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킹의 후예' 노르만이 세계사를 바꾼 2대 決戰 이야기 교황을 포로로 잡아 지중해의 왕자로 군림하게 되는 계기를 만든 시비타테 전투. 그 13년 뒤의 해이스팅스 전투는 노르만 전사집단이 영국을 정복, 초일류국가로 가는 길을 연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중세 유럽의 三國志 서기 900년대 초, 프랑스의 노르망디에 정착한 바이킹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문명화하여 유럽 최강의 騎士(기사)집단이 된다. 해적질을 하던 이들이 騎馬(기마)전술을 발전시켜, 보병 중심의 다른 군대를 눌렀다. 1066년 노르망디 공국의 월리엄 공은 잉글랜드로 쳐들어가 해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롤드 왕을 戰死(전사)시키고, 大勝(대승), 그해 성탄절에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하였다. 윌리엄 정복왕과 노르만 후손들은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복속시키는 과정에서 영국을 유럽 최강의 국가로 만든다. 노르만의 영국 정복은 영어와 佛語(불어)를 결합시켜 오늘날 영어가 세계 최고의 언어가 되는 길도 열었다. 이보다 먼저 이탈리아 남부에서도 노르만 전사들의 정복사업이 진행중이었다. 1017년부터 본격화된 정복은 1130년 로베르 2세가 남이탈리아와 시실리를 통일, 왕으로 登極하기까지 100여 년이 걸렸다. 이렇게 세워진 시실리 왕국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富强(부강)한 나라가 된다. 바이킹의 피를 받은 소수의 노르만 전사들, 특히 오트빌(노르망디의 촌락) 출신 탄크레드 家門의 형제들이 지중해 문명의 심장부를 정복해간 이야기는 삼국지처럼 흥미롭다. 유럽에서도 최근에 와서 본격적으로 연구되고 있는 대목이다. 11세기를 전후한 이탈리아 남부는 교황, 비잔틴, 신성로마제국, 롬바르디(게르만족의 일파), 아랍 세력이 각축하면서 여러 도시가 各自圖生(각자도생)의 길을 걷고 있었다. 노르만 전사들은 처음엔 용병으로 봉사하다가 나중엔 권력을 찬탈하는 방식으로 야금야금 남부 이탈리아의 도시들을 점령해가기 시작하였다. *999년: 노르만 전사들이 나폴리 남쪽의 도시국가 살레르노를 사라센 해적으로부터 지키기 위하여 용병으로 나타난 것이 100여 년에 걸친 남부 이탈리아 정복 사업의 시작이다. *1017년, 이탈리아 동해안 몬테가르가노의 미카엘 천사 聖所(성소)를 노르만 순례자들이 참배할 때 바리의 롬바르드族(족) 계열의 영주 멜수스가 그들을 설득, 아풀리아를 다스리던 동로마제국(비잔틴)의 군대를 공격하도록 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노르만 戰士들은 남부 이탈리아 여러 도시의 傭兵으로 고용되었으나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1046년: 노르망디 오트빌 家門의 로베르 기스카르가 남이탈리아로 와서 먼저 온 형제들과 함께 정복사업에 나서는데, 분열되었던 남이탈리아를 통일하는 主役이 된다. 용맹무쌍한 노르만 세력이 용병의 역할을 넘어 남부 이탈리아 권력투쟁의 키 플레이어로 등장하자 위협을 느낀 세력들이 1052년에 反노르만 연합전선을 구성한다(용병이 힘을 길러 주인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다른 예는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이다). 서로 적대적이던 교황, 비잔틴, 롬바르드 세력, 신성로마제국은 일단 노르만의 得勢(득세)를 꺾어야 한다는 데는 共感(공감)한다. 노르만이 교황을 포로로 잡은 시비타테 決戰 1052년 교황 레오 9세는, 독일로 가서 자신의 친척이기도 한 하인리히 3세 황제에게 援軍(원군)을 요청, 약 700명의 스와비아 보병을 얻어 돌아왔다. 그는 콘스탄티노풀의 동로마(비잔틴) 황제의 협조도 얻어 지원군을 받기로 하였다. 1053년 6월 레오 9세는 직접 연합군(비잔틴 군은 나중에 합류하기로 함)을 이끌고 노르만 세력 타도에 나선다. 교황 측 연합군은 약 6000명이었다. 보병이 다수고 기병이 보조 역할을 했다. 독일 및 이탈리아 인이 중심이었다. 노르만 전사들도 단결했다. 남부 이탈리아에서 각자 정복 사업을 벌이면서 반목하던 세 노르만 지도자들이 이때는 뭉쳤다. 탄크레드와 첫째 부인 사이에서 난 험프리(아풀리아 영주), 둘째 부인 사이에서 난 로베르 기스카르, 아벨사의 영주가 되어 있던 리처드는 약 3000명의 기병과 500명 정도의 보병을 편성했다(이 노르만 병력은 당시 이탈리아에서 활동중이던 노르만 장정의 거의 전부를 모은 것이다). 이들은 교황 군대가 비잔틴 제국의 援軍(원군)과 합류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려고 早期(조기) 공격을 결단했다. 