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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시대의 영웅인가, 교란자(攪亂者)인가.
“배부르게 죽은 자를 슬퍼하지 말라”는 인생교훈을 새기면서 천의 얼굴,
김대중의 삶을 되새겨 보자.
최응표(뉴욕 거주 회원)
이젠 세상이 좀 조용해지겠나, 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치면서 떠오르는
것이 탐욕에 찌든 고인의 어두운 얼굴이었다.
죽음에도 정성어린 애도의 뜻을 담아 아쉽게 보내는 죽음이 있는가 하면,
늦기는 했지만 지금이라도 떠나주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등 떠밀어 보내는
죽음이 있다. 김대중의 죽음은 어느 쪽에 속할까. 후자에 속한다는 대답에
절대다수 국민이 박수를 보낼 것이다.
이제 시대의 영웅으로 대접받기 위해 그처럼 몸부림치던 시대의 교란자(攪亂者)는 갔다. 시끄럽던 한 시대, 빛을 가리던 어둠의 한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다. 그는 훌륭히 죽기 위해 훌륭히 사는 길을 배웠어야 했고 또 그 길을 갔어야 했는데, 어쩐 일인지 그는 그 반대의 길을 가면서 이웃과 사회, 국가와 역사에 고통과 아픔과 시련만을 남긴 채 감당키 어려운 역사의 무거운 짐을 떠넘기고, 결코 가고 싶지 않은 먼 길을 발버둥이 치며 갔다.
그에게 내려지는 역사의 평가는 과연 어떤 것일까. 그리고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고 심판하는 하늘은 그의 인생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냉철하게 짚어 보고,
또 후세를 위해서도 다시는 그런 어지러운 세상을 살지 않기 위해 올바른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정치를 이용했고, 가문의 영광을 위해 게걸스레
부(富)를 축적해 온 철저한 이기주의자다. 더 큰 탐욕을 위해 민주를 팔며
국민을 최면에 걸고 평화라는 가면을 쓴 채 일생을 살다 간 역사의 배신자다.
그에게서 위선을 빼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우리시대의 보편적 가치마저
철저하게 이용하며 자기 이득을 챙겨 온 김대중, 다시는 제2의 김대중이
이 땅에 태어나지 않기를 하늘에 빈다.
물론 그에 대한 평가는 제각기 다를 수 있다.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을 것이고 그 반대의 시각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부정적인 평가가 절대적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배부르게 죽은 자를 슬퍼하지 말라”는 인생교훈을 새기면서 천의 얼굴, 김대중의 삶을 되새겨 보자.
그는 정말 인생을 힘들게 살았다. 힘들었던 만큼 부귀와 영광도 분에 넘치게 받았다. 그런데 남달리 힘들었던 그의 인생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나,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는 철저하게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았다. 남을 위한, 국가를 위한 희생 같은 것은 그에게는 애당초부터 없었다. 그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는 철저한 계산이 깔려 있다. 그에게 있어서 공짜나 외상 같은 것은 어림없는 일이다.
우선 두드러지게 큰 사건 몇 가지만 생각해 보자.
김대중의 정치인생이 그들 표현대로 진실이었다면, 욕심과 허세를 내려놓고 그는 5·18 광주묘역으로 갔어야 했다. 광주묘역은 그의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역사의 현장이고, 정치적 어려움에 부딪칠 때 그는 이곳을 찾아 위로를 받던 거룩한 성지(?)가 아닌가. 그처럼 편안한 마음의 안식처를 두고, 하필 좁디좁은 서울 현충원을 비비고 누었는가. 정부도 난색을 표했던 그곳을 구태여 고집하며 그곳에서 잠을 자겠다고 했는지, 김대중과 그 가족만이 알 일이다.
이것은 살아생전 그의 인생에 진실이 없었다는 것을 한마디로 나타내는 증거의 한 토막이다. 그리고 오늘의 김대중을 있게 한 호남인들에 대한 철저한 배신행위다. 호남이 없는 자리에 김대중이 있을 수 있는가. 자신의 영달을 위해 호남인을 철저하게 이용하곤 철저하게 버린 것이다. 이것이 바로 김대중의 실체다.
