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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델 카스트로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

淸山에 2013. 8. 10. 17:49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

 


이 제목의 책으로도 나와 있던데,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 1926-)가 법정에서 했던 말입니다. 오늘 소개할 내용은 카스트로의 그 법정진술이랍니다.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의 혁명지도자에서 국가지도자에서 지금은 지도자의 형이 된 인물이죠. ^^;;
잠시 이 재판이 열리기 전의 상황을 들여다볼까요.

20세기 중반 쿠바에서는 바티스타 독재정권이 집권하고 있었습니다. 군인 출신의 풀헨시오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 y Zaldívar. 1901-1973)는 1940년 대선에 나와 한 차례 집권한 뒤 물러났으나, 1952년 쿠데타를 일으켜 다시 정권을 잡았습니다. 바티스타는 권력을 손에 넣자마자 언론과 의회를 통제하고 대학생들의 반대운동을 억압하면서 전횡을 휘둘렀습니다.

 


카스트로는 1945년 아바나(Havana) 대학 법학과에 다니다가 학생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된 뒤에는 철거민들의 생존권 투쟁을 돕는 등 적극적으로 사회운동에 참여했습니다.

바티스타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카스트로는 독재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게릴라전을 시작했고, 1953년 7월 26일 오리엔테(Oriente) 주 산티아고 데 쿠바(Santiago de Cuba)에 있는 정부군의 몬카다(Moncada) 병영을 습격했습니다. 그러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카스트로는 체포됐습니다.

 

 


몬카다 병영 습격 뒤 체포된 카스트로. 젊은 시절의 모습이 새롭네요. /위키피디아

 

 

 

그 해 9월 시작된 재판에서 카스트로는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라는 최후진술을 낭독했습니다. 이 진술은 폭정에 맞선 민중의 권리, 즉 혁명의 권리를 주창한 논거로 유명합니다. 오늘날의 쿠바 사회주의에 대한 평가는 잠시 미루고, '혁명의 권리'에 대한 한 젊은 혁명가의 외침이라는 측면에서 읽어보세요.

 

 


존경하는 재판관님, 폭정에 항거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아주 오랜 고대에서부터 지금까지 신조와 사상과 교의를 막론하여 모든 이들에게 인정받는 권리입니다.

머나먼 고대의 신정(神政) 왕조 시절부터도 그랬습니다. 중국에서는 군주가 횡포를 일삼을 경우 몰아내고 도덕적인 인물을 옹립하는 것이 사실상 나라의 운용원리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고대 인도의 철학자들은 전제 권력에 맞서 적극적으로 저항에 나서야 한다는 원칙을 지지했습니다. 그들은 혁명을 정당화했고, 자신들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적도 많았습니다. 인도의 한 영적 지도자는 "다수가 지지하는 생각이 왕 혼자의 생각보다 강하다. 여러 가닥으로 꼬인 밧줄은 사자를 묶을 수 있을 만큼 강하다"고 했습니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들과 로마 공화정은 반역의 권리를 인정했을 뿐 아니라, 독재자에게 죽음을 안기는 것을 옹호하기까지 했습니다. 중세에 들어와 보면, 솔즈버리의 존은 저서 <정치인의 책(Book of the Statesman)>에서 '군왕이 법에 따라 통치하지 않고 독재자로 전락할 경우 폭력적으로 전복시키는 것은 정당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존은 독재자들에게 감옥보다는 단검을 들이대야 한다고 제언했습니다.
(부연하자면... 솔즈버리의 존 John of Salisbury. 1115-1180 은 국가의 구성원을 사람 몸의 여러 기관에 비유한 '유기체론'을 내세웠던 중세 영국의 정치사상가입니다. 제가 본 영어본에는 카스트로가 <정치인의 책>이라 말한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문맥으로 보아 솔즈버리의 존이 1159년 펴낸 <폴리크라티쿠스(Policraticus)>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유기체론을 성서와 결합시켜 공동체의 구성과 운영에 관한 이론으로 체계화했다고 합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Saint Thomas Aquinas. 1225-1274)는 <신학대전(Summa Theologica)>에서 독재자를 처형하는 것에는 반대했지만 인민들이 독재자를 전복시켜야 한다는 주장에는 지지를 보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정부가 폭군으로 전락해 법을 어길 때에는 그 신민(臣民)들이 복종의 의무에서 자유롭게 풀려난다’고 했습니다. 루터의 제자인 필립 멜랑히톤(Philipp Melanchthon. 1497-1560)은 정부가 압제를 할 때에 저항할 권리를 옹호했습니다. 개혁가 중에서도 이름 높은 칼뱅은 정치 사상가이기도 했지요. 그는 ‘민중은 폭정에 맞서 무기를 들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펠리페2세 통치시절 활동했던 스페인인 예수회 수사 후안 데 마리아나는 이런 신념을 누구보다 잘 표현해준 사람입니다. 그는 저서 <왕과 왕정(王政)의 기구들(Rege et Regis Institutione·1598)>에서 ‘통치자가 권력을 남용한다면, 설혹 그가 선출된 자라 할지라도 전제적인 방식으로 통치하려 한다면, 시민 개인이 가능한 한 혼란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폭군 살해(tyrannicide)를 위해 도모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단언합니다.

