데 이 글의 목적을 두고 있다.
[ It can be fairly said that the 1st Marine Division, with the 31st Infantry RCT and 41 Commando, supported by the 1st Marine Air Wing, the fast carriers of Task Force 77, and with an assist from the 5th Air Forces and the Third Infantry Division, played a decisive role at Chosin. We gave up the ground, but we may well have saved the war.]
By Patrick C. Roe. Maj. USMC(Ret) Chairman. Chosin Few. Historical Committee.
1. "장진호 전투"의 성격:
"장진호 전투"는 미 해병 제1사단이 영하 -20도(주간) -32도(야간)의 살인적인 추위 속에서 중공군의 대부대(120.000명 병력대비 10:1)와의 전투로서 세계 2대 동계 전투로, 또한 한국전쟁 중의 10대 전투로 기록된 전투이다.
전사가들은 한국전쟁을 크게 3단계로 분류한다.
제1단계는 1950년 6월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인한 개전과 "인천상륙작전"으로 정세의 전환이 이루어진 시점.
제2단계는 38도선을 돌파하여 '압록강'까지 진출하여 거의 전쟁이 끝날 것으로 생각했던 시점.
제3단계는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한 UN군의 후퇴와 그 이후 휴전까지 전개되었던 밀고 밀리는 치열한 기형적인 전투가 지속되었던 시기.
U.N.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중앙)과 미 해병 제1사단장 '스미스' 소장(우측)
2. "장진호(長津湖) 전투"
'장진호(長津湖 Chosin Reservior) 지역.
"장진호 전투"(1950.11.27~12.11)는 6.25 전쟁의 제2단계에서 1950년9월15일 미 해병 제1사단을 주축으로 한 "인천상륙작전" 이후 38도선을 돌파한 UN군이 북한의 '청천강' 이북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의 대병력(12만명)에 의해 후퇴하게 되는 1950년 11월하순 서부전선의 "청천강 전투"와 연결선상에 있는 동부전선에서 발생한 전투이다.
"장진호 전투"의 격전지(張津湖주변 지형)
Chosin Reservoir - September 2001
This picture of the Chosin Reservoir was taken in September 2001 by a member of the Remains Recovery team based in Hawaii. It was contributed by SGT Dan Seymour, a member of the team. It seems unreal that this serene and beautiful place could have been the scene of one of the most intense battles in U. S. Military History.
On a recent recovery mission to the Chosin (Changjin) Reservoir, the remains of 14 American service members were recovered. The Reservoir appeared on Japanese maps as Chosin and was called Changjin by Koreans.
전쟁초기 '청천강'유역의 서부전선에는 미 8군 휘하의 미 제1군단(미 제24사단, 국군 제1사단, 영 연방 제27여단으로 구성), 중앙에는 제 9군단(미 제25보병사단, 제2보병사단, 여단규모의 터키 전투단), 그리고 조금 동쪽으로 국군 제2군단(국군 제6사단, 7사단, 8사단),예비대로 미 제1기병사단과 영 연방 제29독립보병여단이 전개하고 있었다.
압록강을 도강하는 중공군 (安東) - 1950.10.14 -
1950년 10월 하순 Lin-chiang-Hesanjin 동쪽지역에서 미 해병 제7연대를 공격하기 위하여 준비 중에 있는 중공군 제4군 124사단 지휘관. 미 해병 제7연대에서 생포한 중공군 포로 "장진호 전투"에서 미 해병대 진지를 공격 중인 중공군
이때 미 해병대 병력과 육군 병력으로 구성된 미 제10군단(미 해병 제1사단, 미 제3사단, 미 제7사단)과 국군 수도사단과 제3사단을 주력으로 하는 국군 제1군단이 전개하고 있었다.
당시 동부전선을 담당하고 있는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은 "크리스마스 공세"의 공격개시일을 11월 27일로 정하고, 미 해병 제1사단에 '무평리'를 목표로 진격하여 제8군과 연결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미 해병 제1사단의 제5 및 제7연대는 11월 25일 '유담리'까지 진출한 후, 11월 27일 아침에 '유담리'에서 '무평리'를 향하여 공격을 시작하였으나,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공격이 저지되고 말았다.
11월 28일 11시. 양개 연대장(미 해병 제5 및 제7연대)은 '무평리'의 공격은 물론 현진지의 고수도 어렵다고 판단하고 '유담리'의 방어진지를 재편성하기로 합의하고 방어진지를 보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1월 30일에 UN군 사령부의 철수명령이 접수됨에 따라 양개 연대장은 12월 1일, 사단 사령부가 위치한 '하갈우리'로 철수하여 사단과 합류한 후 '흥남'으로 철수하기로 하였다.
미 해병 제1사단(1만 2,000명)은 서부전선부대와 접촉을 유지하려고 '장진호' 북방으로 진출하던 중 중공군 제9병단의 공격을 받고 7개사단 규모(12만 명)의 중공군이 포위망을 형성한 '장진호' 계곡을 빠져나오기 위하여 2주일 동안에 걸친 사투를 벌인다.
이 전투에서 미 해병 제1사단은 혹심한 추위를 무릎쓰고 '유담리'로부터 '진흥리'까지 40km가 넘는 협곡지대에 겹겹이 에워싸인 중공군의 포위망을 벗어나는 동안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UN공군(미 해병 제1비행사단의 근접항공지원기 Corsair 함재기)의 효과적인 근접 항공 지원하에 과감한 돌파작전을 전개하여 '흥남'지역으로 철수하는 데 성공했다.
3. 미 해병 제1사단
1st Marine Division insignia
"장진호 전투"의 주인공인 미 해병 제1사단은 1950년 10월26일 '원산'에 행정상륙한 후, 한국군 제3사단과 교대하고 "장진호(長津湖) 작전"에 투입된 11월2일 함흥 북방 '수동'일대에서 중공군 1개사단 규모와 충돌함으로써, "장진호 전투"에 돌입하게 되었다. 동부지역에서 중공군의 개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날 야간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미 해병 제1사단은 치열한 근접전투 끝에 중공군 700여 명을 사살하였으나 미 해병 제1사단도 많은 피해를 입고 중공군을 격퇴하고 진격을 계속하여 '진흥리'와 '황초령'을 거쳐 '고토리'를 점령했으며, 11월 16일에는 '장진호' 남단의 '하갈우리'를 점령하였다. Hagaru-ri,
'하갈우리'는 상륙항이었던 '흥남'으로부터 120km 떨어진 곳으로, 여기까지는 비교적 순조로운 진출이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한국의 지붕이라고 하는 '개마고원'지대로서 해발 고도가 1.000 - 2.000m의 '낭림산맥(狼林山脈)'을 따라가는 고산지대였다.
이로 인하여 '진흥리'부터 '장진호'를 연결하는 도로는 기복이 극심한 협곡도로로 인하여 전차의 통행이 불가능하였으며 오히려 우마차의 통행은 가능할 정도였다. 또한 이때부터 작전지역에 눈이 쌓였고 야간에는 수은주가 영하-35도까지 내려가는 혹한이 시작됨으로 인하여 지형과 추위에 익숙하지 못한 미군들에게는 큰 위협이 되고 있었다.
당시 미 해병 제1사단을 공격하고 있는 중공군 제9병단(제20,26,27군) 12개 사단은 11월 초순 '집안'에 도착, 곧 '압록강'을 넘어 '장진호' 방면으로 신속히 남진하여 서부전선에서 중공군의 1차공세를 통해 시간적 여유를 얻은 후 11월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때 '유담리'에 있던 미 해병 제1사단의 2개연대(제5 및 7연대)에 투입된 중공군은 4개 사단이었다.
서부전선에서는 중공군의 2차공세로 인해 미 제8군의 전선이 붕괴되자 UN군사령부는 11월 30일 전면 철수를 명령했다. 이에 따라 '유담리'의 해병 제5 및 7연대는 사단사령부가 위치한 '하갈우리'로 철수하여 사단과 합류한 후 '흥남'으로 철수하기로 했다.
11월 30일 미 해병 제1사단의 주력부대는 '유담리'에서 "돌파작전"을 시도하여 12월 2일에는 '덕동'고개까지 진출한 후, '하갈우리'로 향한 "돌파작전"을 실시했다. '하갈우리'에 도착한 해병 제1사단장 '스미스 '장군 휘하에 약 1만 명의 병력과 1천대의 차량이 있었다. 그러나 해병 제1사단의 '하갈우리'의 도착은 철수의 첫 단계에 불과했다. '고토리', 및 '진흥리', 그리고 최종목적지인 '함흥'까지는 여전히 갈 길이 멀었기 때문이었다.
미 해병 제1사단장 '올리버 P. 스미스' 소장(1893.10.26-1977.12.25)
4. 전투현황
미 해병 제1사단의 "장진호 전투"의 전투일지
중공군은 미 해병 2개연대에 대하여 4개사단을 투입하여 공격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이를 만회하기 위하여 '하갈우리'로부터의 미군 철수로 주변일대에 종전의 4개사단에 추가하여 5개사단을 투입했다. 또한 중공군은 '하갈우리', '고토리', 및 '진흥리' 도로상에, 주요 교량을 폭파하고 장애물을 설치하여 미 해병 제1사단의 철수에 치명타를 입힐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1) 미 해병 제1사단장(오리버 P. 스미스 소장)의 결의
이에 대하여 UN군측에서는 극동군 수송 사령관 '터너'(William H. Tunner) 장군이 해병 제1사단장을 방문하여 "모든 장비를 버리고 병력만이라도 공수철수를 할 것을 제의"하기도 하였으나, 미 해병 제1 사단의 스미스 사단장(M/G Oliver P. Smith)은 "해병대 역사상 그와 같은 불명예는 없었다"하며 이 제의를 거절하고, 육로철수를 결정했다.
당시 2차 대전의 경험이 있는 일당백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노련한 해병대원들과 '스미스' 사단장은 부대가 중공군에게 포위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직후 헬기로 포위지역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장병들과 생사를 같이 하겠다는 결의를 보여주었다. 이 같은 결심을 굳힌 사단장은 각제대가 철수준비를 하는 동안 장병들에게 "사단은 철수를 하는 것이 아니다." 후방의 적을 격멸하고 '함흥'까지 진출하는 "새로운 방향에 대한 공격이다"라는 유명한 말로 장병들의 전의를 고양시켰다. 이들은 철수 간 발생한 600여 명의 들것환자와 함께 부대건제를 유지한 질서있는 철수로 해병대의 용맹성을 과시했다.
