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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의 아름다운 도시 京都

淸山에 2012. 6. 27. 13:58

 

 

 

 

 

日本의 아름다운 도시 京都 
 
 
 百濟 도래인(渡來人)의 후예 坂上田村麻呂와 淸水寺의 유래

김필재    
 
 

 


 京都(일본명 ‘쿄토’)는 1200년 동안 日本의 首都였던 곳으로 ‘平和(평화)와 고요의 도시’라는 別稱(별칭)을 갖고 있다. 태평양 전쟁 중에도 폭격의 중심지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日本의 다른 지역보다 文化遺産이 잘 보존되어 있다.
 
 794년 백제계인 간무 천황이 나라(奈良)에서 이곳으로 수도를 옮겨 平安京(평안경, 헤이안쿄)이라 했으며, 1868년 明治維新(명치유신) 때 首都를 에도(지금의 東京)으로 이전하기까지 日本의 首都였다.
 
 鎌倉(가마쿠라)시대, 室町(무로마치)시대를 거쳐 꾸준히 성장하던 京都는 1467년 応仁의 乱(난)으로 상당 부분이 불타 없어졌다. 특히 室町(무로마치) 중기에는 足利義政(아시카가 요시마사)의 별장이 있던 京都의 히가시야마의 이름을 딴 東山(히가시야마)문화의 발전으로 茶道(다도), 庭園(정원) 등이 발달했다.
 
 1603년 德川家康(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 막부를 세우고 京都所司代(경도소사대)를 두어 京都를 다스렸다. 京都는 에도, 오사카와 함께 3도(三都)라 불렸다. 1869년 明治정부가 東京로 천도함에 따라 京都는 1200년 이상 이어오던 首都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문화 도시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 그러나 새 天皇의 정식 즉위식은 계속 京都에서 거행됐다.
 
 美國은 2차 대전 말에 원자 폭탄의 목표로 日本의 정신적 중심이었던 京都를 고려했다. 그러나 루즈벨트와 트루먼 정부의 국방 장관이었던 헨리 스팀슨(Henry L. Stimson)이 유서 깊은 도시를 파괴하는 것에 반대해 공격 목표를 長崎(나가사키)로 수정, 그 피해를 면했다.
 
 京都는 크게 교토 역을 중심으로 ▲京都 타워, 西本願寺(서본원사, 니시혼간지), 京都御所(경도어소, 교토고쇼, 과거 日本 天皇의 거주지), 등이 있는 중부 ▲清水寺(청수사, 기요미즈테라), 平安神宮(평안신궁, 헤이안진구, 銀閣寺(은각사, 긴카쿠지) 등 볼거리가 많은 동부 ▲金閣寺(금각사, 킨카쿠지), 大德寺(대덕사, 다이토쿠지 등)등이 있는 북부 ▲仁和寺(인화사, 닌나지), 龍安寺(용안사, 료안지) 등이 있는 서부 ▲東福寺(동복사, 도후쿠지)-伏見稻荷大社(후시미이나리다이샤)-平等院(평등원, 뵤도인) 등이 있는 남부 로 나뉜다.
 
 京都의 道路는 중국 당(唐)나라의 首都인 長安을 모방해 건설됐다. 東西로 9개의 큰 길이 있고, 南北으로 다른 道路가 교차하고 있다. 따라서 길을 잃을 염려는 거의 없으므로 명소들을 걸어서 충분히 돌아볼 수 있다.
 
 [사진설명] 京都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淸水寺(청수사, 일본명 ‘기요미즈테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는 780년에 창건됐다. 淸水라는 명칭은 사찰이 세워진 音羽山에서 흐르는 물을 셋으로 나누어 머리위에서 떨어지게 만들어 놓았다는 것에서 유래됐다.
 
 778년 奈良(나라)에서 온 승려 延鎮이 꿈에서 계시를 받아 영천(霊泉)을 찾아 도착한 곳이 바로 清水寺가 자리 잡고 있는 音羽山(음우산, 오토바네야마)이었다고 한다.
 
 당시 音羽山에는 수백 년에 걸쳐 수행을 계속해왔다는 行叡居士라는 이름의 수행자가 있었는데, 이 수행자가 延鎮에게 자신은 지금부터 동쪽 나라로 여행을 떠나니 뒤를 부탁한다는 말과 남기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 후 延鎮은 이곳에 관음상(観音像)을 새겨 안치했는데, 이것이 현재의 清水寺가 건설되게 된 계기라고 한다.
 
 이후 平安(평안)시대의 무관(武官)이었던 坂上田村麻呂(판상전촌마려, 사카노우에 타무라마로, 조상은 백제계로 알려져 있음, 맨 마지막 사진)가 이곳에 있던 자신의 집을 기증하면서 清水寺는 한층 세련된 모습으로 변화했으며, 많은 신자들이 방문하는 유명한 절로 번성하는 계기가 됐다.
 