 

프랑스의 저술가 프랑수아 호망(Francois Hotman. 1524-1590)은 정부와 시민들 사이에는 계약 관계가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만일 정부가 계약을 위반한다면 민중이 정부의 압제에 맞서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시기 널리 퍼졌던 <독재자에 맞선 방어(Vindiciae Contra Tyrannos)>라는 책자도 있습니다. 스테파누스 유니우스 브루투스(Stephanus Junius Brutus)라는 필명으로 발행된 이 책은 지배자가 민중을 억압할 때 그 정부에 맞서 저항하는 것은 합법적이라고 공개 선언하고 있으며, 법관들이 나서서 그 투쟁을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스코틀랜드의 개혁가 존 녹스(John Knox. 1514-1572)와 존 포넷(John Ponet. 1514-1556)도 같은 시각을 보여줍니다. 또한 이런 움직임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책을 쓴 조지 뷰캐넌(George Buchanan. 1506-1582)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정부가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내지 못한 채 권력을 쥐었을 경우, 또는 정부가 정의롭지 못하고 독단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려 할 경우, 그런 정부는 독재자가 되는 것이며 따라서 전복될 수 있고, 종국엔 지배자들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고.


17세기 초반 독일 법률가였던 존 알투스(카스트로는 진술에서 ‘17세기 초반 독일의 법률가’라고 설명했고 영어 원문에 John Althus라고 되어 있으나 어떤 인물인지는 잘 모르겠네요)는 정치학 논문에서 ‘국가의 최고 권위로서의 주권은 그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동의가 모여 생겨난다’고 했습니다. 또한 정부의 권위는 인민들에게 뿌리를 두고 있으며, 정부가 불공정하고 불법적이거나 독재적인 기능을 할 경우 인민들이 복종의 의무에서 벗어나 저항하고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정당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카스트로가 인용하는 사람들은 '혁명의 권리'를 얘기할 때 자주 거론되는 인물들입니다.

후안 데 마리아나(Juan de Mariana. 1536-1624)는 예수회 수사이자 역사학자로, 스페인 톨레도에서 태어났습니다. 17세에 예수회에 들어왔고 시칠리아와 프랑스 파리 등으로 옮겨 다니며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이론들을 공부했습니다. 1592년 20권 분량의 방대한 역사서인 <히스파니아의 역사(Historiae de rebus Hispaniae)>를 집필해 이베리아(Iberia) 반도의 역사를 집대성했지요. 전제군주정에 반대하며 폭정에 맞설 민중의 권리를 옹호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독재자에 맞선 방어>는 1579년 오늘날의 스위스 바젤(Basel)에서 발행된 소책자로, 프랑스의 신교도인 위그노(Huguenot)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읽혔습니다. 전제군주에 맞선 민중의 권리를 주창한 내용입니다. 위그노 운동가 위베르 랑게(Hubert Languet)와 필리페 드 모르네(Philippe de Mornay)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지 부캐넌은 스코틀랜드의 역사학자, 개혁운동가입니다. 잘못된 통치자에 맞선 민중들의 저항권을 옹호한 시와 산문을 여러 편 남겼습니다.

 

 


누군지 아시겠어요? 1958년, 젊은 시절의 라울 카스트로(왼쪽)와 체 게바라입니다.
쿠바 아바나의 체 게바라 박물관에 소장된 사진이라네요. /위키피디아

 

 

 


카스트로의 진술은 계속됩니다. 이제 '논거'를 거쳐 혁명의 사례들로 넘어갑니다.

 

 

더 말씀드릴 것은, 반란의 권리는 쿠바라는 국가 자체의 존립 근거이기도 하다는 것을 재판관님들도 알게 될 거라는 점입니다. 그런 권리가 있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오늘날 쿠바의 판사로서 법복을 입고 있을 수 있게 된 겁니다. 그 예복이 진정 정의를 위해 쓰이기를!

잘 알려진 일이지만, 잉글랜드에서는 17세기에 찰스1세와 제임스2세라는 두 왕이 전제를 휘두르다가 왕좌에서 쫓겨났습니다. 이런 사건들은 자유주의적인 정치철학의 탄생과 때를 같이 해 일어난 것들로, 새로운 사회계급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이 되었으며, 봉건제도의 고리를 끊기 위한 투쟁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신권(神權)적인 전제정치에 맞서 이 새로운 철학은 사회계약과 피통치자들의 동의를 정치의 원칙으로 삼고 있으며, 1688년 잉글랜드 혁명, 1775년 미국 혁명, 1789년 프랑스 혁명의 기반이 됐습니다. 이런 위대한 혁명적인 사건들은 신(新)세계에 있는 스페인 식민지들의 해방으로 이어졌으며, 마침내 쿠바에 이르러 그 사슬이 끊어지려 하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철학을 자양분 삼아 우리 나름의 정치적인 사상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과이마로 헌법(Guaimaro Constitution)에서부터 1940년 개정된 헌법에 이르는 우리의 헌법으로 구체화됐습니다. 1940년 헌법에는 우리 시대의 사회주의적인 흐름이 반영됐습니다. 자산(토지)의 사회적 기능, 적절한 수준의 삶을 영위할 인간으로서의 놓칠 수 없는 권리 같은 것들입니다. 비록 거대한 기득권 때문에 그런 권리를 완전히 실현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과이마로 헌법'은 1868년 쿠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만든 헌법입니다. 쿠바 섬 남동부 과이마로에서 소집된 ‘과이마로 의회(Guaimaro Assembly)에 의해 제정됐기 때문에 과이마로 헌법이라 불립니다.

쿠바의 1940년 개정헌법은 토지개혁과 공공교육, 최저임금 등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발상들이 대거 포함돼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1952년 바티스타의 군사쿠데타로 헌법의 효력이 정지되면서, 개혁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카스트로를 비롯한 쿠바 혁명 운동가들은 바티스타가 무력화시킨 이 1940년 헌법을 원상 복구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습니다.

