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관심 세상史

위유런, 서태후 행차 때 1시간 무릎 꿇다 ‘혁명’ 다짐

淸山에 2013. 4. 14. 14:34
 

 

 

 

 

위유런, 서태후 행차 때 1시간 무릎 꿇다 ‘혁명’ 다짐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17>김명호 | 제318호

 

 

 1962년 11월, 위유런(오른쪽 둘째)이 타이베이의 국부기념관에서 열린 생전의 마지막 서예전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 김명호]  
 


2003년 3월 18일 오전 10시30분, 신임 국무원 총리 원자바오(溫家寶)의 내외신 기자회견이 인민대회당에서 열렸다. 타이완의 TV 여기자가 첫 번째 질문자로 나섰다. “지난 몇 년간 대만 쪽에서는 직항로 개설 등 적극적인 제안을 많이 했다. 지금보다 더 호전되기를 기대한다. 그동안 경제, 우편, 직항 등 삼통(通商, 通郵, 通航)에 관한 귀하의 생각을 들을 기회가 없어서 유감이다. 이 자리를 빌려 총리의 대만 인식이 어느 정도인지도 알고 싶다.”

 

원자바오는 “대만 동포들에게 안부를 전한다. 그간 견지해 온 평화통일과 일국양제(一國兩制)의 방침에는 변화가 있을 수 없다. 경제와 문화 교류를 적극 추진하면 삼통을 조기에 실현시킬 수 있다”며 운을 뗐다.

 

대만에 대한 이해는 시 한 편으로 대신했다. “대만 생각을 할 때마다 그리움을 주체하기 힘들다. 국민당 원로 위유런(于右任·우우임)이 임종 전에 쓴 애가(哀歌) 한 편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어서 지그시 눈을 감고 ‘望大陸(國傷)’을 나지막이 읊조렸다.

 

“나 죽으면, 높은 산 제일 꼭대기에 묻어라, 대륙 산하를 볼 수 있는 곳; 대륙이 보이지 않으니, 할 수 있는 것 오직 통곡뿐! 나 죽으면 높은 산 제일 꼭대기에 묻어라, 두고 온 내 고향 볼 수 있도록; 보이지 않지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곳! 하늘은 아득히 창창하고, 들판은 끝없이 망망한데, 산 위에 올라보니, 온 나라가 상중이다.(葬我于高山之上兮, 望我大陸, 大陆不可见兮, 只有痛哭; 葬我于高山之上兮, 望我故鄕, 故鄕不可見兮, 永遠不忘, 天苍苍野茫茫, 山之上国有殇)”

 

소란했던 회견장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대륙과 대만 할 것 없이 위유런을 모르는 중국인은 없었다. 국부 쑨원을 제외하고 대륙과 대만에서 모두 추앙 받는 사람은 위유런이 유일했다.

 

위유런의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외국기자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멀쑥한 표정을 지었다. 한 서방기자는 평소 사납기로 소문난 중국 여기자에게 뭐 하던 사람이냐고 물었다가 “아무리 설명해도 너희들은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라며 망신만 당했다.

중국인명사전 위유런 편을 보면 “민주혁명가. 정국군 사령관. 국민당 원로. 왕희지(王羲之)·안진경(顔眞卿)·조맹부(趙孟頫)와 함께 중국 4대 서예가의 한 사람. 대시인. 대교육가. 대언론인. 중국 기자들의 비조(鼻祖), 34년간 감찰원장을 역임한, 중국 역사상 가장 청렴했던 고위 공직자”라는 표현이 빠지는 법이 없다.

 

1879년 산시(陝西)성 안위안(安原)에서 태어난 위유런은 두 살 때 엄마를 잃었다. 큰엄마 집에 얹혀살며 6세 때부터 들판에 나갔다. 낮에는 양(羊)치기를 하고 밤에는 등불 밑에서 경서를 읽었다. 타고난 총명함은 숨길 재간이 없었다. 향시(鄕試)에 연달아 합격했다.

 

1900년 여름, 8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했다. 평민 복장으로 황제와 함께 자금성을 빠져나온 서태후는 심복이 순무(巡撫)로 있는 산시성 경내에 들어서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행이 시안(西安)에 도착하던 날, 산시 순무는 학당의 수재(秀才)와 거인(擧人)들을 거리에 동원했다.

 

서태후가 지나갈 때까지 1시간 동안 맨바닥에 무릎을 꿇고 돌아온 위유런은 “내 손으로 태후의 목을 치겠다”며 혁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대도(大刀)에 상의 벗어젖힌 채 “내 피를 태평성세와 바꾸겠다. 자유를 사랑하기를 조강지처 대하듯 하겠다”는 대련(對聯)을 배경으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당시 사진사들 중에는 관방의 첩자들이 많았다.

 

‘혁명을 도모하는 대역부도죄’로 체포령이 내린 위유런은 한밤중에 시안을 빠져나왔다. 상하이에 도착한 위유런은 진단학원(震旦學院)에 입학했다. 학원 설립자 마샹보(馬相伯·마상백)는 예수회 신부들을 두들겨 패는 바람에 교단에서 쫓겨났지만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학생들이 반(反)기독교 운동을 벌이며 자퇴하자 “이런 놈들 가르칠 필요도 없다”며 학교 문을 닫아버렸다.

위유런의 생각은 달랐다 “이런 애들일수록 가르쳐야 한다”며 학교를 다시 세우자고 마샹보를 설득했다. 1905년 중추절, 復旦公學(復旦大學의 전신)의 출범은 26세 청년 위유런이 아니었더라면 불가능했다.

 

위유런의 교육열은 復旦公學 설립에 그치지 않았다. 당시 일본에는 중국 학생들이 많았다. 일본 문부성은 청나라 정부의 요청으로 단속을 엄하게 했다. 반발하는 유학생들의 대규모 귀국사태가 벌어졌다. 위유런은 이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중국공학(中國共學)설립위원회를 조직하고 모금에 나섰다. 두 대학은 반청(反淸) 혁명가와 후스(胡適·호적) 같은 학자들을 수없이 배출했다.

 

3살배기가 청 제국의 마지막 황제로 즉위한 1909년 7월, 위유런은 “민중의 명령을 청하며, 엉뚱한 짓을 삼는 것들에게 불호령을 내리겠다”며 ‘民呼日報’를 창간했다.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두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숨통을 끊어버렸다. 청나라 정부는 일본과의 우호에 금이 간다며 보도를 통제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