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承晩과 朴正熙의 화해
朴正熙대통령기념사업회 주최 조찬강연회 강연문 - 趙甲濟
800년 만에 등장한 군인 정권
이 강연 제목이 좀 이상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습니다. 李承晩과 朴正熙 두 사람이 언제 싸웠느냐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신데, 제 나름대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흑인이 당선되었습니다. 미국에서 흑인이 마음 놓고 투표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최근입니다. 1964년 존슨 대통령 시절에 민권법이 통과되고 그 다음 해에 투표권법이 통과되어 남부지방에서 여러 가지로 제약을 받으면서 투표를 못하던 흑인 등이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헌법에서는 투표권이 보장되었으나 그 전엔 흑인들의 투표율이 한 20~30%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링컨 대통령에 의해서 노예해방이 1860년대에 이뤄졌으나 그 후 100년이 지나서 비로소 흑인들이 마음 놓고 투표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의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미국의 민주주의도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성장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절대로 뻥튀기처럼 하루아침에 완성될 수 없습니다. 건국 대통령 李承晩, 건설 대통령 朴正熙, 이 두 분은 독재자가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의 개척자인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한국에서 군인이 대통령이 된 것, 군인이 집권자가 된 것은 흑인이 미국에서 대통령이 된 것보다도 훨씬 더 어렵고 드문 일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군인이 집권자가 된 것은 삼국시대였습니다. 그 때는 전쟁이 많은 시절이니까 지도자들이 다 군인들이었습니다.
고려 초에 科擧 시험 제도가 들어와 글을 잘 아는 사람들이 지도층을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사람들의 발호가 심해지고 군인들을 멸시하니까 군인들이 들고 일어나 무신난(武臣亂)을 일으켰습니다. 12세기 초 고려시대 일입니다. 무신정권은 100년 만에 끝났습니다. 그 뒤 朴正熙 대통령이 등장할 때까지 약 800년 동안 한국은 글을 잘 아는 사람, 선비라고도 하고 사대부라고 하기도 하고 양반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집권을 했습니다. 그 결과는 文弱과 분열과 식민지化였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성공은 군인이 집권해서 나라를 약 30년 동안 운영했다는 점을 빼놓고는 설명이 안 되는 부분입니다.
국군은 1961년 5·16혁명이 났을 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조직이었고 동시에 가장 선진된 조직이었고 가장 개방적인 조직, 즉 해외 유학자가 가장 많은 조직이었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5·16 군사혁명이 일어났을 때 군 장교단 약6만 명 중 약10%가 해외 유학경험을 갖고 있었습니다. 외무부 공무원보다 높은 비율이었습니다. 1953년의 예를 들면 민간인 해외유학자는 600여명, 장교들이 900여명이었습니다.
우리 국군의 건설자는 李承晩 대통령입니다. 李대통령이 만든 국군, 그 국군이 1950년대에 전쟁도 하고 戰後에 군현대화 계획을 통해서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 장교들이 느꼈던 여러 가지 모순점, 군대 안에서 느꼈던 모순, 그리고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면서 느꼈던 어떤 울분, 이런 모순 구조 속에서 바로 5·16 군사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보면 국군을 매개로 하여 李承晩 대통령과 朴正熙 대통령이 연결됩니다.
두 분의 화해라는 제목을 설정한 이유는 이렇습니다. 지금 한국에서 朴正熙 대통령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70%, 많을 때는 한 80% 됩니다. 여론조사를 하면 요새는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 거의 압도적으로 朴正熙 대통령이 되고 있습니다. 세종대왕이 2등으로 밀렸습니다. 그런데 李承晩 대통령은 아예 논외로 되고 있습니다. 랭킹 10위 안에도 들지 않습니다. 20위 안에도 들지 않고 있습니다. <시사저널>이라는 잡지가 조사한 우리 민족사의 위인들 랭킹이 있습니다. 지식인 상대로 조사했는데, 이승만이 박지성 선수보다 낮게 나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李承晩의 업적
눈에 보이는 朴正熙의 업적
최근 한 20년 동안 좌파세력이 득세해서 한국 현대사를 부정하는 교육과 선동을 하는 과정에서 물론 朴대통령도 많은 공격을 당했습니다만,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기 위해서 논지를 전개하다 보니까 李承晩 대통령한테 그 공격이 집중되었습니다.