 


카스트로는 밀턴, 로크, 루소 등의 근대 사상가들을 줄줄이 불러냅니다.

 

 

폭군에 맞서 봉기할 권리는 이 정도만 완전히 인증을 받은 셈이며, 그것은 정치적 자유라는 이름의 교의로 굳어졌습니다.

164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봅시다. 존 밀턴(John Milton. 1608-1674)은 정치적 권력이 인민에게 있으며 왕을 세우고 끌어내릴 수 있는 것은 인민이라고, 인민에게는 폭군을 몰아낼 의무가 있다고 썼습니다.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는 정부에 대한 글에서 인간의 자연적인 권리가 침해당할 경우 사람들은 정부를 교체하거나 폐지할 권리와 의무를 갖는다고 말했습니다. “부당한 힘에는 힘으로 맞서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이다.”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는 <사회계약론(Social Contract)>에서 웅장한 수사법으로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복종을 강요당한 사람들이 억압에 눌려 복종을 하고 있으면 (체제가) 그대로 굴러간다. 하지만 사람들이 멍에를 깨고 일어서는 순간, 빼앗겼던 스스로의 권리를 찾고 자유를 회복하는 순간 (체제는) 더 나아진다.”

“아무리 강한 사람도, 영원히 통치자로 군림할 만큼 강하지는 않다. 힘을 권리로, 복종을 의무로 바꾸지 않는다면. 힘은 물리적인 권력이다. 그걸 제거하지 않고서는 도덕성을 갖출 수 없다. 힘에 굴복하는 것은 의지가 아닌 (어쩔 수 없는) 필요에 의한 행위다. 아무리 잘 보아준대도, 신중한 행위 정도일 뿐이다. 그걸 어찌 (인민의) 의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자유를 포기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포기하는 것, 인권을 포기하는 것이며 스스로의 의무를 방기하는 것이다. 그 모두를 부정당하면 보상받을 길이 없다. 그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과 양립할 수 없으며, (인간의 행위에서) 자유를 제거하는 것은 그 행위에서 도덕성을 몽땅 제거해버리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한손으로는 절대 권력이라 쓰고 다른 한손으로는 무제한의 복종이라 쓰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모순적이고 무가치한 일인 것이다.”

 

 


이어 카스트로는 미국 독립선언(“우리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창조됐으며 창조주로부터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어떤 권리를 부여받았다고 믿는다. 생명과 자유의 권리, 행복을 추구할 권리 등이다. 그런 권리들을 보장하기 위해 사람들 사이에서 정부가 생겨났으며 정부의 권력은 피통치자들의 동의로부터 나온다. 이런 목적을 깨뜨린다면, 그것이 어떤 형태의 정부이든 사람들은 정부를 교체하거나 폐기하고 새 정부를 구성할 권리가 있다.”)과 프랑스 혁명의 인권선언(“정부가 인민의 권리를 침해할 때, 불복종은 인민의 가장 신성한 권리이자 가장 절박한 의무가 된다.”)을 인용합니다.

 

 

쿠바혁명 이듬해인 1960년 3월 5일, 아바나 시내를 행진하는 혁명의 주역들.
맨 왼쪽이 카스트로, 가운데가 체 게바라. 역시 체 게바라 박물관에 있는 사진입니다.

 /위키피디아

 

 

 

남아프리카공화국 아파르트헤이트의 실상과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투쟁노선을 집대성(?)해준 넬슨 만델라 할아버지의 리보니아 재판 진술처럼, 카스트로의 이 진술을 읽으면 혁명의 당위성이나 당시 상황과 함께 쿠바의 역사를 엿보게 됩니다.

 

 

제 생각이 정당하다는 것은 이제 충분히 보여드렸다고 믿습니다. 존경하는 검사님께서 제게 징역 26년형을 구형하면서 구형 사유들을 설명했는데, 저는 (제 행동이 정당했음을 보여주는) 더 많은 논거들을 설명했습니다.

... 바티스타는 배신행위와 무력을 이용해 공화국의 법을 유린했고 인민의 뜻에 반해 권력을 쥐었습니다. 그런 그가 권좌에 앉아있는 것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겠습니까? 피와 억압과 불명예로 점철된 정권을 어찌 합법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가장 퇴보적인 사람들에 퇴보적인 생각과 방법으로 공적 생활을 채우고 있는 정권을 어찌 혁명적인 정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헌법을 방어할 의무가 있는 법원이 그것을 배신하는 결정을 내릴 때 어찌 그것을 법적으로 유효하다 하겠습니까? 스스로의 피와 목숨을 바쳐가며 나라를 다시 세우고자 하는 사람들을, 법원이 무슨 권리로 감옥에 보낸다는 것입니까? 이 나라와 정의의 원칙을 지켜보는 눈들에, 이 모든 것들은 재앙으로 비칠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을 넘어서서, 더 강력하게 논쟁을 벌여야만 하는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쿠바인입니다. 쿠바인이 된다는 것에는 의무가 따릅니다. 그 의무를 따르지 않는 것은 범죄이며 배신입니다. 우리는 이 나라의 역사가 자랑스럽습니다.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습니다. 우리는 자유와 정의, 인권에 대해 들으며 자랐습니다. 우리의 영웅들과 순교자들을 흠모하라 배웠습니다. 세스페데스와 아그라몬테, 마세오, 고메스, 그리고 마르티는 우리 마음에 첫 번째로 새겨진 이름들입니다. 타이탄(마세오 장군을 지칭)은 “자유는 구걸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마셰티(machete. 중남미 원주민들이 나무를 벨 때나 전투를 할 때 무기로 사용하는 날이 넓은 낫)의 날로 싸워 얻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배웠습니다.
또한 사도(Apostle. 시인 마르티를 지칭)는 쿠바의 자유로운 시민들을 위해 쓴 <황금시대(La Edad de Oro·1889)>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배웠습니다. “옳지 못한 법을 옹호하고 자신의 조국을 함부로 여기거나 조국이 짓밟히는 걸 보고 있는 자는 명예로운 인간이 아니다. 어느 정도 이상의 빛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듯이, 세상에는 어느 정도 이상의 명예가 있어야만 한다. 명예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그들을 대신해서 명예를 추구하는 짐을 져야만 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자유는 명예 그 자체에기 때문에, 그걸 누군가가 훔쳐간다면 그에 맞서 엄청난 힘으로 반란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그렇게 저항하는 사람들이 수천 명이 되면 곧 모든 사람들이 되고, 인간의 존엄성 그 자체가 된다.”