 坂上田村麻呂는 일본 무장(武將)의 대명사로 불릴 만큼 용감한 장수로 백제계 간무왕(桓武天皇)의 총애를 받던 일본 최초의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세이이타이쇼군)이었다.
 
 그의 아내였던 三善高子(삼선고자, 미요시타카코)의 경우도 ‘清水寺縁起’(청수사연기)에 따르면 원래 錦部(금부, 니시키베)씨로 백제계 도래인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이들이 한반도에서 건너온 백제인들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
 
 清水寺는 源氏物語(원씨물어, 겐지모노가타리, 平安 중기의 소설)를 비롯해 많은 고전문학에 언급되고 있다. 여기에서 平安시대에 이미 많은 참배자가 있었던 것을 추측 할 수 있으며, 근세에 들어와서는 가부키(歌舞伎)의 무대로 자주 등장했다.
 
 清水寺는 京都에서는 드물게 法相宗의 사원으로 본당(本堂)을 비롯한 가람은 화재로 인해 소실된 적이 있으며, 현재의 본당(本堂)은1633년 덕천가광(徳川家光,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기부로 재건된 것이며 다른 건물도 대부분 이때에 재건된 것이다.
 
 경내(境內)는 표고 242m의 音羽山 중턱에 돌담을 쌓아 세운 건물들이 들어서 있으며, 입구의 인왕문(仁王門)을 지나 서문(西門), 삼중탑(三重塔)등을 거쳐 현재 일본의 국보(國寶)인 본당(本堂)에 이른다.
 
 본당(本堂)의 동쪽 계단을 내려가면 清水寺라는 이름의 유래인 물이 흘러내리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오토와노타키’(音羽の滝)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여기에서 더 남쪽으로 가면 錦雲渓라 부르는 계곡이 나고, 이 계곡을 넘어가면 子安塔로 불리는 작은 三重塔이 있다. 한편, 清水寺로 향하는 언덕길에는 京都의 기념품과 전통의상, 공예품을 파는 상점이나 찻집, 음식점 등이 줄지어 있다. (2010년 3월16일)
 
 김필재 spooner1@hanmail.net

 

 

 

 

 

 

 

고즈넉한 京都의 옛 거리 풍경  
 
 
 淸水寺 주변 五條坂, 淸水坂, 三年坂, 二年坂 모습 
김필재    
 

 일본의 古都(고도) 京都의 산자락에 위치한 淸水寺 주변에는 五條坂(일본명 고조자카), 淸水坂(기요미즈자카), 三年坂(산넨자카), 二年坂(니넨자카) 등의 이름이 붙은 언덕길이 있다.
 
 五條坂은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언덕길을 오르면 두 갈래 길이 나온다. 그중에서 왼쪽으로 淸水寺를 향해 뻗은 길이 五條坂이다. 이 길은 淸水坂과 만나 淸水寺까지 이어진다. 五條坂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淸水新道(기요미즈신미치)로 불리는 세련되고 화사한 도자기를 파는 가게가 나온다.
 
 淸水坂을 올라가다 왼쪽으로 계단을 내려가는 길은 三年坂이고, 이 길을 계속 가다 다시 오른쪽 계단을 내려가는 길이 二年坂이다. 이 언덕길을 따라 京都의 기념품이나 전통의상, 과자 등을 파는 상점이 늘어서 있다.
 
 힘들면 잠시 쉴 수 있는 찻집이나 음식점 등이 있어 여유 있게 다닐 수 있는 코스이다. 三年坂은 원래 産寧坂라고 불렸다고 한다.
 
 三年坂은 808년에 만들어졌으며, 二年坂은 807년에 완성됐다. 전부 17단으로 되어 있다. 이 길에서 넘어지면 각각 3년, 2년간 재수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인지 혹시 넘어져도 액땜을 해준다는 호리병박을 파는 가게가 옆에 있다.
 
 사진 맨 마지막에 보이는 사찰은 法観寺로 야사카노토(八坂の塔)라고 불리는 五重塔(오층탑)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이다. 三年坂에서 二年坂로 가는 길이나 二年坂에서 高台寺로 걸어가다 보면 눈에 띈다.
 
 法観寺는 아스카(飛鳥)시대에 창건한 사찰로 옛날에는 화려하고 웅장한 가람 배치로 번영한 사찰이었지만 지금은 1440년에 足利義教(아시카가 요시노리)가 재건한 五重塔(높이 46m)와 藥師堂, 太子堂만 남아 있다. 法観寺 주변에는 지금도 인력거가 돌아다닌다.(2010년3월16일)
 
 김필재/spooner1@hanmail.net