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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 유랑민족 쿠르드는 누구인가

淸山에 2012. 6. 28. 08:20

 

 

 

 

 

세계 최대 유랑민족 쿠르드는 누구인가

 

 

다음 글은 쿠르드 신문에 실린 기고 내용 중에서 그들의 역사에 해당되는 부분만 번역한 것입니다.
쿠르드인의 시각에서 본 내용인데 잘 정리가 되었네요.

 

퍼온 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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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역사

쿠르드인들은 성경에 10회 정도 언급되는 메데족(Medes)의 후손이다.
기원전 700-750년경 메데족은 자신들의 강력한 제국인 메데 제국(Medean Empire)을 건설한다.
그들은 “부족 연합(Federation of Tribes)”을 만들어서 새로운 형태의 제국을 건설한다. 수세기 이후, 부족연합 메데 제국은 서방 세계의 국가 모델이 되고 “합중국(Federation of States)”으로 발전한다.
메데인들은 최초로 교류를 위해 동전을 주조하였고, 철강 산업에 있어 다른 국가들보다 발달되어 있었다. 메데인들은 이 기술을 이용하여 무기를 제작하여 군대를 강력하게 만들었고, 그릇, 단지 등과 같은 생활용품도 만들었다.

기원전 550년 메데제국은 메데-페르시아가 된다.
메데 제국 마지막 황제의 손자인 고레스(Kourosh, Cyrus(영어), 페르시아인으로 어머니가 메데 황제의 딸임. 여기서 말하는 고레스왕은 고레스 대왕으로 불리는 대 페르시아 제국을 세운 고레스 2세를 말함)가 제국을 계승하는데, 이러한 변화는 메데 전체 문화, 언어, 군사체계, 정치 형태에서 나타나 페르시아와 메데의 혼합형태를 나타낸다. 수세기 동안 메데인들은 이 메데-페르시아 제국에서 권력을 가진다.
그러나, 제국은 점진적으로 “페르시아 제국”으로 변화하고, 메데인들의 역사와 분화는 페르시아화 한다.


이슬람이 이 지역에 오기 전까지는 비록 점점 약해지고는 있었지만 어느 정도 메데의 주체성을 유지했다. (물론 메데의 주체성이 사라진 것은 이슬람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문제였다. 아마도 저자가 이슬람 신자인듯. 이슬람을 욕하기는 싫은 문장)
이슬람이 이 지역에 들어와 644년 이란의 사산왕조(Sassanid Dynasty)를 멸망시키자 이 지역의 모든 문명에 영향을 받았다. 이슬람은 미스라교(Mithraism) 이후 수 세기 동안 쿠르드인들의 주요 종교인 조로아스터교를 핍박했다. 이 시기 이후 메데인이라는 말이 점차 사라지고 쿠르드인이라는 말이 이 지역 사람들을 지칭하기 시작했다.


터기와 이란 제국에 의한 쿠르드인의 분할

1514-1639년에 걸친 오토만 제국(터키)와 사파비 제국(Safavi Empire, 페르시아) 간의 샬데란 전쟁(Chalderan War)의 결과 처음으로 쿠르드인들은 두개의 제국으로 나뉘었다.
비록 이 분할이 쿠르드인들의 일상생활에는 영향을 주지 않았으나 메데인 이라는 말이 두 제국의 정치적 견해에 의해 없어지게 되었는데, 페리사의 경우 쿠르드 즉 메데 제국의 역사와 문화를 페르시아 제국의 일부로 간주하려고 하였고, 터키의 경우 메데 제국의 존재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메데인들을 분열시키고자 했다.


영국와 프랑스의 배신

1918년 1차 세계대전 이후 Sykes-Picot 조약에 따라 영국과 프랑스는 식민화를 위해 쿠르드를 이란, 터키 및 새로 만들어지는 아랍 국가인 시리아와 이라크로 나누어 버렸다.
이 분할은 모든 쿠르드인들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쿠르드인들은 4개의 다른 여권/국적을 가지도록 강요되었고, 서로 다른 3개의 문화권으로 나뉘어졌으며, 그들 자신의 문화는 터부시 되었다. 이는 쿠르드인들을 노예화하는 새로운 형태의 변화였다.

