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익는 마을 어귀부터 보름달처럼 환해진 아빠 얼굴
관광공사 추천 전통주 명산지 추석 나들이 유상호기자 shy@hk.co.kr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입력시간 : 2013.09.11 22:06:48
수정시간 : 2013.09.12 01:06:48
소줏고리를 이용해 전통 방식대로 술을 증류하는 모습
어쩌면 일제 시대 가장 모질도록 파괴된 우리 문화가 술일 것이다. 외국에서 찾아온 손님 앞에 내 놓기에 그래서 늘 민망해지곤 하는 것도 술. 하지만 되살리려는 노력도 끈덕졌는지 이제 적잖은 전통주가 복원돼 생산 중이다. 온 가족이 모이는 한가위. 막히는 귀성ㆍ귀경길에 짤막한 나들이, 또는 식구끼리 오붓한 당일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가까운 우리 술 생산지를 찾아가보자. 코와 눈, 그리고 입으로 탐하는 여행이다. 한국관광공사가 추석에 가볼 만한 곳으로 술 향기 그윽한 곳 다섯을 골랐다.
'술 익걸랑 나를 청하시오', 중원 청명주
조선 실학자 이익의 <성호사설>을 보면 그는 중원 청명주를 즐겨 마셨다. 술 앞에 붙는 '중원'은 충북 충주 땅에 있던 옛 고을의 지명. 현재 충주시 가금면 창동에 대를 이어 청명주를 빚는 양조장이 있다. 일제 시대 잠시 끊겼던 맥을 이 지역 토박이인 김영섭씨 집안이 20여년 전 복원해냈다.
창동은 본래 강원도와 경상도, 충청도에서 걷은 세곡을 한양으로 띄우던 조창이 있던 포구였다. 물산과 사람이 몰리는 곳에 목을 축일 술이 있는 것은 자명한 이치. '창동에서 마신 청명주가 문경새재에 가서 깬다'는 얘기가 그래서 전해진다.
청명주의 재료는 찹쌀과 밀, 누룩이 전부다. 통밀을 가루 내 물 대신 청명주로 반죽해 누룩을 띄운다. 누룩과 물, 찹쌀을 섞어 항아리에 담고 100일이 지나면 독특한 과일향이 나는 청명주가 완성된다. 만드는 시기에 따라 알코올 도수와 맛, 향이 다르다. 음력 3월께 청명에 마시는 술을 최고로 친다.
●중부내륙고속도로 충주IC 이용. 양조장과 멀지 않은 곳에 술 박물관 리쿼리움이 있다. 수안보 온천, 중원 탑평리 칠층 석탑을 함께 둘러보는 당일 여행 코스가 적당. 중원청명주 (043)842-5005 충주시 관광과 (043)850-6713
찹쌀과 단호박으로 낸 맛, 동몽ㆍ만강에 비친 달
강원 홍천군 내촌면에 전통주조 예술의 양온소가 있다. 양온소란 고려시대 술 빚는 기관의 이름. 멥쌀, 찹쌀, 보리, 수수, 기장, 조 등을 재료로 전통 누룩을 발효제 삼아 옹기에서 만드는 전통 방식을 고집한다.
광주 송학곡자에서 만든 누룩, 홍천 땅에서 난 찹쌀과 단호박으로 술을 빚는다. 발효가 끝난 뒤 용수를 박아 맑게 걸러 숙성한 게 동몽, 지하 암반수를 더해 10일 정도 추가 발효시킨 것이 만강에 비친 달이다. 각각 150일, 100일 정도 발효ㆍ숙성 시킨다. 향이 은은한 동몽은 와인 잔에 마셔야 제격이다. 탁주의 일종인 만강에 비친 달은 달고 부드럽다. 두 술 다 맛있는 술을 좋아하는 현대인의 입맛에 잘 맞는다.
술 빚기 체험장과 게스트하우스를 짓고 있어 머잖아 막걸리 비누 만들기와 목욕 등을 체험할 수 있을 예정.
●가까운 곳에 수타사와 공작산 생태숲이 있다. 부근 홍천생명건강과학관, 한우 마을까지 엮어 하루 나들이가 가능. 전통주조 예술 (033)435-1120 홍천군 관광레저과 (033)430-2471
과학을 담은 건강 전통주, 영주 소백산 오정주
경북 영주시 고현동 귀내마을은 반남 박씨 집성촌이다. 500년 가까이 된 마을 내력만큼이나 오래된 선비의 술, 오정주가 이곳에 전해진다. 16세기 <수운잡방>, 17세기 <요록> 등의 고문헌에 그 효능이 기록돼 있다. <요록>의 한 대목. '오정주는 기가 허한 것을 채워주고, 백발이 검어지며, 수명이 늘고, 빠진 이도 새로 난다.'
