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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2월 8일 아침 10시 55분,서독을 방문하던 박대통령 일행은 뤼브케 서독 대통령의 안내로 루르 지방 탄광지대의 한 공회당에 도착했다. 탄광 막장 현장에서 갓 나온 5백여 명의 광부들이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광부들의 얼굴과 작업복은 석탄이 묻어 흙투성이 그대로였다.
대통령이 단상에 오르자 애국가가 울렸다.음악만 나오고 가사가 나오지 않았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한 소절 한 소절 직접 불러감에 따라 점차 애국가 소리가 커져갔다. 마침내 '대한 사람 대한으로...'하는 대목에 이르자 어느덧 목멘 소리로 변했다.
애국가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장면은 말이나 글로 설명할 수 없다. 가슴과 가슴으로 부둥켜안고 소리도 없이 고이던 눈물. 광부들은 제나라 대통령을 보자 왈칵 복받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반가움에 앞서 서러움이었는지도 모른다.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해외동포의 환영을 받는 게 아니었다. 금메달을 목에 건 영광의 주인공을 격려하는 자리도 아니었다. 내 나라 젊은이들이 고생하고 있구나 생각하니 대통령의 가슴은 미어질 듯했다. 온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조국을 떠나 이역 만리 남의 나라 땅 밑에서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광원
여러분,조국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일합시다.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이라도 닦아 놓읍시다."
그러나 연설은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마침내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고,끝내는 대통령도 울고 말았다. 곁에 있던 육영수 여사도 뤼브케 서독 대통령도,그리고 수행원 모두 다 울었다. 어떤 확실한 공감대가 이 가슴에서 저 가슴으로 전해졌다.
"열심히 합시다.그래서 남부럽지 않게 살아봅시다."
연설이 중단되고 밖으로 나오는 데 한 시간이 걸렸다.
"각하,손 한번 쥐게 해주세요.우리들을 두고 어떻게 떠나시렵니까?"
광원들이 줄지어 손을 내밀며 목메인 목소리로 대통령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밖에 나오니 어느 새 수백 명의 광부들이 운집해 있었다.외치는 만세 소리에 파묻힌 일행은 그 자리에서 근 한 시간 동안 떠나지 못했다.
"대한민국 만세! 대통령 각하 안녕히 가십시오."
목이 터지도록 외친 광원들의 함성을 뒤로 남기고 떠나온 일행들의 마음은 한없이 벅차올랐다.
우리 일행은 간신히 아우토반에 올랐다.차 속에서 눈물을 멈추려고 애쓰는 박 대통령의 모습을 본 옆자리의 뤼브케 대통령이 말했다.
"각하,울지 마십시오. 잘 사는 나라를 만드십시오.우리가 돕겠습니다.
분단된 두 나라가 합심하여 경제 부흥을 이룩합시다.공산주의를 이기는 길은 경제 건설뿐입니다."
그는 자기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박 대통령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통역관인 나는 앞자리에 앉아 칠순의 노(老)대통령이 40대의 젊은 대통령에게 격려해준 우정어린 대화를 통역하면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걷잡을 수 없었다.창밖으로 눈길을 애써 돌렸다.석양빛에 어느 공장 굴뚝인가의 하얀 연기만이 하늘 높이 오르고 있었다.
아직도 우리 기억에 생생한 서독 광원,서독 간호사 파견은 두말할 것도 없이 가난에서 벗어나 보려는 극동 조그마한 나라의 몸부림이었다.그것이 196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말없는 합의,가슴으로 맺은 공감대,자각과 분발,그것이 위대한 힘을 생겨나게 했다.
<백영훈 '아우토반에 뿌린 눈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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