그러나 朴대통령이 만든 것은 눈에 보입니다. 고속도로도 있고, 현대중공업도 있고, 새마을 사업에 의한 농촌의 변화도 있고, 거대한 항만도 있고 그래서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어요. 朴대통령 시절에 활동했던 분들이 아직 살아계셔서 적극적으로 책을 통해서, 여러 가지 활동을 통해서 朴대통령을 지켜냈습니다. 그러나 李承晩 대통령이 하신 것은 대부분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농지 개혁이라든지 교육확충이라든지 韓美 동맹이라든지 이런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눈에 보이는 것의 대부분은 朴대통령이 만들었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대부분은 李承晩 대통령이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李承晩 대통령이 만든 것은 안보이니까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런 것들을 설명해줘야 될 이들이 지식인이고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고 또 李承晩 대통령의 직계가족이고 또는 그분의 정치이념을 이어받은 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분들의 활동이 상당히 미약합니다. 李承晩 대통령은 국내 좌파와 북한 정권의 선전선동에 농락당하고, 일본 사람들도 朴대통령은 존경을 하지만 아마 李承晩 라인, 평화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李承晩하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미국도 李承晩 대통령한테 하도 혼이 나서 그런지 평이 좋지 않습니다. 완전히 사면초가, 아니 오면초가에 빠진 분이 李承晩 대통령이라고 생각합니다.
朴대통령은 李承晩 대통령의 업적이 없었으면 대통령이 될 수도 없었을 것이고 대통령이 된 뒤의 근대화도 그렇게 성공적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李承晩 대통령 시절에 만든 여러 가지 한국의 근본, 그것이 결국은 朴正熙라는 시스템운영의 귀재를 만나 근대화로서 꽃피우게 되었습니다. 이승만이 만든 韓美 동맹이 있었기 때문에 1960년대에 우리는 군사비 지출을 최소화하면서 경제개발에 집중할 수가 있었습니다. 李承晩 대통령의 농지개혁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계급적 구조가 타파되었습니다. 그리고 교육확충이 있었기 때문에 근대화의 시기에 열심히 일할 수 있는 人力이 예비 되어 있었습니다. 朴대통령의 성공은 李承晩 대통령이라는 존재를 무시하고는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朴대통령의 성공 덕분에 李承晩 대통령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가능합니다.
예컨대 張勉 정부 같은 아주 허약한 정부가 계속 되어서 한국이 월남화가 되었다든지 한국의 수준이 예컨대 말레이시아나 태국 정도가 되었으면 李承晩 대통령을 우리가 자신 있게 위대한 지도자였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두 사람은 보완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李承晩이 있었기에 朴正熙가 있었다
朴正熙는 李承晩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었습니다. 군사혁명을 먼저 생각한 시점이 1959년, 1960년 李承晩 대통령 말기였고 그때는 정권의 부패가 심했습니다.
제 짐작으로는 朴대통령이 집권을 오래 한 다음에는 아마 李承晩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많이 좋아졌을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李承晩·朴正熙 두 분을 역사적으로 통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朴대통령의 위대성은 李承晩 대통령의 위대성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역사의 흐름은 단절될 수가 없습니다. 鄧小平은, “毛澤東은 위대한 중국의 지도자였다. 그러나 한 70% 정도는 잘했지만 30% 정도는 잘못했다. 그 30% 정도가 바로 문화대혁명이다. 문화대혁명은 內亂이었다.”라고 엄중하게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70%의 잘한 점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모택동 동지의 정신을 계속 이어 가야 된다.”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이런 통합적인 역사관이 아니라 毛澤東을 격하시켰더라면 鄧小平의 개혁개방은 공산당 내부의 분열을 불러 반드시 실패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鄧小平式 역사관과 金泳三式 역사관을 비교해서 여러 번 글을 쓴 적도 있습니다. 1993년에 집권한 金泳三 대통령은 그 앞 정권의 전통성을 깡그리 부정했습니다. 국가 정통성이 상해임시정부에서 바로 자신의 문민정부로 이어진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문민정부? 지식경제부?
더구나 절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文民정부라는 표현이었습니다. 文民이라는 말 자체가 일본에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군대는 정부가 아니냐, 군인은 사람이 아니냐, 군인은 정부 안에 들어와서는 안 되는 존재냐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저는 평생 글로 먹고 산 사람이라 용어에 대해서 민감합니다. 어떤 조직이 어떤 作名을 하느냐 어떤 용어를 쓰느냐에 따라서 ‘아, 저 사람의 철학은, 가치관은 이런 것이다’라고 생각을 하면서 예측도 해 보고 합니다. 예컨대 올해 李明博 대통령이 취임사를 하면서“한반도에서 이제 이념의 시대는 끝났다”라는 취지의 얘기를 했습니다. 저는 그날 바로 어디서 강연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李明博 대통령이 이념의 시대는 끝났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직도 이념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한반도에서 절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만약 이 노선을 가지고 가면 반드시 좌익의 도전에 직면할 것이다. 아직도 한 겨울인데 이제 봄이 왔으니까 옷 다 벗고 러닝셔츠 바람으로 바깥에 가서 뛰어놀자 하고 문을 열고 나가면 어떻게 되겠느냐.”
이 예언은 그 뒤 촛불 난동 시위에 의해서 증명이 되었고 그 이후 대통령은 “이념이 필요 없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정부에 지식경제부라는 명칭을 가진 부서가 있습니다. 지금 광화문에 나가서 아무나 붙잡고 “당신 지식경제부가 뭐하는 부서인지 아느냐?”라고 물으면 정확하게 답하는 사람이 10%도 안 될 것입니다. ‘지식경제부’를 영어로 어떻게 번역하느냐 ‘Ministry of Knowledge Economy’입니다.
