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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영 대하소설 ‘객주’ 완결편 <11>

淸山에 2013. 7. 26. 14:44

 

 

 

 

 

김주영 대하소설 ‘객주’ 완결편 <11>
글 김주영 그림 최석운
  
 


 
 

그 외에도 울진 포구 여기저기에는 60여 호를 헤아리는 크고 작은 염전이 있고 소금 도가 포주인들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으나, 그는 그런 동사 간에도 내왕 없이 지냈기 때문에 해포이웃이라곤 없었다. 천성이 도무지 분잡스러운 것을 싫어해서 울타리 밖의 사정을 모르고 살면서 엉덩이에 두께살이 앉도록 출입이 없었다.

 

괴팍한 처신 때문에 같은 염호나 소금 도가 포주인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했다고도 볼 수 있겠는데, 송석호는 그런 처지를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 것이 아니면 남의 밭에 개똥도 줍지 않는 꼬장꼬장한 성품에 내 것이라면 고뿔도 남에게 주지 않을 만큼 인색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차인이나 염간(鹽干) 들에게 새경이나 용채를 후하게 쥐여주어 그들로부터 원성을 사는 일은 저지르지 않았다. 처신이 그처럼 데데하지 않은 것에도 알고 보면 까닭이 있었다. 염전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 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된 토호나 벼슬아치들이 질청의 아전이나 관노들을 사주하여 염전을 싼값으로 사들이려 끊임없이 협박과 농간을 자행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농간에 송석호는 염부들과 힘을 합쳐 염전을 지키려 했다.

 

그런 저항에 부딪히면 아전들은 문서에도 없는 염세를 강징하여 그를 괴롭혔다.

삼척, 울진을 비롯하여 통천, 고성, 간성, 양양, 강릉, 영해, 평해와 같은 고을은 예부터 땅이 매우 척박하고 자갈이 많아 농사가 어려웠다.

 

그래서 이들 고을에서는 고기를 잡고, 미역 따거나 소금 굽는 일을 생업으로 삼았다. 그래서 땅은 비록 메말랐어도 부유한 자가 많다고 하지만, 서쪽으로 고개가 너무 높아서 이역과도 같아 한때 유람하기는 좋겠으나 오래 살 곳은 못 되었다.

 

소금 전매하는 일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오랜 세월 그대로 고치지 못하네

우리나라 법이 크게 엄하여, 해마다 내는 세금 일 년 농사보다 많다네

나도 관동으로 나온 뒤에 해안을 다니며 몸소 독려했다네

백성들 누추한 거처는 오두막집, 쑥 엮어 만든 문에 자리조차 걸 수 없어

 
늙은이가 자식 손자 데리고, 한 치의 시간도 쉴 수가 없네

혹한에도 바닷물 길어 오기에, 짐 무거워 어깻등이 휠 대로 휘고

열기와 연기 그을음, 끓이는 훈기에 눈썹마저 타버렸네

 

문 앞의 열 수레나 되는 나무도, 하룻저녁 땔감이 되지 못하네

하루종일 백 말의 물을 끓여도 소금 한 섬 채울 수 없네

 

만약 기한 내에 대지 못하면 혹독한 관리는 꾸짖고 성내어

운송하는 관리는 소금을 산처럼 쌓아놓고, 전매하여 비단으로 바꾸지

임금은 공신을 중하게 여겨 상을 주는 데 아끼지 않네

 

한 사람 몸에 입은 옷가지, 만백성 괴로움 깊이 쌓이네

슬프다 저 소금 굽는 사람들이여, 옷은 해어져 등조차 가릴 수 없고

이 괴로움 견디지 못하여 급히 도망하여 자취를 감추네

 

고려시대 안축이 소금 굽는 일을 보고 충격받아 이렇게 묘사할만치 염한들이 겪는 고초를, 그는 몸소 눈으로 보고 있었다.

 

평생 염막만을 지키고 앉은 터에 이제 막 육십 줄에 들어섰건만, 구루병 걸린 당나귀처럼 허우대가 찌그러진 행색은 애꾸눈이 보아도 열 살은 더 먹어 보였다. 남들이 그의 인색함을 허물하면 언제나 그는 부자로 살았던 어떤 역관의 얘기를 사례로 들었다.

 

그 역관은 일찍이 부자 소리를 들었으나 의복은 매우 검소하였다. 찢어진 모자에 칼은 나무로 만들어 썼다. 그러한 연고를 물었더니 역관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내가 가진 물건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이면, 힘있는 관리와 선비들이 너도나도 모두 가지고 싶어 침을 삼키게 될 것이다. 그때 선뜻 건네주지 않으면 환심을 잃게 될 것이고 골고루 나누어주자면, 숫자가 모자랄 것이다.

 

이어서 송석호는 내가 외관이 의젓하고 치장이 화려하게 되면, 그로 말미암아 필경 화를 부르게 될 것이므로 이렇게 살 수밖에 없다고 그럴듯하게 둘러댔다.

 

2013-04-15 2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