노르만 군은 식량이 부족하여 굶으면서 전투를 해야 할 판이었다. 그들은 교황에 반기를 든 적은 없으므로 협상을 제안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1053년 6월18일 양쪽 군대는 남부 이탈리아 시비타테(Civitate)라는 들판에서 마주 섰다. 노르만 군은 우익에 중무장 기병, 가운데는 말에서 내린 기병과 弓手(궁수), 왼쪽에 기병과 보병 혼합군을 배치했다. 교황 연합군은 왼쪽에 이탈리아 부대, 오른쪽에 독일에서 데리고 온 스와비아 보병을 두었다. 노르만이 先攻(선공)했다. 우익의 중무장 기병이 교황 측의 이탈리아 보병들을 향하여 돌진하였다. 보병은 압도적인 노르만 기병의 돌격에 순식간에 무너졌다. 싸울 생각도 하지 않고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추격 섬멸전이 전개되었다. 노르만의 中軍(중군)은 교황군의 스와비아 보병과 격돌했다. 키가 큰 스와비아 보병은 큰 칼을 잘 썼다. 사람을 세로로 兩斷(양단)할 정도였다고 한다. 노르만 중군은 스와비아 보병들의 철벽같은 방어진을 돌파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반격을 당해 守勢(수세)로 몰렸다. 이때 이탈리아 보병들을 추적하였던 노르만의 중무장 기병이 섬멸전을 끝내고 돌아와 배후에서 스와비아 군을 쳤다. 스와비아 군은 兩面(양면) 공격으로 붕괴, 노르만軍(군)은 대승을 거두었다. 노르만 군은 교황이 머물던 시비타테 城門(성문)에 도착, 최후통첩을 보냈다. 항복하면 봐주고 저항하면 주민들까지 몰살시키겠다고 선언했다. 그 뒤 일어난 사태에 대해선 두 가지 說(설)이 있다. 하나는 교황이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城(성)을 나가 항복, 포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주민들이 살기 위하여 교황을 성문 바깥으로 내몰았다는 說(설)이다. 노르만 군대는 교황을 베네벤토로 데리고 가서 아홉 달 동안 軟禁(연금)시켰다. 나중에 제1차 십자군 전쟁의 선봉이 될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노르만 전사들은 교황에게 사과하고 융숭한 대접을 하면서도 여러 요구조건을 제시하였다. 교황은 독일의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구원군을 보내줄 것이라 믿고 버티었으나 그들은 오지 않았다. 교황은 마침내 굴복했다. 노르만이 남부 이탈리아에서 구축한 기득권을 인정한 것이다. 레오 9세는 풀려나 로마로 돌아온 뒤 곧 죽었다. 1059년 다른 교황 니콜라스 2세와 로베르 기스카르는 멜피(Melfi) 조약을 맺고 노르만의 남부 이탈리아 지배권을 公認(공인)했다. 기스카르를 아풀리아 公, 카라비아 公, 시실리 伯(백)으로 임명한 것이다. 이후 노르만 세력은 교황 편에 선다. 교황의 옹립에도 간여하였다. 당시 교황들은 내부 개혁(신부의 禁婚 등)을 하고, 주교 등 사제 임명권을 둘러싸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맞서는데 노르만이 개혁 교황 측에 힘을 실으면서 역사의 大勢(대세)를 탔다. 시비타테 전투는 1066년의 헤이스팅스 전투처럼 세계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노르만의 남부 이탈리아 및 시실리 정복 사업이 탄력을 받게 되었다. 그동안 각개 약진하던 노르만의 남부 이탈리아 정복 사업은 이 전투에서 공을 세운 기스카르 중심으로 통합된다. 그의 동생 로베르(영어표기는 로저)가 시실리까지 정복하고 그의 아들 로베르 2세가 나폴리 남쪽의 이탈리아와 시실리를 통일한다. 1130년 로베르 2세는 교황으로부터 시실리 왕국의 왕으로 공인받았다. 이 왕국은 나중에 지배자와 이름은 바뀌지만(마지막엔 나폴리 왕국), 700년간 존속되었다. 노르만이 비잔틴 세력, 교황 세력, 로마르디 세력, 그리고 신성로마제국 세력을 배제하고 이탈리아 남부와 시실리를 통합하여 세운 시실리 왕국은 '태양의 왕국'이라 불린다. 약150년간 유럽에서 가장 실용적이고, 개방적인 나라가 되었다. 노르만 인들은 사람과 나라를 다스리는 데 정통하였다. 이런 성공의 가장 큰 비결은 법치였다. 노르만 전사 집단이 지중해 지역의 왕자로 등장하게 되는 계기를 만든 시비타테 결전 13년 후 이번엔 같은 뿌리를 가진 노르만 전사들이 잉글랜드로 쳐들어가 해이스팅스 전투에서 이긴다. 잉글랜드, 스콧랜드, 웨일즈, 아일랜드가 노르만 치하로 들어가면서 오늘의 영국, 그 기초가 다져진다. 노르만 전사들은 시실리 왕국처럼 잉글랜드를 잘 경영하여 유럽에서 가장 선진된 국가 조직으로 키운다. 같은 시기에 노르망디 출신 두 전사 집단이 남쪽과 북쪽 유럽에서 가장 훌륭한 제도를 가진 나라를 만들었다는 점은 세계사의 한 경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