이란, 이라크, 시리아, 터키 4개국은 쿠르드의 국가 정체성을 부인하고 각 나라의 국적을 부여하였다. 새로 짜여진 중동의 지정학적 지도에서 쿠르드인들은 국적뿐만아니라 문화정책, 정치적 숙청에 직면하였다. 1924년 터키가 점령한 쿠르드에서 Şêx se’îdî Pîran이 이끄는 해방운동이 있었다.1929-1931년에는 Îĥsan NȗrÎ Paşa 장군이 쿠르드의 독립을 위해 싸웠고, 1937년 Betlîs에서 Seyîd Reza가 쿠르드의 독립을 위해 터키와 맞섰다. 이들 모든 해방운동은 터키의 잔혹한 진압으로 결말지어졌다.
1946년 Pêşewa Qazî Mohammad에 의해 이란에 점령된 쿠르드에서 쿠르드 공화국(Republic of Kurdistan)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1년도 되지 않아 공화국은 이란의 침공으로 정복되었다. 이라크에 점령된 쿠르드 지역에서는 1930년대 Sêx Mehmudî Berzingî가 쿠르드 왕국의 설립을 위해 영국의 지지를 받는 이라크와 싸웠는데, 이 운동은 영국 공군에 의해 무차별 진압되었다.


미국의 배신

아마도 쿠르드 자유를 위한 시도중에 가장 가슴 아픈 것이 아이룰 혁명(Aylool Revolution)인데, 1961년 9월에 Mustafa Barzanî 장군에 의해 시작되어 1975년까지 이어졌다.
1975년 헨리 키신져의 국제적 중재 음모가 알지어(Algiers)에서 있었는데 쿠르드 역사는 이를 “알지어 협약(Algiers Agreement)”이라고 한다. 실제로 이 협약은 “알지어의 배신(the Algiers Betrayal)”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다. 몇년 전인 1972년 미국 정부는 쿠르드 지도자들에게 미국은 이라크에서 자치권을 얻도록 지원하기로 약속했었다. 그러나 3년 후 알지어에서 미국은 명예를 저버리고 쿠르드를 배신했다. 협약에서 배반의 귀재 헨리 키신저는 두 악마같은 이란과 이라크를 협상 테이블로 불러들여 쿠르드 독립을 위한 어떠한 지원도 하지 않기로 협정을 맺는다.

바르자니 장군은 키신져에게 미국의 지원을 구하는 탄원을 보낸다. 그는 “우리의 운동과 인민들은 모든 이들의 침묵 속에서 믿을 수 없는 방법으로 몰살하고 있다. 우리는 미국이 자국의 정책을 지원한 우리들에 대한 도덕과 정치적인 책임을 질 것이라 생각한다. 당신의 빠른 답변을 바란다.” 라고 편지를 섰다. 다시 바르자니의 탄원은 미국에 의해 묵살되었고 어떠한 답변도 오지 않았다. 게다가 키시져는 수천명 난민에 대한 인도주의적 요청도 거절한다.

미국의 배신은 쿠르드인들에게 비인간적인 파국을 가져온다. 바르자니 장군 휘하의 쿠르드의 지도자들은 미국을 당시 중동 속에서 쿠르드인들의 민주적인 원리를 세우기 위한 도움으로 생각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신져가 미의회 청문회에 섰을 때 쿠르드에 대한 미국의 급작스런 정책변화에 대해 질문을 받고, 냉담하게 “우리는 전도와 사업을 구분하지 못하는 일을 해서는 되지 않는다”라고 대답을 했다. 계속해서 뉴욕 타임즈 특집판에서 미국 지도자들이 더 이상 이라크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비판을 했다.