우리는 또한 10월 10일(세스페데스가 1868년 쿠바 독립선언문을 발표한 날)과 2월 24일(1895년 2월 24일 산티아고 데 쿠바 Santiago de Cuba 부근의 바이레 Baire 에서 봉기가 일어나면서 쿠바 독립전쟁으로 이어졌으며, 종국에는 1898년 미국과 스페인 간의 전쟁으로 확대됐습니다)을 국경일로 기념하라 배웠습니다. 쿠바인들이 치욕적인 폭군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던 날들이기 때문입니다. 별 하나가 그려진 사랑하는 우리의 국기를 지키고 가슴에 간직하라고, 저녁마다 ‘사슬에 묶여 사는 것은 치욕과 불명예 속에 사는 것, 조국을 위해 죽는다면 영원히 살리라!’ 하는 우리의 국가(國歌)를 부르라고 배웠습니다.

 


쿠바의 영웅들에 대해서는 설명이 좀 필요할 듯 싶네요.

먼저 카를로스 마누엘 세스페데스(Carlos Manuel de Céspedes del Castillo. 1819-1874)는 쿠바의 플랜테이션 농장주였는데 노예를 모두 풀어주고 해방운동에 투신한 사람입니다. 1868년 쿠바의 독립을 선언하고 스페인 군에 맞서 전쟁을 벌였지요. 이것이 쿠바 독립전쟁의 서막 격인 ‘10년 전쟁(1868-1878년)’이었습니다. 이그나시오 아그라몬테(Ignacio Agramonte y Loynáz. 1841-1873) 역시 쿠바의 혁명운동가이자 독립영웅이고, ‘10년 전쟁’ 때 활약했습니다.

호세 안토니오 마세오(José Antonio de la Caridad Maceo y Grajales. 1845-1896)는 쿠바 독립군의 부사령관을 맡아 ‘10년 전쟁’ 때 활약한 군인입니다. 구릿빛 피부 때문에 쿠바인들 사이에서는 ‘청동의 타이탄(El Titan de Bronce)’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적군이던 스페인인들에게는 ‘커다란 사자(El Leon mayor)’라 불렸다고 합니다. 19세기 라틴아메리카 게릴라 중에서 가장 큰 활약을 펼친 인물로 꼽힙니다.

막시모 고메스(Máximo Gómez y Báez. 1836-1905)는 오늘날의 도미니카공화국에서 태어났는데 쿠바로 이주해 반 스페인 투쟁을 벌였습니다. ‘10년 전쟁’과 뒤이은 독립전쟁(1895-1898) 때 게릴라 부대를 이끄는 장군으로 활약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우리는 배웠고,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오늘 우리의 조국은 살인으로 넘쳐나고 요람에서 배운 가르침대로 실천하는 사람들은 감옥에 갇히는 것이 현실일지언정. 우리는 우리의 부모가 물려준 자유로운 나라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섬(쿠바)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지 않고서야, 우리는 누군가의 노예로 사는 것에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는 탄생 100주년(1953년)을 앞두고 죽어버린 것 같습니다. 사도의 기억은 영원히 사라져버린 것 같습니다. 저들은 사도를 그리도 모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살아 있습니다, 죽지 않았습니다. 그의 인민들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의 인민들은 가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의 인민들은 사도의 기억을 충실히 지켜가고 있습니다. 그의 가르침을 지키고 있는 것은 쿠바의 인민들입니다. 그의 무덤 앞에서, 피를 뿌리고 목숨을 던지며 그의 나라를 심장에 품고자 하는 위대하고 희생적인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쿠바여, 사도가 죽어가게 놓아둔 채, 그대는 어디로 가려는 겁니까?

 

 

호세 훌리안 마르티(José Julián Martí Pérez. 1853-1895)는 쿠바의 시인이자 독립영웅이죠. 시와 에세이를 쓰고 철학을 가르치고 출판을 하고 정치이론을 다듬으며 독립을 향한 쿠바인들의 열망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쿠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뒤에는 ‘쿠바 독립의 사도(師徒)’로 불리며 상징적인 존재가 됐습니다. 카스트로도 '사도'라 지칭하고 있네요.