Knowledge Economy라고 하니까 미국사람들이 “혹시 Knowledge and Economy 아니냐? 이게 무슨 뜻이냐”라고 묻고 있습니다. 지식경제부는 과거 산업자원부 아닙니까? 더 거슬러 올라가면 상공부 아닙니까? 지금 정부부처 이름에‘상(商)’자‘공(工)’자가 없습니다. ‘무역’이 없습니다. ‘자원’이 없습니다. ‘상, 공, 무역, 자원’이 없다. 즉 실물경제를 담당하는 부서가 명칭으로 보면 없습니다.
이런 作名의 배경 심리를 짐작할 수가 있죠. ‘商, 工’하면 손에 기름때가 묻고 망치 들고 하는 이런 게 연상되기 때문에 우리 공무원들은 점잖게 펜대를 돌리는 사람들이지 商工이라고 불리면 자존심 상한다. ‘자원’도 그렇다. 그러니까 점잖은 말 쓰자. 요새 ‘지식’,‘IT’ 이런 말들이 유행하니까 지식경제부로 바꾸자. 이렇게 된 것 아니겠습니까? 요새 工高,·商高란 이름이 없어지고 정보학교 뭐 이런 식으로 바꾼 것 하고 똑같은 식입니다. 문서상으로는 실물경제를 맡은 부서가 없는데 실물경제를 살릴 수 있느냐 하는 데에 대해 상당히 의구심이 드는 것입니다.
李承晩 대통령은 군대를 만들고, 朴대통령은 군사혁명을 해서 군사문화를 우리 사회에 확산시키면서 한국사회를 능률적인 사회로 만들고 유신 때의 구호처럼 ‘국력의 조직화, 능률의 극대화’를 통해서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역사 전체를 보면 李承晩?朴正熙라는 두 분은 극히 예외적인 존재입니다.
그럼 예외적이 아니고 정상적인 사람은 누구냐. 한국의 지난 천년 동안의 정치사회 생리에 맞는 사람들이 누구냐. 그 사람들이 바로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으로 대표되는 소위 민주투사들, 민간정치인들이죠. 지난 천년 동안 우리는 실천, 건설, 생산이 아니라 뭘 많이 안다는 것을 가지고 권력을 행사하고, 사소한 데 목숨 건 黨爭을 벌이고, 위선적 도덕주의를 凶器로 사용하는 文民정치의 역사를 이어왔습니다. 요사이 민주투사들과 좌파들이 벌이는 정치의 본질은 조선조의 연장입니다.
저는 좀 심플하게 한국은 좌파정권 600년에 우파정권 60년이다, 이런 표현을 씁니다. 조선조 600년에, 대한민국 60년이란 이야기이지요.
좌파의 공통점
좌파와 주자학은 관념적입니다. ‘도덕’을 중시합니다. ‘명분’을 중시합니다. 반대로 ‘상업·공업·군사·과학·기술’을 아주 낮춰봅니다. 그것이 계급서열로 요약이 되면 ‘사(士), 농(農), 공(工), 상(商)’이 되는 것이지요. 朴正熙 대통령의 위대한 점은 복잡한 것을 간단하게 요약하는 능력입니다. 박충훈 씨의 회고록에 의하면 朴대통령은 ‘士, 農, 工, 商’을 ‘商, 工, 農, 士’로 바꿔야 된다. 즉 무역하는 사람이 가장 대우받고 다음에 제조업자, 그 다음은 농사꾼, 그 다음에 ‘士’자들. 그 분이 말하는 ‘士’자는 주로 기자, 지식인, 야당정치인 뭐 이랬을 겁니다. 교수들을 포함해서….
역사 드라마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조선조의 관념적(좌파적) 정치생리는 金泳三 정부 이후에 한국의 주류적인 정치생리로 부활하였습니다. 명분론, 도덕론 그리고 비판의식, 도전하는 것, 법을 부수는 것 이런 것을 미덕이라고 생각하고, 건설하고 생산하고 법질서를 지키겠다는 이런 건설파를 극복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이런 풍조가 다시 살아나 지난 20년 동안 한국사회를 휩쓸었던 것입니다. 이런 知的 풍토에서는 李承晩?朴正熙같은 실용주의자들이 욕을 먹게 되어 있습니다.
李承晩에 의해서 한국의 우파정권이 열린 것입니다.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라는 게 바로 우파정권 아니겠습니까? 국민이 안전하게 먹고 살고 자유를 누리도록 하는 것을 국가 목표로 삼은 나라가 대한민국이고 대한민국은 그래서 우파국가입니다.