이 표리부동하고 양심없는 미국 공무원의 행위는 1975년 뉴욕주 민주당 국회의원인 오티스 파이크(Otis Pike)가 주도한 정보부에 대한 미국 의회 특별 위원회의 조사가 아니었으면 역사에 묻힐뻔 했다. 그의 조사에서 파이크 의원은 테헤란이나 워싱톤 모두 쿠르드가 주도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결론지었다. 그는 쿠르드가 미국이 이라크의 국제적 모험주의 가능성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사용한 단순한 카드에 불과했다고도 결론지었다. 파이크의 위원회는 보고하기를 “쿠르드인들은 미국에 의해 단순히 이라크를 분열시키기 위하여 홀로 싸우도록 만들어졌다”라고 했다. 미국이 쿠르드를 버린 이후 바르자니는 언론에서 “우리는 이란의 왕은 밎지 않았으나 미국은 믿었었다”라고 말했다. 바르자니 장군은 미국인 “쿠르드 같은 작은 민족을 배신하기에는 너무 큰 힘을 가졌다”라고 언급했다.


쿠르드에 대한 이라크의 파괴적인 정책들

비록 1976년 쿠르드인들은 이라크에 대해 다시 저항을 시작했지만, 아이룰 혁명당시와 같이 큰 성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이라크 정부가 쿠르드에 대해 펼친 정책들 특히나 1980년대 사담 후세인 정권하에서 실시된 소위 “안팔(Anfal)” 작전은 쿠르드의 근간을 없애고 여자, 어린이, 노인들을 포함한 쿠르드인들에 대한 인종청소를 목적으로 수행되었다.
안팔 작전을 통해 18만 2천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실종되었고, 약 4,500개의 마을들이 파괴되었다. 할랍자(Halabja)에 대한 화학무기를 이용한 학살은 쿠르드인들에 대한 이라크의 악날한 행위의 정점과 같은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무고한 사람들에 대해 자행된 모든 흉악한 만행들은 UN, 미국 및 EU의 감시하에서 일어났다. 어떠한 강대국도 쿠르드에서 일어난 이 만행들을 알아채지 못했다. 이는 아마도 1980년대에 서방의 권력들은 이란의 왕정이 폐지된 이후 설립된 이란 공화국의 적대적인 정책을 막기 위해 사담 후세인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쿠르드인들은 다시 한 번 근시안적이고 비인간적인 서방 정책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미국의 다시 한 번의 배신

1991년 미국이 이라크가 점령한 쿠웨이트를 되찾기 위해 연합군을 조직할 때,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조지 부시는 이라크 사람들에게 저항할 것을 역설하면서 “피흘림을 멈추는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라크 군부와 이라크 인들이 자신의 손으로 독재자 사담 후세인을 하야 시키고, UN의 중재안을 받아들여 평화를 사랑하는 국제일원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정작 북쪽에서 쿠르드인들이 남쪽에서 시아파들이 이 독재자에 대항해서 항거를 하자 정작 조지 부시는 이들에게 등을 돌려서 이라크 군부가 이들을 몰살하도록 놔뒀다.
남쪽에서 시아파의 봉기를 무력진압하고 나서, 이라크는 북으로 군대를 보낸다 이 결과 2백만녕의 쿠르드인들은 산으로 피신을 할 수 밖에 없게된다. 이들은 비록 사담의 죽음에서는 비껴갔지만 매일 수백명이 산악의 추위로 죽음을 맞이하고, 국제사회의 관심을 받게된다. 이것도 확실히 쿠르드에 대한 미국의 다른 배신행위였다.


미국-EU-쿠르드 협력의 새로운 시작

배고픔, 질병, 죽음에 대한 노출 등으로 인해 대규모 난민이 발생하는 인도주의적 위기가 오고 국제적인 관심을 받고 나서야 부시 행정부는 프랑스 영국 등과 함께 쿠르드 내에 안전지대를 만들었다; 이 안전지대를 만들자 이라크군이 점령하고 있던 키르쿡을 포함한 약 51%의 쿠르드를 버리고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비록 전통적으로 쿠르드의 땅이었던 곳들이 안전지대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이것이 쿠르드인들에게는 최초로 자신들만의 대통령, 총리, 의회, 사법부를 설립하는 기회가 된다. 2003년까지 바그다드와 관계가 없는 이 쿠르드 행정부는 곧 사실상의 정부가 된다.