그때 스미스 사단장은 이 작전이 후퇴작전이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후퇴라니! 우리는 새로운 방향으로 공격 중 "Retreat Hell! We're just attacking in another direction." 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때부터 미 해병 제1사단은 "후퇴가 아닌 새로운 방향으로의 공격"을 위한 긴 여정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12월 6일 '하갈우리'를 출발한 미 해병 제1사단과 미 보병 제7사단 1개 연대는 끝내 죽음의 통로를 통과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11일에는 최종 목적지인 '함흥'과 '흥남' 간의 집결지에 도착함으로써 14일간의 철수작전을 마치게 되었다.
이때 해병 제1사단은 전사 718명, 부상 3,504명, 행방불명 192명의 인명피해를 입었으며, 중공군은 전사 2,500명과 부상12,500명의 손실을 당했다. 이로 인해 중공군 제9병단은 4개월 동안 '함흥'일대에서 부대를 정비한 후에야 차후전투에 투입될 수 있었다.
(2) 전투성과
중공군의 '3차 공세' 저지 및 UN군의 반격의 기틀을 마련: 이 전투결과 중공군의 '함흥'지역 진출이 2주일 간 지연됨으로써 동북지방으로 진격하였던 국군과 UN군부대들이 '흥남'으로 집결할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되었으며, 곧 이어 개시된 "'흥남' 철수작전"도 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중공군 제9병단은 이때의 피해로 중공군 3차 공세에 참여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3차 공세는 후속병력 부족으로 전과를 확대하지 못하고 '수원'일대에서 멈출 수밖에 없게 됐다.
반면 국군과 U.N.군은 반격의 기틀을 마련하여 이후의 전장에서 다시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지휘관의 결단
이때 만일 미 해병 제1사단장이 UN군 사령부의 요청대로 모든 장비를 버리고 공수로 병력만 철수했으면 중공군 제9병단은 '수원'지역 일대에서 차후공격을 위하여 후속부대를 기다리고 있던 중공군의 주력부대에 합류하여 계속 남진했을 것이며 따라서 결과적으로 한국전쟁은 거기서 끝났었을 것이다.
이를 생각할 때 우리, 한국국민은 미 해병대뿐만 아니라 미 해병 제1사단장의 역경 속에서 대한민국을 위한 용기있고 올바른 결단을 했음을 잊어서는 안되며 또한 그에게 감사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Box 속에 수류탄이 들어 있음.
동부전선에는 1950년 10월 26일, '원산'에 행정상륙한 미 해병 제1사단은 한국군 제3사단과 교대하여 "장진호(長津湖)작전"에 투입된 11월 2일, '함흥'북방 '수동'일대에서 중공군 1개사단 규모와 충돌함으로써, "장진호 전투"에 돌입하게 되었으며 동부지역에서의 중공군의 1차공세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5. "장진호 전투"의 의의
실제로 대부분의 전사가들은 당시 낮에는 영하 20도, 밤에는 영하 32도까지 떨어지는 살인적 추위 속에서 만일 미 해병대가 무너졌다면 UN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때문에 "장진호 전투"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소련이 벌인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세계 2대 동계 전투이자 한국전의 10대 전투의 하나로 전사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때의 전투를 "The Battle of the Chosin Reservoir"라고 미군 전사에 기록되어 있다.
미 해병 제1사단이 "장진호(Chosin Reservoir)"지역에서 철수 중인 이때의 대기온도는 주간은 영하-20도, 야간은 영하-32도인 혹한이었다.
(1) 중공군 제9병단의 궤멸
한국전쟁에 투입된 중공군 사단병력은 서부전선에 18개사단, 동부전선에 제9병단의 12개사단이었다. 미 해병 제1사단과 맞섰던 중공군 제9병단은 12개사단 중 8개사단을 투입하여 해병사단의 철수를 포위 및 차단하였지만, 해병사단의 강력한 화력과 강인한 전투력에 의해 돌파를 허용했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인원손실을 입고 궤멸상태에까지 이르게 됨으로써 3월의 마지막 주간까지 4개월 동안 함흥일대에서 부대를 정비한 후에야 차후 전투에 참가할 수 있었다.
미 해병 제1사단이 철수과정에서 수송기로 철수하지 않고 정상적인 지상철수를 하면서, 부대건제를 유지하면서 중공군 제9병단에 가한 치명적인 손실은 중공군 전체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전반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중공군 제9병단은 이때의 피해로 인하여 "UN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느냐, 계속 주둔하느냐?"의 기로에 있었을 때에 1월 및 2월의 중공군 3차 및 4차공세(정월공세)에 참여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중공군의 3차공세는 후속병력의 부족으로 전과를 확대하지 못하고 '수원'일대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때 만일 중공군이 제9병단을, 중공군 전체병력의 40%, 투입하여 금강, 또는 대전선까지 진출하였다면, UN군은 또 다시 낙동강까지 철수하거나 또는 한반도를 포기할 가능성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공군의 자료를 분석해 본 바에 의하면, 미 해병 제1사단의 선전은 "한국을 구하는 결정적인 전투"로 평가될 수 있다는 것이다..
(2) 미국 대통령의 치하
2004년12월7일 조지 부시 미국대통령은 '진주만' 피습 63년을 맞아 이라크 파병 미 해병 제1사단의 본거지인 캘리포니아 주의 Camp Pendleton을 방문한 석상에서 한국전쟁 당시 해병 제1사단이 압도적인 중공군의 대부대(120.000명)에 대항하여 싸운 "장진호 전투"에 대하여 언급하며 이들의 용맹했던 전투를 치하한바 있다. 이때 중공군에 대항하여 전투한 병력은 UN군 20.000명(미 해병대 17.000명, 영국군과 미 육군 3.000명) 이었다.
(3) 미국 해병대의 증강.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의 미 해병대의 상비 병력수는 75,000명이었으나 1953년7월27일 한국전쟁이 종료될 당시에는 총병력수는 281,000명으로 증원돼 있었고 이들의 대부분은 예비역들이었다. 한국전쟁 중 미 해병대의 병력손실은 30,544명의 전사자와 부상자를 냈으며 기간 중 42명에게 미국 최고훈장이 수여되었다.
장진호(長津湖 Chosin Reservoir)의 전경
6. 한국 해병대(K.M.C.)의 혈맹 형제해병대, 미 해병대(Brother Marine U.S.M.C.)
우리는 형제 해병대(Brother Marine이라고 한국전쟁 중 우리는 서로 이렇게 불렀음)인 미 해병 제1사단의 한국전쟁 중의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한 희생이 어떠하였음을 이 내용에 수록되어 있는 사진들을 통하여 다시 깨달아야 한다. 또한 이들이 본일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이국땅, 한국에서 수많은 희생을 감수하면서 공산침략군에 대항하여 우리와 함께 싸운 결과가 오늘의 한국이 있게 되었음을 우리는 한시라도 잊지 말고 항상 감사할줄 알아야 한다.
특히 우리, 해병대는 한국전쟁 중 대부분의 전투기간을 미 해병대와 함께, 미 해병 제1사단의 작전통제하에서 전투하면서 미군들과 똑같은 장비에, 같은 군수물자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전투 시는 항상 충분한 화력지원뿐만 아니라 군수지원도 충분했기 때문에 해병들의 사기는 항상 충천되어 있었고 따라서 전투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이 해병대를 강하게 만든 이유 중의 하나로도 생각된다.
물론 거기에는 피나는, 실전을 방불케하는 훈련으로 단련된 정신력과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강건한 체력을 빼어놓을 수 없다. 결과적으로 이런 전투 환경과 조건 등이 한국 해병대가 "무적해병대", "귀신잡는 해병대""라고 호칭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로도 우리는 말할 수 있다.
한국 해병 제1연대
1951년대 초에 한국 육군에 배속되어 강원도 산악지대에서 전투하고 있었을 때의 해병 제1연대의 해병들은 강원도의 혹한을 먼저 염려하여야 했다. 후방지원이 원활하지 않아서 우리는 식사지원도 제대로 받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보급물자의 부족으로 추위에 떨어야했고 그때의 우리, 해병들의 모습은 거지꼴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때의 우리의 복장상태는 순거지였다. 그런 상태에서는 전투하는 것보다 먹고 생존하는 것이 더 중요했으니, 훗날에 그 어려웠던 때를 회상해 보니 그 당시의 한국 육군의 전투의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특기할 사실은 그로 인하여, 충분한 군수물자지원과 화력지원 등의 지원으로 우리는 1951년 6월4일부터 미 해병 제1사단 제5연대가 최초 가원도 '인제'북방에 위치하고 있는 "도솔산"공격목표에 대한 공격 중 인민군의 험준한 고지형을 이용한 완강한 저항으로 작전초기에 발생한 막대한 피해(500명)로 인하여 부대를 재편성할 수밖에 없게되었다.
이때 우리, 그들의 형제해병대인 해병 제1연대가 그들과 교대하여 10여 일 간의 혈투로 많은 해병들의 이 나라와 이 겨례를 위한 희생을 감수면서 "도솔산"공격목표를 점령한 우리, 해병들의 감투정신은 선배해병들을 통하여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뿐만 아니다. 서부전선으로 이동한 후의 '장단, 사천강지역'에서의, 특히 전초진지에서의 혈전에서는 미 해병대의 화력지원 특히 근접항공지원은 중공군의 개미떼같이 밀려오는 "인해전술"에 대항하여 전투해야했던 우리, 해병들의 전투의식에 무엇보다 큰 보탬을 주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해병뿐만 이 나라의 국민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해병 정신과 해병대 전통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해병 정신"과 "해병대 전통"은 이런 선배해병들의 희생 위에 세워졌으며 또한 이루어져 가고있다는 사실을 오늘의 해병들은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The U.S.Marine Corps in the Korean War.