깽판·건달세력 對 건설·생산세력
저는 한국사회를 다소 무리가 있지만 一刀兩斷(일도양단)해서 비교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저는 한국은 깽판세력, 건달세력과 건설세력, 생산세력의 대결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건설하고 생산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시대를 연 것이 李承晩·朴正熙 두 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士(사)’자로 상징되는 정치인과 지식인 사회에서는 아직도 비판과 저항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을 숭상합니다.
이는, 식민지 통치를 많이 받았든지 아니면 봉건적인 전통이 아직 남아 있어서 무엇인가를 바꿔야 되는, 뒤집어야 되는 것이 필요한 사회에서 통용이 되는 비뚤어진 가치관입니다. 우리는 그런 시대를 이미 멀리하고 선진국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음에도 아직도 역사적 인물을 평가할 때 저항과 비판을 가장 중요한 잣대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 인물관의 연장선상에서 앞으로 발권될 오만 원짜리 십만 원짜리 고액권에 한국 자본주의 건설자인 李承晩·朴正熙 두 분은 빠지고, 김구·신사임당 두 사람이 들어가게 된 것이죠. ‘한 나라가 어떤 수준의 나라냐?’ 하는 것을 구분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면 ‘그 나라의 국민들은 누구를 기리느냐’ 또 ‘그 나라 국민들은 누구를 敵(적)으로 생각하느냐’ 이것일 것입니다.
김정일,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그리고 신채호, 김구 이런 사람들을 기리고 李承晩·朴正熙 같은 사람을 미워하는 수준의 지식인 사회를 아직도 가지고 있는 곳이 대한민국입니다.
20세기 ‘10대 성공한 지도자’ 반열에 오를 분들
‘李承晩·朴正熙 두 사람을 세계사 속에서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하는 걸 가지고 두 달 전 한 점심식사 자리에서 논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분이 20세기의 성공한 지도자들을 내년도 달력에 넣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럼 누구를 넣을 것이냐, 논의를 해 보자. 이렇게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달력에 넣을 것이니까 귀감이 될 사람이어야 되지 않겠느냐. 아무리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더라도 레닌, 스탈린, 히틀러, 모택동은 안 되는 것 아니냐 해서 그런 사람들은 빠졌습니다. 그 사람들이 지도했던 나라가 지금 잘 되고 있어야 될 것 아니겠느냐, 현재를 기준으로 해야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나라가 큰 나라가 되어야 한다. 인구 10만~20만의 작은 나라는 좀 곤란하지 않겠느냐 이렇게 되었어요. 그래서 꼽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미국에서 한 사람을 꼽자. 미국에서는 프랭클린 루스벨트나 레이건 두 사람 중에 한 사람 하면 될 것이다. 그것은 간단하게 끝났습니다. 저는 트루먼이 오히려 뽑혀야 된다고 주장을 했지만 총 한 방 안 쏘고 공산세계를 붕괴시킨 레이건으로 결정됐습니다. 영국에서는 윈스턴 처칠과 대처 두 사람 중에 한 사람. 요새 기준으로 대처로 하자. 일본에서는 누구냐? 戰後에 일본 민주주의를 만든 요시다 수상. 프랑스는 말할 것도 없이 드골. 독일은 아데나워 아니면 콜 수상이다. 한 사람은 통일이고 한 사람은 통일의 기반을 만든 사람이다. 중국은 鄧小平. 인도는 누구냐? 간디는 정치인이라고 볼 수 없고 그 분은 운동가였고, 역시 네루 아니겠느냐. 세계에서 가장 큰 12억 인구의 민주주의가 소란스럽게 굴러가게 만든 네루가 아니겠느냐 이렇게 됐습니다.
그러면 한국이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당연히 들어가야 된다. 경제력이 13위고 또 20세기를 식민지로 출발해서 20세기가 끝날 때는 민주화된, 一流국가 직전에 있는 국가가 됐으니 뽑아야 된다. 그럼 누구냐? 당연히 李承晩·朴正熙 두 분 중에 한 사람이 들어가야 된다.
아프리카에서도 한 사람이 있어야 되지 않느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만델라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때는 나세르 같은 사람들이 영웅이었지만 이집트를 성공한 나라로 볼 수 있느냐? 없다.
아주 영웅적으로 나라를 세우고 지키고 있는 이스라엘에서는 누구를 뽑아야 되느냐? 건국의 아버지 벤구리온인데 이스라엘을 우리가 과연 모범국가로 볼 수 있느냐? 아직도 아랍과 저렇게 싸움박질을 하고 하는데 우선 이스라엘은 제쳐야 된다. 그럼 李光耀(이광요)가 들어가야 될 것 아니냐? 이광요는 여기 들어가면 안 된다. 왜냐? 이광요의 싱가포르를 우리가 민주국가로 볼 수 없지 않느냐.