2003년 봄 아들 조지 부시가 사담 후세인을 몰아내기로 결심하자 미국은 미군이 터키에서 이라크로 진격할 수 있도록 터키의 지원일 필요해졌다. 그러나 놀랍게도 터키 의회는 미국의 요구를 거절하는 결정을 한다.
부시의 첫번째 계획이 틀어지자 미국은 두번째 계획 즉 쿠르드 지도자들에게 협조를 구하는 계획을 수행에 옮긴다. 이 두번째 계획에서 미국은 훨씬 더 많은 것을 얻게 되는데, 쿠르드의 페쉬마가 군이 미국의 보병들이 되어 미군과 함께 사담 후세인 정권 축출을 수행한다.

 


 

 

 


[2009 국제분쟁지역 진단]

 ④'쿠르디스탄' 꿈꾸는 쿠르드족
수백년 ‘떠돌이 민족’… 멀고 먼 건국
관련이슈 : 2009 국제분쟁지역 진단

 

 

인구 2200만, 1000년이 넘는 역사, 그러나 몸 붙일 곳을 찾지 못해 수백년간 유라시아 일대를 헤맨 떠돌이. 쿠르드족의 운명이다.

쿠르드족의 역사는 ‘소외’로 점철돼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슬람교(수니파)를 믿으면서도 쓰는 말이 달라 여느 중동 국가처럼 아랍계로 분류되지 않고, 이제껏 역사에 이렇다 할 발자취를 남기지 못한 피지배 민족이다.

 

이들의 소원은 두말할 나위 없이 쿠르드의 나라 즉 ‘쿠르디스탄’을 세우는 것이다. 하지만 내세울 것 없는 유랑 민족에게 영토를 내어줄 나라는 없다. 그래서 쿠르디스탄을 향한 쿠르드족의 야망은 항상 피를 불렀다.

 

쿠르드와 가장 처절한 전투를 벌이는 상대는 터키다. 터키는 지난 6일 이란과 함께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 반군 은신처를 1시간 동안 폭격했다. 지난해 12월 초 교전에서는 50여명이 죽었고, 10월 초에도 40여명이 사망했다. 1984년 쿠르드 무장투쟁 조직인 쿠르드노동자당(PKK)이 결성된 이래 터키·쿠르드족 4만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쿠르드가 터키와 앙숙이 된 건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약 9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쿠르드를 지배한 오스만 제국이 전쟁에서 패하자 승자인 연합군은 오스만을 쪼개 쿠르디스탄을 건국하기로 했다.

 

그러나 터키의 무스타파 케말이 세력을 모아 공화국을 세우면서 쿠르드족 건국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현재 쿠르드인의 55%는 터키에 살고 있다. 터키 인구의 20%를 차지하는 터키의 쿠르드인들은 10여년 전까지 공공장소에서 쿠르드어를 쓸 수 없었고, 쿠르드족임을 밝혀서도 안 됐다.

 

PKK의 창설자 압둘라 오카란은 1999년 터키 당국에 붙잡혀 무기징역을 살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시리아는 쿠르드어 관련 서적을 출판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고 아르메니아, 이란 모두 쿠르드 독립운동을 철저히 탄압한다.

 

그나마 이라크는 나은 편이다. 1991년 걸프전에서 승리한 미국이 이라크 북부 쿠르드 밀집지역을 비행금지 지역으로 선포하면서 이 일대는 자연스럽게 이라크 정부의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자치구역이 됐다. 이라크 쿠르드족은 2003년 미국이 후세인 정권(수니파)을 완전히 무너뜨리자 시아파와 손잡고 초대 대통령까지 배출했다.

 

하지만 이라크 정정 불안이 잦아들고 미국의 영향력이 줄면서 쿠르드족은 또 한번 위기를 맞게 됐다.