The Korean War saw the hastily formed Provisional Marine Brigade holding the line at the Pusan Perimeter, then landing at Inchon and assaulting north into North Korea along with the Army. As U.S. forces approached the Yalu Rivr,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fearing an incursion by American forces, sent armies over the river to engage American forces within Korea.
At the Battle of Chosin Reservoir, the 1st Marine Division, vastly outnumbered but vastly better equipped and trained, fought Chinese forces in the winter of 1950. Although surrounded, the Marines regrouped, assaulted the Chinese, and inflicted heavy casualties during their fighting withdrawal to the coast. Following the Chosin Reservoir campaign the Marines continued to slug it out with Chinese and North Korean forces until the armistice was signed in 1953.
The Korean War saw the Marine Corps expand from 75,000 regulars to a force, by the end of the conflict in 1953, of 261,000 Marines, most of whom were Reservists. 30,544 Marines were killed or wounded during the war and 42 were awarded the Medal of Honor[5].
The 1st Marine Division participated in the amphibious assault at Inchon under the orders of General MacArthur. "The Old Breed" was the unit chosen to lead the Inchon landing 15 September 1950, adding one more PUC to its list of decorations. The fifth PUC was for the division's "attack in the opposite direction", fighting its way out of the Chosin Reservoir against seven Communist Chinese divisions. The Chinese suffered an estimated 37,500 casualties trying to stop the Marines' march out of the "Frozen Chosin". Battles between April and September earned the division its sixth PUC. During the Korean War the division suffered combat casualties of 4,004 dead and 25,864 wounded.
The withdrawal from Hungnam
On 8 December MacArthur ordered X Corps to evacuate through the port of Hungnam and redeploy to South Korea as part of Eighth Army. Given the size of the force and the near presence of the Chinese, the withdrawal had to be a carefully orchestrated event.
Setting up a special Evacuation Control Group, Almond directed the battle-weary 1st Marine Division to be evacuated first, from 9?5 December. It was followed by the ROK I Corps from 15?7 December, the 7th Infantry Division from 18?1 December, and the 3d Infantry Division from 21?4 December. All this occurred while coordinating shipping with the Navy Task Force 90, uploading thousands of tons of supplies, and maintaining a secure perimeter.
The withdrawal from Hungnam was accomplished successfully, despite all the potential dangers. The X Corps arranged for the withdrawal of over 105,000 troops; 18,422 vehicles; 350,000 tons of bulk cargo; and as a bonus some 98,100 refugees.
Naval gunfire support assisted in pulling off the maneuver with minimal enemy interference. The Navy and Army worked together as well to coordinate a massive demolitions plan to destroy any cargo too bulky or dangerous (like frozen dynamite) to move, along with the docks and port facilities.
The X Corps outloaded all its elements on a strict timetable and moved them by sea to Ulsan, just north of Pusan in South Korea, for refitting and redeployment to the front to help Eighth Army hold the line.
The last soldiers from the 3d Infantry Division embarked on their landing craft to the waiting ships on Christmas Eve 1950. As they left, the docks erupted behind them in a series of huge explosions.
The USS Begor lies off the port of Hungnam as demolition charges destroy the dock facilities on 24 December 1950. (U.S. Navy photograph
China's View of Their Korean War Paticipation.
In the mountainous terrain of North Korea during sub-zero winter conditions, along and in the hills surrounding a primitive road barely wide enough for a single modern vehicle to pass, the battle of Chosin Reservoir took place. It has been termed by historians as the most savage battle in modern warfare.
Chosin Reservoir campaign began on November 27 at Yudam-ni with Chinese Communist action against the 5th and 7th Marine Regiments on the west side of the reservoir. on the 28th, the battle commenced
throughout the 1st Marine Division sector. Approximately 20,000 allied troops (about 17,000 of them men of the 1st Marine Division) were attacked by 120,000 CCF whose orders were to annihilate the allies "to the last man."
This fierce, bloody battle, unparalleled in modern history, resulted in 15,000 allied casualties. 2,500 were killed in action, 5,000 were wounded in action, and 7,500 suffered severe frostbite and cold injuries. The enemy forces endured crippling losses. 40,000 were dead, and thousands more were down with wounds and frostbite.
The 1st Marine Division and attached units fought their way back into action a month later, while seven of the ten CCF divisions never entered combat again during the Korean War.
"Human Wave" Tactics
Western sources gave assertions such as "it seems reasonable to assume that China cannot have lost less than half a million men" , "China suffered at least 900,000 casualties", etc. However, such numbers were based on arbitrary estimates which were greatly inflated.
From official Chinese sources,
CCF casualties during the Korean war were 390,000. It breaks down as follows: KIA: 110,400 DIED OF WOUNDS: 21,600 DIED OF SICKNESS: 13,000 CAPTURED & MISSING: 25,600 WOUNDED: 260,000
From reports published by CCF on August 15 1953, the UN suffered total casualties of 1,093,839, in which 397,543 were Americans, 667293 were ROKs, and 29,003 were others.
From western sources, UN combat casualties totalled 1 million. It breaks as follows: US 144,173, ROK 844,000 (415,000 killed, 429,000 wounded), Commonwealth 6000, others 8,800 (Hastings). The US suffered another 20,000 or so fatality. From military history authored by ROK Defense Department, ROK total casualty was actually 984,400.
Detailed US casualties were: KIA 33,629, accidental death 20,600,wounded 103,248, captured and repatriated 3,746, MIA 8,142. The total count from both sources matched very well, some historians acknowledged that CCF was very honest in their statistics. However, CCF counted 220,000 more US casualties, and about 200,000 less ROK. This discrepancy was partly due to the fact that many ROKs were serving as attachments to US armies and they were counted as US force by PVA.
Why did ROK suffer such greater casualties? one of the reasons was that they were placed on the first line of defense in a lot of the cases, and they suffered the initial blows by PVA. Moreover, the ROK had different fighting style: from CCF battle accounts, Americans usually withdraw all the way down to the foot of the hills after suffering a failed attack, but the ROK only retreated out of range to regroup and attack again immediately, which caused great difficulty for PVA, and of course greater ROK casualties. However, western historians seldom mention the ROK's positive contribution to the UN side. |
Through out the Chosin Reservoir battle both the Army and the Marines had constant daylight support from aircraft of the Marine Air Wing.
This is a photo of the type of aircraft that the Marine Air Wing used. Without these pilots and aircraft the outcome of the battle could have had a different ending. These pilots did a very outstanding job.
# 아래의 사진들은 1950년11월27일부터 12월11일까지의 2주 간 북한 지역의 함경남도 '흥남' 북쪽 "장진호(長津湖 Chosin Reservoir)"지역까지 진출한 미 해병 제1사단 장병들이 중공군(120.000명)의 한국전 개입으로 '흥남항'까지 철수 중의 힘들고 어려웠던, 많은 희생자 발생, 장면 등을 그 당시 참전했던 미 해병대 장병 및 종군기자에 의해 촬영된 사진들로서 그 당시의 어려웠던 상황을 그대로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 "장진호"는 장진강(長津江)을 막아서 만들어진 호수(Reservoir)이 다.
'하갈우리'의 간이활주로(공사진척 40%) 물자수송 및 부상자후송에 사용됨 - 1950.12.6 -
'하갈우리' 간이활주로에 동체착륙한 미 해병대 수송기(C-47) 승무원은 무사했음.
'하갈우리' 간이활주로 지역에서 지원포 사격
'하갈우리' 간이활주로: 미 해병 제1사단은 '장진호' 지역에 진입과 동시에 전투의 계속을 위해 보급물자의 수송을 위한 수송기 이착륙장의 절대 필요에 의거 '장진호'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하갈우리'에 활주로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12월 6일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으로 UN군 사령부의 철수명령에 의거 철수하게 되어 공사진척이 40%정도인 '하갈우리' 활주로를 이용하여 C-47수송기편에 부상자 4,300여 명을 후송하였다. 이때 '장진호' 남쪽끝 일대 지역에는 약 10.000여 명의 병력과 UN구에 협력한 1.500여 명의 피난민, 그리고 1.000여 대의 차량들이 집결하고 있어서 매우 혼잡하였다.
동체착륙 후 연소하는 미 해병대 수송기 - '하갈우리' 간이활주로 -
'흥남'부두에서의 철수(1950.12)
이 '흥남'부두를 통하여 미 해군함정 및 선박들이 군병력외에 북한의 피난민 100.000명을 남한으로 후송하였다.
한국전쟁 중의 서울, 광화문 거리(중앙에 중앙청 건물이 보이고 있음.)
파괴된 서울역
7. "장진호(長津湖) 전투"의 영웅: 레이몬드 G.데이비스 중령(제7연대 제1대대장)
President Harry S. Truman, in the White House Ceremony on November 24, 1952, reads the citation accompanying Marine Lieutenant Colonel Raymond G. Davis' Medal of Honor. Davis' wife, Willa Knox and children Raymond G. Davis, Jr., Gordon and Willa look on. Photo from The Story of Ray Davis.
By his superb leadership, outstanding, courage and brilliant tactical ability, Lieutenant Colonel Davis was directly instrumental in saving the beleaguered rifle company from complete annihilation and enabled the two Marine regiments to escape possible destruction. His valiant devotion to duty and unyielding fighting spirit in the face of almost insurmountable odds enhance and sustain the highest traditions of the United States Naval Service.
— President Harry S. Truman, Citation on the Presentation of the Medal of Honor, 1952 --
Although wounded during the first hour of landing, Major Davis refused evacuation to remain with his Battalion's assault elements in many hazardous missions. on one occasion, when large gaps occurred in our front lines as the result of heavy casualties, and his right flank company was disorganized by point-blank enemy cannon fire following a successful nine hundred yard penetration through heavily defended lines, he rallied and personally led combined troops into these gaps to establish contact and maintain hasty defensive positions for the remainder of the night.
Despite many casualties from close-range sniper fire, he remained in the vicinity of the front line, coordinating artillery and Naval gunfire support with such effect that several determined counterattacks were repulsed. His outstanding courage, devotion to duty, and leadership were in keeping with the highest tradition of the United States Naval Service.