 

 


2003년 마르티의 동상 앞에서 연설하는 카스트로. /위키피디아

 

 


이제 변론을 마치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법률전문가들처럼 선처를 구하지는 않을 겁니다. 동료들이 피노스 섬(Isla de Pinos. 쿠바 수도 아바나 남쪽에 있는 섬으로, '소나무 섬'이라는 뜻입니다. 지금은 '젊음의 섬(Isla de la Juventud)'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에서 굴욕적인 수감생활을 하고 있는 이때에 선처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동료들과 운명을 함께할 수 있도록 저를 그리로 보내주십시오. 범죄자, 도적이 대통령을 하고 있는 나라에서 정의로운 이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옥에 갇히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니까요.

...이 법정에는 아직도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들이 남아 있습니다. 70명이 살해당함으로써 일어난 사건, 즉 우리가 들어본 것 중 가장 큰 학살이었던 사건 말입니다. 학살에 연루됐던 사람들이 풀려나 무장을 한 채 다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 시민들은 계속 위협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일 법원의 비겁함 때문에, 혹은 법원의 우월감 때문에 죄지은 자들에게 법의 엄중한 심판이 내려지지 않는다면, 더불어 그래놓고도 모든 판사들이 사퇴하지 않는다면, 애석한 일이 될 겁니다. 더불어 사법 권력은 전례 없는 오명을 뒤집어 쓸 겁니다.

저처럼 온갖 협박과 비열한 광기에 시달리면서 신경이 날카로워진 사람에게 감옥은 더욱 견디기 힘든 곳이 되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료 70명의 목숨을 앗아간 야비한 독재자의 분노를 저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감옥 역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저에게 유죄판결을 내리십시오.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할 것입니다.

 

 


아바나의 호세 마르티 공원 앞에 걸린 몬카다 병영 습격사건 기념 현수막. /위키피디아

 

 

 

카스트로는 유죄판결을 받고 2년간 복역한 뒤 풀려났습니다. 석방된 뒤에는 멕시코로 가서 바티스타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군사작전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1956년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 1928-1967) 등과 함께 쿠바로 돌아와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1959년에는 마침내 아바나에 입성해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바티스타를 몰아내고 국무총리가 된 카스트로는 쿠바를 사회주의공화국으로 만들었으며, 1965년에는 공산당 제1서기가 됐습니다. 1976년에는 각료회의 의장 겸 국가평의회 의장이 됐습니다. 동시에 쿠바 군 최고사령관에도 취임했습니다.

 


참 오래 전의 기록인데... 지금 읽어보면 여러가지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카스트로는 저 유명한 재판에서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라면서 민중의 ‘저항할 권리’를 옹호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의 지배 하에서 쿠바는 1인 통치가 계속되는 독재국가로 전락했습니다. 의료·보건·복지 등 여러 분야에서 사회주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애썼지만 소련이 무너지고 외부로부터의 경제적 지원이 사라지면서 그마저 흔들렸고, 지금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낙후된 나라가 되어버렸습니다.

 

 

 


카스트로는 2006년 7월 장출혈로 수술을 받은 뒤 동생이자 국방장관이던 라울 카스트로(Raúl Modesto Castro Ruz. 1931-)에게 넘겨줬고, 2008년 국가평의회 의장직을 물려줌으로써 권력을 공식 이양했습니다. 이 때까지 카스트로가 집권한 기간은 무려 49년에 이르렀습니다. 카스트로는 2011년 4월 공산당 제1서기 직에서도 물러났지만, 여전히 공산당 기관지 <그란마(Granma)> 등에 기고하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지난 3월에는 교황 베네딕토16세가 아바나를 방문해서 카스트로와 만났다죠. 울트라 보수파인 베네딕토16세가 명목상으로는 쿠바 혁명정부 자체를 부정하면서도 카스트로와 만나긴 했네요. 카스트로는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RC)과 우파 정부 간의 평화협상에서도 물밑에서 중재역을 맡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장 속으로]

혁명 개시 60년, 쿠바를 가다
[중앙일보] 입력 2013.08.10 00:34 / 수정 2013.08.10 11:58
"진실의 가장 큰 적은 거짓이 아니라 신화다" …

혁명의 역설, 관광상품이 된 체 게바라와 반미

 
 

 

 

혁명 박물관의 대형 그림(혁명 성공에 환호하는 군중과 피델) 앞에 선 필자.

 

쿠바는 혁명의 나라다. 혁명은 키워드다. 반미(反美)와 사회주의는 쿠바의 정체성이다.

 올해가 쿠바 혁명 개시 60주년, 성공 54주년이다. 혁명 지휘자 피델 카스트로(Fidel Alejandro Castro Ruz)는 87세다. 5년 전 동생 라울(Raul) 카스트로에게 권좌를 넘겼다. 피델은 여전히 영향력을 갖고 있다.

 혁명은 신화를 생산했다. 신화는 체제 관리 수단으로 작동한다. 과거의 신화로 오늘의 진실을 관리한다. 신화는 진실의 적(敵)이 된다.

 쿠바 경제난의 돌파구는 관광 산업이다. 관광은 체제의 상징들을 위축시킨다. 자본주의 달러는 위력적이다. 반미·공산주의의 기세는 허약해진다.

 

 

1 코르다가 찍은 유명한 사진 ‘게릴라 영웅’. 2 혁명 직후인 1959년 4월 워싱턴을 방문한 피델 카스트로가 링컨 기념관을 찾았다. 3 쿠바혁명 게릴라전을 이끈 체 게바라(오른쪽)와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의 밀랍인형(아바나 혁명 박물관). 체의 검은 색 베레모와 크리스토발(Cristobal) 카빈 경기관총, 시엔푸에고스의 중절모와 M-1 카빈은 별도로 전시돼 있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 여정은 역설로 시작한다. 캐나다 토론토를 떠난 에어 캐나다 여객기의 비행시간은 3시간25분이다.