웰빙을 추구하는 가족이라면 귀내마을로의 술 여행이 답이다. 맥이 거의 끊겼던 술을 양조장 소백산오정주를 운영하는 박찬정씨가 복원했다. 지금의 오정주는 과거의 청주와 꼭 같지는 않다. 박씨가 발효공학과 한의학을 접목해 24~35도의 소주로 개량했다. 하지만 본래 청주의 부드러운 식감과 잔에 진액 줄이 생길 정도의 점도는 여전하다.
직접 띄운 누룩 100%로 만든 청주를 증류해 소주를 내리기 때문에 숙취가 덜하다. 빨리 취하고 빨리 깨는 술이라는 평.
●소수서원, 부석사, 무섬마을 등과 묶어 근사한 하루 여행 코스를 짤 수 있다. 오가는 길에 사과 과수원이 많다. 부석사 가는 길에 영주 사과로 만든 애플파이를 맛볼 수 있는 애플빈커피가 있다. 소백산 오정주 (054)633-8166 영주시 관광산업과 (054)639-6601
400년 전통의 순곡 증류주, 남한산성 소주
삼국시대 이래 전략 요충지였던 남한산성엔 조선 선조 때부터 빚어 마셨다는 남한산성 소주가 전해진다. 역시 일제 시대 사라졌다가 현재 남한산성소주 대표인 강환구씨의 부친 강석필 옹이 제조법을 복원했다. 강 옹은 소주 빚는 기술로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남한산성 소주는 알코올 도수 40도의 순수 증류주다. 순수하게 곡물로 만들어 높은 도수에도 불구하고 뒤가 깔끔하다. 쌀, 누룩, 물 외에 재래식으로 고은 조청이 특별 재료로 들어간다. 그 덕에 맛과 향이 한결 더 깊고 더 오래 저장할 수 있게 됐다. 전통 소주고리 대신 현대화된 시설에서 생산하는데, 구경하는 재미는 덜해도 균일한 맛을 기대할 수 있다.
탁주도 함께 만든다. 참살이막걸리라는 브랜드인데 100% 지역에서 생산된 친환경 쌀로 만든다. 막걸리로 발효ㆍ숙성시킨 찐빵도 인기. 막걸리는 대형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지만 소주 맛을 보려면 직접 남한산성 행궁 앞 기념품 판매점을 찾아가야 한다.
●서울에서 명절을 보내는 사람들이 찾아가보기 적당한 양조장. 남한산성을 둘러보고 멀지 않은 경기도자박물관과 영은미술관도 함께 코스에 넣을 수 있다. 남한산성소주ㆍ참살이 L&F (031)764-2101 광주시 문화공보담당관실 (031)760-2725
조선 임금님들이 마시던 술, 해남 진양주
조선 왕들이 마시던 술이 멀리 전라도 해남 땅에서 생산되는 까닭은 이렇다. 200여년 전 궁궐에서 술을 빚던 궁녀 최씨가 궁을 나간 뒤 사간 벼슬을 지낸 김권의 후실로 들어갔다. 최씨는 술 빚는 법을 손녀에게 전했는데, 손녀가 해남의 장흥 임씨 집으로 시집가면서 임씨 집안에서 그 비법이 이어지게 됐다. 현재 해남진양주 최옥림 대표와 그의 딸이 빚고 있다.
다른 첨가물 없이 찹쌀과 누룩으로만 빚지만 꿀을 섞은 듯 달콤하고 부드럽다. 더 중요한 재료는 물. 오로지 해남 덕정마을 뒷산인 월출산 끝줄기의 흑석산에서 흘러내린 물만 쓴다. 제사나 집안 잔치에 쓰려 조금씩 가양주로 만들던 것을 몇 해 전 국비 지원을 받아 대량생산을 시작했다. 목으로 넘기는 느낌이 부드러워 '왕이 마시던 술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감탄이 나온다.
●대흥사가 지척이다. 케이블카를 타고 두륜산에 올라 남도의 산과 바다를 품에 안을 수 있다. 고산 윤선도 유적지, 땅끝마을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해남진양주 (061)532-5745 해남군 관광안내소 (061)532-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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