— John L. Sullivan, Secretary of the Navy, about events at Peleliu,
on the Presentation of the Navy Cross, 1945 --
Never a shouter, never profane, never a grandstander, Ray Davis expressed his thoughts with gentlemanly precision and razor-sharp logic, never closed his mind on a topic, ever remaining willing to re-open the dialogue or reconsider a decision. His soft-spoken guidance carried more authority than the strident bellowing of some other leaders.
— Major General Carl Hoffman, USMC (retired), c. 1995 --
Ray Davis is endowed with those qualities of mind and person which fit a Marine officer for command and which attract and stimulate the respect and enthusiasm of both his seniors and juniors. He is highly active, moves quickly and with confidence to the jugular of any problem, yet at the same time he is deferential, courteous, and extremely modest. He is equal to any occasion as it arises and, in my opinion, is preeminently qualified for, and should rise to, the top ranks of his profession. His duties have involved joint efforts with officers of other Services and high echelons of our own government.
— Brigadier General J.M. Masters, Sr., Asst. Chief of Staff, G-2,
Marine Corps Headquarters, fitness report, 1959 --
All of General Davis' community service accomplishments are too numerous to mention in their entirety, but suffice it to say he personifies the definition of a "public servant." His courage, devotion to duty, leadership, and lifetime of exceptionally meritorious service epitomize the true intent of the Medal of Freedom. In war and peace, as an active duty Marine and as a private citizen, General Davis' outstanding courage, unwavering devotion to duty, inspiring leadership, and sound judgment have represented the highest traditions of military service and citizenship. He is a true American hero.
— Senator Zell Miller (Georgia), nomination for the Presidential Medal of Freedom, 2003 --
Of the 50 or so division commanders I have known in Vietnam, General Davis has no peer. He's the best. — General Creighton W. Abrams, Jr. Commander,U.S. Military Assistance Command in Vietnam, 1968-72 --
Looking back over the years, I have come to realize what a tremendous individual he was. I think you will agree that he had a superb tactical ability—probably the finest division commander the Corps has ever had. I was fortunate enough to have seen him remotivate an entire Division so that it became a winning team.
— Colonel Dick Camp (retired), former aide to General Davis, c. 1995 --
미국 최고훈장(Medal of Honor) 수상자 레이몬드 G. 데이비스 중령
Wedding Portrait, 1942.
Gen. Raymond G. Davis
1915년 1월 13일 조지아 주 피츠제럴드에서 태어난 레이몬드 G. 데이비스 장군(Gen. Raymond G. Davis)은 1938년 조지아공대를 졸업 후 ROTC장교로 육군소위로 임관했으나 사임하고 해병대소위로 임관하여 미 해병대의 Basic School에 입교하여 해병대생활을 시작하였다.
'데이비스' 장군은 2차대전 당시 태평양 전선 '과달카날'과 '펠릴리우'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며 치열한 공방전 끝에 자신이 지휘하던 대대의 소대장 전원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했다.
이후 그는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장진호 전투"의 수훈으로 1952년 전쟁 기간 중 미국 의회의 이름으로 대통령이 수여하는 최고훈장인 "명예훈장(The Congressional Medal of Honor)"을 '트루만' 대통령으로부터 수여받았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6.25전쟁 당시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최고훈장"을 수여하였다.
'월남'전에 참전하기도 했던 장군은 해병 제3사단을 지휘하여 1969년 "수훈훈장" 등 총 20여개의 훈장을 수여받아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인물로 알려져 있디.
한국전 참전
한국전쟁 당시 미 해병 제1사단 소속의 중령으로 한국전에 참전한 '데이비스' 대장에 관한 일화가 있다. 당시 중령이었던 '데이비스' 대장은 1950년 8월 21일 아침 한국으로 파견되기 전 캘리포니아주 Camp Pendleton에서 출두명령을 받았다.
출두명령 2시간 후 미 해병 제1연대 제1대대장으로 임명되었으나 대대요원은 불과 수명밖에 없었고, 대대 막사로 예정된 전막에는 아무도 없었다. '데이비스' 중령은 기간요원을 모아놓고 대대장으로서의 첫 번째 훈시를 하게 되었는 데 그의 훈시내용은 당시의 긴급한 상황을 잘 말해 주고 있다.
"1개 대대를 편성하는 데 1주일 여유밖에 없다. 우리의 생애에서 이와 같은 중대한 책임을 맡게 된다는 것은 그렇게 흔히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대원의 60%는 예비역이다. 그 중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역전의 용사도 있지만 대부분은 경험 없는 예비역이다. 이들에게 전투준비를 시키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이것이 잘못되면 이들을 헛되이 죽게 하는 결과가 된다. 하루는 24시간뿐인데 우리는 그 24시간을 전부 사용하여야 한다".
이후 데이비스 중령이 지휘하는 미 해병 제7연대 제1대대는 1개월 후 '인천'에 상륙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반전된 1950년 12월 24일, '맥아더 '원수는 크리스마스 전에 전쟁을 끝내겠다며 "크리스마스 대공세"를 명령했다.
이에 따라 미 해병 제1사단이 '장진호' 쪽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이때 이미 중공군 제9병단이 은밀히 '장진호' 일대에 진입해 있었다. 중공군의 제9병단은 미 해병 제 1사단이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오도록 허용한 후 크게 포위해 공격했다. 뒤늦게 사지에 들어왔음을 알게 된 미 해병 제1사단은 방향을 바꿔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전투과정을 "장진호 전투"라고 미군 전사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때의 중공군과 미 해병대의 병력대치 규모는 10 : 1로서 중공군이 절대 우세하였다.
이 전투에서 미 해병 제7연대 제1대대장인 '데이비스' 중령은 '덕동'고개에서 중공군에 의해 포위되어 고립된 제2대대의 F 중대를 구출하기 위하여 병력을 인솔하여 구출작전을 감행하여 전멸위기에 있던 F 중대를 구출하였다.
"F중대의 혈전"
세계의 2대동기 전투의 하나인 "장진호(長津湖 Chosin Reservoir) 전투" 중 가장 치열했던 미 해병 제1사단제7연대제2대대 F중대가 중공군의 대병력의 포위 속에서의 혈투상황을 소개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음.
1950년11월26일∼12월2일 간 함흥북방 55km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장진호(長津湖)'지역일대의 영하 -30도(C)가 되는 혹한의 산악지대(1,500~1,600m의 눈 덮힌 산악지형)에서 미 해병 제1사단제7연대제2대대 F중대가 6박5일 간 중공군(제59사단 예하부대)에 포위되어 감행된 혈투상황.
Capt. William E. Barber
1. 상황 중공군 제9병단 예하 8개 사단(약 6만 명)은'장진호' 서북지역 일대에서 한만 국경선으로 진출 중에 있는 미 해병 제1사단을 포착, 섬멸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기하고 있었다. 미 해병 제1사단은 11월 25일 10:00, 해병 제5 및 7연대를 전방에, 해병 제1연대를 예비대로 하여 공격을 개시하여 '유담리'에서 '용림동'을 향하여 진출 중에 있었다.
2. 작전경과 11월 28일 '윌리엄 바버' 대위가 지휘하는 제F중대는 미 해병 제1사단의 주력 2개 연대가 적과 대치하고 있는 '유담리'와 예비연대 및 지원부대가 위치하고 있는 '하갈우리'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인 '덕동고개'에 대한 방어임무를 부여받고 눈덮힌 준령에 방어 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바버 '대위는 이날 오후, 중대원들이 계속된 전투와 혹한으로 지쳐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임무의 중요성과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중대원들을 독려하여 진지 구축 작업을 감행하였으며, 야음이 깔릴 무렵에는 각기 구축한 개인호에 들어가 적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적은 예상대로 야음을 이용하여 연대 규모 병력으로 공격해왔으나 중대원들이 용전분투한 결과 적은 450여 구의 시체를 유기한 채 물러갔다. 29일 아침, '바버' 대위가 전투 결과 보고와 함께 공중보급을 요청하였을 때, 대대장으로부터 중대는 즉시 현 위치에서 철수하여 남쪽으로 철수하게 될 대대와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바버' 대위가 판단하기에는 만일 그의 중대가 철수하게 된다면 '유담리'에 있는 2개 연대는 완전히 고립될 뿐만 아니라 '하갈우리'의 예비 연대 및 지원부대 역시 심각한 위협을 받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에 따라 '바버' 대위는 명령의 변경을 건의하기로 하고 무전교신을 시도했으나 교신이 되질 않았다. 그는 후일 명령위반으로 군법회의에 회부되는 한이 있더라도 '유담리'에 있는 8,000명의 병력이 철수를 완료할 때까지 '덕동고개'를 사수하기로 독단 결심했다.
그 후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유담리'의 2개 연대는 적의 강력한 압력에 봉착하였으며 '덕동고개'의 중대는 완전히 적의 포위 속에 빠졌다.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고 '바버' 대위도 다리에 부상을 입었으나 들것에 실린 채로 진지를 순회하면서 중대원들을 격려하였다. 이러한 '바버' 대위의 강인한 의지와 용기에 감동한 중대원들은 영웅적인 용기를 발휘하여 우세한 적의 포위망 속에서도 6일 간이나 '덕동 통로'를 확보하였다.
12월 2일 해병 제7연대제1대대가 '유담리'의 포위망을 돌파하고 천신만고 끝에 F중대와의 연결에 성공하였을 때 220명의 중대원 중 겨우 87명만이 피로 물든 '덕동고개'를 걸어나왔다. 바버 대위는 철수명령은 지키지 않았으나 사단 전체작전에 기여한 전공이 인정되어 후일 미국 최고훈장(Congressional Medal of Honor)을 받았다.
3. 교훈 중대장 '바버' 대위는 대대명령에는 위반했지만 그가 직접 당면한 상황을 볼 때 '유담리'에 남아있는 2개 연대의 우군에게 치명적인 결과가 초래될 것으로 판단하고 독단으로 유일한 철수로의 확보를 계속했다. 직접 대치하고 있는 지휘관은 그가 수령한 명령이 명령하달 후의 상황 변동 때문에 시행이 어렵고 또한 명령의 수정건의를 할 수 없을 경우에는 적절한 독단행동을 취해야 한다.