 

 

 쿠바 입국 비자는 필요 없다. 간략한 신상을 기록한 여행자 카드로 대신한다. 그 카드의 반쪽을 낸다. 나머지 반쪽은 출국 때 제출한다. 아바나 공항 관리직원은 여행자 카드에만 입국 도장을 찍는다. 여권에는 도장을 찍지 않는다.

 쿠바는 미국의 적성국가(여행금지)다. 쿠바 여행 기록은 미국 입국 때 말썽을 낳을 수 있다. 쿠바는 고민을 해결해준다. 여권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쿠바 여행은 비밀이 된다. 관광객들은 캐나다·멕시코 등에서 아바나로 간다.

 쿠바는 50여 년 미국에 맞섰다. 미국의 제재·봉쇄 정책(embargo)은 반세기를 넘겼다. 피델은 다윗의 신화를 연출했다. 골리앗 미국은 수모를 당했다. 지금 쿠바엔 관광 달러가 절실하다. 미국 관광객(1년 40만 명 정도, 추산)을 배려해야 한다. 다윗의 명성은 역설의 상황 속에 허약해졌다.

 호세 마르티(Jose Martı)공항 터미널은 KTX 서울역보다 작다. 거리의 가로등은 밝지 않다. 바다를 낀 방파제 도로를 지났다. 아바나의 랜드 마크 말레콘(Malecon)이다. 많은 사람이 방파제 주변에 있다. 관광안내원은 “에너지 부족은 만성적이다. 더위를 피해 집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 친절한 설명은 말레콘의 낭만적 이미지를 정지시킨다.

 

 

4 혁명광장 앞 양쪽 건물에 체 게바라(왼쪽)와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의 얼굴이 철선으로 형상화돼 있다. 5 혁명 박물관 ‘바보들 코너(Rincon de los Cretinos)’. 쿠바 독재자 바티스타와 미국의 공화당 출신 세 대통령(레이건, 아버지 부시, 부시). 6 지난달 26일 열린 몬카다 병영 습격 기념식.(혁명 개시 60주년)

 

 

 아침이 되면 풍광은 달라진다. 아바나는 과거에 색깔을 입힌다. 50년 넘은 미국산 중고차들의 색상은 원색이다. 옛 의사당 건물 의 외관은 워싱턴 DC 연방의사당을 흉내 냈다. 건물 주변에 매끈한 핑크색 올드 카가 서 있다. 미국 올즈모빌(Oldsmobile) 98 시리즈 컨버터블(58년형)이다.

 카메라를 들이댔다. 자동차 모델료 촬영비는 1CUC(외국인 전용 화폐, 1달러 정도). 올드 카는 미국의 꼭두각시 풀헨시오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 정권의 유산이다. 이제 관광외화벌이의 첨병이다. 쿠바 사람들은 외국에서 수입한 엔진으로 고물 차를 재생시킨다. 2011년까지 현대차 엔진 2000여 개가 팔렸다.

 

 

혁명 박물관 입구에 구형 탱크(소련제 SAU-100)가 서 있다. 설명문이 있다. “1961년 4월 피그만(灣) 침공 때 총사령관 피델 카스트로가 미국 함정 휴스턴 호를 향해 100mm 포를 쏘았다.”- 미국 CIA가 사주한 1500 쿠바 용병들의 피그만 진입작전은 실패했다. 쿠바는 미국 플로리다에서 90마일 떨어져 있다.

 전시실에는 ‘M 26 Julio’(7-26 운동)라고 쓴 휘장·완장들이 우선 진열돼 있다. 피델의 몬카다(Moncada) 병영(兵營) 습격 날짜(1953년 7월 26일)를 의미한다. 혁명 개시일로 기념한다. 아바나 법대 출신 변호사 피델은 체포된다. 법정 속 피델의 발언이 적혀 있다. “역사가 나를 사면시킬 것이다(La historia me absolvera)-.” 혁명의 무기는 말이다. 언어는 대중을 결집한다.

 전시품은 반란군의 저항 과정을 나열한다. 2년 뒤 석방된 피델은 멕시코로 간다.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가 합류한다. 아르헨티나 유복한 중산층 가정 출신,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 체의 등장은 혁명의 서사(敍事)적 드라마를 강화한다. 혁명 핵심은 피델(1926년생), 체 게바라(28년생), 카밀로 시엔푸에고스(Camilo Cienfuegos 32년생), 라울(31년생)로 짜였다. 전체 지휘부의 평균 연령은 28세였다.

 

7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주범, 소련제 중거리 핵미사일의 복제품이 모로 카바나 군사기지에 전시돼 있다. 8 아바나의 미국제 올드카. 올즈모빌 98 시리즈 컨버터블. 9 피에로 차림의 거리 공연단▷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56년12월 피델의 부대 82명은 쿠바 섬 남동쪽에 상륙했다. 그때 탔던 요트 그란마(Granma·할머니)가 조형물로 걸려 있다. 피델 부대는 바티스타 정부군의 공격을 받았다. 생존한 17명의 바르부도스(barbudos·털복숭이) 게릴라들은 시에라마에스트라 산맥으로 들어간다. 반란의 소품들이 시기·인물별로 펼쳐 있다. 체 게바라의 군화, 탄약대, 카메라, 담배 파이프가 눈길을 끈다.

