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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보수, 가짜 보수[송희영 칼럼]

淸山에 2016. 4. 23. 05:16







[송희영 칼럼]

진짜 보수, 가짜 보수

 송희영 주필 
 
입력 : 2016.04.23 03:20



보수가 좌파와 다른 점은 인간의 결점·불완전성 인정하는 아량, 포용, 관용의 정신
우리 보수는 차갑기 그지없어… 기계적인 법치·엄숙함에 매몰 '진짜 보수'의 얼굴 되찾아야


 
 
송희영 주필
  송희영 주필 
 


보수 세력이 갈라지는 소리가 본격적으로 들린 것은 국정 교과서 파동 때였다. 기존의 역사 교과서에 좌편향 문제가 있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국정 교과서가 해답이라는 정부 결정에 찬성하지 않은 보수계 인사가 많았다. 보수의 분열이었다.


통진당이 해산된 게 2014년 12월이다. 극단 종북(從北) 세력에 대한 심판이었다. 김일성 일가의 3대 세습, 굶주림, 무자비한 숙청, 핵무장을 밀고가는 북한을 보며 종북은 우리 사회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이단아 집단이 됐다.

그렇게 이념의 좌표축(軸)에서 왼쪽 끝이 붕괴하자 머지않아 오른쪽 끝도 무너질 것이라고들 했다. 극좌를 제거하면 극우(極右)가 무너지든가, 이념의 무게중심이 왼쪽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그것이 국정 교과서 논란 때 싹트더니 고작 16개월 만에 총선에서 대폭발했단 말인가.


보수주의는 인간의 완결성을 믿지 않는 땅 위에 건설된 철학이다. 인간이란 허약하고, 변덕스럽고, 불안정하고, 때로는 폭력적인 존재라고 본다. 이런 미완성 동물들이 조직한 정부라고 해서 완벽할 리 없고, 미숙하기 그지없는 유권자들이 뽑은 대통령, 국회인들 결함 없는 완성체가 될 수 없다고 믿는다.


진짜 보수 정치인은 그래서 왕과 대통령의 권력, 공무원 권한을 축소하자고 끊임없이 주장한다. 선진국 보수 정당들이 내거는 '작은 정부'도 바로 이런 인간관에서 비롯된 공약이다.


보수 정치로 나라를 부활시킨 대표적 인물은 영국 대처 총리와 미국 레이건 대통령이다. 두 사람 모두 공기업 민영화, 규제 철폐, 세금 인하를 통해 작은 정부를 실천했다. 11년, 8년씩 재임하는 동안 경제는 살아났고 국제 무대 발언권도 강해졌다.


그러나 한국의 보수 정치 8년은 정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철도 노조가 파업하면 공기업 민영화는 절대로 없다고 약속했다. 세월호, 메르스 같은 일만 터지면 공무원 조직이 커지기만 했다. 권력 실세들이 포스코·국민은행 같은 민간 기업 인사에까지 시시콜콜 개입했다. 국가권력의 한국식 팽창을 보면 원조 보수들이 통곡할 일이다.


영국의 최고 전성기인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시절에 유행하던 표현이 하나 있다. '당신 뜻대로 하라(as you like it)'이다. 보수 정권이 30년 이어지고 있었다. 기업과 개인에게 '네 맘대로'라며 마음껏 자유를 허용했다. 정부는 민간이 할 수 없는 식민지 관리, 공중위생, 노동자 복지를 맡았다. 여왕과 총리들이 정부가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민간의 자율성을 확장한 것이다.


보수 정치인으로 행세하려면 완전하지 못한 자신부터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완전하지 못한 인간이 권력을 쓰려면 다른 사람의 지혜를 빌려야 한다. 보수 정치란 쉬지 않고 역사와 전통, 관습, 경험 법칙을 배우고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를 통해 자신의 부족한 것을 메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4·13 총선 후 아사히신문은 사설에서 '독선(獨善)'이라는 단어를 썼다. 뉴욕타임스도 '교만, 거만, 오만'으로 해석될 단어(arrogance)를 사용했다. 한국의 보수 정치가 겸손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진짜 보수라면 이 세상엔 순도 100%의 진실한 사람, 진정성·의리로만 똘똘 뭉친 무결점 인간은 없다는 것쯤은 알아야 한다. 명색이 보수를 표방한 정치 세력이 어떻게 그런 완벽한 후보를 골라내겠다고 골육상쟁의 싸움을 했는지 모를 일이다.


우리 보수는 차갑기 그지없다. 이번 정권의 어느 장관이 뱉은 말은 지워지지 않는다. "회의 분위기는 언제나 엄숙합니다. 장엄미사처럼 거룩하고 경건하죠." 농담도 거의 없다. 권력 핵심들은 허리띠를 풀어헤친 술좌석도 갖지 않는다. 기계적인 법치(法治)는 입에 달고 산다.


엄숙, 경건한 압박감은 국민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별것 아닌 풍자 예술이나 보도가 심각한 검찰 수사로 번진다. 용서가 없고 너그러움은 박하다. 좌파는 당과 조직의 이름으로 가차없는 처벌을 내리곤 한다. 수백만명이 희생된 스탈린의 숙청, 중국의 홍위병 운동, 김정은의 고모부 고사포 처형에서 배신자를 제거하는 좌파 정치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권력을 쥔 자신은 아무 결점 없는 순수 완성체라는 오만한 인간관이 빚은 참사다.


보수가 진보 좌파와 다른 것은 아량과 포용, 관용이다. 인간은 불완전한 허점투성이 생물체여서 실수나 일탈(逸脫)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서로 너그럽게 감싸안고 가야 한다고 믿는 게 보수 철학의 핵심이다.


나라마다 시대마다 보수의 색깔이 다르긴 하다. 하지만 반공·친미(親美)만 보수가 아니다. 이승만·박정희를 비판하는 사람을 보수의 적으로 돌리는 것도 단편적이다. 이제 보수가 진짜 제 얼굴을 찾지 못하면 갈수록 무너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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