(1) '덕동고개' 점령 '유담리'-'하갈우리'를 연결하는 도로는 암석으로 된 단 하나뿐인 일차선도로이며 대략 중간지점에 '덕동고개'라는 중요한 요충지가 있고 노면은 동결된 상태였다. 이 도로는 '유담리'의 2개 연대 전투단으로서는 유일한 보급로였다. 미 해병 제1사단은 이 도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덕동고개'와 그 서북방 약 3km 떨어진 무명고지에 보병 1개 중대(F중대)를 배치하여 방어임무를 부여했다.
11월27일 11시30분, '하갈우리'의 제7연대제2대대 F중대장('바아버' 대위)은 '덕동고개'로 전진하여 진지를 점령하고 주보급로를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F중대장은 각 소대장을 동반하고 현지에 미리 가서 지형을 정찰하고 '덕동산'의 서남방 약 1km 떨어진 '신흥리' 도로 북쪽고지에 진지를 선정했다. 저녁 때 중대주력이 도착하여 바로 진지구축을 시작, 21시경에 진지편성을 마치고 대기하고 있었다.
이 무렵, 중공군 제79 및 제89사단은 '유담리'에 대하여 공격을 개시하고 있었고, 제59사단은 '유담리'와 '덕동고개' 사이의 도로를 차단하고 F중대진지에 접근하고 있었다. '덕동고개' 서북쪽 무명고지는 제7연대제1대대 C중대(1개 소대)가 점령하고 있었다. C중대진지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은 28일 02시 30분부터 시작되었다.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서 날이 밝았을 때는 이미 C중대는 전사 15명, 부상 44명이나 되었고 완전히 포위되어 1419고지의 중공군으로부터 감제당하고 있는 상태였다. 무전기도 파괴되어 코르세아전투기의 지원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60밀리박격포탄도 다 소모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자 28일 저녁때 제7연대제1대대가 도착하여 C중대를 구출했다. 그러나 이 대대는 F중대 위치까지는 도착하지 못했다. F중대도 28일 02시 30분경부터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수일간 포위되어 분전하면서 고개를 확보하고 있었다.
(2) '덕동고개'부근의 전투 '유담리'-'하갈우리' 간의 최대 요충지인 '덕동고개'는 27일 저녁부터 미 해병 제7연대제2대대 F중대가 점령하고 있었다. 중대장 '암 E. 바아버' 대위는 11월 7일에 중대장으로 임명되어 겨우 20일이 지났을 뿐이었다. 그는 1940년3월에 해병대에 입대하여 공정부대의 병사로 2년 간 근무한 후 태평양전선에서 일본군과 싸웠고, 1943년11월 소위로 임관했다.
그 후 '유황도'에서의 전공으로 '은성훈장(Siver Star Medal)을 받은, 전투경험을 통해서 단련된 베트란 장교였다. '바아버' 중대장은 '덕동고개'의 진지점령'시 천막설치를 뒤로 미루고, 즉시 진지구축을 개시하도록 했다. 복장이나 무기 손질에 대해서는 특히 엄격하고 꼼꼼했다. 이때 중대에는 제2대대 화기중대의 중기관총반과 81mm 박격포반이 배속되어 있어서 그 병력은 240명이었다. '하갈우리'에 있는 미 해병 제11포병연대제3대대의 H포대(105mm 곡사포)가 이 중대를 직접 지원하도록 되어 있었다.
F중대는 고지 정상에서 북쪽을 향해서 1개 소대(2개 분대를 1선,·1개 분대를 2선)를, 서쪽과 동쪽방향으로 각각 1개 소대(각각 3개 분대 병력)를 배치하여 '아치'형의 중대진지를 편성했다. '아치'의 다리 부분은 반사면이었는데, 이 부분은 중대본부와 3.5"로케트포반으로 연결됐고, 그 아래 도로 가까운 곳에 중대 지휘소와 60mm 및 81mm 박격포를 배치시켰다. 81mm박격포는 북서쪽의 암산에 대해서 시험사격을 실시했다. 그러나 '하갈우리'의 105mm포는 '유담리'에서 '하갈우리'로 가는 제1자동차수송대대의 차량종대가 08시가 좀 지날 때까지 엔진 소리를 내며 고갯길을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위험하여 시사를 하지 못했다.
이때 하늘은 맑고 달빛은 밝게 비쳤으며 기온은 영하-29도였다. 이 무렵 중공군 제 79 및·제89의 2개 사단이 '유담리'에 대해 공격을 개시하고 있었다. '중공군 제59사단은 '유담리'와 '덕동고개' 사이의 도로를 차단함과 동시에, F중대진지로 육박해 오고 있었고 1개 연대는 소리도 없이 이미 F중대의 진지를 포위하고 있었다.
F중대 3소대장은 01시가 좀 지나 진지를 순찰했는데, 돌처럼 얼어붙은 진지에서 수하하는 자가 없었다. 곧 분대장을 집합시켜 호통을 쳤다. "너희들은 왜 멍청히 잠만 자고 있느냐, 눈을 크게 뜨고 경계하라." 그러나 분대장들이 병사들을 흔들어 깨우기도 하고 발로 차기도 하며 "정신 차려 경계하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02시경, 소대장이 다시 순찰을 했을 때는 각 진지에서 활기있게 수하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무렵 '유담리'방향에서도 격렬한 공방전의 총포성이 울리고 있었다.
28일 02시 30분, 약 1개 중대의 중공군이 갑자기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난사하면서 북, 서, 남 등 세 방향에서 F중대를 공격해 왔다. 북방으로부터 능선을 따라서 돌격해 온 중공군 때문에 북쪽을 향해 배치되어 있던 약 2개 분대의 해병들은 어느 사이에 많은 사상자(35명중 27명)를 내고 후방 돌출부에 위치하고 있던 2선 분대지역으로 철수함으로써 고지 정상은 중공군에 의해서 점령되고 말았다. 이 공격과 동시에 중공군은 서측방과 서북방으로부터도 돌격해 왔다.
이때 2소대의 '카페라다' 일등병은 얼어서 마비된 발을 문지르려고 침낭 안에서 신을 벗고 있었는데, 중공군의 돌격 소리를 듣고 양말 바람으로 뛰어나와 호 속에 우뚝서서 소총으로 침착하게 조준사격을 했다. 10명 이상을 쏘아 넘어뜨렸을 때 소총이 작동되지 않았다. "소총을 달라"고 소리치는 그에게 호 속에 넘어져 있던 부상병이 장전된 소총을 건네 주었고, 그는 돌격해 오는 중공군을 차례차례 쓰러뜨렸을 뿐 아니라 또한 날아오는 수류탄을 되돌려 던지고 발길을 차내면서 분전했다. 새로운 병력을 계속 투입하여 끊임없이 수류탄을 던지며 전진하는 중공군 병사와 이를 되받아 던지며 분전하는 해병대원 간의 치열한 근접전투가 도처에서 전개되었는데, 해병들은 더 이상 중공군의 돌격을 허용하지 않고 끝까지 진지를 사수했다.
그러나 중공군은 다시 진지 남쪽의 도로방향으로부터 북으로 공격을 개시하여 60mm박격포반의 반장 이하 10명을 살상하고 중대지휘소로 육박해 왔기 때문에 중대장은 지휘소와 박격포를 경사면위로 이동시켰다. 도로방면에서 경사면을 올라오며 공격하는 중공군에 대해서는 미리 배치한 중기관총사격과 수류탄으로 저지했다. 60mm와 81mm박격포반의 하사관들이 모두 전사 또는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박격포는 일등병이 통합지휘하여 전투를 계속했다.
중대장 '바아버' 대위는 적탄을 무릅쓰고 각 병사들의 진지로 뛰어다니며 전투를 지휘하고 대원을 격려했다. 동측방에 위치하고 있던 1소대는 거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 270도 정면에서 펼쳐진 전투는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날이 밝자 1소대는 그 주력으로써 산정을 향해 역습을 실시하여 본래의 저항선을 회복했다.
06시 30분경에 전투는 거의 끝났는데, 그때까지 중대의 피해는 전사 20명·부상 54명으로 약 31%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중공군의 유기시체는 약 450구나 되었다. 이 무렵 중대의 수류탄 보유량은 극히 소량이었고 박격포탄도 10발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중대는 해병들의 사상자와 중공군 전사자가 가졌던 화기,·탄약,·수류탄을 주워 모으는 한편, 공중보급을 요청했다. 부상자를 모두 천막에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눈 속에 구멍을 파고 그 안에 침낭을 깔아서 수용하고 교대로 난방시설이 된 천막에 들어가게 했다. 위생병은 몰핀(진통제) 주사약을 입에 물고 녹여 가면서 부상자 구호를 위해 뛰어다녔으나, 혈액이 얼어서 수혈을 못 해 구제되지 못한 부상자도 있었다.
오후 늦게 해병대의 R5D기가 박격포 탄약과 위생기구를 공중투하했으나 진지밖에 떨어진 탄약도 많았다. 주변의 고지에 대해서는 '코르세아기'에 의한 지상공격과 '하갈우리'로부터 포병의 엄호사격이 실시되었다.
28일에는 '하갈우리'와 '유담리'로부터 F중대에 대한 증원부대가 투입되었는데, 모두가 강력한 중공군부대에 의해서 차단되어 '덕동고개'에는 도착하지 못했다. 28일 밤, F중대의 배치는 전날 밤과 같았으나 진지에 배치된 인원수는 30%나 줄어 있었다.
'하갈우리'의 포병은 밤 중에 F중대진지 주변의 중공군에 대해서 요란사격을 가했고, 81mm박격포는 진지 동북방의 바위산에 , 60mm 박격포는 진지 북방의 안부에 대해서 사격을 가했다. 주간에 철수하여 재편성을 실시하고 있던 중공군 제59사단은 일몰후 다시 행동을 개시하고 있었다. 22시 30분경, '하갈우리'방면에서 격렬한 포성이 들려 왔다. 중공군 제58사단이 공격을 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29일 02시 15분, 중공군의 한 부대가 북쪽의 3소대에 대하여 박격포사격을 가한 후 공격해 왔다. 이어서 서북측과 서측 정면으로부터 전면적인 공격을 가해 왔다. 40명 내지 50명의 중공군이 북쪽의 3소대진지를 돌파하여 진내에 돌입해 왔다. 진내에 들어온 중공군은 모여서 무언가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이때 해병들은 경기관총을 후방으로 돌려 이들을 순식 간에 섬멸하고 말았다. 그러나 아직도 북방으로부터의 압박이 강해서 1선부대는 20m 정도 철수했다. 중대장은 왼쪽 무릎에 관통상을 입었으나 부하의 부축을 받아 앉은 채로 지휘를 계속했다.