 체 게바라와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의 밀랍인형은 인기 코너다. 두 지휘관은 게릴라전의 1등 공신이다. 밀림 속에서 총을 든 모습은 사실적이다. 단파 방송용 송신기가 놓여 있다. 선전·선동의 심리전 무기다. 피델의 군대는 농민의 지지를 얻는 데 주력했다. 게릴라와 농민은 물과 고기의 관계다. 피델 부대는 마오쩌둥(毛澤東)의 전설을 작은 형태로 재연했다.

 

 


여전사 빌마 에스핀. 미국 MIT 공대 출신 화학공학도. 게릴라 동지인 라울 카스트로

(왼쪽·국가평의회의장)와 결혼했다.미모의 여전사들이 사진으로 걸려 있다. 총을 메고 어깨에 탄창을 두른 셀리아 산체스(Celia Sanchez)와 빌마 에스핀(Vilma Espın).

에스핀은 미국 MIT 출신 화학 공학도.

 

혁명 성공 뒤 게릴라 동지 라울과 결혼했다. 셀리아는 피델의 여인으로 알려져 있다. 피델은 공식 결혼을 하지 않았다. 혁명과 사랑은 게릴라 전선의 이면이다. 체 게바라도 비슷하다.

 1층 출구 벽에 ‘바보들 코너’(Rincon de los Cretinos)가 있다. 바티스타와 미국의 공화당 출신 세 대통령(레이건, 아버지 부시, 부시)이다.

 이렇게 적혀 있다. “고맙다. 우리의 혁명을 성공시켜준 바보(바티스타), 강하게 해준 바보(레이건), 공고하게 해준 바보(아버지 부시). 사회주의를 돌이킬 수 없게 도와준 바보(부시).” 관광 가이드는 “반미의 오기를 표출한 것”이라고 했다. 치기(稚氣)의 카툰은 박물관의 간결하면서 비장한 컨셉트와 어울리지 않는다.

 쿠바의 키워드에는 미사일 위기가 있다. 1962년 10월 미국과 소련의 대치는 정점에 올랐다. 소련이 쿠바에 배치한 핵미사일 때문이다. 3차 대전의 재앙을 몰고 올 뻔한 사건-. 아바나의 모로 카바나 군사기지는 긴박했던 기억을 되살린다.

 그곳에 거대한 R-12 로켓(SS-4) 중거리 탄도 핵미사일이 전시돼 있다. 소련은 그 미사일을 철수했다. 위기는 사라졌다. 그때 소련은 R-12 복제품을 쿠바에 기증했다. 미사일 설명문은 그 시절의 긴장을 증언한다. “길이 22.1m, 직경 1.65m, 무게 2만7200 kg, 사정거리 700~2100 ㎞, 핵무기 적재량 1메가톤(히로시마 핵폭탄 77배 위력), 36개 미사일이 쿠바에 도착했다.”

 여러 대의 소련제 SA-75 지대공 미사일, 미그 21기도 보인다. 지난 7월 파나마 당국이 북한 선박(청천강호)에서 적발한 쿠바 무기와 같은 기종이다. 관광객들은 여유 있게 그 전시물에 다가선다. 쿠바의 반미 전설은 위력을 잃었다. 경제적 고통 때문이다.

 쿠바 커피 수입상 조셉 매코엔(캐나다 출신, 55세)은 “쿠바인의 소련에 대한 기억은 미사일 위기보다 경제 위기 때다. 90년대 초 소련 붕괴로 쿠바 경제는 망가졌다. 지원(1년 50억 달러 수준)이 끊겼다. 그 ‘평화시대의 특별시기’에 식량과 의약품·석유 부족, 전기 차단을 진하게 경험했다”고 했다.

체게바라는 아바나를 장식한다. 알베르토 코르다 가 포착한 체의 얼굴은 끊임없이 복제, 복사, 재구성, 재창조된다. 혁명의 아이콘으로, 관광 상품으로, 아바나의 이미지로 거리에 널려 있다.

 혁명광장 크기는 축구장 세 배쯤이다. 내무부 5층 건물 벽에 철선으로 체 게바라의 얼굴 형상을 만들었다.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Hasta la Victoria Siempre)’라는 글귀가 달려 있다. 피델에게 보낸 체의 작별 편지 글귀다.

 반대편 건물 벽은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의 얼굴이다. 글귀는 ‘잘하고 있어 피델(Vamos bien Fidel)-’. 그는 게릴라 지휘부에서 최연소였다. 잘생긴 외모는 체 게바라 못지않다. 의문의 비행기 추락사고로 숨졌다(59년 10월).

 광장을 나와 아바나 비헤나(옛 아바나) 쪽으로 갔다. 아르마스 광장에는 길거리 책방들이 있다. 체 게바라 책들로 차 있다.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와 체게바라의 만남 사진도 판다. 사진에 “시대의 가장 완벽한 인간(era’s most perfect man)’이라고 적혀 있다. 사르트르의 체 게바라 평가다.

 사르트르는 60년 2월 쿠바에서 체를 만났다. 그는 탁월한 실존철학자다. 하지만 사유가 아닌 사실의 세계에선 거센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소련은 비판의 자유가 완벽하게 보장됐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의 공포통치 때 발언이었다. 그것은 좌파 지성의 치명적인 오류로 기록됐다. 그런 논란에 상관없이 사르트르의 말은 강렬하다. 체의 카리스마적 매력은 강화된다. 체의 숭배자들에게 그의 언행은 묵시록(<9ED9>示錄)이 된다.