실권자인 누리 알 말리키 총리를 필두로 시아파 세력이 정권 중심부에 안착하면서 차츰 쿠르드족을 밀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쿠르드가 유전지대인 키르쿠크를 장악하고 있다는 점도 시아파로선 달갑지 않다. 말리키 총리는 지난달 레제프 타이프 에르도안 터키 총리와 함께 PKK를 소탕하기로 합의했다.

 

최근 터키는 PKK 소탕을 이유로 걸핏하면 이라크 국경을 넘는다. 주권 침해 소지가 다분한데도 이라크 정부는 이를 짐짓 모른 체하고 있다. ‘손 안 대고 코풀기’ 식으로 쿠르드 세력을 잠재울 수 있기 때문이다.

 

윤지로 기자 kornyap@segye.com

 

 

 

 

 

 

 

탄압받는 쿠르드족엔 왜 무관심한가요
[한주의 시사 키워드] 쿠르드와 恨
김태완 맛있는공부 기자 kimchi@chosun.com 

 

 

터키군 전투기들이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 반군을 공격했다는 기사가 외신면에 부쩍 자주 올라오고 있어요. 사실 쿠르드족은 나라가 없습니다. 단 한 번도 독립국가를 이뤄본 적이 없는 민족입니다. 이들을 부를 때 '~족'이라는 접미사를 붙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기원전 1세기경 로마에 편입된 뒤 난민살이를 하던 유대인들이 1948년 이스라엘을 세웠을 때 쿠르드족의 마음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AP 연합뉴스

 

쿠르드족은 이미 기원전 7세기부터 지금까지 로마, 페르시아, 아랍, 터키, 몽골, 러시아 등 강대국에 의해 찢기고 밟히고 할퀴기를 계속해 왔어요. 이들의 기구한 민족사는 '한(恨)'에 단련된 우리 민족의 설움이나 유대인 박해와 닮아 있습니다. 하지만 종교, 문자, 문화 그리고 인종의 순수성을 그야말로 악착같이 지켜낸 자긍심 강한 민족입니다.

 

쿠르드족은 터키 영토 내에 1000만명, 이란·이라크에 800만 명, 그밖에 시리아 및 구소련 아르메니아 등의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어요. 중세 시대엔 아라비아인들의 지배를, 16세기엔 오스만투르크에 복속됐고 20세기에는 이라크가 오스만투르크로부터 분리됨에 따라 이라크령으로도 편입됐습니다. 삶의 터전이 주변 강대국에 찢겨져도 민족성을 잃지 않은 것이 오히려 주변 이슬람 국가의 박해를 초래했습니다.

 

조선일보 2002년 3월 27일자 '이규태 코너'에 실린 쿠르드족 이야기는 많은 생각을 갖게 합니다. 한번은 이규태 선생이 터키 동부 아르메니아 고원에 솟아 있는 아라라트산을 찾았어요. 아라라트산은 노아의 방주 파편이 발견된 세계적 관광지입니다. 선생이 그곳을 안내하는 쿠르드족 청년을 만났는데 그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해요.

 

"왜 우리 같은 피압박 민족에 무관심하면서 전설 속에 나오는 배 파편에만 관심을 갖는지 모르겠다."

터키는 한국전쟁 당시 1만5000명의 병사를 파병한 나라고 함께 알타이어를 쓰는 어족입니다.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 준결승전에서 터키에 지고도 왠지 기분이 좋았다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입니다. 터키를 형제국이라 생각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터키가 탄압하는 쿠르드족에 대한 관심은 부족한 듯싶습니다.

 

2006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터키 출신 소설가 오르한 파무크가 얼마전 내한했었지요. 그가 이런 말을 했어요. "터키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 아르메니아인 100만명과 최근 몇 년 사이 쿠르드인 3만명의 죽음에 대해 아무도 논의하려고 들지 않는다."

오르한의 그 말은 잊고 있었던 우리 민족의 한(恨)과 쿠르드족의 박해를 오버랩 시켰습니다.

 


입력 : 2008.06.18 16:14 / 수정 : 2008.06.18 1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