20일 아침, 3소대는 역습으로 주저항선을 탈환했다. 전날 밤의 손실은 해병측이 전사 5명·부상 29명이었으며 중공군측의 전사자는 200명 이상이었다. 날이 밝은 후 F중대는 진지 주위에 낙하산을 돌려 놓아 표시를 했다. 해병대 수송기는 이것을 표적 삼아 정확한 투하로 탄약 등을 보급했다.
미 해병 제6관측기인 헬리콥터가 SCR-300과 SCR-619 무전기의 건전지를 투하했는데 동체와 기수에 총격을 받았다. 공군의 C-119기 '훌라잉 박스'에서 투하된 보급품은 진지 서방 500m 지점에 떨어졌으나 낮에는 적의 사격 때문에 회수할 수가 없어서 밤에 포병의 엄호사격을 받으면서 회수했다. 이렇게 하여 박격포의 탄약,·수류탄,·C-Ration,·커피 등을 수령했다. 모포와 들것도 보내 왔기 때문에 중상자들을 땅 위에 재우지 않아도 되었다. # C-119기 '훌라잉 박스': 쌍발·쌍동의 중형 수송기, 1947년 초 취항, 적재능력 13.6톤, 62명 수송 가능, 주로 공수부대 작전용
그날 오후 중대장은 분대장 이상을 모아 다음의 훈시를 했다. "'유담리'의 제5 및 제7연대는 포위되어 격전 중에 있으며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다. 지난 28일 밤, '하갈우리'진지도 강력한 공격을 받아 포위되어 '고토리'와 차단되었다. 이러한 상황이기 때문에 우리 중대가 증원을 받을 가능성은 없다. 앞으로는 보다 더 강력한 공격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인지뢰와 조명지뢰를 전방에 매설하여 진지를 강화하라. 우리는 해병대답게 싸운다는 것만을 생각하면 된다."
29일 밤은 조용했으나, 30일 02시경, 중공군이 영어로 소리를 쳤다. "F중대 제군은 포위되어 있다....중공군은 따뜻한 옷을 주고 잘 대우한다. 즉시 항복하라"고 했다. 이에 대해서 중대는 그 대답으로 박격포 조명탄을 쏘아 올리고 기관총탄을 퍼부었다. 30분후 약 2개 중대의 중공군이 착검을 하고 도로의 남쪽으로부터 돌격해 왔다. 중대는 주간의 공중보급 덕분에 충분한 탄약과 수류탄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박격포로 조명하고 기관총사격과 105mm곡사포의 시한탄사격, 그리고 수류탄투척으로 적을 완전히 격퇴하였다.
30일, 헬기콥터가 무전기의 건전지를 가져 왔고, 수송기가 탄약 등을 공중 보급했다. 중대는 처음으로 예비탄약을 가질 여유가 생겼다. 저녁 때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4시간 사이에 7∼8센티미터가 쌓였다. 중공군은 4정의 기관총을 '사북방' 바위산에 거치하여 밤 중인 01시가 좀 지나 사격을 가해 왔다. 중대는 박격포로 조명을 하면서 105mm포로 사격을 했는데 다행히 처음에 사격한 포탄 4발이 명중하여 일거에 중공군을 격멸했다.
12월 1일, 중대장은 중공군의 공격이 없었기 때문에 중대원의 긴장이 해이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중대지역을 청소하도록 명령했다. 쓰레기와 깡통은 파묻고 부상자의 장비는 한곳에 모아 정돈하였으며, 전사자의 시체는 나란히 누이고 모포로 덮었다. 척후를 북방으로 내보냈으나 중공군의 사격으로 거의 전진하지 못했다. 항공기와 박격포의 간단없는 공격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은 호 속에서 이 공격을 잘 견디어 내고 있었다.
12월 1일 밤, 중공군은 산발적으로 장거리포 사격을 가해 올 뿐 별다른 공격은 없었다. 이날 밤 '유담리'로부터 1개 대대(제7연대제1대대)가 대대장의 지휘하에 쌓인 눈을 밟으며 적 진지를 돌파하여 F중대를 구출하기 위해 달려오고 있었다.
2일 아침, 구원대대가 접근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된 중대장은 대대장에게 필요하다면 안내병력을 내보내겠다는 뜻을 무전으로 송신했다. 제1대대장은 그 기분을 이해하겠으나 그럴 필요는 없다고 응답해왔다. 2일 11시 25분, 제1대대는 F 중대의 진지에 도착하여 중대를 구원했다.
F중대는 5일 동안 밤낮으로 완전히 포위된 상태에서 불과 240명으로서 중공 제59사단의 맹공을 견뎌 냈고 적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혔던 것이다. F중대의 피해는 약 47%로서 전사 26명·부상 89명, 행방불명 3명이었으며 특히 장교 7명 중에서 부상당하지 않은 장교는 1명뿐이었다. F중대 진전에서 발견된 중공군이 유기한 시체는 1,500구에 달했다.
F중대는 덕동고개를 고수함으로써 약 1주일간 중공 제59사단의 주력 2개 연대를 끌어들여 '유담리'진지에 대한 압력을 완화시킨 결과가 되었다.
중공군은 병력의 우세만을 믿고 "인해전술(Human Wave Tactics)"로 이 작은 방어진지를 돌파하려고 용감하게 돌격을 되풀이했으나 끝내 돌파할 수가 없었다. F중대가 최후까지 건재하여 그 목적을 달성한 요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특히 중대장 '바아버' 대위의 강인한 의지, 적절한 지휘, 전대원의 왕성한 사기와 단결, 필승의 신념, 보·포·항공의 효과적인 화력지원의 협조체제, 및 충분한 보급 등은 빼놓을 수 없는 점일 것이다. 더욱이 '바아버' 대위와 '카페라다' 일등병에게는 미국 최고훈장(Congressional Medal of Honor)이 수여되었다.
자료출처: "장진호 전투(덕동고개 전투)": 한국전쟁 전투사(12)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이 작전은 결과적으로 미 제10군단이 성공적으로 1950년 '흥남'철수를 실시할 수 있도록 결정적으로 중요한 산악통로를 개통시켰다.
특히 "장진호 전투"에서 Cohen 군목(대위)은 장교들이 중공군과의 격전 중에 전부 쓸어진 것을 보고 행정요원들을 모아 마지막 역습 돌격을 감행하여 중공군에게 점령된 고지를 재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미 해병 제1사단은 결사적으로 포위 추격하는 중공군과 매서운 추위(낮에는 -20도 밤에는 -32도), 그리고 엄혹한 굶주림 속에서 상당수의 대원을 잃고 간신히 '흥남'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100.000여 명의 북한 피난민들과 함께 '흥남'부두에서 미 해군의 함정과 선박을 이용하여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장성 아들들
이 "장진호 전투"에 미 해병 제1비행사단장 '피일드 해리스' 소장의 아들 '해리스' 중령도 참전했었는 데 애석하게도 전사했다. 한국전쟁 중 미군 장성아들 142명이 참전했었는 데 그 중 3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했다. 미 제8군 사령관이었던 '밴프리드' 장군의 아들은 B-26기의 조종사로 한국전쟁에 참전했었는 데 전사했다.
9. 레이몬드 G. 데이비스 중령의 공훈
미국 전사(戰史)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 중의 하나로 기록된 "장진호 전투"에서 미 해병 제1사단이 중공군 12만 명을 막지못했다면 대한민국의 운명은 바뀌었을 것이며 이 전투의 한 가운데에 바로 타계한 '데이비스' 장군이 있었다.
10. The Chosin Few(생존자협회)
"장진호 전투" 이후 이 전투애서 생존한 장병들의 모임(미국 캐나다 호주)을 "초신 퓨(Chosin Few)"라고 부르며 이들은 세계 52개 지역에서 그때의 생존자들과 그들의 가족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이 단체(Chosin Few 생존자협회)는 1984년 회원 6.000명으로 결성되었다. 또한 한국 전쟁 이후 미국에서는 "장진호 전투"에 관한 수기(手記)가 여러 차례에 걸쳐 출판(12 종류)되기도 했다. 지금도 "장진호 전투"에 관한 내용의 수기들이 계속 출판되고 있다.
# Chosin 은 '長津'을 일본어로 발음한 데에서 유래되었는데 이것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은 일본에서 제작한 한국지도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 해병대도 미군과 같은 전술지도(50.000분의 1)를 사용하였다.
11. 노년의 레이몬드 G. 데이비스 장군
'레이몬드 G. 데이비스' 장군은 여생을 불우한 재향군인을 돌보는 일과, 한미 유대강화를 위해 헌신했다. 특히 '워싱턴' 소재 '한국전 참전용사 위령공원' 건립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으며 '한국전쟁 50주년 기념사업회'회장직을 수행했다. 그외에 그는 1991년 '평양'을 방문하여 원탁회의에 참석했으며 또한 2002년에는 한국전쟁 중에 전사한 미군유해 회수를 위한 미국정부의 대표로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인 "자유 향유의 댓가"에서 한국민들에게 다음과같이 말했다.
"자유를 위하여 싸우는 사람은 혹독한 고난과 영웅적인 희생을 통해 강력한 힘을 향유하는 것이며, 평화란 진실로 힘을 통해서만 가능해 지는 것이다.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평화만을 고집하던 자들의 목소리가 국민의 의지를 약화시켰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이런 지적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궁굼할 따름이다.
한국전쟁 당시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수많은 한국민을 공산군으로부터 구출하여 자유를 찾게한 미 해병대 예비역 대장, '레이몬드 G. 데이비스' 장군(Gen. Raymond G. Davis (Ret.))은 심장병(Heart attack)으로 2003년 9월 3일 조지아 주 '칸여스' 소재 '카운티 병원'에 입원 3일만에 8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미 해병대 사령관 '마이클 W. 해기' 대장, '젤 밀러' 상원의원, 죠지아 주 '선니 풀듀' 주지사외에 수백명의 퇴역군인들(Veterans)이 참석하여 그의 타계를 슬퍼했다.