이슬람 국가群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한 터키의 國父 케말 파샤가 들어가야 한다. 이렇게 됐습니다. 자연스럽게 李承晩?朴正熙 두 분이 ‘세기적 지도자’다, ‘세계적 지도자’라는 것이 증명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李承晩 대통령의 홍보자문을 하셨던 올리버라는 사람이 1994년 <월간조선>에 글을 썼는데 이분의 첫 마디가 “李承晩 대통령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정치지도자였다”라고 했을 때 제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때만 해도 저는 朴正熙 대통령에 대한 취재를 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李承晩 대통령에 대해서는 상당히 무지했습니다. 그로부터 14년쯤 지나서 자연스럽게 저는 올리버의 평가에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사의 가장 큰 인물: 朴正熙, 李承晩, 金春秋
그러면 우리 민족사에서 이 두 사람의 위치는 어떠냐? 이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고대국가인 삼국시대부터 계산합시다. ‘인물이 크다’는 것은 한반도를 뛰어넘는 시각을 가져야 되죠? 한반도만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보고 주변 국가를 보면서 국가의 進路를 정확하게 잡은 사람이 누구냐? 이렇게 치면 의문의 여지없이 저는 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朴대통령. 朴대통령은 개방정책을 썼고, 한국 사람이 세계에서 활동할 수 있는 무대를 제공하고, 한국을 세계적 공업 국가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개방적 세계화 전략을 쓴 사람이죠.
李承晩 대통령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李承晩 대통령에 대해서 가장 나쁜 평을 하는 사람은 주로 미국 사람들입니다. 특히 무초 대사는 6·25때 李 박사와 여러 가지 갈등도 많았습니다. 무초가 1970년대 초에 미국에서 은퇴한 분들을 인터뷰를 해서 자료로 남기는 오럴 히스토리 프로그램에서 李承晩 대통령에 대해 죽 증언한 내용 중에서 한 마디가 기억이 납니다.
물론 비판적인 내용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李承晩 대통령은 세계정세를 가장 높은 수준에서 이해한 분이다”란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은 아마 외교관이 어떤 정치인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찬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닉슨 회고록에 李承晩 대통령 이야기가 상당히 길게 나옵니다. 1953년에 닉슨 부통령이 李承晩 대통령을 방문했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친서를 가지고 방문을 했습니다. 李대통령이 계속 북진통일을 하겠다고 하니까 혹시 단독으로 전쟁을 할까 싶어서 닉슨에게 ‘반드시 단독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다짐을 받아오라’는 명령을 가지고 왔어요.
李承晩 대통령이 닉슨에게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지금 외국 사람들 눈에 이 李承晩은, 이 한국은 미국이 하자는 대로 하는 나라다 이런 식으로 보이는 즉시 미국은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는 데 있어서 가장 유효한 수단을 잃게 될 것이다. 李承晩은 뭘 할지 모르는 예측불가능의 사람이라는 것을 공산당들이 알게 될 때 그것이 미국의 대소(對蘇)전략, 對공산주의 전략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공산당과 대결할 때는 에측불가능성(unpredictability), 이것을 항상 유지해야 된다”고 닉슨한테 한 수 가르쳐 주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어요. 닉슨은 그 뒤에 공산당과 대결하면서 계속 李承晩 대통령의 그 충고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썼습니다.
또 한 사람은 누구냐? 그것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주도했던 김춘추?김유신·문무왕 세 사람 중 한 사람이겠죠. 金春秋는 목숨을 걸고 통일외교를 했습니다. 고구려를 찾아가고, 그 다음에 일본을 찾아가고 마지막에는 당나라를 찾아가 羅唐연합체제를 만들어서 그 힘으로 신라가 백제·고구려를 통합하는 삼국통일을 이룩했고, 최초의 민족통일국가를 만들었습니다.
金春秋·李承晩·朴正熙. 이 세 분이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큰 인물일 것입니다. ‘가장 크다’는 뜻은, 세 분이 당대의 큰 인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만든 체제가 그 뒤에도 계속 이어져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정치인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철학과 노선이 계승되었느냐, 아니냐’일 것입니다.
프랑스는 1958년에 드골이 만든 제5공화국 헌법체제가 지금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드골리즘을 계승한 정치세력들이 계속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李承晩·朴正熙를 이어가는 정치세력이 한국에 있느냐? 李承晩·朴正熙 노선이 그 뒤의 대한민국 발전의 기본노선이었다는 점은 틀림이 없어요. 그런 점에서 李承晩·朴正熙 노선은 지금도 이어지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李承晩·朴正熙를 프랑스가 드골을 모시듯 하나의 지표로 삼고 영웅으로 삼고 공화당이 링컨을 내세우듯이 하는 정치세력은 없습니다.
그 이유를 정치학자들이 연구하면 좋은 논문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저보고 설명을 하라면 이렇습니다.
李承晩·朴正熙의 한국적 민주주의
李承晩 대통령은 전쟁 중에도 언론 통제를 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을 수행하는 정부를 그때 한국 신문처럼 가혹하게 비판한 나라도 아마 별로 없을 것입니다. 전쟁 중에도 국회를 해산하지 않았습니다. 전쟁 중임에도 역대 최대 규모의 지방선거를 해 1만 몇천 명이 되는 사람을 뽑은 나라가 바로 민주주의를 하기 시작한 지 5년도 안 되는 李承晩 정부였습니다.