 쿠바 관광가이드 루이스 페르난데스(전직 교사)는 “체는 모든 세대에서 존경받는다. 그리고 체 게바라 없는 관광 상품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지만 젊은 세대의 느낌은 다르다. 그들에게 체의 삶은 이미지다. 젊은 세대는 메이저 리그 선수, IT, 외국 연예스타에 열광한다”고 했다. 혁명 후 출생자는 인구(1100만 명)의 70%를 넘었다.

 체는 순회대사, 중앙은행장, 산업부 장관을 맡았다. 체제 정화(淨化)작업도 책임졌다. 반혁명·부패 세력의 제거다. 혁명은 숙청과 처형을 동반한다. 체는 냉혹하고 무자비한 면모도 가졌다. 그는 게릴라 시절에 첩자를 즉결 총살하는 임무를 맡았다. 체의 불편한 진실이다. 65년 체는 쿠바를 떠난다. 아프리카 콩고, 남미 볼리비아로 갔다. 그는 볼리비아에서 체포돼 처형당한다(67년, 39세).


아 바나 거리에 피델의 동상은 없다. 그것은 사회주의 형제국 쿠바와 북한의 차이로 꼽힌다. 평양은 김일성 부자 동상이 넘쳐난다. 페르난데스는 “지도자를 우상화하지 않는다는 게 피델의 신념”이라고 한다.

 체 게바라가 쿠바를 떠난 것은 노선 불일치 때문이다. 체는 급진 마르크스주의자였다. 피델은 상대적으로 온건파였다. 체는 소련의 제국주의적 면모를 비난했다. 소련은 피델에게 압력을 넣었다. 공산주의 노선투쟁은 권력 투쟁과 숙청으로 마감한다. 피델은 그렇게 정리하지 않았다. 그 결별을 혁명과 우정의 드라마로 각색했다. 피델의 통치술이다. 97년 7월 체 게바라의 유해가 쿠바로 돌아왔다. 피델은 산타 클라라에 체 게바라 동상을 세웠다.

 쿠바는 인권 탄압 논란 속에 있다. 쿠바 정부는 강·온으로 대처한다. 체제 불만의 배출구를 만든다. “조국이 싫은 사람은 떠나라”며 여러 번 항구를 열었다. 쿠바 망명·탈출자는 50여 년간 1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LA 다저스의 쿠바 출신 외야수 야시엘 푸이그(Puig·22세)는 최소 여섯 번 시도 끝에 탈출했다. 그리고 인생 대박을 터뜨렸다. KOTRA의 서정혁 아바나 무역관장은 “가족 방문 등 정치적 목적 없는 탈출을 해서 붙잡혀도 처벌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탈북자에게 연좌제를 적용하는 북한과 다르다.

 그것은 체제 관리 수단이다. 경제에 도움을 준다. 미국에 사는 쿠바인들의 본국 송금액은 1년에 50억 달러(현금+물품)로 추산된다. 미국은 송금 규제를 풀었다.

교육(문맹퇴치), 의료, 주택 보급은 피델의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당뇨병·항암제 등 몇 가지 생명공학 부문은 세계적인 기술력을 과시한다. 의료는 수출 자원이다. 쿠바는 베네수엘라 석유를 헐값에 산다. 그 대가로 의사 1만 명을 베네수엘라에 파견했다.

 아바나 보건소의 현실은 답답하다. 약품, 고급 의료 기기(器機) 부족에 시달린다. 의료 선진의 국가 자신감은 상처를 입는다. 쿠바 사람의 한 달 평균 임금은 20~25달러 수준이다. 의사도 비슷하다. 쿠바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5000~6000달러 수준(추정치). 여기에는 식량·의료·학비를 무상으로 받는 것이 포함된다. CUC(외국인 통용화폐)를 쉽게 만지는 관광업종은 인기 있는 가난 탈출구다.

 국가평의회 의장 라울 카스트로 체제는 쿠바를 바꾸려 한다. 올해 초 54년 묶은 해외여행의 규제를 풀었다. 자영업은 계속 확대된다. 지난해 자동차 매매도 허용했다. 하지만 부패와 비효율, 관료주의 폐해는 크게 고쳐지지 않는다. 미국은 경제 엠바고를 풀지 않고 있다. 쿠바의 경제 침체는 계속된다.

가판대에서 산 책을 펼쳤다. 혁명성공 뒤 피델의 첫 연설문이 담겨 있다. 그는 진실의 힘을 언급했다. “진실을 애기하는 것이 혁명가의 첫 번째 의무다. 혁명군의 승리는 진실을 말했기 때문이다. 독재정권이 왜 패배했나. 병사들을 속였기 때문이다.”

 나는 케네디 대통령의 말이 생각났다. ‘진실의 적(敵)은 신화’-. 그의 예일 대학 졸업식(1962년 6월) 연설문 속에 있다. 그 부분은 미국 국내정치와 관련된 언급이다. 하지만 그 구절은 오늘의 쿠바에 적용될 만하다.

 “진실의 가장 큰 적은 (의도적이고, 인위적이며, 부정직한) 거짓이 아니라 (끈질기고, 그럴듯하고, 비현실적인) 신화다(For the great enemy of the truth is very often not the lie-deliberate, contrived and dishonest― but the myth-persistent, persuasive, and unrealistic).”

 쿠바는 신화와 진실이 얽혀 있다. 과거와 현재가 섞여 있다. 피델의 혁명은 세상을 뒤집었다. 반 세기 뒤, 세상은 다시 달라졌다. 혁명은 오래되고 지쳐 있다.

아바나(쿠바)=글·사진 박보균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