그리고 자신의 국가관이나 정치이념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건국대통령과
산업대통령의 한가운데에 눕겠다고 고집한 그 저의가 무엇인지, 국민은
냉철하게 짚어 봐야 한다. 거기엔 분명히 김대중다운 계산이 깔려 있을 것이다.
이것을 가려내야 한다. 나는 이것을 우리역사의 명령이라고 생각한다.
그에게 계산 없는 행위란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는 말이다. 산자에게 속은 것도 억울한데 죽은 자에게 까지 속아서야 어디 온전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조갑제 기자는 김대중에 대한 중요한 평가는 6·15 선언에 있다고 했다.
어쩌면 그는 노벨상을 사기 위해 일생을 투자해 온지도 모른다. 아무 조건 없이 묵묵히 선행(善行)을 행하며 남을 돕고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상(賞)의 참된 의미다. 상을 목적으로 거룩한 선행을 수단으로
삼아 국가를 배신하고 불법을 범하는 행위는 범죄행위고, 상에 대한 모독이다. 그렇게 살아 온 인생이 바로 김대중이다. 수단과 목적을 뒤바꾸어 놓는 것쯤, 문제될 것이 없다.
이 세상 최고의 영광이라는 노벨상이 없다고 치자. 그런데도 국가의 평화와
민족의 통일이라는 대전제(大前提)를 위해 그처럼 목숨 걸고 뛰었을까. 천만에, 그럴 위인이라면 네 번씩이나 대통령이 되겠다고 안달하며 인생에 때 묻히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오로지 노벨상을 위해 자신을 투자했고, 끝내는 나랏돈 까지 훔쳐다가 6.15라는 반역문서를 사들인 공로로 노벨상이라는 영광을 안은 자가 아닌가. 세상에 그 고귀한 노벨평화상을 그처럼 지저분하게 받은 자가 있다던가. 그래서 노벨상의 가치가 반으로 줄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는 절대 평화주의자가 아니다. 민주주의 신봉자도 아니고 애국자는
더더욱 아니다.
그는 일본에서 ‘한민통’이라는 친북단체를 결성하고 反대한민국 활동을 벌인
전과자다. 그런 반역자를 너그럽게 받아 준 조국을 두 번 배신한 것이다.
이제 그의 가슴에서 평화주의자라는 훈장, 애국자라는 훈장, 그리고
민주투사라는 훈장을 떼어버릴 때가 된 것이다.
이 운동은 전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의 몫이다.
그는 일생을 선동과 위선과 모사꾼으로 살았다. 그가 자리한 곳은 항상
어지러웠다. “서울 광장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분향소에는 쓰리기와 취객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 는 본국 신문 기사를 읽는 순간, 그것이 바로 김대중의 인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오른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다. 그는 세상을 너무 우습게보고 제왕처럼 살았다. ‘레이몽’의 좌파 식별 법에 “정직하면서 머리가 좋은 사람은 좌파가 될 수 없다”고 했다. 결국 김대중은 머리는 좋을지 모르나 정직하지는 못한 사람이다.
이상화 시인은 일제의 암흑기(暗黑期)를 살면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 가”라며 참을 수 없는 울분을 토해 냈다. 지금 한국사회는 지식인의 암흑기를
살고 있다. 그래서 “죽은 지식인의 사회에도 봄은 오는 가”라는 절규가 절로
나온다. 지식인이 죽었다는 것은 희망이 죽었다는 것이 아닌가. 조갑제 기자가 지적한 것처럼, 이명박 대통령에 이어 송호근 교수의 김대중에 대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는 한국지식인의 사회가 죽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기적의 역사’를 이끌어 온 전임 대통령의 업적을 기리고 예우하는 것이
대한민국 역사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라고 말한 이명박 대통령, 입에 침이나
바르고 하는 소린가. 누구처럼 거짓말 인생을 살기로 작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너무 역겨워서 하는 소리다.
부디 기적의 역사를 이끌어 왔다는 그 전임자의 길은 피해 갔으면 한다.