그러나 李承晩 대통령은 서구식 자유 민주주의가 당장 1950년대의 한국에서 시행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민주주의를 보는 시각에서는 朴대통령과 상당히 비슷했어요. 그러나 朴대통령처럼 그것을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말로 개념화해서 당당하게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李박사가, 올리버에게 털어놓은 이야기가 이렇습니다.
“나는 민주주의의 약점이 굉장히 많다고 생각한다. 특히 민주주의를 하기 시작하면 지도자가 국민 여론의 눈치를 보고 國益을 위한 결정을 할 수가 없다는 점이 가장 큰 약점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두 분은 결국 완성된 민주주의를 할 수 없는 시대의 지도자였습니다. 따라서 두 분이 내건 정치이데올로기를 지금은 쓸 수가 없어요. 아무리 李承晩 대통령이 위대하지만 21세기에 李承晩 대통령의 민주주의觀을 적용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두 분은 흔히 ‘자기성공의 희생자’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두 분의 국가경영이 성공하여 중산층이 많이 생기고 민주주의 교육으로 不義와 부정에 저항할 줄 아는 젊은 세대를 키웠다. 이들 중산층과 학생들은 두 분을 비판하고 부정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혁명과 암살로 물러났고 대한민국은 騎手를 바꾸어 계속 달려갔다. 자신을 부정하고 비판할 수 있는 세력을 키웠다는 점에서 ‘자기 성공의 희생자’란 말입니다.
그럼 김일성·김정일은 무엇이냐? ‘자기실패의 受惠者’입니다. 자기성공의 희생자는 역사에서 높게 평가를 받지만 최후는 좋지 않습니다. 반면, 체제를 망쳐놓고 독재를 해서 아무도 자기한테 도전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편안하게 잘 먹고 잘 사는 자기 실패의 수혜자가 김일성?김정일인데 저 자들은 앞으로 역사를 통해서 斷罪될 것입니다.
드골은 이미 거의 완성된 프랑스의 정치지도자였기 때문에 드골리즘은 지금 그대로 프랑스를 지도하는 이념으로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李承晩은 한국 최초의 대중정치인
李承晩 대통령이란 분과 朴대통령 두 분은 매우 다르면서도 매우 같은 사람입니다. 저는 ‘朴대통령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라고 물으면 ‘교사, 군인, 혁명가 그리고 CEO’ 라고 합니다. 李承晩은 뭐냐? 그분도 교사였습니다만 그 전에는 언론인이었습니다. 언론인, 교사, 혁명가 이렇게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두 분 다 교사였습니다. 위대한 교사였습니다. 국민들을 교육의 대상으로 생각했습니다. 또 대중에 대한 신념이 있었습니다.
특히 李承晩 대통령은 ‘우리 국민들은 자질이 세계 어디를 내놔도 上之上(상지상)이다. 그러나 양반들, 지배층은 下之下(하지하)다. 이 국민들을 각성시키고 교육하면 우리나라는 발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백성, 대중, 국민들에 대한 확신이 있었어요. 이 점에 있어서는 朴 대통령보다도 더 확신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李承晩 대통령은 한국 최초의 대중 정치인입니다. 아무런 조직이 없는 李承晩 대통령이 귀국해서 건국의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뒷받침했던 것은 李承晩에 대한 대중의 지지였습니다. 대중의 지지가 워낙 강했기 때문에 미군정도 어떻게 할 수 없었고 한민당도 결국 이승만을 위해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朴正熙 권력은 총구에서 나왔지만 李承晩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왔어요. 투표에서 나온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국민들의 李承晩에 대한 신뢰에서 나왔다. 그런 점에서 최초의 대중적 정치인이었다. 저는 李承晩을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李承晩 대통령을 이해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계속 이해하는 정도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좋게 말하면 좀 깊어지고 있습니다.
최근에 李承晩 대통령이 스물아홉 살에 한성감옥에서 썼던 <독립정신>이라는 책이 현대문으로 약간 바뀌어서 나왔습니다. 스물아홉 살에 쓴 걸 제가 읽어보면서 李承晩이라는 사람은 이때 이미 대통령이 된 사람이다. 대통령이 가져야 될 기본적인 관점을 스물아홉 살에 옥중에서 이미 정리한 사람이다, 이렇게 감탄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에서 李承晩 대통령이 했던 어록을 몇 개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스물아홉 살입니다. 그때까지 외국에 가본 적도 없습니다.
