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의 대표적 전기 작품: <인생>과 <비극>
이 두 작품에는 르네상스 이후 서양 미술의 전통이 고스란히 표현돼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림 전체의 주제와 구도, 그리고 색감과 인물의 손짓까지... 모두 교묘하게 선배들의 위대한 작품들로부터 '훔쳐' 왔으니 그럴 수 밖에.
(그러함에도, 이들 작품은 여전히 엄청난 완성도를 보여준다. 피카소는 결코 싸구려 표절 작가가 아니었다. 이는 밑에 더 설명한다.)
"훌륭한 예술가는 남의 작품을 베끼지만, 위대한 예술가는 훔쳐 온다."
피카소 본인이 한 말이다.
사실은 이 말마저 동시대의 위대한 극작가이자 시인, 평론가인 T.S. 엘리엇으로부터 '훔쳐' 온 것이다. (엘리엇이 한 말은 "Immature poets imitate; mature poets steal."이었다.)
엘리엇은 "세상 아래 새로운 것 없다"는 예술 전통론의 신봉자였다.
즉, 예술에서 창조라는 개념은 전에 있었던 걸 새롭게 재표현하는 것이지, 결코 전에 없던 걸 새롭게 탄생시키는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예술의 진화론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우리 모두가 과거 선조의 유전자의 복제와 교차에 의해 탄생한 존재인 것처럼, 세상 모든 예술 작품들도 과거에 있던 것들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복제하고 짜집고 덧붙여 만들어진 것들이라는 주장이다.
(이 T.S. 엘리엇의 주장을 가장 잘 뒤받침하는 예술 작품은 공교롭게도 그의 대표작인 <The Waste Land>. 이 작품에 대해선 나중에 따로 설명하련다.)
이 주장에 동조를 하든 말든, 피카소는 "훌륭한 예술가는 남의 작품을 베끼지만, 위대한 예술가는 훔쳐 온다"는 지론에 누구보다도 충실한 작가였다.
대부분의 삼류, 아마추어 미술 평론을 보면 (우씨 나도 아마추언데...) 피카소가 어릴 때부터 어마어마한 천재성을 지닌 환쟁이었던 사실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한다.
제대로 된 미술 평론은 대개 작가의 어린 시절 재능에 대해선 별 언급을 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전성기 때 예술적 가치가 있는 작품이지, 어릴 때 어떻게 뭘 그렸던 (그게 예술적 가치가 없는데) 무슨 상관이냐?
피카소가 데뷔 전에 그린 그림들은 대부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있는 피카소 미술관에 있으니 한번 눈으로 확인해 보시라. 솔직히 우리나라 좀 재능있는 고등 유학반 애들 포트폴리오만도 못하다. 그걸 보기나 하고 '어릴 적부터 어마어마한 천재성' 어쩌고 운운하는 건지... 고호나 이중섭 같은 다른 위대한 화가들도 마찬가지: 그 사람들 데뷔 전 그린 그림들 대부분 진짜 꽝이다.
피카소는 미술 신동은 아니었다. (어릴 때 그보다 잘 그린 사람 수두룩 빡빡이었다.)
그는 단지 어릴 때부터 그림 때문에 고민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에게 그림 그리는 행위는 먹고 자고 싸고 자위를 하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웠다. 게다가, 그 자연스러운 행위를 다른 이들이 상상도 할 수 없을만큼 열심히 했다.
(전에 말했던 20살까지 자위를 수만번을 했다는 섹스 머신 인간... 그런 식이었다. 피카소는 섹스 대신 그림을 택했을 뿐.)
무엇보다, 피카소를 위대한 화가로 만들어 준 가장 중요한 원인은 다른 사람 그림을 베끼는데 주저함이 없었다는 것.
그는 좋은 그림을 보면 일단 그대로 베껴 보았다. 그리고 그 스타일을 답습하고 발달시켜 자신의 그림으로 만들었다.
대표적으로, 그가 파리에 있을 때 함께 그림을 그렸던 조르쥬 브라크(Georges Braque)로부터 큐비즘 스타일을 '훔쳐'온 것을 들 수 있다.
브라크는 친구의 문병을 갔다가 창문 밖으로 보이는 에펠탑을 조각조각 해체시켜 블록 모양으로 그림을 그린 적이 있다. 피카소는 친구가 고안한 이 큐비즘의 아이디어를 그대로 따와서 자신의 그림에 응용, <아비뇽의 처녀들> 같은 걸작을 양산해 낸다.
사실, 브라크의 입체주의 그림도 사실은 세잔의 성 빅토와르 산의 그림에서 본딴 것이다. 세잔은 일찍이 성 빅토와르 산을 그리면서 사물의 모습을 서로 다른 각도에서 관찰해 재구성한 기법을 선보인 바 있다. (이제 왜, 엘리엇이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고 말했는지 알겠는가?)
어쨌든,
피카소의 3가지 특징,
1. 고민하지 않는다
2. 부지런하고 정력적이다
3. 다른 것을 받아들이는데(베끼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은 피카소를 위대한 예술가로서 성장키는데 어마어마하게 빠르고 강력하고 동력이 됐다. 위대한 예술가가 된답시고 혼자 방구석에 틀어박혀 고민고민 해봐야 인생 힘들고 시간만 낭비될 뿐이다. (세잔이 택한 방식이긴 하지만...)
빠른 시간 내에 위대해지고 싶다면 베끼건 '창조'하건 무작정 손을 움직여라... 피카소는 이점을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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