대한민국이 너무 안쓰럽지 않은가.
송호근 교수가 말하는, 산업화의 용광로에 처박힌 김대중식 민주이념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그에게 과연 진정한 민주이념이란 것이 있기나 한 것인가. 뱅뱅 꼬는 송 교수의 문장 스타일로 보아 혹 잘못 꼬아 쓴 글이 아닌가하고 몇
번을 되풀이 해 읽어 보았지만, ‘용공 혐의와 함께 현해탄에 수장될 운명에 처
해졌다’는 문맥으로 보아 잘못 쓴 글은 아니다.
정말 서울대 사회학 교수가 맞는가. 믿기지가 않는다.
일본에서의 김대중의 정치활동이 어떤 것이었는지 정말 모르는가. ‘한민통’
이라는 단체가 어떤 성향의 결사체인지 사회학 교수가 모른단 말인가. 그러면서 그의 민주이념을 말할 수 있는가. ‘한민통’이 김일성을 따르는 친북 단체라는
것은 귀가 따갑도록 들어 온 것인데, 사회학 교수가 모른다? 누가 믿을까.
스웨덴 한림원이 부랑아 북한을 길들인 공적을 높이 샀다고 했는데, 과연 그럴까. 그것은 스웨덴 한림원이 김대중에게 완전히 속은 것이다. 김대중이 한림원을 속여 돈 주고 샀다는 표현이 맞고, 김정일이 김대중을 길들였다는 표현이 맞다.
“우리에게 100달러에서 1만 달러에 이르는 험난한 도정(道程)의 온갖 투쟁과 저항을 대신 짊어진 순교자의 의미가 더 커 보였다.” 정말 듣기 거북한 소리다. 아첨도 이쯤이면 가히 ‘노벨 아첨상 감’ 아닌가. 순교자라는 성스러운 낱말은
그런데 쓰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순교자(殉敎者)의 사전적 의미는, 모든 억압과 박해를 물리치고, 자기가
신앙하는 종교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자라고 돼 있다. 그런데 김대중의 정치적 종교는 어떤 것인가. 나는 그가 민주주의를 그의 종교로 신봉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랬다면 절대 김일성, 김정일과 가까워 질 수가 없다.
그래서 위선으로 뭉쳐 있다는 것이다.
송 교수는 또 ‘그는 자신을 괴롭힌 세상과 화해했다’고도 썼다. 그에게 화해란 단어가 정말 어울리는 말인가. 언제 누구와 무엇을 화해했다는 말인가.
그가 가는 곳엔 언제나 갈등과 분열과 선동이 춤을 추지 않았는가. 우리사회에 조용한 날이 얼마나 있었던가. 거기엔 언제나 김대중의 그림자가 있다는 것이
한국사회의 상식처럼 되어 있는 것이 사실 아닌가. 정말 죽은 지식인의 사회엔 봄이 오지 않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김대중이 있었기에 우리가 환한 세상을 누린다’고 했다. 대한민국이 그처럼 풍요 속에 환한 세상을 사는 것이 김대중 때문이란다.
오늘의 이 찬란한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 어찌 그 때문인가. 대한민국의 영광은, 초석을 놓은 건국 대통령 이승만과 산업화의 길을 열고 세계로 나가라고
채찍질을 해 대며 땀 흘린 박정희와 상업전선의 일꾼들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잘 살아 보자고 앞으로 뛰는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던 자가 바로
야당을 하던 김대중과 김영삼이었다는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대학 교수마저 국민을 속이려 해서야 되는가. 세상이 흐려지는 채임의 큰 부분이 그
사회의 지식인에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이제 폭풍의 진원지는 잦아들고 조용한 새 날이 오고 있다.
그래도 연민의 정이 한 구석에 남아 있으니 가는 자의 명복은 다 같이 빌어 주자. 그것이 산 자의 도리니까. 저 세상에서는 부디 마음먹고 진실하게 살라고
기도하는 것도 잊지 말자. 이 세상에서처럼, 마구 살다가 쫓겨나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부디 영혼이 새롭게 태어나기를 진심으로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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