“자유를 존중하는 것은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다. 우리는 세계에 대해 개방해야 한다. 우리는 세계와 반드시 교류해야 한다. 통상은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오는 것은 우리를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다. 경쟁하는 마음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 과거의 제도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것조차도 버리고 바꿀 수 있다는 각오를 가지고 사람과 가정과 나라가 모두 새롭게 됨으로써 우리나라가 영국과 미국과 같이 되도록 한마음으로 힘쓰면 일본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부디 깊이 생각하고 고집부리지 말고 모든 사람들이 힘껏 일하고 공부하여 성공할 수 있도록 자유로운 길을 열어놓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에게 스스로 활력이 생기고 관습이 빠르게 변하여 나라 전체에도 활력이 생겨서 몇 십 년 후에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를 존중하는 것은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다.”
요새 우리나라 개방주의자들이 하는 이야기와 똑같습니다. 똑같은 것이 아니라 훨씬 더 고차원이라고 생각합니다.
李承晩·朴正熙 두 사람은 당대에 知的으로 가장 뛰어난 분이었습니다. 사상적으로도 가장 뛰어난 분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다 쉬운 말로 표현했습니다. 한국의 식자층은 무엇을 얼마나 많이 아느냐, 많이 비판하느냐를 기준으로 인간을 평가하는 경향인데, 두 분은 얼마나 많은 것을 생산하고 건설했는냐, 즉 실천을 기준으로 평가해야 할 사람이고, 그런 시대를 만든 분입니다.
정신, 패기, 국가개조 의지가 사라지고 있다
미국에서 젊은 사람들이 모여 오늘날 미국의 쇠퇴에 대해 토론을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거기서 내린 결론은 1973년부터 미국이 징병제를 폐지하고 지원제로 간 것이 가장 큰 문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미국의 국가 분위기가 굉장히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지원병제를 실시하니까 전쟁을 하더라도 인명손실을 최소화해야 된다. 그래서 제1차 걸프전쟁 때는 미군의 戰死者가 300명도 안됐습니다. 두 번째 이라크 전쟁 때는 4500명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反戰(반전)분위기가 일어나고 이라크 전쟁을 비판하는 분위기 속에서 오바마가 당선이 되었습니다.
세계 최대 강국이 세계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전쟁을 하는데 4500명의 전사자도 감당할 수 없다. 그런 정신력을 가진 국가가 과연 세계를 지도할 수 있나. 이 문제는 바로 대한민국의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도 아프가니스칸, 이라크에 파병을 했습니다만 언론과 여론은 단 한 사람의 군인도 죽지 않아야 된다는 식입니다. 한국은 지금 70만 군대를 가지고 있으나 1950년대, 60년대의 우리 국군의 정신이 과연 거기 들어가 있느냐, 의구심이 듭니다. 징병제는 다행히 유지되고 있으나 이것도 선거 때만 되면 지원제로 바꿔야 한다는 공약을 내거는 사람이 앞으로도 계속 나타날 것입니다.
국군은 건국의 礎石, 護國의 干城, 근대화의 旗手, 민주화의 울타리 역할을 해왔습니다. 대한민국 성공의 기관차였고 지금도 국민정신의 유일한 담보자입니다. 국군이 좌경화 교육을 받아 정신이 오염된 젊은이들을 어떻게 치료해줄 것인가, 이것은 국가생존의 문제인 것입니다.
좌파정권 10년 동안 김대중·노무현 두 대통령이 헌법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對北정책을 취했습니다. 헌법이 짓밟힐 때 앞장서서 헌법을 막으라고 우리가 월급을 주고 있는 90만 공무원 중에서 자기 직을 걸고 “왜 대통령이 헌법을 위반하느냐”라고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 한 사람은 국회입법서기관이었어요. 유세환이라는 사람. 이 사람은 2006년에 나온 책을 통해서 노무현의 對北정책은 국가변란이다. 법률적으로 구성을 하면 내란동조다. 그래서 노무현을 내란죄로 사법처리해야 된다는 책을 썼어요. 그래 가지고 직위해제됐다가 다시 재심에서 3개월 정직 처분을 받고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을 빼고는 90만 공무원, 군대까지 넣으면 150만 정도의 공무원 집단이 특히 군인들이 눈앞에서 대한민국 헌법이 좌경 권력에 의해서 유린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입 닫고 가만히 있었다. 이런 공무원 집단, 이런 군대를 믿고 국민들이 안심하고 잘 수 있나. 이승만, 박정희 두 분은 지금 저승에서 통탄하고 있을 겁니다. 이런 굴종은 식민지 군대나 하는 일입니다.
李承晩·朴正熙 신념의 원천은 기독교와 군인정신
李承晩·朴正熙 두 분은 자존심과 자주정신의 화신이시죠. 인간은 자존심만큼 크게 된다고 흔히 말합니다.