Gen. Raymond G. Davis 미 해병대 부사령관 - 1971.3,12 -1972.3.31 - '레이몬드 G. 데이비스' 중령
Gen. Raymond Gilbert Davis U.S.M.C, (Ret)는 ROTC 출신으로 1938년 6월 27일 해병소위로 임관 후 1938년 6월 T.B.S.(The Basic School Philadelphia Navy Yard)에 입교, 졸업 후 최초 근무는 태평양함대 소속 항공모함 USS Portland (CA 33) 해병파견대에 배치되어 함상근무로 시작하여 1941년 8월 중위로 진급, 1942년 2월 대위로 진급, 1943년 10월 소령으로 진급, 1944년 10월 중령으로 진급하여 2차세계대전, 한국전쟁(미 해병 제1사단 제7연대 제1대대장 및 제7연대 부연대장), 그리고 월남전(해병 제3사단장)에 참전하였다.
1953년 10월 대령으로 진급, 1963년 7월 1일 준장 진급, 1966년 11월 소장 진급, 1970년 중장 진급, 1971년2월 23일 미국 Nixon 대통령에 의해 대장 진급과 동시에 미 해병대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971년 3월 12일에 상원의 승인을 받았다.
특히 한국전쟁 중에는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전멸의 위기에 있던 해병 제7연대 제2대대 F 중대를 같은 연대의 제1대대장이었던 '데이비스' 대대장이 병력을 이끌고 구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막대한 인원 손실이 예상되었던 2개 해병연대의 탈출을 가능케 한 공로로 1952년 11월 24일 미국 '트루만' 대통령으로부터 백악관에서 미국 최고훈장인 "Medal of Honor"를 수여 받았으며 한국정부로부터도 그의 한국전쟁 중의 공로로 한국의 최고훈장을 수여 받았다.
특히 그의 진급과정에서 독자들(해병대 장교)이 눈여겨 보아야 할 내용은 중령에서 대령진급은 그의 최고훈장(Medal of Honor)수상에도 불구하고 9년이나 걸렸으며 그의 장군진급도 10년이 걸렸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는 독자들의 현명한 판단에 맡긴다.
미 해병 제1사단이 중동부전선으로부터 서부전선(임진강 너머의 서북쪽지역, 판문점 포함)에 배치되어 중공군과 전투할 때 '데이비스' 중령은 제7연대 부연대장이었다. 이때 한국 해병 제1연대는 미 해병 제1사단의 작전통제하에 좌일선연대로 배치되었으며 이에 대한 내용은 blog.empas.com/marinekslee 해병대 전투에서 자세히 설명되어 있음.
'데이비스' 장군(Gen. Raymond G. Davis)은 1963년에 장군 진급을 했으며 월남전에는 미 해병 제3사단장으로 참전하여 '월남정부'로부터 월남 최고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장군은 미군 전사상 가장 많은 (서훈)훈장을 받은 장군이다. 1971년 대장진급과 동시에 미 해병대 부사령관(1971.3,12-1972.3.31)으로 임명되었으며 그 직을 끝으로 퇴역하여 그의 34년 간의 군생활을 마감하였다.
미 해병 제3사단의 격전지(월남 케산지역)를 다시 찾은 '데이비스' 장군(좌측)
한국전기념사업회 주관 한국전기념행사에 참석한 '김영삼' 대통령과 '빌 크린턴' 미국 대통령 중앙 기념사업회의장인 '레이몬드 G. 데이비스' 대장(퇴역) - 1995년 -
노년의 레이몬드 G, 데이비스 대장(퇴역)
"[After I retired] Knox knew that I would find another career in which I could once again honor the work ethic which had driven me while overseas and Stateside, in war and peace: to do whatever I could to improve the quality of life of my fellow man, whether in the Service of our country, or in my home state of Georgia." — General Raymond G. Davis --
Raymond Gilbert "Ray" Davis (January 13, 1915-September 3, 2003) was a highly decorated United States Marine Corps commissioned officer, serving in World War II, the Korean War and the Vietnam War.
His single most notable endeavor was the salvation of hundreds of trapped American troops during the 1950 Battle of Chosin Reservoir while commanding the 1st Battalion, 7th Marine Regiment, for which he was awarded the Medal of Honor.
His final rank, appointed by President Nixon, was General. He retired from the post of Assistant Commandant of the Marine Corps on March 31, 1972, after more than 33 years with the Marines. Davis had a close relationship with Chesty Puller, serving with him on Guadalcanal and in Korea.
Davis was born on 13 January 1915, in Fitzgerald, Georgia, and graduated in 1933 from Atlanta Technical High School, Atlanta, Georgia. He then entered the Georgia School of Technology, graduating in 1938 with a Bachelor of Science degree in Chemical Engineering.
While in college he was a member of the Reserve Officers Training Corps unit. After graduation, he resigned his commission in the U. S. Army Infantry Reserve to accept appointment as a Marine second lieutenant on 27 June 1938.
12. 미국 최고훈장(Medal of Honor)수여자
"장진호 전투"에 참전하여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혁혁한 공을 세운 장병 17명에게 미국정부로부터 미국 최고훈장( Medal of Honor)이 수여되었다.
장교 9명: 해병대: 중위 2명 대위 2명 소령 1명 중령 1명
육군: 중령 2명
해군: 소위 1명
부사관 및 병 8명: 해병대: 부사관 5명 병 3명
미국 최고훈장(Congressional Medal of Honor)
13. 기타
미국 군별 최고훈장(Medal of Honor)
한국전쟁 중 미국 최고훈장 수여자 수
[군별][장교][하사관][병] 계
해병대 12 11 20 43
육군 18 24 35 77
해군 2 5 7
(조종사) (위생병)
공군 4 4
총계 131
한국전쟁 참전국 인원손실 현황
"Marines know that they can rely on other Marines."
— General Raymond G. Davis --
Despite early victories in liberating South Korea from its northern aggressors, U.N. troops suffered dramatic set-backs in November and December 1950, as Chinese troops attacked from the north.
In the Chosin Reservoir of North Korea, the U.S. Marines encountered overwhelming enemy forces, and one outfit, Fox Company, had been cut off from its allies.
After three unsuccessful attempts to liberate the surrounded rifle company, Colonel Litzenberg of the 7th Marines turned the matter to Lieutenant Colonel Raymond G. Davis.
Marines move through the Chosin Valley. |
Given 20 minutes to plan his mission, Davis gathered his troops, stripped them of all but the most essential supplies, and set out over icy ridges to extricate the isolated company from its position surrounded by enemy forces.
Under nearly constant fire from the Chinese and in temperatures of 20 degrees below zero and lower, Davis led his company to Toktong Pass, securing a vital passage for the stranded company.
For his heroism he received the Medal of Honor.
Two years after the battle, at a White House ceremony to award the Medal of Honor, President Harry S. Truman presented a citation, commending Davis for "his superb leadership, outstanding courage and brilliant tactical ability."
The citation also acknowledges Davis' personal valor in circumstances that would test any military man:
Marines moving out of the Chosin Valley. |
Always in the thick of fighting, Lieutenant Colonel Davis led his battalion over three successive ridges in the deep snow in continuous attacks against the enemy and, constantly inspiring and encouraging his men throughout the night, brought his unit to a point within 1500 yards of the surrounded rifle company by daybreak.
Although knocked to the ground when a shell fragment struck his helmet and two bullets pierced his clothing, he arose and fought his way forward at the head of his men until he reached the isolated Marines.
The success of this mission and the capture of Toktong Pass allowed the safe evacuation of two regiments of Marines and more than 100,000 North Koreans fleeing communist dictatorship.
Although commended for outstanding leadership, Davis credits the victory to his men. In his description of the events in The Story of Ray Davis, he writes:
Marines rest in the Chosin Valley. |
Throughout this lengthy ordeal on a mission which only they thought could succeed, I heard not one complaint from my troops. What motivated them? First, Marines were in trouble and we would rescue them. Then, some of the units in our formation
had themselves been rescued on prior days and were en route to return the favor. Marines know that they can rely on other Marines |
Leadership From Top Down
"Guadalcanal had to happen, but not Korea," said Gen Davis, when he was well into his 80s and emphasizing the need for national preparedness. The war in Korea was invited by downsized American forces, which eventually pursued a defensive no-win posture and settled for a draw.
"In Vietnam we also made partial commitment and never supported our forces. It was a total disaster; our limited commitment led to the destruction of our limited will to win, [and] 58,000 American lives [were] lost in a war that should not have happened."
Col Warren H. Wiedhahn, USMC (Ret), a close friend of Gen Davis who had known and served with the general since the Chosin Reservoir days, said, "There was much that Ray Davis accomplished that was not under the gun. In manpower [at Headquarters, U.S. Marine Corps], dealing with Marine allocations worldwide, he was hailed in his Legion of Merit citation for augmenting the scope of personnel processing in the whole Marine Corps."
A tour as Commanding General, Marine Corps Development and Education Command (MCDEC), Quantico, beginning in July 1970, gave Davis an opportunity to oversee "the whole panoply of education and development and right some wrongs."
His last active-duty post, Assistant Commandant of the Marine Corps, began on 12 March 1971. As a four-star general, he had enough experience to know what was going on and had the trust and confidence of the Commandant of the Marine Corps.
All in all, Davis said he had never concentrated on promotions. When promoted to brigadier general in 1963, he said, "Promotional chances were minimal; I just waited for the ball to bounce."
Davis closed 34 years of active service as a Marine on 31 March 1972 at 1000 in Washington, D.C. That same day at 1400, he was pledging loyalty in Atlanta as executive vice president of the Georgia Chamber of Commerce.
Gen Davis was an active traveler and supporter of veterans and their causes, often returning to battlefields long past, such as Khe Sanh in what was once the Republic of South Vietnam. (Photo courtesy of Cyril J. O'Brien) |
"Oh, he loved Georgia, even bought land near Atlanta when a second lieutenant to assure he'd settle there when the battles were won," recalled Col Wiedhahn. "He never stopped working for his family, friends, veterans."