李承晩 대통령은 그 비밀이 아마도 ‘기독교에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분이 고종을 몰아내는 쿠데타 음모를 했다가 붙잡혔다가 다시 탈옥을 하는 과정에서 잡혀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6개월 동안 큰 칼을 차고 있으면서 언제 불려나가서 사형될지 모르는 그 상황에서 성경을 읽다가 어느 순간 뭔가 번쩍하는 섬광을 느꼈고 그 뒤부터 마음이 편해지고 겁이 없어졌다는 체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나온 孫世一 씨의 <李承晩과 金九 평전>에 그 부분이 아주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 장면을 읽어가면서, 사도바울이라는 사람이 기독교도를 잡아 족치는 역할을 하다가 갑자기 뭐 벼락 같은 걸 맞아가지고 위대한 기독교도로 변화하는, 거듭 태어나는 그런 체험을 청년 李承晩이 했구나, 이걸 통해서 인격이 바뀐 분이구나, 굉장한 사명감과 자기 확신이 생겼구나, 기독교 정신이 李承晩을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朴正熙 대통령의 자주정신은 군인정신과 연결될 것입니다. 死生觀에 대해서 답을 주는 가치체계는 유교가 아니고 기독교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군인정신, 즉 박정희가 경험했던 일본의 武士道 정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朴대통령이 굉장히 잘 돌아가신 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분이 10·26때 총을 맞고 어떤 행동을 했느냐 하는 것에 저는 굉장히 관심이 있었습니다. 과연 총을 맞고도 “나는 괜찮아”라고 했느냐, 과장은 아니겠느냐 해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을 제가 다 만나서 인터뷰를 하고 기록을 가지고 검토한 적이 있습니다. 김재규가 쏜 총에 가슴이 관통당하고 등에서는 피가 콸콸 쏟아지는데 옆에 시중들던 두 여자가 손수건도 구할 수 없으니까 손으로 막았습니다. 막으면서 “각하 괜찮습니까?”하니까 “난 괜찮아” 요게 마지막 유언이죠. 김계원 씨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신모라는 여성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은 ‘난 괜찮으니까 자네들은 피하게’ 라는 뜻이었다고 합니다.
그 마지막 모습이 다른 모습이었으면 어떻게 되느냐? 차지철처럼 실내 화장실로 들어가서 돌아가셨으면 어떻게 되느냐? 마지막의 그분 모습이 바로 그 사람이 살아온 62년 인생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그것은 연습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연기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그 마지막 모습이 바로 朴正熙라는 영웅적 인간의 단면이라고 생각합니다. “淸濁을 같이 들이 마시되 질풍노동의 시대에서도 끝까지 영혼의 순수함을 유지해간 분”이었습니다.
‘위대한’ 대통령과 ‘부지런한’ 대통령
두 사람이 30년을 다스렸습니다. 위대한 지도자는 보통 역사 속에서 가끔 한 사람씩 나옵니다만 두 분이 릴레이 하듯이 30년 동안 한국을 이끌었다는 것은 우리의 행운입니다. 그 뒤에 나온 전두환?노태우 두 사람도 부지런한 대통령이었습니다. ‘위대한’이라는 말은 붙이기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최소한 열심히 일한 부지런한 대통령이었습니다. 그 뒤를 이은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이 세 사람에 대하여는 조금 시간을 두고 평가를 해야 될 것입니다. 우선 세 사람은 한국 현대사의 정통성과 연속성을 부정했습니다. 노무현·김대중 두 사람의 對北정책 또는 對內정책에서의 헌법파괴, 反국가성에 대해서는 엄중한 평가가 있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위대하더라도 실수는 있게 마련이고 그 실수 중에 하나로 우리가 지금 피부로 느끼고 있는 것은 한글전용 정책입니다. 李承晩·朴正熙 두 사람은 한글전용으로 대중들의 문맹률을 낮춰야 된다고 생각했지만 朴대통령은 글을 대부분 한자로 썼고, 李承晩 대통령은 아주 훌륭한 漢詩를 남겼습니다. 두 사람은 한자를 잘 아니 한글專用을 해도 별 불편이 없었어요. 한자를 모르는 사람한테 한글 전용은 언어의 암호화이고 한국어 파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한국어는 70%의 漢字語와 30%의 한글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漢字를 모르면 문맹자와 같습니다. 지금 한국은 세계에서 문맹률이 가장 높은 국가입니다. 60%가 문맹자입니다. 60%가 자기 나라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한글전용으로 쓰인 역사책을 어떻게 읽겠습니까? 한글전용으로 쓰여 있는 건축서적을 어떻게 읽겠습니까? 실제로 읽지 못합니다. 많은 보고서를 절대로 읽지 못합니다. 해석이 안 됩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 李承晩·朴正熙 두 분이 남긴 나쁜 유산이죠. 이것도 한자를 아는 기성세대가 해결하지 못하면 우리는 문맹률 60%인 나라, 그러면서도 자기가 문맹인 줄 모르는 국민들, 고급 독서가 불가능한 국민들을 남기고 말 것입니다. 韓國語가 파괴되면 李承晩·朴正熙 두 분이 세운 대한민국의 정신적 바탕이 흔들리고 교양 없는 국민들이 양산될 것이고, 그리하여 一流국가의 문턱에서 꿈을 접어야 된다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드리면서 제 이야기를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