Close to the family? Raymond Gilbert Davis Jr. told how he collapsed at the close of a long-distance race in France. "Dad caught me before I fell. I didn't even know he was there.
"While Dad was in Paris, Mom and Dad used off-duty [time] to take us all over Europe."
Ray Davis considered veterans a breed apart. GEN Claude "Mick" Kicklighter, USA (Ret), former Assistant Secretary, Department of Veterans Affairs, said of Davis, "No matter what the official business, he'd also bring the cause of veterans or a veteran to the top levels of government, agenda or not."
Gen Davis' strong initiative as chairman of the Presidential Commission for the Korean War Memorial stemmed partially from his "unhappiness with the Vietnam Veterans Memorial." Its emphasis, he said, was on the fallen with less consideration for the hundreds of thousands who served with honor and survived.
"The Korean War is no longer a forgotten war, but in fact a forgotten victory which our memorial will document and celebrate for all time to come."
Struck by a massive heart attack, Gen Davis passed away on 3 Sept. 2003 at age 88. He is buried in Forest Lawn Memorial Garden in College Park, Ga. However, Gen Davis will live on in history as truly one of the giants of the Corps.
Editor's note: Cy O'Brien served as an infantryman in a rifle company in the 3d Marines on Bougainville. He was later a combat correspondent on Guam and Iwo Jima. Following WW II he spent 12 years in the Marine Corps Reserve, retiring as a captain.
그는 퇴역 후에도 각종 비영리 민간단체를 통한 국가와 사회를 위한 헌신으로 민간인에개 수여되는 최고훈장인 '자유훈장'(The 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미국정부로부터 수여받았다.
The Chinese Failu e at The Chinese Failure at Chosin
By: Patrick C. Roe, Major, USMC (Ret) Chairman, Chosin Few Historical Committee
NOTE: The following article is from the talk given at the Chosin Few Reunion in Portland in August.(1996)
Information contained in the article is based on translations of some of the Chinese histories published in the past ten years and on information on the Chinese operations complied by intelligence sources during the Korean War and which have been recently declassified.
The Chinese hesitated to intervene in the Korean War until after the Inchon Landing. Party officials, led by Mao Zedong, agonized over the decisions, finally agreeing on October 2nd to act. Difficulties in mobilizing the troops and a further halt when the Russian reneged on their agreement to provide air support, delayed the entry of Chinese troops until October 20th.
The initial Chinese plan was to move into Korea, develop a defensive base in the central mountain region of North Korea, and hold a line across the peninsula from Chongju to Hamhung. The Chinese planned to hold that line through the winter while the Russians re-equipped the Chinese army with modern weapons and equipment. Then, in the spring, re-trained and equipped with modern weapons, they planned to launch and offensive that would drive all UN forces from Korea.
By the 20th of October as Chinese began to cross the river, the 8th Army had secured Pyongyang and commenced a drive north across the Chongchon River to the Yalu border. Unable to reach their planned positions in time, the Chinese collided with the 8th Army north of the Chongchon on October 25th. In nine days of heavy fighting the Chinese inflicted serious damage on the 8th Army and forced it to withdraw south of the Chongchon.
On the eastern side of the peninsula two ROK divisions had seized Wonsan on October 10th and were advancing north. Mao Zedong assumed they would continue north through the Chosin Reservoir area, then turn west. To protect the left flank of the Chinese forces facing the 8th Army the 42nd CCF Army was detailed to cross the mountains, move south, and engage the ROK divisions. It was the leading element of this army, the 124th CCF Division which we encountered at Sudong on November 3rd.
Mao Zedong had expected the 1st Marine Division to land at Chinampo, the port for Pyongyang, and was surprised to find it, with the 7th Infantry Division, landing on the East Coast. Realizing he needed more strength in the east, Mao ordered the 9th CCF Army Group under General Song Shilun, consisting of 150,000 men in twelve divisions, to move into Korea, cross the mountains and "seek opportunities to destroy the four divisions on the east."
The 9th Army Group began moving into Korea on November 5th. The 20th Army, four divisions, was to cross from Manpojin to Yudam-ni and, initially, cover the routes across the mountains leading to the west. The 27th Army followed, moving east to Changjin town and covering the route north. The 26th Army moved last, crossing at Linjiang and taking up positions between Linjiang and Huchang as army group reserve, and defending against any advance down the Yalu River by the 7th Infantry Division.
By November 12th General Song had devised a plan to attack and destroy the two leading regiments of the 1st Marine Division, the 7th and 5th. The remainder of X Corps could then be annihilated, one by one. General Song sent his plan to Mao for approval.
In reply Mao said: "The American Marine First Division has the highest combat effectiveness in the American armed forces. It seems not enough for our four divisions to surround and annihilate its two regiments. [You] should have one to two more divisions as a reserve force. The 26th Army should be stationed close to the front."
The 9th Army Group was to attack in coordination with the Chinese forces in the west on November 25th. But, due to delays in getting into position the attack was not commenced until the 27th of November. By that time the forces were disposed as follows:
At Yudam-ni four battalions of the 89th Division were to hold the road against our attack west. The 79th Division would attack from the north, possibly with one regiment of the 94th Division. The 59th Division would cut the road south of Yudam-ni and hold Toktong Pass. At Hagaru-ri the 58th Division would attack from the southwest and over-run the town.
The 60th Division would cut the road between Hagaru-ri and Koto-ri and over-run Koto-ri. East of Chosin the 80th Division, with one regiment of the 81st attached, would attack and destroy the army forces there.
By the 29th General Song realized his offensive was not going well. The forces at Yudam-ni had been unable to break into the perimeter. That evening he changed his plan and shifted his principal effort to the 31st RCT east of the reservoir. The two additional regiments of the 81st Division were committed to the attack, with, possibly, an additional regiment from the 94th Division.
The climax of the battle, although not realized by either side, came on December 2nd. By that time the 5th and 7th Marines were breaking through at Toktong Pass and would reach Hagaru the following day. While the Chinese forces East of Chosin had shattered the 31st RCT, the Chinese themselves had been reduced to ineffectiveness. Five of the eight Chinese divisions committed to the initial attack were, for all practical purposes, out of action and two more were badly battered.
At Yudam-ni the 79th and 59th Divisions were out of action. East of Chosin the 80th and 81st were unable to participate further in the campaign. At Hagaru the 58th Division had been virtually destroyed by its attacks on the perimeter. The 60th Division had been sufficiently weakened it was unable to mount an attack on Koto-ri, and the 89th Division had taken serious losses.
The heavy casualties the Chinese suffered from ground and air action were compounded by the cold. The terrible cold was at once our own worst enemy and our greatest ally. Chinese combat power was greatly weakened by the awful losses the poorly clothed Chinese suffered from frostbite and exposure.
And, compounding the weakening of the Chinese forces by combat and cold was the failure of their logistic system. In two or three days of fighting most Chinese units had used up the meager allotment of ammunition they had carried when they crossed the river, and were beginning to suffer shortages of food.
So, on December 2nd, General Song Shilun ordered the 26th Army south from the Huchang River to take over the attack on Hagaru-ri. Movement of the 26th Army was slowed and delayed by air attacks. Further, according to one of the Chinese histories, some elements got lost in a snowstorm.
The 26th Army was unable to reach Hagaru and launch an attack on the 5th. Advanced elements did reach East Hill and attempt to hold that. And, on the night of December 6th, at the 1st Marine Division was attacking toward Hagaru-ri, advance elements of the 26th Army did attack the column but were unable to organize a coordinated attack.
The last barrier was the Funchillin Pass. In desperation Mao Zedong ordered Song Shilun to send the remnants of the 58th and 60th Divisions south to cut us off there. Attack of the 1st Marine Division to seize the pass initially met moderate resistance. But the night of December 8th was one of the coldest of the campaign. Brisk winds whistling through the pass brought the windchill factor to new lows.
That night many Chinese froze to death in their foxholes, and fearful injuries from the cold inflicted many more. The final barrier was breached. By the 11th all units had reached Hamhung and were commencing to embark.
At Hamhung the remnants of the 9th CCF Army Group were joined by the reorganized 3rd North Korean Corps. Neither was strong enough to mount an attack. As the Chinese history puts it, the "conducted on the spot surveillance of the enemy."
The Chinese history admits that non-combat losses from cold were extraordinarily heavy. one Chinese source puts them at 40,000 for the 9th Army Group. This is partially confirm!ed by an estimate of 10,000 cold casualties in the 26th Army. Combat losses were also heavy.
The Marine history estimates 25,000 killed by air and ground action and another 12,500 wounded. This is almost the exact reverse of the usual ratio of killed to wounded, but in that vicious cold, with little medical help available to the Chinese, even a minor wound could be fatal. The total losses in the 9th Army Group could have been as much as half the entire force.
On the 17th of December when Mao heard the story of the volunteers who froze to death at the Funchillin! Pass he sent a cable to show his "deepest sorrow" for those who die of bitter cold.
The X Corps Command Report gives a total of 9,675 battle casualties. Non battle casualties are not given for the entire corps. In the 1st Marine Division there were 3,561 battle casualties and 3,349 non battle casualties, mostly from cold. All five of the divisions involved at Chosin were either in action again or ready for action by the middle of January.
The Chinese had commited divisions in Korea, eighteen in the west, the twelve divisions on the 9th Army Group in the east. The exceptionally severe losses inflicted on the 9th Army Group kept all twelve of those divisions, forty per cent of the available Chinese forces, out of action until the very last week in March.
Had those twelve divisions been available for the Chinese Third and Fourth Phase attacks in January and February their presence could have been decisive. The war might have ended then and there.
It can be fairly said that the 1st Marine Division, with the 31st Infantry RCT and 41 Commando, supported by the 1st Marine Air Wing, the fast carriers of Task Force 77, and with an assist from the 5th Air Forces and the Third Infantry Division, played a decisive role at Chosin. We gave up the ground, but we may well have saved the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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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국사편찬연구소 Institute for Military History(한국전의 10대 전투)
http:// futurekorea.com.kr.
Harry Truman Library
미 해병대 군사문헌
oldmar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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